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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평점 :
그녀는 내게 마음 속의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늘 제대로 만나고 싶었고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었지만, 언제나 실패하기만 했던 그녀...
그런 그녀를, 아니 그런 그녀가, 올여름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마치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듯, 텅빈 강의실에서 시끄러운 카페에서 흔들리는 전철안에서 그녀가 남긴 두 통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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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가 서간체로 쓴「자기만의 방」과「3기니」를 유서처럼 남기고 우리곁을 떠난지 올해로 76년이 흘렀다.
이 긴 세월동안 '자기만의 방'과 '독립된 소득'을 가지게 된 여성의 비율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지만, 그녀가 끝까지 추구했던 남여평등과 인류평화는 여전히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남여 간 격차는 더 크게 더 교묘하게 확대되었고, 인류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크고 작은 전쟁을 일삼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녀가 살았던 시대처럼 여성 공무원이 결혼과 동시에 퇴직을 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지만 고위직에 오른 여성의 비율은 비참할 정도로 낮으며, 그 당시 영국 여성이 타국의 남성과 결혼을 하면 자동적으로 영국 국적이 박탈되던 관행은 사라졌지만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은 여전하며, 대학의 도서관조차 남성을 동반하거나 사유서를 갖춰야 입장이 가능했던 당시와 같은 상황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대학 진학률은 남성보다 더 높음에도불구하고 취업률에서는 남성에 훨씬 못미치는 기현상에 직면해 있다.
더 놀라운 건,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당시보다 여성의 지위가 나아지기는커녕 상대적으로 더 악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안타까운 건 바로 이 점이 그녀를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작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녀가 꿈꾸웠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요즈음뿐 아니라 과거 이백 년 동안에도 가난한 시인들은 아주 작은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영국의 가난한 집 아이들은 위대한 작품들을 산출하는 지적 자유로 해방될 희망이 아테네 노예의 아들만큼이나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을 픽션에만 한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니까요. -「자기만의 방」163~164쪽 中-
'여성 존재의 본질은 남성에 의해 부양되고 남성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은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다'
'교육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좋은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것이 나쁜 일이라면, 돈을 벌기 위해 마음을 파는 것은 훨씬 더 나쁜 일이다'
이와같은 그녀의 '발견'과 '발언'은 오늘날 가치관으로 비춰봐도 여전히 놀랍고 날카로운 빛을 발한다.
「자기만의 방」보다 십여 년 늦게 씌여진 「3기니」는 전자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의 생각들을 더한층 체계화시키고 구체화시킨 작품이다.
그녀는 '전쟁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답을 제시한다.
첫째, 여성 대학 재건 단체에 1기니를 기부할 것.
둘째, 여성의 전문직 진출을 지원하는 단체에 1기니를 기부할 것.
셋째, 인류의 정의 평등 자유를 수호하는 단체에 1기니를 기부할 것.
언뜻 보면 이 세가지 답변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그녀가 직접 밝혔다시피 동일한 목적 즉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대의에 기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여성이 교육을 받게 되면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좀더 전문적인 일을 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므로, 전쟁과 같은 파괴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에 대한 협조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 다음으로 교육받은 여성들이 전문직에 진출하면 생계를 더이상 남성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고 남성 또한 가족부양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나 비인간적인 삶이나 자원 쟁탈 전쟁에 빠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며, 끝으로 인류의 정의 평등 자유가 지켜진다면 더이상 인류의 한편(혹은 '남성')이 행복하기 위해서 인류의 또다른 한편(혹은 '여성')을 불행에 빠트리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의 주장과 사유들은 그동안 많은 지적과 비난을 받아왔다.
특히, '페미니스트'를 명백히 부정하는 듯한 발언 등은 그녀를 페미니스트 작가로 알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어떤 구태의연한 단어, 한창때에 무척 많은 해를 입혔고 지금은 폐물이 된 사악하고 타락한 단어를 파괴하는 것보다 더 적합한 의식이 있을까요? 우리가 지적한 그 단어는 바로 '페미니스트'입니다. 그 단어는 사전에 따르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제 그 유일한 권리, 생계비를 벌 수 있는 권리가 획득되었으므로, 그 단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는 단어는 죽은 단어이자 타락한 단어이지요. 그러므로 그 시체를 화장하는 의식으로 이 순간을 축하합시다. (...) 연기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그 단어는 파괴되었지요. 축하의 결과로 무엇이 생겨났는지 보십시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소멸되었고 공기가 맑아졌습니다. 더욱 청명한 공기 속에서 우리 눈에 드러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동일한 대의를 위해서 함께 일하는 여성과 남성입니다. 과거를 덮었던 구름도 걷혔습니다. 19세기의 여성ㅡ챙이 쑥 나온 모자를 쓰고 숄을 두른, 기묘해 보이는 죽은 여성들ㅡ은 무엇을 위해서 일했을까요?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대의입니다. "우리의 주장은 오직 여성의 권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조세핀 버틀러입니다. "그것은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심원하다. 그것은 모든 인간ㅡ모든 남성과 여성ㅡ이 정의와 평등과 자유라는 위대한 원칙을 몸소 누릴 수 있는 권리의 주장이다." 이 말은 당신의 말과 동일합니다. 이 주장은 당신의 주장과 동일하지요.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며 분노를 금치 못했던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은 실은 당신이 주창하는 운동의 전위대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상대하는 적과 동일한 적에 대항하여 동일한 이유에서 싸웠습니다. 당신이 파시스트 국가의 폭정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처럼 그들은 가부장적 국가의 폭정에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치렀던 것과 동일한 싸움을 그저 지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3기니」337~338쪽 中-
자, 과연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스트들의 적일까?
그녀는 분명 '페미니스트'라는 구태의연한 단어를 불살라 버리자고 주장했다.
그렇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없애자고 주장한 것이지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단어 하나로 인간을 정의하고 남성과 여성을 구분지어 서로 충돌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그녀가 꿈꿨던 세상은 전 인류의 평화요 정의요 자유였으므로...
그렇다면, 역시 자주 그 본질이 왜곡되어 왔던 '전쟁을 막기 위해서 모두 무관심한 아웃사이더가 되자'는 그녀의 주장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녀의 '무관심'의 본질이고, 이 무관심으로부터 어떤 행동이 잇따라야 합니다. 그녀는 애국적 시위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형태의 국가적 자화자찬에도 동의하지 않고, 전쟁을 고무하는 어떠한 박수 부대나 청중에도 끼지 않으며, '우리의' 문명이나 '우리의' 지배를 다른 종족에게 강요하려는 욕망을 부추길 군사 전시회, 경기, 군악 연주회, 시상식과 다른 의식들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서약할 것입니다. 게다가 사적인 생활의 심리로 미루어볼 때,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이 이처럼 무관심을 행사하면 전쟁을 방지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흥분을 일으키는 주축이 될 때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행동의 자유를 전적으로 허용할 때 훨씬 더 행동하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일상의 심리에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3기니」349쪽 -
그녀는 국가중심주의와 애국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전쟁과 같은 집단폭력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자양분으로 삼아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전쟁을 막기 위해선 자국(민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충분한 사유의 결과이자 놀랍도록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다 알다시피, 그녀는 영국인이다.
오늘날까지도 영국인들은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ㅡ영광이라고 쓰고 착취와 약탈이라고 읽어야 하지만ㅡ을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기꺼이 영국 '국민'이 아닌, 전세계의 '시민'이자 '국민'이 되고자 했다.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과거'에 박수 칠 수 없다는, 그리고 그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그녀의 고백을, 과연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미친 여자의 넋두리'정도로 폄하해야 옳은가.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어째서 명민했던 어린 소녀가 가정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신경쇠약에 시달려야만 했는지를...
어째서 뛰어났던 한 여성이 외투 주머니 가득 돌멩이를 집어넣은 채, 스스로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야만 했는지를....
어째서 고인이 된지 칠십 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녀의 조국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덜 알려지고 덜 추앙받는지를....
그녀의 문장들은 읽기가 쉽지 않다.
특히, 백여 페이지가 넘는「3기니」의 각주들은 독자를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성별을 떠나 지금보다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볼 것을 권한다.
한번에 잘 만나주지 않더라도 여러번 시도해 보길 바란다.
그녀가 작가로서 충실했던 만큼, 우리 또한 독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그녀를 두번 죽이려는 세상에서 그녀를 지키는 길이자 다시 부활시키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