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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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은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정원과 포도밭을 거닌다.
신발은 흠뻑 젖었다. 시내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산타 파비올라에서는 6시에, 다른 어떤 곳에서는 6시에서 1분이 지난 뒤에.

물이 뚝뚝 듣는 포도나무 사이에 홀로 선 그녀는 뭔가가 분명히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잡아낼 수가 없다.
그녀의 생각 속에는 텅 빈 곳도 있고,
동시에 빽빽하게 엉켜 혼란처럼 느껴지는 곳도 있다.

러다 마침내 깨닫는다. 수태고지는 비 온 뒤에 그린 것이다.

아치들 사이로 흘끗 보이던 그 먼 풍경은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순간의 표정을 짓고 있다.
천사가 온 것은 비 온 뒤였다.

그 첫 서늘한 순간을 택한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비 온 뒤> 139쪽 

 

 

 

 

 

 

연인과 막 헤어진 해리엇은 열 살 무렵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왔던 산타 파비올라를 다시 찾는다. 
그녀는 그 뜨겁던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끝나버릴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연애가 끝나면 생각은 늘 혼란스럽고 진실은 안개에 싸여 있다. 진실은 아예 없다, 종종 그렇게 보인다. 사랑이 기대를 저버렸다. 관계가 또다시 부서져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p124)


 

여기까지 읽었을 때, 어디선가 빗속을 구르는 바퀴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내리던 비는 어느덧 그쳤고, 이른 아침의 고요함을 뚫고 종소리가 멀어져 갔다. 

해리엇에게 '비 온 뒤' 깨달음이 찾아왔듯, 나에게도 깨달음이 찾아온 걸까?  
 

             
우연히 읽은 <여름의 끝>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좋고 또 좋았다. 
'첫작품의 감동을 능가하는 후속작은 없다'거나 '한계효용의 법칙' 따위의 그럴 듯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소위 '개인적 취향'에 저격당했다고나 할까. 
한 단락... 한 단락...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나만 간직하고 싶은 그런 느낌을 품게 만들었다.  

이미 고인이 된 윌리엄 트레버는 글로써 표현되어질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는 무모한 시도 대신 표현되어질 수 없음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은 처음 읽으면 아무런 느낌이 없다가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빗소리처럼 서서히 마음을 적신다. 


그는 떠날 것이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눈을 뜨면 분홍색으로 칠한 벽과 빈 벽난로 위의 성화, 그리고 창가에 놓아둔 자신의 옷이 지금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사라질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가 떠났다는 사실은 부엌에서도, 마당에서도,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 테고, 레이번 스토브에 넣을 무연탄을 부엌으로 옮길 때도, 교유기를 끓일 때도, 암탉에게 모이를 줄 때나 토탄을 쌓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들판에서도, 달걀을 들고 사제관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때도, 코널티 양이 동전을 세는 동안에도, 보청기를 낀 남자가 단열용 전기제품 보호구나 소젖 패드 등을 찾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 옆에 누워 있을 때도,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빵을 자를 때도, 올드타임 춤곡이 흘러나올 때도.     -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185~186쪽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날 것임을 직감하고 약속과는 달리 결국 자신은 그를 따라나서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는 슬픔이, 옮겨지는 시선을 따라 차곡차곡 차오른다. 처음엔 벽난로 위의 성화와 창가에 놓아둔 옷에, 그 다음엔 마당과 외양간과 부엌에, 그리고 집밖의 들판과 사제관에, 결국은 일상 전체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행복해야 할 미래의 어느 순간조차도 슬픔으로 뒤덮힐 것임을 암시한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는 그 사실을, 그들이 만나지도 않았고 레이프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려 했다. 그녀에게는 그가 난데 없이 나타난 것 같았기에 그가 라하단을 떠나면 난데없는 곳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잊지 못할 터였다. 평생 그간의 수요일 오후들,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기억할 터였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레이프가 꾸며낸 존재였고 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고 믿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어차피 기억을 꾸며낸 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트레버<루시 골트 이야기> 187쪽

"너는 네 만족스러운 삶으로 돌아가야 돼. 내 삶의 손님이 되는 게 아니라, 너는 내 삶에서는 손님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야. 레이프, 내가 너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 우리 몫이 아닌 걸 훔치고 있는 거야. 달링 레이프, 우리는 기억으로 만족해야 돼." (...)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기억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네 말이 맞아. 너는 그러면 안 돼. 그건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나는 우리 사랑의 기억이 전부인 삶을 살 거야. 나는 눈을 감고 내 입술 위에 네 입술을 다시 느낄 거고 매일 파도를 보듯 또렷하게 네 웃는 얼굴을 볼 거야. 우리는 놀라운 친구였어. 레이프! 이 여름이 끝나지 않기를 우리가 얼마나 바랐는지! 앞으로 오는 여름은 다를 거야. 우리 둘 다 그걸 알아."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203~205쪽             

                                                                                             



만약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견뎌낼 수 있다면 아직 젊거나  여전히 젊다고 생각하는 거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는 건, 가진 거라곤 시간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남겨진 시간이 터무니 없이 짧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미래에 대한 기대 대신 과거로부터 소환된 추억을 현재의 거울로 삼는다. 미래의 어느날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오늘이 부끄럽지 않도록 애쓴다. 이것이 곧 영원히  돌고 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시간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반성과 속죄로, 추억과 연민으로, 그리고 한없는 그리움으로...


'모든 인연은 언젠가 끝이 나겠지만,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윌리엄  트레버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그려낸다. 
나는 작가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윌리엄 트레버의 문장들 덕분에 예정된 이별에 대한 직감들과 다가올 슬픔에 대한 예감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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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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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다가 개학을 얼마 안 남겨놓고 몰아쳐서 하는 방학 숙제처럼 읽었다.  사실 마크 트웨인의 작품들 뿐만 아니라 내용을 잘 알고 있어서 당연히 원작을 읽었다고 오랫동안 착각했던 작품들이 제법 많다. 어린시절 읽었던 아동용 문고들은 원작을 그대로 옮기지 않은 축소판이 대부분이라서, 올해 독서계획은 '읽은듯 (하지만) 안읽은 책읽기'로 정해놓고 보니, 본의 아니게 고전명작들을 찾아 읽게 된다. 원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만 읽으려 했으나, 톰을 빼놓고는 헉을 이야기할 순 없을 것 같아서 먼저 씌여진 <톰 소여의 모험>부터 읽었다. 

 

 

일단, 톰의 눈에 비친 헉은 이런 아이다. 
  

허클베리는 동네 어머니들이 하나같이 몹시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상스럽고 질이 좋지 않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동네 아이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고 어른들이 말려도 그와 어울려 놀고 싶어 하면서 그 애처럼 되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다른 점잖은 집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톰도 허클베리와 같은 화려한 떠돌이 생활이 부러웠지만, 그 아이하고는 절대로 같이 놀아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톰은 기회만 생기면 그와 함께 놀았다. 허클베리는 언제나 어른들이 입다 버린 헌옷을 입고 다녔는데 넝마 조각 같은 누더기 옷을 사시사철 피는 꽃처럼 펄럭거리고 다녔다. 모자는 낡아 빠진 폐물로, 천이 큼지막하게 떨어져 나간 챙이 초승달 모양으로 너덜거렸다. 외투를 걸칠 때면 옷자락이 발뒤꿈치까지 내려와 닿았고, 뒤쪽에 달린 단추는 등 아래쪽 엉덩이 근처에 매달려 있었다. 멜빵 하나로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킨 바지는 엉덩이 부분이 나지막하게 축 쳐져 있어 마치 빈 부대를 걸치고 있는 듯했다. 술 장식을 단 밑단은 접어 올리지 않을 때는 진흙에 질질 끌렸다.  - <톰 소여의 모험> 84쪽

 


톰은 폴리 이모와 동생 시드 등과 같이 살았지만 헉은 비록 아버지가 있어도 술주정뱅이여서 학교도 교회도 안가고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자는 등 떠돌이와 다름없이 생활한다. 말하자면, 헉은 백인이지만 비기독교인에 비문명인으로 배척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톰과 헉은 평등한 친구사이라기보다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고 리드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헉 역시 두뇌회전이 빠르고 겁이 없는 톰을 자신보다 한수 위라고 추켜세우면서 고분고분 톰의 말을 따르기만 한다.

 

더글러스 과부댁은 나를 양자로 삼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아줌마가 어찌나 매사에 엄격하고 격식을 따지는지 밤낮 그 집안에서 지내는 일이 갑갑해서 죽을 맛이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나는 그만 그 집에서 토껴버렸지요. 옛날에 입던  헌 누더기옷과 설탕을 담던 큰 나무통으로 되돌아와 다시 한번 자유를 누리는 몸이 되었지요. 그러나 톰 소여가 끝내 나를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갱단을 조직하는 중인데 만일 내가 과부댁 집에 다시 돌아가 얌전히 굴면 이 갱단에 끼워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왔지요.  -<허클베리핀의 모험> 16쪽

 

 

내 기억 속의 헉 역시 늘 지저분하고 불량한 아이로, 그저 주인공 톰을 빛내주는 조연 정도로만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원작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톰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동일뿐이지만 헉은 아니었다. 헉은 굳이 주일학교에 가지 않아도,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아도, 선한 지혜로움을 발휘하는 인물이었다. 


톰이 겉으로는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돈과 명예를 숭상하는 세속주의와 영웅주의에 물들어 있는 반면, 헉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남몰래 도와주고 흑인 노예를 고발하지 않는 등 사회적 가치보다는 인간적  가치를  우선시한다. 특히, 도망치는 흑인 노예를 고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헉의 갈등과 결심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 중에 백미로 꼽힌다.  헉은 자신이 타인의 재산인 검둥이가 도망가도록 방조하는 건 법을 위반하는 행위로 당연히 벌을 받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헉은 영웅심에 젖어 나중에 칭찬을 받기 위해 용기를 발휘한 게 아니라 법과 질서 대신 자신의 양심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슬아슬한 고비였습니다. 나는 종이를 집어 손에 쥐었습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나는 숨을 죽이고는 생각한 끝에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그러고는 편지를 북북 찢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끔찍스런 생각이었고 무서운 말이었지만 벌써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뱉은 말을 취소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그러고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마음을 고쳐 먹는 일에 대해서 신경을 끄기로 했습니다. 그 모든 생각을 머리에서 말끔히 씻어버렸지요. 다시 나쁜 짓을 하기로 하자고 했습니다. 나란 놈은 자라나기를 그런 식으로 자라났으니 나쁜 짓이 내 천성에 맞고, 착한 일은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맨 첫번째 일로 나는 짐을 다시 한번 노예 상태에서 훔쳐내자,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일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것도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나쁜 짓을 하기로 한 이상, 더구나 끝까지 하기로 한 이상, 철저하게 해내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 <허클베리핀의 모험> 451~452쪽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키우기로 결심했을 때, 어린시절 읽었던 허클베리핀의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라는 말이 그무엇보다 큰힘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60년대 전후(戰後) 힘들었던 일본사회는 장애아는 국가와 후손을 위해서 자연도태시키는 게 암묵적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애국자가 아니며 반민족주의자로 인식되었다.


우리는 흔히 남이 하려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용기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용기란 결국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혹 순수하게 타인의 이익을 위해 나서기도 하지만, 그대가로 자신에게 심각한 불이익이 따른다면 '오지랖' 이니 '만용'이니 하면서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감옥에 갇히거나 벌금을 내는 등 속세의 처벌을 두려워할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옥에 가야 할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르는지도 모르겠다.


천당과 지옥이 신의 영역이라면 감옥은 인간의 영역이다.
만약 헉이 "지옥은 내가 가겠어!" 라고 외치지 않고 "감옥은 내가 가겠어!"라고 외쳤더라도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읽히면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으리라.
이런 의미에서 헉은 단순히 동시대의 규범적 제약만 뛰어넘은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가로막는 벽을 허문 것이다. 종종 법과 질서로 대표되는 악이라는 '벽' 말이다.


오늘날에야 흑인노예제도의 비합리성이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마크 트웨인이 살았던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흑인 노예를 풀어주거나 도망친 노예를 숨겨주는 것은 국가 정의를 훼손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중대 범법 행위로 처벌이 뒤따랐다.  그래도 헉은 '나쁜 짓'을 하기로 한다. 그것도 끝까지 제대로 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댓가로 신이 자신을 지옥에 떨어뜨린다면 기꺼이 지옥에 가겠노라고 결심한다. 헉은 인간이라면 모르겠으나 신이라면 인간의 생명을 구한 자신을 결코 지옥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선과 악은 본능이다.
나는 인(간)성에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대다수가 선을 선택하지 못하는 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 혹은 내가 속한 집단(대표적으로 가족)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올까 두렵기때문이다.  선이라는 본성은 악이 아니라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안정 등을 내세우는 법과 규정 등에 가로막힌다. 


마크 트웨인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논란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헉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작품의 초입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내걸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20세기 초반까지 수십 년이 넘도록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청소년에게 욕설과 불법과 악행을 사주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禁書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이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이 루이자 메이 올컷이란다.  바로 <작은 아씨들>로 여전히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그분'이다.  


고전명작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하는 자 기소당할 것이다.
고전명작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자 추방당할 것이다.
고전명작에서 웃음을 찾으려고 하는 자 총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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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김혜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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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걸어온다.
큼지막한 캐리어를 갖고 있어서 언뜻 여행객처럼 보이지만 그는 노숙자다. 이제 막 중앙역으로  굴러 떨어진...
술판과 악취와 욕설이 난무한다. 그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다.  한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캐리어에 넣어둔 돈은 그대로다. 적지만 그거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안도감은 들지 않는다. 차라리 모두 없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고 이 광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이나 자존감, 그런 것들이 정말 있다면 그건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떨어뜨리고 마는 거다.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되는 거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오는 최악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29쪽

 

여자는 늙고 아프다.
남자와 여자는 밤을 기다린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나란히 눕는다. 추억할 과거도 기약할 미래도 없는 이들에겐 오직 현재 뿐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란 불청객이 불쑥 끼어들테니까...

종일 별다른 것을 먹지 않아도 여자의 배는 늘 불룩하다. 임신한 것처럼 솟아난 그 배가 거슬리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많다. 자꾸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곧 스스로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86쪽

 

 

남자는 아픈 여자를 돌보고 아픈 여자는 남자 주위를 맴돈다.
이게 과연 사랑일까?   
만약 사랑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너와 여자의 관계는 이곳에 있을 때만 유효한 거다. 팀장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을 벗어나는 즉시 너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될 거다. 그렇게 단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속하지 않은 그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내겐 이 여자가 전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35쪽


작품 해설에서 지적했듯 이 작품을 읽는 독법은 여러가지다. 어떤 작품인들 단 하나의 독법만 있을까마는...
암튼, 평론가는 '희생당한 인간(호모 사케르)'과 '사랑하는 인간(호모 에로스)' 그리고 '희망 혹은 절망하는 인간' 이렇게  세가지 접근법을 제시한다. 


일단 작품의 주인공들은 노숙자다. 이들이 어떤 사연으로 거리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산업화 사회에서 아니 인류 사회에서는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자는 늘 존재해 왔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노숙자를 지원하는 센터나 임시 쉼터 등등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노숙'만큼은 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노숙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희생당한 인간에 대한 연민만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아선 안된다. 두번째는 육체적 욕망으로써 표출되는 사랑의 실체다. 남자와 여자는 절망할수록 생의 끝으로 다가갈수록 에로스에 몰입한다. 아름답게 포장된 사랑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보여준다.

 

살아 있는 내 육체가 혐오스럽다. 사는 게 이토록 힘겨운데 쉬지 않고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허기를 느끼고 다른 누군가의 체온을 바란다는 게 징그러울 정도다. 인간다움과는 먼 이런 방식으로 내 몸이 바라는 걸 해결해줘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아무렇게나 아무데서나 몸을 섞고 신음을 내뱉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가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인가. -285쪽

 

 

 

짝짓기 후 숨을 거두는 자연계의 많은 생명체들처럼 남자와 여자는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임을 웅변한다. 작가는 사랑을 불쾌하고 역겹고 심지어 자기파괴적인 지경으로까지 추락시킨다. 더이상 물러설래야 물러설 곳도 없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도 없는 곳으로 사람을 몰아부친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제 끝이구나' 생각한 순간, 불연듯 앞부분에서 스쳐가듯 지나쳤던 한 문장이 튀어올라왔다. 

 

 

이게 젤 밑바닥인 거 같지? 아냐, 바닥 같은 건 없어.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 -161쪽

 


나는 이 문장에 전율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을 선전하지도 자기희생적 사랑의 숭고함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이게 희망의 끝인 것 같지? 아냐, 희망 같은 건 없어. 희망이라고 생각한 순간 또다른 걸 희망하게 돼.'
'이게 절망의 끝인 것 같지? 아냐, 절망 같은 건 없어. 절망이라고 생각한 순간 또다시 희망하게 돼.'
'이게 사랑의 끝인 것 같지? 아냐, 사랑 같은 건 없어. 사랑이라고 생각한 순간 사랑이 아닌 거야.'



마지막 세 번째는 완전한 절망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속 "그"는 완전한 절망을 바라 광장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다시 희망을 바라게 된다. 미래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미래를 꿈꾸자 현재는 형편없는 요구를 해온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채무증서처럼 시간은, 갑자기 그를 몰아세운다. 희망은, 그보다는 절망을 계획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유혹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완전한 절망의 불가능성을 통해 온전한 희망 역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 된다. 삶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절망이나 희망의 몫은 없다. - 작품 해설 <캐리어 혹은 탈구된 영혼에 대하여>  중  by 강유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네가 필요하다.'
나는 이 작품을 모든 실존의 시작이요 끝인 이 단 한마디로 귀결짓고 싶다


멀리 돌아왔다.
한참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첫 번째를 거쳐 두 번째를 지나 세 번째 독법에 도달해 있었다. 
여러가지 시선으로 읽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한다면 김혜진의  『중앙역』처럼 여러가지 시선 전부로 읽히는 작품은 어떤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원래는 이 작품이 목표가 아니었다.  
호평 일색인 『딸에 대하여』를 읽기 앞서 예행연습(?) 차원에서 집어든 작품이었다. 처음 만나는 작가였기 때문에 일단 '스타일'을 알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목표로 한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제 이 작품은 '맛보기용' 혹은 '머리식히기용'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작가 김혜진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그녀가 앞으로 얼마나 멀리 나갈지... 얼마나 빨리 달릴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그저 김애란이나 황정은의 작품을 읽고난 것처럼 호흡이 빨라지고 신열이 나고 얼굴이 달아오를 뿐이다. 솔직히 난지금 '멘붕' 상태다.  '거인'을 만난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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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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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草처럼 꾸불꾸불 이어진 書架 사이 사이

손끝이 닿는 곳마다 감겨오는 숨결들


끝없는 세월을 거슬러 오르고 수많은 난관을 헤쳐온

차곡차곡 강바닥에 쌓인 모래알같은 이야기들


그 속에서 나는 보았네

은빛 가득한 수면 위에 홀로 금빛으로 빛나는 단 한마리

바로 황금 물고기를

 

.

.

.

.

.

 

 

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살짝 벗어나 책 속으로 숨어든 이 순간만큼은 '나'를 잊어버릴 수 있어서 좋다. 골치 아픈 세상만사 다 제쳐두고 오롯이 책 속의 등장인물과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절대자유의 순간이랄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으며, 누구든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훨씬 더 자주 흔들렸을 테고 더 깊이 절망했으리라.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관계에 더 한층 집착했을 것이며 현실을 외면하고 미래에만 매달렸으리라.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답없는 질문들 앞에서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비관(판)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어렸던데다가 그 후에 살아온 모든 나날이 그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 일은 차라리 꿈이랄까, 아득하면서도 끔찍한 악몽처럼 밤마다 되살아나고 때로는 낮에도 나를 괴롭힌다. 햇살에 눈이 부시고 먼지가 날리는 텅 빈 거리, 푸른 하늘, 검은 새의 고통스런 울음소리, 그때 갑자기 한 남자의 손이 나를 잡아 커다란 자루 속에 던져 넣고, 나는 숨이 막혀 버둥거린다. 나를 산 사람은 랄라 아스마이다. -9쪽


 

 

노벨상 수상 작가인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는 유괴당했을 때 초승달 귀걸이를 하고 있어서 '밤'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불리게 된 라일라의 이야기다.


라일라는 유대인 노부인의 수발이 되어 살아가다가 그녀가 죽자 창녀촌과 빈민촌을 떠돌아 다닌다. 품을 팔아 의식주를 해결하기도 하고 좀도둑질을 하기도 한다. 의지하는 어른을 만나기도 하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를  얻기도 하지만 늘 그녀를 붙잡으려는 그물이 사방에서 던져진다.  그녀는 그때마다 사력을 다해 도망을 쳐야만 한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더이상 도망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으면 아무곳에나 숨어들어 사흘 밤낮을 깊은 잠속에 빠져든다. 


사람들은 지친 그녀를 정성껏 보살펴 준다.

그러나 그녀가 기력을 회복하면 꼭 그녀를 가두거나 통제하려고 한다. 

그녀는 윤이 나는 검은 피부와 청량한 목소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빛났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극한의 생존 조건 속에서도 그녀는 책을 읽었다. 책 속에서 또다른 세상을 만났고 또다른 삶을 보았다.  라일라에게 책은 좋은 친구처럼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모든 걸 알려주었다.



 

나는 몇 달 동안 닥치는 대로, 어떤 순서도 따르지 않고, 나 자신의 기분에 따라, 원하는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지리학과 동물학에 관한 책을 읽었고, 졸라의 『나나』와 『제르미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세 가지 이야기』,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  슈바르츠 바르의 『마지막 의인』,  얌보 우올로겜의 『폭력에 대한 의무』,  벤 젤룬의  『모래의 아이』,  크노의  『내 친구 피에로』, 엑스브라야의  『모랑베르 패거리』,  바슐르리의  『벙어리 여인들의 섬』,  뱅스노의 『혼돈』,  상드라르의 『모라바진』 같은 소설들도 읽었다.  또한 번역본으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  『잘나의 탄생』 『내 예쁜 손가락이 내게 말해줬어요』 『순결한 성자들』도 읽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책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이었다.  밖은 여전히 더웠지만 도서관은 무척 조용하고 시원했으며, 그곳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73~80쪽 중-



불행으로 점철되는 라일라의 기구한 운명과 때론 자포자기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고 내내 가슴을 졸이던 나는 그녀를 믿게 되었다. 그 어떤 가혹한 시련이 라일라를 덮쳐도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보라! 그녀는 에밀 졸라와 빅토르 위고와 카뮈와 플로베르를 만나지 않았는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가장 좋아하는 소녀가 어떻게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은 사람이 어떻게 선을 악으로 갚으며, 졸라와 모파상을 만난 소녀가 어떻게 허영심과 순수함을 구별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라일라는 '나'이기를 기꺼이 포기한 순간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고, 악착같이 움켜쥔 양 손의 힘을 뺀 순간 두 발로 땅 위에 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연주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누군인지 알고 있었다. 내 왼쪽 귀 안쪽의 작은 뼈 하나가 부러졌다는 사실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옛날의 그 검은색 자루, 새하얀 거리, 불길한 새의 잔뜩 쉰 울음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조라도, 아벨도, 들라예 부인도, 저프도, 도처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뒤쫓고 그물을 치는 그 모든 사람들도, 나는 잊어버렸다.  -247쪽


 

허용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탐하고 취하는 사람들 속에서 라일라는 오히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고, 보호와 속박으로 포장된 사랑에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웠으며, 타인의 연민과 욕망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홀로 설 수 있었고, 조건없는 도움과 선의에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과 행복을 양보함으로써 보답할 줄 알았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리고 약한 물고기에 불과했던 라일라는 마침내 길고 긴 여정을 마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간다.


 

더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십오 년 전에, 영겁의 시간 전에, 물 때문에 생긴 분쟁, 우물을 놓고 벌인 싸움, 복수를 위하여 힐랄 부족의 적인 크리우이가 부족의 누군가가 나를 유괴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 물살을 거슬러올라가 어느 강의 물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막 먼지에 손을 올려놓으며,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275쪽



삶이란 누구에게나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아무도 돌아가는 길을 기억하지 못한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그옛날 그길을 따라 바다로 나갔었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바다로 떠난 연어들이 모두 되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듯 누구나 떠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난을 극복한 ㅡ혹은 '선택(구원)'받은 ㅡ특별한 존재만이 귀향을 허락받는다. 


 

영국인 어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르 클레지오는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서구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프랑스의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줄곧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를 떠돌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돌아갈 '그곳'은 어디일까? 아프리카일까? 프랑스일까? 아니면 영국일까? 작가의 이와 같은 체험은 낙인처럼 그의 정신 세계에 새겨져 그의 작품은 늘 '구원과 귀향 그리고 치유'라는 패턴을 갖는다. 



 『황금 물고기』의 라일라 역시 '유괴'라는 사건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향 등지를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작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1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읽힌다. 독자는 주인공인 라일라에게 동화되기보다는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동행자이거나 목격자로서의 위치에 놓여진다.  

 

그래서 책이 끝나면서 라일라의 여정은 끝나지만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독자로서의 나의 여정은 새롭게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책을 읽기 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겠지만 그 일상 속의 나는 책을 읽기 전의 나와는 다른 나일 수밖에 없으리라. 여전히 나는 귀향 중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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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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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부터 쿡방 먹방 들이 이렇게 많아진 거지?'

어쩌다 TV 앞에 앉으면 뉴스를 제외하고는 음식과 연관이 없는 프로그램은 손에 꼽을 정도다. 

채널마다 음식점 소개 혹은 요리 관련 프로가 방영되고, 심지어 홈쇼핑에서도 여차하면 먹거리들을 판매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미식의 시대를 너머 탐식 심지어 폭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만 같다.  


'저 많은 프로그램들이 정말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걸까?'

'저렇게 다양하고 고급진 음식들을 직접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건강식은커녕 끼니조차 제때 챙겨먹기 어려운 게 대다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지 않을까?'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데에는 먹방만한 게 없다는 것일까?'

'음식 방송이야말로  방송국 입장에선 저비용으로 손쉽게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이란 말일까?' 

 

나도 모르게 넋놓고 TV 화면을 바라보다가 순간 수치스러워졌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고민과 질문들을 모두 뛰어너머 그저 '먹고 산다'는 것, 생명체라면 벗어날 수 없는 그 고된 숙명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밀려왔다.


'식(食)'과 '생(生)'

'먹고 산다'는 이 한마디만큼 단순 명료하게 인간을 정의내릴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모두 '먹는 인간'일 뿐이다.

 


 

1949년에 마닐라에서 열린 전쟁범죄 재판에 나가 증언하기도 한 농민 칼메리노 마햐야오가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았다. 1946년부터 1947년 초까지 이 마을과 주변에서만 서른여덟 명이 잔류 일본병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먹혔다. 머리 부분 같은 잔해 혹은 먹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증언으로 사실은 명백해졌다. 하지만 일본 측은 단 한 번도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67쪽


1993년도 소말리아 부흥과 인도적 문제 해결을 위한 원조 금액이 1억 6600만 달러인데, 그에 따르는 유엔의 군사 활동에 15억 달러가 넘게 든다고 한다. 식량 1달러당 군사비가 10달러. 이상하다.  겉보기에도 그렇다. 유엔 활동단에 참가한 각 군의 장갑차나 헬리콥터의 소음이 모가디슈를 내리누르고, 주민들은 굶주린 배를 안고 웅크린 채로 있다. - 202쪽


1993년에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외국 통신사나 일본의 잡지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알았다.

함대의 훈련 기지에서 신병 수십 명이 영양실조로 입원하고 그중 네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그 원인으로 함대의 재정 악화, 식량의 부정 유출 가능성을 암시하는 보도가 있었다. -247쪽


체르노빌에서 '먹는다'는 것은 여기까지 다다른 끝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행위다. 우크라이나는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를 맞고 있고, 월간 인플레이션율은 50퍼센트를 넘었다. 먹는다는 것은 오염 여부를 따지기 전의 절박한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면 눈앞의 풍경이 애절하고도 비장하게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 길에서 살짝 측정기를 보았다. (한 시간당) 1.0마이크로시벨트가 나왔다, 도쿄의 열 배가 넘는다. -293쪽



 

『먹는 인간』은 기자인 저자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세계 각 지역의 음식 문화(?)를 취재하고 작성한 기사문들을 모은 책이다. 다만, 여타의 현지 음식 취재와는 달리 이 책의 시선은 먹는 '즐거움'이 아니라 먹는 '괴로움'에 모아져 있다.


저자의 카메라에는 사탕수수나 야생동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의 인육을 먹었던 일본 병사들과 식량원조 지원을 위해 진행된 군사 행동에 식량원조보다 열 배나 더 되는 돈을 쓰는 유엔평화유지군 및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버섯을 캐먹고 물고기를 잡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체르노빌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는 부자들이 먹고 남긴 음식들을 사먹는 빈민들이 존재하며, 러시아에서는 경제개혁 실패와 권력층의 부패로 영양실조에 걸린 병사들과 구걸하는 첼로 소녀를 만날 수 있고, 태국에서는 애완동물 사료공장에서 자신이 만든 통조림 값보다 조금 더 많은 급료를 받으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소녀도 있다.



 

이건 저자가 취재를 하던 당시의 모습일 뿐이라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 년이나 지난 일일 뿐이라고... 오늘날 세상은 훨씬 나아졌을 거라고... 항변해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해마다 30%의 음식(13억톤, 약1조달러)이 버려지고 있으며, 유엔의 <2017 세계 식량안보 및 영양 상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 기아인구는 전체인구의 약 11%인 8억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 속에 소개된  전 세계 각 지역의 에피소드들이 '빈곤과 기아'라는 단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는 건 아니지만, 인간이란 결국 먹고 사는 존재ㅡ살고 먹는 존재가 아니라ㅡ라는 부인할 수 없는 본질을 보여준다.  그래서 정확한 통계 수치나 기아 난민을 찍은 자료 화면들보다 훨씬 더 실체적으로 단 한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바로,

굶주림은 굶주리는 사람이나 배부른 사람 모두를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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