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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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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동안 읽은 책들 중, 가장 인상적인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전자가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진화생물학과 인류고고학을 영민하게 뒤섞어 인류의 발전 과정을 거시적(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빅히스토리')으로 그려냈다면,  후자는 상상 · 협력 · 탐욕이라는 사피엔스의 본능적 특질이 어떻게 컴퓨터 공학 및 의학과 결합하여 인류를 불멸의 존재로 이끄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틀렸다.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저 생각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도 틀렸다. 인간은 존재(해야)하기 때문에 그저 욕망할 뿐이다. 애초 인간에게는 자의식 즉 내면의 목소리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내면의 목소리라고 굳게 믿어왔던 건 다름 아닌 두뇌의 알고리즘일 뿐이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유주의는 어떤 외적 실체가 이미 만들어 놓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유권자, 소비자, 관객은 저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이용해 자기 인생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지만 생명과학은, 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생화학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자유주의를 뿌리째 뒤흔든다. (...) 중세 십자군 전사들은 삶의 의미가 신과 천국에서 온다고 믿었고,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인생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둘 다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지금까지 자유의지와 개인의 존재를 의심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도, 중국,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2,000년도 더 전에 '개별적인 자아는 환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의심이 경제, 정치, 일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실제로 역사를 바꾸지는 못한다. 인간은 인지부조화의 대가라서, 실험실에서는 이것을 믿고, 법원이나 의회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믿을 수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낸 날 그리스도교가 사라지지 않았듯이, 과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유주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417~419쪽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싶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구글의 빅데이터나 인공지능(AI) 시스템에 개인 정보를 넘겨주면 된다.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미래는 내가 검색하고 클릭하고 '좋아요'를 눌렀던 수많은 나의 '흔적'들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되어 내가 어떤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고 어느 곳에서 생활하며 어떤 음식을 먹는게 더 좋을지를 통계 수치로 알려주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주장이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라도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절대 권력과 종교에 저항하기 위해 강조되었던 개인의 지위와 역할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인본주의와 개인주의를 불러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인식. 개체로서의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최고이자 절대진리라는식의 개인우선(우월)주의 사고가 현대 자본주의 물질소비문명과 결합하여 역으로 개인을 소외시키고 있다.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유신론자들이 '데오스(theos,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경배하는 반면,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경배한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같은 인본주의 종교들의 창립이념은 호모 사피엔스는 특별하고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의미와 권위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선 또는 악이 된다.

유신론이 신을 내세워 농업을 정당화했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을 내세워 공장식 축산 농장을 정당화했다. 축산 농장은 인간의 필요, 변덕, 소망을 신성시하는 반면 그밖에 모든 것을 무시했다. 동물들은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축산 농장은 동물에게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축산 농장에는 신도 필요 없다. 현대 과학과 기술이 고대의 신들을 훨씬 능가하는 힘을 인간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농장주들은 과학기술 덕분에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조건들보다 더 극단적인 환경에서 젖소, 돼지, 닭을 기를 수 있다. -142쪽


 

흔히, 다른 생물종과 구별되는 인간의 가장 큰 능력으로 '생각하는 힘'을 들곤 한다.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란,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보다 육감('느낌')이나 생각('상상')을 더 중시한다는 뜻이다. 사피엔스는  이처럼 생각하는 능력을 통해 다른 유인원종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집단 협력으로 지구를 지배하고 인류 문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이와 같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가상의 존재('허구')를 수없이 창조하고 또한 이를 경배해 왔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똑같은 허구적 규칙들을 모두가 믿지 않으면 축구 경기를 할 수 없고, 허구 없이는 시장과 법원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246~247쪽



그러고 보면, 인류 역사는 '신(信)'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인류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것을 위해 목숨도 불사했다. 신(神)을 위해 죽었고 왕(國)을 위해 전쟁을 했다. 오늘날에도 이 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좀더 교묘해졌고 더한층 악랄해졌을 뿐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살고 죽을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은 외부나 타자가 아니라 자기 내부 즉 바로 자기 자신(自身)으로 바뀔 따름이다. 과거 인간은 필멸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영혼(종교)을 통한 불멸의 삶을 추구했다면, 이제 인간은 과학기술의 도움을 빌어 영원한 육체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神) 즉 '데우스'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개별적 가치를 상실하는 과정 속에서 그 무엇(혹은 '누구')으로도 대체불가하고 인공지능(빅데이터)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켜 신인류로 살아남을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神)은 얼마나 될까?

<그리스 로마신화>만 봐도 그속에는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찬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그동안 수많은 신들이 존재해왔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신들이 탄생(?)하고 있으리라. 


맨  처음 창조주는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신의 모습을 닮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신들을 만들어냈다.

신의 복제품인 인간이 자신의 모습(복제품)을 본떠서 수많은 신들을 만들었으니 신들은 '복제품의 복제'인 셈이다. 이제 인류는 신들을 복제하는 것(시뮬라크르)에서 벗어나 신들을 그대로 흉내내는(미메시스) 단계로의 진입이 머잖아 보인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복제품(인간)과 진품(신)이 구별되지 않는, '시뮬라시옹(가상이 현실이고, 가짜가 진짜인 세상)'의 세계로 접어든 것이다.   


보통 인문서나 과학서 한 권을 정독하고 나면 겨울철 목욕탕에 갔다가 막 나왔을 때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서늘한 기운이 관통하면서 온몸이 맑아지고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알듯말듯했던 궁금증들과 조각난 지식들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맞춰지면서 완성되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 책은 읽고 나서 기분이 산뜻해지기는커녕 더한층 우울해졌다. 아무리 미래에 대한 예측은 '장미빛 환상' 아니면 '지옥의 묵시록' 양극단을 오고가는 시계추라고는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현재보다 더욱 발전된 미래임에도불구하고 그것에 환상을 품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동안 인류는 스스로 만든 창조물들 앞에서 창조주로서 그것을 사용하고 관리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의지하고 숭배함으로써 오히려 얽매이고 지배당하는 피조물로서의 역할에 더 익숙해왔기 때문이리라.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우리가 만들어냈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그것에 통제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 한 권의 책이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복음서인지 아니면 인류의 멸망을 예언한 계시록인지는 중요치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복음서라면 신을 향한 복음이 아닌 인간을 향한 복음이 되어야 할 것이요, 계시록이라면 인간에 '대한' 계시록이 아닌 인간을 '위한' 계시록이 되도록 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이 모든 열쇠는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쥐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복음서 혹은 계시록이 될지는 순전히 인류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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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증보판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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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과학 분야에 선천적으로 취약한 내가 흥미를 보이는 유일한 분야가 있다면 생물 그중에서도 진화생물학이다.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 그의 <진화론>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책들이 출판 되었고, 이를 계기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제프리 밀러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이쪽 분야의 책들을 꽤(?)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물론 나처럼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최재천 교수의 책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 역시 진화생물학(혹은 진화심리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다. 즉, 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행동 및 자연현상까지 진화론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려는 이 책은 나름의 통찰력을 선사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였던 건 문학작품의 존재 이유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부분이었다.

 

이야기에 대한 별스러운 애착은 인간이 다른 진화적 적응들을 갖추다 보니 부수적으로 발현하게 된 부산물일 수 있다. 예컨데 우리의 마음이 진화한 소규모 집단에서는 누군가의 은밀한 사생활을 알아내는 일이 번식에 큰 도움이 되었다. (...) 자연선택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정보를 얻는 활동에서 짜릿한 즐거움을 느끼게끔 석기 시대의 우리 마음을 설계했다. 하지만, 대중매체와 과학 기술이 득세하는 현대 환경에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실 또는 상상 속 인물들의 사생활을 엿보면서 즐거움 그 자체만을 탐닉하는 현상이 뒷소문을 추구하는 적응의 부산물로서 생겨나게 되었다. 아니면, 이야기를 즐기는 성향 그 자체가 어떤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게끔 정교하게 설계된 진화적 적응일 수 있다.(...)

 

이야기는 극중 인물이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고 어떻게 해결하는지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독자에게 유용한 가르침을 주게끔 설계된 적응이다. 즉 이야기는 삶의 모형이다. 생존과 번식이 결판나는 치열한 전장으로 투입되기 전에 이러한 모의실험이 굳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의 인생항로가 그만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p148~149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옛날 옛적부터 있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읽기를 싫어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류에게 '이야기'는 본능이다.

한편, 여성이 남성보다 책을 더 자주 사고 더 많이 읽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남성 작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설명한 진화론적 관점이 흥미롭다. 제프리 밀러는 저서 <연애>에서, 여성은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반면 남성은 이야기를 하길 좋아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잘 하는 남자가 여성에게 선택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이야기를 많이 지어내는 쪽은 남자일 수 밖에 없노라고... 

 

이 책의 저자 역시 인간의 '웃음 본능'을 설명하면서, 여성은 웃기는 남성을 선호하는 반면 남성은 자기를 웃기는 여성보다는 잘 웃어주는 여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프리 밀러의 가설과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남성은 이야기를 잘 지어내는 재주를 특화시키고 여성이 이야기를 잘 듣고 읽는 재주를 특화시킨 건, 좋은 이야기와 재밌는 이야기를 구분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자연선택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진화심리학과 진화생물학 및 진화행동학 등에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어떤 초월적인 영혼이나 합리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선택된 결과일 뿐이라는 주장은, 20세기 초 인간 행동의 모든 원인을 '성'과 연관지었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롭지만 또한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동성애의 비율이 돌연변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비율(1~10%)을 차지한다는 점은 진화생물학에서는 변변한 가설조차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과 행위를 무조건 진화론과 연관지으려는 태도에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창조론를 창조학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창조론은 종교의 영역일 순 있어도 결코 과학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류의 생존과 번식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자연선택되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불투명한 단서로부터 내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를 지닌 행위자의 존재를 다짜고짜 가정하는 성향은 사악하고 지능적인 악령, 그리고 이로부터 사람들을 지켜 주는 자비로운 신에 대한 관념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 인지심리학자 파스칼 보이어에 따르면, 사람들은 아주 약간만 낯설고 이상한 것에 가장 관심이 가고 더 잘 기억한다. 반면에 시시하도록 정상적인 것이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한 것은 제대로 기억하거나 전파하지 못한다. -p218

 

'신이 실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신을 믿는다면 실재로 신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잃을 게 없지만, 반대로 내가 신을 믿지 않는데 실재로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전부를 잃는 것이다.'

 

인간이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서 유신론쪽으로 더 기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실재로 인류의 조상은 길을 가다가 낯선 존재와 마주쳤을 경우, 일단 상대를 자신보다 강력하다고 전제한 후 잽싸게 도망감으로써 생존 확률을 높여왔다. 신처럼 '불가지론'에 대한 인간의 비과학적인 믿음과 복종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표현처럼 인류에게 종교란 부정할 수는 있어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면, 본능 즉 직관은 이성적 판단, 즉 추론보다 앞선다. 설령 그것이 현대 과학에는 위배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인간의 경우 혐오감이라는 감정이 작동하여 병원체가 들어 있는 대상을 멀리하게 해준다. (...) 단순히 어떤 사람이 우리 집단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임을 알려주는 단서만으로도 그를 회피하거나 배척하는 기제가 작동한다. 내부인들끼리 뭉치며 외부인을 몰아내려는 심성이 어떻게 전염성 질병을 막아주는 방패가 될까? 답은 기생체와 숙주 사이의 공진화 군비경쟁에 있다. -p73

 

동물의 사체 섭취, 더러운 물체와의 접촉, 근친 상간,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흉칙한 외모와 자극적인 냄새에 대한 거부 등등......

굳이 배우지 않아도... 법에 저촉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지 않아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들은 전통과 터부 등의 이름으로 불허되어 왔는데, 이는 전염병이나 병균을 멀리함으로써 생존에 유리하도록 설계된 우리의 마음 지도 때문이란다. 

 

여기에는 음식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향신료의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을 사용하는 음식을 선호하는 지역일수록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온도가 높고 습해서 병원균에 훨씬 쉽게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국가가 서구에 비해 문화적으로 덜 개방적이고 더 폐쇄적인 것도 다양하고 많은 향신료를 사용하는 음식이 발달한 이유도 모두 진화론적으로 보면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자연 그 자체에 깃든 외부적 실재가 아니다. 잡식성 영장류인 인간이 오랜 세월 진화하면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던 특정한 환경을 잘 찾아가게끔 그 환경에 대해 느끼는 긍정적인 정서일 뿐이다. -p126

 

어째서 진화적으로 쓸모 없어 보이는 꽃에 매혹되었을까? 꽃은 오래지 않아 이 자리에서 과일이나 견과, 덩이줄기 같은 음식물이 나게 되리라고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꽃이 있는 곳에는 인간의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도 찾아온다. -p135

 

아프리카 사바나 풍경과 폭포 및 분수대 등등... 

이런 사진과 그림들을 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이런 장소들이 먹이를 구하고 위험을 피하기 쉬우며 생존에 꼭 필요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꽃이나 나무에 대한 인류의 높은 호감도 역시 이들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카페의 2층 창가 자리부터 손님이 차는 이유와 백화점 1층 정중앙에 주로 분수대가 자리하고 있는 이유 역시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 대한 인류의 동경과 모방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도 역시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아무리 지고지순한 지위를 부여한다 한들, 기껏해야 '털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 등에 흥미를 갖는 이유 역시 진화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기에 앞서, 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인간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탐구하도록 진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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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오 쿠키를 먹는 사람들
리처드 프레스턴 지음, 박병철 옮김 / 영림카디널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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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참, 특별한(?) 책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책이 나온 1997년 당시 나는 이 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사 속에서 미국 남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팔로마(스페인어로 '비둘기 장'이란 뜻)산 천문대에서 근무하는 천체물리학자들이 졸음과 추위를 몰아내기 위해 별을 관측하면서 커피와 함께 오레오 쿠키를 즐겨 먹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추측형을 사용한 건,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흐릿해졌기 때문에... ^^;

(* 참고로, 오레오쿠키는 미국 나비스코사에서 1912년부터 생산하는 과자다.)

 

바로 그 순간, 내 머리와 마음 속에서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 오랫동안 나에겐 '오레오 쿠키를 먹는 사람들 = 천체물리학자 = 별 = 아름답다'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버렸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별을 갖고 있으며 죽으면 그 별로 돌아간다고 믿게 되었다.  

 

그 후,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 볼때마다 나는 사물에 대한 아름다움을 너머, 사물을 향한 일종의 경외심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지구로부터 수억, 수십억 광년 떨어져 있는 천체에서 발하는 빛이 지구에 도달하려면 떨어진 그 거리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 눈에 비친 그 별빛은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히 먼 과거의 빛이다.

인간이 탄생하기도 훨씬 더 전에... 심지어 지구가 탄생하기도 훨씬 더 전에... 그 빛은 이미 '나'를 향해 출발했던 것이다....

 

그 뒤,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차례 이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에는 내가 알고 있던 천체 지식들을 총동원하고 살짝 내 의견까지 곁들여서...

그만큼 난 이 책을 좋아했다.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이 책을 구입해서 갖게 되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책만큼은 잘 읽게 되지 않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나면 읽어야지'... '이번엔 꼭 읽어야지...' '이 계절이 지나기 전엔 꼭 읽어야지...' '올해가 다 가기 전엔 꼭 읽어야지...'

이렇게 십 수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난 이 책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게 되었더랬지...

 

그리고도 한참이나 세월이 더 흘러갔고...

이 책이 불행하게도 내 품을 떠나고 나서야, 나는 마침내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한번 잃어버린 사랑은 되돌이킬 수 없듯, 한번 내곁을 떠난 책을 다시 얻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그러나 어렵사리 구한 책을 막상 두손에 펼쳐 들고 읽으려니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난해하고 낯선 용어와 이론도 그렇지만 신문기자인 저자가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육하원칙에 따라 서술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과학적(?)이었다. 내가 '별'이라고 칭하는 것을 과학자들은 '항성'이라고 불렀다. 

 

과학은 사실을 추구하고, 문학은 진실을 추구한다고 했던가. 

사실과 진실 사이에 깊고 깊은 심연이 놓여있듯...  '별'과 '항성' 의 어감적 차이만큼이나 과학과 문학 사이에도 좁힐 수 없는 '강'이 존재함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이건 순전히 내 잘못이지 싶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지어내고 꾸며진 이야기들 탓(?)에 나는 읽으면서 여러차례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 책은 충분히 재밌고 쉽게 쓰여져서 출판되자 마자 베스트셀러였고 지금도 천체 분야의 명저로 손꼽힌다.

 

 

이 책의 주인공은...

1928년부터 1949년까지 무려 21년에 걸쳐 7층 높이의 크기로 만들어진 헤일 천체 망원경이라고도 하겠다.

아니,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헤일 천체 망원경(직경 508cm)을 통해 보여지는 밤하늘의 수많은 천체들이라 하겠다. 

 

천체나 우주 물리 분야라고 하면 으레 인류의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천체를 연구하는 건, 인류의 미래가 아닌 인류의 과거 심지어 지구 더 나아가 우주의 초기 탄생을 연구하는 것이다. 천체망원경을 통해 천체를  바라본다는 건 바로 과거를 바라보는 행위인 셈이다. 그리고 만물은 모두 죽은 별들의 잔해들이며,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란다. 그러니 인간은 별에서 왔다는 나의 상상은 옳았던 셈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놀라운 일인가!

 

어디 이뿐인가.

한개의 항성(태양)과 아홉개의 행성(지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천왕성 혜왕성 명왕성)으로 이루어진 태양계에 살고 있을 뿐인 인간이 태양계를 너머 은하, 그 은하 너머 우주까지 내다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고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또한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수백 수천 수억 광년을 거슬러 올라가 까마듯한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관측한다는 사실 자체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우주의 드넓음과 신비로움에 압도당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아울러, 우주의 탄생과 진실에 조금씩 접근해가는 인간의 위대함에 숙연해지지 않았다면 이 또한 거짓말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렵고 그래서 다소 지겨울 수도 있는 책이지만, 곳곳에 아름다운 문장들이 감춰져 있다.

마치 수많은 별들 속에 혜성이 감춰져 있는 것처럼...

 

 

- 이 망원경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던 어떤 사람의 자취입니다... p89

- 기계를 신뢰하는 인류의 완고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헤일 망원경에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열망과 두려움이 담겨있는 것이다. p131

- 팔로마 산에서 얼어죽지 않은 채로 새벽을 맞이하려면 오레오 쿠키를 먹어라. p144

- 그는 <몬테크리스토 백작> 속의 한 구절을 항상 마음 속 깊이 새겨두고 있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다음 두 마디로 집약된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p277

- 언젠가 인류는 행성을 소유할수도 있겠지만 별만큼은 결코 가질 수 없다. p317

 

 

 

 

+ )

 

오랫동안 좋아해온 짝사랑과 조우하는 기분은 어떤 걸까?

지금,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내멋대로 재구성되었던 상상이 현실이 되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운...

 

그래,

우리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하겠지만, 사랑만큼은 결코 가질 수 없겠지...

인류가 언젠가는 행성을 소유할 수도 있겠지만 별만큼은 결코 가질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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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유전자, 광인의 유전자
필립 R. 레일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흥미로운 제목에 비해, 그닥 흥미롭지는 않았다.

내 선택에 따른 의무감으로 읽어야만 하는 책들은.... 참 고민스럽다. 

읽기를 포기하자니 찝찝하고, 다 읽자니 괴롭고...

 

일단, 2002년도에 책이 출간될 당시엔 최신이었을 연구자료들이 지금은 더 이상 최신이 아니라는 점이 책읽기의 재미를 급격하게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몇몇 챕터들은 개인적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면, 동성애는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인가? 조울증과 정신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들은 정말 유전자에 의한 것인가? 아닌가? 외모 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인품도 유전되는가? 아니면 후천적 환경으로 조성되는 것인가? 등등...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과학적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지만, 저자는 유전적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코발트 블루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우유보다는 커피를, 아침보다는 저녁을 더 선호하는 것도...

바뀌지 않는 오래된 성격들과 오래된 습관들도....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유전자 덕분(?)이란다.

 

왠지 허탈함이 쓸고간 마음 한켠이 벽돌 한장만큼 가벼워진 느낌이다. 

그동안 내가 저질러왔던 못난 행동들과 수많은 실수들 그리고 인품적 결함 등에 대해서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영향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넓다는 건, 실로 '양날의 칼'이 아닐까 싶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질병을 미리 알고 예방할 수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유전자에 따른 책임회피나 차별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류는  일찍이 지난 20세기 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라든지 지적장애여성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불임시술 등등... 유전자에 따른 차별의 피해를 톡톡히 경험한 바 있기에 유전자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찬반 양론이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저자는 인간 유전자와 관련된 이야기 뿐만 아니라 동식물에 대한 유전자 연구 및 이에 대한 활용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다만, 연구사례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나열한 나머지 신빙성은 확대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자연과학 분야에 흥미나 기초 지식이 부족한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상당히 지루했다. 

 

 

한편, 유전자 연구가 발전함에 따라 인류가 직면하게 될 '딜레마'에 대해 생각해 보면.... 문제는 더한층 복잡해진다.

 

심심하면 한번씩 뉴스거리로 올라오곤 하는 유전자 조작 식품들...

전국민을 단번에 생물학자로 만들어버린 줄기세포 연구...

불임치료용으로 보관되고 있는 냉동 수정란의 처분 권한과 이용 규칙 등등...

 

이 밖에도 유전자 검사와 관련 정보를 어디까지 용인하고 공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와 '알 권리' 등이 서로 충돌하면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것임은 불을 보듯 확실하다.

 

 

그런데 정말 치료 목적의 인간 복제와 식량 증진 차원에서의 동식물 복제 그리고 재대혈 냉동 보관 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인류는 더욱 행복해질까?

 

특히 재대혈을 냉동 보관하면 골수이식이 필요하거나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재대혈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그런데 재대혈 냉동 보관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부유한 부모가 아니면 자신의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태반에서 재대혈을 추출하여 냉동보관할 수가 없다고 한다. 출생과 동시에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향후 질병 치료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사회를 평등하고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내 머리 속에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건 다름 아닌, 기술 발전이 반드시 인류의 행복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끝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좋은 성격과 나쁜 습관들...

개인의 성적 취향 및 정체성...

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눈부신 외모와 사랑스러운 미소까지도...

 

전부 다 '유전자의 영향'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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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잭 웨더포드의 또 다른 역작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에는 칭기스 칸이 대제국을 다스리면서 동시에 정복전쟁을 펼쳐나가기 위해 만들어낸 독특한 통치전략이 나온다. 칭기스 칸은 네 아들에게 각각 러시아(주치), 중앙아시아(차가타이), 몽골서부(우구데이)와 몽골동부(툴루이)를 맡기고 네 딸들은 각각 주변국인 옹구드(알아카이), 위구르(알-알툰), 오이라트(치체겐), 칼루크(툴라이)에 시집보낸다. 그리고 그 지역의 왕들을 사위(구레겐)로 삼아 정복 전쟁에 참여시켰다. 그러므로 통치는 자연스럽게 후방에 남아있는 여성(딸들)의 몫이 되었다. 딸들은 철저하게 아버지 칸을 위해 봉사했다. 정복전쟁시에는 중요한 후방 보급기지로써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평화시에는 각 지역의 특산품을 아버지의 나라와 오빠들의 나라에게 보내주고 그곳의 특산품을 받아오는 등 물물교환 형식으로 제국 경제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아버지 칸이 죽은 후, 재물과 권력에 눈이 먼 남자 형제들은 제일 먼저 누이들의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결국, 몽골제국을 주위에서 잘 감싸고 있던 이웃국가들이 무너지자 몽골제국은 마치 '잇몸 없는 이빨'과 같은 신세가 되면서 제국은 순식간에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칭기스 칸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이처럼 딸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칸'으로 불리운 인물이 사라지자, 초원에는 다시 스스로를 '칸'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이 나타나 부족끼리 서로 싸우는 혼돈의 시기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무덤도 남기지 않은 칭기스 칸의 그림자는 때론 존경으로 때론 경멸로 사람들 사이를 떠돌게 된다.  

 

 

 

칭기스 칸 사후에 그를 묘사한 수많은 이미지와 그림이 나왔지만 실제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려진 초상화는 없다. 역사의 다른 정복자와는 달리 칭기스 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자신의 상(像)을 조각하거나, 동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칭기스 칸의 초상이나 몽골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중국인은 성긴 턱수염에 눈의 초점이 흐린, 마음씨 좋은 늙은 숙부처럼 그려놓아, 사나운 몽골 전사보다는 비탄에 사로잡힌 중국 현자를 보는 듯하다. 페르시아의 세밀화는 칭기스 칸을 왕좌에 앉은 투르크족 술탄처럼 그려놓았다. 유럽인은 사나운 얼굴에 잔인한 눈으로 노려보는 전형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해놓았는데, 구석구석 추하기 짝이 없다.

 

고려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의 삶에 대하여 온갖 신화와 기발한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믿을 만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이야기에 자신의 공포를 투사했다. 알렉사드로스, 카이사르, 샤를마뉴, 나폴레옹 같은 정복자들이 죽고 나서 수백년이 흐르면 학자들은 그들의 잔학하고 호전적인 행위들을 업적이나 역사에서 떠맡았던 특별한 임무와 비교해 보게된다. 그러나 칭기스 칸과 몽골인의 경우 업적은 잊혀지고 이른바 범죄나 야만성만 확대되었다. 칭기스 칸은 야만인, 피에 굶주린 미개인, 파괴 자체를 즐기는 무자비한 정복자의 전형이 되었다. 칭기스 칸, 그의 몽골 유목민 무리, 나아가서 아시아 사람들 전체가 만화 속의 1차원적 인물이 되었으며, 문명화된 백인 세계 너머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의 상징이 되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p23~25-

 

 

 

칭기스 칸 사후 몽골족에는 이렇다할 인물이 탄생하지 않는다.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칭기스 칸의 손녀로 알려진 씨름 소녀 '쿠툴룬'의 활약상과 칭기스 칸이 여자로 환생한 것이라고 몽골인들이 믿고 있는 만두하이 카툰과 그녀의 남편인 다얀(大元) 칸의 드라마틱한 삶이 어렴풋하게 기억될 뿐, 몽골제국의 역사와 몽골족은 세계사에서 잊혀졌거나 아니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그러나 정사(正史)가 미쳐 다 지우지 못한 역사의 흔적들은 사람들의 노래와 민담 그리고 언어 속에 담겨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그 유명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토트>가 몽골의 공주 '쿠툴룬'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검은 머리를 질끈 동여맨 채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여전사 '뮬란' 역시 몽골의 여전사를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인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 궁전이 몽골 '게르'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걸 아는가?

 

'다운증후군'을 한때 '몽골리즘'이라고 불렀던 건, 몽골인에 대한 서양인의 비하(혹은 '공포')의 산물이라는 걸 아는가?

 

스탈린이 칭기스 칸의 무덤을 찾기 위해 몽골 초원을 샅샅이 뒤졌지만 발견하지 못했다는 걸 아는가?

 



'몽골반점'이라는 유전학적인 유사성은 차치하더라도 우리 역사에서 몽골은 먼 나라가 아니다. 고려가 몽골의 사위국으로써 '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잭 웨더포드는 제3자의 입장에서 몽골의 고려 지배를 다음과 같이 바라보고 있다. 

 


 

몽골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가 한국(당시의 고려)이었다. 몽골 족은 고려를 무지개가 뜨는 나라 혹은 사위의 나라라고 불렀다. 고려 침략은 우구데이 통치 때 시작되었으나, 쿠빌라이 칸의 통치 시기에 와서야 온전히 몽골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몽골 족은 고려 왕실과 통혼을 했고 때때로 고려 왕자가 몽골 궁정에 와서 몽골 족의 언어와 관습을 배우기도 했다. 근 70년에 걸쳐서 다섯 명의 고려 왕들이 보르지긴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다. 다른 사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는 전통적인 법률, 행정 구조, 조세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 시절의 구레겐과는 다르게, 고려의 사위들은 오지의 전장에 파견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고려로 시집간 몽골 왕비들은 알라카이 베키처럼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고려는 제일 마지막으로 사위국이 된 나라였으나 이 지위를 원나라가 멸망한 1368년까지 유지했다. < 고려왕조실록>의 1442년 기록에 의하면, 한 몽골 칸은 두 우방국의 관계를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의 위대한 조상 칭기스 칸이 사통팔달 온 세상을 지배했을 때(......)하늘 아래서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없었소. 고려는 그 어떤 나라보다 우리와 우의가 좋았지. 마치 피를 나눈 형제처럼 가까웠소."

고려 왕들은 몽골어를 잘하고, 몽골 친적들도 많았으며, 몽골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몽골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베이징 궁정의 상전들이 볼 때 몽골 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은 동시에 한국어를 했고, 한국 친척들이 있었고, 한국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백성에게는 여전히 한국인처럼 보였다. 이처럼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능력은 고려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의 이런 정신분열적 생활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에게 커다란 개인적 희생을 요구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p194~195-

 


 


 

몽골인은 한국을 일컬어 '솔롱고스'라고 한단다.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곳' 이라는 뜻이란다. 푸른 초원의 스텝에 무지개가 뜨면 얼마나 아름답고 예쁘겠는가.

몽골인들은 어쩌면 고려인들을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곳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환대하지 않았을까?


 

몽골인에게 '솔롱고스'로 기억되는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왕조의 통치가 한때 이민족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한 건 아니지...?

 

고려멸망과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위해 왜곡되어진 역사를 진실의 전부라고 믿고 있는건 아닌지...?

 

서양인과 마찬가지로 몽골인을 잔혹하고 야만적인 민족으로만 기억하고 있진 않은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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