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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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동안 읽은 책들 중, 가장 인상적인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전자가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진화생물학과 인류고고학을 영민하게 뒤섞어 인류의 발전 과정을 거시적(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빅히스토리')으로 그려냈다면,  후자는 상상 · 협력 · 탐욕이라는 사피엔스의 본능적 특질이 어떻게 컴퓨터 공학 및 의학과 결합하여 인류를 불멸의 존재로 이끄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틀렸다.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저 생각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도 틀렸다. 인간은 존재(해야)하기 때문에 그저 욕망할 뿐이다. 애초 인간에게는 자의식 즉 내면의 목소리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내면의 목소리라고 굳게 믿어왔던 건 다름 아닌 두뇌의 알고리즘일 뿐이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유주의는 어떤 외적 실체가 이미 만들어 놓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유권자, 소비자, 관객은 저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이용해 자기 인생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지만 생명과학은, 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생화학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자유주의를 뿌리째 뒤흔든다. (...) 중세 십자군 전사들은 삶의 의미가 신과 천국에서 온다고 믿었고,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인생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둘 다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지금까지 자유의지와 개인의 존재를 의심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도, 중국,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2,000년도 더 전에 '개별적인 자아는 환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의심이 경제, 정치, 일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실제로 역사를 바꾸지는 못한다. 인간은 인지부조화의 대가라서, 실험실에서는 이것을 믿고, 법원이나 의회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믿을 수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낸 날 그리스도교가 사라지지 않았듯이, 과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유주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417~419쪽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싶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구글의 빅데이터나 인공지능(AI) 시스템에 개인 정보를 넘겨주면 된다.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미래는 내가 검색하고 클릭하고 '좋아요'를 눌렀던 수많은 나의 '흔적'들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되어 내가 어떤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고 어느 곳에서 생활하며 어떤 음식을 먹는게 더 좋을지를 통계 수치로 알려주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주장이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라도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절대 권력과 종교에 저항하기 위해 강조되었던 개인의 지위와 역할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인본주의와 개인주의를 불러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인식. 개체로서의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최고이자 절대진리라는식의 개인우선(우월)주의 사고가 현대 자본주의 물질소비문명과 결합하여 역으로 개인을 소외시키고 있다.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유신론자들이 '데오스(theos,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경배하는 반면,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경배한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같은 인본주의 종교들의 창립이념은 호모 사피엔스는 특별하고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의미와 권위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선 또는 악이 된다.

유신론이 신을 내세워 농업을 정당화했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을 내세워 공장식 축산 농장을 정당화했다. 축산 농장은 인간의 필요, 변덕, 소망을 신성시하는 반면 그밖에 모든 것을 무시했다. 동물들은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축산 농장은 동물에게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축산 농장에는 신도 필요 없다. 현대 과학과 기술이 고대의 신들을 훨씬 능가하는 힘을 인간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농장주들은 과학기술 덕분에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조건들보다 더 극단적인 환경에서 젖소, 돼지, 닭을 기를 수 있다. -142쪽


 

흔히, 다른 생물종과 구별되는 인간의 가장 큰 능력으로 '생각하는 힘'을 들곤 한다.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란,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보다 육감('느낌')이나 생각('상상')을 더 중시한다는 뜻이다. 사피엔스는  이처럼 생각하는 능력을 통해 다른 유인원종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집단 협력으로 지구를 지배하고 인류 문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이와 같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가상의 존재('허구')를 수없이 창조하고 또한 이를 경배해 왔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똑같은 허구적 규칙들을 모두가 믿지 않으면 축구 경기를 할 수 없고, 허구 없이는 시장과 법원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246~247쪽



그러고 보면, 인류 역사는 '신(信)'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인류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것을 위해 목숨도 불사했다. 신(神)을 위해 죽었고 왕(國)을 위해 전쟁을 했다. 오늘날에도 이 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좀더 교묘해졌고 더한층 악랄해졌을 뿐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살고 죽을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은 외부나 타자가 아니라 자기 내부 즉 바로 자기 자신(自身)으로 바뀔 따름이다. 과거 인간은 필멸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영혼(종교)을 통한 불멸의 삶을 추구했다면, 이제 인간은 과학기술의 도움을 빌어 영원한 육체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神) 즉 '데우스'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개별적 가치를 상실하는 과정 속에서 그 무엇(혹은 '누구')으로도 대체불가하고 인공지능(빅데이터)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켜 신인류로 살아남을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神)은 얼마나 될까?

<그리스 로마신화>만 봐도 그속에는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찬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그동안 수많은 신들이 존재해왔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신들이 탄생(?)하고 있으리라. 


맨  처음 창조주는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신의 모습을 닮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신들을 만들어냈다.

신의 복제품인 인간이 자신의 모습(복제품)을 본떠서 수많은 신들을 만들었으니 신들은 '복제품의 복제'인 셈이다. 이제 인류는 신들을 복제하는 것(시뮬라크르)에서 벗어나 신들을 그대로 흉내내는(미메시스) 단계로의 진입이 머잖아 보인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복제품(인간)과 진품(신)이 구별되지 않는, '시뮬라시옹(가상이 현실이고, 가짜가 진짜인 세상)'의 세계로 접어든 것이다.   


보통 인문서나 과학서 한 권을 정독하고 나면 겨울철 목욕탕에 갔다가 막 나왔을 때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서늘한 기운이 관통하면서 온몸이 맑아지고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알듯말듯했던 궁금증들과 조각난 지식들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맞춰지면서 완성되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 책은 읽고 나서 기분이 산뜻해지기는커녕 더한층 우울해졌다. 아무리 미래에 대한 예측은 '장미빛 환상' 아니면 '지옥의 묵시록' 양극단을 오고가는 시계추라고는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현재보다 더욱 발전된 미래임에도불구하고 그것에 환상을 품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동안 인류는 스스로 만든 창조물들 앞에서 창조주로서 그것을 사용하고 관리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의지하고 숭배함으로써 오히려 얽매이고 지배당하는 피조물로서의 역할에 더 익숙해왔기 때문이리라.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우리가 만들어냈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그것에 통제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 한 권의 책이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복음서인지 아니면 인류의 멸망을 예언한 계시록인지는 중요치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복음서라면 신을 향한 복음이 아닌 인간을 향한 복음이 되어야 할 것이요, 계시록이라면 인간에 '대한' 계시록이 아닌 인간을 '위한' 계시록이 되도록 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이 모든 열쇠는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쥐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복음서 혹은 계시록이 될지는 순전히 인류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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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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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가 장편 소설을 썼나?'

이런 사실조차 몰랐던 나는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는 별다른 기대감없이 집어 들었다. 이름있는 거장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들은 '습작'인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실망감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째서 탐험소설들 특히 해양탐험소설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 세부 묘사에 집착하는 걸까?'

이 작품의 도입부분 역시 지루하다.  배의 전체적인 모습은 그렇다치고 밧줄의 매듭 방법과 갑판에 생긴 작은 틈새까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면서도 오히려 등장인물의 심리에 대해서는 매정하다싶을 만큼 건조체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이런 장르가 주목받기 시작한 근대(18~19세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근대는 현실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로, 과학과 실증 및 경험적 태도를 중시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분위기가 문학작품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래서 에드거 앨런 포 역시 이 작품을 쓰면서 비록 꾸며낸 이야기(소설)일지라도 과장하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그려내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다.

 


 

암튼, 아서 고든 핌이라는 18살 청년이 우여곡절 끝에 친구의 도움으로 고래잡이 배에 몰래 승선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즉시 내 작은 아파트를 차지했는데, 새로운 궁전으로 들어서는 어떤 왕도 그때의 나보다 더 흡족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거스터스는 이어서 그 방의 열린 끝부분을 닫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그런 뒤 심지를 갑판 가까이 가져다가 거기 놓인 짙은 색 채찍끈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 끈이 내가 숨은 장소로부터 목재들 가운데 낸 꾸불꾸불한 통로를 지나 그의 방으로 통하는 통풍창 바로 아래 선창의 갑판에 박힌 못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만에 하나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내가 이 끈을 이용해서 그의 안내 없이도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장치해놓은 것이었다. 이제 그는 내게 충분한 양의 심지와 성냥 등과 더불어 랜턴을 건네주고,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자주 나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한 뒤에 떠났다. 이것이 6월17일의 일이었다. -2장 35쪽-



그러나 고든을 돌봐주기로 약속했던 친구 어거스터스는 배가 출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상반란으로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고 만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고든은 답답한 '은신처'에서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심지어 신선한 공기도 부족한 상황에서 열흘 가까이 버텨낸다.  



선상반란으로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배 위에서는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마치 화면 전체를 붉은 피로 물들이는게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하드코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버지는 손발이 묶인 채 승강용 계단 위에 고개를 아래도 향하게 눕혀져 있었으며 이마에 난 깊은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죽음이 멀지 않아 보였다. 일등항해사가 악령 같은 조소의 표정을 띈 채 그를 굽어보며 그의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서 커다란 지갑과 정밀시계를 꺼냈다. -4장 62쪽-


마침내 신참자로 배를 탔던 영국 남자가 불쌍하게 울면서 올라왔다. 그는 항해사를 향해 너무나도 비굴한 태도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다. 그가 들은 유일한 대답은 도끼로 이마를 가격당한 일이었다. 그 불쌍한 사람은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갑판 위로 쓰러졌고, 흑인 요리사는 그를 아기처럼 팔에 들고 잘 조준해서 바닷물에 던져버렸다. -4장 64쪽-


상갑판에 있던 모든 선원들이 곧 굴복할 뜻을 비쳤고 하나씩 둘씩 올라와서 처음의 여섯명과 함께 포박된 채 눕혀졌다. 선상반란에 관여하지 않은 선원은 다 해서 스물일곱이었다.

이어서 너무나 끔찍한 살상이 뒤따랐다. 포박된 선원들은 통로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는 요리사가 도끼를 들고 서 있다가 다른 반란자들이 희생자를 한명 한명 배의 옆면으로 밀치면 그들이 머리에 도끼를 박았다. 그런 식으로 스물두명이 죽었다. 그리고 어거스터스는 매 순간 다음이 자신의 차례라고 예상하며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4장 65쪽-



이것만으로도 입을 다물기 어렵건만 난파된 상태에서 네 명의 생존자들이 제비를 뽑아 희생자를 정하고 동료를 죽여 인육을 먹는가 하면,  영국국적의 고래잡이 배에 의해 간신히 구조되어 어느 섬에 정박하지만  그곳 원주민에 의해 단 두명만 제외하고 서른 여섯 명 선원 전원이 몰살 당하는 등등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포의 다른 대표작들의 괴기스러움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포는 안타깝게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자신의 주특기를 기꺼이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생전에 포 자신 역시 이 작품을 두고, '어리석은 작품'이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채 일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이 겪었다고 하기엔 너무 잔인하고 충격적이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이렇게 무덤덤하게 그려냈다는 것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도 공포고딕소설을 완성했으며 현대추리소설 장르를 새롭게 개척한 인물로 알려진 에드거 앨런 포가  말이다. 게다가 이야기가 한창 전개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후기' 를 삽입하여 독자가 수긍할 만한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작품을 끝내버린다.



핌 씨가 안타깝게도 근자에 갑자기 사망했다는 사실과 그 정황에 대해서는 이미 일간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그의 이야기를 완성시켰을 몇개의 남은 챕터들, 즉 위의 챕터들이 활자화되고 있는 동안 그가 지니고 수정하던 챕터들도 사고 도중 복원 불능의 상태로 망실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다를 수도 있으며 만일 궁극적으로 그 챕터들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독자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이 결손을 메꾸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시도해보았다. 서문에서 이름이 언급된 신사, 즉 거기서 이루어진 진술로 미루어 이 진공 상태를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그 신사는 그 일을 거절했다. (...)

마지막 두세 챕터의 상실은 (잃은 것은 다 해서 두세 챕터였다) 그것들이 남극에 관련된 사실을 담고 있거나 적어도 남극에 무척 가까운 지역에 관한 사실을 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또한 지금 정부에서 남태평양에 보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탐험대가 그 지역들에 관한 저자의 진술들의 진위를 곧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다. -후기 272~273쪽-


 

 

그래서 이 작품은 미완성 작품으로 평가되어 출간 당시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포의 엄청난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건, 만약 에드거 앨런 포의 이 작품이 없었다면 하멜의 <모비딕>도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도 탄생하지 못했을 거란 점이다. 세상의 모든 단편소설들이 고골리의 '외투' 속에서 나왔다고 말한다면,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다오."라는 문장도, 벵골산 호랑이 '리차드 파커'의  포효도, 이 한 작품으로부터 시작되었노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 작품은 에드거 앨런 포를 재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포는 마약중독에 빠져 어린 아내와 궁핍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불운한 천재로만 알고 있었는데, 새롭게 확인된 사실에 따르면 포가 당시 미국 문단을 지배하던 주류문단에 비판적인 글을 많이 썼기 때문에 악의적으로 매도되어왔다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또한, 과학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과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연결시켜 독특한 공포추리소설 장르를 구축한 점을 들어 포를 과거지향적인 전근대적 인물로 바라보았던 시각 역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역자가 작품해설에서 지적했듯 포는 자연과학을 추구하는 19세기 근대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또 이를 극복하자 했던 인물이며,『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야말로 포가 이와 같은 자신의 사상을 담아내려고 시도한 첫 작품으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대한 미스터리(?)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어째서 배경에 대해선 지루할 정도로 세심하게 묘사하면서도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에 대해선 신문기사문처럼 무미건조하게 처리했는지를, 또한 어째서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야기의 뒷마무리를 하지 않고 남극에 대한 여운만을 남긴 채 끝내버렸는지를 말이다.  어쩌면 포는 이 작품을 통해서 감성보다는 이성을 미신보다는 과학을 향한 인류의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이라고 해서 그의 추리소설들만을 상상하고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린 시절 <80일간의 세계 일주> 와 <15소년 표류기> 등등 모험소설에 열광했던 독자라면 아마도 이 작품에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여러모로 아쉽지만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또한 놀라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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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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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집을 읽기 전, 뒤에 실린 신형철의 평론을 먼저 읽었다.

작품보다 평론이나 해설을 먼저 읽으면 확실히  독자적(獨自的)인 작품 읽기에 방해가 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글을 눈앞에 두고서 읽지 않고 버텨낼 면역력(?)이 나에겐 아직 없는 것 같다. 

 

평론가이면서도 독자적(讀者的)인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항상 작품과의 거리감이 나의 의도보다 훨씬 더 크게 줄어든다. 또한 학구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일반 평론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의 문체는 마치 한 편의 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단순히 '잘 쓴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영혼마저 털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신형철의 글 앞에서만큼은 작품을 직접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특별한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곤 한다.   


 

이 작품집을 두고, 그가 이런 글을 남겼다.

 


 

이미 오래전에 빅터 프랭클 같은 이는 인간은 이성으로 사유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먼저 고통받는 인간이며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더 중요한  측면이라고 과감하게 말하면서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라는 명칭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나는「봄밤」과 「이모」 같은 소설을 읽으며 '호모 파티엔스'를 달리 번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고통은 '고통을 받다'라는 형태로만 사용되는데 이 경우 인간은 고통에 대해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만 이해된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해내기도 한다. 환자(patient)는 견디는(patient)사람이다. 그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인생의 비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통을 견디면서 인간의 숭고함을 입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전에는 없는 동사인 '고통하다'를 발명해내고, '호모 파티엔스'를 '고통-받는 인간'이 아니라 '고통-하는 인간'이라고 옮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형철「호모 파티엔스(patiens)에게 바치는 경의」중 -


그렇다면, 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가 생의 마지막 2년 동안만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다간 '이모'(「이모」)와 남동생 관주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는 옛 직장 동료(문정)을 끝까지 원망하지 않는 관희(「카메라」). 그리고  정신지체 누나를 둔 탓에 여자친구(예연)로부터 버림받은 전직 헬스트레이너이자 일식요리사인 인태(「층」)는 분명 '호모 파티엔스'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몹시 쇠약해져 한번에 몇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한 말들은 또 이전에 한 말들과도 조금 달랐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106쪽「이모」중-


그것은 어쩌면 10년 전에 지자체의 책임자가 그 길을 다시 포장하면서 돌길을 깔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1년 9개월 3일 전에 문정이 지나가는 말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136쪽「카메라」중-


 

한때 그녀를 보면서 그녀가 누나였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한때 그녀를 예연씨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날 그녀는 사촌에게 사정을 다 듣고도 그에게 내색을 안한 거다. 그가 바래다줄 때도 와이퍼와 우산 얘기만 했다. 결국 누나는 흘려졌다. 그날 인희는 그녀에게 흘러들어갔다. 사촌의 무식함도 같이 흘러들어갔다. 그는 그런 인간들을 많이 봤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다 뒤통수를 치는, 그녀가 그런 년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예연은, 예연은, 그는 어딘가에 칼을 찔러넣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개년이다. 예연은, 개년이다. 그가 알지 못하는 온갖 낯선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그녀의 머릿속이.....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말만은 하고 싶었던가.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초밥를 먹는 이 남자처럼.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230쪽「층」중-

 

 

그저 손바닥 위에 담뱃불을 눌러 끄고... 남동생이 어이없이 쓰러져 죽어간 돌길을 찾아나서며... 옛 여자친구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다녔던 길 건너 도서관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견뎌낼 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들의 성격이나 어떤 행동들이 잔인한 운명을 불러온 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하마르티아(hamartia) 때문에" (「시학」13장) 불행에 빠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마르티아'란 원래 '화살이 과녁을 비껴가는 일'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이 ① 단순한 판단 착오나 실수인지, ② 주인공의 도덕적 성격적 결함인지가 불분명하여 여전히 논란거리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마따나 '에토스가 곧 다이몬'이라면 (즉 성격이 곧 운명이라면) 세상의 모든 성격은 제안에 비극적인 것을 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신형철「호모 파티엔스(patiens)에게 바치는 경의」중-


 

예술가의 기질을 '자의식 과잉'으로 착각한 어느 신참 여류작가의 환각과 환청(「역광」)의 원인은 인물의 성격이 그들을 비극적 운명으로 인도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람의 성격은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후천적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점에서 비극의 원인을 전적으로 개인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개인의 성격보다는 환경이나 상황이 어떻게 개인을 되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 넣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지자체에서 도로를 새로 깔면서 기존의 아스팔트 대신 고궁이나 공원처럼 작은 돌들로 교체했다는 평범한 현실 속에는, 한 남자가 죽었고 그로 인해 한 여자가 실연을 당하는 아픔과 그 충격으로 앞니를 가는 습관이 생겨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정신지체 장애인 누나가 또다시 가출을 해서 임신을 했다는 어이 없는 소식에 자기도 모르게 '미친년'이라는 욕이 튀어나와버린 대수롭지 않은 상황 속에는,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에 빠진 박사 학위를 소지한 여자와 고졸 학력이 전부인 남자가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 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합당한 이유따위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일찌기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일갈했는지도 모르겠다. 운명이란 만들어지는 것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롯이 견뎌내는 것이고 참아내는 것이다. 견뎌내고 참아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딱, 여기까지였다면 그러니까 이렇게 운명을 견뎌내는 호모 파티엔스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쳤더라면, 그저 그런 눈물팔이식 통속 소설집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타협하지 않고, 기어이 눈물로 가득찬 독자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다.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던 천사같은 얼굴이 붉디붉은 피로 물들어 고통스럽게 이그러지도록 만든다.


 

바로, 이거다.

연민하지 말고 공감하라는 것.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도 마음 아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소시오패스를 빼고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배고픔에 우는 아이를 보면 저절로 눈물이 고이고, 실의에 빠진 사람을 보면 가만히 어깨를 다독거리며, 장애아나 그 가정을 보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러나 이런 눈물 한방울 돈 몇 푼 속에는, '내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는 속마음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반면,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서 실제로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차마 눈물을 흘리지도 호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지도 못한다. 그런 작은 호의나 선의로 사라질 슬픔이 아니라는 걸 줄어들 고통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들은 앓는다. 천갈래 만갈래 고통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행운을 재확인하는 목격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눈을 마주바라보면서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는 체험자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나저나,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작가는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라고 말하면서, 눈물 몇 방울 돈 몇 푼 떨구고는 서둘러 현장을 떠나버리는 목격자인지 아니면 고통의 현장에 남아 슬픔의 매순간을 고스란히 견뎌내면서 끙끙 앓는 체험자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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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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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읽지 않아도 그저 그 이름만으로도 독자를 '울컥'하게 만드는 작가가 있다. 나에게 작가 공선옥은 그런 존재다.


공선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로 다루는 작가로 그녀의 작품들은 언제나 '그때 그곳'에서부터 출발한다. 다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한 것이 있다면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치며 쏟아내던 통곡이 마른 침을 조용히 삼키며 먼곳을 응시하는 서늘한 침묵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리라.  


일본의 대표적 반전 작가 이바라기 노리코의 대표작에서 제목을 따온『내가 가장 예뻤을 때』역시 그녀답게(?) '후일담' 소설이다.

1980년 그해 봄, 스무살을 보내던 아홉 명의 이야기가 봄날처럼 때론 따사롭게 때론 변덕스럽게 펼쳐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인 이들은 계엄령이 내려진 거리에서 한명은 피를 흘리며 죽었고, 또다른 한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살아남은 일곱 명 중 누군가는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이 되는가 하면, 또다른 누군가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엄마가 된다. 


스무살답게 그들은,

꿈꾸고... 도전하며... 분노하고... 좌절한다...

그리고 또한, 사랑하고... 이별한다...   



 

어떡하든 돈을 좀 마련해서 서구보건소로 오라며 전화를 끊는데 속에서 뭔가 왈칵 치밀었다. 경애가 죽었을 때 태용이 어린애처럼 악을 쓰며 울던 것이 생각났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덴뿌라 하나씩 입에 물고 찐빵 같은 웃음만 지어도 행복한 어린애들이 아니었다. 그것이 서러웠다. 진만이, 승규, 만영이, 태용이, 승희, 정신이, 그리고 나 해금이. 우리 곁에 경애와 수경이가 있었다. 아홉 송이 수선화 중 두 송이가 졌다. 그리고 승희가 애를 낳았다. 승희 아이는 새로 핀 꽃송이인가. -42쪽


사는 게 외롭고 괴롭고도 서글퍼서 밥을 먹고도 단 초코파이를 먹는 판님이와 판님이 또래들이 과자와 음료수봉지를 안고 양지 쪽으로 몰려간다. 공장 안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그 얼굴들이 수척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해온다. 오후에는 좀더 분발해서 외로운 것은 어떻게 못 해줘도 일 때문에 괴롭히지는 말아야지. 각오를 새기며 찰기라곤 없는 밥과 붉은 기름이 둥둥 떠 있는 육개장 비슷한 국, 고춧가루와 소금으로만 무친 듯한 김치와 딱딱한 닭튀김 조각이 놓인 식판에 고개를 숙인다. 또 눈물이 비어져나오려고 한다. 코를 처박고 기름을  피해가며 국물을 떠먹는데, 누군가 내 등을 툭 친다.  -242쪽


겨우 참았던 눈물이 다시 퐁퐁 샘솟기 시작했다. 시인이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답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름답구나. 환이 때문에, 해금이 너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졌는지도 몰라. 봐, 네가 울기 전보다 지금 별이 훨씬 더 반짝이잖아." -211쪽


 

독자답게 나 또한, 

좋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눈을 감고 장면을 상상하며...웃고...울다가...

결국, 비어져나오려는 눈물에 잠시 잠깐 고개를 든다...



 

나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숭늉을 마셨다. 승희 엄마가 내 등을 토닥거려주며 깊은 속에서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악아, 우지 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게로 우지를 마라."

나는 승희 엄마의 품속에 안겼다. 승희 엄마 옷자락에서 아주 아주 오래 묵은, 엄마 냄새가 났다. 그건, 바로 흙냄새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내리면 마당의 마른 흙에서 뿜어져나오는 냄새, 가을에 고구마를 캘 때면 땅속에서 솟아나는 자우룩한 냄새. 그리고 저녁 냄새가 났다. 모든 저녁이면 나는 냄새들. 환한 낮에는 숨어 있다가 어둠이 스며들면 비로소 피어나기 시작하는 냄새들. 뜨물 냄새, 연기 냄새, 수챗물 냄새, 쉰 행주 냄새, 파 마늘 냄새.... 그리고 별냄새, 달냄새. 승희 엄마 품은 한없이 포근했다. 승희 엄마가 내 등을 토닥이며 노래 같기도 하고 한숨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소리를 흥얼거렸다. -65쪽 


 

난, 이 문장이 좋고 또 좋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래, 누구에게나 사는 건 죄가 아닌데... 왜, 눈물이 자꾸 나는 걸까.'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 역시 참 슬펐던 것 같다.

비록,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멀쩡한 주위 사람들이 순식간에 송장이 되어나가는 참극을 겪지는 않았지만 막연한 불안감에 종종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더랬다. 

또래 친구들보다 뒤처질까 늘 전전긍긍했고, 남들 눈에 비치는 내모습이 초라하진 않을까 자주 긴장했으며, 드넓게 펼쳐진 미래는 너무 막연해서 그저 막막했다.


지금도 눈 감으면 마치 어젯일처럼 손에 잡힐 듯 기억은 생생하건만, 왜 그렇게 서글펐는지 도무지 구체적인 이유도 까닭도 떠오르질 않는다. 마치 작중 화자 해금이에게 스물 살이 꿈처럼 피안(彼岸)으로 사라져 갔듯 나의 스물살도 그렇게 기억 너머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더랬다.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은 안타까운 거리만큼, 안타까운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이환과 보낸 세상물정 모르던 시간들은, '내 가슴에 은하수 흐르던 시절'들은 아스라이 멀어졌다. 그 시절은 내게도 오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환에게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절들이 그렇듯, 목련이 지듯, 모란이 지듯, 속절없이 지나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시절들이 밀려오게 되어 있다. 졸음이 밀려오는 틈새로, 은하수도 흐르지 않는 깜깜한 밤에 건조한 모래바람 부는 사막을 횡단하는 김진혁의 영상이 떠올랐고, 저 깊은 근원으로부터 일어서 표면에 이르러서야 파문을 일으키는 물결처럼, 저 깊은 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진저리를 느끼며 나는 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282쪽



 

그녀의 작품은 마치 '집밥'같다.

'어떤 맛일까?' 궁금증을 유발하지도 않고 침이 꼴깍 넘어갈만큼 식욕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투박하지만 깊은 맛이 있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표현할 순 없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집밥처럼 그녀의 작품들은 한결같다. '한결같다'는 건 작가로서 개별 작품들에 특징이 없다는 것이고, 그만큼 창조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들은 이상하게 물리지도 질리지도 않는다. 친숙한 인물들과 익숙한 사건 및 배경들이건만 왠일인지 그 느낌이 불편하거나 거북하기는커녕 오히려 엄마 손길이 깃든 집처럼 포근하다.  


역사는 어쩌면 그저 평범한 생을 살다 갈수도 있었을 사람들을, 어쩌면 그것이 한평생 소망이었을 사람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이바라기 노리코를 일본의 대표적 반전(反戰) 작가로 만들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은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공선옥을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후일담 작가로 다시 살아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끝으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고 난 후, 자꾸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는 마음을 이바라기 노리코의 또다른 시 한편으로 추스려본다.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바짝바짝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하고서는


나날이 까다로워져가는걸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건 어느쪽인가


뜻대로 되지 않는 걸 가족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엇이든 서툴기만했던건 나 자신이 아니던가


초심이 사라져가는 걸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초에 깨지기 쉬운 결심에 지나지 않았던가


안 된 일들을 모두 세상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간신히 빛나던 존엄의 포기일 뿐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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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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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는 한참되었지만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죄책감까지는 아니어도 해야할 중요한 일을 하지 않은 기분이랄까.

 

일단, 저자 유시민은 내가 한때 열렬히 좋아했었고 또다른 어느 한때엔 죽도록 싫어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에 대한 미움조차 '팬심'의 일부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2011년도에 나왔고 2017년인 올해초 개정판이 나왔다. 드문 일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개정판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촛불집회'로 대변되는 정치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무관치 않으리라.


그동안 나는 유권자로서 어떤 후보를 찍어야 하고 어떤 정부가 올바른 정부일까? 에 대한 고민은 했었지만, 국가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국가란 당연히 '실재'하는 것으로, 국가가 아닌 혹은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두려움 때문에 애써 외면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두려움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인의 피 속에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으니까...


국가의 탄생은 바로 이와같은 대중의 혼란과 공포로부터 기원했다. 

 

'자연상태'란 곧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질서도 법도 선악의 판단기준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국가가 출현하기 전 인간의 삶이 실제로 그러했는지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국가 출현 이전 인간의 삶은 홉스가 묘사한 '자연상태'와 비슷했을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생활의 단위를 중심에 두고 보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진화생물학자들은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20만 년 동안 혈연으로 맺어진 작은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다른 작은 공동체와 적대적 경쟁을 벌였다고 말한다. 사자와 늑대, 하이에나, 침팬지 같은 포유동물의 일반적 생활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다른 동물과 달리 높은 인지능력과 학습능력, 소통능력을 발현함으로써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었다. 그게 바로 국가였다. 불안하고 고독하고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두가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공동의 권력을 세운 것이다. -30쪽


 

 

홉스는 국가의 탄생을 <사회 계약설>의 토대 위에서 찾았다. 물론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전제군주정의 시대에 살았던 홉스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핵심을 꿰뚫어봤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그후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 자유주의 국가론를 불러왔고, 19세기 중반엔 마르크스 유물론에 입각한 전체주의 국가론이 대두한다.

 

 

로크가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면서 국가와 국민은 천부적으로 맺어진 고정불변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면, 루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와 정부를 분리하고 정부가 계약을 위반했다면 국민은 그 정부를 무너뜨릴 권리('계약을 해지할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로크와 루소가 다진 자유주의 국가론의 토대 위에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최고의 선(善)으로 규정하고 이를 해칠 수 있는 모든 국가 권력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 국가론은 당시 신생 국가였던 미국의 헌법 제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세워진 대한민국 또한 이와같은 미국의 법치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주의 국가론과 자유주의 국가론이 국가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고 그 위에서 국가의 역할과 목적에 대해 논했다면, 유물주의 국가론은 국가란 계급 투쟁의 산물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국가가 사라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이론에 기초하여 일어난 공산주의혁명은 마땅히 국가주의를 물리쳐야만 한다. 하지만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은 오히려 국민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도구로써 국가 중심주의를 더더욱 강화하였다. 바로 전체주의 국가론이다. 


 
마르크스는 '빅 브라더'나 철학자, 가장 지혜로운 자 또는 어떤 선택된 계급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였다. 계급적 적대관계가 없고, 삶의 주체로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개인들이 서로 상생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세상, 이보다 더 멋진 사회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유럽인의 삶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문화적 토대를 존중해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을 의미한다. 이런 사회는 더 이상 운동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체일 뿐, 더는 '투쟁하는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다. 내부에 적대적 계급관계나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사회에는 운동과 변화의 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역사가 종결됨으로써 결국 역사 그 자체가 종결된다.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역사 그 자체를 종결하는 마지막 혁명이 되는 것이다. -90~91쪽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은 1945년에 출간되었다. <동물동장>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 예브게니 쟈마찐의 소설 <우리들>은 1921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1년에 나왔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혁명은 1949년에 완성되었다.

나는 늘 궁금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세계를 그린 책들이 이미 여러 권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19세기까지 무려 수백 년간 세계 문명의 중심 국가였고 수천 년 간 종교 대신 철학을 신봉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라는 허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우리나라 일부 386세대는 마오쩌둥 사후 바로 역사의 오점으로 지적된 중국 대륙의 문화혁명을 찬양하고 공산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을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나의 질문들에 유시민은 이렇게 답한다. 

 
현실적 위력은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생명력은 다 타버린 화로 밑바닥의 불씨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진화의 시간이 아닌 역사의 시간에 그것이 큰 불길로 다시 살아날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좌절한 인류의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에 대한 꿈은 언제든 사람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다. -100쪽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상상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만의 독특한 특질이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이런 특질들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믿음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특징도 함께 발달시켰다. 그래서 현대인은 늘 변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국가 권력 아래 순종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를 향한 의지 못지 않게 강렬하다. 어쩌면 불안한 자유보다는 안정적인 독재를 더욱 선호하도록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원래 국가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으며 평화와 안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법을 만들어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고, 때론 폭력을 동원해서 강자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국가 권력이 끝없이 확대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탄생했으며, 국가의 정의와 목적을 찾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은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갖춘 나라이다. 이 제도들을 제대로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지를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뽑아놓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좋지 않은 제도라고 불평할 수 없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악을 저지른다고 해도 위축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언제든,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 이 가능성을 말살하면 독재정부가 된다. 압도적인 민심의 압력이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2016년12월9일, 우리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재확인했다. -118쪽

 

한때 우리 사회는 진보정당과 종북세력을 구분하지 못했던 무지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옹호하는 소수 운동권 세력이 국회에 진출했다가 물러나는 해프닝이 벌어졌는가 하면, 반정부 발언과 보수 언론을 일갈하는 일부 지식인들을 향해서 '혹시 빨갱이 아닐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유시민 역시 그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종종 너무 급진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들리거나 남성중심주의적 사고로 오해받을 만한 발언들을 했던 그가 참으로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이를 또다른 각도에서 보면, 누군가의 자유로운 발언으로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와 역할 또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국가론과 목적론적 국가론은 결합할 수 있으며, 그 결합을 통해 각자의 결점을 제거하고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다. 나는 진보정치세력에게 필요한 국가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국가에 대한 다섯 번째 질문이다. 내가 찾은 답은 이러하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이다. -225쪽


 

이 책은, 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서들을 탐독하고 고민한 결과이다. 
국가의 탄생과 발전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들을 밝힌다. 

 

그저 앎(知)이라는 지적인 만족에만 머물지 않고 앎을 실천(行)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본보기와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일독을 권한다. 만약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만족한다면 읽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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