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지리의 힘 1~2 - 전2권 지리의 힘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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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말그대로 '지리'를 중심에 뒀지만 '지리'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정학적 못지 않게 지경학적 위치가 한 나라의 성장과 쇠퇴 및 외교 관계까지 결정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일단, 큼직하게 대륙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유럽 대륙이 일찍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운행이 가능한 하천들이 많이 분포했다는 점이다. 라인 강, 다뉴브 강, 센느 강 등등 대륙을 가로 지르면서 풍부한 수량과 완만한 흐름으로 운송과 소통에 기여했다. 물론, 이런 강의 존재는 계곡과 산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이런 자연물들은 자연스럽게 천연 장벽이 되어 국경을 이루기도 한다. 그래서 유럽은 이렇게 뻗어나가고 저렇게 퍼져나간 산맥과 강줄기들 사이사이로 크고 작은 민족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면서 오늘날 여러 국가들로 발전했던 것이다.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바 강을 제외하면 유럽의 주요 강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왜 유럽이 상대적으로 소규모 국가들이 많은지 이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대다수 강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탓에 어떤 면에선 이 하천들이 천연 국경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저마다 권리에 따라 경제적 영향권을 형성했다. 이런 양상은 각 하천 유역마다 적어도 하나의 주요 도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여기서 성장한 일부 도시가 수도들이 되었다. (...)
오늘날의 수도들인 비엔나,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 부다페스트 그리고 베오그라드(세르비아의 수도)가 다뉴브 유역에서 탄생했다. 한편 이 경로는 서로 이어지는 두 개의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천연 국경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국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각 민족들이 부상하더니 마침내 민족 국가들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다뉴브 지역의 지리, 특히 최남단의 지리를 보면 북유럽평원의 큰 나라들에 비해 왜 유독 이 지역에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들이 많은지 수긍이 간다. -<지리의 힘 1권> 92쪽




반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러시아의 경우엔 동서로 가로지르는 강이 없다. 그래서 교류와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고 여기에 혹독한 기후까지 더해지면서 오랫동안 그리고 현재까지도 성장이 지체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지리적 조건은 전략적 깊이가 너무 길어서 외부 세력이 공격해 들어오면 후퇴하면서 기력을 모아 되받아칠 수 있는 방어엔 적합하지만(물론, 몽골 기마병에게는 이 전략도 통하지 않았다) 외부 세계로 힘을 투사하려면 보급선과 전선이 길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된다. 그래서 러시아는 대국인 건 분명하지만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췄다고 할 순 없다. 




우랄 산맥으로 유럽 대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 북한은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과 해상 경계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아시아의 맹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지리의 힘 1권> 130쪽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영토가 넓은 우크라이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지리의 힘> 1, 2권 모두 우크라이나를 위한 독립적인 챕터는 없다.  하지만 2022년 6월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동남부 지역과 돈바스 지역을 함락시켰다.  팀 마샬이  '순망치한' 관계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해 언급한 그대로 진행된 셈이다.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가 수도 키에프를 계속 지배하는 한 러시아는 자국의 완충지대가 손상되거나 북유럽평원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부동항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항의 임대차 계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신중한 중립국의 행보만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를 용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중립적 행보의 폭을 점차 넓혀가는 우크라이나가 괘씸하더라도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고 나토와 유럽연합이라는 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하려는 야심을 품고 러시아 선박의 흑해 항구 입항에 반대한다면? 한술 더 떠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군함을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물론 이는 현재로서는 어불성설에 가깝다. (...)
러시아의 외교 정책 엘리트가 보기에 유럽연합 가입은 나토 가입의 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일종의 레드 라인(불화나 협상 시 한쪽 당사자가 양보하지 않으려는 쟁점이나 요구)을 넘는 행위로 본다. -<지리의 힘 1권> 137쪽




어불성설이라고 했던 일들이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는 순진했고 국민은 성급했다. 대통령은 공약을 지키려다가 전쟁을 야기시켰고 국민은 나토와 EU가입이라는 눈 앞의 당근에만 현혹되어 등 뒤에서 휘두르는 러시아의 채찍은 잊었다. 

현재 러시아 지배로 들어간 지역을 우크라이나가 자력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나토나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 같지도 않고...




한편, 혜택 받은 유럽 대륙과 가장 흡사한 대륙을 꼽으라면 북아메리카 대륙일 것이다.

북아메리카 대륙은 미시시피 강이 남북으로 흐르면서 수송로 역할을 톡톡히 할 뿐 아니라 대서양으로 흐르는 강줄기들이 수로처럼 잘 발달해 있어 18세기 산업혁명 당시 증기선들이 오르내리기에 수월했다. 여기에 중부와 남부의 대평원은 대규모 곡물 재배를 가능케했다는 점 또한 미국이 최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지리적 조건이었다. 여기에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양차 대전에서 영국은 비록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에 휘말려든 반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미국은 전쟁의 포화는 받지 않은 채 전쟁 특수로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영국으로부터 전세계 거점 지역들을 인계받아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발단까지 마련한다. 




"훌륭한 기지들이군. 이제 우리가 가져야겠어."
가격은 적절했다. 1940년 가을에 영국은 더 많은 군함들이 절실했다. 반면 미국에게는 50척 정도의 여분이 있었다. 결국 기지 협상을 위한 구축함들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은 강대국이 될 수 있을 능력을 전쟁을 계속 수행하게 하는 도움과 맞바꿔 버렸다. 이렇게 해서 서반구의 영국 해군 기지 대부분이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 -<지리의 힘 1권> 72쪽




사실, 영국은 지경학적으로 볼 때 두 가지의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첫째는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강력한 분리 독립 세력이 무려 두 개나 존재한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국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를 이루는 북쪽과 웨일즈와 잉글랜드를 이루는 남쪽은 원래 각기 다른 대륙이 충돌하면서 떨어져 나왔단다. 그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아일랜드가 섬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지형을 이룬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인류가 그곳에 거주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1만 년 전의 일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 지역은 높은 협곡과 산맥 및 그 사이의 계곡을 흐르는 강들로 천연 국경선이 그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영국(브리튼)은  단순히 지방색이라고 하기엔 무색한 지역간 차이가 매우 큰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민족이 각기 다른 역사와 고유한 문화를 간직하며 발전해온 상태에서 심지어 종교까지 다르다면 오히려 통합 대신 분리와 독립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영국이 대영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내부에서 단결해서 외부로 뻗어나간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와 신대륙을 필두로 한 식민지배를 통해서였다. 부가 나라 안으로 모여들 때까지는 다름과 차이라는 틈은 돈으로 충분히 메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접착제가 공급되지 않자 틈은 갈라지고 벌어졌다. 영국 본토가 브렉시트를 감행함으로써 북아일랜드라는 조각을 잘라냈고, 이를 지켜본 스코틀랜드 역시 분리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원래 스코틀랜드는 아일랜드의 소코티 부족이 점령했던 곳으로 스코틀랜드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이들 지역이 종교와 민족 및 역사와 문화 등에서 모두 잉글랜드적이지 않은 건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한편, 아프리카와 호주 대륙은 물이 부족한 대륙이다. 특히, 아프리카는 인류가 최초로 기원한 지역으로 그 출발이 빨랐고 크기 또한 유럽과 신대륙 및 아시아 대륙을 능가함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나일강 문명을 제외하면 별다른 문명을 이룩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이 황하 문명을 인도가 인더스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풍부한 수자원과 이용할 수 있는 수로가 존재했던 지리적 혜택 덕분이었다.




이집트는 어디까지나 지역 강국에 지나지 않았다. 국토의 3면이 사막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지중해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 테지만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나무가 귀하다는 점이다. 대다수 역사에서 나무가 귀한 나라치고 세력을 과시할 만한 강한 해군력을 구축한 나라는 없었다. 물론 이집트에 해군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이집트는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고 레바논에서 삼나무를 수입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대양 해군이 돼 보지는 못했다. -<지리의 힘 1권> 236쪽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이집트는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중 한 곳이고 기원전 10세기에 이미 거대 왕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중해와 맞닿아 있으면서 그리스가 지중해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바다로 진출조차 시도해보지 못했다. 아니 딱 한 번 시도하긴 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바다에 닿자마자 바로 도망가지 않았던가. 

이집트가 바다와 친하지 않았던 이유가 늘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알게 되었다.

이집트에는 배를 만들 수 있는 나무가 없었던 거였다. 



오늘날에도 이집트는 물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의 '급수탑'으로 불리는 에티오피아가 그랜드 르네상스 댐을 건설하면서 청나일강의 물길을 장악할 수 있게 되자 이집트로선 언제라도 생명선을 위협받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물을 덜 사용하는 작물 쪽으로 농업을 개편하고 에티오피아가 물을 무기로 사용할 수 없도록 백나일강의 진원지인 수단과 연합할 수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어 보인다. 




이제 또다른 고대 제국 중 하나인 중국을 살펴볼 차례다.

사실 저자는 <지리의 힘> 제1권 첫 번째 챕터를 중국에 할애할 만큼 중국을  중요한 나라로 보고 있다. 중국은 4천 년만에 대륙세력에서 대양세력으로 거듭나고 있는데 만약 중국의 도전이 성공한다면 차세대 강대국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영토, 인구, 시장, 신기술 등등 강대국이 갖춰야할 지리 외적 요건까지 겸비했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은 20세기 들어 새로 갖춘 것들이 아니다.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넓은 영토에 엄청난 인구와 서양을 능가하는 기술 대국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난 한 세기 동안 중국은 강대국의 조건을 가졌음에도불구하고 강대국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더 정확하게는 강대국이었으나 강대국의 지위에서 밀려난 것이다.

저자뿐만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무섭게 성장하는 현대 중국을 바라보면서 '중국이 어떻게 저렇게 빨리 성공할 수 있지?'라면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러나중국은 강대국이 될 조건들을 이미 다 갖추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중국은 어떻게 그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서도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을까?'라고 물어야 옳지 않을까.



지경학적으로 강대국의 조건을 갖춘 나라가 강대국이 되는 과정과 원인을 찾아보는 건 특별할 게 없다.  1+1=2 처럼 지극히 당연한 섭리니까. 오히려 중국과 같은 나라가 강대국이 아닌 게 더 이상하고 비정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의 조건을 갖지 못했거나 부족함에도 강대국이 되었거나 그 반대로 강대국의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강대국이 되지 못한 나라를 살펴보는 게 더욱 중요하다. 

영국과 스페인은 전자에 가깝고, 러시아와 브라질은 후자에 가깝다.  




중국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14억 가지는 된다. 또한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없는 이유도 14억 가지는 된다. 1930년대에 미국에 몰아친 대공황 같은 사태가 중국에서도 발생한다면 중국은 수십 년은 후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세계 경제라는 틀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중국은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이 만들지 못하게 되는 순간 엄청난 실업 사태가 발생한다. 이 대량 실업 사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도시 지역에 사람들이 주로 몰려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커다란 사회적 동요를 피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중국에서 보이는 여타의 모든 현상처럼 이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사회적 동요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다. -<지리의 힘> 1권, 53쪽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없는 14억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중화사상'이다. 

쇄국은 곧 쇠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고립이든 의도적인 선택이 되었든, 경계를 세우고 안과 밖을 구분한다는 건 결국 제2의 만리장성을 쌓는 것이다.  천하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성벽을 세워 스스로를 천하 속에 가둔 진나라는 멸망했다.  

14억 인구가 많긴 하지만 60억 인구와 분리시켜 권외 지역으로 남는다면, 전세계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중국 자신에겐 득보단 실이 더 많을 것이다. 




한편,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대국과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일본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지리의 축복보다는 재앙을 입은 경우가 더 많았다. 저자는 이런 우리나라의 지리적 운명을 '경유지'로 표현했다. 

한반도는 국경을 여러 나라와 맞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유지라는 이유만으로 일찌기 몽골 제국이 일본 열도를 침공할 때 길잡이로 앞장서야 했으며 일본이 대륙을 침공할 때도 유린당했다. 



고려 이전까지는 외부로 힘을 투사하고 뻗어나가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반도 내의 여러 부족들이 서로 다투면서 힘을 소진시켰고 결국 힘겹게 얻은 대륙의 북쪽도 지키지 못하고 한반도에 주저앉아 버렸다. 고려는 자주적으로 국정을 이끌면서 몽골에 30년이나 저항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조선에 이르러선 강대국의 속국이라는 지경학적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약하고 심지어 한심한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구한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결과에 따른 평가이고, 어쩌면 조선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무모한 도전이나 명분 대신 평화와 안정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개입없이 조선이 단독으로 일본을 상대했다면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다. 청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도 군사력으로는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다만, 유목민족이 세운 청나라는 과거 수, 당과 몽골이 한반도 공략에 대대적으로 나섰지만 모두 실패하면서 왕조의 멸망을 자초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복해서 직접 통치하는 대신 조공을 받는 속국이나 자치적인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어쨌든 두 가지 모두 한반도는 경제적 이득보다는 군사적 방어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반도는 어떠한가?

위치도 바뀌지 않았고 이웃한 나라 역시 그대로다. 

강대국의 군사 방어용이라는 지리적 가치 또한 변하지 않았다. 




18세기에 한국이 얻은 <은자의 왕국>이라는 별칭은 수세기에 걸친 정복과 점령, 약탈 혹은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경유지의 대상이 된 뒤에 이 나라가 스스로 고립을 택한 데서 나온 명칭이다. 만약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이 북쪽에서 내려오면 일단 압록강을 건넌 뒤 해상까지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천연 장벽은 거의 업다. 반대로 해상에서 육로로 진입한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런 배경에서 몽골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나갔고 이어 명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그리고 일본도 수차례나 침입했다. 한국이 여러 교역로들과 단절하고 홀로 있기를 희망하면서 바깥 세계와 엮이지 않는 편을 택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 일본이 다시 들어왔고 1910년에는 아예 이 나라를 통째로 합병해 버렸다. (...)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북위 38도선을 따라 분단되었다. (...)  
역사학자 돈 오버도퍼 교수는 38도선에 따라 이 나라를 남북으로 임의로 분할한 것은 여러 모로 불운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945년에 미국 정부는 8월10일의 일본 항복에만 정신이 팔려서 한반도에 대한 명확한 전략을 수립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한반도에 북쪽에서 소련군의 이동이 포착되자 미 백악관은 한밤중에 다급하게 회의를 열었고 오로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발간한 지도만을 지참한 두 명의 하급 관리는 북위 38도선을 손으로 찍었다. 즉 이 나라를 반쯤 내려온 소련군의 남하를 중단시킬 지점으로 북위 38도선을 찍은 것이다. 
이 자리에는 어떤 한국인도 또는 한국 전문가들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인 제임스 번스에게 그 선은 약 반세기 전인 1904년에서 1905년에 치른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상의하던 선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미국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소련은 미국 측이 러일전쟁 당시 소련의 주장을 사실상 승인했으며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과 북쪽의 공산 정권도 용인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국 거래는 성사됐고 이 나라는 분단되었다. -167~168쪽





이 내용이 실제 팀 마샬의 영어 원서에도 그대로 나와 있는지 모르겠다. 

원서에서는 일본만 언급했다가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다니까 은근슬쩍 그것도 일본보다는 앞부분에 그러나 분량은 적게 삽입해서 생색만 낸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저자와 에이전트의 약삭빠름을 지적하기보다는, 만약 그렇다면 21세기 초 현재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 또한 그정도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다.  

한국산 가전과 K-콘텐츠 및 한국인들이 국제 무대에서 선전한다고 해서 마침내 한국이 세계 TOP10에 들었다거나 지역 강국이 되었노라고 벅찬 자부심과 애국심에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초대받고는 독립국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진정한 우방으로 조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던 고종과 민영환의 '우물안 개구리'식 세계관에서 단 1cm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때와 다른 약간의 변화라고 한다면 중국 대신 미국의 품으로 들어갔고,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양 대국이 서로 힘이 투사하는 과정에서 등거리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주변국과의 관계 즉 일본의 외교는 여전히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과거사의 그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서로를 비난하지만, 과거사에 발목잡혀 있는 건 둘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건 일본이 친 장벽보다 우리가 친 장벽이 더 높다는 점이다.  우리가 중국을 향해 친 장벽보다 중국쪽에서 친 장벽이 더 높은 것처럼 말이다. 더 높은 장벽 안에 갇힌 사람의 시야가 더 좁을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혐한정서는 극우 정치인이 표출하고 일부 보수단체만 적극적으로 호응할 뿐이지만 한국에서의 반일감정은 전국민에게 퍼져있어서 집권 세력들이 가장 쉽게 손대는 정치 이슈 중 하나다. 중국의 혐한정서는 14억 명의 정신 세계를 장악하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반중정서는 중국처럼 노골적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내가 까치발을 세워 장벽 너머 보이는 상대보다 상대가 나를 더 많이 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먼저 사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용서할 순 없는 걸까?

용서란 강자가 약자에게 베풀 수 있는 아량이다.  먼저 용서할 수 없다면 상대보다 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은 아직은 '넘버3'일 뿐이다. 





5년 만에 출간된 <지리의 힘> 2권은 1권에서 빠졌던 지역들과 세계 곳곳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좀더 자세하게 파고 들었다. 제1권이 역사와 지리를 결합한 조감도에 가깝다고 한다면, 제2권은 현상과 원인 및 예측을 논하는 끝장토론이라고나 할까. 특히, 발칸과 중동 및 사헬 지역의 끊이지 않는 폭력과 테러는 부족과 지역간 차이와 다름에서 야기된 듯 보이지만 결국은 '쩐(錢)의 전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종교와 민족이 다르고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중은 이런 사실들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 하여, 이들 지역 사람들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혹은 아무도 차지하지 못하게) 무력을 사용한다. 영토도, 원유도, 물도, 심지어 인구마저도 모두 이권다툼의 목적이자 원인일 뿐이다. 




사헬이라는 단어는 해안 또는 해변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나왔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건조한 사하라 사막을 건너려던 초창기 여행자들이 이 지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이 해안은 바위가 많은 관목지, 덤불로 덮인 모래벌판, 낮게 자라는 풀과 나무들로 이뤄져 있다. (...) 이곳 사헬은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가로질러 홍해와 대서양까지 연결되는 장장 6천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경로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는 낭만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팀북투(말리의 중부에 위치한 도시)나 카르툼(수단의 수도) 같은 큰 도시로 볼 수 있지만, 세계 시장으로 팔려가는 광물에 생계를 의지하는 작고 지저분하고 후미지고 파리가 들끓는 동네도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카에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길을 이용하는 투아레그족과 플라니족 같은 유목민족을 지나치고 최근에 국경선이 그려진 나라들을 건너면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이념과 폭력성으로 무장한 수많은 무장단체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지리의 힘 2권> 295~296쪽 




사우디아라비아는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나라다. 

그리고 국명은 사막 한 가운데를 지배하던 토후 가문의 이름이기도 하다. 



1744년에 종교학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게 바야, 즉 충성 맹세를 했다. 그는 무슬림이라면 군말 없이 지도자에게 충성해야 하며, 대신 지도자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슬람교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운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두 측의 합의에는 사우드 가문은 정치를, 종교적 측면은 와하비파의 영역이라는 입장이 담겨 있었다. -<지리의 힘 2> 123쪽




이렇게 탄생한 와하비즘(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은 소수인 국왕 일가가 3천5백 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을 용사로 키워내고 알카에다의 탄생을 불러왔다. 9.11테러로 빈 라덴과 알카에다는 소탕되었지만 소멸된 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의 대테러 작전과 러시아 및 이란 등의 맞대응이 IS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테러 단체들의 탄생을 도와주고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TV뉴스 등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시뻘건 피와 총격음이 난무하는 잔인한 장면들만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가치판단을 방해한다. 물론, 이유는 테러범이든 방송사 운영진이든 정치인이든 똑같이 '돈'과 '권력'을 위해 폭력을 상품화하거나 도구화할 뿐이다.  




한편, 영국 못지 않게 대제국이었던 스페인과 고대 문명의 산실인 그리스는 지리의 축복과 재앙을 한꺼번에 받은 나라들이다. 이 두 나라의 성장과 쇠락이야말로 지리의 공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특히,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을 쟁취했으나 내전의 진흙탕 속에 빠졌던 그리스의 근현대사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만하다.  



터키에 남겨진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미래를 정치인들이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민간인 학살과 마을 파괴가 횡행하면서 로잔조약(1923년 터키와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이 맺은 조약)이 맺어지기 몇 달 전에 이미 적어도 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떠났다. 소수계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그리스와 터키 양측의 발언이 나온 후로 로잔조약은 강제로 주민들을 교환하는 데 합의했다. (...)
(그리스) 테살로니키는 발칸 지역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도시였다. 그런데 난민들이 밀려들어 오자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졌고 이를 기회로 반유대주의 정서가 촉발됐다. 그러자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온주의 운동과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새로 온 이주자들 다수가 정착한 곳은 지난 10여 년간 그리스로 편입된, 즉 <새로운 그리스>로 알려진 열악한 곳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뒷날 많은 이들이 공산당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궁극적으로 군사 정변과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하는 빌미를 가져왔다.
1920~1930년대는 지속되는 분열과 불안정 그리고 파시즘과 손발을 맞추는 군사 통치의 시대였다. 그리스는 독재자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의 지휘 아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애당초 그는 그리스가 중립을 지키는 걸 원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침공에서 고배를 마신 뒤 그리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 군대에 의한 가혹한 점령기를 보내게 된다. 그나마 이 나라의 지리 덕분에 점령군은 내륙 전체를 지배하진 못했고 그리스는 결사적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악지형을 십분 활용해서 지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 기간에 행해진 적군의 식량 징발로 수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굶어 죽었고, 7만 명이 처형당했으며, 레지스탕스 공격에 협조한 죄로 수백 곳의 마을이 파괴됐다. 또 6만여 명의 그리스계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많은 이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테살로니키의 유대인들은 겨우 9%에 불과했다.
1944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독일군이 철수하자 영국군이 군중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아테네로 입성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안도도 몇 주밖에 가지 못했다. 그해 12월, 아테네 거리에 다시금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리스 내전의 전조를 알리는 소리였다. 이 갈등의 시초는 적어도 왕당파와 반왕당파로 국론이 갈라진 20세기 초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간헐적으로 협력하기는 했지만 양대 레지스탕스 그룹인 공산주의 EAM-ELAS와 중도우파 EDES는 독일군이 철수하고 난 뒤 그리스에 다른 통치 권력이 들어서는 것에 대비하고 있지 않았다. -<지리의 힘 2권>, 228~230쪽




결국, 소련의 지원이 끊기자 공산주의자들은 이웃한 공산권 국가인 알바니아로 도망가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그리스 땅에 곧바로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내전으로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꽃피운 그 땅에서 민주주의는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민선 지도자들와 정부 관료들은 무능했고 부패했다. 군부 쿠데타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 근현대사와 닮아도 너무 닮은 거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우리와는 털끝만큼도 닮은 점이 없는 강대국들의 역사는 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자세히 배우고 가르치면서 정작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면,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해전이나 미국 링컨 대통령의 남북전쟁보다는 그리스나 베트남의 독립전쟁과 내전 등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데 말이다.    



트라팔가 해전이 나왔으니 나폴레옹의 프랑스나 넬슨의 영국 입장 말고 스페인의 입장에서 이 전쟁을 살펴보자. 사실, 트라팔가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인 영국이나 프랑스 지도에는 없다.  지브롤터 해협의 스페인 쪽 갑곶을 이르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폴레옹과 넬슨은 왜 자기 나라도 아닌 스페인까지 와서 싸운 걸까?




1600년에 850만 명이었던  이 나라 인구는  한 세기 만에 6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매년 평균 1만 명의 군인들이 사망한 데다 식민지로 이주한 또 다른 5천 명까지 더해진 탓이다. 극도의 빈곤과 되풀이되는 역병은 성장으로 가는 발목을 붙잡았다. 1700년대로 접어들어도 스페인은 여전히 전 세계에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대국이었지만, 원래 갖고 있던 것을 자키기에도 벅찬 데다가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유럽 내에서도 많은 영토를 잃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그리고 1704년에는 지브롤터까지 영국에 빼앗겼다. 
갈등이 한 세기를 괴롭혔다. 스페인은 원래 프랑스와 싸우다가 나중에는 한편이 되는데 1805년에 트라팔가에서 두 나라의 연합 함대는 영국 해군에게 패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3만 명의 프랑스 군대가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해 들어오면서 이른바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게릴라라는 단어는 실상 이 전쟁에서 나온 말로, 스페인어에서 전쟁을 뜻하는 게라(guerrilla)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말은 당시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스페인의 비정규군 무리를 지칭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396쪽




단테의 <신곡>에서 가장 끔찍한 9옥은 '배신자'들이 가는 곳으로, 입구엔 신을 배반한 악마 루시퍼가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와 의부인 카이사르를 죽인 부르투스와 카시오스를 잡아 먹고 있다. 그만큼 배신을 가장 나쁜 죄악으로 본 것인데, 그렇다면 스페인을 배신한 나폴레옹은 9옥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배신과 침략이 없었다고 스페인이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엔 신진 세력인 영국의 부상이나 카리브해 식민지의 독립 전쟁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20세기 초 대영제국이 무너지는 것과 비슷한 지경학의 공식이 스페인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일단 스페인은 지도 상으로만 보면 피레네 산맥으로 유럽과 경계를 이루며 3면은 대서양과 지중해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지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남쪽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무어인과 북쪽으로는 산맥을 넘어 밀려들어온 고트족 등등 여러 민족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는 점이다. 영국이 1704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합쳐지면서 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듯이 스페인도 146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라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한 후 그라나다 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아랍왕국을 몰아내면서 대제국으로써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흘러들어오는 은을 동방의 사치품을 구입하고, 유럽 내 분쟁에 쓰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는 데 '몰빵'하기 시작한다. 결국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힘의 영역을 넘어서까지 제국이 확대되자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카리브의 해적들도 은을 가득 싣고 귀환하는 스페인 함대를 노략질했으니 그들도 제국 쇠락에 한몫했다과 봐야하나). 그러자 각 지역에서 분리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원래 다른 민족으로 각기 다른 왕국들이었으니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북쪽의 갈리시아, 그 옆의 바스크 지방,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가 특히 심했다.  독재자였던 프랑코 장군의 출신지가 갈루시아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무려 36년의 전체주의 통치 끝에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군부에 기대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대신 스페인에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 주기로 한다. 




"스페인은 유럽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스페인 국민은 유럽인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유럽의 일부가 되려면 스페인은 먼저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만 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감수하고서라도 기존의 정치 체제를 해체할 생각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모든 분파들을 향해 발언을 해야 한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모든 스페인 사람들의 왕>이 될 거라고 말했다. 이는 어찌 보면 수세기 동안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려는 과업이 실패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카를로스 국왕의 다음 행보는 카탈루냐와 갈리시아를 방문해서 그들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코의 출시지인 갈리시아에서 국왕은 스페인어보다 포르투갈어에 더 가까운 갈리시아어로 짤막하게 연설까지 했다. 그는 "갈리시아 만세! Viva Galicia!"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지리의 힘> 2권, 407쪽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와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로 대표되는 스페인 프로축구 시합은 단순히 스포츠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걸핏하면 관중들의 집단폭력사태가 일어나는 이유 역시 각 지역의 민족들이 서로 싸우던 과거의 전쟁이 집단 기억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지역 감정은 저리가라 할 정도인데도 어째서 한국인들은 서로 뭉치지 못하고 헐뜯기만 한다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는건지 모르겠다. 

물론, 이 말은 일본인이 구한말 의병활동과 3.1독립운동으로 단합하는 조선인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말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은 서로 잘 싸운다'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요즘엔 특히 해외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중장년층 교포 출신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것 같다. 교포들은 오랫동안 해외에 거주해서 국내의 상황들을 체험하기가 쉽지 않고 그저 피상적으로만 접하다가 현지인이나 다른 외국인의 관심이나 질문을 받게 되면 그제서야 외국인의 눈에 비쳐 반사된 한국의 모습을 보고는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물론, 이 외국인들의 의식과 생각에 일본의 소프트 파워가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 잘 싸운다'는 말은 일본 열도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해서 캘리포니아 해안 절벽에 부딪힌 후 반사되어 다시 한국과 한국인에게 되돌아온 셈이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 영국 사람들과 스페인 사람들도 지역적으로 독립을 주장할 정도로 서로 분열되어 있지만 세계  어디에서도 "영국 사람들은 서로 잘 싸워", "스페인 사람들은 단합하지 못해." 등등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지리의 힘> 1권 마지막 챕터가 북극이라면 제2권의 마지막 챕터는 우주다. 

과거와 현재를 살펴 보고 이해하게 되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북극과 우주는 인류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건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만이 미지수일 뿐...



아마 인류 4천 년 역사가 지구 표피층에 만들어진 지형과 대기층의 온도에 따라 결정되었다면 앞으로의 4천 년 인류 역사는 태양계와 그 너머 우주 공간에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또다른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주 공간이 가상의 적을 더 잘 관찰하고 더 빨리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우주 경쟁에는 늘 군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 개척자 둥 한 사람인 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우주 비행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1930년대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까지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했지만 로켓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나치는 폰 브라운의 연구를 지원했고 그 결과물인 V-2 로켓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에 투하됐다. 1944년에 최초로 우주 공간에 쏜 발사체가 된 V-2는 수직 이륙 후 고도 176킬로미터까지 날아올랐다. 종전 후 폰 브라운과 120명의 과학자들은 문제의 V-2와 함께 미국으로 옮겨가서 미국의 우주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
러시아인들 또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이 경주에서 앞서가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독학자이자 은둔형 과학자로 알려진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우주 비행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우주 공간에 도달하기 위한 중력권 탈출 속도는 초속 8킬로미터가 돼야 하며 액체 연료와 다단계 로켓을 사용하면 가능하리라는 가설을 처음으로 세웠다. 또한 그는 우주 정거장과 에어론, 산소 시스템의 청사진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의 논문들 다수가 비행기가 최초 비행을 하기도 전에 출판됐다. 그가 우주 여행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있다. 1911년에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지구는 인간의 요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요람에서만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은 달의 뒷면에 있는 분화구에 특별히 그의 이름을 붙여서 그를 기억하려고 한다. -428쪽




지구의 모래알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고 그 한 알 한 알들의 사이가 수 조 킬로미터에 달할만큼 넓고 넓은 우주 공간에서  80%가 금으로 이뤄진 지구만한 행성이나 혹성을 마주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지금은 갈등과 전쟁의 주된 원인인 원유와 천연자원 및 물 등등은 앞으로 우주에서 무한대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금, 은, 우라늄, 철, 구리 등등 주기율표에 나와 있는 원소들 대부분은 우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을 이루는 요소들도 모두 우주에서 기원했음은 물론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 말을 이렇게 바꿔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읽는 만큼 보인다.' 



팀 마샬의 <지리의 힘> 은 지리와 역사를 결합한 교양서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역사 지식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의식적으로 역사책들을 읽은 덕을 톡톡히 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과거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해 보고 현재 상황에 대입해 보면서 새롭게 깨닫고 인식하게 되어 스스로도 신기하고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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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 윤치호 일기 제4권 1896년
윤경남 지음 / 신앙과지성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벌거벗은 한국사: 벼랑 끝 조선, 그들은 왜 러시아로 향했나?> 편을 시청한 후 윤치호에 대한 궁금증이 급상승했더랬는데 도서관 서고에서 바로 이 책이 눈에 띄는 게 아닌가. 언젠간 읽을 책이라는 생각으로 대출해왔다


이 책은 부친과 함께 고종의 탈출을 꾀하다 실패한 '춘생문 사건'으로 피신한 시기부터 시작된다. 뒤이어 고종의 아관파천이 성공하고, 때마침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초청장이 날아든다.



윤치호는 구한말 흔치 않은 개화파 인사였다. 특히 일본, 중국 등에 머물면서 개화 사상을 기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가 된 후 미국의로의 유학 경험은 선진 문물과 문화에 대한 동경과 함께 조선의 미개함에 분노하게 하는 특유의 사상을 갖도록 했다.


애국가 작사라는 진위 논란과 우국지사와  친일파라는 불명예가 공존하는 가운데 무려 60여 년에 걸쳐 영어로 기록한 그의 일기는 개인의 삶을 통해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역사책이 아닐까 싶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윤치호에게 조선의 현실은 암울하다 못해 참혹했다. 



낮에는 손님들의 방문으로 소일하다. 온통 흥분의 도가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고 있다. 서울 전역에 단발령이 내린 것이다. 조정에서도 상투와 망건을 쓰는 것을 금지했다. 사람들이 이런 일로 인해 폭동을 일으킬까봐 공포에 떠는 사람도 있다. 일본 군대가 출동해서 그 폭동을 막아주겠지.
국모가 일본놈들에게 살해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비굴하게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굴던 백성들이 지금 와서 뭔가 행동을 일이키려 하는구나. 명령에 잘 따르도록 길들여진 조선 사람을 위해서 혹은 그들과 더불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게 확실해진다. 조선 사람들의 그런 씨알머리 없는 소리에는 한 푼어치도 동조하지 않을 테다. -21쪽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자 러시아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민비 일파을 몰아내기 위해 초유의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여러 나라에 알려졌지만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다.  심지어 조선의 백성들마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민비는 조선 백성들로부터도 외면받았던 것이다.



일본에 대한 칭송이 뉴욕에 사는 모든 인종들의 입에 회자하고 있다. 조선 왕실이 당한 비극적 참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고 신경 쓰지 않는데도 말이다. 일본이 왕비뿐만 아니라 궁중의 모든 대신들을ㅡ물론 왕까지ㅡ살해했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일본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은 실패했어도, 그들이 하는 짓은 모두 잘한 짓이란 말인가? 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는 격인가! -96쪽



반면, 윤치호는 이에 대해 울분과 민비에 대한 애통함을 여러 차례 표현할 뿐만 아니라  <갑신정변>의 실패에 대한 분석도 현실적이다. 30대 초반으로 해외에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라 아직 조정에서 변변한 직함도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관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났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옥균 일당은 그들이 요인 6, 7명만 제거하면 일이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나라를 최악의 파국으로 몰아 넣었다. 또한 왕비께서는 김옥균과 그 일당들을 죽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왕비의 옥좌는 영원히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왕비는 백여 명의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래서 모든 백성에게 미움을 산 것이다. 머리가 잘 돌아가 새로운 말을 잘 만들어내는 유길준은 박영효를 퇴출시키는 비극적인 음모를 꾸몄고, 왕비를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스기무라와 유길준은 왕비 한 사람을 없애버리면, 조선에서 알게 모르게 악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와비를 시해한 것이다. 그들의 비열한 범죄는 조선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더러운 책력임이 증명되었다. -60쪽




이런 인물이었으니,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민영환이나 간신배들 사이에서 배척당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조선에 올곧은 선비며 충신이 없었던 게 아니다. 19세기 당시 조선은 60년 세도정치로 바른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사장당하고 흥선대원군과 민비외척의 권력 다툼 속에서 기회주의자들만 살아남아 있었다. 


윤치호는 나라의 운명보다는 개인의 영달과 일신의 안녕에만 관심을 갖는 정치인들과 심지어 고종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유길준은 자신을 뽐내는 일에는 가장 뛰어난 모사꾼이다. 그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원칙이나 예의나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다. 거짓말을 자랑삼아 하면서 사실처럼 우겨된다. 정직한 사람을 건드리는 것보다는 거짓말하는 일이 더 빨리 성공하는 지름길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결국 그는 주사직으로 시작하여 1년에서 1년 반 사이에 대신 반열까지 올라 세력이 커진 셈이다. -30쪽

나는 이완용이 정말 싫다. 그의 특권 의식과 저질스러운 교활함이 족제비 같은 뒷거래를 좋아하는 그가, 평범하거나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에게 대하는 노새 같은 완고함이 싫다. 그러면서도 그는 권력층 앞에서는 강아지처럼 알랑거리며 순종한다. 이런 온갖 행위가 나도 모르게 그에게 적대감을 일으키게 한다. 그가 세우고 싶어 하는 '사대부'혹은 선비학교는 그를 위해서라도 따로 세워 다니게 해야겠다. -32쪽 



이완용은 그렇다쳐도 나름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던 <서유견문>의 저자인 유길준에 대한 윤치호의 평가가 특히 인상적이다. 아마 두 사람의 관계는 일기에도 밝혔듯이 유길준의 후임으로 학부협판이 된 윤치호에게 유길준이 알렌 박사가 맡긴 4,000불에 대한 영수증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일어난 것 같다. 알렌 박사는 선교자이자 의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는데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외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주면서 조선 왕실로부터 신뢰를 얻는다. 이에 조선 최초의 서양병원인 광혜원 등을 세우기도 하지만 철도부설권 등 여러 이권에 간여하여 엄청난 수수료를 챙긴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알렌이 유길준에게 준 4,000불 역시 어쩌면 부정을 눈감아주는 대가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니 유길준이 당당하게 착복을 하고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영수증을 요구했겠지...




윤치호는 처음엔 거절하지만 결국 민영환과 함께 러시아로 출발한다. 다만, 원래의 여행경로인 남방루트(상해-인도양-수에즈운하-모스크바) 대신 일본 요코하마항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뉴욕에 도착해 다시 대서양을 건너 영국 리버풀을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고 드문드문 등장할 뿐이어서 아쉽다. 일기를 쓰지 않았을 리는 없는데 번역 과정에서 누락시켰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우여곡절 끝에 대관식이 열리기 직전 사절단은 무사히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그렇지만 '특별전권대사'인 자신을 명함에는 '대관식 특별대사'로만 기입한 것부터 시작해서 황제의 대관식이므로 대관식장엔 모자를 벗고 들어가는게 예의라는 윤치호의 조언에 격노한 민영환이 대관식에 불참하는 등 두 사람은 곳곳에서 충돌한다. 



민영환 공은 조선의 예법과 관습에서 벗어난다는 구실로, 대관식이 거행되는 잠깐 동안이라도 갓(사모)을 벗어야 한다는 의례를 완강하고 단호하게 끝내 거부했다. 이는 그의 개인비서인 "물고기" 씨, 김득련이 민 공에게 사모를 벗지 말도록 겅의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민 공의 마음을 바꾸도록 간곡하게 설득해 보았다. 그가 최고로 중차대한 임무를 가지고 상감의 어명을 받들고 대관식에 온 사람임을 강조하고, 잠시 동안만 그 고루한 조선 관습을 접어두는 일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님을 간청했다. -107쪽  




단발이야 '수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 사상에 유배된다고 할 수 있지만 모자를 벗는 것도 이것과 연관짓는 건 억지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아마도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고 외국어도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였던 민영환의 자격지심이 만들어낸 헤프닝이지 않을까 싶다.  


한편, 중국과 이홍장에 대한 윤치호의 평가는 냉정하다 못해  경멸에 가까울 정도인 반면 대관식 때 화려한 예복을 입은 니콜라이 황제가 2000년 전에 살았던 헐벗은 젊은이(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에 감격해 한다. 기독교와 서양문명에 깊이 전도되어 있던 윤치호의 기울어진 가치관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종이 니콜라이 황제에게 보낸 예물에 대해서도 약소국으로서의 비참함을 자각한 것까지는 이해하겠으나 비하에 가까운 표현은 윤치호라는 인물됨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특별 사절들 가운데서 중국 사절들은 화려한 비단에 수놓은 옷을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누런 이를 드러내고 길게 땋아 늘인 머리를 짧게 잘라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본 사절단들은 유럽식 복장에 가장 세련되고 부러운 동방의 나라로 군림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듯했다. 페르시아 사절단은 아주 화려한 저장에 잘생긴 친구가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 유의 친구도 그 친구의 왕이 최근에 살해되고 그의 정부는 영국파와 러시아파로 갈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비참한 처지에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할 때, 불상한 우리 측 대표들은 다른 행복한 국가 대표들로부터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103쪽

이홍장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그는 외교적 의전을 잘 알 뿐 아니라 빈틈없이 행동을 할 줄 아는 중국 사람이다. 그는 서양 문명이 중국 문명보다 우월한 것을 알 만큼 민첩하고, 그 자신이 서양 문명을 수용함으로써 그 자식을 중국에 전수하는 재주마저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모험을 즐기는 유능한 외국인 여러 사람을 돈을 넉넉하게 주어 자기 주위에 포진시켜 놓은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후원자인 이홍장 칭찬을 해외에 요란하게 퍼뜨려서, 사람들은 그가 자질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렇게 시간과 돈, 영향력 행사, 그리고 측근의 외국인들에 의해 이홍장이라는 가공의 위대한 인물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전형적인 인물의 능력과 위대함은 일본인 때문에 여순항, 위해위, 그리고 북양 함대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 바닷물에 침몰해 버렸다. 고맙게도 일본은 이홍장의 기세를 꺽어 놓았다. 오늘 우리 앞에는 그렇게 못된 노새처럼 구는 진짜 이홍장만이 남아 있다. -110쪽

5월29일(금요일)
아름다운 날씨, 모스크바

오전 10시에, 조선왕이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대관식을 축하하며 보내는 선물을 전하기 위해 파스콤 장군과 함께 크렘린 궁전에 가다. 선물은 자수를 놓은 병풍 2개, 큰 대나무로 만든 창 가리개 발 4개, 수놓은 돗자리 4개, 진주조개로 장식한 장개장 1벌, 백동향로 2개이다.
이 선물은 조선 사람이 사적으로 러시아 사람에게 건네는 선물로는 알맞다. 그러나 조선왕이 러시아 황제에게 주는 선물치고는 너무 빈약하게 느껴진다. 선물을 보관하려고 받아 든 관리들의 옆얼굴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아, 불쌍한 우리 조선 나라여! -122쪽



조선은 그저 경제력만 없는 나라가 아니었다.

고종 황제가 민영환을 통해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에게 부탁하고자 했던 다섯 가지 내용을 살펴보면, 왕이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어 자존심 다 내던지고 심지어 나중엔 국토마저 담보로 삼아 차관을 구걸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6월5일(금요일)
아름다운 날씨, 소낙비 오다. 모스크바

오후 2시에 민영환 공과 나는 외무대신 로바노프 왕자를 만나러 가다. 다음은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다. 

민영환: 신임장을 제출하기 위해 황제 알현을 할 수 있을까요?

로바노프: 민 공의 요청을 황제께 아뢰었습니다. 황제께서 그 조건을 수락하실지 여부는 내가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지침을 받는 대로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민영환: 조선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감안하셔서 제가 귀하에게 내놓는 다섯 가지 제안을 러시아 정부가 받아들여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1. 조선군대가 믿을 만한 수준으로 단련될 때까지 러시아 군대가 국왕의 경호를 지원해 줄 것.
2. 군대와 경찰의 훈련을 위해 다수의 군사교관을 파견해 줄 것.
3. 궁내부와 내각과 광산과 철도분야를 지도할 고문관을 파견해 줄 것.
4.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직통 전신을 가설할 것.
5.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갚기 위해 300만 엔을 차관해 줄 것 등입니다. -127쪽


6월7일(주일)
더운 날씨, 모스크바

오전 10시30분에 재무대신 세르게이 비테를 방문하다. 민영환 공은 이미 황제와 로바노프 대신에게 한 말을 거의 되풀이해 말했는데, 무엇보다도 조선 국왕의 호위 문제를 황제가 윤허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했다. 비테는 영어를 못하므로 스타인이 내게 재통역을 해야만 했다.
(...)
오후 2시경 숙소로 돌아오다. 스타인이 내게 말하기를 비테가 자기에게 살짝 알려주는데, 조선 국왕이 자기 정적들을 자기 손으로 처단할 힘조차 없다면 어떻게 다른 나라 사람이 그를 보호해줄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맞다, 맞아!) 비테의 말은 매정하고 굴욕적이자만,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므로 알아차려야만 하다. -133쪽



조선사절단이 초조하게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와 일본 특사 야마가타 사이에는 조선을 분할 통치하자는 4개항으로 이뤄진 비밀 협정이 체결된다. 이것도 모르고 사절단은 러시아측의 긍정적인 반응을 확신하면서 모스크바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다. 그리고 이곳에서 5개 조항의 친서에 대한 러시아의 답변서를 받는다.



6월30일(화요일)
더운 날씨에 소낙비 오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외무대신 로바노프가 민 공에게 5개 조항의 친서에 대한 대답을 보내왔다. 그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상감은 원하는 기간만큼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할 수 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상감이 환궁할 경우에 러시아 정부는 그의 안전에 대한 답변을 보낸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관에 경비병을 한 명 배치한다.

2. 군사 교관에 관해, 러시아 정부는 경험 있는 고위 관리를 서울에 보내어 그 문제에 관해 조선 정부와 협의하도록 한다 이 견해에 있어서 첫째 문제는 조선왕을 경호하기 위한 자체 조직이다. 조선의 경제적인 여건을 조사하고 재정적인 개선 방책을 찾기 위해 경험 있는 전문가를 조선에 파견할 것이다.

3. 서울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 산하에 두 명의 신뢰할 만한 관리를 고문관으로 파견한다.

4. 차관 문제는 조선의 재정 조건과 요구사항을 충분히 파악한 후에 고려해 볼 것이다.

5. 러시아는 조선의 지상 통신선을 연결하는 사안에 동의하며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조력할 것이다. -165쪽



사절단의 전권대사인 민영환도 러시아에 갔다 온 후, <해천수범>이라는 책을 남겼다는데 이 책에는 조선이 러시아에 요구한 5개 조항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조선 조정에선 계속 전갈을 보내 윤치호 대신 조선말이 서툴러 황제의 모후를 '황제 에미'라고 옮긴 러시아 국적의 김도일만 데리고 니콜라이 황제를 알현하는 등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된다. 윤치호를 견제하려는 세력들이 고종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윤치호를 배제시켰던 것이다. 



불쌍한 이범진! 뭇 여인들과 러시아 통역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감 전하가 이범진을 냉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범진이 이따금 전하께 간언을 드렸기 때문이다. 전쟁 귀신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물리치시코, 감놔라 대추 놔라 하는 점쟁이들에 대해서, 그리고 부도덕한 남자와 여자들과 조정의 각료들을 무시하시도록 말씀드린 것이다.
"중전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중전이 그 귀신놀이의 장본인이라 생각했었소. 하지만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소. 중전께서는 오직 대전 전하의 기분을 좋게 해드리기 위해서만 여러 가지 해로운 일들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이범진이 눈물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괘씸한 러시아 통역관, 김홍육; 저질의 계교나 부리는 지겨운 간신배, 주석면; 신들린 이자들이 피둥피둥 살만 찌는 궁중 나인들까지 부추겨 나약하고 희망도 없는 왕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상감과 세자의 눈과 귀가 되어 날치고 있는 것이다. 상감 전하는 온순해 보이지만 진실을 감추고 있는 지배자일 뿐이다. 우리 상감의 착한 성격이나 고질적인 나쁜 성질들이 하나같이 영국 역대의 역사에 잘 알려진 어떤 왕을 생각나게 한다. -77쪽  




어쩌면 이때부터 나라와 백성보다는 일신의 안녕에만 집착하면서 간신배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고종에 대한 실망감이 윤치호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던 건 아닐까.

윤치호는 민영환으로 대표되는 조선 사대부와 특권층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결국 민 공 같은 특권 계층에 있는 조선 고관들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신중하게 자신을 낮추어 행동하는 관리는 한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 공은 천성이 예민하고, 합리적이고, 자신을 털어놓을 만큼 소탈한 면도 있다. 그러나 조선의 부패한 조정 안에서 그의 끝없는 성공 가도는 오히려 그를 타산적이고, 이상스럽게 역정을 잘 내게 하고, 오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민 공이 외국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면, 사물을 피상적으로만 관찰하기보다는 사물의 핵심에 들어가서 이치를 규명하는 사람이 되고, 좀 더 진실하고 용기 있는 조선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154쪽

민 공의 사람 다루는 개념: 이중적이고, 위계와 비밀스런 계략으로 일관한다. 
겸손에 대한 개념: 한숨을 몰아쉬면서 온갖 자기비하의 말을 함.
위엄에 대한 개념: 심술꾸러기처럼 입술을 쑥 내밀고 팔자걸음으로 벌릴 수 있는 한 다리를 벌리고 굽신거리며 걷는다. 
권위에 대한 개념: 자기 아랫사람에게 최상의 특권 의식을 보여준다. 
천절하거나 말거나, 공평하거나 말거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기 기분이 내키는 대로 변덕스럽게 대한다.
예절에 대한 개념: 지나치게 칭찬하는가 하면 마음에 없는 친밀감을 늘어놓기도 한다.
분별력에 대한 개념: 소심하고 필요 이상으로 혼자서 속을 끓인다.
조심성에 대한 개념: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원만을 미소로 위장하고 등뒤에서 몰래 자기의 적을 강타하려고 표적을 겨눈다.
궁금에 대한 근검 절약성: 그가 쓸데없이 공금을 한 푼이라도 아낄 때는 한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러한 그가 조선에 돌아가면 녹슬어 못쓰게 될 풍차와 밀방아 기계를 사는데 1,500루블의 공금을 낭비했다. 
고상한 품위에 대한 개념: 그 신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179쪽



결국, 두 사람은 귀국길을 함께 하지 못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헤어진다. 

민영환 이하 사절단은 모스크바 철도를 이용해서 돌아가는 한편, 윤치호는 불어를 더 배워보겠다는 핑계 혹은 변명을 내세워 파리로 향하기 때문이다. 


파리와 마르세유에  3개월 정도 체류하는 동안 윤치호는 베르사유 궁전,세인트 채플, 판테온과 노트르담 등을 둘러본다. 이때 남긴 일기들에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러시아에 머물 때와는 달리 감상적이고 정감이 넘치며 사색적이다. 


프랑스의 굳은 날씨와 향수에 젖어 그해 말 12월 윤치호는 마르세이유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인도양을 거쳐 상해에 도착해 중국인 아내와 막 태어난 아들과 조우한다.

사실, 윤치호의 러시아 방문과 파리 체류 시기는 그의 인생 행로 중 초창기로 30대 초반의 혈기와 미숙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렇지만 윤치호는 붓 가는대로 써내려간 일기라는 형식을 십분 활용하여 조정의 무능과 관료의 타락 및 미숙함을 지적하고  때론 적나라한 표현도 불사하여 정사보다 오히려 더 사실적이고 실감나게 시대 상황을 담아냈다고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구한말 조선의 부패상과 국제적인 위상을 절감했다.

그런데 이상했던 건 학창시절 역사 수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TV 역사 프로그램에서조차 이런 이야기들은 접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윤치호는 매국노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가 영어로 일기를 썼다는 사실도 그를 비난하는 이유가 되었을 뿐이었지, 그가 왜 영어로 일기를 썼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당시 조선에 머물렀던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읽어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더랬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걸쳐 우리가 정말 배우고 가르쳐야 할 역사는 갑오농민전쟁과 3.1운동만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과거는 애써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 

인류의 역사에서 비극이 자꾸만 되풀이되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가와 민족들이 자국의 역사를 미화시켜 자긍심을 고취시키려고만 할 뿐, 잘못된 과거는 최대한 숨기고 망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에서 두 번 다시 되풀이하면 안 될 끔찍한 일들일수록 자꾸만 반복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빛나는 영광의 순간만 기억하는 사람보다 뼈아픈 실수를 되새기는 사람이 성장하듯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역사일수록 외면해선 안된다. 역사는 취하거나 망각하는 술(酒)이 아니라, 쓰지만 몸에는 좋은 약(藥)처럼 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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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가난해서
윤준가 지음 / 미래의창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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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제목에 낚여(?) 목록에 저장해놓았었는데, 어제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읽고 싶었던 <유럽사 산책>이 1권만 있고 2권은 없어서 쉬어간다는 의미에서 교양서 위주로 대출해온 여섯 권 중 이 책이 끼어 있었다. 사이즈가 작아 손에 폭 안기는 게 의심스러웠지만(?) 머리 식힌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제일 먼저 읽기 시작했다. 


언젠가 서촌이며 종로5가 쪽방촌이 급부상하면서 문 열면 바로 골목인 동네가 관광객들로 떠들썩했다. 그때, '가난도 구경거리가 되는구나' 싶었고, 늘 그렇듯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챙기듯' 지가와 임대료 상승의 혜택은 고스란히 집주인들에게 돌아갔더랬다. 



암튼, 책의 배경에 대해 좀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출간되었다는데, 내가 느낀 소감은 이렇다. 




첫째, 가난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웠으나 결국은 평범한 외주 출판노동자의 일상 기록이었다.  


저자가 좋은 교육을 받고 출판사 편집자라는 전문직으로 경력을 쌓을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자존감 있는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가난이라는 덫에 갇히지 않고 어떻게든 자식 세대에겐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부모 세대의 굳은 의지와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부모 세대에게 가난을 당연한 듯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배신에 가깝지 않을까. 소박하다 못해 태평한 평안함 속에서 조금씩 배어 나오는 무책임과 무기력에 살짝 분노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빈곤을 마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개인의 선택으로 둔갑시키고 미화시키는 것 또한 불편했고.



내 삶은 엄마와 다르다. 나는 엄마와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가질 수 있는 성취는 엄마보다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엄마와 아빠가 열심히 일해 교육시킨 결과다. 미안한 이유는 내가 누리는 것들이 엄마 아빠의 노력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부모의 노력은 자식에게 들어가고, 자식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정작 부모들은 큰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자식의 인생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싶어하는 부모들의 마음은. -198쪽 




둘째, 그럼에도불구하고 몇 가지 상념들과 느낌은 내 가슴 밑바닥을 휘저어 놓았다.


가난에 의한 기억과 경험은 단순히 과거로만 남지 않는다. 말투, 행동, 입맛, 취향, 취미, 분위기 등등...  그 사람이 머물다 떠난 공기 속에도 둥둥 떠다닌다.  

저자는 줄곧 가난했고, 여전히 가난하며, 앞으로도 계속 가난할 것이다.

그래서 부촌까지는 아니어도 중산층이 거주하는 안전한 동네의 중대형 아파트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인간의 품위와 예의에 대해선 안타깝지만 영원히 모를 것이다.  


항상 밝고 인사성 바른 아이들...

마트든 음식점이든 재촉하거나 서두르지 않는 여유로움...

교통질서를 지키며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운전자들과 보행자들...  

피아노 연주나 약간의 생활 소음 정도만 아주 가끔 날 뿐,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알고보니, 부모들이 어렸을 때부터 아파트에서 성장한 어른들이라 실내에선 아이들에게도 뒷꿈치를 들고 걷거나 슬라이딩하듯 걷도록 교육을 시켰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건 가족이 화목하다는 뜻이다. 확실히 분노조절장애는 지역병이다. 가난한 동네 출신들이 유독 많이 걸리는 것 같다. 


나도 이런 곳에 살게 되면서 더이상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후줄근한 옷차림을 하지 않게 되었고, 목청 높여 고함을 치는 일이 사라졌으며, 주차 라인을 잘 지켜 차를 세우고, 앞사람을 앞질러 지나가거나 마트줄이 길어져도 초조해하지 않게 되었다. 

의지만으론 쉽사리 바뀌지 않던 것들이 그냥 이사 한 번 했을 뿐인데 특별한 노력없이도 바뀌더라.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는 걸...  

좁고 더러운 집에 살면 꿈도 작아지고 속도 좁아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머무는 집과 사는 동네를 닮아가는 것 같다.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좀더 좋은 환경으로 옮겨가려고 스스로 독려하고 노력해야 한다. 자포자기하지 말고...




그때 알게 됐다. 싸구려에다 오래되기까지 한 장판은 아무리 청소를 해도 깨끗하지 않는다는 걸. 가난한 살림이 더러워 보이는 건 꼭 게을러서가 아니라는 걸. 룸메(남편)는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열심히 바닥을 닦았지만 여전히 더러워 보였다. 바닥뿐만이 아니었다. 부엌의 벽과 싱크대 사이에 틈새가 너무 좁아 청소를 전혀 할 수 없는 공간이 있었는데, 이전 세입자 혹은 그 이전 세입자부터 차곡차곡 쌓인 먼지와 때가 잔뜩 낀 그곳은 너무 더러워서 쳐다보기도 싫었다. 나는 그리 깔끔 떠는 타입이 아닌데도 집에 그런 구석이 있다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화장실 문은 계속해서 물기가 닿으니 페인트가 벗겨지고 나무가 썩어갔다. 화장실이 워낙 좁아서 물방울이 튀지 않게 샤워나 청소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문을 통째로 갈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좁고 더러운 집'. 내 마음속에서 우리 집이 그랬다. -74쪽  




셋째, 일하는 여성으로서 일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비하를 내재화했다.



왜 모든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는걸까?

자기 일이 없고 전업주부로 경력단절을 겪는 여성들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과 주장만  '에코 효과'처럼 지속적으로 접하면, 웬지 모를 '피해자 의식'과 결합해서 마치 거대한 사회적 물결이 형성된 것처럼 느껴지면서 또다른 관점과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가부장제는 초부유층과 저소득층에서 오히려 더 강하게 남아 있으며, 중산층에서 가장 덜하다는 걸 실감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착각현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자발적으로 전업주부가 되었거나 되고 싶고, 일하지 않고도 내가 만족하는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다면 그 경제적 바탕이 배우자의 수입이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든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일하지 않는 혹은 일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가치가 없다'라는 논리가 통용될 수 없듯이  '일하지 않는 여성은 가치가 없다'는 식의 사고가 페미니즘의 중심 코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은 모두들 나보다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녔고 아이들은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교육을 받았다. 남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자신의 일을 찾으려면 무척이나 힘든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남편들은 돈 번다는 말을 방패로 삼고, 아내를 '도와준다'며 작은 집안일 하나에도 생색을 냈다. 가능한 만큼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권리라 여기는 것 같았다. 남편의 외벌이로도 온 가족이 생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안정과 행복인 동시에 여성의 발목을 붙잡는 일종의 함정으로 작동했다. 사회는 우리 세대 여성들에게 가부장제에 순응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싸우고 개척하며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인지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130쪽






마지막으로, 브런치라는 SNS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데 조금 실망했다.


일단은 개인 블로그에 올려도 그만인 듯한, 아마추어보다는 조금 낫고 전문가보다는 훨씬 못한 콘텐츠와 글솜씨들은 마치 독서로 성장하고자 하는 독자를 쉽고 편안한 저가 취향의 세계로 인도해 싸구려 소비자로서의 역할에만 머물게 만드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저자가 물질에 대한 저가 취향으로 소비자를 인도한다고 지적한  '다이소 함정'의 출판물 버전은 아닐런지 브런치 운영자들은 고민해봐야 한다. 



조심스럽게 말해보자면 다이소는 취향을 죽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1,000원, 2,000원짜리 조악한 제품들을 구매하다 보면 그만 다이소의 세계에 갇혀버린다. 그곳에서 살 수 있는 제품을 굳이 다른 데서 찾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아니 세상까지 갈 것도 없다. 한동네에만 해도 다양한 질의 물건이 존재하는데, 가성비라는 미명하에 갇히면 뭐가 더 좋으니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입장할 때부터 어느 정도 체념하고 들어가서는 저렴한 물건, 가성비가 좋아 보이는 물건을 집어 들고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의 질이면 만족해야 한다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설득한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다이소 물건으로 가득한 집에 살고 있다. 그야말로 가성비의 늪이다. 49~50쪽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나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니구나...' 

'너도나도 다같이 궁핍해도 괜찮겠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위안과 안도를 얻는 대신 분노하고 불편해했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하지? 혹시 내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하고 의심해 보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사회는 잘못되었으니 바꿔야 해.'하고 분개해야 한다. 

다양한 계층이 존재하고 다른 삶의 층위가 존재할 수 있음을 가로막는, 다같이 가난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개인과 사회의 건강한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더 나은 삶에 대한 개개인의 열망과 희망 때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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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흥망
폴 케네디 지음 / 한국경제신문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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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8년 1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엔 이듬해인 1989년 1월에 소개되었다. 당시로선 유례없을 정도로 빨리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이 책이 미친 충격파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유기체의 생로병사에 따라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는 토인비식 문명사관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지적한 네 가지 우상 중 '인종우상 '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인종우상'이란 자연 현상을 포함하여 모든 걸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생명체(특히 인간)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설명하는 오류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폴 케네디는 1500년부터 2000년까지 약 500여 년간의 문명을 다루면서,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신봉하는 왕조의 평균 수명은 300년이라는 둥, 천명이 다해 멸망했다는 식으로 과거 역사를 의인화(?)하지 않는다.  인종우상을 철저히 배격한 것이다. 


폴 케네디에 따르면, 15세기 이후 근대 시대부터 한 나라(집단)의 성장과 멸망은 철저하게 개개인이 생존과 이익을 위해 움직인 결과였다.  

일찍부터 중앙집권화되고 체계적인 관리제도를 갖추고 있었던 동양에선 개개인이 생존과 이익을 위해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없었다. 아니, 사람들이 그럴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화약과 나침반 및 정화의 원정 등등... 동양은 능력과 기술은 갖추었으나 의도와 의지가 없었다. 그러나 분권적이고 종교적 열정이 가득했던 중세를 지난 서양은 달랐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 과정에서 용병과 무기가 발달했다.

결국, 필요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도전이 성공이라는 자식을 낳았던 셈이다. 



유럽의 분산된 국가체제가 통합의 큰 장애였다는 것은 그렇다고 동어반복은 아니다. 당시 많은 수의 경쟁국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수단을 갖추었거나 돈으로 구비할 능력이 있었으므로 어떤 나라도 혼자서 대륙의 지배권에 성큼 다가설 수는 없었다. 
이같은 유럽국가들의 경쟁적 상호작용을 가지고 통일된 '화약제국'의 부재는 설명할 수 있겠으나 유럽의 세계주도권을 향한 꾸준한 부상은 쉽게 설명할 없다. 1500년에 신흥군주국들이 소유한 군대를 술탄의 어마어마한 병력이나 명제국의 대군 앞에 맞세워 놓았다면 아주 초라한 꼴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16세기 초, 어느 면에서는 17세기까지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17세기가 되자 군사력의 균형은 서양에 유리한 방향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같은 변화의 설명 역시 유럽의 세력분산에서 찾아야 한다. 세력분산은 무엇보다도 도시국가들, 나중에는 보다 큰 왕국간의 초보적인 군비경쟁을 유발하였다. 이렇게 된 데는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인 배경이 있다. 이탈리아의 유능한 군대가 봉건기사와 그 수행자 대신 특정도시의 시장이 감독하고 상인이 봉급을 지급하는 창병, 석궁사수와 (이를 호위하는) 기병대료 고체되자 용병대장이 실속을 다하려고 무진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고용한 상인과 시장이 그들에게 돈값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바꿔 말하자면 도시는 일거에 승리할 수 있는 그러한 무기와 전술을 요구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전쟁비용을 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15세기 후반 프랑스 왕들은 '국민'군을 자기 휘하에 두고 월급을 주면서 이 군대가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주기를 고대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자유시장체제하에서 많은 용병대장들이 서로 고용계약을 차지하려고 다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공업자와 발명가들 역시 새로운 주문을 얻기 위해 제품개선에 몰구하였다. 이같은 무기의 개선은 15세기 초 석궁과 장갑용 철판제조업에서 나타났으며 마침내 그후 50년이 못되어 화약무기의 실험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대포가 최초로 사용되었을 때는 그 형태와 성능면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커다란 단철포신으로 돌포탄을 쏘면서 굉장한 폭음을 낸 대포는 가히 인상적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성능이 대단하였다. 그 대포는 투르크군이 1456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포격할 때 사용하던 것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지속적인 개량의 자극은 아마도 유럽에만 있었던 것 같다. - 49쪽 '서양의 부상' 중-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무모한 '베팅'은 성공했다. 다만, 그들을 부의 길로 인도한 건 절실히 원했던 동양의 향신료가 아니라 신대륙의 은이었다.

로마제국이 야만족에게 유린당하고 멸망했듯, 半문명인에 불과했던 서유럽인들에 의해 신대륙의 제국들은 순식간에 몰락해버린다. 그렇지만 맹목적인 믿음만 있을 뿐 신의 선물을 제대로 활용할 소양을 갖추지 못했던 스페인과 포루투갈은 신대륙에서 얻은 부를 동양의 사치품을 사들이는데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 데 돈을 쏟아 부었다. 

이 과정에서 물자의 이동이 늘어나면서 유럽의 변방과 소국에 불과했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재빠르게 기회를 포착했다. 특히, 네덜란드는 고대 아테나와 중세의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을 모방하다가 전쟁의 규모가 커지자 실물경제의 범위를 넘어 비실물경제 즉 우리가 말하는 '금융경제'이라는 걸 만들어 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유럽의 '금융혁명'을 부채질한 가장 크고 지속적인 자극요인은 전쟁이었다. 펠리페 2세 때와 나폴레옹 때의 재정 부담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 (...) 경제적 의미에서 볼 때 강대국간의 끈질기고 빈번한 충돌이 서양의 상업과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기보다는 촉진하였는지의 여부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한 나라의 절대적인 성장을 긴 분쟁 전후의 상대적 번영과 힘과 무관한 것으로 평가할 것인가의 여부에 상당히 좌우된다. 분명한 것은 가장 번영하고 근대화된 18세기 국가들도 이 당시의 전비를 경상수입으로 즉각 감당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중세는 세금을 거두어들일 기구를 갗추었다 해도 국내의 저항을 유발할 공산이 컸으며 이는 모든 정부가 두려워하는 바였다ㅡ특히 외부의 도전이라도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정부가 전쟁을 적절히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차입ㅡ공채와 관직을 팔거나 아니면 국가에 돈을 납입한 모든 사람에게 이자부 양도성 장기증권을 매각하는 것ㅡ이었다. 자금의 입수가 확실해지고서야 관리들은 군납업자, 식료품상인, 조선업자 그리고 군인들에게 지불을 보장할 수 있었다. 방대한 양의 자금을 조달함과 동시에 지출하는 양면체제는 많은 점에서 서양의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발전을 부채질하는 풀무와 같았다. -121쪽 '금융혁명' 중-



한자동맹 등을 통해 발트해 연안 무역을 장악했던 네덜란드는 대서양으로 규모가 커지자 국토 면적과 인구 규모로는 새로운 대항해 시대에 발빠르게 대처할 수 없었다. 이런 네덜란드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영국이 메꿔나가기 시작한다. 

사실, 그 당시 유럽의 강대국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떻게 프랑스를 따돌릴 수 있었을까? 아니, 프랑스는 어째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까?   

'새옹지마'처럼 인간의 의지가 배제된 신의 변덕이 작용한 것일까? 

영국의 노력과 의지를 평가절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남달랐던 건 결코 아니었다. 여기엔 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꿔 말하면 '장점이 곧 단점이 되고, 단점이 곧 장점으로 바뀐 과정'이 있었다. 



18세기의 영국은 상공업이 단단히 뿌리내리고 집요하게 성장한데다 재정신용도는 탄탄하며 우연하고 상승적인 사회구조였는데 반해 구제도의 프랑스는 실속없이 위험하기만 한 군사적 오만에 빠져 있으며 경제는 낙후되고 엄격한 계급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전통적 관념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의 세제가 영국의 세제보다 더 진보되어 있었다. 또한 어떤 면에서 18세기 프랑스의 경제는 비록 석탄과 같은 기간품목의 자원밖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산업혁명으로 도약할 조짐을 보였다. 프랑스의 군비생산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수많은 노련한 기술자와 몇몇 내로라 하는 기업체도 있었다. 훨씬 많은 인구와 고도의 지약농업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는 이웃한 섬나라 영국보다는 훨씬 부자였다. 정부수입이나 군대의 규모에서도 프랑스는 서유럽의 어떤 라이벌도 압도하였다. 통제경제 체제는 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영국 정부에 비해 훨씬 큰 응집력과 형안을 지녔다. 따라서 18세기의 영국인들은 영국해협 건너의 프랑스를 응시할 때마다 자기 나라의 강점보다는 상대적 약점을 절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체제는 재정 부문에서 결정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 전시에는 국가의 힘을 제고하고 평화시에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영국의 전반적인 세제는 프랑스ㅡ 즉 직접세보다는 간접세에 크게 의존하였다ㅡ보다 뒤떨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특정한 양상으로 말미암아 인민들의 원성은 훨씬 적었다. 예컨대 영국에는 프랑스와 같은 세금징수청부인, 세리와 중개인들이 없었다. 영국의 과세는 거의 '보이지 않는' (많은 기본품목에 대한 소비세) 형태이거나 외국인을 겨냥(관세)했다. 영국에는 국내 통행세가 없었으므로 프랑스 상인들은 사기가 저하하였고 상업의 발달이 저해되었다. 영국의 토지세ㅡ18세기 거의 전기간을 통해 주된 직접세였다ㅡ는 어떤 면세특권도 없었으며 이 또한 사회의 대부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각종 세금은 선출된 의회에서 토의된 후 승인되었는데 영국 의회는 많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구제도보다는 훨씬 대의적이었다. -124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요컨대 구제도하의 프랑스는 그 규모와 인구, 부의 면에서 언제나 유럽 최대였지만 '초강대국'이 될 만큼 크지도 효율적으로 조직되지도 않았으며 육지가 제한되어 바다로 눈길을 돌려봐도 자신의 야심이 초래하기 마련인 적의 동맹을 압도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행동은 유럽세력의 다원성을 뒤엎은 것이 아니라 공고히 하였다. 다만 혁명에 의해 국력이 쇄신되고 나폴레옹에 의해 잘 운용됨에 따라ㅡ일시적으로나마ㅡ대륙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성공은 일시적이었으며 군사적 재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러시아와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을 오랫동안 통제할 수 없었다. -136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17세기까지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는 동양의 제국들과 더 흡사한 사회 구조였던 것 같다. 

 '국왕이 멀쩡히 존재하는데도 대표자들로 이뤄진 의회에 의해 다스려지는' 영국을 바라보면서 프랑스는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작은 섬나라가 고대 그리스 자치도시를 흉내내면서 혼란을 자초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은 '과거는 언제나 현재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강했을 테니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영국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지나온 과거보다 언제나 더 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것이야말로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착각이면서도 착각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확증편향' 중 하나다.   



물론, 영국의 정치혁명과 금융혁명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며 독립적으로 진행된 것도 아니다.

의회민주주의에 따른 정치혁명은 종교투쟁을 거친 의식혁명의 결과였고, 의식혁명으로 몽매한 상태에서 벗어나자 자연스럽게 자연에 대한 탐구와 과학적 발견이 뒤따르면서 산업혁명을 불러올 수 있었다. 


동서양의 대분기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종교를 버리고 과학을 택한 영국과는 달리 중국과 인도 및 오스만 제국은 수학, 천문, 의학 등 기초 과학이 종교적 교리와 충돌하자 종교를 위해 과학을 (덮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던 지식인과 성직자의 이해득실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중앙관료제 사회에서는 새로운 사상과 혁명이 위로부터 아래로 퍼져나간다는 건 물이 아래서 위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자체적인 제도가 탄력을 받아 규모가 점점 커지자, 이 새로운 게임에 진입하는 사람들과 지역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블루오션이 레드오션이 되는 건 시간문제요 이때부턴 힘의 법칙이 적용된다. 그 유명한 영국의 해군력은 경제 성장과 함께 발전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필두로,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내 라이벌 국가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고, 서인도제도와 동인도제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대륙까지 영향력을 과시한다.



18세기의 러시아의 지위를 정확히 서열짓기는 쉽지 않다. 군대는 대체로 프랑스보다 규모가 컸고 주요 제조업 분야(직물, 철)에서도 훨씬 앞서 있었다. 어떤 라이벌국가도ㅡ적어도 서쪽으로부터ㅡ러시아를 정복하기에는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곤란하였다. '화약제국'이라는 지위 덕분에 러시아는 동쪽의 유목민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인력, 천연자원과 농경지를 추가로 획득함으로써 강대국 대열에 뛰어 들 수 있었다. 러시아가 정부통제 아래 여러 방식의 근대화운동에 돌입한 것은 사실이나 그 속도나 정책의 성공에는 과장된 부분이 다소 있다. 아직도 후진성의 징후가 많이 남아 있었다. 즉 엄청난 가난과 야만성, 너무나 낮은 1인당 소득,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매서운 기후, 기술과 교육의 낙후성뿐만 아니라 로마노트가의 반동적이고 천박한 인물들이 그것이다. 뛰어난 에카페리나대제까지도 경제와 재정문제에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18세기 유럽의 군사조직과 기술의 상대적 정체 덕분에 러시아는 외국의 전문기술을 빌어 자원이 적은 나라들을 따라잡고 앞설 수 있었다. 초강대국의 이러한 무자비한 이점은 다음 세기의 산업혁명으로 전쟁의 규모와 속도가 바뀌고 난 뒤에야 소멸하게 된다. -143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만약, 엄청난 국토와 자원을 보유한 러시아가 표트르 대제의 열망처럼 근대화에 성공했다면 18세기 대영제국는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독립국이었을 때 서유럽에서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를 자력(!)으로 무찌르고 그 여세를 몰아 영국과 충돌해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위로의 시민혁명을 이룩한 영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황제를 정점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에 치중하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이는 오스만이나 무굴제국 및 중국의 청제국도 마찬가지였는데, 중앙집권화된 사회는 처음엔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의 의지와 노력은 반감되고 집단에 무임승차하려는 욕구가 지배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국가는 구조적으로 외부의 방어에는 저항할 수 있어도 외부를 향한 공격에는 일정한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국 경제가 외부의 압력에 무너지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나폴레옹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영국은 산업혁명을 진행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대의 역사적 사건이 서로 특이한 방법으로 상호작용했음은 확실하다. 즉 정부의 무기주문이 선철, 강철, 석탄, 목재무역을 부추겼고 방대한 정부지출(국민총생산의 29%로 추정된다)이 재정실무에 영향을 주었으며 새로운 수출시장은 프랑스의 '역봉쇄'가 억제도 했지만 공장의 생산을 제고시켰다. -188쪽, '재정-지리적 위치와 전쟁의 승리, 1660~1815년' 중-



근대 재래식 전쟁의 끝은 나폴레옹이 장식한다.

물론, 19세기 중후반에도 크림 전쟁, 보불 전쟁 등이 일어나지만 20세기 초 양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들 전쟁들은 소규모 국지전이었으며 역사의 향방을 바꾸기보다는 기존의 강대국 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견제구'에 불과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말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만약' 나폴레옹과 태양왕 루이 14세의 운명이 뒤바뀌어 나폴레옹이 태양왕 루이14세가 되었다면 인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은 새시대를 연 선두주자가 되고자 했으나 사실은 몰락하는 구시대의 일부로, 스스로를 태워 장렬히 산화하는 근대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미국 남북전쟁을 제외하고는 1815년과 1885년 사이에 상호피폐로 이어진 장기전은 없었다. 1859년의 프랑스-오스트리아전쟁이나 1877년 투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과 같은 이 시기의 소규모 전쟁들은 강대국체제에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보다 중요했던 전쟁마저도 몇 가지 점에서는 제한된 것이었다. 크림전쟁은 주로 지역적인 전쟁이었으며 영국의 자원이 총동원되기 이전에 종결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과 프랑스-프로이센전쟁도 한철 작전으로 끝났는데 이는 훨씬 오래 끌었던 18세기의 전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그러므로 군사지도자들과 전략전문가들이 미래의 강대국 전쟁은 1870년 프로이센이 보여줬던 것과 같은 속전속결ㅡ철도와 병력동원계획, 신속한 공세를 위한 총참모부의 계획, 속사화기와 대량동원된 단기복무병력 등이 결합되어 몇 주 안에 적을 압도하는 작전을 전개했다ㅡ을 바탕으로 하리라고 전망한 것은 당연하였다. 신형 속사화기들은 적절히 사용되기만 한다면 공격전보다도 방어전에 이로우리라는 점을 그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용인할 수 없는 대중적 주의주장과 광대한 지역이라는 사정이 맞물려 그 당시 유럽의 어떤 치열했던 단기전보다도 훨씬 길고 치명적인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미국 남북전쟁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전쟁들은 모두ㅡ테네시계곡, 보헤미아 평원-크림반도 혹은 로렌의 들판에서건간에ㅡ하나의 일반적인 결론을 시사했다. 즉 패전국들은 19세기 중엽의 '군사혁신'을 받아들여 새로운 무기를 채택하고,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무장시키며, 철도 기선 전신에 의한 개량된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하는 한편 군대를 지탱하기 위한 생산적인 산업기반을 확립하는 노력을 소홀히 한 나라들이라는 점이었다. 이 모든 전쟁의 승전국측 장군들과 군대가 전투에서 한심스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러한 실수로 훈련된 병력, 보급, 조직 및 경제기반에서 갖는 이점이 상쇄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1860년 이후의 한 시기에 대한 최종적이고 보다 일반적인 관찰을 하게 된다. 이 장 첫머리에서 지적했듯이 워털루전투 이후의 반세기는 국제경제의 꾸준한 성장, 산업발전과 기술발전으로 인한 대폭적인 생산증가, 강대국체제의 상대적 안정성과 국지적인 단기전의 발발로 특징지어진다. 게다가 육군과 해군의 무장이 어느 정도 현대화되기는 했지만 군대에서의 새로운 발전은 산업혁명과 정치체제의 변화에 민감한 민간 부문의 발전에는 크게 못미치는 것이었다. 이 반 세기 동안의 변천에서 1차적으로 혜택을 입은 것은 영국이었다. 생산력과 세계적 영향력을 가지고 따질 때 영국은 1860년대 후반에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비록 제1차 글래드스턴 내각의 정책으로 인해 이 사실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1차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유럽 밖의 산업화되지 않은 농업사회로서 이들은 서양의 제품이나 군사적 침공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똑같은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산업화가 뒤진 유럽의 강대국들ㅡ러시아, 합스부르크제국ㅡ은 본래의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새로 통일된 국가인 이탈리아는 도저히 일등국가에 끼어들지 못했다. -269~270쪽, '산업화와 세계균형의 변동, 1815~1885' 중



양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까지의 복잡한 상황들과 미국의 개입 등에 대해선 이미 충분한 논의와 함께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한 리뷰는 생략하기로 한다. 만약 궁금하다면 최근에 올린 리뷰글들 살펴보시길...


19세기 초까지 도시공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 직물과 수공업 산업에선 강점을 보였지만, 라인 연방을 통일한 프로이센만큼 근대화에 성공하진 못했다. 

1,2차 세계대전은 몰락하는 기존 제국(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과 오스만, 청)과 한 발 늦게 뛰어든 프로이센(독일)과 일본이 이미 구축된 세계 질서에 반발하면서 일어났고, 여기에 영국과 미국 등이 개입하면서 대전으로 확산되었으머 그 결과 역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다. 



폴 케네디는 1945년 이후 미국-소련 양국의 냉전 체제와 군비경쟁 등을 소상히 다루면서, '미국, 소련, 중국, 일본, 유럽공동체로 이뤄진 5강 체제가 한동안 펼쳐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직후, 소련은 해체되었고 80년대 경제성장의 정점을 찍은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저성장 시대에 돌입하면서 저자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정중동'의 전략으로 급성장할 것이라는 중국에 대한 예측은 맞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일독의 의미가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1500년 이후 500년에 걸친 근대 사회를 정치,경제학적 관점과 군사,기술학적 관점으로 설명함으로써 기존의 유기체적 문명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맞춘 점쟁이가 미래도 반드시 맞춘다는 보장은 없다'라는 격언이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과거를 살펴보는 그의 방식이 그냥 패를 돌려 뽑는 '무대포'식이 아니라 광범위한 통계와 각국이 처한 상황들을 전방위적으로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까운 미래에, 어느 나라가 흥하고 쇠할 것인지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마치, 다각도의 통계(빅데이터)를 분석해서 일찌감치 당선자를 맞출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단, 그의 관점을 바탕으로 정리해보면 오늘날 영국과 일본은 국토 면적과 인구를 감안할 때 추락이라기보다는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복귀한 것이다. 과거 스페인제국과 네덜란드의 사례에서 보듯 과잉팽창에 따른 군사비 지출이 과도해지면 무너지게 된다.  둘 다 섬나라로 외부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었고 내부의 강력한 응집력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국토와 인구의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강대국이 아닌) 영향력 있는 대국의 지위를 보존하는데 만족하게 될 것이다.   


한편,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경제력(혹은 생산력)보다는 군사력이 과도하게 발전한 나라다. 더구나 소련이 해체된 후 줄어든 영토와 인구에 반해 소련 시절의 군사적 능력은 고스란히 승계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군사 부문이 강했는데 해체 이후엔 국가 전체에서 군사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한층 커졌다. 러시아는 군사력을 생산력 향상이나 사회 발전 등으로 분산 배치하면서 힘을 길러야하지만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거인과 길게 국경을 맞대고 있다보니 이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 중 러시아가 가장 큰 도전과 딜레마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양한 민족과 언어로 이뤄진 유럽공동체는 러시아를 비롯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공동 방어 전략을 펴고 있다. 물론, 유럽공동체 회원국의 힘만으로 만들어져야 옳지만, 현실은 미국이 이끌고 있는 나토를 중심으로 국가안보를 추구하고 있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이웃나라끼리 전쟁이 잦았고 중국처럼 한 나라로 통일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강력하고 믿을만한 외부 세력(미국)이 리더 역할을 해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중국의 경우는 강력해진 힘을 외부로 투사하면서 미국을 태평양 서쪽으로 후퇴시키고 아시아 지역에서 강자라는 전통적인 역할과 지위를 되찾고자 시도할 것이다. 다만, 이런 중국의 행보가 지역 안보나 질서에 위협이 가해지는 방식은 최대한 피하려고 할 것이다. 핵무장한 북한을 중국이 지원하는 것 역시 기존의 동북아시아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력한 중국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러시아와 미국을 포함해서)은 남한 위주의 통일 한국도 싫지만 북한 위주의 통일 한반도 역시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폴 케네디는 한국에 대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가 강대국이었던 적은 없으니 당연히 <강대국의 흥망>에서 우리나라가 비중있게 다뤄진 건 아니고, 작년 ebs의 '그래이트 마인즈'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비록 한국은 원치 않는 내전과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를 겪었지만 강대국들의 헤게모니가 충돌하는 한가운데에서(마치 고요한 '태풍의 눈' 처럼) 지난 반세기 동안 놀라운 경제 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인의 노력과 외부 세계의 여러 조건들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인구와 영토 및 자원 등 하드웨어를 감안할 때, 한국이 가까운 미래에 강대국의 조건을 갖출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앞으로 한국은 강대국이나 대국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현재와 같은 중견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과 지속적인 지역 안보를 추구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양자동맹보다는 다극 체제 및 국제기구를 통한 다자간 안보와 외교를 활발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반도(우리)는 늘 불안하고 긴장한 상태로 외부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피곤한 운명을 타고 난 모양이다.  

그래도 접시 위에 떠 있는 나뭇잎마냥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만사태평 나른하고 아둔한 운명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좋다. 다시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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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럽인가 - 세계의 중심이 된 근대 유럽 1500~1850
잭 골드스톤 지음, 조지형.김서형 옮김 / 서해문집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와 엇비슷한 2000년대 초반에 나온 경제사 책이다. 둘 다 기존의 프로테스탄트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1500~1850년 동서양 사회를 비교해서 서유럽 특히 영국 산업혁명의 원인을 밝혔다. 


1500년까지 유럽은 결코 동양보다 앞서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 및 인도 등 아시아 제국들이 훨씬 풍요로웠다. 유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발전된 도시와 장인 기술 및 인구성장 등은 양쯔강 하구로 대표되는 비옥한 토지와 땅에 부담을 덜 주는 비료 사용 및 안정된 중앙집권적 통치 제도와 활발한 역내외 교역 그리고 '근로혁명'(특히, 일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아시아인의 놀라운 성실함 덕분이었다. 




따라서 중국 농민은 토지를 경작하는 일에 많은 목축을 투입할 필요가 없었으며 어떤 토지도 휴경지로 묵혀 둘 필요가 없었다. 농업관개와 (일반적으로 돼지의) 거름은 가벼우면서도 비옥한 토양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중국 북부의 평원에서 재배한 곡식은 유럽의 것, 즉 밀, 기장, 콩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도 중국인은 토지면적당 그리고 농민 1인당 유럽인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곡식을 생산하고 더 많은 수공업자와 도시 노동자를 부양했으며 더 많고 더 큰 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다. -35쪽

더욱이 이 시기에 전반적인 기술적 리더십을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다른 기술이 다른 장소와 다른 시기에 나타나 발전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외바퀴 손수레, 운하, 운하 갑문, 자성 나침반, 거대한 지역의 정확한 지도 제작, 선미재 방향키가 달린 선박, 대양 항해 선박, 화약, 주철(무쇠), 도자기, 비단, 인쇄, 종이를 발명하거나 발전시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술에서 중국의 초기 선도적 역할, 즉 방수가 되는 선실 목재 가구와 강력한 삭구 그리고 돛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전문 기술에 요구되는 복합 기술을 도해로 이해하기 위해, 그림 22-3에서 아메리카로 항해할 때 콜럼버스가 사용한 선박과 정화 제독이 지휘한 중국 선박을 비교해 보자. 콜럼버스의 항해 80여 년 전, 정화의 함대는 북중국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해안까지 항해하고 귀국했는데, 이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에서 북아메리카까지 다녀온 항해보다 훨씬 더 먼 장거리 항해였다.

인도는 다양하고 뛰어난 질의 면직물 생산에서 전 세계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무슬림 세계는 향신료를 생산하고 황동과 목재 상감으로 물건을 제작하는 데 뛰어났으며, 질 좋은 융단과 카펫을 생산하는데 탁월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유럽에서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질 좋고 순전한 유리를 생산했으며, 잉글랜드는 다양하고 뛰어난 질의 양모 직물을 생산했고 네덜란드는 어업, 인쇄, 양조에서 뛰어났다.  -65쪽



이때,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을까? 

동서양이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전쟁은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일본을 다녀온 조신통신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들었던가?

당시 에도를 방문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에도는 인구 20만이 넘는 대도시로 밤에도 시가지에 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고 청결하면서도 화려하고, 사람들은 모두 잘 차려 입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서 마치 천국같다.라고 했다.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의 눈에도 분명 에도는 한양보다 더 크고 더 발전되고 더 풍요롭게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왜?" "어떻게?"라는 의문을 품는 대신 "유학도 모르는 미개인 주제에 감히!"라는 자만심만을 가졌을 뿐이다. 지도층의 권력 독점을 위해 새로운 사상이나 문물을 거부하고 기존 종교(조선의 경우엔 유교)나 과거의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사회는 혁신과 발전이 가로막혀 도태된다는 저작의 지적에 조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 




요약하자면, 1800년까지 영국과 중국 모두는 경제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경험했고 식료품과 면직물 생산에서 더 중요한 증대를 과시했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더 높은 생활수준으로 나아가는 어떤 진정한 의미의 전환기적 발전을 마련하지 못했다. 양국 사회는 생활수준과 관련해 이전 수세기 동안의 장기적 주기의 범주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기후, 인구 그리고 임금의 장기적인 상승과 하락은 생활수준의 상승과 하락을 재생산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진정한 전환기적 발전은 여전히 미래에 있었다. 경제 발전의 가속 패턴은 1800년 이후가 돼서야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처음 영국에서 시작되어 서유럽, 동아시아 그리고 나머지 세계에 확산되었다. 따라서 1800년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 농업 문명들은 동일한 수준에서 영위되고 있었다. -75쪽



20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케네스 포메란츠와 잭 골드스톤의 책들은 각각 2000년, 2003년에 출간되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워낙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막스 베버가 활동하던 20세기 초에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 대한 역사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19세기의 제국주의 사조 속에서 베버의 주장은 '식민지배와 노예무역' 등 서구인의 흑역사를 건드리지 않고도 서구의 우월함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신선함을 너머 탁월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암튼, 그 뒤 반 세기 동안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해졌고 많은 사료들이 발굴되고 연구되면서 서구의 일방적인 '자화자찬'식 주장은 그 자체로 또다른(!) 역사가 되어버렸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요 종교의 사원과 교회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들의 지도자들은 세속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이러한 상호 옹호의 합의에 대가를 지불한 사람은 일반 농민과 노동자, 귀족이 아닌 상인과 수공업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성직자, 주교, 귀족, 왕을 부양하기 위해 세금, 십일조, 수수료, 부과금을 지불하는 성스러운 의무를 짊어져야 했다. -91쪽 



'종교는 권력의 편'이었다.

종교가 혁신과 인류 발전에 이바지했을 때는 다양한 종교와 분파들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하던 다원주의와 대관용의 시대 뿐이었다. 오히려 프로테스탄트(신교도)는 가톨릭 및 영국 국교회와의 경쟁에서 밀려 신대륙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후손들이 자본가로 성장한 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에 1700년 대의 산업혁명에 대한 원인이나 이유가 될 수 없다. 



사실, 1500년에서 1700년까지 가톨릭교회는 과학 발전에 개방적이고 지지하는 입장을 종종 견지했고, 대기 압력의 존재에 대한 전환기적 발견은 두 명의 가톨릭 신자인 이탈리아의 토리첼리와 프랑스의 파스칼이 성취한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 과학혁명의 출현은 프로테스탄트적인 것이 아니라 범유럽적 창조물일 뿐 아니라 가톨릭 사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간단히 말하면, 영국이 19세기 초 세계의 지배적인 기술적 산업적 군사적 강대국으로 등장했으며 그 후 100년간 나머지 유럽 국가들이 그 뒤를 따라간 것이 사실이지만, 이 발전이 단순히 일반적인 서양 종교 혹은 심지어는 프로테스탄티즘 혹은 각별히는 칼뱅주의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산업 강대국으로서 영국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최근이며 많은 측면에서 독특하며 가톨릭교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 국가에서의 더 폭넓은 추세와 매우 동떨어진다. 지난 1000년의 거의 모든 기간 동안 , 발명, 경제 발전 그리고 글로벌 무역의 추동력은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이슬람 국가 출신의 학자, 수공업자, 대양 항해자였다.- 99쪽

분명한 것은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사회에서 다양한 종교적 견해가 공존할 때 경제 발전이 가장 잘 번창하게 된다는 점이다. 반면에 국가가 종교 사상의 가혹한 통일성을 강제할 때 경제성장은 제한되고 점차 쇠퇴하게 된다. 관용이냐 아니면 엄격한 정통 신앙이냐 양자 사이의 선택은 모든 종교적 전통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세계 역사상 경제성장 패턴을 연구하는 데 어떤 특정 종교의 성격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06쪽



대다수 서구인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신봉하는 것 못지 않게 대다수 비서구인은 '식민 지배와 노예제'을 동서양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식민 지배와 노예제는 서유럽(스페인과 포르투갈)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로마제국이나 고대 이집트 및 아시아 제국도 오랫동안 여러 곳의 식민지를 다스렸고 노예제의 역사 또한 깊다. 그리고, 강한 편이 약한 편의 잉여생산물을 무력으로 약탈하거나 불평등한 물물교환을 강요한 것 또한 인류 역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국이 주장했던 조공무역 역시 형식만 다를 뿐 강대국과 약소국이라는 관계 설정을 기본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평등하거나 대등한 교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왕친조와 삼궤구고두례를 강요함으로써 상대에서 굴욕감을 준다는 점에서 단순한 무력 시위나 공격보다 더한층 정교한 정치, 외교적 수단에 가깝다. 

교역과 약탈은 늘 동전의 양면과 같다.  




1860년대까지 증기력을 사용한 전함은 성조기나 유럽의 여러 국기를 휘날린 채 지구 곳곳을 항해했고, 철로의 네트워크는 대륙들을 가로 질러 전례 없는 속도로 상품과 사람들을 이동시켰다. 권총이나 소총이 대량생산되었으며, 새로운 디자인이 개발되면서 정확성이나 발사율 또한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동안 계속 나타났으며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통제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싼 가격에 원자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어려움에 처했다. 중국의 경제와 행정은 인구 성장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반란과 13년(1851~1864년) 동안 지속된 내전(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했다. 수천만 명이 죽었고 제국의 중앙 권력은 붕괴되었다. 일본에서 쇼군은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에 직면했고, 오스만제국의 술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에서 수세기 동안 성행했던 노예화와 교역자들 및 식민지 개척자들의 탐욕스러운 욕구 때문에 한때 강력했던 아프리카 여러 왕국은 약화되었다. 
19세기 내내 이와 같은 정반대의 추세가 성행한 결과, 유럽 국가들 (그리고 미국)은 약화된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력을 행사하거나 보다 값싼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이 권위와  통제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새로 개발된 증기선이나 전함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위협하거나 철도와 근대 무기로 아프리카를 지배하는 데 자신들의 장점을 활용한 것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서양을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한 것은 식민주의와 정복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서양의 등장과 다른 세계의 몰락이야말로 유럽 국가들이 전 지구상으로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던 요건이었다. -138~139쪽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대분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1700년까지는 동양이 서양보다 조금 나은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1800년까지도 둘의 차이는 그닥 뚜렷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1850년엔 확실히 둘의 차이는 명백하고도 분명했다. 

사실, 변화는 조금씩 천천히 일어났고 눈에 보이지 않게 쌓여가다가 1850년에 임계점에 다다르자 둘의 격차는 더욱더 벌어졌다. 양적 변화는 처음엔 산술급수적이지만 일정한 점을 통과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바뀌면서 질적 변화를 이끌게 된다. 20대엔 친구들과 연봉이 비슷하지만 30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기술습득이나 경력이 쌓이면서 소득 차이가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하지만 아직 현격하진 않다. 40~50대에 이르면 투자(특히 집)나 승진 등에 따라 이젠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 격차가 두드러지며, 60대 이후에는 서로 다른 계층에 속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그 시작은 단순하다. 그러나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17세기와 18세기에 유럽과 아시아를 통틀어 지배자들은 지방 엘리트로부터 거둔 조세를 토대로 더욱 강력해졌고, 전통 종교를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정치적 위기에 대응했다. 이 가운데 예외적이던 곳은 바로 영국인데,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더 강력해진 의회, 독특한 관습법, 종교적 다원주의와 관용은 영국을 대단히 특이한 국가로 만들었다. -188쪽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전통을 강화하고, 청과 조선은 유교라는 학문을 빙자한 교리로 사회질서를 다듬기에 급급하는 동안, 서유럽 특히 영국에선 왕과 귀족층의 권리를 제한하고 종교 대신 관습법(흔히, 말다툼할 때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딨어?'에서의 그 '법')을 택하게 된다.  성문법은 법을 만든 자(권력자)와 집행하는 자(성직자나 관료)의 권한을 높이고 보호하는 한편, 관습법은 오랜 시간 동안 해당 지역 사람들이 따르고 지켜왔다는 점에서, 관습법을 중시한다는 건 소수가 다스리는 사회가 아닌 일반 대중의 의견을 중시하고 따른다는 의미다.  법률적으로 비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묻는 배심원 제도 역시 소수에 의한 법의 독점을 막고 다중의 판단을 중시하겠다는 영국 시민 사회의 관습법 중시가 구현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 편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이익과 권한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고, 또 다른 한 편(영국)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이익과 권한을 제한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작은(?) 차이가 위대한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종교나 왕의 법에 얽매이지 않게 된 영국인들은 개개인이 단독자로서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의식과 함께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엔 주로 먹고 살 고민과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한계급들이 심심풀이(?)로 실험과 연구를 시작했음은 당연하다. 



170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발생한 것은 틀림없다. 18세기 초부터 유럽의 선진 국가들은 더 발전한 아시아 국가들의 기술이나 생산성을 따라잡기 시작했고, 결국 경제적, 군사적 독점을 위한 행로를 시작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산업혁명"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유용한 것이라는 결과로 간주하지 않고, 기술혁신의 속도가 빨라지고 새로운 동력이나 기계, 발명과 기술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물질적 생활이 향상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면, 산업혁명은 170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유럽, 특히 영국에서 발생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231쪽



이제 유럽이 어떻게 앞서게 되었는가를 확인했으니,  중동과 동양은 어떻게 뒤처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한다. 아니, 어쩌면 승자의 승전보보다는 패자의 실패담으로부터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다. 

'그 많던 제국들은 어떻게 사라져갔는가?'



점차 과학은 종교적, 철학적 신념과 혼합되기 시작했고, 이는 기존 종교 속에 융해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과학이 정치적, 종교적 권위에 억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정통 신앙을 토대로 하는 보수주의나 종교를 통해 국가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둘째, 전근대 시대의 거의 모든 과학은 수학과 자연과학으로 분리되었다. 수학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세거나(산술학), 공간의 관계들(기하학)을 살펴보는데 유용했다. 또한 이는 관측과 같은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매우 유용했다. 그리고 항해를 위해 하늘에 나타난 행성의 위치 편집이나 달력, 점성술 그리고 통계에도 유용했다. 그러나 전근대 시대의 과학적 전통ㅡ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중세 유럽인들, 아랍인들, 중국인들ㅡ은 수학이 우주의 기본 구조를 연구하는 데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학이야말로 자연과학(자연 세계에 대한 연구)이나 신학(인간과 자연 세계, 창조주의 관계를 포함하는 종교적 문제에 대한 연구)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만약 누군가 신이나 영혼의 본질을 알고 싶어하거나 인간과 신의 관계, 또는 동물의 용도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ㅡ식물이나 바위, 불, 공기, 액체, 가스, 수정 등ㅡ의 본질을 알고자 한다면, 이는 수학 방정식이 아니라 경험과 논리를 토대로 하는 추론의 문제였다. 자연과학의 과업은 사물과 그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 측정은 실제적 문제였고, 주로 관측자나 장인, 금융업자 같은 사람들이 측정하는 것이 유용했다. -265쪽

중국과 인도에서 전통은 자연의 숨겨진 힘ㅡ중국에서는 기(氣), 인도에서는 프라나(prana)ㅡ를 믿었다. 이러한 힘이야말로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중국 과학자들에게 세계는 늘 변화하는 것이었고, 변화들은 복잡한 주기를 형성하고,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작용하는 반대 세력의 복잡한 주기나 흐름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엄청난 기술과 수학의 활용 그리고 운하나 관개에서부터 천문학과 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의 관찰에도 불구하고, 중국 과학자들이 우주를 기계적인 시계 장치로 간주하거나 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 방정식을 적용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이들에겐 음과 양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상황 속에서 작용하는 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는 지나침을 억제하고 전체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266쪽

요컨대, 17세기에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전통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지식이 더 이상 강화되지 않고, 대신 이성과 관찰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지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1700년이 되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접근방법이 발생했다. 영국에서 본질에 관련된 연구는 정교한 기구나 도구 그리고 공개적 증명을 토대로 하는 실험과 측정을 통해 수행되었다. 대륙에서는 실험을 개인적인 연구 영역으로 국한시키거나 오락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수학과 논리학이 과학 연구의 토대를 형성했다. 
우리는 데카르트주의가 논리적 그리고 수학적 사유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 체계를 형성했고, 이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과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가르침을 토대로 한 전반적인 지식 체계를 위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발견과 종교적 갈등의 결합은 지식에 대한 길잡이가 되면서 전통과 종교의 권위를 침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데카르트적 체계의 확산은 불가피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에서 왕립 학회의 경험주의자들은 지식 습득에서 네 번째이자 가장 낮은 형태인 일상생활에서의 실험을 통해 지식을 획득했고, 이를 새로운 것으로 변화시켰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연역론에 회의적이었다. 도구와 과학 기구를 사용한 실험을 통해 과학 지식을 쌓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으로 이전에는 한 번도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던 지식의 다섯 번째 근원이 발전했다. 다시 말해,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망원경이나 현미경, 프리즘, 진공 펌프 그리고 다른 도구를 가지고 관찰한 결과가 고대 시대나 종교, 연역론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관찰로부터 얻은 지식보다 훨씬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그리고 특히 17세기 유럽에서 이는 상당히 혁신적이고 놀랄 만한 주장이었다. -280~281쪽



한마디로, 데카르트의 대륙철학은 '제논의 역설'을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다. '제논의 역설'이란 화살은 활시위와 과녁 사이의 중간 지점을 반드시 통과하게 되므로 영원히 과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건데, 현실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관찰과 실험을 중시했던 베이컨식의 영국 경험주의가 옳았던 것이다.     




1850년 이후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서양은 앞서가고 동양은 추격하는 형세는 바뀌지 않았다. 물론, 이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포기한 국가와 지역이 생긴 것처럼 새롭게 경쟁에 진입한 국가와 지역도 있었는데, 천만다행이도 우리나라는 후자에 속한다. 한국은 레이스에 새롭게 등장해 맹추격을 해서 다크호스로 부상했지만 여전히 선진국과의 격차는 크며 우리의 속도보다 우리를 뒤따라오는 후발 주자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맹추격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는 과거보다 국격이 높아졌다고 기뻐하며 소위 '국뽕'에 취해 있기엔 지속적이고도 항구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내재적 역량, 즉 기초체력이 부족하다. 선발진에 진입할지 아니면 중진이나 후진 그룹으로 뒤처질지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다음과 같은 성장을 가로 막는 장애물들을 스스로 쌓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부존자원의 판매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저개발의 수렁에 떨어질 수 있다. (...)  아르헨티나는 양모와 쇠고기를 판매했고, 쿠바는 설탕을 팔았으며 잠비아는 구리를, 나이지리아와 멕시코는 석유를, 브라질과 말레이시아는 고무를 판매했다. 이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다. 그들의 상품을 고가로 판매할 수 있는 한, 그 나라의 모든 것은 잘 되어 나간다. 그러나 산업 세계가 슬럼프에 빠지고 수요가 떨어지거나 다른 생산국이 시장에 들어오거나 인공적인 대용품이 발견된다면, 그 상품의 시장은 붕괴하게 된다.  (...) 설탕 혹은 커피 혹은 구리 혹은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일은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 혹은 기술의 큰 진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더욱이 가치와 수익에서의 실질 이익은 이들 상품을 생산한 국가에게 축적되지 않고 이들 상품을 사탕 혹은 화려한 커피 음료 혹은 구리선 혹은 다이아몬드 보석으로 전화시킨 가공업자에게 축적된다. 가장 큰 금융 이익은 원재료를 생산하는 일에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생산품을 가공하고 창출하는 일에서 나온다. 이들 상품을 판매해 이득을 보는 특혜의 엘리트들이 있는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미숙련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엘리트들은 광범위한 기술교육을 일반인들에게 제공하기를 원치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위협할 수 있는 권력 혹은 후원 세력의 원천이 될 수도 있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산업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장애물은 잘못된 종류의 교육에 대한 투자다. 서양의 성공을 관찰한 많은 국가는 서양의 성공이 광범위한 교육, 사상의 자유, 장인의 기술 교육 그리고 과학적으로 숙련된 기술자 생산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대학 교육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수많은 인문학 전공자와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는 근대적 경제를 창출하는 공학적 기업적 능력을 육성하지 않은 채, 법학, 행정학, 사회과학, 예술, 인문학, 의학, 회계학, 심지어 신학의 전통적인 기술로 대학생을 훈련시키는 데 수백만 달러를 낭비했다. 그 결과, 과도하게 교육받은 남녀의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경제성장보다 사회불안에 빠져 들어갔다. 

세 번째 장애물은 새로운 산업을 창줄할 수 있는 훈련, 아이디어 그리고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의 부재다. 공산주의 국가(쿠바처럼)든 비공산주의 국가(인도처럼)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근대적 교육제도를 발전시키고 수천 명의 뛰어난 과학자와 재능있는 공학기술자를 훈련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거나 그들의 아이디어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생산 할당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 소유의 공장에서 일을 하도록 배속되었다. 유능한 과학자들과 공학기술자들은 다른 지역에서 개발된 모델을 수입하거나 모방함으로써 종종 생산 목표를 충족시키고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제품과 생산공정 창출에 기반을 둔 자기 자신의 회사와 기업을 출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공학기술자와 산업가들에게 부여하지 않은 채, 사회주의 국가들은 글로벌 경제 선도 국가들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다. 

빈곤으로 치닫는 네 번째 요소는 폐쇄적인 경제의 창출이다. 미국, 영국, 일본을 포함한 많은 성공적인 국가는 특정 산업을 보호하거나 혹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특정 회사나 산업을 도와주기 위해 시장 제한 혹은 관세정책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목적은 항상 무역에서 이익을 증대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무역을 전적으로 폐쇄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많은 개발도상국은 서양과 나머지 비서양 국가들 사이의 격차에 반응해 서양의 제조품에 문을 닫고 그 대신 자신들의 공산 제품을 생산한다. 처음 이런 정책은 좋은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경제를 닫아버린 채, 이들 국가들은 혁신을 이뤄 경쟁할 수 있는 공학기술자들에게 주어쟈야 할 기회와 동기도 없애 버렸다. 사회주의 국가처럼, 이들은 시대에 뒤진 생산기술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이들 사회의 경제가 경쟁에 개방되자, 비로소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빈곤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은, 오늘날의 세계에는 좀더 드물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역사 속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났던 것으로, 종교의 정통 신앙이 혁신을 질식시키거나 종교 교육이 과학기술 교육을 지배하거나 대체하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존경받을 만한 성취로 간주되기보다는 죄악으로 간주되거나 혹은 정통 신앙의 연구가 위신과 보상에서 현대과학 연구보다 훨씬 더 존경스럽다고 간주되는 곳에서는, 혁신은 일상적인 경제생활의 토대가 전혀 되지 않는다. -306~308쪽 중  




이상의 다섯 가지 장애물 중,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두 번째 장애물이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 칸막이처럼 들어차 소통과 혁신과 개방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불필요한 인문계 고등 교육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이고 그 대신 초등, 중등 교육과 기술 교육에 치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 유럽인가?' 라는 질문을 '왜 우리는 못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본다면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한다면 반드시 일독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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