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파리
목수정 지음 / 꿈의지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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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좋아할 거라면서 누군가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성격상 여행을 매우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는지라 평소에도 여행 서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새로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도 아닌, 이미 닳을대로 닳은 프랑스 파리라니...  기껏해야 '파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어느 보보(보헤미안 부르주아)의 하릴없는 '덕질'이겠거니 싶었다. 그저 추천해준 사람과 앞으로 몇 차례의 만남이 더 있을 예정인지라 면전에서의 난처함이나 면해볼 요량이었다.


 

수천 번쯤 사진으로 보았던 어떤 곳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두 가지다. 마침내 동경하던 그곳에 이른 가슴 벅참. 그리고 보자마자 금세 식상해져서, 온몸으로 그것을 감각하기보다, 사진 한 장 박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이다. 자주 우린 명소에 가서 실망을 경험한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실망할까 봐 실체에 다가서길 외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46쪽



 

순간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어디 명소뿐이겠는가.

사람이나 책 혹은 어떤 사상이나 행위 등등 한때 열렬히 좋아하고 추종했던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결국 실망하고 외면한다. 본질보다는 겉모습(허상)을 좋아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드물긴 하지만 욕망이 제거된 시선으로 본질에 다가서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켜 파리라는 도시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에게 파리는, 우리 각자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존재하듯, 그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이 집에서 뒹굴던 잡동사니가 저 집으로 옮겨져서 다시 뒹굴다가 몇 년 뒤, 다시 태양 아래로 이끌려 나와 새 주인을 기다리고, 그 사이에 1~2유로의 돈이 오가는 이 다락방 비우기('비드 그리니에 Vide Grenier')의 룰. 마음만 먹으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물물교환에 가까운 사람들 간의 거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살이가 자본의 논리에서 조금만 길을 틀어도, 우리 얼굴엔 생존을 위한 고단한 긴장 대신, 느긋한 휴식의 미소가 어른거린다는 사실도. -66쪽



 

재미있는 건, 정류장을 안내하는 방송 목소리가 한국은 낭랑한 20대 여자 목소리인데 반해, 여기는 차분한 중년 여성, 혹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라는 사실 (새로 생긴 트랩에서 그것은 종종 5살 짜리 아이의 목소리로 대치되곤 한다). 이는 프랑스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안내 방송 목소리에 해당되는 사실이기도 한데, 20대 여자만이 여자로서의 유용성을 인정받는 듯한 우리 사회의 암묵적 풍경과는 사뭇 다른 대목이다. -75쪽



 

'어...?!'

글쓴이의 사뭇 다른 시선에 한껏 풀어져있던 자세를  나도 모르게 바로 잡았다.

최소한 이 책만큼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베르사이유 궁전과 센느강이 얼마나 화려하고 매혹적인지 혹은 파리가 얼마나 지저분하고 파리지앵들이 불친절한지 등등으로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보통 여행 에세이들은 자아도취(혹은 자기자랑) 아니면 자기발견(혹은 자기개발) 로 적당히 치장되어, 책 한 권 정도에 불과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2~30대 여성 독자들의 환상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출판되는 것 같다. 그래서 책을 펼쳤을 때 행복감에 빠져들게 해야지 불편한 감정이나 현실 인식을 불러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불문율을 교묘하게 깨뜨린다.


그 후, 나는 파리 시내에 있는 가장 큰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를 종종 들렸다. 오자마자 접했던 하나의 인상적인 죽음은 삶의 끝으로부터 이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내게 전했고, 나는 그 길을 따랐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도시에서 내가 일방적으로나마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은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을 만나 차분히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82쪽



글쓴이에 대한 호기심이 존중감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솔직 발랄하다고 하기엔 가닿는 시선들이 너무 넓고 깊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훨씬 더 잘 쓸 수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살짝 힘을 빼고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랄까. 

분명 자신만의 '히스토리(history)'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리라.   


니체는 '구걸은,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친구로 대할 수 없게 만드는 나쁜 행위'라고 규정한 바 있다. 거지는 스스로를 불쌍하게 만듦으로써 뭔가를 받고자 하는 자이기 때문이란 거다. 반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부의 재분배라는 차원에서, 그에게 구걸하는 모든 걸인에게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거지들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내 안에서 니체와 사르트르가 싸우는 걸 느낀다. 대부분은 사르트르가 승리한다. 그들에게 내 동전 몇 닢을 털어주는 것이 교회에 가서 헌금하는 것보단 훨씬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최종적으로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돈을 건네게 한다. -257쪽


 

파리의 수많은 거지와 소매치기들을 보면서 이렇게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설령 서로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 뒷모습만을 보며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다. 


 

야트막한 능선으로 이루어진 뷔트 쇼몽(Buttes Chaumont) 공원에서 오전 한때를 보내다가 파리의 먹자골목인 '붉은 아이들의 시장(Marche des Enfants Rouges)'에서 쌀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센느강변을 따라 걷다가 '라탱 구역(Quartier Latin)' 으로 접어들어서 2,30년대 고전영화 한 편을 감상하거나, 입장료가 무료인 '빅토르 위고의 집' 혹은 '기메 박물관'을 찾아가리라.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아르스날 항구(Port Arsenal) 에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와인 한잔으로 하루를 마감해도 좋겠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되었네요. 저는 잘 지냅니다) 라고 속삭이면서...  



나는 이 책으로 목수정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지만, 한 눈에도 저자의 '대표작'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엔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책들이 셀 수도 없이 많고, 그녀의 눈길이 머물렀던 세계가 넓디 넓으며, 무엇보다도 그녀가 잠 못들고 고민하며 지새웠을 밤들이 너무 길었을 거라는 걸, 그녀의 문장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여행 안내서라는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느낌과 감상을 내세우지 않는다. 최대한 멋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한 흔적들 속에서 오히려 저자의 깊은 내공이 느껴졌다.  세상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알고,  세상과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도전도,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여정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녀의 또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더불어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해준 분에게도 감사 인사를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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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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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람을 세 번 미치게 한다. 

한 번은 제목에, 다른 한 번은 내용에,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그 파급력에...

아마 나뿐만은 아니리라.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읽을 수 '없는' 이 책을, '읽어버린' 사람이라면, 이미 '미쳤'거나 곧 '미쳐'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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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의 싯구에서 인용했다는 제목을 보고는 종교서적인 줄로만 알았다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보고는 책의 혁명이나 혁명에 관한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종교 서적도 혁명에 관한 이론서도 아니었고, 서평집은 더더욱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은 '혁명서'다.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일, 바로 혁명을 선동하고 촉구하는 책이다.

 

 

 

 

 

16세기초 루터는 성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까지 절대진리라고 믿어왔던 준거들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성직자들이 주장한 것들은 성서에는 적혀 있지 않거나 다르게 적혀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이나 선지자들처럼 침묵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직자를 통해 전해듣기만 했던 성서를 직접 읽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중세는 무너지고 문예부흥을 거쳐 인류 역사는 근대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다.  


사실, 인류의 혁명은 개인의 책읽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이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처럼 뻔한 주장을 반복함에도불구하고 전혀 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러가지로 이야기해왔습니다만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정당하게도 어딘가에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검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독서의 묘미'가 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知)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정보로서 읽는다면 괜찮겠지만, 그것이 과연 '읽는다'는 이름을 붙일 만한 행위일까요. 그렇게 정보로 환원되는 것밖에 상대하지 않으니 당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42~44쪽

 

 

TV 방송 보듯 그냥 습관적으로 봤을 뿐(watch),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거나 내면의 불편한 감정들을 억누르면서 진짜 읽었다(read)고 할 수 있는 책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책들 중, 반은 읽으나 마나 한 책들이었고, 그 반 중 반은 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책들이었으며, 나머지 반 중 반만 진짜 읽은 책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이마저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을, 바로 읽을 수 '없는' 이 책을, 읽어버렸으므로.


'책을 읽는다'는 건,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책들은 무의식적으로 걸러내고 회피하게 된다. 소위 '취향적 독서'란, 내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착한(?) 책들만 보는 걸 말한다. 이런 책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엔 안성맞춤이겠지만 읽으나 마나하거나 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진통제와 같아서 일시적으로 통증을 잊게 해주지만 치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병을 악화시킨다.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식견의 끄트머리에 섰을 때, 인간은 두려움에 몸부림친다.  

소멸을 두려워하고 소멸과 동시에 모든 건 끝이라는 편협한 개인적 사고야말로 우리를 이기주의자로 만들고 종말론자로 만들며, 종말론은 전쟁조차 불사하게 만든다.  


이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훨씬 거대하고 유구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내 삶의 의미를 찾지 마라.

내 삶속에 남과 다른 특별한 의미 따위는 없다.

누구에게나 삶, 그 자체가 바로 의미다. 

 

 

 

 

좋은 약은 입에 쓰듯 좋은 책도 쓰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위안을 주는 책이 아니라 이처럼 나를 뒤흔드는 책이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매우 취약한 상태여서 달콤한 목소리로 구원과 행복을 약속하며 다가오는 손길이 있다면, 주저않고 맞잡을 것이므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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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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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기회가 된다면 백석같은 사람과 연애 한번 해보고 죽고 싶다'는  어떤 이의 진담같은 농담을 듣고,  「백석 평전」을 읽었다.  「백석 평전」을 다 읽고나니, 뜬금없이 누군가가 한없이 그리워져서 안도현의  「연어」를 펼쳐 들었다. 



 

그리움, 이라고 일컫기엔 너무나 크고,

기다림, 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넓은 이 보고 싶음.

삶이란 게 견딜 수 없는 것이면서 또한 견뎌내야 하는 거래지만,

이 끝없는 보고 싶음 앞에서는

삶도 무엇도 속수무책일 뿐이다.     - 도현 <연어>  39쪽 -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가 나온지도 벌써 이십 년이 지났건만, 그리움이라고도 기다림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이 간절함은 변함없이 속수무책으로 세월을 삭혀내고 있다.


언제 만나도 좋은 사람 극히 드물듯, 언제 읽어도 좋은 문장 역시 드물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좋은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인 거고, 진짜 좋은 문장일 뿐이다. 다른 건 없다. 아무것도...


일찍이 안도현의 문장들을 읽어왔고 좋아했지만, 진짜 좋은 문장인 줄은 몰랐었다.

백석의 시들을 읽고 나서야 안도현의 시들이 다시 보였고, 그속엔 분명 월북시인 백석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

속절없이 푹푹 눈은 내리고 연인을 향한 시적 화자의 마음도 속수무책 쌓여만 간다. 언뜻보면 사랑에 목매여 세상사 나몰라라 하는 연약한 실패자의 한탄같다.  

속으로 '에잇, 못난 놈'하고 돌아서려는데,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되묻는 목소리에 그만 발목이 잡히고 만다. 


그래, 남들 눈엔 기생과 모던보이의 불장난으로밖에 안 보였겠지만 백석은 자야에게 자야는 백석에게 북풍한설 모진 추위도 견뎌낼 수 있는 뜨거운 연탄과 같은 존재였으리라.

 

 

 

 

 

 

백석은 1912년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열 아홉살 때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일찌감치 문학적 감수성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장학금을 받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서울과 함흥 등지에서 각각 신문기자와 영어교사로 재직하였고, 1936년 한정판(100부)으로 시집  『사슴』 을 남긴 후, 해방과 함께 '사라진' 시인이다.



하수상한 그 시절, 사라진 시인이 어디 백석 한명 뿐일까.

이육사가 그러했고, 윤동주도 그러했다. 특히 백석처럼 북국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 <사슴>을 힘겹게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는 밤을 새워 필사를 했을 정도로 백석 시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윤동주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시인들이 백석의 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며, 백석은 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신경림과 안도현이야말로 '백석 키즈'로 불릴 정도로 백석의 시풍과 닮아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 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한때 무던히도 읊어댔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시를 마음껏 읊을 수 있어서 견뎌낼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라는 걸.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며 그리움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사랑을 아는 것도 아니며, 가난하지 않다고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다.

가난하지 않아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백석의 시에는 평안도 사투리와 향토 음식들과 의성어 의태어들이 살아 움직인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기교에만 의존했다면 그의 시들은 입안에서만 맴돌다 그쳤을 것이다. 그는 전통과 지방색과 토착어를 자기 시의 바탕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의연한 기개와 도도한 세련미를 놓치지 않았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中-




백석의 시는 이상(李箱)처럼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서구와 일본을 모방한 어쭙잖은 모더니즘이나 탐미주의 시와도 구별되며, 경향적인 카프계열의 시인들과도 다른 길을 찾아 걸어갔다. 이광수를 필두로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 정지용, 김기림, 최재서, 이태준, 백철, 임화, 김억, 김동인, 김기진, 박영희, 함대훈, 이기영, 이석훈, 최정희, 모윤숙, 노천명 등 주변의 많은 문인들이 친일로 돌아섰지만, 그는 그 어떤 노선에도 가담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를 독립투사로 칭송할 순 없어도 북한 정권에 순응한 '빨갱이'로만 보아서도 안된다. 북한에서 그가 러시아 문학작품 번역만에 몰두하고 동화시쪽으로 분야를 바꿔 창작 활동을 이어간 것과 삼수갑산 오지로 숙청당한 후 체제 찬양시들을  쓴 것 등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바다가 물웅덩이에 깊지도 얕지도 않은

집게 네 형제가 살고 있었네


막내 동생 하나를 내어놓은 집게네 세 형제

그 누구나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웠네


남들 같이 굳은 껍질쓰고

남들 같이 고운 껍질 쓰고

뽐내며 사는 것이 부러웠네


그래서

맏형은 굳고 굳은

강달소라 껍질 쓰고 강달소라 꼴을 하고 강달소라 짓을 했네


그래서

둘째 동생은 곱고 고운 배꼽조개 껍질 쓰고 배꼽조개 꼴을 하고 배꼽조개 짓을 했네


그래서

셋째 동생은 곱고도 굳은 우렁이 껍질 쓰고 우렁이 꼴을 하고 우렁이 짓을 했네


그러나

막내동생은 아무것도 아니 쓰고 아무 꼴도 아니 하고 아무 짓도 아니 하고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워 아니 했네


그런데

어느 하루 밀물이 많이 밀어 물웅덩이 밀물에 잠겨버렸네


이때에 그만이야

강달소라 먹고 사는 이빨 센 오뎅이가 밀물 다라 떠들어 와

강달소라 보더니만 우두둑 우두둑 깨물었네


강달소라 껍질 쓰고 강달소라 꼴을 하고 강달소라 짓을 하던 

맏형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런데

어느 하루 난데없는 낚시질꾼 주춤주춤 오더니 물웅덩이 기읏했네


이때에 그만이야

망둥이 미끼하는 배꼽조개 보더니만

낚시질꾼 얼른 주워 돌에 놓고 돌로 쳐서

오지끈 오지끈 부서졌네


배꼽조개 껍질 쓰고 배꼽조개 꼴을 하고 배꼽조개 짓을 하던

둘째 동생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런데 

어느 하루 부리 굳은 황새가 진창 묻은 발 씻으러 물웅덩이 찾아왔네


이때에 그만이야

황새가 좋아하는 우렁이 하나 기어가자

황새는 굳은 부리 우렁이 등에 쿡 박고

오싹 바싹 쪼박냈네

우렁이 껍질 쓰고 우렁이 꼴을 하고 우렁이 짓을 하던

셋째 동생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러나

막내동생 아무것도 아니 쓰고 아무 꼴도 아니 하고 아무 짓도 아니 해서

오뎅이가 떠와도 겁 안 나고

낚시질꾼 기읏해도 겁 안 나고

황새가 찾아와도 겁 안 났네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워 아니하는

막내동생 집게는 평안하게 잘살았네  

                                                                                     - 백석, 「집게네 네 형제」 -




 

누가 읽어봐도 동화시로써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시속에서도 안도현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물론 그가 백석을 표절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오마주라면 또 모를까.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 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드렸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안도현  「스며드는 것」 -



이제는 글을 써서 사는 삶보다 글도 쓰며 사는 삶을 살고 있지만, 불쑥불쑥 글만 써도 되는 삶을 꿈꾸곤 한다. 

특히, 시를 그것도 좋아했던 시를 읽을 때면 밀물처럼 멀미가 밀려오곤 한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보다. 미련이 남았다는 건 그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제는 최선을 다할 자신이 없다.


굳이 내 글을 팔지 않아도 삼시 세끼 거룩한 밥상을 마주할 수 있고, 미래의 어느날 오래된 오늘을 꺼내봤을 때 남루하지 않을 추억 몇 조각 떠올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안도현 시인이 백석 시인을 떠올리고, 내가 안도현 시인을 떠올리는 것처럼...



시를 읽으면 삶이 깊어진다!
시를 읽어도 세월은 가고, 시를 읽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러나 시를 읽으며 세월을 보낸 사람에 비해 시를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낸 사람은 불행하다. 시 읽기가 새롭고 다양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경험이라면,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의 경험은 얕아서 찰방거리고 추억은 남루할 테니까 말이다.    

                                                             - 안도현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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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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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게 마음 속의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늘 제대로 만나고 싶었고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었지만, 언제나 실패하기만 했던 그녀...


그런 그녀를, 아니 그런 그녀가, 올여름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마치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듯, 텅빈 강의실에서 시끄러운 카페에서 흔들리는 전철안에서 그녀가 남긴 두 통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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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가 서간체로 쓴「자기만의 방」과「3기니」를 유서처럼 남기고 우리곁을 떠난지 올해로 76년이 흘렀다.

이 긴 세월동안 '자기만의 방'과 '독립된 소득'을 가지게 된 여성의 비율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지만, 그녀가 끝까지 추구했던 남여평등과 인류평화는 여전히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남여 간 격차는 더 크게 더 교묘하게 확대되었고, 인류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크고 작은 전쟁을 일삼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녀가 살았던 시대처럼 여성 공무원이 결혼과 동시에 퇴직을 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지만 고위직에 오른 여성의 비율은 비참할 정도로 낮으며, 그 당시 영국 여성이 타국의 남성과 결혼을 하면 자동적으로 영국 국적이 박탈되던 관행은 사라졌지만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은 여전하며, 대학의 도서관조차 남성을 동반하거나 사유서를 갖춰야 입장이 가능했던 당시와 같은 상황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대학 진학률은 남성보다 더 높음에도불구하고 취업률에서는 남성에 훨씬 못미치는 기현상에 직면해 있다. 

 


더 놀라운 건,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당시보다 여성의 지위가 나아지기는커녕 상대적으로 더 악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안타까운 건 바로 이 점이 그녀를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작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녀가 꿈꾸웠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요즈음뿐 아니라 과거 이백 년 동안에도 가난한 시인들은 아주 작은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영국의 가난한 집 아이들은 위대한 작품들을 산출하는 지적 자유로 해방될 희망이 아테네 노예의 아들만큼이나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을 픽션에만 한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니까요.  -「자기만의 방」163~164쪽 中-



 

'여성 존재의 본질은 남성에 의해 부양되고 남성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은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다'

'교육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좋은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것이 나쁜 일이라면, 돈을 벌기 위해 마음을 파는 것은 훨씬 더 나쁜 일이다'



이와같은 그녀의 '발견'과 '발언'은 오늘날 가치관으로 비춰봐도 여전히 놀랍고 날카로운 빛을 발한다.



 

「자기만의 방」보다 십여 년 늦게 씌여진 「3기니」는 전자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의 생각들을 더한층 체계화시키고 구체화시킨 작품이다. 



 

그녀는 '전쟁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답을 제시한다.


첫째, 여성 대학 재건 단체에 1기니를 기부할 것.

둘째, 여성의 전문직 진출을 지원하는 단체에 1기니를 기부할 것.

셋째, 인류의 정의 평등 자유를 수호하는 단체에 1기니를 기부할 것.


 

언뜻 보면 이 세가지 답변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그녀가 직접 밝혔다시피 동일한 목적 즉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대의에 기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여성이 교육을 받게 되면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좀더 전문적인 일을 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므로, 전쟁과 같은 파괴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에 대한 협조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 다음으로 교육받은 여성들이 전문직에 진출하면 생계를 더이상 남성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고 남성 또한 가족부양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나 비인간적인 삶이나 자원 쟁탈 전쟁에 빠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며, 끝으로 인류의 정의 평등 자유가 지켜진다면 더이상 인류의 한편(혹은 '남성')이 행복하기 위해서 인류의 또다른 한편(혹은 '여성')을 불행에 빠트리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의 주장과 사유들은 그동안 많은 지적과 비난을 받아왔다.

특히, '페미니스트'를 명백히 부정하는 듯한 발언 등은 그녀를 페미니스트 작가로 알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어떤 구태의연한 단어, 한창때에 무척 많은 해를 입혔고 지금은 폐물이 된 사악하고 타락한 단어를 파괴하는 것보다 더 적합한 의식이 있을까요? 우리가 지적한 그 단어는 바로 '페미니스트'입니다. 그 단어는 사전에 따르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제 그 유일한 권리, 생계비를 벌 수 있는 권리가 획득되었으므로, 그 단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는 단어는 죽은 단어이자 타락한 단어이지요. 그러므로 그 시체를 화장하는 의식으로 이 순간을 축하합시다. (...) 연기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그 단어는 파괴되었지요. 축하의 결과로 무엇이 생겨났는지 보십시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소멸되었고 공기가 맑아졌습니다. 더욱 청명한 공기 속에서 우리 눈에 드러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동일한 대의를 위해서 함께 일하는 여성과 남성입니다. 과거를 덮었던 구름도 걷혔습니다. 19세기의 여성ㅡ챙이 쑥 나온 모자를 쓰고 숄을 두른, 기묘해 보이는 죽은 여성들ㅡ은 무엇을 위해서 일했을까요?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대의입니다. "우리의 주장은 오직 여성의 권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조세핀 버틀러입니다.  "그것은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심원하다. 그것은 모든 인간ㅡ모든 남성과 여성ㅡ이 정의와 평등과 자유라는 위대한 원칙을 몸소 누릴 수 있는 권리의 주장이다."  이 말은 당신의 말과 동일합니다. 이 주장은 당신의 주장과 동일하지요.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며 분노를 금치 못했던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은 실은 당신이 주창하는 운동의 전위대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이 상대하는 적과 동일한 적에 대항하여 동일한 이유에서 싸웠습니다. 당신이 파시스트 국가의 폭정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처럼 그들은 가부장적 국가의 폭정에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치렀던 것과 동일한 싸움을 그저 지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3기니」337~338쪽 中-


 

자, 과연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스트들의 적일까? 

그녀는 분명 '페미니스트'라는 구태의연한 단어를 불살라 버리자고 주장했다.

그렇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없애자고 주장한 것이지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단어 하나로 인간을 정의하고 남성과 여성을 구분지어 서로 충돌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그녀가 꿈꿨던 세상은 전 인류의 평화요 정의요 자유였으므로...



 

그렇다면, 역시 자주 그 본질이 왜곡되어 왔던 '전쟁을 막기 위해서 모두 무관심한 아웃사이더가 되자'는 그녀의 주장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녀의 '무관심'의 본질이고, 이 무관심으로부터 어떤 행동이 잇따라야 합니다. 그녀는 애국적 시위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형태의 국가적 자화자찬에도 동의하지 않고, 전쟁을 고무하는 어떠한 박수 부대나 청중에도 끼지 않으며, '우리의' 문명이나 '우리의' 지배를 다른 종족에게 강요하려는 욕망을 부추길 군사 전시회, 경기, 군악 연주회, 시상식과 다른 의식들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서약할 것입니다. 게다가 사적인 생활의 심리로 미루어볼 때,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이 이처럼 무관심을 행사하면 전쟁을 방지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흥분을 일으키는 주축이 될 때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행동의 자유를 전적으로 허용할 때 훨씬 더 행동하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일상의 심리에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3기니」349쪽 -


그녀는 국가중심주의와 애국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전쟁과 같은 집단폭력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자양분으로 삼아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전쟁을 막기 위해선 자국(민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충분한 사유의 결과이자 놀랍도록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다 알다시피, 그녀는 영국인이다. 

오늘날까지도 영국인들은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ㅡ영광이라고 쓰고 착취와 약탈이라고 읽어야 하지만ㅡ을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기꺼이 영국 '국민'이 아닌, 전세계의 '시민'이자 '국민'이 되고자 했다.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과거'에 박수 칠 수 없다는, 그리고 그 혜택을 마음껏 누리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그녀의 고백을, 과연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미친 여자의 넋두리'정도로 폄하해야 옳은가.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어째서 명민했던 어린 소녀가 가정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신경쇠약에 시달려야만 했는지를...

어째서 뛰어났던 한 여성이 외투 주머니 가득 돌멩이를 집어넣은 채, 스스로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야만 했는지를....

어째서 고인이 된지 칠십 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녀의 조국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덜 알려지고 덜 추앙받는지를.... 




 

그녀의 문장들은 읽기가 쉽지 않다.

특히, 백여 페이지가 넘는「3기니」의 각주들은 독자를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성별을 떠나 지금보다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볼 것을 권한다.

한번에 잘 만나주지 않더라도 여러번 시도해 보길 바란다.


그녀가 작가로서 충실했던 만큼, 우리 또한 독자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그녀를 두번 죽이려는 세상에서 그녀를 지키는 길이자 다시 부활시키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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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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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Dear My Friend:



 

나는 공적인 관계가 아닌 사적인 만남의 경우에는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습관적으로 그 만남의 의미를 되짚어보곤 해.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만남이었거나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한 만남의 경우에는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든 한때 얼마나 친밀한 사이였든 상관없이 그 인연은 이미 수명이 다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인간 관계는 천칭 저울과 같아서 양쪽의 무게가 똑같지 않으면 결국 무너지고 말지.


네 마음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 나에게 이번 만남은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더이상 미룰 수도 미루고 싶지도 않았어. 

근데 참 신기했던 건, 아주 오랜만에 만났음에도불구하고 어색하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야. 

그만큼 마음 밖에선 멀어도 마음 속에선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일까?


 

난 어떤 말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어. 물론, 오랫동안 물음표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내가 직접 물어보지는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지. 어찌되었든 심적으로 힘든 상황에 있는 너에게 또다른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위로를 해줘야 했던 내가, 너의 미소에 위로받았고 너의 말들에 공감했으며 너의 진심에 감동했단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더 일찍 만날 걸...'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늘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면서 우리의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법이지. 

'지금이 아니었다면 안 되었을 거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잖니.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헤어져선 안 될 사람들이 헤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니? 그건 서로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아닌 미안함 때문이래.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차마 할 수 없으면, 결국 그 사람 곁을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


참!
선물로 전해준 박준의 산문집을 오늘 다 읽었어.

시인의 에세이는 늘 시(詩)같아서, 시시(詩詩)하게 읽어야 제맛이라지만, 나는 편지처럼 읽었단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책을 다 읽고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졌어.  

 

시인처럼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도 하고...

미처 말이 되어보지 못한 소리들이 넋두리가 되어 가슴 속을 맴돌고...

 

 

네가 어느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지... 어디 부분에서 눈시울을 붉혔을지... 알 것 같더구나.


 


관계가 원만할 때는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생각하고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한 사람이 부족하면 남은 한 사람이 채우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가 끝나고 나면 그간 서로 나누었던 마음의 크기와 온도 같은 것을 가늠해보게 된다. 이때 우리는 서운함이나 후회같은 감정을 앓는다. 특히 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연의 끝을 맞이한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후회될 만큼 커다란 마음의 통증을 경험하게 된다. -45쪽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자책과 후회로 스스로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할 때, 속은 내가 속인 나를 용서할 때, 가난이나 모자람 같은 것을 꾸미지 않고 드러내되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그제야 나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57쪽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70쪽


사랑에 대해 내리는 정의들은 너무나 다양하며 그래서 모두 틀리기도 모두 맞기도 하다. 다만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언제나 참일 것이다.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면 그 이유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95쪽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 일은 생각보다 괜찮아요. -148쪽


나는 아버지에게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오늘은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그 정도로 몸이 안 좋다고 운전을 안 할 수 있나. 아프다고 해서 안 해도 되는 일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아." 하며 웃었다. 나는 아버지의 웃음에 서운하고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169쪽



 

물론, 너는 이미 '감'을 잡았겠지만 내 글을 읽을 때엔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게 몇 가지 있단다.

 


 

첫째는, 내가 쓴 책 리뷰들은 책 내용과는 별반 상관이 없다는 점이야. 그럼에도불구하고 책리뷰란에 포스팅을 하는 건, 그 책을 읽고 나서 쓴 글이기 때문이지. 만약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쓰여질리 없는 글들이니까...

 


 

둘째는, 나는 정말 좋아하면 '침묵'하는 버릇이 있단다. 

기록은 망각을 막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망각을 불러오는 핑계가 되기도 하지. 너무 좋아하는 것들은 표현되어질 수 없고 표현되어져서도 안된다고 생각해. 물론 망각되어져서도 안되겠지. 그렇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그 모든 사랑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기고 되새겨져서 마음의 무늬가 되는 거란다. 


 

 

셋째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들과 해야할 말들은 리뷰에 다 담겨 있다는 점이야.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내 말들보다는 내 글들 속에서 찾아야 돼. 말은 한번 하고, 한번 들으면 끝이지만, 글은 여러번 반복해서 씌여지고, 읽혀질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말보다 훨씬 더 정직할 수밖에 없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날 '커피 홀릭'이라고 한 말에는 약간의 해명(?)이 필요할 것 같구나.

나는 커피숍에 가면 항상 커피를 주문하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는 늘 커피만 마신다'고 말해서, 나도 그만 무의식적으로 '나는 커피 홀릭'이라고 인식해버렸던 것 같아.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평소 나는 차를 더 많이 마시거든. 그래서 어쩌다 커피숍을 가게 되면 차 대신 다른 음료 즉 커피를 주문하게 되는 거야. 너를 만난 그날에도 오전에 집에서 한잔 그리고 너와 만나서 두 잔, 총 석잔을 마셨을 뿐이건만 '불면증'에 시달렸단다. 


 

사실, 커피 석잔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이라고 할 수는 없지. 어쩌면 그날밤 내가 잠들지 못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을지도 몰라...


 

이제, 이 글의 본론이자 나의 진심을 말해야 할 것 같구나.


사실, 그날 눈물을 흘린 건 너만이 아니었단다.

너와 서둘러 헤어졌던 건 시간이 늦어서가 아니라 조금만 더 있으면 나도 곧 눈물을 보일 것만 같아서였어. 수술한지 며칠 안되서 오래 걸을 수 없다는 너를 배웅하고, 지하철역까지 걸어와선 화장실에 들려 손을 씻고 너에게 문자를 보냈더랬지. 그리고 전철 안에서 이 책을 읽기 위해 펼쳐들었다가, 그제서야 "**문고에는 이 책이 없더라고요." 라는 너의 한마디가 떠올랐지...


 

그날 너는, 내가 너를 배웅하고 혼자 걸어왔던 그 길을 두번 왕복했던 건 아니었을까?

지하철역에서 내려 약속장소인 **문고까지 걸어왔다가 이 책이 없다고하니까 다시 00문고까지 걸어가서 사온 거였어. 약속시간에 딱 1분 늦게 도착했으니 늦지 않으려고 서둘렀을 테고... 건강한 성인의 걸음으로도 반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 거리를 수술한지 얼마 안 된 몸으로 걸었던 거였어, 너는...


 

 

(울컥)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까 함께 울 걸 그랬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니까....



친구야!

앞으로는, 우리 혼자 울지 말고 함께 울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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