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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평점 :
'나뭇잎을 햇빛에 비췄을 때 보이는 잎맥을 그리고 싶다'
나는 일찌기 제임스 설터의 단편집 <어젯밤>을 읽은 후, 그가 남긴 이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몇 편 안 되는 그의 작품들을 다 읽고 난 지금, 내가 과연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나 했었는지 아니 앞으로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수나 있을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만큼 설터의 작품은 밀도가 높다.
어떻게 단 두 명의 인물만으로 특별한(?) 사건 전개도 없이 삶을 그려낼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관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 한 점, 손끝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 코끝에 맴도는 한 줄기의 향기로 삶을 표현하고, 그 삶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시간을 포착해낸다.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이국적인 소리와 쏟아지는 햇빛, 무성한 잎사귀, 쓰러진 나무,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에 달아나는 작은 짐승들, 곤충, 고요함, 그리고 꽃. 이 모든 것은 제각각이면서도 밀접하게 엮여 있고, 보이는 것과 달랐다.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66쪽)
삶은 미스터리다.
해변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보고, 햇살처럼 부서지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달콤한 포도주와 연인의 따뜻한 향기에 취하고, 나른하게 움직이는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그렇지만, 그 무엇도 삶은 아니다.
삶은 마치 숲과 같다.
숲은 멀리서 보면 엇비슷해 보일 뿐 숲을 이루는 개별 나무들의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빛이 허락한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 나무의 본질을 볼 수는 없다. 눈(眼)은 빛이 비춰주는 사물을 볼 뿐, 빛 자체는 제대로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어쩌다 한줄기 빛 속으로 흩날리는 먼지의 무리를 보고나서야 빛이 존재한다는 걸, 그 덕분에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삶은 빛 그 자체다.
빛 자체는 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빛이 비추는 사물을 볼 수 있을 따름이듯, 내 삶은 타인의 삶에 비추어질때만 볼 수 있다.
책은 그녀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하나의 문단, 하나의 진술이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문장들은 가느다랗다. 수영할 때 민물 가자미가 몸 속으로 들어오듯. 그녀는 흥분했다.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이 그렇듯, 윤이 나게 닦인 문장들이 딱 적당한 때 도착한 기분이었다.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238쪽)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문장 앞에서 휘청했다.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결국 삶은, 존재하지만 볼 수는 없는 빛과 같은 어떤 것이다. 내 삶은 타인의 삶 속에 비춰질 때만 볼 수 있다...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의 원제인 <Light Years>는 '광년(光年)'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광년은 빛이 일년동안 이동한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이지만, 기나긴 억겁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설터는 사람 역시 숲을 이루는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생각했고, 나무를 이루는 잎맥처럼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그려내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빛(Light)'과 '시간(Year)'이지 않았을까?
삶은 볼 수 없는 빛과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건 결국 선택의 문제다.
무감각한 권태와 무의미한 실존에 질식당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한가지는 있어야 한다. 그게 일이건 사랑이건 가족이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문제는 이것들을 동시에 가질 순 없다는 점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고 깨달은 건 바로 이 점이다. 결국 인생이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 혹은 두가지를 반복적으로 취사(取捨) 선택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거...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는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었다.
한 권의 책은 몇 단락으로 요약되고, 다시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되다가 마침내 단 한개의 문장으로 뇌리에 새겨지는 법이다. 그런데 설터의 작품은 도무지 단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재독(再讀)할 가치가 충분한 작가다.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처럼, 삶은 흉터로 나뉜다. 인생 초기에 생긴 흉터들은 더 촘촘하다. 시간에 압축된 듯, 이십 년 세월의 상처들은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250쪽)
계절은 그녀의 은신처였고 그녀의 의복이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굴복했다. 땅처럼, 과일처럼 익고 시들었다. 겨울이면 긴 양털 코트로 몸을 감쌌다. 그녀에겐 낭비할 시간이 있었고, 요리를 하고 꽃꽂이를 했다. (256쪽)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 기구와 그릇들은 모두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273쪽)
이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 확실했다. 사랑 대신 존경을 받을 나이였다. 허영을 키우고 잡지책을 넘기던 시절을 지나, 부러움을 받던 세상에서 더 넓고 더 고요한 세상으로 순례를 해온 것이다. 여행자처럼 할 얘기가 많았지만 말로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3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