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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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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을 때, 마침 작가 초청 강연이 시작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타이밍이 절묘하기도 했지만 나름 관심있었던 작가였기에 계획엔 없었지만 2시간을 기꺼이 투자하기로 했다. 강사는 기계적으로 준비된 멘트만을 하는 것 같았다. 태도는 무성의하다고 할 순 없지만 무심했고, 내용은 약간 과장하면 오프라 윈프리쇼나 생방송 아침마당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상처, 트라우마, 고통, 대면, 용서 등등...

지극히 자기연민적 단어들로 가득 채워졌던 강연이 끝나자 다들 재밌었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로선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사실, 남들은 재밌다고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들을 꼽아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표를 얻는다. 예를 들면, 유명인사 강연 듣기라던지 전통있는 지역 축제에 간다던지 아니면 맛집 방문이나 익스트림 스포츠 하기 등등 말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쓰고 나서야 실은 이 모든 것들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삽질'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머릿속으론 '도대체 누가 이따위를 두고 재밌다(혹은 맛있다)고 한 거야?'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바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같은 사람들 덕분이리라. 단, 오해하진 마시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아니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처럼 경제적 댓가를 받고 글을 쓰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굳이 경제적 이득이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재밌다(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그저 내가 이런 부류로 분류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1995년 3월 11일부터 18일까지, 나는 자발적으로 또한 돈을 받고서, 카리브해 7박 크루즈(7-Night Caribbean) 여행을 경험했다. 내가 탄 배는 4만7,255톤 규모의 동력선 제니스 호로, 현재 남부 플로리다에서 운영되는 20여 개 크루즈 회사 중 하나인 셀리브리티 크루즈가 소유한 배이다. 선박과 시설은, 이제 내가 좀 아는 이 산업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단연코 일급이다. 음식은 훌륭하고, 서비스는 흠잡을 데 없고, 육지 관광과 선상 활동은 사소한 수준까지 최대의 재미를 제공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배는 워낙 깨끗하고 하애서 꼭 삶은 것처럼 보인다. 서카리브해의 파랑은 아기포대기 파랑부터 형광 파랑까지 다채롭다. 하늘도 마찬가지다. 기온은 자궁 속 같다. 태양 자체가 우리에게 알맞게 설정되어 있는 것 같다. 승무원 대 승객 인원 비는 1.2에서 2사이다. 정말 호화 크루즈다. - 25~26쪽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월간지 <하퍼스>로부터 취재 의뢰를 받고 일인당 2,700달러 정도 하는 호화 크루즈 여행권을 받는다. 당연히 원고료는 따로 받기로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초호화 크루즈 여행의 문제점만을 집중 취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순전히 느낀 그대로를 기록해달라고 요구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짜(!) 느낀 그대로를 기록한다. 그것도 무려 엄청난 각주를 포함하여 170여 쪽에 걸쳐서.



 

투명인간이 해주는 것 같은 신비로운 방 청소가 어떤 면에서는 근사하다는 걸 나도 인정한다. 누군가 짠 나타나서 방을 지저분하지 않게 만든 뒤 도로 짠 사라진다는 것은 모든 진정한 지저분쟁이의 꿈 아닌가. 꼭 죄책감은 쏙 뺀 채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대로 스멀스멀 솟는 어떤 죄책감이 있다. 깊은 불안감과 불편함이 차츰 증가하여, 결국에는ㅡ적어도 내 경우에는ㅡ 기이한 형태의 응석받이 편집증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 근사한 투명인간 방 청소 서비스를 이틀 겪은 뒤 내가 언제 1009호실에 있고 언제 없는지를 페트라가 어떻게 아는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제야 페트라를 직접 본 일이 거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페트라는 1009호 객실 청소 담당 직원의 이름이다) -85쪽


이전에 나는 미국 밖을 나가본 적이 거의 없고, 이처럼 고소득 무리의 일원으로 나가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지금 항구에서는ㅡ이렇게 멀찍이 떨어진 12층 갑판에서 그냥 내려다보기만 하는데도ㅡ 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또한 불쾌하게 의식하게 된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갑자기 내가 백인이란 사실을 의식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저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다. 저 무덤덤한 자메이카인들과 멕시코인들에게, 특히 네이디어의 백인이 아닌 하급 직원들에게. (...) 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절망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의 본질적이고 새삼 불쾌한 미국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비롯된다. 그리고 이 절망은 항구에서 절정에 달한다. 난간에 서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속하는 사람들 무리를 내려다볼 때, 이 위에 있든 저 밑에 있든 나는 미국인 관광객이고, 따라서 그 정체성상 크고, 살찌고, 벌겋고, 시끄럽고, 거칠고, 오만하고, 자기 생각뿐이고, 응석꾸러기이고, 외모에 신경 쓰고, 창피해하고, 절망하고, 탐욕스럽다. -104~106쪽


그리고 모든 상층 갑판의 모든 카트에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수건 남자들 특수부대가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이 몸 앞뒷면을 웰던으로 잘 익히고 이제 그만 갑판 의자에서 가뿐히 일어날 때 수건을 집어서 방으로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심지어 카트의 '다 쓴 수건'칸까지 가져갈 필요도 없다. 당신의 궁둥이가 의자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연 수건 남자가 나타나서 당신 대신 수건을 카트에 담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 11층 갑판 수영장 옆 윈드서프 카페에서는 언제나 격식 없는 뷔페 형식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카페테리아를 우울한 경험으로 만드는 길고 느린 줄이 없고, 앙트레 요리만 73가지 종류가 있으며, 엄청나게 맛있는 커피가 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노트를 한 뭉치 들고 있거나 쟁반 위에 음식을 너무 많이 담기만 했어도, 당신이 뷔페에서 떨어져 나오자마자 홀연 웨이터가 나타나서 쟁반을 들어줄 것이다. -78~79쪽

 

 

저임금 유색인종들이 제공하는 황제급 서비스와 무한정 제공되는 고급 음식들에 둘러싸여 저임금 유색인종 직원들보다 더 열악한 삶에 직면하여, 호화 여객선에서 잠깐 하차한 관광객들에게 조잡한 기념품들을 판매하려 애쓰는 현지인들의 슬픈 미소에 익숙해지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지나치게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데이비스 포스터 월리스의 글이 이렇게 길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재밌으면서도 서글프진 않았으리라.  



 

모두 아홉 편이 실려 있는 에세이 중 첫 번째인 <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읽고 나서 고민에 빠졌다. 계속 읽자니 그의 글들이 너무 방대하고 난해해서 그가 쳐놓은 선들을 따라가다가 나도 모르게 미궁에  빠져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그만 읽자니,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엄청나게 길고 요란한 문장들을 구사하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작가의 인력(引力)에 저항하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나는 하루를 쉬어 갔다.  다들 어렵다고 하지만 나는 다시 읽고 싶은 이런 글을 쓴 저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면서...


 


 


 

 

 

알고 보니, 그는 십대 때 우울증을 앓았고 알콜중독에 시달렸으며 카프카와 도스또옙스키를 흠모했고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를 숭배했으며 조너선 사프란 포어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후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상태였다. 

이 말인 즉슨,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글들은 어쩌면 이 단 한 권으로 끝날 소산이 지극히 크다는 뜻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이 추가로 번역 소개될 여지는 10% 미만이라는 데에 한표 던진다. 그의 문체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고 단번에 익숙해지긴 힘들지만 일단 마음을 열고 나면 놀라운 흡입력으로 빠르게 읽힐 뿐만 아니라 뜻밖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우와, 내가 이런 문장을 한번에 읽고 단숨에 이해하다니...'


그만큼 그는 유능한 작문 강사였고, 자타가 공인하는 어법 전문가였다. 브라이언 A 가너가 편찬한 <현대 미국 영어 어법 사전>(글제목: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에 대한 그의 서평을 읽어 보라! 글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할지라도 문장의 형식과 관점의 올바름에는 완전히 감동하고 감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서 이 책을 번역한 번역가의 이름에도 눈길이 한번 더 갈 것이고, 그 이름 석자를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앞으로 읽을 책을 선택할 때 또하나의 기준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부디 그러길 바라마지 않는다.



끝으로, 이런 글들을 쓴 작가도 작가지만 이런 글들을 실어 준ㅡ그것도 원고료까지 주면서ㅡ 미국의 잡지사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다른 한편으론 이점 역시 지극히 미국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나라는, 어느 때 보면 더할나위 없이 야만적이고 어느 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문명적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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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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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영화평을 읽기 위해 일주일을 꼬박 견뎠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나는 스스로 좀 덜 망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듯 한편의 영화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권의 책이 한사람의 세계를 바꿀 수 있듯 한편의 영화가 전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된 것도 순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로 인해 내 삶의 명도가 한 단계 더 밝아졌다고나 할까. 


 

이십 년 전에도 그녀의 글에 감탄했었는데 이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감탄하게 된다. 다만, 이번엔 영화가 아니라 그림이다.


 


 

    불꽃이 작렬할 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멈춘다. 꼬리를 흔들며 솟구치는 불씨의 '피융'하는 비명에 귀 기울인다. 불꽃놀이란 대개 군중 속에 섞여 보게 되지만 개인의 내밀한 기억으로 애장되곤 한다.


    왜일까?

    우선 소중한 사람과 함께 구경하는 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고된 불꽃놀이를 부러 탐탁지 않은 사람과 보러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불꽃놀이는 찰나적이다. 그리하여 우리 의식에 지워지지 않는 점을 찍는다. 불은 적극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동시에, 사로잡힌 대상을 태워 무화시키는 이율배반적 원소다. 완성의 순간 곧 수십만 개의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이다. 흡사 벚꽃의 미학이다.


    불꽃놀이는 색종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일가를 이룬 일본 화가 야마시타 기요시(1923~71)의 평생에 걸친 탐닉이었다. 같은 소재를 다룬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여기 소개한 그림은 불꽃의 활짝 뻗친 살이 유난히 가늘고, 밤하늘 장관을 올려다보는 구경꾼이 남자 한 명뿐이라는 점에서 도드라진다. 흰 윗도리에 검은 바지, 귀가 드러난 머리 모양을 한 그림 속 남자는 화가 본인이다. 그림 속 그는 너무 조그마해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붉고 노랗게 만개한 꽃불들은, 수면의 반영과 다정이 쌍을 이루지만 남자는 혼자다. 그날 밤 야마시타는 정녕 혼자였을 수도 있고, 깊이 고독했던 나머지 혹은 불꽃의 흥취가 도저히 남과 나눌 수 없을 만큼 충만해 사람 무리를 짐짓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63쪽


  

우선 알록달록한 둥근 원형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면 맨 아래 사람의 뒷모습같은 건 주의깊게 보지 않았으면 놓치고 말았을 게 분명하다. 그녀의 지적 덕분에 눈길이 머문다. 그리고 다시 보니 지적 장애와 평생 다리를 절었다는 작가의 외로움이 불꽃으로 화하여 형형히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소멸함으로써, 존재가 증명되는 불꽃의 이미지는 일말의 오차도 없이 작가의 삶과 겹쳐진다. 기억되지 못하고 불꽃처럼 사라져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만약 불꽃이 예술 작품이라면 이렇다할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불꽃을 이루는 작은 불씨들일 터. 결국 (나란 존재는) 한송이 꽃도 못되는, 꽃잎에 불과하다는 걸 기어이 깨닫게 만든다. 



 

일간지나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출간한 책들은 어딘지 모르게 현시성(現時性)이 떨어진다. 

김빠진 맥주나 식어버린 튀김같다고나 할까. 아무리 고급진 재료와 수준 높은 솜씨로 만들었다 한들 이미 그 본연의 맛을 잃어버린 셈이다. 이 책 역시 <씨네21>에 실렸던 글을 모았단다. 그렇지만 이 책만큼은 가뿐히 시간을 초월한다. 어디 이 책 한권 뿐이랴. 김혜리의 영화 평론집 『영화를 멈추다』 역시 나온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건만 다시 읽어봐도 세월의 무상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언급된 영화 작품조차도 마치 최근 개봉한 영화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김혜리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영화는 내가 알고 있던 그 영화가 아니라 전혀 다른 또다른 영화로 탈바꿈한다.


잘 쓰는 줄은 익히 알았지만, 이토록 잘 쓰는 줄은 몰랐다.




 

타인의 몸이 아주 가까워져 마침내 나와 그의 거리가 제로, 나아가 마이너스가 될 때 인간의 육체는 홀연 하나의 장소로 변모한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코를 묻은 아빠의 등은 너른 평원이고, 최적의 자세로 포옹한 연인에게 서로의 품은 경건한 성당이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도입부에서 거대한 사막의 능선을 보여주는데, 잠시 후 변화한 카메라 앵글은 그 풍경이 여인의 벗은 몸이었음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상대의 몸을 극접사로 더듬는 이의 시각과 촉각에 감각된 연인의 겨드랑이는 그 어떤 바다보다 완벽한 곡선을 지닌 만이며, 쇄골에 패인 웅덩이는 애틋한 해협이다.

타인의 육체만이 아니다. 심한 통증이 엄습하면 우리는 갑자기 몸을 하나의 공간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자궁은 동굴이 되고 내장은 협곡이 된다. 격심한 감정은 혈관을 달리며 전신에 메아리친다. 영혼과 의식이 거주하는 우리 안의 차원 없는 공간이 불현듯 실루엣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 159쪽




 

달큰시큰한 몸내음과 손끝에 어릴듯 말듯한 솜털들 그리고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의 크레마가 입안에 감도는 것만 같다. 


물론 나도 글을 읽고 감동하고 그림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나 이렇게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녀는 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이다. 아니, 그냥 단순히 잘 쓰는게 아니라 가장 관능적으로 잘 쓰는 사람이다.  정말 인간적으로 까놓고 말해서, 사랑에 '풍덩' 빠지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글을 써낼 수 있단 말인가. 결코 제정신(?)으로 빚어낼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마치 조물주는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똑같이 부여한 건 아니라는 걸 재확인시켜주는 것만 같다. 조물주는 정말 그녀처럼 특별한 심미안을 갖춘 이들에게만 자신을 대신해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여성학자 정희진 등등 쟁쟁한 문장가들조차 그녀의 글에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건 이처럼 조물주의 편애가 유독 그녀 한사람에게만 향한 건 아닌지 하는 의심도 한몫 했으리라. 


 


   

     프란스시코 데 고야(1746~1828)가 그린 '검은 그림' 연작의 한 작품인「개」는 천진한 무방비함의 초상이다.  14점의 벽화로 이뤄진 검은 그림 연작은 의뢰나 대중에게 공개될 계획 없이 그려졌다.

 

    화가는 광대한 배경에 몹시 조그만 개 한 마리를 떨어뜨려놓았다.

  

    배경인 창백한 황색 허공과 암갈색 바닥은, 형체와 스케일을 헤아릴 수 없어 더욱 위압적이다. 지평선 혹은 수평선으로 나뉜 위아래 공간의 극단적 비율은 배경을 우물이나 벼랑 바닥처럼 보이게 한다. 개의 네 다리를 집어삼킨 어둠은 홍수에 불어난 물 같기도 하고 유사(流沙)같기도 하다.  

 

    공포의 근원이 하늘에서 오는지 땅에서 오는지조차 불분명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개를 구해줄 지푸라기 하나 없다. 순종의 표시로 귀를 뒤로 젖힌 개가 주시하는 오른쪽 허공에는 어렴풋한 음영이 어른대는데 상상력을 발동하면 인간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의 눈빛에는 원망도 호소도 없다. 그저 영문을 모른 채 곧 내려질 심판에 한없는 신뢰를 보일 뿐이다. 그것이 자기를 끝장낼지언정.


     돌이켜보건대 우리 모두도 한 번쯤은 이 개처럼 연약하고 맹목적이었다. 고야의「개」는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깊은 우물에 빠져 허덕였던 인생의 연약했던 한 철을 상기시킨다. 또한, 신의 뜻과 그 종착점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걷고 있는 이 길의 풍경을 멈추어 돌아보게 한다. -189~192쪽 



 

 


 

사실 나는 이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리뷰는 불가능하다는 걸 예감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온몸으로 통과하며 쓴 글들을 나는 온몸을 내던져 느끼고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그껏해야 벗은 신발을 양손에 움켜쥐고 모래 사막 위를 걷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게 고작일 뿐이었다. 행여나 발이 데지는 않을까 물집이 잡히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말이다. 


이렇듯 나는, 나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나를 내던지고 타인을 문학을 예술을 사랑할 여력도 자격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남기는 건,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 말 한마디 때문이다.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부디, 그녀처럼 세상을 무한히 신뢰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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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파리
목수정 지음 / 꿈의지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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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좋아할 거라면서 누군가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성격상 여행을 매우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는지라 평소에도 여행 서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새로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도 아닌, 이미 닳을대로 닳은 프랑스 파리라니...  기껏해야 '파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어느 보보(보헤미안 부르주아)의 하릴없는 '덕질'이겠거니 싶었다. 그저 추천해준 사람과 앞으로 몇 차례의 만남이 더 있을 예정인지라 면전에서의 난처함이나 면해볼 요량이었다.


 

수천 번쯤 사진으로 보았던 어떤 곳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두 가지다. 마침내 동경하던 그곳에 이른 가슴 벅참. 그리고 보자마자 금세 식상해져서, 온몸으로 그것을 감각하기보다, 사진 한 장 박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이다. 자주 우린 명소에 가서 실망을 경험한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실망할까 봐 실체에 다가서길 외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46쪽



 

순간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어디 명소뿐이겠는가.

사람이나 책 혹은 어떤 사상이나 행위 등등 한때 열렬히 좋아하고 추종했던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결국 실망하고 외면한다. 본질보다는 겉모습(허상)을 좋아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드물긴 하지만 욕망이 제거된 시선으로 본질에 다가서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켜 파리라는 도시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에게 파리는, 우리 각자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존재하듯, 그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이 집에서 뒹굴던 잡동사니가 저 집으로 옮겨져서 다시 뒹굴다가 몇 년 뒤, 다시 태양 아래로 이끌려 나와 새 주인을 기다리고, 그 사이에 1~2유로의 돈이 오가는 이 다락방 비우기('비드 그리니에 Vide Grenier')의 룰. 마음만 먹으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물물교환에 가까운 사람들 간의 거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살이가 자본의 논리에서 조금만 길을 틀어도, 우리 얼굴엔 생존을 위한 고단한 긴장 대신, 느긋한 휴식의 미소가 어른거린다는 사실도. -66쪽



 

재미있는 건, 정류장을 안내하는 방송 목소리가 한국은 낭랑한 20대 여자 목소리인데 반해, 여기는 차분한 중년 여성, 혹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라는 사실 (새로 생긴 트랩에서 그것은 종종 5살 짜리 아이의 목소리로 대치되곤 한다). 이는 프랑스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안내 방송 목소리에 해당되는 사실이기도 한데, 20대 여자만이 여자로서의 유용성을 인정받는 듯한 우리 사회의 암묵적 풍경과는 사뭇 다른 대목이다. -75쪽



 

'어...?!'

글쓴이의 사뭇 다른 시선에 한껏 풀어져있던 자세를  나도 모르게 바로 잡았다.

최소한 이 책만큼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베르사이유 궁전과 센느강이 얼마나 화려하고 매혹적인지 혹은 파리가 얼마나 지저분하고 파리지앵들이 불친절한지 등등으로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보통 여행 에세이들은 자아도취(혹은 자기자랑) 아니면 자기발견(혹은 자기개발) 로 적당히 치장되어, 책 한 권 정도에 불과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2~30대 여성 독자들의 환상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출판되는 것 같다. 그래서 책을 펼쳤을 때 행복감에 빠져들게 해야지 불편한 감정이나 현실 인식을 불러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불문율을 교묘하게 깨뜨린다.


그 후, 나는 파리 시내에 있는 가장 큰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를 종종 들렸다. 오자마자 접했던 하나의 인상적인 죽음은 삶의 끝으로부터 이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내게 전했고, 나는 그 길을 따랐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도시에서 내가 일방적으로나마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은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을 만나 차분히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82쪽



글쓴이에 대한 호기심이 존중감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솔직 발랄하다고 하기엔 가닿는 시선들이 너무 넓고 깊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훨씬 더 잘 쓸 수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살짝 힘을 빼고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랄까. 

분명 자신만의 '히스토리(history)'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리라.   


니체는 '구걸은,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친구로 대할 수 없게 만드는 나쁜 행위'라고 규정한 바 있다. 거지는 스스로를 불쌍하게 만듦으로써 뭔가를 받고자 하는 자이기 때문이란 거다. 반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부의 재분배라는 차원에서, 그에게 구걸하는 모든 걸인에게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거지들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내 안에서 니체와 사르트르가 싸우는 걸 느낀다. 대부분은 사르트르가 승리한다. 그들에게 내 동전 몇 닢을 털어주는 것이 교회에 가서 헌금하는 것보단 훨씬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최종적으로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돈을 건네게 한다. -257쪽


 

파리의 수많은 거지와 소매치기들을 보면서 이렇게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설령 서로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 뒷모습만을 보며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다. 


 

야트막한 능선으로 이루어진 뷔트 쇼몽(Buttes Chaumont) 공원에서 오전 한때를 보내다가 파리의 먹자골목인 '붉은 아이들의 시장(Marche des Enfants Rouges)'에서 쌀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센느강변을 따라 걷다가 '라탱 구역(Quartier Latin)' 으로 접어들어서 2,30년대 고전영화 한 편을 감상하거나, 입장료가 무료인 '빅토르 위고의 집' 혹은 '기메 박물관'을 찾아가리라.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아르스날 항구(Port Arsenal) 에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와인 한잔으로 하루를 마감해도 좋겠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되었네요. 저는 잘 지냅니다) 라고 속삭이면서...  



나는 이 책으로 목수정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지만, 한 눈에도 저자의 '대표작'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엔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책들이 셀 수도 없이 많고, 그녀의 눈길이 머물렀던 세계가 넓디 넓으며, 무엇보다도 그녀가 잠 못들고 고민하며 지새웠을 밤들이 너무 길었을 거라는 걸, 그녀의 문장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여행 안내서라는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느낌과 감상을 내세우지 않는다. 최대한 멋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한 흔적들 속에서 오히려 저자의 깊은 내공이 느껴졌다.  세상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알고,  세상과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도전도,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여정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녀의 또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더불어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해준 분에게도 감사 인사를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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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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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기회가 된다면 백석같은 사람과 연애 한번 해보고 죽고 싶다'는  어떤 이의 진담같은 농담을 듣고,  「백석 평전」을 읽었다.  「백석 평전」을 다 읽고나니, 뜬금없이 누군가가 한없이 그리워져서 안도현의  「연어」를 펼쳐 들었다. 



 

그리움, 이라고 일컫기엔 너무나 크고,

기다림, 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넓은 이 보고 싶음.

삶이란 게 견딜 수 없는 것이면서 또한 견뎌내야 하는 거래지만,

이 끝없는 보고 싶음 앞에서는

삶도 무엇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 도현 <연어>  39쪽 -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가 나온지도 벌써 이십 년이 지났건만, 그리움이라고도 기다림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이 간절함은 변함없이 속수무책으로 세월을 삭혀내고 있다.


언제 만나도 좋은 사람 극히 드물듯, 언제 읽어도 좋은 문장 역시 드물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인 거고, 진짜 좋은 문장일 뿐이다. 다른 건 없다. 아무것도...


일찍이 안도현의 문장들을 읽어왔고 좋아했지만, 진짜 좋은 문장인 줄은 몰랐었다.

백석의 시들을 읽고 나서야 안도현의 시들이 다시 보였고, 그속엔 분명 월북시인 백석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

속절없이 푹푹 눈은 내리고 연인을 향한 시적 화자의 마음도 속수무책 쌓여만 간다. 언뜻보면 사랑에 목매여 세상사 나몰라라 하는 연약한 실패자의 한탄같다.  

속으로 '에잇, 못난 놈'하고 돌아서려는데,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되묻는 목소리에 그만 발목이 잡히고 만다. 


그래, 남들 눈엔 기생과 모던보이의 불장난으로밖에 안 보였겠지만 백석은 자야에게 자야는 백석에게 북풍한설 모진 추위도 견뎌낼 수 있는 뜨거운 연탄과 같은 존재였으리라.

 

 

 

 

 

 

백석은 1912년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열 아홉살 때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일찌감치 문학적 감수성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장학금을 받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서울과 함흥 등지에서 각각 신문기자와 영어교사로 재직하였고, 1936년 한정판(100부)으로 시집  『사슴』 을 남긴 후, 해방과 함께 '사라진' 시인이다.



하수상한 그 시절, 사라진 시인이 어디 백석 한명 뿐일까.

이육사가 그러했고, 윤동주도 그러했다. 특히 백석처럼 북국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 <사슴>을 힘겹게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는 밤을 새워 필사를 했을 정도로 백석 시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윤동주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시인들이 백석의 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며, 백석은 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신경림과 안도현이야말로 '백석 키즈'로 불릴 정도로 백석의 시풍과 닮아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 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한때 무던히도 읊어댔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시를 마음껏 읊을 수 있어서 견뎌낼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라는 걸.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며 그리움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사랑을 아는 것도 아니며,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다.

가난하지 않아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백석의 시에는 평안도 사투리와 향토 음식들과 의성어 의태어들이 살아 움직인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기교에만 의존했다면 그의 시들은 입안에서만 맴돌다 그쳤을 것이다. 그는 전통과 지방색과 토착어를 자기 시의 바탕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의연한 기개와 도도한 세련미를 놓치지 않았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中-




백석의 시는 이상(李箱)처럼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서구와 일본을 모방한 어쭙잖은 모더니즘이나 탐미주의 시와도 구별되며, 경향적인 카프계열의 시인들과도 다른 길을 찾아 걸어갔다. 이광수를 필두로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 정지용, 김기림, 최재서, 이태준, 백철, 임화, 김억, 김동인, 김기진, 박영희, 함대훈, 이기영, 이석훈, 최정희, 모윤숙, 노천명 등 주변의 많은 문인들이 친일로 돌아섰지만, 그는 그 어떤 노선에도 가담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를 독립투사로 칭송할 순 없어도 북한 정권에 순응한 '빨갱이'로만 보아서도 안된다. 북한에서 그가 러시아 문학작품 번역만에 몰두하고 동화시쪽으로 분야를 바꿔 창작 활동을 이어간 것과 삼수갑산 오지로 숙청당한 후 체제 찬양시들을  쓴 것 등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바다가 물웅덩이에 깊지도 얕지도 않은

집게 네 형제가 살고 있었네


막내 동생 하나를 내어놓은 집게네 세 형제

그 누구나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웠네


남들 같이 굳은 껍질쓰고

남들 같이 고운 껍질 쓰고

뽐내며 사는 것이 부러웠네


그래서

맏형은 굳고 굳은

강달소라 껍질 쓰고 강달소라 꼴을 하고 강달소라 짓을 했네


그래서

둘째 동생은 곱고 고운 배꼽조개 껍질 쓰고 배꼽조개 꼴을 하고 배꼽조개 짓을 했네


그래서

셋째 동생은 곱고도 굳은 우렁이 껍질 쓰고 우렁이 꼴을 하고 우렁이 짓을 했네


그러나

막내동생은 아무것도 아니 쓰고 아무 꼴도 아니 하고 아무 짓도 아니 하고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워 아니 했네


그런데

어느 하루 밀물이 많이 밀어 물웅덩이 밀물에 잠겨버렸네


이때에 그만이야

강달소라 먹고 사는 이빨 센 오뎅이가 밀물 다라 떠들어 와

강달소라 보더니만 우두둑 우두둑 깨물었네


강달소라 껍질 쓰고 강달소라 꼴을 하고 강달소라 짓을 하던 

맏형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런데

어느 하루 난데없는 낚시질꾼 주춤주춤 오더니 물웅덩이 기읏했네


이때에 그만이야

망둥이 미끼하는 배꼽조개 보더니만

낚시질꾼 얼른 주워 돌에 놓고 돌로 쳐서

오지끈 오지끈 부서졌네


배꼽조개 껍질 쓰고 배꼽조개 꼴을 하고 배꼽조개 짓을 하던

둘째 동생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런데 

어느 하루 부리 굳은 황새가 진창 묻은 발 씻으러 물웅덩이 찾아왔네


이때에 그만이야

황새가 좋아하는 우렁이 하나 기어가자

황새는 굳은 부리 우렁이 등에 쿡 박고

오싹 바싹 쪼박냈네

우렁이 껍질 쓰고 우렁이 꼴을 하고 우렁이 짓을 하던

셋째 동생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러나

막내동생 아무것도 아니 쓰고 아무 꼴도 아니 하고 아무 짓도 아니 해서

오뎅이가 떠와도 겁 안 나고

낚시질꾼 기읏해도 겁 안 나고

황새가 찾아와도 겁 안 났네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워 아니하는

막내동생 집게는 평안하게 잘살았네  

                                                                                     - 백석, 「집게네 네 형제」 -




 

누가 읽어봐도 동화시로써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시속에서도 안도현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물론 그가 백석을 표절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오마주라면 또 모를까.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 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드렸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안도현  「스며드는 것」 -



이제는 글을 써서 사는 삶보다 글도 쓰며 사는 삶을 살고 있지만, 불쑥불쑥 글만 써도 되는 삶을 꿈꾸곤 한다. 

특히, 시를 그것도 좋아했던 시를 읽을 때면 밀물처럼 멀미가 밀려오곤 한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보다. 미련이 남았다는 건 그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제는 최선을 다할 자신이 없다.


굳이 내 글을 팔지 않아도 삼시 세끼 거룩한 밥상을 마주할 수 있고, 미래의 어느날 오래된 오늘을 꺼내봤을 때 남루하지 않을 추억 몇 조각 떠올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안도현 시인이 백석 시인을 떠올리고, 내가 안도현 시인을 떠올리는 것처럼...



시를 읽으면 삶이 깊어진다!
시를 읽어도 세월은 가고, 시를 읽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러나 시를 읽으며 세월을 보낸 사람에 비해 시를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낸 사람은 불행하다. 시 읽기가 새롭고 다양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경험이라면,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의 경험은 얕아서 찰방거리고 추억은 남루할 테니까 말이다.    

                                                             - 안도현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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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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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Dear My Friend:



 

나는 공적인 관계가 아닌 사적인 만남의 경우에는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습관적으로 그 만남의 의미를 되짚어보곤 해.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만남이었거나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한 만남의 경우에는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든 한때 얼마나 친밀한 사이였든 상관없이 그 인연은 이미 수명이 다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인간 관계는 천칭 저울과 같아서 양쪽의 무게가 똑같지 않으면 결국 무너지고 말지.


네 마음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 나에게 이번 만남은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더이상 미룰 수도 미루고 싶지도 않았어. 

근데 참 신기했던 건, 아주 오랜만에 만났음에도불구하고 어색하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야. 

그만큼 마음 밖에선 멀어도 마음 속에선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일까?


 

난 어떤 말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어. 물론, 오랫동안 물음표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내가 직접 물어보지는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지. 어찌되었든 심적으로 힘든 상황에 있는 너에게 또다른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위로를 해줘야 했던 내가, 너의 미소에 위로받았고 너의 말들에 공감했으며 너의 진심에 감동했단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더 일찍 만날 걸...'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늘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면서 우리의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법이지. 

'지금이 아니었다면 안 되었을 거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잖니.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헤어져선 안 될 사람들이 헤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니? 그건 서로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아닌 미안함 때문이래.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차마 할 수 없으면, 결국 그 사람 곁을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


참!
선물로 전해준 박준의 산문집을 오늘 다 읽었어.

시인의 에세이는 늘 시(詩)같아서, 시시(詩詩)하게 읽어야 제맛이라지만, 나는 편지처럼 읽었단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책을 다 읽고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졌어.  

 

시인처럼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도 하고...

미처 말이 되어보지 못한 소리들이 넋두리가 되어 가슴 속을 맴돌고...

 

 

네가 어느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지... 어디 부분에서 눈시울을 붉혔을지... 알 것 같더구나.


 


관계가 원만할 때는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생각하고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한 사람이 부족하면 남은 한 사람이 채우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가 끝나고 나면 그간 서로 나누었던 마음의 크기와 온도 같은 것을 가늠해보게 된다. 이때 우리는 서운함이나 후회같은 감정을 앓는다. 특히 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연의 끝을 맞이한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후회될 만큼 커다란 마음의 통증을 경험하게 된다. -45쪽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자책과 후회로 스스로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할 때, 속은 내가 속인 나를 용서할 때, 가난이나 모자람 같은 것을 꾸미지 않고 드러내되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그제야 나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57쪽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70쪽


사랑에 대해 내리는 정의들은 너무나 다양하며 그래서 모두 틀리기도 모두 맞기도 하다. 다만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언제나 참일 것이다.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면 그 이유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95쪽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은 생각보다 괜찮아요. -148쪽


나는 아버지에게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오늘은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그 정도로 몸이 안 좋다고 운전을 안 할 수 있나. 아프다고 해서 안 해도 되는 일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아." 하며 웃었다. 나는 아버지의 웃음에 서운하고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169쪽



 

물론, 너는 이미 '감'을 잡았겠지만 내 글을 읽을 때엔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게 몇 가지 있단다.

 


 

첫째는, 내가 쓴 책 리뷰들은 책 내용과는 별반 상관이 없다는 점이야. 그럼에도불구하고 책리뷰란에 포스팅을 하는 건, 그 책을 읽고 나서 쓴 글이기 때문이지. 만약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쓰여질리 없는 글들이니까...

 


 

둘째는, 나는 정말 좋아하면 '침묵'하는 버릇이 있단다. 

기록은 망각을 막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망각을 불러오는 핑계가 되기도 하지. 너무 좋아하는 것들은 표현되어질 수 없고 표현되어져서도 안된다고 생각해. 물론 망각되어져서도 안되겠지. 그렇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그 모든 사랑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기고 되새겨져서 마음의 무늬가 되는 거란다. 


 

 

셋째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들과 해야할 말들은 리뷰에 다 담겨 있다는 점이야.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내 말들보다는 내 글들 속에서 찾아야 돼. 말은 한번 하고, 한번 들으면 끝이지만, 글은 여러번 반복해서 씌여지고, 읽혀질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말보다 훨씬 더 정직할 수밖에 없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날 '커피 홀릭'이라고 한 말에는 약간의 해명(?)이 필요할 것 같구나.

나는 커피숍에 가면 항상 커피를 주문하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는 늘 커피만 마신다'고 말해서, 나도 그만 무의식적으로 '나는 커피 홀릭'이라고 인식해버렸던 것 같아.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평소 나는 차를 더 많이 마시거든. 그래서 어쩌다 커피숍을 가게 되면 차 대신 다른 음료 즉 커피를 주문하게 되는 거야. 너를 만난 그날에도 오전에 집에서 한잔 그리고 너와 만나서 두 잔, 총 석잔을 마셨을 뿐이건만 '불면증'에 시달렸단다. 


 

사실, 커피 석잔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이라고 할 수는 없지. 어쩌면 그날밤 내가 잠들지 못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을지도 몰라...


 

이제, 이 글의 본론이자 나의 진심을 말해야 할 것 같구나.


사실, 그날 눈물을 흘린 건 너만이 아니었단다.

너와 서둘러 헤어졌던 건 시간이 늦어서가 아니라 조금만 더 있으면 나도 곧 눈물을 보일 것만 같아서였어. 수술한지 며칠 안되서 오래 걸을 수 없다는 너를 배웅하고, 지하철역까지 걸어와선 화장실에 들려 손을 씻고 너에게 문자를 보냈더랬지. 그리고 전철 안에서 이 책을 읽기 위해 펼쳐들었다가, 그제서야 "**문고에는 이 책이 없더라고요." 라는 너의 한마디가 떠올랐지...


 

그날 너는, 내가 너를 배웅하고 혼자 걸어왔던 그 길을 두번 왕복했던 건 아니었을까?

지하철역에서 내려 약속장소인 **문고까지 걸어왔다가 이 책이 없다고하니까 다시 00문고까지 걸어가서 사온 거였어. 약속시간에 딱 1분 늦게 도착했으니 늦지 않으려고 서둘렀을 테고... 건강한 성인의 걸음으로도 반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 거리를 수술한지 얼마 안 된 몸으로 걸었던 거였어, 너는...


 

 

(울컥)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까 함께 울 걸 그랬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니까....



친구야!

앞으로는, 우리 혼자 울지 말고 함께 울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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