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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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Germinal)'은 공화력의 일곱 번째 달(月)로 3월21(22)일~4월19(20)일이며, '씨앗' '희망' 혹은 '싹이 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르미날은 혹독한 추운 겨울이 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달'이지만, 우리에게 4월은 유난히 '잔인한 달'이다.

4.3 제주 항쟁과 4.19 학생 의거가 있었고, 천안함과 세월호도 제르미날에 가라앉았다.



 

이런 제르미날에 에밀 졸라의『제르미날』을 읽게 된 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내 독서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역사란 무엇인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 '아'는 나를 말하고 '비아'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말한다. 

역사는 곧 나와 다른 사람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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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이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깊은 밤 르 보뢰 탄광으로 흘러들어온 건 우연이었다. 그는 배가 고팠고 갈 곳이 없었으며 아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탄광촌 몽수에서는 열 살이 지나면 누구나 갱에 내려가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려 50년 넘게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 본모르 영감도 그랬고, 그의 아들 마외도 그랬으며, 또 그의 아들 쟈사르와 장랭 그리고 딸 카트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탄을 캤고, 탄을 캐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탄광촌 밖으로는 나가본 적도 없고 탄광일 이외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오락이란, 그저 사랑을 나누고 아이들을 낳는 것 뿐이었다.

 


한편, 탄광촌 사장 엔보 씨와 주주인 그레구아르 가족 역시 주어진 환경과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따름이다. 재력을 바탕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사악하지 않고, 욕망과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히려 그들의 연민과 자비심이 그들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도화선이 되고 만다.  

 


 

​이렇게 비참한 삶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고된 노동 끝에 파김치가 된 아직 어린 여자들이 저녁이면 또다시 끝없는 노동과 고통에 시달릴 생명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그녀들이 항상 굶주림으로 고통받을 생명들로 자신을 채워간다면 이런 악순환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다가오는 불행을 막는 것처럼, 배를 틀어막고 허벅지를 꽉 조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 201쪽

그레구아르 가문은 그들의 탄광에 대해 변치 않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주가는 다시 오를 터였다. 신이라도 앞날을 확실히 알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인 믿음에, 한 세기 전부터 가족이 무위도식할 수 있게 해준 가치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그들이 보유한 주식은 그들에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극진히 섬기는 신이자, 그들로 하여금 커다란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먹음직스러운 식탁에서 살찌울 수 있게 해주는 그들 가정의 수호자였다. 그런 삶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존재를 의심하며 운명을 거스르고자 애쓴단 말인가. -128쪽



 

결국, 두 달 넘게 이어졌던 총파업은 군대의 발포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끝이 났다.

회사는 다시 문을 열었고, 사람들은 예전처럼 갱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자 수바린의 테러로 갱이 무너져 또다시 사상자가 발생하고 탄광은 땅속으로 꺼져버린다.



 

러시아식 혁명주의 소설과 같은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오늘날의 현실과 너무도 똑같이 작품이 끝나버리자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파업이었고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단 말인가?'


 

 

어쩌면 그들은 패배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돈과 목숨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리는 르 보뢰 탄광에서 울려퍼진 총성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치유될 수 없는 그 상처로부터 제정의 피 또한 흘러내리게 될 것이다. 산업의 위기가 끝나고 공장이 하나둘씩 다시 가동한다고 해도 전쟁 상태는 계속될 것이며, 더이상 평화로운 해결이란 있을 수 없다. 광부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고, 자신들의 힘을 시험하면서 정의를 향한 외침으로 프랑스 전역의 노동자들을 흔들어놓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들의  패배를 보며 마음을 놓지 못했다. 몽수의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승리 한가운데서도 파업 다음날에 대한 은밀한 불안감에 휩싸인 채, 주위의 깊은 침묵 속에 자신들의 종말이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혁명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어쩌면 내일이라도 총파업과 함께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른 것이다. 공제조합 기금을 확보한 노동자들은 한데 힘을 모아 몇 달 동안 굶주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무너져가는 사회에 거센 충격을 가한다면, 부르주아들은 그들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충격이, 계속해서 또다른 충격이 아래에서부터 가해지면서 낡은 건물이 흔들리고 무너져 르 보뢰 탄광처럼 심연으로 빨려들어가고 말 것이다. - 2부 366~367쪽



 

이 작품은 파업을 위한 작품도 파업에 대한 작품도 아니었다.

나는 작품이 너무나 오늘날의 현실을 쏙빼닮아 있는 나머지 이 작품을 우리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작품은 파업에 따른 결과보다는 파업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개체로서의 개인은 (파업에) 실패할지언정, 전체로서의 인류는 (파업을 통해) 진보한다.



 

에밀 졸라는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인간도 주어진 환경과 타고난 성격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인식의 바탕 위에 루공 마카르 총서를 기획하여 무려 이십여 년에 걸쳐 총 20권의 총서를 완성했다. 『제르미날』은 총서의 열세 번째 작품이며, 주인공 중 한명인 에티엔은 일곱번 째 작품인『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의 아들이며, 그 유명한『나나』는 총서의 아홉번 째 작품으로 제르베즈의 딸이다. 그러므로 에티엔과 나나는 남매지간인 셈이다.


제르베즈가 알콜중독에 빠져 삶이 불행해진 것인지 아니면 삶이 불행해서 알콜에 의존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듯, 에티엔과 나나 그리고 카트린의 삶이 어찌하여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분별력과 예의를 갖춘 마외 부부가 파업에 앞장서고 평소 순박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에밀 졸라조차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그는 수천 년 인류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무대에 서보지 못했던 하층민 중에서도 최하층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몸짓과 목소리를 기록했을 따름이다. 그 기록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었다.



 

에티엔은 밀밭 아래, 산울타리 아래 그리고 어린나무 아래에서까지 도처에서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하늘 높이 떠오른 4월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출산의 기운을 머금은 산허리에서 삶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나무의 새순들이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초록빛  나뭇잎을 터뜨리고, 새로운 풀들이 대지를 뚫고 나올 때마다 들판 전체가 가늘게 떨렸다. 사방에서 따뜻한 기운과 빛을 갈망하는 씨앗들이 부풀어오르고 키가 자라면서 땅을 뚫고 들판 위로 솟구쳤다.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나무의 수액이 넘쳐흘렀고, 싹트는 소리는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은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 2부 369~370쪽



 

에티엔은 분명 들었다.

그 소리는 무너진 갱속에 갇혔을 때 울려온 희망의 소리요, 새봄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생명의 소리였다. 


1902년 에밀 졸라가 가스중독으로 사망하자 프랑스 북부 탄광촌에서 달려온 수백 명의 광부들이 그의 관을 둘러싸고 연호했던 바로 그 소리였다.  


'제르미날! 제르미날!'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그 이전의 수많은 실패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6년 촛불집회와 2017년 대통령 탄핵이 가능했던 건 그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실패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거에 비해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그건 앞선 이들의 실패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고, 오늘 우리가 투쟁한다면 그 결과는 후손들이 기억해 줄 것이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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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6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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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작'하는 작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한 마디로 가능할 걸 열 마디하고, 한 장이면 될 걸 수십 장씩 남발하며, 한 권이면 충분할 주제를 두세 권씩 시리즈로 묶어내거나, 비슷한 문체와 구성으로 이 작품이 저 작품같고 저 작품이 그 작품같은, 소위 자기 자신을 무한정 표절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런 작가들이 국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이건 독자의 수준을 탓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출판사의 장삿속을 탓해야 하는 건지...


암튼, 나의 이런 편벽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박완서의 작품들을 애써 골라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완.서.가 누구인가?  

불혹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한 작가, 전쟁과 이산의 과거사 속에서 탄생한 작가, 팔순이 넘도록 작품 활동을 한 작가 등등...

그녀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 붙는다. 그만큼 그녀는 그 어떤 한 마디로도 규정될 수 없는 한국 문학의 거목과 같은 존재이지 않은가. 굳이 내가 찾아 읽지 않아도 이미 읽은 사람들 많고, 앞으로 읽을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을 작가다. 그런 그녀의 작품집을 불쑥 집어들었다가 화창한 봄날 오후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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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는 작가 생전에 펴낸 단편선집(총7권) 중 여섯 번째로 90년 대에 쓰여지고 발표된 작품 열 편이 실려 있다. 두어 편을 제외하고는 60대 이상 노년층이 주인공이거나 화자로 나온다. 정욕이 제거된 '그레이 로맨스'의 겉멋을 지적하는가 하면(「마른 꽃」),  평생 체면과 허영심에 얽매여 있던 육십 대 여성이 헛되이 애만 쓰며 보낸 하루가 펼쳐지고 (「너무도 쓸쓸한 당신」) , 부모는 열 자식 건사해도 열 자식은 부모 한 명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세태가 그려진다 (「환각의 나비」,「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꽃잎 속의 가시」) .



 

배꼽 아래는 참담했다. 볼록 나온 아랫배가 치골을 향해 급경사를 이루면서 비틀어짜 말린 명주빨래 같은 주름살이 늘쩍지근하게 처져 있었다. 어제오늘 사이에 그렇게 된 게 아니련만 그 추악함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욕실 안의 김 서린 거울에다 상반신만 비춰보면 내 몸도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또한 욕조에 잠겨서나 나와서나 내 몸 중에서 보고 싶은 곳만 보고 즐기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급히 바닥에 깔고 있던 타월로 추한 부분을 가리면서 죽는 날까지 그곳만은, 거울 너에게도 보이나 봐라, 하고 다짐을 했다.  - 『마른 꽃』 36쪽-



 

내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드러날 기름기 없이 처진 속살과 거기서 우수수 떨굴 비듬, 태산준령을 넘는 것처럼 버겁고 자지러지는 코곪, 아무 데나 함부로 터는 담뱃재, 카악 기를 쓰듯이 목을 빼고 끌어올린 진한 가래, 일부러 엉덩이를 들고 뀌는 줄방귀, 제아무리 거드름을 피워봤댔자 위액 냄새만 나는 트림, 제 입밖에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끝없는 잔소리, 백 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인색함, 그런 것들이 너무도 빤히 보였다.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는 것은 사랑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 되리라. 겉멋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마른 꽃』 46쪽-

조금은 과장을 하고 조금은 생략을 해도 좋으련만 그녀의 손끝에서 묻어나오는 노년은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적나라하다. 적나라하다 못해 꽃샘추위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듯 소름이 돋고, 뜨거운 태양 아래 장시간 펼쳐져 있던 생선 좌판 사이를 지나칠 때처럼 콧등에 주름이 잡힌다. 

 

지는 꽃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애잔하다 했던가.

사람도 젊음과 완숙미가 다 빠져나간 자리엔 스산함만 고인다. 영원한 소멸 앞에서 모든 생명체는 처연할 수밖에 없다. 

그냥 이대로 가자니 억울하고... 되돌아 가자니 되돌이킬 수도 없어 속만 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이 무력감이라니... 

지독하다. 산다는 건, 지독한 일이다.


오빠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종일관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마침내 끝났구나, 하는 얼굴로 상주 노릇을 했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무도 또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해한 영화를 보고 나면 혹시라도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한두 번 더 보게 되는 수가 있다. -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149쪽


 

남편은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위로가 필요 없는 인간처럼 참을 수 없는 인격이 또 있을까. 그의 체제 순응은 강요된 것도 의도적인 것도 아닌 체질적인 거였다. 그의 매력 없음의 본질 같은 거였다. 그와 다시 합친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생각하기가 싫어서였다. 그러나 오늘은 표면적인 별거의 이유가 완전히 소멸되는 날이다. - 『너무도 쓸쓸한 당신』 158쪽

 

 

한편, 이처럼 쓸쓸한 풍경만 담겨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나만 알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자화상들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아란은 깨끗하고 반득한 건물만 모여 있는 거리를 이방인처럼 달착지근한 향수에 젖어 유유히 거닐다가 그럴듯한 찻집에 들어가 랩을 들으면서 비 오는 날은 일 나가지 않고 샹송을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 바보같은 엄마, 별난 파출부를 생각했다. 지금도 거금을 가지고 있긴 마찬가지인데 거짓말처럼 불안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렀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시는 그렇게 못나빠진 불안증에 걸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따개비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 살던 세상에서 어느 만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맛을 여유 있게 즐기고 나서 아란은 집으로 향했다. 너절한 동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여유를 두고 바라보니 영화 세트처럼 재미가 쏠쏠했다. 세상과 나 사이에 돈이라는 윤활유가 넉넉해지면 세상은 이리도 아름다운 것을. - 『공놀이 하는 여자』 275쪽-


아란은 첩의 소생으로 태어나 본처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나 친부가 죽으면서 물려준 집 한 채에 그동안 쌓였던 모멸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심지어 본처 가족들을 용서하고픈 마음마저 생긴다.

돈 앞에서는 자존심도 존엄성도 없다. 아니, 돈이야말로 자존심이요 존엄성 그 자체다. 그래서 원래부터 갖고 있던 사람보다 없다가 갖게 된 사람들이 더 무서운 법이다.  예전엔 모욕인지도 몰랐던 모욕들이 불편인지도 몰랐던 불편들이 부끄러운줄도 몰랐던 부끄러움들이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아무리 지우고 털어내려해도 떨어지지 않는, 그 천박과 옹색과 거칠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학대한다.  왜냐하면 꿈엔들 나타날까 두려운, 잊고 싶은 자화상이니까....



 

집에 가면 우선 헌이한테 전화부터 걸어야지. 헌이하고 잔 게 얼마 만인지. 어서 헌이하고 자고 싶었다. 헌이 자기한테 시키던 온갖 굴욕적이고  야비한 짓거리를 그에게 시켜가며 데리고 놀고 싶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주도권이란 이렇게 간단히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을. 그의 비리비리한 팔뚝을 담뱃불로 지질 수도, 그로 하여금 방바닥을 기게 할 수도, 개처럼 헐떡이며 온몸을 핥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란은 혼자서 미친 듯이 킬킬거렸다.

헌하고 급하게 하고 싶은 것은 자는 것만이 아니었다.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꿈은 더이상 일편단심 개천에서 용 나기를 기다리다가 기어코  개천에서 난 용의 조강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아니라도 개천에서 용 날 꿈에 매달려 사는 너의 여덟 식구만 해도 너에게는 버거운 악몽일 테니 나는 이제 개천바라기에서는 빠지겠노라고. 그렇더라도 헌의 쓸모가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용은  아니라도 필요에 따라 기둥서방을 삼을 수도,  싫증나면 헌신짝처럼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훗날 헌신짝처럼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 두려워해야 할 이는 이제 내가 아니라 헌이 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네가 아니라 나다. 여태껏 모든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의  주도권은 항상 가진 자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쯤은 너도 알 것이다.  - 『공놀이 하는 여자』  


 

박완서는 박완서다.

그녀는 남에겐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욕망을 들춰내는데 탁월하다. 마치 나만 알고 넘어가길 바랐던 일들만 용케 알고 일러바치는 얄미운 시누이처럼 감추고 또 감추고 싶었던 내 안의 욕망들을 헤집어내어 낱낱이 까발겨 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는 가시에 찔린 듯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리고, '그래, 너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표제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인 줄 미처 몰랐다.  

「그 여자네 집」은 작중 화자가 김용택 시인의 시 <그 여자네 집> 전문을 낭독하면서 시작된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작중 화자가 들려주는 사연인 즉, 대략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칠십 여 년 전 쯤, 하늘 아래 봄이면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마을이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도 행촌리(杏村里)란다. 이 행촌리엔 만득이와 곱단이라 불리우는 어여쁜 총각 처녀가 살았더랬는데 둘은 동갑내기로 어렸을 때부터 서로 잘 어울렸더랬다. 그러던 어느날 만득이가 징병으로 차출이 되고, 혼례라도 서둘러 치러주려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곱디 고운 곱단이를 그렇게 데려오고 싶지 않았던 만득이는 꼭 살아돌아와 꽃가마 태워주겠다는 약속만을 남긴 채 전쟁터로 끌러갔더란다. 그러나 만득이가 돌아오기도 전에 마을마다 결혼 안 한 젊은 처자들만 골라서 정신대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하는 수없이 곱단이네는 서른 넘은 아이 셋 달린 홀아비에게 울며 불며 안 가겠다는 곱단이의 등을 떠밀어 시집을 보내버렸더란다. 살아돌아온 만득이는 곱단이가 시집갔다는 신의주쪽을 향해 목놓아 곱단이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 만득이는 하는 수없이 순애라는 마을의 또다른 처자와 얼떨결에 결혼을 하고는 서울로 도망치듯 이사를 나왔단다.


또다시 세월이 흐르고 흘러 중국 단체 관광으로 압록강 유람선을 처음 타본 만득이는 압록강 푸른 물을 바라보다가 그만 '엉엉' 목놓아 통곡을 하고 말았단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직도 곱단이를 잊지 못해 그러냐고 시샘어린 한마디를 쏘아부쳤단다. 



 

웬지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사연이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 부모님 혹은 우리 조부모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나 이뤄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는 차고 넘치니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만득이과 곱단이라는 젊은 남여의 슬픈 사랑 이야기지만, 이 작품은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더 사실적이고, 피해자의 피맺힌 고통뿐만 아니라 피해를 면한 자의 억울한 슬픔까지 담아낸 역사 그 자체다.    



 

비록 곱단이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어요. 곱단이가 딴 데로 시집가면서 느꼈을 분하고 억울하고 절망적인 심정을요. 나는 정신대 할머니처럼 직접 당한 사람들의 원한에다 그걸 면한 사람들의 한까지 보태고 싶어요.  당한 사람이나 면한 사람이나 똑같이 그 제국주의적 폭력의 희생자였다고 생각해요. 면하긴 했지만 면하기 위해 어떻게들 했나요? 강도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십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강도는 죄가 없고 자살이 되나요?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서 사랑의 기쁨, 그 향기로운 숨결을 모조리 질식시켜버리니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죠.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내 마음 알겠어요? 장만득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 『그 여자네 집』 213~214쪽-


'아!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마음'이라니...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지 30 년이 다 되어가고 1992년부터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건만, 일본의 정식 사과는 커녕 일본 정부의 악의적인 역사 왜곡과 일본 국민의 무책임한 역사 외면은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당한 자의 한조차 미처 풀어주지 못하고 있거늘 무슨 여력이 있어 면한 자의 슬픔까지 어루만져 줄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나는 당한 자의 고통에 머물러 있었을 뿐 면한 자의 슬픔같은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 인식의 한계는 고작 여기까지였던 것이다. 


역시, 박완서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전부 섭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속에선 언제나 그 누가 뭐래도 그녀의 대표작은 『나목』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 여자네 집』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이란 처음 읽던 다시 읽던 누구나 '다시' 읽는다고 말하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웬지 처음 읽는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읽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처음 읽어도 언젠가 한번은 읽었던 작품처럼 느껴지는 게 또한 고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박완서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고전이라 하겠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읽는다고 말하면 아직도 읽지 않았느냐는 핀잔을 받을 것만 같고, 처음 읽어도 언젠가 읽었던 것처럼 낯설지 않고 익숙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바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에게 일어났었고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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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키스패너
프리모 레비 지음, 김운찬 옮김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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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쯤이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돌아온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몇 권의 책들을 썼다. 특히『이것이 인간인가』는 출판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주목받아 증언문학으로는 드물게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프리모 레비는 꾸준히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도 페인트 공장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품질을 관리하는 화공학자인 자신의 본업을 끝까지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멍키스패너』는 그가 회사을 퇴직하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쓴 첫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그의 전작들처럼 보고 듣고 겪은 '경험의 기록'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멍키스패너』의 주인공은 두명이다. 한명은 작중 화자인 '나'이고, 다른 한명은 '파우소네'다. '나'의 직업은 화학자로 이탈리아의 한 리스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편 파우소네는 조립공으로 러시아, 알래스카, 인도 등지를 떠돌면서 산 위에 송전탑을 세우는 작업에 투입되는가 하면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 위에 현수교를 연결하기도 하고 빙하가 떠다니는 북극해에 원유시추시설 설치작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볼가강 근처 작업장의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숙소에서 만난다. 사실, 파우소네는 과묵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화자 앞에서만큼은 수다쟁이로 돌변해서 단 한번도 꺼낸 적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물론, 작품 속 화자는 작가인  프리모 레비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나는 고용주와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는 언제나 바빴고 나도 바빴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곧바로 마음이 맞았어요. 그도 허풍 부리지 않고, 자기 일을 알고, 다른 사람보다 크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지휘할 줄 알고, 자신이 주는 돈을 일일이 세어보게 만들지 않고, 누가 실수해도 크게 화내지 않지만 자신이 실수하면 곰곰이 생각해보고 용서를 구하는 그런 타입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도 이곳 출신으로 당신처럼 자그마하고, 다만 약간 더 젊어요. - 22쪽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모든 작업에, 아주 이상한 작업에도 쏟아붓지요. 아니, 이상한 작업일수록 더 많은 영혼을 쏟아부어요, 나에게는 내가 하는 모든 작업이 첫사랑 같아요." -62쪽


"그런데 당신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만든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요? 당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 67쪽


"만약 당신이 나름대로 신중함을 갖고 있지 않으면 조만간 좋지 않게 끝나요. 신중함은 직업보다 더 배우기 어려운 것이에요. 대부분 나중에 배우게 되는데, 곤경을 통과하지 않고 배우기는 힘들어요. 조그마한 곤경을 곧바로 통과하는 사람은 행운아예요." -194쪽


" 전혀 어려운 것 없고 모든 것이 언제나 똑바로 이루어지는 일을 하는 건 분명히 정말 지겨울 것이고, 결국에는 사람들을 멍청이로 만들 거예요. (...) 만족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 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무분별한 욕망이 아니라 도달할 희망이 있는 것이어야 해요. " - 215~216쪽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것 같은 파우소네의 말들은 마치 진흙 속의 진주처럼 의미심장하게 반짝거린다. 


자신의 일에 대해 여러 말 하지 않으면서도 명확히 알고 있고,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자신의 실수는 쉽게 잊지 않으며, 목청 높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표현하고, 신경쓰지 않아도 될만큼 돈계산이 깔끔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심지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첫사랑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약 운명이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제외하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불행히도 그건 소수의 특권이다) 지상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121쪽


분명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처럼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그 일에 전적으로 몰입하며 이를 통해 완전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일을 하는 '노동하는 인간'일 뿐이다. 영혼없는 노동은 형벌에 가까워서 아무리 오래 종사해도 숙련(熟練)되지 않고 정통(精通) 할 수 없다. 정통이란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는 경지를 말한다. 마치 몸에 밴 습관처럼 정통하면 실수도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이와같은 일들이 발생한다면 그건 더 나은 향상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완전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유능하다는 건 자신의 작업(직업)에 완전히 숙달되었다는 뜻이고, 숙달이란 곧 습관을 통해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므로 완전함이란 습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업적으로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마주하면 놀라움과 함께 경외심을 느끼곤 한다. 비록 그 직업은 흔하고 미천할지언정 그 작업은 특별하고 숭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파우소네가 엄청난 일을 했다거나 특별난 경험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무미건조하고 다소 지겹기까지 하다. 왜 아니겠는가. 설계 도면대로 볼트를 너트에 끼우고 적당한 힘으로 멍키스패너를 돌려 뭔가를 조립하는 일은 솔직히 단순단복에 가까운 일이라서 뭔가 새롭고 창의적인 기술이나 재능의 발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수십 수백 미터에 달하는 철교와 철탑을 떠올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간단한 볼트와 너트의 연결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조립물들은 더이상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절대성과 웅장함을 갖춘 완전체로써 기능하고 존립하기 때문이다. 단어와 단어가 결합하여 한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모여 문단을 이루어 마침내 한 권으로 만들어진 책이 '작품'으로써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에 동의했다. 스스로를 측정할 수 있고, 측정에 있어 다른 사람들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안에서 자기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는 장점에 대해서 말이다. 당신의 창조물이, 빔 위에 빔이 올라가고, 볼트가 하나하나 조여지면서 확고하고, 필연적이고, 대칭적이고, 목적에 합당하게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그리고 작업이 끝난 뒤에 바라보면서 아마 당신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마 당신이 모르고 또 당신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당신은 나이를 먹은 뒤에 다시 당신의 창조물을 찾아갈 수도 있고, 아마 그것은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오직 당신에게만 아름답게 보이더라도 상관없을 것이며, 당신 자신에게 '아마 다른 사람은 해낼 수 없을 거야"하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79쪽



 

내 기준에 비춰 볼때, 프리모 레비는 균형잡힌 인물에 가깝다.

일과 가정 그리고 취미 등 모든 방면에서 최선을 다했고 또 최고의 결과를 얻었다. 그는 적당한 운과 재능을 타고났고 또 남못지 않은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정신과 몸은 그로인해 망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굳건해졌다. 안정된 삶을 지키고 누릴 수 있는 겸손과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인의 평가와 인정보다는 자기만의 삶의 기조를 유지하고 지키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 어떤 업적이나 명성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소박하고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프리모 레비야말로 진정한 '공작인(Homo Faber)'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작인, 즉 호모 파베르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하빌리스 그리고 호모 루덴스를 하나로 결합한 인간 유형으로, 단순히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창의적으로 작업하며 일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인간이다.


 

『멍키스패너』는 프리모 레비가 파우소네라는 또 한명의 호모 파베르를 내세워서 '진정한 호모 파베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써내려간 모범답안같은 작품이다.  요즘처럼 '워라벨'이 중시되는 시대에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인 인간)도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인 인간)도 아닌, 호모 파베르로 사는 것이 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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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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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꿈꿔왔던 작품이다.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모티브로 삼아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깜짝 놀랄만큼의 기시감(旣視感)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집을 나서서 길을 재촉하고 있다.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두터운 코트를 걸치고서, 때는 1941년,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레너드 앞으로 짤막한 편지 하나를 남겼다. 바네사 앞으로 쪽지를 남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결단을 내고야 말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너무도 잘 안다는 표정으로, 강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언덕진 풀밭과 교회, 그리고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여기저기 흩어져 풀을 뜯고 있는, 황록색이 연하게 묻어날 듯한 흰색으로 더욱 눈에 두드러져 보이는 양 떼에 거의 넋을 놓고 있다. - 마이클 커닝햄 『세월』 9쪽-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그녀의『댈러웨이 부인』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꽃은 자기가 사오겠다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신선한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아침 공기가 몸을 감쌌다. 빅벤이 시종을 쳤다. 종소리가 묵직한 원을 그리며 퍼졌다. 거리는 생명력이 넘치고 모든 것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

사람들의 시선 속에, 활개치며 성큼성큼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울부짖는 아우성 속에,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그리고 허청허청 발을 질질 끌면서 춤추는 샌드위치맨(sandwich man) 속에, 악대와 손풍금 속에, 환성과 종소리와 그리고 머리 위를 나는 비행기의 기묘하게 찢어지는 듯한 폭음 속에, 이러한 것들 속에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인생이 있었다. 그리고 런던이 있었고, 6월의 이 순간이 있었다.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7~12쪽-


 

저녁 파티에 쓸 꽃을 사러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댈러웨이 부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의 극치'로 불리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이제 나보고 도대체 무엇을 쓰란 말인가?'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나 또한 탄식하고 말았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이 완벽한 이해와 존경심이라니...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궁극의 극치'가 아닐까 싶다.


마이클 커닝햄은 열 일곱 살 때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서 받았던 깊은 충격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가 『세월』이라는 작품 속에 고스란히 쏟아놓았다. 작품의 구조와 문체뿐만 아니라 주제까지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 울프의 목소리를 빌어 그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가끔 그녀 때문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는 그녀가 아마 영국에서 가장 지적인 여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책들은 몇 세기를 두고 읽힐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그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아내가 아닌가. 그녀는 20년 전 케임브리지에 있던 그녀의 남동생 방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램브란트나 벨라스케스의 작품만큼이나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키가 훤칠하고 창백한 버지니아 스티븐이었고, 지금 이 순간 그의 앞에 서 있는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이다. - 마이클 커닝햄『세월』54쪽 -


나 역시 동감하는 바이다.

그녀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여성일지도 모른다. 지성과 감성을 갖춘 수많은 현대 여성들은 버지니아 울프에게 저마다 크고 작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남여 차이에 따른 구분을 뛰어넘는 그녀의 페미니즘은 여성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범인류애로 확대되었으며, 그녀가 생전에 보여준 행동과 결단력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삶을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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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커닝햄의  『세월(The Hours)』 에는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1923년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댈러웨이 부인』을 읽기 위해 가출(?)을 감행하는 로라 브라운, 그리고 2001년 뉴욕에 살고 있는 클라리사 보건이다.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시공간 속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모두 똑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 놓여 있을 따름이다.  마치 회전목마처럼 눈에 비치는 배경이 바뀜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일정한 궤도와 속도로 움직이는 회전판 위에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일찌감치 이 점을 간파했으리라. 

결국 삶이란 흐르는 시간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것이라는 걸...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을 끝까지 잘 견뎌내면서 매순간 떠오르는 의식들 속에서 생의 기쁨과 고통을 오롯이 느끼는 것이라는 걸...

 


 

지금 이 순간에는, 앞에 펼쳐질 시간들로 인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마음은 흥얼흥얼 노래를 읊조린다. 오늘 아침, 그녀는 혼미를, 말하자면 막힌 파이프를 관통하여 황금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형언하기 어려운 제2의 자아를, 아니면 약간 더 순수한 자아를 느낄 수 있다.

만약 그녀가 신앙심이 깊다면 그녀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지성과 감정 이상의 것이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눈부신 금속으로 만든 동맥처럼 세 가지 모두를 관통하고 있지만 말이다.  - 56쪽 -


고통은 그녀를 정복하고, 그때까지 버지니아의 것이었던 모든 것을 재빨리 고통 그 자체로 바꿔 버린다. 그 진척 과정이 너무도 위압적이고 들쭉날쭉한 윤곽선이 너무도 선명하여, 그녀는 고통을 그 자체 생명력을 지닌 실체로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래너드와 함께 광장을 거닐 때도 그녀는 그것을, 조약돌 위로 반짝이는 은빛 덩어리를,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대못을 박아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면서도 완전한 하나의 덩어리로 남는 그 고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110~111쪽 -



죽는 순간까지 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고통조차 외면하지 않았던 그녀는, 마이클 커닝햄의 안내로 다시 한번 로라 브라운의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온다.




창에서 몸을 돌린다. 신발을 벗는다. 『댈러웨이 부인』을 유리가 덮힌 침실용 탁자에 올려놓고 침대에 눕는다. 방 안은 호텔에서 흔히 느껴지는 기이한 고요로, 삐걱거리는 소리와 꼴꼴거리는 소리, 그리고 카펫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를 짓누르는 너무나 부자연스런 고요로 가득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삶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다. 그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왠지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서 책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 같다. 물론 하늘빛의 이 호텔 방만큼 댈러웨이 부인의 런던과 더 동떨어진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물에 빠져 죽은 그 천재 여인 버지니아 울프도 죽어서는 이 방과 다르지 않은 곳에 살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다.  - 229쪽-



다섯 살 아들을 두었고 뱃 속엔 둘째 아이를 임신한 평범한 가정주부 로라 브라운은 견딜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댈러웨이 부인』을 마저 읽기 위해 호텔을 찾는다. 그녀는 울프처럼 죽을 것인가? 아니면 울프의 분신과 같은 댈러웨이 부인처럼 살 것인가? 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만난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를, 순결하고 착란적이며 일상의 삶과 예술의 불가능한 요구 사이에서 좌절감을 느낀 울프를 상상해 본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머니에 돌을 넣고서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걸음걸이를 상상해 본다. 로라는 계속해서 자신의 배를 문지르고 있다. 그것은 아마 호텔에 투숙하는 일 만큼이나 단순할 수도 있어,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호텔 투숙보다 더 간단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 233쪽 -


로라는 시간을 놓치지 않고 매순간을 읽는다. 여기 한순간이 있고, 저기 한순간이 흘러가네,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한 페이지가 막 넘어가려 한다.

그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아들을 향해 침착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이도 웃음으로 화답한다. 녀석은 타버린 초 끄트머리를 핥고 있다. 그 아이는 또 다른 소망을 품는다.  - 321쪽 -



자살 충동을 느끼는 엄마를 보면서 어린 아들 리처드는 무얼 느꼈을까?

리처드의 미소가 한 생명을 구원했듯, 그의 마지막 순간에 클라리사가 미소를 지어보였더라면 그도 구원받았을까?




그렇게 로라 브라운은,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가 결국에는 실패했던 그 여인은, 가정을 뛰쳐 나갔던 그 여인은 그녀를 본따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을 하직했는데도 여전히 살아 남아 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전 남편이 간암에 걸려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난 후에도, 자기 딸이 음주 운전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 그녀는 리처드가 창문을 미끄러져 산산조각 난 유리 위로 떨어져 내린 뒤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

클라리사는 늙은 부인의 손을 꼭 잡는다. 그 외에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 339~340쪽-



그래,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손을 잡아주는 일 말고, 미소를 지어주는 일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때가 되어 사그라드는 저녁 햇살 앞에서...

철이 되어 떨어지는 나뭇잎 앞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 앞에서...

흐릿해지는 옛사랑의 추억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버지니아 울프가 로라 브라운이 그리고 클라리사 로건이 그랬듯이, 삶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위에 펼쳐진 기억의 조각일 뿐이라는 자각말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The Years)』처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써내려간 이 작품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딴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을 직접 체험한다고 생각하고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마이클 커닝햄도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의식의 흐름 속을 헤매다가 이런 작품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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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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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이란 무엇인가?

17세기까지 고전주의자들은 소설을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교훈적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반면,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은 고단하거나 따분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자극제로써의 소설의 역할만을 중시했다. 그러나 19세기 리얼리스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곧 소설이라고 생각했으며, 20세기 예술지상주의자들에게 소설이란 작가와 독자의 정신적 유희('희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술로서의 소설이 인간의 정신적 유희의 결과이자 목적이라면, 인간은 소설을 통해서 어떻게 예술적 감흥을 경험하는가?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정신적 충격과 함께 깊은 희열을 느끼곤 한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ㅡ리ㅡ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서 있는 사 피트 십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고전 명작이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작품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그만큼 오해와 착각도 많이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백경>과 <모비딕>이 사실은 같은 작품이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로리콤(롤리타 콤프렉스)'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롤리타>에는 롤리타가 없다는 것 등등...


아무튼, 여러가지 이유 등으로 고전 명작은 읽기가 쉽지 않다. 설령 어렵사리 읽었다 하더라도 재미나 감동을 받기는 더더욱 어렵다. 고전 명작이니까 무언가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치(고정관념)'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 여러 번의 결심과 상당한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롤리타』는 우려했던 것만큼 불쾌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음 편히 읽히는 작품도 아니었다. 야하거나 충격적인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의외였다. 예술과 외설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치고는 너무 非외설적이라고나 할까.


일단,『롤리타』는 메타픽션의 시조격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메타픽션이란 작가가 독자에게 '지금부터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글쓰기 기법을 말한다. 지금이야 이와 같은 메타픽션이 널리 알려져있지만 『롤리타』가 씌여지고 출간되던 당시에는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꾸며서 독자로 하여금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도록 작품을 쓰는 것이 작가의 임무요 소설의 진리처럼 받들여지던 시대였다. 이를 감안해 볼 때, 나보코프가 그 당시 『롤리타』라는 작품을 통해서 얼마나 전복적인 글쓰기를 시도했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보코프는 이미 소설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고,『롤리타』를 완성한 후 외설 시비가 일자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소설이 이렇게 쓰여질 수도 있구나! 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썼는지보다는 무엇을 썼는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소재는 주제를 위한 하나의 도구 혹은 장치일 뿐, 주제를 압도하거나 넘어서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일까?

작가가 처음부터 명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써내려간 소설을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에 있어서 만큼은 나보코프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흔히 <저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니면 좀 덜 점잖은 표현으로 <그 친구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야?> 하는 질문을 떠올리기가 쉽다.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이 책을 끝내버리겠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없는 그런 작가이다. 어떻게 그걸 쓰게 되었느냐,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등의 질문을 받았을 때, 영감과 배합의 상호작용이라는 낡은 용어들에 의지하는 그런 작가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은, 내가 한 가지 요술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요술을 부리는 마술사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 423쪽-



 

작가가 특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하겠다는 불순한(?) 의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누군가가 '어떤' 생각과 느낌을 누군가로부터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의도를 처음부터 가지고 쓴 작품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독자)로서 매우 불쾌하기 그지없다. 



 

『롤리타』는 분명 페도필리아(pedophillia)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이를 찬양하지도 조장하지도 않는다. 성적 금기를 다룬 정도와 강도만 놓고 본다면,『롤리타』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귄터 그라스의『양철북』이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는다. 『양철북』은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반전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재에 대한 외설시비 논란을 거뜬히(?) 잠재우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사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역시 얼마든지 서구사회에서 환영받는 반전 혹은 반공산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태생으로 볼셰비키 혁명 이후 타국으로 망명했으며, 그의 부친은 러시아 공산주의자에게 저격 당해 사망했고 형은 독일 내 나치 캠프에서 굶어 죽은 슬픈 가족사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의 아내 베라는 심지어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남다른 신분이나 과거를 이용(?)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예술이 현실에서 지나치게 벗어나 미화되는 것 역시 문제지만 현실참여라는 미명 하에 정치적 색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 역시 反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잣대로 예술을 재단하거나 예술가에게 도덕적 임무를 부여하고 요구하는 사회 역시 위험하다.  과거 전체주의 국가와 오늘날 일부 사회주의 국가를 보라. 그들의 예술은 얼마나 도덕적이고 교훈적인가. 선이든 악이든 어떤 경우든 예술이 목적성을 띠게 되면 그 목적을 위해 복무하는 시녀로 전락할 따름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작품이다. 한편, 내가 생각하는 정말 좋은 작품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반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작품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나에게『롤리타』는 이런 작품 중에 하나다.   
  

 

나는 그녀에게  현찰로 사백 달러, 그리고 수표로 삼천육백 달러가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조심스럽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는 내 작은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는 아름답게 꽃피었다.  『정말』 그녀는 고통스럽게 힘주어 말했다. 『사천 달러를 주시는 거예요?』 나는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싸안고 지금까지 흘렸던 어떤 눈물보다 더 뜨겁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 턱으로 흘러내렸고 몸은 불덩이가 되었으며 코가 막혀 왔다.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자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날 만지면 그대로 죽을 것 같다. 넌 정말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같이 갈 희망이 전혀 없는 거야? 그것만 말해 줘.』

『네』 그녀는 말했다. 『네, 여보, 전혀 없어요』

그녀는 전에 한번도 나를 여보라고 부른 적이 없다.

『가지 않아요. 그건 분명해요. 큐에게 돌아가는 게 차라리 나아요. 제 말은ㅡ』

그녀는 이 상황에 알맞은 말을 찾고 있다. 내가 마음속으로 그 말들을 대신해 준다 (<그는 내 마음을 망가뜨렸고, 아빤 그저 내 삶을 망가뜨렸어요.>) 

『 제 생각엔』 그녀는 말을 잇는다ㅡ『아이쿠』ㅡ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주워올린다.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 돈만 있으면 우린 다음주쯤, 떠날 수 있어요. 제발 울지 마세요. 이해해 주세요, 아빠. 맥주를 더 갖다 드릴게요. 아, 제발 울지 마세요. 그동안 너무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런 게 삶인가 봐요.』

나는 내 얼굴과 손가락을 씻었다. 그녀는 선물을 보고 웃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딕을 부르려고 했다. 나는 곧 갈테니 그를 부르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화에 궁색해진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 381쪽-


험버트 험버트,

그는 짐승으로 살았지만 인간으로 죽었다.

비록, 사랑이었지만...


돌로레스 헤이즈,

그녀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기에 결코 정복당하지 않았다.

설령, 사랑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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