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사 강의 (리커버 에디션) -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박노자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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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근현대사를 알고자 한다면 러시아 혁명을 피해 갈 수는 없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러시아는 근대 혁명 사상의 실험장이었던 만큼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러시아 혁명사는 중심 키워드로 작용한다. 

그럼, 일단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러시아의 근대사에서부터 출발해보자.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자마자 러시아는 민중 혁명으로 전제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러시아의 사회와 경제 구조도 여전히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개혁의 대상인 황제와 귀족이 개혁의 주체가 되었으니 제대로 된 개혁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는 서구 열강 중 하나로 등장하지만 당시의 러시아는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후발주자인 일본에 비해서도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던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우선 지식층의 사상적 뒷받침과 민중의 시위 및 항쟁 그리고 새로운 체제라는 혁명 이후의 대안이 필요하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던 가장 큰 이유는 세 번째 요소 즉 혁명이 성공한 후 구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와 이를 실행할 정치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혁명이 싹트기 좋은 시대였다.

우선 마르크스라는 걸출한 사상가가 있었고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층이 탄생했다.

새로운 사상은 구체제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유럽의 젊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도시 노동자에게도 퍼져 나갔는데 특히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현대화가 가장 늦었던 러시아의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레닌과 트로츠키 등 많은 혁명가들이 러시아 출신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1) 러시아의 혁명가들


러시아의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모범생이었던 레닌이 반체제 사상에 빠져들었던 건 큰형이 황제 암살 모의를 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레닌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피해 일찍부터 해외에 나가 활동을 하게 되는데, 처음엔 독일 사민당의 카우츠키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차후에는 독일 사민당의 보수화를 비난한다. 



1914년까지만 해도 레닌은 엥겔스의 바통을 이어받아 독일 사민당의 공식적인 이론가가 된 카를 카우츠키(1854~1938년)를 자기 일생의 사상적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카우츠키는 레닌의 후원자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사상적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제2의 아버지이기도 했어요. 또한 레닌은 독일 사민주의자들을 자신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조해야 할 이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 사민당은 덩치를 키워나가면서 국회에서도 더 많은 지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체제에 안주하면서 철저히 보수화되고 있었지요. 사민당의 이론가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년)은 노골적인 수정주의 노선으로 선회하면서 잉여가치론을 부정했어요. -49쪽 



저자는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독점화 경향 이론을 획일적으로 받아들였다면서 창의력이 부족한 기계론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비판한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독점화 경향 이론을 고스란히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작은 기업이 큰 기업에 먹히고, 큰 기업이 인수 합병을 통해 더 커지고 ,국가가 하나 혹은 몇 개의 기업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기업과 국가가 하나가 되고, 자본가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 여러 나라에 있는 국가 규모의 기업을 합쳐나가고, 그래서 결국 세계화된 초국적 기업이 등장하면 그때 사민주의자들이 총선을 통해 권력을 잡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할 것도 없고, 그저 이 일련의 과정을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에 합법적으로 정권만 잡으면 되는 거예요. 사회주의를 거의 자연발생적이면서 불가역적인 것으로 본 셈이죠. -51쪽  



그런데 흥미로운 건, 마르크스가 예상한 대로 자본주의는 독점화 경향 이론에 따라 진행되어왔는데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20세기 초 독일 사민당이 정당으로써 일정한 의석수를 차지하자 투쟁과 혁명을 포기하고 보수화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전세계 노동자 농민의 권익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쪽으로 일찌감치 변질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러시아 사민당(사회민주노동당)은 혁명을 위한 전위적 정당을 주장한 레닌과 전국민을 참여시키는 대중 정당을 주장한 마르토프가 충돌하면서 각각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갈라서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파로 알려진 볼셰비키는 사실 투표에서 단 한 표 차이로 소수파로 알려진 멘셰비키를 이긴다. 레닌의 전위정당론이 독재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을 감지한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에 가입했지만 밋밋한 투쟁 방식에 불만을 품고 탈퇴하여 어느 정파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홀로 대국민 연설과 팸플렛 등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러시아도 참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 경제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동원령까지 발령되자 러시아 민중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른다. 

마침내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정마저 무너뜨리고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전쟁을 중단할 수도 없었고 민중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었다. 이때 레닌의 볼셰비키를 비롯해 사회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이 10월 혁명을 추진해 권력을 쟁취한다. 그 유명한 볼셰비키 혁명은 사실상 무혈혁명에 가까웠다.  



레닌은 처음부터 러시아 농민을 혁명의 세력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는 농민이 대다수(약75%)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드넓은 지역에 거주해서 조직화가 힘들었던 데 비해 도시노동자는 25% 남짓이었지만 이들은 대규모 생산공장에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촌보다 침투하기도 쉬웠고 농민보다 동원하기도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물론, 농민에 비해 문맹률 또한 낮았던 것도 주효했다. 



한편, 대중 연설의 귀재였던 트로츠키는 당 내에서의 영향력보다는 러시아 민중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레닌은 당시 가장 시급한 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로츠키를 소환한다. 트로츠키는 처음엔 외교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독일에게 엄청난 영토 할양을 약속하고 연합국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늪에서 빠져나온 뒤, 국방 인민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뛰어난 전략 전술로 구세력과의 내전마저 승리로 이끈다. 

국내 혁명에 성공한 볼세비키는 이제 본격적으로 혁명의 세계화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론 사상가로도 뛰어났던 트로츠키가 이때 주장한 게 '불균형 복합 발전론'이다.   




트로츠키는 정치적 불만이 크면서 노동자의 집중도가 높아서 급진적 사상이 퍼지기 쉬운 나라가 생기고, 그런 나라가 공동의 세계적 과정에 던져질 때 약한 고리가 되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질 위험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후진적인 열강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지요. 또한 국가 간의 경쟁과 전쟁 등이 계속되고 한 나라 안에서도 내부 세력들의 괴리가 지속된다면 혁명의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지겠지요. 당시에 독일의 사민주의자들은 선진국이 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봤습니다. 반면에 트로츠키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뚜렷하면서도 복잡한 나라, 후진성과 선진성이 교묘하게 얽히고설킨 나라, 가장 약하거나 가장 강한 나라가 아닌 그 중간의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거예요. 이게 바로 트로츠키의 '불균형 복합 발전론'입니다. 
20세기 후반에 혁명이 일어났던 나라인 이란을 살펴보면, 선진국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공업이 발전되어 있었고 지배계급의 장악력은 비교적 약한 나라였습니다. 도시 하층민과 농민들의 누적된 불만, 미국의 침략을 막을 만큼의 강력한 군사력, 기존 노동자계급의 좌파적 기반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트로츠키가 주장한 불균형 발전론과 잘 들어맞는 사례지요.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에서 민중운동이 활발했는데요,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은 선진성과 후진성이 공존하는 국가 주도형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파탄에 이르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민중운동 발전의 원동력이 커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혁명기의 러시아보다는 경제 상황이 좋았고, 제1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교육적 바탕도 있었으며, 국내의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 점 등 때문에 혁명이 만회될 수 있었습니다. -113~114쪽



트로츠키가 1940년도에 사망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1925년 레닌 사후, 트로츠키가 당 내에서 따돌림을 받고 권력이 스탈린에게 넘어간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춘 탓에 독불장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항우가 결국 범인(凡人)에 가까웠던 유방에게 무너진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저자 역시 스탈린에 대해선 '지극히 평범했다'라는 말로 개인적 설명을 일축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트로츠키가 레닌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세계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 즉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은 아주 날카로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은 다소 편향적이었어요. 사실 모든 인간에게 이런 측면이 있을 겁니다. 트로츠키의 사상이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 논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혁명의 국제성을 강조한 것은 분명 높이 살 만합니다. 하지만 국가나 당 등 유사 국가적 조직에 내재된 위험성에 상당히 무감각했고, 이를 과소평가한 채 국가 지상주의적 사고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어요. 대중의 민주적 자율성 문제를 간파하지 못한 것 역시 아쉬운 지점이고요. -122쪽



마르크스는 철학자 레닌은 사상가라고 한다면, 트로츠키야는 혁명가라고 하겠다. 

끝까지 자신을 믿었고 타협할 줄 몰랐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마저 파괴시키곤 하는데 트로츠키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극으로 마감한 것 또한 혁명가답다. 



반면, 레닌이나 트로츠키에 비해 스탈린은 평범 그 자체였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극심한 자격지심과 인간적 질투심을 끝까지 극복하지 못했다. 그가 트로츠키에 대해 취했던 지나친 조치들 역시 정신적 콤플렉스의  발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가 혁명의 완수 대신 국가의 안정을 최우선시했던 것 역시 인간다운 조치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위험에서 빠져나오면 더큰 모험을 하기보단 안위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 역시 국민을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스탈린에 의해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세상은 마치 수 백 년 된 사회처럼 빠르게 관료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제2차 세계대전만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최고 권좌에 머무르기는커녕 비참한 말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스탈린 체제는 분명 억압적이었지만, 제정러시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민 포섭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체제에 포섭된 대중들은 억압을 느꼈지만, 그에 대한 불만을 정치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어요. 결국 스탈린 치하의 소련 체제는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대민 포섭 능력이 뛰어나면서 고속 압축적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 단위의 非시장적 개발주의로 규정하는 게 정확할 겁니다. -161쪽



스탈린이 대중에게 묵인된 독재를 펼칠 수 있었던 건 5개년경제개발계획이 성공했기 때문이고 공산당 내에서 지위를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건 숙청 때문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숙청은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승진의 기회가 되었다. 혁명을 직접 겪었고 그 감각을 간직한 사람들 즉 스탈린이 非혁명적이라는 걸 알아차릴 만한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결국 혁명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간부로 발탁(?)되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년)다. 물론, 그 역시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전임자의 시신 위에 자신이 앉는 권좌를 올려놓는 걸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을 지지했고 나라가 해체된 뒤에도 과거 소비에트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는 향수에 젖어 있다.  마치 '그래도 전두환 노태우 시절이 서민들이 살기엔 가장 좋았다'는 식의 말들이 한국 사회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소련을 오랫동안 뒷받침해온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산업 경제 팽창이 만들어낸 폭력과 포섭의 연결고리였어요. 비교해보자면 박정희 시대의 한국은 소련이나 북한보다는 포섭의 기제가 너무나 약했습니다. 소련에서의 무상교육 같은 것을 한국에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요. 우골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 시대에는 대학 교육을 받으려면 부모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했습니다. 소련에서는 비록 양질은 아니었지만 노동자를 위한 무상의료 제도도 실시되었어요. 반면에 박정희 시대에 의료제도는 철저히 시장에 맡겼지요. 소련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연금제도가 자리 잡는데, 박정희 정권은 군인과 공무원에 한해서만 연금제도를 시작했고요. 박정희는 복지 혜택이라는 포섭 정책을 스탈린과는 비교 못할 만큼 훨씬 더 작게 실시한 겁니다. -167쪽



성장과 독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폭력과 포섭 또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전자가 한국을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후자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지역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결국, 20세기에 접어들어 인류가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던 두 개의 정치체제는 이름만 다를 뿐 구동되는 원리는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미군과 영군군이 프랑스에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공산당은 독자적인 군사력으로 독일군이 패퇴된 뒤에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겁니다. 프랑스 부르주아에게는 공산당을 막아설 힘이 없었어요.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과 함께 프랑스로 들어온 샤를 드골(1890~1970년) 장군이 부르주아 공화국을 부활시켜도 소련을 따르는 프랑스 공산당으로선 그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이렇게 놓쳐버린 것이지요. 보수화된 소련이 유럽의 부르주아들을 살렸다고도 볼 수 있고요. 소련은 이미 보수화되어 있었지만 사회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유럽 사회주의자들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자본가들은 이런 상황을 만든 소련에게 내심 고마워했을 거예요. -183쪽



그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레지스탕스 운동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엔 소련을 위한 투쟁 즉 '소련 지키기'의 성격도 강했다.

1958년 쿠바의 카스트로 1965년 베트남의 호찌민 그리고 1973년 칠레의 아옌데를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사회주의는 공식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제, 공산주의 혁명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까?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발달하면 공산주의 혁명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했던 마르크스는 '자본의 위력'은 알았지만 '돈의 위력'은 몰랐다. 그래서 자본의 위험성과 자본에 의한 개인의 파괴만을 강조했다. 개인이 돈에 매수되어 자본의 치맛폭에 스스로를 맡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여야할 적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진 게 아니라 개인주의에 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앞으로 영원히 살아남을까?

자본주의의 수명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에 달려 있다. 자본으로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까지는 살아남을 것이다. 문제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이다. 북유럽식 복지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완벽한 대체나 대안이 될 수 없다. 결국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복지도 경제 즉 자본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인류는 비록 사회주의 혁명엔 성공했지만 단 한번도 사회주의를 실현시켜보지는 못했다고...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대안은 여전히 사회주의가 될 수 있노라고... 


맞는 말이다.

만인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인류가 탄생한 순간부터 품어왔던 꿈이니까. 




현실적 위력은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생명력은 다 타버린 화로 밑바닥의 불씨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진화의 시간이 아닌 역사의 시간에 그것이 큰 불길로 다시 살아날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좌절한 인류의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에 대한 꿈은 언제든 사람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00쪽




이 책의 부제 역시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이다. 어떻게 다른 미래를 한번도 꿈꿔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꿈꾸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러나 '꿈만 꾸고 살 수도 없다.'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혁명이란 마치 사랑의 서약과도 같아서 지킬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걸 서로가 잘 알기에 지켜지지 않았다고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혁명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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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최고의 세계사 수업 - 인간은 어떻게 욕망하고 연결하고 부를 축적했는가?
에드워드 로스 디킨슨 지음, 정영은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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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의 변화로 시작해 '정치와 외교(전쟁)'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후자에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주로 공적으로 이루어진 사건만을 기록하는 사료를 1차 자료로 삼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리라. 

이런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나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밖에도 역사란 과거에 내가 속한 공동체(민족이나 국가)에서 일어난 일로만 국한시켜 생각하는 것 역시 자주 저지르는 실수다. 


역사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시간은 축소시키고 공간은 확장시켜야 한다. 즉, 가까운 과거부터 살펴보되 시야는 민족이나 국경의 범주를 뛰어넘어 전세계로 확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저자는 19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현상들을 유의미한 수치와 통계 자료로 분석하고,  '확산-대폭발-변화'라는 세 팩터로 나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단순히 어느 한 지역의 국소적 현상이나 사건들이 결국엔 전세계적인 변화와 흐름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선 19세기는 '확산'의 세기였다.

18세기를 거치면서 그동안 쌓여왔던 인류의 경험과 지식이 기술혁명과 의식혁명을 일으켰다. 보건과 농업 분야의 발전으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수천 년 동안 흙에 얽매여있던 인류의 삶이 해방되어 도시로 공장으로 다른 대륙으로 확산되었다.


필요가 발명을 낳고, 도구가 생각을 바꾼 시대였다. 


이렇듯 특정 기술을 지닌 사람들이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자원과 환경이 있는 곳으로 이주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지구적으로 나타난 이 흐름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패턴이었다. 물론 특정한 기회가 대규모 이주를 이끈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이주는 특정한 자원을 지닌 이들이 그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인력을 의도적으로 모집한 결과이기도 했다. 대규모 이주는 결코 무작위적이고 무계획적으로, 개별적으로 나타난 흐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술을 쓸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하고자 했고, 정부와 기업, 비정부 조직, 기업가들은 전 지구를 연결하는 '세계경제'를 구축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인력과 기술을 동원하여 세계 곳곳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개발하고자 했다. -080쪽



개개인의 능력차는 역사를 변화시킬 정도로 크지 않았다. 19세기는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만드는 그런 사회가 더이상 아니었다. 그러나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주어지는 기회와 선택의 폭은 전혀 달랐다. 


생산 영역과 방식을 선점했던 사람들은 이익 확대를 위해 규모를 늘리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원자재와 시장을 필요로 했던 반면, 기존의 생산 영역에 머물렀던 지역과 사람들은 경쟁력을 잃었고 이때 밀려나 생긴 차이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 어떤 시대보다도 19세기와 20세기를 알아야하는 절대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이런 구조가 고착화되기까지 크고 작은 충돌과 두 번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잘 알다시피, 양차 세계대전은 영국, 미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열강과 그 뒤를 바짝 뒤쫒던 독일, 러시아, 일본 으로 이뤄진 2위 그룹 간의 대결이었고, 감동적인 역전 드라마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풍부한 원자재와 식민지를 보유했던 강대국과 기술과 군사력을 갖춘 강소국 간의 싸움으로, 처음부터 누가봐도 승패는 분명했다. 다만, 러시아라는 변수가 새롭게 등장했을 뿐이다.  


큰 싸움 뒤에는 뒷청소 또한 길고 지난한 법이다. 운이 조금 좋거나 나빴을 뿐 과정은 대동소이했고,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독립 운동의 결과로 독립을 쟁취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소개한 각국의 혁명은 모두 달랐다. 각국은 각기 다른 역사와 제도,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구조, 전략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가 처한 상황과 가능성이 달랐다. 그러나 각각의 혁명에는 놀랄 만큼 유사한 점이 있다. 우선 모든 사례에서 혁명을 촉발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 엘리트 계층 내부의 분열이었다. 엘리트 계층 중 일부는 기존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제도의 유지를 바랐던 반면, 다른 일부는 그 모든 제도의 근대화를 원했다. 근대화의 열망을 불러온 요소 또한 유사했다. 첫번째 요소는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대변하는 정부에 대한 열망이었고, 두 번째 요소는 근대화에 실패하면 점점 강해지고 있는 제국주의 세력에게 먹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혁명의 핵심적인 지도자가 국제적인 경험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점도 유사했다. 기존 체제에 불만을 가진 엘리트 계층의 저항이 국제 경제 확대로 인한 압박에 신음하던 국민의 더 큰 저항과 함께 진행되었다는 점도 유사했다. 국민의 저항 중에는 산업, 상업 경제의 발랄로 가혹한 노동 환경에 내몰린 산업 노동자들의 저항과 국제적 식량 생산 시장의 형성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가난한 농부나 소작농의 저항도 있었다. 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정권이 근대화된 형태의 독재 정권이었다는 점 또한 유사했다. 혁명 이후 많은 국가에서는 근대식 대중 정치 운동에 기반을 둔 일당 지배 체제가 나타났다. 혁명 세력이 사회 변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종교계와 갈등을 겪은 것도 유사했다. 당시 혁명 이후 각국에 나타난 독재 세력은 대부분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시작하여 2000년 멕시코 제도혁명당의 몰락까지, 이어지는 20세기의 두 번째 혁명의 물결이 닥칠 때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272쪽

 


우리나라는 북쪽에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남쪽엔 이승만 정권이 세워졌지만 10년 만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새로 구축되는 질서와 흐름을 따라갔다고 하겠다. 

흥미로웠던 건,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되고 또다시 들어선 전두환 군사 정권 역시 여러 대륙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시위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권력을 내놓았다는 점이었다.  

이 또한 학생운동의 결과로 독재 정권을 타도시켰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화의 물결은 놀랍도록 광범위하게 일었다.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절반을 훌쩍 넘는 국가가 다양한 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75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세계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35개국, 권위주의 독재 국가 101개국, 그 중간 어디쯤 속한 국가가 11개국 존재했다.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78개국, 권위주의 독재국가가 43개국, 중간에 속한 국가가 43개국이었다. 1970년 대 중반에 접어들며 발생한 혁명의 물결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권(1974년, 1975년), 그리스의 군부 독재 정권(1974년), 이란의 샤 정권(1979년)을 차례로 휩쓸었다. 1980년대 초중반에는 외채 위기와 '긴축 조치'로 국민의 지지를 잃고 타격을 받은 남미의 독재 정권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82년 (말비나스, 혹은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벌어진 영국과의 짧은 전쟁에서 패배한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 정권은 1983년 해체되었다. 1990년과는 정반대의 통계였다. 이러한 추세는 1986년 필리핀을 필두로 1980년대 후반 아시아로 전파되었다. 1980년대 말에는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199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 -573쪽



공교롭게도 이 모든 변화는 냉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미국은 전후 냉전 시기에 공산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개도국과 후진국들의 경제 성장을 도왔으며 비도덕적인 권위주의 정권조차도 용인해 왔다. 물론, 여기에 소요되는 자금은 영국의 대처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밀어부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및 선진국의 복지축소로 획득한 것이었다. 


결국, 천문학적인 돈을 동원하는 서구사회와 더이상 경쟁할 수 없었던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은 더이상 반공 노선을 내세우며 득세했던 각국의 독재정권을 지지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서 여러 나라의 독재정권이 무너지게 된다. 우리나라도 명실상부한 민간인 출신 대통령은 1992년에서야 탄생하는데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변화에 따른 결과였다. 



동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정권이 세계의 경제 발전에 뒤처져 붕괴했다면, 저개발국의 독재 정권들은 오히려 경제적 성공과 그로 인한 국민의 의식 변화로 인하여 붕괴했다. 한국과 대만의 소수 엘리트주의 군부 정권은 194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일종의 국가 지도 자본주의 혹은 계획 자유경제를 통하여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산업 발전을 도모했다. 두 국가 모두 경제발전을 위하여 관세를 통한 기간산업 보호, 가격 임금 이윤 이자 환율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개입, 외국인의 소유권 제한과 해외투자자 이익 반출 제한, 보조금 저리 융자, 세제 혜택, 기간산업과 핵심 인프라의 국영화, 정부 주도의 종합 대기업 형성, 장기적인 경제 계획 수립 등 다양한 정책을 활용했다. 이 정책들은 과두제에 가까웠지만 민주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일본이 앞서 활용한 정책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었다. 정책의 실행은 대개 미국의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1953~1961년까지 한국에 투자된 자본의 80퍼센트는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미국의 일부 사업가와 의원들은 "미국 정부의 지원 프로그램이 실질적으로 국가사회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보조하는 데 쓰이고 있다"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 대만, 일본이 공산주의 확산 방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판단한 미국은 이러한 정책들을 용인하고 장려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브라질을 비롯한 일부 남미 국가들도 정도는 덜했지만 유사한 경제 정책을 활용했다. -581쪽 




이 정도면 미군부대에서 나온 짬밥을 끓인 일명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면서 공장과 탄광 및 공사장에서 뼈빠지게 일해서 심지어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목숨 내놓고 싸워 받아온 달러로 나라를 이만큼 부유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그 딸을 감옥에 집어넣느냐고 거리로 나왔던 그분들이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흔들만도 했다.  


우리는 전쟁의 폐허에서 우뚝 일어나 맨손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별적인 사건들도 시야를 확대해서 보면 독립적이지 않고 시공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과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만든 실타래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이 실타래가 뻗어나갈 미래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물리적인 국경의 의미는 예전처럼 강하지 않다.

그러므로 국가 단위로 치러지는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핵억지력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전쟁으로 얻는 이익보다 시장을 유지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이!'



잠재적인 후보로는 우선 대학을 꼽을 수 있다. 현대의 대학들은 유전학, 공학, 금융학, 재료과학, 조직심리학, 컴퓨터공학, 경제학 등 여러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과학적 기술적 연구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 역량은 다양한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종합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게다가 대학 대부분은 공익 추구라는 사명을 갖는다. 지구를 구하는 것 이상의 공익이 어디 있겠는가?
지구적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질만한 또 다른 후보는 거대 대국적 기업이다. 1970년경 기업들이 교통 통신의 확대와 무역 세게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합병에 나서면서 세계적으로 기업 통합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 예를 들자면, 화석연료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석유 회사들의 장기적 이익에도 부합된다. 2012년 세계 상위 10대 기업(매출 기준) 중 일곱 개가 석유 회사였다. 상위 열 세 개 기업의 매출을 모두 합한 금액보다 높은 GDP를 가진 국가는 전 세계에 단 네 곳밖에 없었다. 이들의 매출 총액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세금 수입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전 세계 국가 중 상위 100개 기업의 수익 총액보다 세금 수입이 더 많은 국가는 역시 단 한 곳, 미국뿐이었다. 기업의 수익은 의무적인 지출처가 정해져 있는 세수와는 달리 사실상 실소득에 해당하므로 더 자유럽게 활용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국적 기업들이 지국적 문제의 논의를 점차 늘리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후보는 경제 세게화의 혜택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초고액 자산가들이다. 현재 세계 50대 부호의 자산 총액은 전 세계에서 열두 개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GDP보다 높다. 이들의 순 자산 가치는 미국 혹은 유럽연합 GDP의 11분의 1에 해당하며, 아랍 세계 GDP 총액의 절반, 사하라 이남 국가 전체의 GDP 총액에 맞먹는다. 세계 5대 부호(그러니까 다섯 명의 개인)의 자산을 더한 총액보다 연간 세수가 높은 국가는 열 곳밖에 없고, 50대 부호 자산 총액보다 연간 세수가 높은 국가는 단 두 곳뿐이다. 이러한 부의 집중을 불편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 자산가들은 마음만 먹으면 한 대륙의 GDP에 맞먹을 만큼의 자금을 지구적 문제 해결에 투자할 수 있다. 부자들이 그 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들도 이 지구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629~632쪽 중



지구가 직면하게 될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고 세계 평화와 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각국 정부의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대학 및 연구소와 다국적기업 그리고 거대 자산가들에게 달려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런 세계 평화와 지구 환경 보호가 각국 정부의 손에 달려 있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물론, 각 정부는 국민의 대표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는 지구 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 사람들은 인류의 생존과 미래를 극소수 초고액 자산가의 선의에 내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까? 순전히 그들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른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로버트 프랭크 교수의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라는 책을 한 번 읽어 보시길...

그들 역시 지구인의 한 사람으로써 자신이 얻은 혜택에 비례해서 합당한 역할을 해야 한다.



'권력은 시장에게 넘어갔다'

이 말은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확실히 공산주의에 대해 자본주의는 승리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선거의 타락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꾸준히 추구해왔던 보편적 진리에도 승리했을까? 

정의, 사랑, 자비, 헌신, 협력 등등....

이 모든 가치보다 자본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면 인류는 승리했지만 또한 패배한 것이나 매한가지다. 진화와 진보를 향해 걸어온 인류의 역사 발전 과정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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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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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이상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일본어 책제목도 한국어 제목과 같은진 모르겠으나 제목만 보면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선택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그래서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로 귀결된다. 


후대인에게 과거에 일어난 이벤트들이 종종 이해되지 않는 건 사건 자체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나온 과거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선 사건의 배경이나 주변 즉,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여기엔 여러 사람들의 오판과 오해 및 예기치 못한 우연이나 실수 등도 포함된다.



출중한 역사서는 대개 물음표로 시작해서 마침표로 끝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시종일관 '그럼에도 일본은 왜 전쟁을 선택했을까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되서 일본은 전쟁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로 마무리한다. 청중(독자) 역시 '그래서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되었군(요).'하고 수긍하게 됨은 물론이다.  




대다수 일본인이 중일전쟁은 잘못된 침략전쟁이라고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전쟁 발발 소식을 접하자 마치 해방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나는 군부와 정치인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에 일본 국민은 어쩔 수 없이 떠밀려졌다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황은 전쟁 재가를 머뭇거렸고 일부 정치인은 끝까지 전쟁만큼은 막으려고 애썼으며 지식층에선 한탄을 토로했다.



현대의 우리는 수렁에 빠진 중일전쟁이 더 나쁘게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됐다고 생각하는데, 그것과는 인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당시의 중국통 다케우치는 중일전쟁은 내키지 않는 전쟁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은 강대국인 미국 영국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자를 괴롭히는 전쟁이 아니라 밟은 전쟁이라는 감회를 말했습니다. 다케우치의 글에는 전쟁을 '상쾌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표현은 소설가이자 문예평론가였던 이토 세이의 일기에도 나옵니다. 그는 개전 다음 날인 12월9일 일기에 "오늘은 모두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고 밝다. 어제와는 전혀 다르다"라고 적었습니다. (...) 그렇다면 서민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주오대학의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쓴 <민초의 파시즘>에는 서민의 편지나 일기가 등장하는데, 이 책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야마가타현 오이즈미촌의 소작농 아베 다이이치는 개전한 날 일기에 "드디어 시작된다. 몸이 바싹 긴장되는 것 같다"라고 썼고, 진주만 공격의 전과가 발표된 12월10일에는 오후부터 농사일을 쉬고 반나절 동안 "신문을 보았다"라고 썼습니다. 화려한 전과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입니다. 
요코하마 시내 다카시마역의 역무원 고하세 사부로는 개전 당일 일기에 "역장에게서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이미 우리는 어제까지의 나태한 기분에서 벗어났다. 있어야 할 곳에 안착된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썼습니다. 난바라 시게루만 태평양전쟁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뿐,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지식인 다케우치 요시미, 소설가 이토 세이, 농민 아베 다이이치, 역무원 고하세 사부로 등 모두가 태평양전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364쪽




어떻게 방금 저지른 잘못(중일전쟁)을 바로 눈앞에 두고서도 똑같은 과오를 저지를 수 있을까?

대공황으로 대다수 일본인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는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누구나 강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듯이 1930년 대 대공황은 전세계인이 겪었던 일이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자신보다 몇 배나 강한 국가를 상대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에 대한 희열감과 자부심이 넘쳐난다.

히틀러조차 미국을 직접 공격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전력 상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건 독일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감행했고 일본 국민은 환호했다.  

그렇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이성을 갖춘 국가와 국민이라면 설령 전쟁을 수행할 목적과 능력이 있더라도 최대한 회피하려고 하지 우선 순위로 고려하지는 않는다.  



일본인 중에는 과거를 올바르게 보는 독일인과 그렇지 않은 일본인, 이런 식의 비교는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데이터가 있다면 저도 그것을 근거로 올바르게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중 하나가 포로의 대우입니다. 어떤 미국 단체가 미군 포로 병사 398명의 명부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 비율을 지역별로 산출했습니다. 그 데이터를 보면 일본과 독일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된 미군 병사의 사망률은 1.2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군 병사의 사망률은 37.3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상당한 차이입니다. 포로를 대우하는 일본군의 방식이 굉장히 가혹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포로 문화가 없었던 일본 병사로서는 투항한 적국 군인이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일본은 자국의 군인조차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성격이 결국 포로 학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
전쟁에는 식량이 필요합니다. 뉴기니 북부의 정글 등에는 자동차도로가 없습니다. 병사의 1일 주식은 600그램입니다. 최전선에서 5000명의 병사를 움직이려고 하면 거리에 따라 다르지만, 주식만 짊어지고 간다고 해도 3만 명의 인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계산으로 식량을 보급한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뉴기니 전선에서 병사들은 전사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아사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같은 책 418쪽에서 '뉴기니에는 제18군이 파견됐는데, 10만 명의 군인 중에 9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라고 구체적 수치를 들어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일본군의 체질은 국민의 생활에도 나타났습니다. 전쟁 중의 일본은 국민의 식량에 가장 신경 쓰지 않은 국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패전에 가까워질 무렵 일본 국민이 섭취하는 칼로리는 1933년 시점의 60퍼센트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일본은 1940년을 기준으로 농민이 41퍼센트나 있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일본의 농업은 노동집약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농민에게는 징집유에가 거의 없었습니다. 공장의 숙련 노동자에게는 징집 유예가 있었지만 말이지요. (...)
반면 독일은 달랐습니다. 독일은 일본보다 더 심하게 국토가 파괴됐습니다. 그러나 1945년 3월, 즉 항복 2개월 전 시점에 에너지 소비량이 1933년보다 10~20퍼센트 증가했습니다. 전시체제 이전보다 좋아진 셈입니다. 독일은 국민에게 배급하는 식량을 절대로 줄이지 않았습니다. 
태평양전쟁은 군인에게도, 국민에게도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일본의 탄광에서는 많은 중국인 포로, 연행돼온 한국인 노동자가 일했습니다. 원래 포로에게 노동을 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식량과 급료를 주어야 하고, 장교에게는 노동을 시키면 안 된다는 등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규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작업장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장면은 점차 잊혀갔습니다. 일본의 병사와 국민은 자기 자신의 열악한 처지와 힘든 생활만을 기억했고, 그 기억으로 포로와 식민지 주민의 비참했던 모습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430~432쪽 中




늘 수동자이자 피해자의 시선으로만 바라봤던 근현대의 전쟁들-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및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행위 당사자 중 한 편의 시선으로 보니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중반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분명히 깨달았다. 외교는 철저히 '기브 엔 테이크'이며 '전쟁은 비지니스'라는 걸 뼈저리게 절감했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역사 인식의 폭이 확대되었다.



이 책은 일본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5일 동안 이뤄진 역사 강의를 묶은 것이다.

일본측 사료와 자료들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적절하게 통계 수치를 인용해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갖고 있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대한 불편함과 의구심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변명하지는 않지만 역사적 과오에 대한 회한이나 반성보다는 오히려 전쟁 선택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바둑이나 장기 시합에서 패한 후, 복기하면서 다음번엔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겠다는 건 똑같은데, 그게 패전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전쟁 자체에 대한 것인지는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비록 저자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이 전쟁을 선택한 근본적인 이유가 다름 아닌 인명에 대한 경시가 아닐까 싶다. 

타인의 생명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조차도 쉽게 내던지는 일본인의 DNA에 오랫동안 새겨져온 생명경시풍조가 바로 전쟁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이자 주된 이유였다.  





일찌기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들을 관찰한 후,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만약 그녀가 일본과 일본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 관찰한다면, 뭐라고 했을까? 

'악의 순진성'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의 결과에 책임지려는 의무를 저버린 순간 누구나 악을 행할 수 있듯이, 자기희생이라는 의도의 순수함과 집단주의라는 행위의 숭고함에 경도되면 악을 행하고도 악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순수한 백치 상태, 즉 절대악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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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굴레 - 헤이안 시대에서 아베 정권까지,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
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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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나라'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던 일본과 일본인을 가장 섬세하게 분석한 책이다. 

그동안 단순히 문화적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일본인에 대한 '언캐니함'의 근원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외부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대 일본의 수많은 모순은, 에도 시대에 존재하던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회의 간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인 동시에 꽉 막힌 이름 없는 관료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오사카 상인 집안들과 점점 경직화되던 사무라이 계급의 선례를 생각하면 그다지 혼란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충성과 자기 부정을 광기의 수준으로까지 가져가면서(사무라이들의 자기희생 컬트,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과로사할 때까지 일하는 현대의 샐러리맨), 또 한편으로는 기괴한 비디오 게임이나 헨타이(변태적 성욕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망가, 괴상한 패션으로 대변되는 엉뚱하고 전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뿌리도 에도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모순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모두가 겉으로만 중시하는 척하는 사회적 평화를 위해 유지하는 가면(다테마에)과, 믿을 만한 사람과 술 한 잔 나눌 때가 아니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그 밑의 현실세계(혼네) 사이의 충돌을 묘사하기 위한 단어들도 생겨났다. -102쪽



일본의 근대는 1868년 메이지유신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근데 이상하지 않은가?

메이지 유신이란 다름아닌 왕정 복고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천황에게 권력을 되돌려 주는 게 근대를 여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일반적인 역사의 흐름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시민혁명에 의해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일본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200년 넘게 이어져 온 긴 평화 속에서 지배층은 매너리즘에 빠졌고 세심한 조율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쿠가와의 몰락은 보통 페리 제독이 방문했던 1853년에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1838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해, 오시오 헤이하치로라는 이름의 오사카 사무라이가 다양한 계층의 군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오사카의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
오이시는 "알고서 행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知而不行只是未知)"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명나라 유학자 왕양명(1472~1529년)의 추종자였다. 언행일치를 강조하는 왕양명의 사상(양명학)은 청나라와 도쿠가와 일본의 주류 사상이던 신유학, 즉 주자학과 충돌했다. 왕양명의 저술에 깔린 급진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수많은 개혁사상가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 -113쪽



조선 역시 영정조 시대가 끝난 직후인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몰락한 양반출신이었던 홍경래는 10여 년 동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몽 개혁 사상을 전파하면서 반란을 준비했다. 비록 두 사람이 일으킨 반란은 실패했지만 두 나라가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오시오의 난으로 일본은 사무라이가 지배하던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력이 복구불능 상태로 빠졌고, 조선 역시 홍경래의 난으로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신분질서에 구멍이 뚫린다. 


오시오의 난 이후 일본은 사쓰마와 죠슈번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혁명이 배양되기 시작한 반면, 조선에선 서학을 배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이 잉태된다. 한쪽은 칼(武)을 다른 한쪽은 책(文)을 들면서 두 나라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갈리게 된다. 물론, 한국과 일본 사이에 피상적 접촉이나 일시적 충돌은 있었지만 겹치고 포개진 채 뒤섞인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두 물결이 합쳐져 흐르다가 다시 갈라지면서 나타나는 문화적 혼합과 문명의 융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웃한 단일 민족이 기나긴 세월 동안 공존하면서 한국와 일본처럼 이질적인 경우도 드물다.

 

두 나라는 일찌감치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섰다.     

헤엄쳐 건널 수 있는 그 짧은 바닷길이 참으로 넓어 보인다. 

넓지 않은 그 바다 덕분에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었고 서로가 의도치 않은 접촉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구의 물결은 두 나라 모두에게 엇비슷하게 몰려왔다. 

역사의 무대 위에선 때론 능력이나 기회보다는 의도와 의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서로를 이해할 의지와 기회가 없었던 한국과 일본은 두 나라를 개국(또는 정벌)시키려는 확고한 의지와 의도를 가진 서양 세력 앞에서 각자 필살기(?) 무기로 대응했다. 

조선은 대륙에 조공을 바치던 선비의 나라답게 외세 의존으로 기운 반면, 명목상일지언정 사무라이 사회였던 일본은 스스로 자력갱생의 길로 나아간다. 

조선의 지배층은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신의 목숨과 기득권이 우선이었다. 여차하면 대륙으로 도망갈 수 있었던 그들에 비해 일본의 지배층에겐 깊은 바다 뿐이었다. 위기의 순간엔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다가 옥쇄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걸어온 길은 언제나 '모 아니면 도'식의 타협할 줄 모르는 막다른 길이었다. 저자는 메이지 유신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정치 체제는 주권재민이 아닌 천황을 겉으로 내세운 집단지도체제였고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나미가 밀어닥친 일본을 보면서 전세계는 질서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줬던 숭고한 일본인에 감탄함과 동시에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모습에 경악했던 근본적인 이유와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지도자들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로, 일본 정치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명확한 통치권을 갖는 권력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경쟁관계에 있는 권력 집단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온전히 합법적인 판단을 내려줄 제도적인 절차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이 전혀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 또한 공개적인 정치 절차가 없었던 데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정책의 대부분은 그 입안의 구심점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설사 정책을 끌고 가는 일관된 동력이 있다고 해도 이는 정부의 공식 기관이 주도해가는 것이 아니다. 해외로부터의 압력과,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한 국내 각종 이익집단의 요구에 좌우된다. 4장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이런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브레이크도 나침반도 없는 나라가 힘을 갖게 되면 자국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들에도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사실이 1930년대에 일어난 사건들로 증명되었음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424쪽



사실, 태평양 전쟁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일전쟁의 발발은 어처구니 없는 사소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는가. 일본은 계획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고 수행한 게 아니었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전쟁을 결정한 사람이 없었기에 끝내야 할 사람도 없었다.  패전이 짙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당시 일본인들의 고려 사항 속엔 항복은 없었다. 그들에겐 오직 끝까지 싸우다가 다같이 죽는다는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  

일본인은 어째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진다는 근대인의 특성을 거세당한 채, 석기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적일 수가 있을까. 

그 해답 역시 태가트 머피가 들려준다.



왜 일본이 자생적 부르주아 혁명에 실패했는가에 대한 대답의 일부는 도쿠가와 막부가 잠재적인 반대 세력들을 회유했던 천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회유의 정치 문화는 막부 멸망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일본 정치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지고 있다. 집권층은 상인 계급이 부의 축적을 통해 사무라이와 다이묘들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는 만사의 위계를 중시하는 그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부가 상인들의 일에 직접 관여하고 나섰다면 절대 권력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일깨워 유럽에서처럼 부르주아 단결의 도화선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대신 막부는 이 부분이 중요한 포인트인데, 상인 조합과 관련 단체들이 스스로를 자율감독하는 것을 전제로 그들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이러한 자율 감독은 상업활동을 기존 권력 구조에 노골적인 도전이 되지 않는 암묵적인 테두리 안에 묶어두는 역할을 했다. 재산권은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는 근대적 개념을 몰랐던 일본의 상인들은 권력에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스스로 해낼 만한 이론적 틀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도쿠가와 통치를 관통하는 신유학(주자학) 정치 이론은 현존하는 위계질서를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다. 달리 말하자면, 현존하는 정치적 관계를 초월하는 어떤 질서가 존재해서 그 정치적 관계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신성한 왕권'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절대 왕정 제도는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군주의 권리가 더 높은 존재인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개념(왕권신수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군주 자체는 신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사상에서는 정당하게 설립된 정치 권력 자체가 신성을 지닌다. 도쿠가와 막부는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오래된 개념을 적극 장려해서 어느 누구도 막부의 통치에 도전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했다.  -117쪽 



'천황=신'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신(神)인 파라오 앞에 엎드려 있는 고대 이집트인들을 보는 것만 같다.  

저자는 일본의 굴레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의 탁월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는데 이를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첫 단추에 지고지순한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한다는 건 일본과 일본인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체와 근원이 없는 일본적이고 일본다움에 집착하게 되면서 일본 문화는 그 세밀함과 정교함이 나날이 더해만 갔다. 별것 아닌 시시한 것에 대해서도 아니 어쩌면 별것 아닌 것이기 때문에 더한층 가꾸어 꾸미고 더 잘하려고 애쓴다. 가끔씩 우리가 일본에 대해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하고 느끼는 근원 또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든다던지...

혼을 바쳐 일하는 장인 정신이라던지...

소름 돋을 만큼 아름다운 문방구들과 악섹세리라든지...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자세와 서비스라든지...


일본인은 끝까지 계속해서 '~척'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가짜일수록 진짜에 집착하는 것일까?



메이지 시절 종교가 겪었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걸었던 길을 여러 면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적이지 않다'고 낙인찍어 기존 질서를 파괴하며, 사실상의 신흥 종교를 '순수하고' 자생적인 전통으로 포장하여 만들어내고,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에 열광한 소수의 엘리트들이 그 제도적 유산을 오래도록 일본에 남기게 된다. 또 '일본적인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데 집착했던 메이지 일본은, 일본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대륙의 영향을 애써 지우고자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많은 서양 문화를 허겁지겁 받아들여 미숙하게 소화시켰다. 그 결과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서양에 대한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에 빠졌고, 이러한 모순은 이후 비참한 정치적 결말을 가져온다. -143쪽



우리나라도 정치가 늘 말썽이고 여당과 야당 모두 주장하는 바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굳이 해석이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심한 관찰자라면 그 속을 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는 가끔씩 앞뒤가 맞지 않는 직소퍼즐을 보는 것 처럼 순간 '멍'해진다. 도무지 해석은 커녕 해독이 필요한 암호같다.  



지역구를 자손들에게 물려 주는 것도 그렇고...

테러와 확성기가 등장하는 각종 혐오 시위들도 그렇고...

너무나 자주 바뀌는 총리들인데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일본 정치의 비정상(?) 역시 근원은 메이지 유신에서 비롯되었지만 미군정에 의해 틀이 짜여진 후 미국에 의해 공고해지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일본 정치사를 논하는 부분은 다소 지겹고 따분하다.

고이즈미와 아베가 나오자 반갑기까지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정치인들의 이름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사회당, 공명당 및 민주당 등이 있지만 일본엔 자민당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그 이상함이 당연함으로 귀결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실패를 인정하고, 책임지고, 청산하는 데 특히 어려움을 겪어왔다. 왜냐하면 충성의 행동 규범은 상사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면 당신이 자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규범은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CEO가 회사 문제에 대해 '책임지고' 사임한다든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납품 업체가 있는데도 회사가 기존 업체로부터 계속 납품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이 그 사례들이다. (...) 좋은 일본인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상호, 의존관계나 의무 또는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또는 조직)을 배신하기보다는 '주주 가치'나 '공공의 선' 같은 추상적인 원칙을 위반하는 쪽을 택한다. (...)
물론 이런 신자유주의적 관행들은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공익 전반을 약탈하는 행위를 용이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미국이나 영국에서 드러나듯 사회적 위험 요소로서 점점 심각해지는 소득 격차 문제와 불가분하게 엮여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에서 기업 인수합병 시장이나 주주 가치를 통해 경제적 정치적 결과가 좌우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혁명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이다. 일본 비즈니스 세게의 근본적인 개혁을 옹호하는 사람은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혁명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는 것과 같다. -355~357쪽 중




일본은 정치인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관료들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정치인의 진짜 본업은 유권자로부터 표를 적당히 얻어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이고 그 다음엔 직업정신과 투철한 소명감으로 똘똘 뭉친 엘리트들로 이뤄진관료집단에게 권한을 주고 행정을 일임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일이 발생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게 된다. 공무원이 공무를 집행했다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선출직 정치인 역시 투표에 의해 뽑히긴 하지만 천황의 이름으로 임명되기 때문에 업무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건 결국 임명권자인 천황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인데 살아있는 신(神)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은 철저한 관료사회라 할 수 있고 전 후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이런 관료들과 일란성 쌍생아라 할 수 있는 샐러리맨들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희생을 해야 하는 농촌 지역엔 '하얀 코끼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선심성 지역 공공 사업을 몰아주고, 격무와 저인금에 시달리던 도시 직장인들에게는 종신고용이라는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저항 세력은 원천봉쇄 당하고 만다. 그 결과 잘못 끼워진 단추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의존과 종속 관계 또한 공고해졌다. 



미국의 외교 정책과 노선을 함께하고 일본 내 미군기지 비용을 부담하는 한, 일본의 엘리트 지도층은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 보안 당국의 은밀한 협조를 얻어가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려왔다. 아베 입장에서는 미국이 그토록 요구하던 것들을 다 들어주었으니, 이제는 세계 최강인 미군의 무조건적인 후원을 믿고 중국을 향해 내키는 대로 대응해도 된다는 생각했던 듯싶다. (...) 미국은 물론 일본이 중국과 독자적인 친분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오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중국과 정면 대치의 갈등 상황으로 치닫는 시기와 조건 또한 일본의 뜻대로 선택하도록 놔두지 않으려 했다. -574쪽 

 


결론부터 말해 보겠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든 동해 표기 문제든 위안부 문제든 역사왜곡 문제든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분쟁에 있어서 미국은 언제나 일본 편에 섰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이 확실하다. 

누가 더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국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이 언제까지나 외교와 국방을 미국에 맡겨놓을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전통적인 강대국이 건재하며 이 둘 사이엔 남한과 북한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역학 관계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고, 미국은 현재 일본(가끔씩 한국)을 지렛대 삼아 동북아시아 역내 문제에 개입하고 있지만 결국엔 역외 국가일 뿐이다. 

일본이 열도를 움직여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가 아시아를 탈출할 수 없는 한, 일본은 언제까지나 동북아시아에 남아 있어야 하고 미국은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다.  


당장 미국과 손절하라는 뜻이 아니다. 일단, 미국과의 관계에 특별한 영향을 주지 않는 분야 특히 역사와 영유권 분쟁 등에서 일본이 미래지향적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인정함으로써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야말로 일본으로선 가장 효과적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십대 때 처음 일본 땅을 밟은 후 40여 년 동안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인 저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일본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단순히 상대의 좋은 것만 좋아하는 제한적 사랑이 아니라 단점과 트라우마까지도 이해하고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행간마다 느낄 수 있었다. 부러웠다. 한국에 대해 이 정도의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외국인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K-pop을 즐기고 BTS에 열광하며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것 말고 한국인의 내면에 새겨진 결과 무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외국인 말이다. 앞으로 십 수 년이 흐른 뒤라면 모를까 지금까지는 없는 것 같다.


'일본의 굴레'를 보면서 '한국의 굴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본이 짊어진 그 굴레는 한국의 어깨 위에도 얹혀 있었다. 




참고로, 나는 마리우스 잰슨의 <현대일본을 찾아서>를 읽은 직후 바로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두 책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었다.

<현대일본을 찾아서>는 일본에 관한 저술로는 명저 중의 명저로 손꼽히기에 손색이 없었다. 역사 서술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다소 학문적이고 후자보다는 조금 더 클래식하다면,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는 역사보다는 전쟁 이후의 현대 일본 사회와 정치를 기술하는데 더 많이 치중했다. 전자보다는 훨씬 더 읽기 쉽고 조금 더 캐주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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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비교 통사 - 역사상의 재정립이 필요한 때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박은영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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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중일 세 나라를 모두 아우르는 역사서는 접해보지 못했다.

내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비교적 일찍(?) 한국 역사를 자신의 학문 세계에 포함시켰던 저자의 이 책조차도 2020년도에서야 출판되었으니, 한국의 역사관은 여전히 애국심 고취가 주목적인 국내용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다.

한국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함께 균형잡힌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저자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내 친일파의 공격을 피하지는 못한 것 같다.


K-pop은 일찌감치 일본에 진출했건만 우리는 법적으로 일본 연예인의 국내 공연조차 금지하고 있으면서 BTS가 일본 TV에 나오고 공연 티켓이 매진된 걸 메인 뉴스로 알리면서 자랑스럽게 여긴다.

10여 년 전만해도 한국의 아이돌 지망생과 출신들에게 일본 시장은 실력을 쌓고 스타로 도약하는 발판이었다. 

이제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춤과 노래를 배우려 오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건만 아직도 일본 노래나 연예인의 국내TV 출현이 금지되어 있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왜풍이 무서워서인가?

그렇다면 반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식민강점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어디 연예계뿐이랴.

역사 분야에서의 논란과 분쟁은 예상 외로 뜨겁고 끈질기다. 

물론, 독일처럼 전쟁의 유산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 일본의 국내 정치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정치 세력 역시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를 반복하면서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분쟁을 일삼고 있다.

이런 의도적인 분쟁에 한중일 세 나라 국민 모두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나라의 자국 중심적인(심지어 왜곡된) 역사 교육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중일 세 나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으로 긴밀했던 세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이를 위해 세 나라 역사 학자들의 공통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한국의 역사를 배우고 연구한 대표적인 일본 역사학자로, 이 책은 한중일 세 나라의 공통된 주식인 '쌀'을 생산하는 농사 방법과 변화를 중심으로 세 나라가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비교 분석한 책이다.

학문적으로 접근했으나 읽기에 어렵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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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세 나라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듯하면서도 상당히 달랐는데, 특히 중국과 한국보다는 일본의 이질성이 더욱 두드려졌다. 


우선, 유교(주자학)의 수용 면에서 그렇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중국과 한국 및 일본에 순차적으로 전래되어 고대 국가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한국에선 적극적으로 수용된 반면, 일본에선 에도 시대에 양명학이 일본 지식층의 관심을 끌었을 뿐 근대에 이르기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과거제도의 유무였다. 

일정한 시험을 거쳐 관료를 뽑는 과거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국과 한국 및 베트남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제도였다. 

세습 귀족을 억제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채택된 과거 시험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대대로 세습되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단히 근대적인 제도였다. 과거 제도 덕분에 중국과 한국에선 전문적인 시험준비과목이자 학습서로써 주희의 주자학이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중세를 마무리하고 근세로 접어든 조선 역시 고려의 문벌 귀족 대신 유학자에 의해 건국된 나라였다. 반면, 문(文)보다는 무(武)가 지배적이었고, 무사 출신인 쇼군에 의해 다스려졌던 일본에서는 과거 제도가 수용될 수 없었다.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통치 시스템이 절실했던 에도의 지배층은 조선을 통해 유학에 접근했지만, 충(忠)보다는 효(孝)를 숭상하는 주희의 주자학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국 전국 시대에 공자에 의해 창시된 유가의 가르침, 곧 유교는 한대(漢代)에 국교가 된 이후 국가체제에 큰 영향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주자학 이전의 유교는 사상으로서 체계화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특히 불교가 유입되고 나서는 지배적인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따라서 주자학은 장대한 체계를 가진 불교에 대항하는 가운데 태어난 새로운 유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주자학의 성립을 전후하여 유교 자체의 면목이 완전히 일신되었다. 더욱이 주자학의 탄생은 그것을 낳은 계층인 과거(過擧) 관료층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사상계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존재 양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4쪽

중국 화북의 농업은 그 기후적 조건 때문에 축력(畜力)의 이용이 불가피하므로 가족 경영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역축(役畜)을 소유한 대경영과 거기에 보조적인 노동력을 제공하는 영세 경영 내지는 예속적 노동력의 존재라는 이중구조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약도작의 발전은 이러한 이중구조를 해소시켜 가족경영의 보편화를 초래했다. (...) 송학(宋學), 특히 주자학은 이와 같이 대두한 농민층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를 강하게 의식한 학문이었다. 주자학은 생래적인 신분의 차이를 부정하고, '배움'의 차이를 통해 사회를 질서 있게 유지하고자 한다. 따라서 주자학은 귀족적인 체제를 부정하고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통해, 즉 실력으로 지배 엘리트가 된 사대부층에 적합한 사상이면서 동시에 경영 주체로서 성장해 온 '민(民)'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를 자각적으로 의식하는 가운데 성립한 것이다. -46쪽




그 다음은 지배구조였다.

주지하다시피, 중국과 한국은 일찌감치 조공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군신 관계를 구축했다. 

한국이 중국 대륙을 천자로 받들고 신하의 신분에 머물렀던 가장 큰 원인은 원에 의한 침략과 100여 년에 걸친 원간섭기로부터 기인한다. 원이 멸망하고 고려가 다시 일어섰더라면 한국 역시 일본처럼 무를 중시하는 체제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학을 신조로 삼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새로운 나라 조선이 건국되면서 중국 대륙을 천자로 스스로를 낮춰 자발적으로 신하의 자리에 머물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중국 대륙이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음에도 이미 사라진 명을 떠받드는 건 무엇 때문인가?

이건 명분일 뿐이다.

이미 지배세력으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사대부로선 새로 부상하는 학문이나 사상 체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당시 사회에 필수불가결할지라도 문호를 개방하기보단 쇄국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18세기 말 이후 조선 근해에도 서양 선박이 빈번하게 출몰했다. 이들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선정부는 그 요구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특히 청과의 책봉 관계를 내세우면서 독자적으로 외교를 할 권한이 없다는 점을 거부의 이유로 삼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취했다. 그러나 유럽이나 세계정세에 관한 정보는 상당히 부족한 상태로 17,18세기 서학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도 외부세게에 대한 관심은 매우 약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후반이 되어 유럽이나 미국, 나아가 일본이 무력을 배경으로 강력하게 통상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했을 대 적절한 대응을 어렵게 했다. -150쪽




반면, 중앙집권화도 통일된 사상이나 사회체제도 아직 성립되지 않았던 일본은 15세기 초반 서구에서 시작된 '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종착지가 될 수 있었다. 

여기엔 태평양과 동지나해까지 이어지는 일본 제도의 지리적인 이점과 섬이라고 하기엔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일본에 비해 황해와 동해가 마치 호수처럼 둘러쳐져 있고 대륙 깊숙이 폭 들어앉은 한반도는 영토도 작았고 인구도 적었다. 여기에 더해 체제 수호 경향이 강한 중앙집권적인 왕국 체제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으니, '대항해 버스' 운전사와 승객들에겐 조선은 그냥 지나치는 간이역이었다. 




마지막으로, 군현제이냐? 봉건제이냐? 의 차이점이다. 

모든 통치자는 직접 통치를 지향한다. 그러나 다스리는 영토가 넓을수록 다스려야하는 인구가 많을수록 중앙집권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대리자에게 땅을 나눠주고 자체적으로 군대를 보유하여 영토를 수호하면서 황제를 대신해 다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는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봉건제는 지역 봉건 영주의 힘이 커지고 황제의 힘은 약해지는 생태적 특징으로 군사적 충돌과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국은 봉건제와 군현제가 번갈아 등장하다가 수당을 거쳐 송(宋) 대에 이르러서야 군현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다. 한국 역시 삼국 시대라는 혼란기와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를 거쳐 송과 동시대인 고려에 접어들면서부터 서서히 군현제가 정착된다.  

반면, 일본은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를 거쳐 전국시대에 들어선다. 전국시대는 일본의 봉건 영주인 다이묘(번주)들 간의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로 60여 년 간 이어진 이 혼란기를 오다 노부다가가 끝내면서 일본도 중앙집권화로 접어들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예상치 못하게 빨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후 일본은 도요토미와 이에야스를 거치면서 서서히 덴노-쇼균-다이묘로 이어지는 봉건체제가 구축된다.

중세 서양의 봉건제와 가장 흡사한 사회 구조였던 일본은 지정학적 위치와 함께 봉건제라는 사회구조 덕분에 동아시아에서 발전이 가장 뒤처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장 먼저 서구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른바 '서양의 충격'에 직면하게 된 동아시아 각국은 무엇보다도 구미의 군사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은 참으로 파란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 과정을 규정한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서구에서는 18, 19세기에  형성되는 국민국가의 체제와 유사한 체제를 동아시아의 국가, 특히 중국과 조선은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
이러한 유사성은 중국이나 조선에서 '서양의 충격'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 특유의 어려움을 부과했다. 즉 양국에서도 19세기 말기가 되면 국가체제의 개편이 과제로서 인식되기 시작했으나, 과연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 파악 자체가 용이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아시아 가운데 일본의 경우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은 농업 면이나 문화 면에서의 공통성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와 공통된 부분이 있었던 반면, 국가체제 면에서는 동시기의 중국, 조선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유사성의 다수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서양의 충격'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크게 규정하는 것이었다. 곧 무엇보다도 군사적인 위협이라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던 구미에 대해, '무위(武威)에 의한 평화'를 체제이념으로 한 막번체제로서는 그 존립기반을 곧장 위협받는 것이 되므로 부득이 민첩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154쪽




'왜 유럽인가?

라는 질문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와 프로테스탄티즘"라고 답했다. 

나는 한 때 이 말을 철썩같이 믿었더랬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을 읽어본 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네가 아니고 나니까"라는 대답처럼 결과론적인 혐의가 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뛰어난 문헌고증학자이자 사회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는 유럽인이라는 원초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않고 학문적으로 그 안에 안주해버렸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윤리>는 철저하게 유럽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럽의 세계화 분석에 불과하다.  



'왜 일본인가?'

늘 품게 되는 질문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리더는 누가 봐도 세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중국(청)이었지 변방의 섬나라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동안 너무 한국인다운 사고 패턴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비한국인의 사고 방식을 알기 위해 스스로 비한국인의 길을 택할 필요는 없다. 비한국인을 편견없이 바라보려는 노력만으로도 시야가 확대될 수 있다. 

고개 숙여 자세히 보기 전에 우선 고개 들고 멀리 봐야 한다. 그럼, 세상은 두 배로 넓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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