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강대국의 흥망
폴 케네디 지음 / 한국경제신문 / 199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1988년 1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엔 이듬해인 1989년 1월에 소개되었다. 당시로선 유례없을 정도로 빨리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이 책이 미친 충격파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유기체의 생로병사에 따라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는 토인비식 문명사관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적한 네 가지 우상 중 '인종우상 '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인종우상'이란 자연 현상을 포함하여 모든 걸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생명체(특히 인간)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설명하는 오류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폴 케네디는 1500년부터 2000년까지 약 500여 년간의 문명을 다루면서,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신봉하는 왕조의 평균 수명은 300년이라는 둥, 천명이 다해 멸망했다는 식으로 과거 역사를 의인화(?)하지 않는다.  인종우상을 철저히 배격한 것이다. 


폴 케네디에 따르면, 15세기 이후 근대 시대부터 한 나라(집단)의 성장과 멸망은 철저하게 개개인이 생존과 이익을 위해 움직인 결과였다.  

일찍부터 중앙집권화되고 체계적인 관리제도를 갖추고 있었던 동양에선 개개인이 생존과 이익을 위해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없었다. 아니, 사람들이 그럴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화약과 나침반 및 정화의 원정 등등... 동양은 능력과 기술은 갖추었으나 의도와 의지가 없었다. 그러나 분권적이고 종교적 열정이 가득했던 중세를 지난 서양은 달랐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 과정에서 용병과 무기가 발달했다.

결국, 필요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도전이 성공이라는 자식을 낳았던 셈이다. 



유럽의 분산된 국가체제가 통합의 큰 장애였다는 것은 그렇다고 동어반복은 아니다. 당시 많은 수의 경쟁국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수단을 갖추었거나 돈으로 구비할 능력이 있었으므로 어떤 나라도 혼자서 대륙의 지배권에 성큼 다가설 수는 없었다. 
이같은 유럽국가들의 경쟁적 상호작용을 가지고 통일된 '화약제국'의 부재는 설명할 수 있겠으나 유럽의 세계주도권을 향한 꾸준한 부상은 쉽게 설명할 없다. 1500년에 신흥군주국들이 소유한 군대를 술탄의 어마어마한 병력이나 명제국의 대군 앞에 맞세워 놓았다면 아주 초라한 꼴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16세기 초, 어느 면에서는 17세기까지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17세기가 되자 군사력의 균형은 서양에 유리한 방향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같은 변화의 설명 역시 유럽의 세력분산에서 찾아야 한다. 세력분산은 무엇보다도 도시국가들, 나중에는 보다 큰 왕국간의 초보적인 군비경쟁을 유발하였다. 이렇게 된 데는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인 배경이 있다. 이탈리아의 유능한 군대가 봉건기사와 그 수행자 대신 특정도시의 시장이 감독하고 상인이 봉급을 지급하는 창병, 석궁사수와 (이를 호위하는) 기병대료 고체되자 용병대장이 실속을 다하려고 무진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고용한 상인과 시장이 그들에게 돈값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바꿔 말하자면 도시는 일거에 승리할 수 있는 그러한 무기와 전술을 요구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비용을 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15세기 후반 프랑스 왕들은 '국민'군을 자기 휘하에 두고 월급을 주면서 이 군대가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주기를 고대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자유시장체제하에서 많은 용병대장들이 서로 고용계약을 차지하려고 다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공업자와 발명가들 역시 새로운 주문을 얻기 위해 제품개선에 몰구하였다. 이같은 무기의 개선은 15세기 초 석궁과 장갑용 철판제조업에서 나타났으며 마침내 그후 50년이 못되어 화약무기의 실험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대포가 최초로 사용되었을 때는 그 형태와 성능면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커다란 단철포신으로 돌포탄을 쏘면서 굉장한 폭음을 낸 대포는 가히 인상적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성능이 대단하였다. 그 대포는 투르크군이 1456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포격할 때 사용하던 것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지속적인 개량의 자극은 아마도 유럽에만 있었던 것 같다. - 49쪽 '서양의 부상' 중-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무모한 '베팅'은 성공했다. 다만, 그들을 부의 길로 인도한 건 절실히 원했던 동양의 향신료가 아니라 신대륙의 은이었다.

로마제국이 야만족에게 유린당하고 멸망했듯, 半문명인에 불과했던 서유럽인들에 의해 신대륙의 제국들은 순식간에 몰락해버린다. 그렇지만 맹목적인 믿음만 있을 뿐 신의 선물을 제대로 활용할 소양을 갖추지 못했던 스페인과 포루투갈은 신대륙에서 얻은 부를 동양의 사치품을 사들이는데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 데 돈을 쏟아 부었다. 

이 과정에서 물자의 이동이 늘어나면서 유럽의 변방과 소국에 불과했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재빠르게 기회를 포착했다. 특히, 네덜란드는 고대 아테나와 중세의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을 모방하다가 전쟁의 규모가 커지자 실물경제의 범위를 넘어 비실물경제 즉 우리가 말하는 '금융경제'이라는 걸 만들어 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유럽의 '금융혁명'을 부채질한 가장 크고 지속적인 자극요인은 전쟁이었다. 펠리페 2세 때와 나폴레옹 때의 재정 부담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 (...) 경제적 의미에서 볼 때 강대국간의 끈질기고 빈번한 충돌이 서양의 상업과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기보다는 촉진하였는지의 여부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한 나라의 절대적인 성장을 긴 분쟁 전후의 상대적 번영과 힘과 무관한 것으로 평가할 것인가의 여부에 상당히 좌우된다. 분명한 것은 가장 번영하고 근대화된 18세기 국가들도 이 당시의 전비를 경상수입으로 즉각 감당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중세는 세금을 거두어들일 기구를 갗추었다 해도 국내의 저항을 유발할 공산이 컸으며 이는 모든 정부가 두려워하는 바였다ㅡ특히 외부의 도전이라도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정부가 전쟁을 적절히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차입ㅡ공채와 관직을 팔거나 아니면 국가에 돈을 납입한 모든 사람에게 이자부 양도성 장기증권을 매각하는 것ㅡ이었다. 자금의 입수가 확실해지고서야 관리들은 군납업자, 식료품상인, 조선업자 그리고 군인들에게 지불을 보장할 수 있었다. 방대한 양의 자금을 조달함과 동시에 지출하는 양면체제는 많은 점에서 서양의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발전을 부채질하는 풀무와 같았다. -121쪽 '금융혁명' 중-



한자동맹 등을 통해 발트해 연안 무역을 장악했던 네덜란드는 대서양으로 규모가 커지자 국토 면적과 인구 규모로는 새로운 대항해 시대에 발빠르게 대처할 수 없었다. 이런 네덜란드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영국이 메꿔나가기 시작한다. 

사실, 그 당시 유럽의 강대국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떻게 프랑스를 따돌릴 수 있었을까? 아니, 프랑스는 어째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까?   

'새옹지마'처럼 인간의 의지가 배제된 신의 변덕이 작용한 것일까? 

영국의 노력과 의지를 평가절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남달랐던 건 결코 아니었다. 여기엔 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꿔 말하면 '장점이 곧 단점이 되고, 단점이 곧 장점으로 바뀐 과정'이 있었다. 



18세기의 영국은 상공업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집요하게 성장한데다 재정신용도는 탄탄하며 우연하고 상승적인 사회구조였는데 반해 구제도의 프랑스는 실속없이 위험하기만 한 군사적 오만에 빠져 있으며 경제는 낙후되고 엄격한 계급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전통적 관념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의 세제가 영국의 세제보다 더 진보되어 있었다. 또한 어떤 면에서 18세기 프랑스의 경제는 비록 석탄과 같은 기간품목의 자원밖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산업혁명으로 도약할 조짐을 보였다. 프랑스의 군비생산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수많은 노련한 기술자와 몇몇 내로라 하는 기업체도 있었다. 훨씬 많은 인구와 고도의 지약농업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는 이웃한 섬나라 영국보다는 훨씬 부자였다. 정부수입이나 군대의 규모에서도 프랑스는 서유럽의 어떤 라이벌도 압도하였다. 통제경제 체제는 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영국 정부에 비해 훨씬 큰 응집력과 형안을 지녔다. 따라서 18세기의 영국인들은 영국해협 건너의 프랑스를 응시할 때마다 자기 나라의 강점보다는 상대적 약점을 절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체제는 재정 부문에서 결정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 전시에는 국가의 힘을 제고하고 평화시에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영국의 전반적인 세제는 프랑스ㅡ 즉 직접세보다는 간접세에 크게 의존하였다ㅡ보다 뒤떨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한 양상으로 말미암아 인민들의 원성은 훨씬 적었다. 예컨대 영국에는 프랑스와 같은 세금징수청부인, 세리와 중개인들이 없었다. 영국의 과세는 거의 '보이지 않는' (많은 기본품목에 대한 소비세) 형태이거나 외국인을 겨냥(관세)했다. 영국에는 국내 통행세가 없었으므로 프랑스 상인들은 사기가 저하하였고 상업의 발달이 저해되었다. 영국의 토지세ㅡ18세기 거의 전기간을 통해 주된 직접세였다ㅡ는 어떤 면세특권도 없었으며 이 또한 사회의 대부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각종 세금은 선출된 의회에서 토의된 후 승인되었는데 영국 의회는 많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구제도보다는 훨씬 대의적이었다. -124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요컨대 구제도하의 프랑스는 그 규모와 인구, 부의 면에서 언제나 유럽 최대였지만 '초강대국'이 될 만큼 크지도 효율적으로 조직되지도 않았으며 육지가 제한되어 바다로 눈길을 돌려봐도 자신의 야심이 초래하기 마련인 적의 동맹을 압도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행동은 유럽세력의 다원성을 뒤엎은 것이 아니라 공고히 하였다. 다만 혁명에 의해 국력이 쇄신되고 나폴레옹에 의해 잘 운용됨에 따라ㅡ일시적으로나마ㅡ대륙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성공은 일시적이었으며 군사적 재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러시아와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을 오랫동안 통제할 수 없었다. -136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17세기까지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는 동양의 제국들과 더 흡사한 사회 구조였던 것 같다. 

 '국왕이 멀쩡히 존재하는데도 대표자들로 이뤄진 의회에 의해 다스려지는' 영국을 바라보면서 프랑스는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작은 섬나라가 고대 그리스 자치도시를 흉내내면서 혼란을 자초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은 '과거는 언제나 현재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강했을 테니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영국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지나온 과거보다 언제나 더 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것이야말로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착각이면서도 착각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확증편향' 중 하나다.   



물론, 영국의 정치혁명과 금융혁명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며 독립적으로 진행된 것도 아니다.

의회민주주의에 따른 정치혁명은 종교투쟁을 거친 의식혁명의 결과였고, 의식혁명으로 몽매한 상태에서 벗어나자 자연스럽게 자연에 대한 탐구와 과학적 발견이 뒤따르면서 산업혁명을 불러올 수 있었다. 


동서양의 대분기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종교를 버리고 과학을 택한 영국과는 달리 중국과 인도 및 오스만 제국은 수학, 천문, 의학 등 기초 과학이 종교적 교리와 충돌하자 종교를 위해 과학을 (덮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던 지식인과 성직자의 이해득실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중앙관료제 사회에서는 새로운 사상과 혁명이 위로부터 아래로 퍼져나간다는 건 물이 아래서 위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자체적인 제도가 탄력을 받아 규모가 점점 커지자, 이 새로운 게임에 진입하는 사람들과 지역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블루오션이 레드오션이 되는 건 시간문제요 이때부턴 힘의 법칙이 적용된다. 그 유명한 영국의 해군력은 경제 성장과 함께 발전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필두로,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내 라이벌 국가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고, 서인도제도와 동인도제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대륙까지 영향력을 과시한다.



18세기의 러시아의 지위를 정확히 서열짓기는 쉽지 않다. 군대는 대체로 프랑스보다 규모가 컸고 주요 제조업 분야(직물, 철)에서도 훨씬 앞서 있었다. 어떤 라이벌국가도ㅡ적어도 서쪽으로부터ㅡ러시아를 정복하기에는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곤란하였다. '화약제국'이라는 지위 덕분에 러시아는 동쪽의 유목민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인력, 천연자원과 농경지를 추가로 획득함으로써 강대국 대열에 뛰어 들 수 있었다. 러시아가 정부통제 아래 여러 방식의 근대화운동에 돌입한 것은 사실이나 그 속도나 정책의 성공에는 과장된 부분이 다소 있다. 아직도 후진성의 징후가 많이 남아 있었다. 즉 엄청난 가난과 야만성, 너무나 낮은 1인당 소득,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매서운 기후, 기술과 교육의 낙후성뿐만 아니라 로마노트가의 반동적이고 천박한 인물들이 그것이다. 뛰어난 에카페리나대제까지도 경제와 재정문제에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18세기 유럽의 군사조직과 기술의 상대적 정체 덕분에 러시아는 외국의 전문기술을 빌어 자원이 적은 나라들을 따라잡고 앞설 수 있었다. 초강대국의 이러한 무자비한 이점은 다음 세기의 산업혁명으로 전쟁의 규모와 속도가 바뀌고 난 뒤에야 소멸하게 된다. -143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만약, 엄청난 국토와 자원을 보유한 러시아가 표트르 대제의 열망처럼 근대화에 성공했다면 18세기 대영제국는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독립국이었을 때 서유럽에서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를 자력(!)으로 무찌르고 그 여세를 몰아 영국과 충돌해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위로의 시민혁명을 이룩한 영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황제를 정점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에 치중하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이는 오스만이나 무굴제국 및 중국의 청제국도 마찬가지였는데, 중앙집권화된 사회는 처음엔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의 의지와 노력은 반감되고 집단에 무임승차하려는 욕구가 지배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국가는 구조적으로 외부의 방어에는 저항할 수 있어도 외부를 향한 공격에는 일정한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국 경제가 외부의 압력에 무너지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나폴레옹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영국은 산업혁명을 진행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대의 역사적 사건이 서로 특이한 방법으로 상호작용했음은 확실하다. 즉 정부의 무기주문이 선철, 강철, 석탄, 목재무역을 부추겼고 방대한 정부지출(국민총생산의 29%로 추정된다)이 재정실무에 영향을 주었으며 새로운 수출시장은 프랑스의 '역봉쇄'가 억제도 했지만 공장의 생산을 제고시켰다. -188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근대 재래식 전쟁의 끝은 나폴레옹이 장식한다.

물론, 19세기 중후반에도 크림 전쟁, 보불 전쟁 등이 일어나지만 20세기 초 양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들 전쟁들은 소규모 국지전이었으며 역사의 향방을 바꾸기보다는 기존의 강대국 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견제구'에 불과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말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만약' 나폴레옹과 태양왕 루이 14세의 운명이 뒤바뀌어 나폴레옹이 태양왕 루이14세가 되었다면 인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은 새시대를 연 선두주자가 되고자 했으나 사실은 몰락하는 구시대의 일부로, 스스로를 태워 장렬히 산화하는 근대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미국 남북전쟁을 제외하고는 1815년과 1885년 사이에 상호피폐로 이어진 장기전은 없었다. 1859년의 프랑스-오스트리아전쟁이나 1877년 투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과 같은 이 시기의 소규모 전쟁들은 강대국체제에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보다 중요했던 전쟁마저도 몇 가지 점에서는 제한된 것이었다. 크림전쟁은 주로 지역적인 전쟁이었으며 영국의 자원이 총동원되기 이전에 종결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전쟁도 한철 작전으로 끝났는데 이는 훨씬 오래 끌었던 18세기의 전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그러므로 군사지도자들과 전략전문가들이 미래의 강대국 전쟁은 1870년 프로이센이 보여줬던 것과 같은 속전속결ㅡ철도와 병력동원계획, 신속한 공세를 위한 총참모부의 계획, 속사화기와 대량동원된 단기복무병력 등이 결합되어 몇 주 안에 적을 압도하는 작전을 전개했다ㅡ을 바탕으로 하리라고 전망한 것은 당연하였다. 신형 속사화기들은 적절히 사용되기만 한다면 공격전보다도 방어전에 이로우리라는 점을 그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용인할 수 없는 대중적 주의주장과 광대한 지역이라는 사정이 맞물려 그 당시 유럽의 어떤 치열했던 단기전보다도 훨씬 길고 치명적인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미국 남북전쟁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전쟁들은 모두ㅡ테네시계곡, 보헤미아 평원-크림반도 혹은 로렌의 들판에서건간에ㅡ하나의 일반적인 결론을 시사했다. 즉 패전국들은 19세기 중엽의 '군사혁신'을 받아들여 새로운 무기를 채택하고,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무장시키며, 철도 기선 전신에 의한 개량된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하는 한편 군대를 지탱하기 위한 생산적인 산업기반을 확립하는 노력을 소홀히 한 나라들이라는 점이었다. 이 모든 전쟁의 승전국측 장군들과 군대가 전투에서 한심스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러한 실수로 훈련된 병력, 보급, 조직 및 경제기반에서 갖는 이점이 상쇄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1860년 이후의 한 시기에 대한 최종적이고 보다 일반적인 관찰을 하게 된다. 이 장 첫머리에서 지적했듯이 워털루전투 이후의 반세기는 국제경제의 꾸준한 성장, 산업발전과 기술발전으로 인한 대폭적인 생산증가, 강대국체제의 상대적 안정성과 국지적인 단기전의 발발로 특징지어진다. 게다가 육군과 해군의 무장이 어느 정도 현대화되기는 했지만 군대에서의 새로운 발전은 산업혁명과 정치체제의 변화에 민감한 민간 부문의 발전에는 크게 못미치는 것이었다. 이 반 세기 동안의 변천에서 1차적으로 혜택을 입은 것은 영국이었다. 생산력과 세계적 영향력을 가지고 따질 때 영국은 1860년대 후반에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비록 제1차 글래드스턴 내각의 정책으로 인해 이 사실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1차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유럽 밖의 산업화되지 않은 농업사회로서 이들은 서양의 제품이나 군사적 침공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똑같은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산업화가 뒤진 유럽의 강대국들ㅡ러시아, 합스부르크제국ㅡ은 본래의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새로 통일된 국가인 이탈리아는 도저히 일등국가에 끼어들지 못했다. -269~270쪽, '산업화와 세계균형의 변동, 1815~1885' 중



양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까지의 복잡한 상황들과 미국의 개입 등에 대해선 이미 충분한 논의와 함께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한 리뷰는 생략하기로 한다. 만약 궁금하다면 최근에 올린 리뷰글들 살펴보시길...


19세기 초까지 도시공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 직물과 수공업 산업에선 강점을 보였지만, 라인 연방을 통일한 프로이센만큼 근대화에 성공하진 못했다. 

1,2차 세계대전은 몰락하는 기존 제국(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과 오스만, 청)과 한 발 늦게 뛰어든 프로이센(독일)과 일본이 이미 구축된 세계 질서에 반발하면서 일어났고, 여기에 영국과 미국 등이 개입하면서 대전으로 확산되었으머 그 결과 역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다. 



폴 케네디는 1945년 이후 미국-소련 양국의 냉전 체제와 군비경쟁 등을 소상히 다루면서, '미국, 소련, 중국, 일본, 유럽공동체로 이뤄진 5강 체제가 한동안 펼쳐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직후, 소련은 해체되었고 80년대 경제성장의 정점을 찍은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저성장 시대에 돌입하면서 저자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정중동'의 전략으로 급성장할 것이라는 중국에 대한 예측은 맞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일독의 의미가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1500년 이후 500년에 걸친 근대 사회를 정치,경제학적 관점과 군사,기술학적 관점으로 설명함으로써 기존의 유기체적 문명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맞춘 점쟁이가 미래도 반드시 맞춘다는 보장은 없다'라는 격언이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과거를 살펴보는 그의 방식이 그냥 패를 돌려 뽑는 '무대포'식이 아니라 광범위한 통계와 각국이 처한 상황들을 전방위적으로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까운 미래에, 어느 나라가 흥하고 쇠할 것인지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마치, 다각도의 통계(빅데이터)를 분석해서 일찌감치 당선자를 맞출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단, 그의 관점을 바탕으로 정리해보면 오늘날 영국과 일본은 국토 면적과 인구를 감안할 때 추락이라기보다는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복귀한 것이다. 과거 스페인제국과 네덜란드의 사례에서 보듯 과잉팽창에 따른 군사비 지출이 과도해지면 무너지게 된다.  둘 다 섬나라로 외부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었고 내부의 강력한 응집력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국토와 인구의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강대국이 아닌) 영향력 있는 대국의 지위를 보존하는데 만족하게 될 것이다.   


한편,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경제력(혹은 생산력)보다는 군사력이 과도하게 발전한 나라다. 더구나 소련이 해체된 후 줄어든 영토와 인구에 반해 소련 시절의 군사적 능력은 고스란히 승계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군사 부문이 강했는데 해체 이후엔 국가 전체에서 군사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한층 커졌다. 러시아는 군사력을 생산력 향상이나 사회 발전 등으로 분산 배치하면서 힘을 길러야하지만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거인과 길게 국경을 맞대고 있다보니 이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 중 러시아가 가장 큰 도전과 딜레마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양한 민족과 언어로 이뤄진 유럽공동체는 러시아를 비롯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공동 방어 전략을 펴고 있다. 물론, 유럽공동체 회원국의 힘만으로 만들어져야 옳지만, 현실은 미국이 이끌고 있는 나토를 중심으로 국가안보를 추구하고 있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이웃나라끼리 전쟁이 잦았고 중국처럼 한 나라로 통일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강력하고 믿을만한 외부 세력(미국)이 리더 역할을 해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중국의 경우는 강력해진 힘을 외부로 투사하면서 미국을 태평양 서쪽으로 후퇴시키고 아시아 지역에서 강자라는 전통적인 역할과 지위를 되찾고자 시도할 것이다. 다만, 이런 중국의 행보가 지역 안보나 질서에 위협이 가해지는 방식은 최대한 피하려고 할 것이다. 핵무장한 북한을 중국이 지원하는 것 역시 기존의 동북아시아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력한 중국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러시아와 미국을 포함해서)은 남한 위주의 통일 한국도 싫지만 북한 위주의 통일 한반도 역시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폴 케네디는 한국에 대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가 강대국이었던 적은 없으니 당연히 <강대국의 흥망>에서 우리나라가 비중있게 다뤄진 건 아니고, 작년 ebs의 '그래이트 마인즈'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비록 한국은 원치 않는 내전과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를 겪었지만 강대국들의 헤게모니가 충돌하는 한가운데에서(마치 고요한 '태풍의 눈' 처럼) 지난 반세기 동안 놀라운 경제 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인의 노력과 외부 세계의 여러 조건들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인구와 영토 및 자원 등 하드웨어를 감안할 때, 한국이 가까운 미래에 강대국의 조건을 갖출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앞으로 한국은 강대국이나 대국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현재와 같은 중견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과 지속적인 지역 안보를 추구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양자동맹보다는 다극 체제 및 국제기구를 통한 다자간 안보와 외교를 활발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반도(우리)는 늘 불안하고 긴장한 상태로 외부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피곤한 운명을 타고 난 모양이다.  

그래도 접시 위에 떠 있는 나뭇잎마냥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만사태평 나른하고 아둔한 운명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좋다. 다시 달려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유럽인가 - 세계의 중심이 된 근대 유럽 1500~1850
잭 골드스톤 지음, 조지형.김서형 옮김 / 서해문집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와 엇비슷한 2000년대 초반에 나온 경제사 책이다. 둘 다 기존의 프로테스탄트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1500~1850년 동서양 사회를 비교해서 서유럽 특히 영국 산업혁명의 원인을 밝혔다. 


1500년까지 유럽은 결코 동양보다 앞서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 및 인도 등 아시아 제국들이 훨씬 풍요로웠다. 유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발전된 도시와 장인 기술 및 인구성장 등은 양쯔강 하구로 대표되는 비옥한 토지와 땅에 부담을 덜 주는 비료 사용 및 안정된 중앙집권적 통치 제도와 활발한 역내외 교역 그리고 '근로혁명'(특히, 일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아시아인의 놀라운 성실함 덕분이었다. 




따라서 중국 농민은 토지를 경작하는 일에 많은 목축을 투입할 필요가 없었으며 어떤 토지도 휴경지로 묵혀 둘 필요가 없었다. 농업관개와 (일반적으로 돼지의) 거름은 가벼우면서도 비옥한 토양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중국 북부의 평원에서 재배한 곡식은 유럽의 것, 즉 밀, 기장, 콩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도 중국인은 토지면적당 그리고 농민 1인당 유럽인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곡식을 생산하고 더 많은 수공업자와 도시 노동자를 부양했으며 더 많고 더 큰 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다. -35쪽

더욱이 이 시기에 전반적인 기술적 리더십을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다른 기술이 다른 장소와 다른 시기에 나타나 발전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외바퀴 손수레, 운하, 운하 갑문, 자성 나침반, 거대한 지역의 정확한 지도 제작, 선미재 방향키가 달린 선박, 대양 항해 선박, 화약, 주철(무쇠), 도자기, 비단, 인쇄, 종이를 발명하거나 발전시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술에서 중국의 초기 선도적 역할, 즉 방수가 되는 선실 목재 가구와 강력한 삭구 그리고 돛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전문 기술에 요구되는 복합 기술을 도해로 이해하기 위해, 그림 22-3에서 아메리카로 항해할 때 콜럼버스가 사용한 선박과 정화 제독이 지휘한 중국 선박을 비교해 보자. 콜럼버스의 항해 80여 년 전, 정화의 함대는 북중국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해안까지 항해하고 귀국했는데, 이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에서 북아메리카까지 다녀온 항해보다 훨씬 더 먼 장거리 항해였다.

인도는 다양하고 뛰어난 질의 면직물 생산에서 전 세계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무슬림 세계는 향신료를 생산하고 황동과 목재 상감으로 물건을 제작하는 데 뛰어났으며, 질 좋은 융단과 카펫을 생산하는데 탁월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유럽에서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질 좋고 순전한 유리를 생산했으며, 잉글랜드는 다양하고 뛰어난 질의 양모 직물을 생산했고 네덜란드는 어업, 인쇄, 양조에서 뛰어났다.  -65쪽



이때,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을까? 

동서양이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전쟁은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을 다녀온 조신통신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들었던가?

당시 에도를 방문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에도는 인구 20만이 넘는 대도시로 밤에도 시가지에 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고 청결하면서도 화려하고, 사람들은 모두 잘 차려 입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서 마치 천국같다.라고 했다.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의 눈에도 분명 에도는 한양보다 더 크고 더 발전되고 더 풍요롭게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왜?" "어떻게?"라는 의문을 품는 대신 "유학도 모르는 미개인 주제에 감히!"라는 자만심만을 가졌을 뿐이다. 지도층의 권력 독점을 위해 새로운 사상이나 문물을 거부하고 기존 종교(조선의 경우엔 유교)나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사회는 혁신과 발전이 가로막혀 도태된다는 저작의 지적에 조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 




요약하자면, 1800년까지 영국과 중국 모두는 경제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경험했고 식료품과 면직물 생산에서 더 중요한 증대를 과시했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더 높은 생활수준으로 나아가는 어떤 진정한 의미의 전환기적 발전을 마련하지 못했다. 양국 사회는 생활수준과 관련해 이전 수세기 동안의 장기적 주기의 범주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기후, 인구 그리고 임금의 장기적인 상승과 하락은 생활수준의 상승과 하락을 재생산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진정한 전환기적 발전은 여전히 미래에 있었다. 경제 발전의 가속 패턴은 1800년 이후가 돼서야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처음 영국에서 시작되어 서유럽, 동아시아 그리고 나머지 세계에 확산되었다. 따라서 1800년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 농업 문명들은 동일한 수준에서 영위되고 있었다. -75쪽



20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케네스 포메란츠와 잭 골드스톤의 책들은 각각 2000년, 2003년에 출간되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워낙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막스 베버가 활동하던 20세기 초에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 대한 역사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19세기의 제국주의 사조 속에서 베버의 주장은 '식민지배와 노예무역' 등 서구인의 흑역사를 건드리지 않고도 서구의 우월함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신선함을 너머 탁월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암튼, 그 뒤 반 세기 동안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해졌고 많은 사료들이 발굴되고 연구되면서 서구의 일방적인 '자화자찬'식 주장은 그 자체로 또다른(!) 역사가 되어버렸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요 종교의 사원과 교회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들의 지도자들은 세속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이러한 상호 옹호의 합의에 대가를 지불한 사람은 일반 농민과 노동자, 귀족이 아닌 상인과 수공업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성직자, 주교, 귀족, 왕을 부양하기 위해 세금, 십일조, 수수료, 부과금을 지불하는 성스러운 의무를 짊어져야 했다. -91쪽 



'종교는 권력의 편'이었다.

종교가 혁신과 인류 발전에 이바지했을 때는 다양한 종교와 분파들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하던 다원주의와 대관용의 시대 뿐이었다. 오히려 프로테스탄트(신교도)는 가톨릭 및 영국 국교회와의 경쟁에서 밀려 신대륙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후손들이 자본가로 성장한 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에 1700년 대의 산업혁명에 대한 원인이나 이유가 될 수 없다. 



사실, 1500년에서 1700년까지 가톨릭교회는 과학 발전에 개방적이고 지지하는 입장을 종종 견지했고, 대기 압력의 존재에 대한 전환기적 발견은 두 명의 가톨릭 신자인 이탈리아의 토리첼리와 프랑스의 파스칼이 성취한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 과학혁명의 출현은 프로테스탄트적인 것이 아니라 범유럽적 창조물일 뿐 아니라 가톨릭 사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간단히 말하면, 영국이 19세기 초 세계의 지배적인 기술적 산업적 군사적 강대국으로 등장했으며 그 후 100년간 나머지 유럽 국가들이 그 뒤를 따라간 것이 사실이지만, 이 발전이 단순히 일반적인 서양 종교 혹은 심지어는 프로테스탄티즘 혹은 각별히는 칼뱅주의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산업 강대국으로서 영국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최근이며 많은 측면에서 독특하며 가톨릭교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 국가에서의 더 폭넓은 추세와 매우 동떨어진다. 지난 1000년의 거의 모든 기간 동안 , 발명, 경제 발전 그리고 글로벌 무역의 추동력은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이슬람 국가 출신의 학자, 수공업자, 대양 항해자였다.- 99쪽

분명한 것은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사회에서 다양한 종교적 견해가 공존할 때 경제 발전이 가장 잘 번창하게 된다는 점이다. 반면에 국가가 종교 사상의 가혹한 통일성을 강제할 때 경제성장은 제한되고 점차 쇠퇴하게 된다. 관용이냐 아니면 엄격한 정통 신앙이냐 양자 사이의 선택은 모든 종교적 전통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세계 역사상 경제성장 패턴을 연구하는 데 어떤 특정 종교의 성격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06쪽



대다수 서구인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신봉하는 것 못지 않게 대다수 비서구인은 '식민 지배와 노예제'을 동서양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식민 지배와 노예제는 서유럽(스페인과 포르투갈)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로마제국이나 고대 이집트 및 아시아 제국도 오랫동안 여러 곳의 식민지를 다스렸고 노예제의 역사 또한 깊다. 그리고, 강한 편이 약한 편의 잉여생산물을 무력으로 약탈하거나 불평등한 물물교환을 강요한 것 또한 인류 역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국이 주장했던 조공무역 역시 형식만 다를 뿐 강대국과 약소국이라는 관계 설정을 기본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평등하거나 대등한 교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왕친조와 삼궤구고두례를 강요함으로써 상대에서 굴욕감을 준다는 점에서 단순한 무력 시위나 공격보다 더한층 정교한 정치, 외교적 수단에 가깝다. 

교역과 약탈은 늘 동전의 양면과 같다.  




1860년대까지 증기력을 사용한 전함은 성조기나 유럽의 여러 국기를 휘날린 채 지구 곳곳을 항해했고, 철로의 네트워크는 대륙들을 가로 질러 전례 없는 속도로 상품과 사람들을 이동시켰다. 권총이나 소총이 대량생산되었으며, 새로운 디자인이 개발되면서 정확성이나 발사율 또한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동안 계속 나타났으며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통제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싼 가격에 원자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어려움에 처했다. 중국의 경제와 행정은 인구 성장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반란과 13년(1851~1864년) 동안 지속된 내전(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했다. 수천만 명이 죽었고 제국의 중앙 권력은 붕괴되었다. 일본에서 쇼군은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에 직면했고, 오스만제국의 술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에서 수세기 동안 성행했던 노예화와 교역자들 및 식민지 개척자들의 탐욕스러운 욕구 때문에 한때 강력했던 아프리카 여러 왕국은 약화되었다. 
19세기 내내 이와 같은 정반대의 추세가 성행한 결과, 유럽 국가들 (그리고 미국)은 약화된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력을 행사하거나 보다 값싼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이 권위와  통제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새로 개발된 증기선이나 전함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위협하거나 철도와 근대 무기로 아프리카를 지배하는 데 자신들의 장점을 활용한 것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서양을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한 것은 식민주의와 정복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서양의 등장과 다른 세계의 몰락이야말로 유럽 국가들이 전 지구상으로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던 요건이었다. -138~139쪽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대분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1700년까지는 동양이 서양보다 조금 나은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1800년까지도 둘의 차이는 그닥 뚜렷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1850년엔 확실히 둘의 차이는 명백하고도 분명했다. 

사실, 변화는 조금씩 천천히 일어났고 눈에 보이지 않게 쌓여가다가 1850년에 임계점에 다다르자 둘의 격차는 더욱더 벌어졌다. 양적 변화는 처음엔 산술급수적이지만 일정한 점을 통과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바뀌면서 질적 변화를 이끌게 된다. 20대엔 친구들과 연봉이 비슷하지만 30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기술습득이나 경력이 쌓이면서 소득 차이가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하지만 아직 현격하진 않다. 40~50대에 이르면 투자(특히 집)나 승진 등에 따라 이젠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 격차가 두드러지며, 60대 이후에는 서로 다른 계층에 속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그 시작은 단순하다. 그러나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17세기와 18세기에 유럽과 아시아를 통틀어 지배자들은 지방 엘리트로부터 거둔 조세를 토대로 더욱 강력해졌고, 전통 종교를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정치적 위기에 대응했다. 이 가운데 예외적이던 곳은 바로 영국인데,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더 강력해진 의회, 독특한 관습법, 종교적 다원주의와 관용은 영국을 대단히 특이한 국가로 만들었다. -188쪽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전통을 강화하고, 청과 조선은 유교라는 학문을 빙자한 교리로 사회질서를 다듬기에 급급하는 동안, 서유럽 특히 영국에선 왕과 귀족층의 권리를 제한하고 종교 대신 관습법(흔히, 말다툼할 때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딨어?'에서의 그 '법')을 택하게 된다.  성문법은 법을 만든 자(권력자)와 집행하는 자(성직자나 관료)의 권한을 높이고 보호하는 한편, 관습법은 오랜 시간 동안 해당 지역 사람들이 따르고 지켜왔다는 점에서, 관습법을 중시한다는 건 소수가 다스리는 사회가 아닌 일반 대중의 의견을 중시하고 따른다는 의미다.  법률적으로 비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묻는 배심원 제도 역시 소수에 의한 법의 독점을 막고 다중의 판단을 중시하겠다는 영국 시민 사회의 관습법 중시가 구현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 편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이익과 권한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고, 또 다른 한 편(영국)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이익과 권한을 제한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작은(?) 차이가 위대한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종교나 왕의 법에 얽매이지 않게 된 영국인들은 개개인이 단독자로서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의식과 함께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엔 주로 먹고 살 고민과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한계급들이 심심풀이(?)로 실험과 연구를 시작했음은 당연하다. 



170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발생한 것은 틀림없다. 18세기 초부터 유럽의 선진 국가들은 더 발전한 아시아 국가들의 기술이나 생산성을 따라잡기 시작했고, 결국 경제적, 군사적 독점을 위한 행로를 시작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산업혁명"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유용한 것이라는 결과로 간주하지 않고, 기술혁신의 속도가 빨라지고 새로운 동력이나 기계, 발명과 기술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물질적 생활이 향상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면, 산업혁명은 170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유럽, 특히 영국에서 발생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231쪽



이제 유럽이 어떻게 앞서게 되었는가를 확인했으니,  중동과 동양은 어떻게 뒤처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한다. 아니, 어쩌면 승자의 승전보보다는 패자의 실패담으로부터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다. 

'그 많던 제국들은 어떻게 사라져갔는가?'



점차 과학은 종교적, 철학적 신념과 혼합되기 시작했고, 이는 기존 종교 속에 융해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과학이 정치적, 종교적 권위에 억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정통 신앙을 토대로 하는 보수주의나 종교를 통해 국가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둘째, 전근대 시대의 거의 모든 과학은 수학과 자연과학으로 분리되었다. 수학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세거나(산술학), 공간의 관계들(기하학)을 살펴보는데 유용했다. 또한 이는 관측과 같은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매우 유용했다. 그리고 항해를 위해 하늘에 나타난 행성의 위치 편집이나 달력, 점성술 그리고 통계에도 유용했다. 그러나 전근대 시대의 과학적 전통ㅡ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중세 유럽인들, 아랍인들, 중국인들ㅡ은 수학이 우주의 기본 구조를 연구하는 데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학이야말로 자연과학(자연 세계에 대한 연구)이나 신학(인간과 자연 세계, 창조주의 관계를 포함하는 종교적 문제에 대한 연구)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만약 누군가 신이나 영혼의 본질을 알고 싶어하거나 인간과 신의 관계, 또는 동물의 용도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ㅡ식물이나 바위, 불, 공기, 액체, 가스, 수정 등ㅡ의 본질을 알고자 한다면, 이는 수학 방정식이 아니라 경험과 논리를 토대로 하는 추론의 문제였다. 자연과학의 과업은 사물과 그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 측정은 실제적 문제였고, 주로 관측자나 장인, 금융업자 같은 사람들이 측정하는 것이 유용했다. -265쪽

중국과 인도에서 전통은 자연의 숨겨진 힘ㅡ중국에서는 기(氣), 인도에서는 프라나(prana)ㅡ를 믿었다. 이러한 힘이야말로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중국 과학자들에게 세계는 늘 변화하는 것이었고, 변화들은 복잡한 주기를 형성하고,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작용하는 반대 세력의 복잡한 주기나 흐름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엄청난 기술과 수학의 활용 그리고 운하나 관개에서부터 천문학과 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의 관찰에도 불구하고, 중국 과학자들이 우주를 기계적인 시계 장치로 간주하거나 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 방정식을 적용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들에겐 음과 양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상황 속에서 작용하는 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는 지나침을 억제하고 전체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266쪽

요컨대, 17세기에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전통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지식이 더 이상 강화되지 않고, 대신 이성과 관찰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지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1700년이 되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접근방법이 발생했다. 영국에서 본질에 관련된 연구는 정교한 기구나 도구 그리고 공개적 증명을 토대로 하는 실험과 측정을 통해 수행되었다. 대륙에서는 실험을 개인적인 연구 영역으로 국한시키거나 오락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수학과 논리학이 과학 연구의 토대를 형성했다. 
우리는 데카르트주의가 논리적 그리고 수학적 사유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 체계를 형성했고, 이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과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가르침을 토대로 한 전반적인 지식 체계를 위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발견과 종교적 갈등의 결합은 지식에 대한 길잡이가 되면서 전통과 종교의 권위를 침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데카르트적 체계의 확산은 불가피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에서 왕립 학회의 경험주의자들은 지식 습득에서 네 번째이자 가장 낮은 형태인 일상생활에서의 실험을 통해 지식을 획득했고, 이를 새로운 것으로 변화시켰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연역론에 회의적이었다. 도구와 과학 기구를 사용한 실험을 통해 과학 지식을 쌓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으로 이전에는 한 번도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던 지식의 다섯 번째 근원이 발전했다. 다시 말해,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망원경이나 현미경, 프리즘, 진공 펌프 그리고 다른 도구를 가지고 관찰한 결과가 고대 시대나 종교, 연역론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관찰로부터 얻은 지식보다 훨씬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그리고 특히 17세기 유럽에서 이는 상당히 혁신적이고 놀랄 만한 주장이었다. -280~281쪽



한마디로, 데카르트의 대륙철학은 '제논의 역설'을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다. '제논의 역설'이란 화살은 활시위와 과녁 사이의 중간 지점을 반드시 통과하게 되므로 영원히 과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건데, 현실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관찰과 실험을 중시했던 베이컨식의 영국 경험주의가 옳았던 것이다.     




1850년 이후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서양은 앞서가고 동양은 추격하는 형세는 바뀌지 않았다. 물론, 이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포기한 국가와 지역이 생긴 것처럼 새롭게 경쟁에 진입한 국가와 지역도 있었는데, 천만다행이도 우리나라는 후자에 속한다. 한국은 레이스에 새롭게 등장해 맹추격을 해서 다크호스로 부상했지만 여전히 선진국과의 격차는 크며 우리의 속도보다 우리를 뒤따라오는 후발 주자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맹추격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는 과거보다 국격이 높아졌다고 기뻐하며 소위 '국뽕'에 취해 있기엔 지속적이고도 항구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내재적 역량, 즉 기초체력이 부족하다. 선발진에 진입할지 아니면 중진이나 후진 그룹으로 뒤처질지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다음과 같은 성장을 가로 막는 장애물들을 스스로 쌓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부존자원의 판매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저개발의 수렁에 떨어질 수 있다. (...)  아르헨티나는 양모와 쇠고기를 판매했고, 쿠바는 설탕을 팔았으며 잠비아는 구리를, 나이지리아와 멕시코는 석유를, 브라질과 말레이시아는 고무를 판매했다. 이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다. 그들의 상품을 고가로 판매할 수 있는 한, 그 나라의 모든 것은 잘 되어 나간다. 그러나 산업 세계가 슬럼프에 빠지고 수요가 떨어지거나 다른 생산국이 시장에 들어오거나 인공적인 대용품이 발견된다면, 그 상품의 시장은 붕괴하게 된다.  (...) 설탕 혹은 커피 혹은 구리 혹은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일은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 혹은 기술의 큰 진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더욱이 가치와 수익에서의 실질 이익은 이들 상품을 생산한 국가에게 축적되지 않고 이들 상품을 사탕 혹은 화려한 커피 음료 혹은 구리선 혹은 다이아몬드 보석으로 전화시킨 가공업자에게 축적된다. 가장 큰 금융 이익은 원재료를 생산하는 일에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생산품을 가공하고 창출하는 일에서 나온다. 이들 상품을 판매해 이득을 보는 특혜의 엘리트들이 있는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미숙련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엘리트들은 광범위한 기술교육을 일반인들에게 제공하기를 원치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위협할 수 있는 권력 혹은 후원 세력의 원천이 될 수도 있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산업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장애물은 잘못된 종류의 교육에 대한 투자다. 서양의 성공을 관찰한 많은 국가는 서양의 성공이 광범위한 교육, 사상의 자유, 장인의 기술 교육 그리고 과학적으로 숙련된 기술자 생산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대학 교육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수많은 인문학 전공자와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는 근대적 경제를 창출하는 공학적 기업적 능력을 육성하지 않은 채, 법학, 행정학, 사회과학, 예술, 인문학, 의학, 회계학, 심지어 신학의 전통적인 기술로 대학생을 훈련시키는 데 수백만 달러를 낭비했다. 그 결과, 과도하게 교육받은 남녀의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경제성장보다 사회불안에 빠져 들어갔다. 

세 번째 장애물은 새로운 산업을 창줄할 수 있는 훈련, 아이디어 그리고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의 부재다. 공산주의 국가(쿠바처럼)든 비공산주의 국가(인도처럼)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근대적 교육제도를 발전시키고 수천 명의 뛰어난 과학자와 재능있는 공학기술자를 훈련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거나 그들의 아이디어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생산 할당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 소유의 공장에서 일을 하도록 배속되었다. 유능한 과학자들과 공학기술자들은 다른 지역에서 개발된 모델을 수입하거나 모방함으로써 종종 생산 목표를 충족시키고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제품과 생산공정 창출에 기반을 둔 자기 자신의 회사와 기업을 출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공학기술자와 산업가들에게 부여하지 않은 채, 사회주의 국가들은 글로벌 경제 선도 국가들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다. 

빈곤으로 치닫는 네 번째 요소는 폐쇄적인 경제의 창출이다. 미국, 영국, 일본을 포함한 많은 성공적인 국가는 특정 산업을 보호하거나 혹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특정 회사나 산업을 도와주기 위해 시장 제한 혹은 관세정책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목적은 항상 무역에서 이익을 증대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무역을 전적으로 폐쇄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많은 개발도상국은 서양과 나머지 비서양 국가들 사이의 격차에 반응해 서양의 제조품에 문을 닫고 그 대신 자신들의 공산 제품을 생산한다. 처음 이런 정책은 좋은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경제를 닫아버린 채, 이들 국가들은 혁신을 이뤄 경쟁할 수 있는 공학기술자들에게 주어쟈야 할 기회와 동기도 없애 버렸다. 사회주의 국가처럼, 이들은 시대에 뒤진 생산기술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이들 사회의 경제가 경쟁에 개방되자, 비로소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빈곤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은, 오늘날의 세계에는 좀더 드물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역사 속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났던 것으로, 종교의 정통 신앙이 혁신을 질식시키거나 종교 교육이 과학기술 교육을 지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존경받을 만한 성취로 간주되기보다는 죄악으로 간주되거나 혹은 정통 신앙의 연구가 위신과 보상에서 현대과학 연구보다 훨씬 더 존경스럽다고 간주되는 곳에서는, 혁신은 일상적인 경제생활의 토대가 전혀 되지 않는다. -306~308쪽 중  




이상의 다섯 가지 장애물 중,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두 번째 장애물이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 칸막이처럼 들어차 소통과 혁신과 개방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불필요한 인문계 고등 교육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이고 그 대신 초등, 중등 교육과 기술 교육에 치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 유럽인가?' 라는 질문을 '왜 우리는 못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본다면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한다면 반드시 일독해야 할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짧고 굵게 읽는 러시아 역사
마크 갈레오티 지음, 이상원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인 푸틴 덕분에(?) '러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역사책은 너무 두꺼운 반면 실제 러시아 역사는 천년 밖에 되지 않아 놀랐다.

그나마도 북방 민족이 남하하여 우크라이나 키예프(키이우)을 중심으로 들어선 '루시'가 그 시초란다.




류리크공이 라도가 호숫가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린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그림은 고전으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12세기 당시를 기록한 유일한 문헌인 <원초연대기>는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원문에서는 이들을 '바랑기아인들'이라고 표기하고 러시아어로는 '바랴그'라는 명칭이 있다. 이 책에서는 우리에게 더 익숙한 바이킹으로 통일한다-옮긴이)을 몰아내기 위해 슬라브 민족들이 수차례 전투를 벌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추드, 메리아, 라디미크, 크리비크 등 무수히 많은 토착 부족들의 자치 시도는 또 다른 전쟁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법과 서열, 영토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이들은 바이킹에게 가서 통치자를 청했다. "저희 땅은 드넓고 비옥합니다만 질서가 없습니다. 와서 우리를 통치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류리크(862?~879)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류리크 왕조는 17세기까지 러시아를 지배했다. 바스네초프의 그림을 보면 용 머리가 특징적인 바이킹 배를 타고 온 류리크가 형제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라도가 호숫가에 내려선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손에 든 도끼는 그가 전사공후라는 것을 강조한다. 새로 지배를 받게 된 슬라브족 대표단이 예의를 갖추고 이들을 환영한다.

이 그림은 바이킹의 뾰족한 투구며 슬라브족의 옷에 놓인 전통적 자수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충실하게 당시를 재현한다. 새로운 지배자에게 새로운 신민들이 공물을 바치는 장면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명백한, 매우 명백한 거짓이기도 하다. -20~21쪽




당황스러웠다.

첫 페이지부터 '거짓의 역사'라고 선언하고 시작하는 역사책이라니....

시차만 11시간이 나고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거대한 영토를 보유한 러시아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도 다시 없을 것 같다.


'강대국인가?' 하면 국제 무대에서 늘 조연이고, '선진공업국인가?' 하면 무기를 제외하곤 'Made in Russia'는 눈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땅만 큰 대국인가?' 하면 세계 최초로 달착륙에 성공했고, '문명의 후발주자인가?'하면, 톨스토이와 <백조의 호수>의 나라다. 그만큼 러시아는 땅크기만큼이나 다면적일 뿐만 아니라 다층적이기도 하다.

거칠고 야성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정이 넘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이들의 역사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류리크는 도레스타드의 로릭, 즉 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경건왕에게 미움을 사서 860년에 추방된 덴마크의 야심가로 추정된다. 류리크의 도착 시기(860~862)가 서구 연대기에서 그가 사라진 시기와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스칸디나비아의 침략자 겸 상인들은 오래전부터 슬라브 땅을 알고 있었다. (...) 고향을 떠나야 했던 도레스타드의 로릭이 슬라브 지역을 새로운 공국으로 삼으려 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 가능하다. 그는 우선 라도가에 성채를 지어 정착했고 내륙의 교역 거점을 차지해 홀름가르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이 바로 고대 러시아의 중심지 중 하나인 노브고로드('새로운 도시'라는 뜻)가 된다. 하지만 그가 슬라브인들의 초청을 받았다는 증거는 나온 적 없다. 류리크의 여정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한 큰 흐름의 일부일 뿐이다. -22쪽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할 즈음 아스콜드와 디르라는 바이킹 모험가 두 사람이 부하들을 이끌고 남서쪽 슬라브 도시인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는 야심한 계획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보다 반세기쯤 앞서 남쪽의 흑해변을 약탈한 스칸디나비아 출신 모험가들도 이미 시도했던 일이었다. 슬라브인들은 이들 바이킹 정복자들을 '루시'라 불렀고(스웨덴 인을 뜻하는 핀란드어 단어 '루오치(Ruotsi)'에서 나온 것 같다), 그래서 루시의 땅이 탄생했다. -24쪽




지도를 찾아보니, 노브고로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중간 쯤에 위치해 있었고, 키예프는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 유럽식 도시로 건설한 새로운 도시였고, 모스크바는 사냥꾼들의 움막 몇 채가 모여있던 작은 촌에 불과했으나 13세기 몽골 지배기에 킵차크 한국의 중심지(사라이)로 공물을 보내는 중계지역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그후 제국의 수도로 성장하게 된다.



러시아 민담에 계속 등장하는 것이 삼형제 이야기다. 형제들은 레크, 체크, 루스인데 폴란드(레히트인들이라고도 불렸다), 체코, 루시라는 슬라브 세 민족의 시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형제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민담에서 한 명은 강하고 공정한 이로, 또 다른 한 명은 영리한 모험가로, 그리고 막내는 아주 나쁜 놈이나 신심 깊은 바보로 등장한다.

이와 연결시켜 보자. 옛날 옛적에 세 도시가 있었다. 이 세 도시는 러시아가 택할 수 있었던 각기 다른 세 가지 길을 대표했다. 키예프는 가장 위대한 도시인 동시에 가장 전통적인 봉건적 중심지였다. 그 권력은 가문의 혈통을 통해, 그리고 키예프가 루시의 심장이자 영혼이라는 믿음을 통해 표현되었다. (...) 노브고로드는 북쪽에 위치한 교역 동시로 발트해의 부유한 국제항구들에까지 영향력을 떨쳤다. 돈 많은 시민 대표들, 그리고 과두제 민주주의가 큰 힘을 발휘했다. (...)

키에프와 노브고로드의 전성기 시절 셋째이자 막내인 모스크바는 도시라 부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모스크바에 대한 첫 기록은 유리 돌고루키('긴 팔의 유리'라는 뜻)가 키예프 대공이 되기 전인 1147년, 거기서 한차례 모임을 주재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이 몰려오자 키예프는 파괴되고 노브고로드는 몰락하면서 모스크바가 번성기를 맞이했다. 루시 전체의 주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전통, 몽골 관행, 모스크바 특유의 실용주의가 결합된 정치 문화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44~51쪽 중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다'라는 푸틴의 주장은 맞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동시에 러시아의 시조는 키예프, 즉 우크라이나고 우크라이나는 바이킹에 의해 세워졌다는 말과 이어진다. 러시아만의 전통을 내세우며 러시아 민족주의를 내걸고 있는 푸틴에게, '러시아의 전통이 무엇인가?' '과연 독립적인 러시아의 전통이라는 게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블라디미르의 케르소네소스 정복은 러시아의 2014년 크림합병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크림반도를 러시아 정교의 품에 다시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바스 지역에서 전투가 한창이던 와중, 모스크바와 키예프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전쟁이 벌어졌다. 블라디미르 대공을 어느 쪽 선조로 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키예프 대공이라 한다면 오늘날 러시아의 정신적 조상이 우크라이나인이 되어 버린다. 다른 한편 류리크 왕가 혈통을 강조한다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절반만 피를 나눈 관계가 될 것이었다. 이처럼 고대 역사, 민족 신화, 현대 전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밀접할 수 있다. 루시의 땅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44쪽




안타깝게도 러시아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체성 자체가 흐릿해지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역사 위에 역사를 덧씌워 재생산해냈다. 하지만,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은 과거일수록 끈질기에 오래 살아 남는다. 역사란 바로 그런 흔적의 기록이다.



이 짧디 짧은 책을 읽으면서 마음은 여러 차례 답답해졌다. 마치 '아비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분명 유럽을 기원으로 뒀고 유럽의 일원임을 내심 바라지만 유럽을 적으로 삼고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날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는 민족주의국가 러시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진심은 언제나 유럽 속에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걸 감안한다면 러시아의 타자화는 서양에 의한 동양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얼마나 단단하게 고착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른 바 '몽골 멍에' 시기는 러시아 스스로 상상하는, 또한 많은 외부인들이 바라보는 러시아 모습의 핵심을 이룬다. 몽골의 압제가 러시아를 유럽과 단절시켜 당시 진행되던 르네상스와 초기 종교개혁에서 소외되었다고들 한다. 당대의 문화, 사회, 경제, 종교적 변화를 경험하는 대신 불쌍한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노예라는 피투성이 늪'(칼 마르크스의 표현이다)에 빠져 허우적대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적'통치 형태, 즉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최상층이 극단적인 잔혹함을 무기로 하위층에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무자비한 형태를 내면화했다. 몽골 제국과 가장 긴밀히 연결되었던 모스크바는 가장 열정적으로 그 정치 문화를 수용했고 러시아 땅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같은 방식을 적용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에 부합하나 전체 그림에서는 일부분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몽골의 정복이 러시아를 외부와 차단시키지는 않았다. 상인과 사절단, 망명객과 선교사들은 여전히 오갔다. 노브고로드는 발트해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했고 모스크바 공후들은 콘스탄티노플, 리투아니아 양쪽과 정략 결혼을 했다. 러시아가 고립되었다면 이는 울창한 산림을 동서로 통과하는 강의 수로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가 상대적으로 빈곤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몽골 지배를 벗어난 후 러시아에 르네상스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도시들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농작물의 생산 증대, 그리고 상인 계층 및 도시 인구의 급성장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몽골 침략은 분명 러시아의 도시화나 도시 중심의 장인 경제를 후퇴시켰다. 공물 부담이 커지면서 교역이나 농경 확대도 힘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러시아의 깊은 산중에서 르네상스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65~66쪽




13세기 몽골의 유럽 침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듣도 보도 못한 말발굽들이 돌풍처럼 나타나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을 멸절시키더니 어느날 돌연히 사라져버렸다.

정확한 공포의 실체를 알지 못했기에 유럽은 오랫동안 심지어 현재까지도 몽골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후유증에서 동반된 신경증은 유럽의 동쪽 끝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러시아로 향했다.


어찌됐든 러시아는 비잔티제국 멸망 후 제3의 로마로 자처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유럽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 속에는 슬라브, 바이킹, 타타르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북방의 소수민족의 전통까지 녹아들어가 있다. 러시아는 이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고 존중받아 마땅하며 스스로 자랑스러워할만 하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유럽의 근대산업화에 러시아가 뒤처지면서 이에 따른 질투와 선망이 교차하면서 유럽의 대 아시아 신경증은 이제 러시아 자신에 전염되어 종종 히스테리를 동반한 고질병이 되고 만다.



오스트리아 외교관 지그문트 폰 헤르베르슈타인이 이반 4세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대귀족들이 "그 찬란한 위업에 압도되거나 공포에 질려서 복종했다"고 나온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았을 테지만 한 개인의 권력이 공포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 권력은 유지하기 어렵다. 이반 3세와 4세는 신이 권리를 부여한 전제군주정의 이념적, 제도적, 더 나아가 미학적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농민에서 대귀족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이 이런 통치자를 혼란과 굶주림, 외적 침략에 대한 대안으로 감사히 받아들이기까지는 '동란의 시대'라는 총체적 위기가 필요했다.

결국 1613년 젬스키 소보르(전국회의)가 16세의 미하일 로마노프에게 통치권을 주었다. 차르를 원하고 필요로 한 끝에 마침내 차르를 만들어낸 것이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키예프 루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에 강력한 총주교 필라레트의 아들이라는 점에 이르기까지 손색 없는 인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진실은 지친 러시아가 안정된 미래를 원했다는 데 있었고 미하일은 바로 그 안정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645년까지 통치했으며 그의 왕조는 1917년까지 지속된다. -92쪽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옐친과 푸틴도 모두 위와 같은 '동란의 시대'에 등장했던 어린 미하일처럼 러시아인들에게 받아들여진 통치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집권으로 혼란은 가라앉았지만 그만큼 사회적 역동성과 발전 가능성은 사라졌다.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비애는 바로 이와같은 양극단을 역사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하는 건 아닐까.


러시아는 유럽을 향한 애정과 질투를 멈춰본 적이 없다.

표트르 대제는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염세를 매기겠다고 엄포하면서까지 유럽을 따라했지만 전근대적인 농노제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예카테리나2세는 독일계로 러시아 왕가에 시집을 와 남편 암살 후 왕위에 올랐던 인물로, 통치 자체보다는 볼테르 등 유럽의 지식인과 나눈 서신 등으로 유명하다. 비록 여왕은 충분히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유럽혈통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통치로 러시아가 근대화되거나 유럽을 따라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러시아 역사는 침략과 전쟁의 역사로 이어졌다. 피해는 엄청났지만 승리로 끝나는 이상한 희비극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러시아인들의 정신 세계 또한 분열되었다.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도, 영광의 역사 위에 새로운 역사를 쌓아올릴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폴레옹과 싸워 거둔 승리는 러시아 체제의 근본적 유효성을 중명하는 편리한 신화로 자리 잡았다. 보로지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프랑스는 승리할 자격이 충분함을 보인 반면 러시아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였다"라고 썼다. 독이 든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체제는 위험에 빠지는 법이다.

그 체제의 가장 젊고 총명한 이들이 정반대의 결론을 내는 상황이라면 두 배로 더 위험하다. 예카테리나 시대 이후 프랑스어, 프랑스 문학과 사상은 교양의 핵심이었다. 교육받은 엘리트 출신 젊은 장교들은 혁명 시대의 사상에 열광했고 프랑스에서 직접 이를 경험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 1세 통치 초기에는 러시아에도 곧 변화가 찾아와 보수적 반동이 척결되리라는 희망이 가득했다. 질서정연한 표면 아래에서 비밀 결사체, 급진 정치세력, 모반 세력이 활발히 움직였고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이들도, 곧장 공화제로 가야 한다는 이들도 나왔다. 1820년대가 되자 무장 봉기만이 변화를 일으킬 유일한 희망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심지어 1825년 12월로 거사 날짜까지 잡혔다. 이 때 신은 알렉산드르 1세에게 죽음이라는 자비를 베풀었다. 예정된 봉기 한 달 전에 티푸스로 사망한 것이다. -152쪽




근대를 향해 달려가던 유럽은 내부 모순으로 구체제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는데, 이때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한다. 대포와 함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의 내전을 정리해주겠답시고 갑옷을 입고 창을 둔 중세 기사가 등장한 형국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러시아는 풍차를 보고 달려드는 돈키호테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에 걸쳐 성공적인 전사-차르였다. 그는 러시아군에 열정과 시간, 그리고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다. 전체 인구가 6~7천만 명인 가운데 군 규모는 백만 명에 육박했다. 하지만 외양 꾸미기를 진짜 전투 능력 효율화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이 곧 드러났다. 알렉산드르 1세가 그랬듯 니콜라이 1세도 전 세계의 전통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책무를 느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동료 군주들이 혁명의 불씨를 짓밟아 끌 수 있도록 도와주러 달려가는 '유럽의 헌병'으로 불리게 되었다. 1831년에는 폴란드 반란을 진압했다. 러시아가 폴란드인들의 헌법적 권리를 짓밟은 탓에 일어난 반란이었다. 한때 자기 의회까지 갖춘 왕국이던 폴란드가 임명된 러시아 총독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격하되어 버렸던 것이다. 1848년, 유럽 각지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최악의 흉작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콜레라가 유행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과거 질서 수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1846년, 오스트리아를 도와 크라코프 자유 도시 봉기를 진압한 니콜라이 1세는 1848년에 몰다비아 민족 운동을 분쇄하고, 1849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러시아 군을 보내 헝가리 혁명을 지지했다.

다시 한 번 쌍두 독수리는 양쪽을 바라보았다. 니콜라이는 신의 뜻에 거스르는 불법적 자유주의로부터 유럽을 구해내는 동시에 유럽 사상으로부터 러시아을 보호하고자 했다. 서구 과학 기술의 발전상을 알고 있었으므로 유용한 것들은 도입하고자 했지만 그 유용한 것을 낳은 사회적, 정치적, 법적 맥락은 외면했다. 투자 자본을 만들 상인 계층이 번성하지 못한 상황, 대학과 교육계에서 자유로운 토론으로 아이디어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혁신가와 회의론자가 새로이 등장할 사회적 이동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영원히 뒤처진 채 남들의 발명품을 도입하고 적응하려 애써야 할 형편이었다. -157~158쪽




러시아의 역사는 최소 500년 뒤늦게 시작되었다. 이건 아마도 지리적으로 외지고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지역간 교류와 인구증가가 미흡했고 곡물생산도 뒤떨어져서 국가의 기틀이 뒤늦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은 러시아인들은 기질적으로는 유럽인에 비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물론, 신체적으로도 부족하긴 커녕 우월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어울릴 만한 국가 체제는 갖추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전히 후진적이었다. 또래 집단에 체구만 큰 미숙한 아이가 한 명 있는 셈이다. 뭔가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바로 이때 한 인물이 나타난다.



1917년에 권력을 잡은 인물은 '실용주의자 레닌'이었다. 그는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성숙한 거대한 노동계급을 갖추지 못했고, 아직 사회주의를 건설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준비 안 된 나라에 사회주의를 억지로 도입했다가는 보수적인 성향에 혁명 에너지만 넘치는 정권을 낳는 역효과가 나타난다고 경고했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이 경고가 옳다는 것은 스탈린이 증명했다.) 레닌은 기회를 포착했고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권력 획득을 정당화했다. 어차피 세계 혁명이 곧 일어날 테니 모든 일이 순조롭게 귀결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182쪽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앞의 몇 권의 책에서 차고 넘치도록 읽고 적었으므로 여기서 또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레닌의 희망은 희망으로 그쳤고 소비에트민주공화국연방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체제로 돌아선다. 일당독재를 넘어 일인독재는 2차세계대전(러시아식으론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의 승리로 면죄부를 받는다. 또다시 승리는 러시아 편이었고, '절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은 공인되었고, 이런 뜻밖의 전쟁과 승리의 역사가 오늘날 러시아인에게 어떤 유전인자를 물려줬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레닌 사후 러시아는 국가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해 빠른 경제성장에 올인했고 '또다시' 성공한다. 이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성공이었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르시초프와 브레즈네프까지 30여 년 동안 러시아는 마치 스스로 이룬 성취가 외부 세계로부터 오염되는 걸 막기라도 하려는 듯 스스로 크렘린이라는 요새에 갇혔다.


자체적인 봉쇄와 고립이 성공적으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국제 상황이라는 운도 따랐다. 1970년 대 중동 위기로 러시아의 천연가스 가격이 고공 행진을 하면서 국민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경제는 성장을 멈췄지만 등 따뜻하고 배부른 국민들을 러시아 관영TV 앞으로 끌어모으기는 쉬웠다.

하지만 이런 가식적인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러시아의 고질병이 도진 것이다. 또다시 경찰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면서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개입한 게 화근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등은 전세계의 이목이 순식간에 소련에 향하도록 만들었음과 동시에 견고했던 크렘린이라는 요새에 수많은 금이 가있다는 것도 노출시켰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좀더 현대적인 나라로 만들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개혁 개방이 필요했는데, 개혁 개방은 오히려 그동안 감춰뒀던 러시아라는 국가의 단점들을 낱낱이 공개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고, 결국 소비에트연방은 해체된다.



1990년대는 '제2의 동란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고프고 지친 인민들을 이끌어줄 새로운 지도자, 모욕받은 러시아인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워줄 강력한 차르가 또다시 필요한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혁명이 필요한 순간에 레닌이 있었듯, 바로 이때 적임자가 나타난다.



물론 푸틴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것은 훨씬 더 많다. 때로 지나치게 남성성을 드러내는 성향에 대해, 반대 세력을 극단적으로 (더 나아가 치명적으로) 억누르는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너그럽고 심지어는 조력하기까지 하는 이중성에 대해, 네 번째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24년 이후 또 다른 집권 가능성을 모색할지, 은퇴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말이다. 러시아의 남다른 역사에 남겨진 큰 흔적으로 볼 때 푸틴은 차르나 서기장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당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는 의문도 가능하다. 물론 국가를 안정시키고 세계 무대에서의 적대적인 역할, 더 나아가 심통 부리는 역할을 되살렸다는 면에서 그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면서도 이반 뇌제나 (그보다 한층 더했던) 스탈린처럼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았고 표트르 대제처럼 실제 모습보다 과장되지 않았다. 레닌이나 안드로포프처럼 냉정한 지성을 지니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여제나 드미트릴 돈스코이처럼 예민한 정치 본능을 갖지도 않았다. 이는 푸틴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에 세우려는 것이다. 그가 러시아 역사를 새로 만들고자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승리를 극대화하고 비극은 최소화하는 공식판 역사를 초중등교과서와 대학 강좌들은 점점 더 수용하게 될 것이다. 스탈린은 꼭 필요했던 산업화를 이룬 전시의 지도자가 되고 굴라크 이야기는 밀려나게 될 것이다. 푸틴은 이 새로운 공식 역사가 "내부 모순이나 이중 해석의 여지를 없애야"한다고 요구했다. 진정한 역사란 그처럼 말끔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푸틴이 러시아의 이미지와 역사 기록을 통제하려 한 첫 번째 인물은 아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도 말 잘 듣는 연대기 기록가들을 두었고, 예카테리나 여제는 유럽에 비친 러시아의 모습을 신중하게 관리했으며 알렉산드르 3세 치세 때의 '관제 민족주의' 열풍은 이의를 제기하는 골칫거리 학자들이 입 다물고 따르도록 만드는 조치를 동반했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스탈린이 편집해 1938년에 출판한 <모든 연합 공산당(볼셰비키)의 역사: 속성과정>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를 뒤바꾸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후 20년에 걸쳐 67개 언어로 4백만 부 넘게 인쇄 배포된 이 책은 아마 성경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읽힌 책일 것이다. -220쪽





과거를 꾸미고 가꾸는 건 비난 권력자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개인도 지나간 과거는 예쁘게 미하시켜 기억한다.

그리고 러시아만 역사를 치장하고 왜곡한 것도 아니다. 오늘날 강대국일수록 악취나는 과거를 갖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건 굳이 여러 말이 필요없다. 그러나 똑같은 행동이지만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 있고, 그 기준은 결국 국가(조국) 내부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얼마나 유익한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미화하고 왜곡했지만 그 나라가 특히 잘못된 역사를 통해 인류 전체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했다면 과오는 용서받을 수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코티드부아르와 니제르를 방문해서 과거 식민통치와 노예제에 대해 사과했을 때 노예제는 아프리카인들 스스로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로 사과를 받아주고 잘못된 과거를 스스로 인정했던 건 인상적이다. 노예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이 서로 싸우고 전투에서 진 부족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과거를 지배한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다.

미래를 위해 역사를 왜곡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현재를 지배하기 위해 과거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왜곡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일수록 미래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미래는 과거를 왜곡하는 현재의 야만까지도 잊지 않고 새긴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 버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 H. 카 러시아 혁명 - 1917-1929
에드워드 H. 카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데아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란 무엇인가>로 너무나 유명한 E.H. 카는 역사학자라기보다는 외교관으로 오랜 기간 일을 했다.

그를 두고, 일본의 역사가인 가토 요고는 '이상한 역사가'라고 했고, <코뮤니스트>의 저자는 '포스트19세기의 리버럴리스트에서 유사코뮤니스트로 변신했다'고 했다.


내가 E.H. 카에 다시 관심을 갖고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내눈에 비친 E.H. 카는 이상하지도 유사코뮤니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 담당 외교팀에서 근무하면서 러시아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퇴직 후 1944년부터 1977년까지 30년여 년 동안 기념비적 저서인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를 썼다. 이 책은 열네 권짜리로 일반인이 읽기엔 너무 방대한 양이기 때문에 30분의 1로 요약한 책이 바로 <러시아 혁명: 1917-1929>다. 300쪽도 되지 않는 얇은 책이지만 저자의 바람과는 달리 일반인이 읽기엔 쉽지 않다.


일단, 무엇보다도 1991년 소련이 해체된 후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진 게 주원인인 것 같다. 암튼, 이 책은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들어서고 같은 해 10월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 러시아가 어떻게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게 되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은 혼합된 성격을 띠었다. 이 혁명은 독단적이고 낡아빠진 전제정에 맞선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와 입헌주의자의 반란이었다. 그것은 '피의 일요일'이라는 잔혹한 학살에 의해 점화되어 최초의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대표소비에트(노동자대표평의회) 선출로 이어진 노동자의 반란이었다.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조정되지 않은, 종종 대단히 가혹하고 폭력적인 광범한 농민 반란이었다. 이 세 개의 실은 결코 하나로 엮이지 않았고, 혁명은 몇 가지 비현실적인 헌법상의 양보를 얻은 채 쉽게 진압됐다. 1917년 2월 혁명에서도 동일한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이번에는 전쟁에 따른 피로와 전쟁 수행에 대한 광범한 불만 때문에 이 요인들이 더욱 강화되고 두드러졌다. 차르가 물러나지 않는 한, 반란의 물결을 막을 길은 없었다. 전제정은 의회 두마의 권위에 바탕을 두는 민주적 임시정부 선포로 대체됐다. 하지만 혁명의 혼합된 성격은 곧바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났다. 임시정부와 나란히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ㅡ수도는 1914년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ㅡ가 1905년의 선례에 따라 재건됐다. -15쪽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로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온 러시아는 백군과의 내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트로츠키의 주도로 붉은 군대(적군)가 만들어지는데, 트로츠키는 이때 차르 시대의 훈련받은 장교들을 대거 받아들인다. 적군이 백군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구체제가 쌓아놓은 탄탄한 군대조직이었던 셈이다. 적폐 세력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트로츠키는 레닌보다 현실적이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두 개의 주요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에는 중앙집중적인 통제와 관리, 소규모 생산 단위의 대규모 단위로의 대체, 통일된 계획 조처 등 경제적 권한과 권력의 집중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상업적 금전적 형태의 분배로부터 이탈, 무상이나 고정 가격의 기본 재화와 서비스 공급 도입, 배급, 현물 지급, 가정된 시장이 아닌 직접 사용을 위한 생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요소 사이에 아주 뚜렷한 구분선을 그을 수 있었다. 집적과 집중 과정은 비록 전시공산주의라는 속성 재배 온실에서 지나치게 번성했지만, 혁명의 첫 번째 시기와 유럽 전쟁 중에 이미 작동하고 있었던 과정의 연속이었다.

(...)

집적과 집중 정책은 산업에 거의 배타적으로 적용됐고, 이 정책을 농업에도 적용하려는 시도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 (...) 화폐에서 이탈하고 '자연' 경제로 대체하는 정책은 사전에 구상된 어떤 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의 후진적인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나온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프티부르주아의 열망을 품은 농민의 반봉건주의 혁명과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부르주아 반자본주의 혁명을 결합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도시와 농촌의 갈등에 대처하려는 시도가 갖는 근본적인 난점의 표현이었다. 이 정책은 결국 전시공산주의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그것을 파괴한 모순이었다. -54~55쪽 중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끝내자 식량 위기가 찾아왔다. 자급자족을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었던 농촌에서 잉여 생산물을 도시로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농민의 희생을 강요한 게 원인이었다. 이에 대한 레닌의 처방은 신경제정책(NEP)이었다. 즉, 농민이 잉영 생산물을 자율적으로 암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자, 이들이 필요로 하는 소비재를 만드는 공업과 상업도 덩달아 발전했다. 한마디로, 신경제는 레닌이 공산주의에서 한 발 물러난 타협의 소산이자 일정 부분 구체제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다.




신경제정책은 농민을 재난에서 구해 준 반면, 산업과 노동시장을 혼돈 직전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신경제정책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착취"의 약자라고 선언하며 '노동자그룹'을 자처한 당내의 한 지하 반대파 그룹은 4월 당대회에서 비난을 받았다. 신경제정책이 농민에 대한 양보 정책이라고 가볍게 설명됐을 때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은 이 양보의 대가를 누가 치르는가 하는 점이었다. 혁명의 영웅적 기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전과 산업 혼란의 영향 속에서 분산과 해체, 극적인 감소를 겪었다. 산업 노동자는 이미 신경제정책의 의붓자식이 됐다. -88쪽




레닌이 주도한 신경제정책은 농촌에 이익을 가져다주면서 식량 부족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했지만 이에 따른 대가는 산업화의 부진과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이었다. 계속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트로츠키에 대한 반대 기류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었다. 트로츠키는 백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레닌과는 달리 농촌의 잉여생산물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비록 과거 반대파(멘세비키)였던 전력과 노동의 군사화를 주창했기 때문에 노동조합 진영에서 의심을 사고 있었지만 트로츠키만큼 당시 러시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명가도 전무했다. 그러나 현실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이 연합해서 反트로츠키 대열을 주도하면서 트로츠키는 서서히 고립되어갔다.




카메네프는 인격의 힘보다는 지성이 더 많았다. 허약하고 허영심과 야심이 많은 지노비예프는 빈 왕좌를 차지하려는 열망이 지나칠 정도로 충만했다. 그는 부재한 지도자의 권위에 지나칠 정도로 굴종하는 언사로 당대회를 주재하고 발언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레닌의 지혜를 해설하는 권위자인 양 행세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겸손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기 몫으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으면서 레닌을 '스승'이라고 거듭 칭했다. 레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연구해서 바르게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조직에 관해 말할 때면 관료제에 대한 레닌의 비난을 되풀이하면서, 이런 가시 돋힌 말이 대부분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위선적이게도 무시했다. 민족 문제에 관한 보고에서 스탈린은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단호하게 지지했으며, 자신에게 가해진 '조급하다'는 비난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101쪽




레닌이 말년에 스탈린의 권력욕과 교활함을 꿰뚫어보고 멀리하려 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스탈린은 소수민족인 그루지아(조지아) 출신으로 심지어 슬라브족도 아니었다. 全세계 공산화를 지향했기에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던 다른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스탈린은 민족주의 색체가 내면화되어 있었고, 그의 이런 성향은 향후 소비에트가 국가주의와 일당독재로 기우는 계기가 되었다.



제국주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많은 식민 지역에서는 '자본주의=제국주의, 공산주의=민족독립'이라는 등식이 손쉽게 성립되었고, 이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처음부터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에 의한 반제국주의 혁명에는 동의했지만 그 뒤에 일어나야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반자본주의 혁명은 애초 시도할 마음 자체가 없었다.




1921년 창건된 중국 공산당은 당시 당원이 1000명 남짓으로 주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이었다. 보로딘이 도착하기 전에, 명백히 코민테른의 선동에 따라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국민당에도 가입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분명, 공산당원 다수가 이중으로 노동당원 자격도 갖고 있던 영국을 본보기로 삼았다. 입당 조치의 의도는 규율 있고 헌신적인 집단이 더 크고 느슨한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자극제가 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조정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쑨원의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의 불일치를 은폐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 혁명에 종속되는 한 어려운 일은 없었다. 보로딘이 국민당 강령에 지주의 토지 몰수를 포함시키라고 재촉하고 나서야 쑨원은 완고하게 저항했고, 결국 보로딘은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150쪽


위기는 국민당 자체의 분열을 통해 발생했다. 국민당 좌파를 대변하고 보로딘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우한 정부는 민족 혁명에 대한 지지를 사회혁명의 목표에 대한 말뿐인 동의와 결합했다. 우한의 남쪽에 있는 후한 성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했는데, 이때가 마오쩌둥이 처음으로 농민의 옹호자로 이름을 날린 순간이었다. 난창에서는 장제스와 그의 장군들이 우파로 급격히 변신하면서 자신의 민족주의적 야심에 사사건건 끼어드는, 다루기 힘든 농민과 노동자의 요구와 공산당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감을 표현했다. 영국 정부의 바뀐 태도도 이런 상황 전개를 부추겼다. -155쪽




1920년대 초, 내전이 마무리되자 러시아는 대외 외교에 치중하지만 러시아에 호의적인 나라는 독일 정도였다. 특히, 레닌은 독일의 전시 경제의 일환인 중앙집권적 통제와 계획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전쟁 전에 자본주의가 자체의 내적 발전에 의해 향하고 있던 최종 단계는 독점 자본주의였다. 레닌이 "역사의 변증법"이라고 지칭한 과정에 따라 전쟁은 독점 자본주의가 '국가독점 자본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을 촉진하고 있었다. 국가독점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완전한 물질적인 준비"를 구성했다. 레닌은 1917년 9월에 "대규모 은행 없이는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독일 모델을 러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후진적 경제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 내재한 온갖 어려움을 제기했다. 러시아에서 최근 산업 성장이 매우 집중되고 국가에 직간접으로 의존했지만, 여전히 산업은 원시적인 조직 단계에 있었고 사회주의 계획가들에게 제공할 만한 이론적 실천적 원조나 지침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계획경제라는 원칙에는 어떤 저항도 없었다. 1919년 당 강령은 경제에 관한 "하나의 일반적인 국가 계획"을 요구했으며, 이때부터 경제 문제에 관한 당과 소비에트의 결의안에는 항상 "단일한 경제 계획"의 요구가 포함됐다. -163쪽




소비에트는 진정한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변 다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내 선전용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이미 全세계 공산화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나라도 러시아와 접촉하거나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공산당에 입당하는 당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레닌은 마르크스 이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춘 자만을 당원으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과는 달리 누구나 마음(열정)만 있으면 공산당원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신규 공산당원들을 장악한 인물은 당연하지만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이렇게 레닌 사후 공산당을 아래서부터 서서히 장악해 나가는 한편, 트로츠키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고 다른 소수 반대파들에 대해서도 '편향'과 '반당'이라는 굴레를 씌워 몰아낸다.




당과 국가의 최고 권위는 하나의 기관ㅡ당 정치국ㅡ에 집중됐고 이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트로츠키가 이끄는 반대파가 공식적으로 그런 이름이 붙여진 마지막 사례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서구 민주주의의 관행에서 익숙한 반대파라는 단어는 집권당에 대한 반대당, 즉 야당을 의미했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양립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다음 단계에서 소수 반대파는 "편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치적 차이가 아니라 이론상의 이단을 가리키는 언어였다. 결국 소수 반대파 그룹은 단순하게 '반당(反黨)'이라는 낙인이 찍혔는데, 당에 대한 적대는 국가에 대한 적대와 무조건 동일시됐다. -181쪽




이렇게 해서, '공산당=국가'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스탈린식 통치는 소비에트 사회에 씻을 수 없는 폐해를 남기게 된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방식은 결국 관료화를 불러왔고, 관료화는 부패와 통제를 일삼게 된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권력은 절대권력을 지향하게 되고 절대권력은 통제와 독재가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소비에트 사회는 점점 더 혁명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1928년 12월 당 중앙위원회는 모든 출판을 당과 국가의 통제 아래 둔다는 법령을 공표했다. 이 통제는 사실상 전러시아프롤레타리아작가협회가 행사했다. 이런 결말을 중앙위원회나 더군다나 스탈린이 계획한 것은 아니었고, 아마 바라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타락은 위에서부터 확산됐다. 하급의 소규모 독재자들은 상급의 권력자를 구워삶거나 아첨하고, 위의 독재자가 사용하는 방법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경쟁자를 제거했다.

권력을 강화하고 집중하는 움직임은 특히 법의 영역에서 두드러졌다. -182쪽




한편, 신경제체제로 굴락(부농)과 중농들 위시한 농촌이 혜택을 본 반면, 도시 노동자들은 식량난과 낮은 임금에 시달렸다. 빠른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농민을 위한 정책은 더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스탈린의 대표적인 경제 정책이 기획 시도된다. 바로, 5개년계획이다.



1차 5개년 계획의 채택은 소련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신경제정책의 본질은 농민 경제에 일정한 자유를 양보하는 것이었다. 농민 경제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무분별한 처사였을 것이다.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이 "사적 상업에 어느 정도의 자유"를 제공하면서도 "시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 역할"을 보중했다고 주장했다. 신경제정책의 목표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공식 당국은 신경제정책이 폐지됐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소규모 사적 산업의 생산물과 무엇보다도 농산물을 거래하는 자유시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주요한 경제 활동이 계획의 지시에 종속되고 농민에게 점차 가혹한 압력이 가해지자, 신경제정책의 생존은 이례적인 동시에 불안정한 현상이 됐다. -225쪽




공산주의 혁명은 분명 레닌의 작품이었지만,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사회는 스탈린에 의해 구상되고 구축되었다.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을 떼어놓고는 러시아의 1917~1929년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을 터인데, E.H 카 역시 두 인물 특히 스탈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빼먹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스탈린은 대중을 경멸하는 태도로 바라보았고, 자유와 평등에 무관심했으며, 소련 이외의 어떤 나라에서든 혁명의 전망에 대해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그는 일찍이 1918년 1월에 당 중앙위원으로는 유일하게 레닌에 반대해 "서구에는 혁명 운동이 전무하다."고 주장했었다.

일국사회주의는 스탈린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일국사회주의 덕분에 스탈린은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들을, 어쨌든 본인을 깊이 감동시킨 유일한 정치 신조인 러시아 민족주의와 조화시킬 수 있었다. 소수민족이나 작은 나라에 대한 스탈린의 처리 방식에서 민족주의는 쉽게 국수주의로 변질됐다.

레닌과 초기 볼셰비키에게 준엄하게 비난받았던, 러시아의 오랜 反유대주의의 가락이 들렸다. 공식적으로는 반유대주의가 계속 비난을 받았지만 어조의 단호함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미술과 문학에서 혁명 초기의 열정적인 실험주의가 포기되고, 그 대신 점점 더 엄격해진 검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 전통 양식으로 회귀해야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학파와 법학파는 빛을 잃었고, 과거 러시아와의 연속성을 찾는 일은 이제 질책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 일국사회주의는 레닌뿐 아니라 마르크스도 거부했던 과거 러시아의 민족적 배타성으로 복귀하는 신호였다. 이것은 스탈린 체제를 러시아 역사의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과 결코 모순되지 않았다. -251~252쪽




E.H 카의 러시아 혁명사는 1929년에 끝난다.

하지만 그 이후 소비에트 사회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시대를 거쳐 2차세계대전의 참화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가 간신히 살아남는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승자의 편에 섰다는 점이다.

만약 러시아가 2차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공격에 무너졌거나 싸움을 포기한 채 무기력한 방관자로 남았더라면 혁명 이후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소비에트의 손을 들어줬고 그 반향은 뜻밖의 형태로 멀리 퍼져나갔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예측과 바람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러시아 혁명으로 생겨난 흥분 상태가 대체로 파괴적인 수준에 머물면서 혁명적 행동을 위한 어떤 건설적 본보기도 제시하지 못한 반면, 후진적인 비자본주의 나라에서는 흥분 상태가 더욱 널리 퍼지고 생산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거의 자신만의 노력을 통해 주요 산업 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혁명 체제의 위신 덕분에, 자연스럽게 소련은 1914년 이전에 사실상 이론의 여지가 없었던 서구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에 대항하는 후진국 반란을 이끄는 지도자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보면, 서구의 눈에 소련의 자격을 의문시하게 만든 오점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은 후진적인 비자본주의 세계의 반란을 통해 자본주의 열강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했으며, 그 잠재력은 아직 소모되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스스로 정한 목표와 그것이 만들어낸 희망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혁명의 기록은 결함과 모호함으로 점철됐다. 하지만 혁명은 현대의 다른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도 세계 전체에 걸쳐 더 심대하고 지속적인 반향을 미치는 원천이었다. -280쪽




<러시아 혁명사>라는 대작을 남겼음에도 E.H 카는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대접은 커녕 공산주의자, 친소련학자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녔다. 그는 역사학계에서도 철저하게 외면받았는데 이에 대한 반론으로 쓴 책이 다름아닌 <역사란 무엇인가>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유독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한데, 일본인들은 그의 주장이 전범국인 일본의 항변을 암암리에 대변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선 어째서 E.H 카의 유명세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걸까? 도대체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E.H 카의 말은 참으로 옳다.

러시아 혁명을 냉전이 한창이던 1960~70년대에 바라본 것과 소련이 해체된 후인 1990년대 그리고 다시 한 세대가 더 흐른 현시점에서 바라볼 때 그 의미와 평가는 결코 같을 수 없다.

E.H 카는 당시 냉전의 프레임으로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고 평가했던 보편적 역사관을 기꺼이 외면했기에 외면당했다.

그가 30여 년에 걸쳐 냉철한 언어로 기록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앞으로 19세기 초반의 역사를 배우고 연구하려는 후세들에게 바이블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E.H 카의 대표작은 <역사란 무엇인가> 대신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 혹은 그 요약본인 <러시아 혁명: 1917-1929>가 되어야 마땅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세기 최고의 세계사 수업 - 인간은 어떻게 욕망하고 연결하고 부를 축적했는가?
에드워드 로스 디킨슨 지음, 정영은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란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의 변화로 시작해 '정치와 외교(전쟁)'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후자에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주로 공적으로 이루어진 사건만을 기록하는 사료를 1차 자료로 삼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리라. 

이런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나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밖에도 역사란 과거에 내가 속한 공동체(민족이나 국가)에서 일어난 일로만 국한시켜 생각하는 것 역시 자주 저지르는 실수다. 


역사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시간은 축소시키고 공간은 확장시켜야 한다. 즉, 가까운 과거부터 살펴보되 시야는 민족이나 국경의 범주를 뛰어넘어 전세계로 확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저자는 19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현상들을 유의미한 수치와 통계 자료로 분석하고,  '확산-대폭발-변화'라는 세 팩터로 나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단순히 어느 한 지역의 국소적 현상이나 사건들이 결국엔 전세계적인 변화와 흐름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선 19세기는 '확산'의 세기였다.

18세기를 거치면서 그동안 쌓여왔던 인류의 경험과 지식이 기술혁명과 의식혁명을 일으켰다. 보건과 농업 분야의 발전으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수천 년 동안 흙에 얽매여있던 인류의 삶이 해방되어 도시로 공장으로 다른 대륙으로 확산되었다.


필요가 발명을 낳고, 도구가 생각을 바꾼 시대였다. 


이렇듯 특정 기술을 지닌 사람들이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자원과 환경이 있는 곳으로 이주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지구적으로 나타난 이 흐름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패턴이었다. 물론 특정한 기회가 대규모 이주를 이끈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이주는 특정한 자원을 지닌 이들이 그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인력을 의도적으로 모집한 결과이기도 했다. 대규모 이주는 결코 무작위적이고 무계획적으로, 개별적으로 나타난 흐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술을 쓸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하고자 했고, 정부와 기업, 비정부 조직, 기업가들은 전 지구를 연결하는 '세계경제'를 구축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인력과 기술을 동원하여 세계 곳곳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개발하고자 했다. -080쪽



개개인의 능력차는 역사를 변화시킬 정도로 크지 않았다. 19세기는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만드는 그런 사회가 더이상 아니었다. 그러나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주어지는 기회와 선택의 폭은 전혀 달랐다. 


생산 영역과 방식을 선점했던 사람들은 이익 확대를 위해 규모를 늘리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원자재와 시장을 필요로 했던 반면, 기존의 생산 영역에 머물렀던 지역과 사람들은 경쟁력을 잃었고 이때 밀려나 생긴 차이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 어떤 시대보다도 19세기와 20세기를 알아야하는 절대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이런 구조가 고착화되기까지 크고 작은 충돌과 두 번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잘 알다시피, 양차 세계대전은 영국, 미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열강과 그 뒤를 바짝 뒤쫒던 독일, 러시아, 일본 으로 이뤄진 2위 그룹 간의 대결이었고, 감동적인 역전 드라마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풍부한 원자재와 식민지를 보유했던 강대국과 기술과 군사력을 갖춘 강소국 간의 싸움으로, 처음부터 누가봐도 승패는 분명했다. 다만, 러시아라는 변수가 새롭게 등장했을 뿐이다.  


큰 싸움 뒤에는 뒷청소 또한 길고 지난한 법이다. 운이 조금 좋거나 나빴을 뿐 과정은 대동소이했고,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독립 운동의 결과로 독립을 쟁취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소개한 각국의 혁명은 모두 달랐다. 각국은 각기 다른 역사와 제도,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구조, 전략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가 처한 상황과 가능성이 달랐다. 그러나 각각의 혁명에는 놀랄 만큼 유사한 점이 있다. 우선 모든 사례에서 혁명을 촉발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 엘리트 계층 내부의 분열이었다. 엘리트 계층 중 일부는 기존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제도의 유지를 바랐던 반면, 다른 일부는 그 모든 제도의 근대화를 원했다. 근대화의 열망을 불러온 요소 또한 유사했다. 첫번째 요소는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대변하는 정부에 대한 열망이었고, 두 번째 요소는 근대화에 실패하면 점점 강해지고 있는 제국주의 세력에게 먹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혁명의 핵심적인 지도자가 국제적인 경험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점도 유사했다. 기존 체제에 불만을 가진 엘리트 계층의 저항이 국제 경제 확대로 인한 압박에 신음하던 국민의 더 큰 저항과 함께 진행되었다는 점도 유사했다. 국민의 저항 중에는 산업, 상업 경제의 발랄로 가혹한 노동 환경에 내몰린 산업 노동자들의 저항과 국제적 식량 생산 시장의 형성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가난한 농부나 소작농의 저항도 있었다. 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정권이 근대화된 형태의 독재 정권이었다는 점 또한 유사했다. 혁명 이후 많은 국가에서는 근대식 대중 정치 운동에 기반을 둔 일당 지배 체제가 나타났다. 혁명 세력이 사회 변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종교계와 갈등을 겪은 것도 유사했다. 당시 혁명 이후 각국에 나타난 독재 세력은 대부분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시작하여 2000년 멕시코 제도혁명당의 몰락까지, 이어지는 20세기의 두 번째 혁명의 물결이 닥칠 때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272쪽

 


우리나라는 북쪽에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남쪽엔 이승만 정권이 세워졌지만 10년 만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새로 구축되는 질서와 흐름을 따라갔다고 하겠다. 

흥미로웠던 건,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되고 또다시 들어선 전두환 군사 정권 역시 여러 대륙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시위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권력을 내놓았다는 점이었다.  

이 또한 학생운동의 결과로 독재 정권을 타도시켰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화의 물결은 놀랍도록 광범위하게 일었다.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절반을 훌쩍 넘는 국가가 다양한 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75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세계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35개국, 권위주의 독재 국가 101개국, 그 중간 어디쯤 속한 국가가 11개국 존재했다.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78개국, 권위주의 독재국가가 43개국, 중간에 속한 국가가 43개국이었다. 1970년 대 중반에 접어들며 발생한 혁명의 물결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권(1974년, 1975년), 그리스의 군부 독재 정권(1974년), 이란의 샤 정권(1979년)을 차례로 휩쓸었다. 1980년대 초중반에는 외채 위기와 '긴축 조치'로 국민의 지지를 잃고 타격을 받은 남미의 독재 정권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82년 (말비나스, 혹은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벌어진 영국과의 짧은 전쟁에서 패배한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 정권은 1983년 해체되었다. 1990년과는 정반대의 통계였다. 이러한 추세는 1986년 필리핀을 필두로 1980년대 후반 아시아로 전파되었다. 1980년대 말에는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199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 -573쪽



공교롭게도 이 모든 변화는 냉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미국은 전후 냉전 시기에 공산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개도국과 후진국들의 경제 성장을 도왔으며 비도덕적인 권위주의 정권조차도 용인해 왔다. 물론, 여기에 소요되는 자금은 영국의 대처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밀어부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및 선진국의 복지축소로 획득한 것이었다. 


결국, 천문학적인 돈을 동원하는 서구사회와 더이상 경쟁할 수 없었던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은 더이상 반공 노선을 내세우며 득세했던 각국의 독재정권을 지지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서 여러 나라의 독재정권이 무너지게 된다. 우리나라도 명실상부한 민간인 출신 대통령은 1992년에서야 탄생하는데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변화에 따른 결과였다.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정권이 세계의 경제 발전에 뒤처져 붕괴했다면, 저개발국의 독재 정권들은 오히려 경제적 성공과 그로 인한 국민의 의식 변화로 인하여 붕괴했다. 한국과 대만의 소수 엘리트주의 군부 정권은 194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일종의 국가 지도 자본주의 혹은 계획 자유경제를 통하여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산업 발전을 도모했다. 두 국가 모두 경제발전을 위하여 관세를 통한 기간산업 보호, 가격 임금 이윤 이자 환율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개입, 외국인의 소유권 제한과 해외투자자 이익 반출 제한, 보조금 저리 융자, 세제 혜택, 기간산업과 핵심 인프라의 국영화, 정부 주도의 종합 대기업 형성, 장기적인 경제 계획 수립 등 다양한 정책을 활용했다. 이 정책들은 과두제에 가까웠지만 민주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일본이 앞서 활용한 정책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었다. 정책의 실행은 대개 미국의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1953~1961년까지 한국에 투자된 자본의 80퍼센트는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미국의 일부 사업가와 의원들은 "미국 정부의 지원 프로그램이 실질적으로 국가사회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보조하는 데 쓰이고 있다"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 대만, 일본이 공산주의 확산 방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판단한 미국은 이러한 정책들을 용인하고 장려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브라질을 비롯한 일부 남미 국가들도 정도는 덜했지만 유사한 경제 정책을 활용했다. -581쪽 




이 정도면 미군부대에서 나온 짬밥을 끓인 일명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면서 공장과 탄광 및 공사장에서 뼈빠지게 일해서 심지어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목숨 내놓고 싸워 받아온 달러로 나라를 이만큼 부유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그 딸을 감옥에 집어넣느냐고 거리로 나왔던 그분들이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흔들만도 했다.  


우리는 전쟁의 폐허에서 우뚝 일어나 맨손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별적인 사건들도 시야를 확대해서 보면 독립적이지 않고 시공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과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만든 실타래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이 실타래가 뻗어나갈 미래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물리적인 국경의 의미는 예전처럼 강하지 않다.

그러므로 국가 단위로 치러지는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핵억지력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전쟁으로 얻는 이익보다 시장을 유지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이!'



잠재적인 후보로는 우선 대학을 꼽을 수 있다. 현대의 대학들은 유전학, 공학, 금융학, 재료과학, 조직심리학, 컴퓨터공학, 경제학 등 여러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과학적 기술적 연구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 역량은 다양한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종합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게다가 대학 대부분은 공익 추구라는 사명을 갖는다. 지구를 구하는 것 이상의 공익이 어디 있겠는가?
지구적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질만한 또 다른 후보는 거대 대국적 기업이다. 1970년경 기업들이 교통 통신의 확대와 무역 세게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합병에 나서면서 세계적으로 기업 통합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 예를 들자면, 화석연료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석유 회사들의 장기적 이익에도 부합된다. 2012년 세계 상위 10대 기업(매출 기준) 중 일곱 개가 석유 회사였다. 상위 열 세 개 기업의 매출을 모두 합한 금액보다 높은 GDP를 가진 국가는 전 세계에 단 네 곳밖에 없었다. 이들의 매출 총액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세금 수입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전 세계 국가 중 상위 100개 기업의 수익 총액보다 세금 수입이 더 많은 국가는 역시 단 한 곳, 미국뿐이었다. 기업의 수익은 의무적인 지출처가 정해져 있는 세수와는 달리 사실상 실소득에 해당하므로 더 자유럽게 활용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국적 기업들이 지국적 문제의 논의를 점차 늘리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후보는 경제 세게화의 혜택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초고액 자산가들이다. 현재 세계 50대 부호의 자산 총액은 전 세계에서 열두 개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GDP보다 높다. 이들의 순 자산 가치는 미국 혹은 유럽연합 GDP의 11분의 1에 해당하며, 아랍 세계 GDP 총액의 절반, 사하라 이남 국가 전체의 GDP 총액에 맞먹는다. 세계 5대 부호(그러니까 다섯 명의 개인)의 자산을 더한 총액보다 연간 세수가 높은 국가는 열 곳밖에 없고, 50대 부호 자산 총액보다 연간 세수가 높은 국가는 단 두 곳뿐이다. 이러한 부의 집중을 불편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 자산가들은 마음만 먹으면 한 대륙의 GDP에 맞먹을 만큼의 자금을 지구적 문제 해결에 투자할 수 있다. 부자들이 그 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들도 이 지구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629~632쪽 중



지구가 직면하게 될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고 세계 평화와 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각국 정부의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대학 및 연구소와 다국적기업 그리고 거대 자산가들에게 달려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런 세계 평화와 지구 환경 보호가 각국 정부의 손에 달려 있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물론, 각 정부는 국민의 대표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는 지구 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 사람들은 인류의 생존과 미래를 극소수 초고액 자산가의 선의에 내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까? 순전히 그들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른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로버트 프랭크 교수의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라는 책을 한 번 읽어 보시길...

그들 역시 지구인의 한 사람으로써 자신이 얻은 혜택에 비례해서 합당한 역할을 해야 한다.



'권력은 시장에게 넘어갔다'

이 말은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확실히 공산주의에 대해 자본주의는 승리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선거의 타락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꾸준히 추구해왔던 보편적 진리에도 승리했을까? 

정의, 사랑, 자비, 헌신, 협력 등등....

이 모든 가치보다 자본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면 인류는 승리했지만 또한 패배한 것이나 매한가지다. 진화와 진보를 향해 걸어온 인류의 역사 발전 과정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