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이타주의자 - 세상을 바꾸는 건 열정이 아닌 냉정이다
윌리엄 맥어스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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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맥어스킬은 옥스퍼드대 철학과 부교수이자 비영리 단체 '기빙왓위캔(Giving What We Can)', '8만시간'의 공동 설립자다. 먼저 이렇게 저자의 이력부터 살펴보는 건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을 땐 자칫 분별력을 잃고 저자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좀비' 독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딱히 성공 확률이 높은 것 같지도 않지만...  

 

윌리엄 맥어스킬은 철학과 교수답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기부 단체들을 소개 평가할 뿐만 아니라 기부자들의 심리까지 파헤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재해구호에 기부금이 몰리는 쏠림현상의 폐해와 공정무역상품 구매가 오히려 득(得)보다는 실(失)이 더 많다는 점이었다.

 

특히, 윤리적 소비를 한 경우 선행을 덜 실천하는 방식으로 '도덕적 허가' 효과가 발생한다는 지적은 날카로웠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져서 무례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기부라는 것 자체가 가장 저렴하게(?) '심리적 면죄부'를 구매하는 방식이라고 여겨왔던 평소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직업적으로, 그 만큼은 열정이 이끄는 삶을 살다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잡스의 배신(?) 또한 충격적이었다.

 

 

이상의 객관적 증거들로 볼 때 열정에 맞는 직업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거라 넘겨짚고 진로를 선택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일 자체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면 열정은 자연히 뒤따라온다.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였다. 잡스는 젊었을 때 선불교에 열성적이었다. 인도를 여행했고 LSD(마약성 환각제)를 자주 복용했으며 삭발을 한 채 법복을 입고 다니는가 하면 승려가 되려고 일본행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잡스가 기술 분야에 발을 들인 건 열정 때문이 아니었다.

올원팜 All-One Farm이라는 공동체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기술에 밝은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의 사업을 부업으로 도운 게 계기가 됐다. 애플컴퓨터조차 우연의 산물이었다. 잡스와 워즈니악은 도락가들에게 서킷 보드를 판매하다 어느 컴퓨터 상점 주인이 완전 조립된 컴퓨터를 사겠다고 하자 돈을 벌려고 그 일에 뛰어들었다. 애플사와 컴퓨터 기술에 대한 잡스의 열정이 불타오른 것도 사업이 관심을 끌고 성공을 거둔 뒤부터다. - 211쪽

 

 

 

스탠포드대 졸업식장에서 열정이 이끄는 삶을 살라! 고 역설했던 스티브 잡스...

하긴, 어디 스티브 잡스뿐이랴.

수많은 정치인들, 성공한 CEO들과 종교 지도자들 역시 하나같이 열정을 강조하고 열정에 호소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은 열정이 아닌, 냉정과 이성에 따라 살면서 말이다.

 

 

 

자, 이제 본론이자 결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여러 사업에 관여하는 대형화된 비영리단체들(예: 월드비전, 유니세프 등등) 보다는 비용효율성과 투명성이 높은 사업에 집중하는 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낫고, 재해구호보다는 개발도상국의 보건위생 향상에 애쓰는 단체를 선택해서 지속적으로 기부하는 편이 세상을 좀더 이롭게 바꾸는데 기여하는 최선의 방법을 제시해준다.  

 

 

따라서 자원봉사에 지원하거나 직업을 선택하거나 윤리적인 소비를 실천할 때는 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들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을 얼마나 개선시킬 수 있을까?

이는 남을 돕는 일에 한정된 시간과 돈을 분배해야 할 때 고려해야 할 최우선 사항들이다. 이를 염두에 두었다면 이제는 가장 효율적인 선행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65쪽

 

 

 

만약 당신이 굶주린 아프리카 어린이가 나오는 광고만 보면 지체없이  ARS 번호를 누르는 유형이거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기부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는 편이라면 혹은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특히, 열정이 이끄는 삶이 전부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는 유형이라면 더더욱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삶을 이루는 건 폭죽과 같은 한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파도처럼 쉼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일상(습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더이상 열정에 휘둘릴만큼 젊지도 어리석지도 않지만 내가 하는 작은 선행들이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되는 건 아닌지 늘 궁금했고 불안했는데 이 한 권의 책이 소중한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물론, 저자가 제시해준 방법들이 정말 최선의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 by Bertrand Russ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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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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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을 때, 마침 작가 초청 강연이 시작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타이밍이 절묘하기도 했지만 나름 관심있었던 작가였기에 계획엔 없었지만 2시간을 기꺼이 투자하기로 했다. 강사는 기계적으로 준비된 멘트만을 하는 것 같았다. 태도는 무성의하다고 할 순 없지만 무심했고, 내용은 약간 과장하면 오프라 윈프리쇼나 생방송 아침마당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상처, 트라우마, 고통, 대면, 용서 등등...

지극히 자기연민적 단어들로 가득 채워졌던 강연이 끝나자 다들 재밌었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로선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사실, 남들은 재밌다고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들을 꼽아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표를 얻는다. 예를 들면, 유명인사 강연 듣기라던지 전통있는 지역 축제에 간다던지 아니면 맛집 방문이나 익스트림 스포츠 하기 등등 말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쓰고 나서야 실은 이 모든 것들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삽질'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머릿속으론 '도대체 누가 이따위를 두고 재밌다(혹은 맛있다)고 한 거야?'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바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같은 사람들 덕분이리라. 단, 오해하진 마시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아니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처럼 경제적 댓가를 받고 글을 쓰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굳이 경제적 이득이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재밌다(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그저 내가 이런 부류로 분류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1995년 3월 11일부터 18일까지, 나는 자발적으로 또한 돈을 받고서, 카리브해 7박 크루즈(7-Night Caribbean) 여행을 경험했다. 내가 탄 배는 4만7,255톤 규모의 동력선 제니스 호로, 현재 남부 플로리다에서 운영되는 20여 개 크루즈 회사 중 하나인 셀리브리티 크루즈가 소유한 배이다. 선박과 시설은, 이제 내가 좀 아는 이 산업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단연코 일급이다. 음식은 훌륭하고, 서비스는 흠잡을 데 없고, 육지 관광과 선상 활동은 사소한 수준까지 최대의 재미를 제공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배는 워낙 깨끗하고 하애서 꼭 삶은 것처럼 보인다. 서카리브해의 파랑은 아기포대기 파랑부터 형광 파랑까지 다채롭다. 하늘도 마찬가지다. 기온은 자궁 속 같다. 태양 자체가 우리에게 알맞게 설정되어 있는 것 같다. 승무원 대 승객 인원 비는 1.2에서 2사이다. 정말 호화 크루즈다. - 25~26쪽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월간지 <하퍼스>로부터 취재 의뢰를 받고 일인당 2,700달러 정도 하는 호화 크루즈 여행권을 받는다. 당연히 원고료는 따로 받기로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초호화 크루즈 여행의 문제점만을 집중 취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순전히 느낀 그대로를 기록해달라고 요구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짜(!) 느낀 그대로를 기록한다. 그것도 무려 엄청난 각주를 포함하여 170여 쪽에 걸쳐서.



 

투명인간이 해주는 것 같은 신비로운 방 청소가 어떤 면에서는 근사하다는 걸 나도 인정한다. 누군가 짠 나타나서 방을 지저분하지 않게 만든 뒤 도로 짠 사라진다는 것은 모든 진정한 지저분쟁이의 꿈 아닌가. 꼭 죄책감은 쏙 뺀 채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대로 스멀스멀 솟는 어떤 죄책감이 있다. 깊은 불안감과 불편함이 차츰 증가하여, 결국에는ㅡ적어도 내 경우에는ㅡ 기이한 형태의 응석받이 편집증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 근사한 투명인간 방 청소 서비스를 이틀 겪은 뒤 내가 언제 1009호실에 있고 언제 없는지를 페트라가 어떻게 아는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제야 페트라를 직접 본 일이 거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페트라는 1009호 객실 청소 담당 직원의 이름이다) -85쪽


이전에 나는 미국 밖을 나가본 적이 거의 없고, 이처럼 고소득 무리의 일원으로 나가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지금 항구에서는ㅡ이렇게 멀찍이 떨어진 12층 갑판에서 그냥 내려다보기만 하는데도ㅡ 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또한 불쾌하게 의식하게 된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갑자기 내가 백인이란 사실을 의식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저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다. 저 무덤덤한 자메이카인들과 멕시코인들에게, 특히 네이디어의 백인이 아닌 하급 직원들에게. (...) 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절망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의 본질적이고 새삼 불쾌한 미국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비롯된다. 그리고 이 절망은 항구에서 절정에 달한다. 난간에 서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속하는 사람들 무리를 내려다볼 때, 이 위에 있든 저 밑에 있든 나는 미국인 관광객이고, 따라서 그 정체성상 크고, 살찌고, 벌겋고, 시끄럽고, 거칠고, 오만하고, 자기 생각뿐이고, 응석꾸러기이고, 외모에 신경 쓰고, 창피해하고, 절망하고, 탐욕스럽다. -104~106쪽


그리고 모든 상층 갑판의 모든 카트에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수건 남자들 특수부대가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이 몸 앞뒷면을 웰던으로 잘 익히고 이제 그만 갑판 의자에서 가뿐히 일어날 때 수건을 집어서 방으로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심지어 카트의 '다 쓴 수건'칸까지 가져갈 필요도 없다. 당신의 궁둥이가 의자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연 수건 남자가 나타나서 당신 대신 수건을 카트에 담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 11층 갑판 수영장 옆 윈드서프 카페에서는 언제나 격식 없는 뷔페 형식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카페테리아를 우울한 경험으로 만드는 길고 느린 줄이 없고, 앙트레 요리만 73가지 종류가 있으며, 엄청나게 맛있는 커피가 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노트를 한 뭉치 들고 있거나 쟁반 위에 음식을 너무 많이 담기만 했어도, 당신이 뷔페에서 떨어져 나오자마자 홀연 웨이터가 나타나서 쟁반을 들어줄 것이다. -78~79쪽

 

 

저임금 유색인종들이 제공하는 황제급 서비스와 무한정 제공되는 고급 음식들에 둘러싸여 저임금 유색인종 직원들보다 더 열악한 삶에 직면하여, 호화 여객선에서 잠깐 하차한 관광객들에게 조잡한 기념품들을 판매하려 애쓰는 현지인들의 슬픈 미소에 익숙해지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지나치게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데이비스 포스터 월리스의 글이 이렇게 길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재밌으면서도 서글프진 않았으리라.  



 

모두 아홉 편이 실려 있는 에세이 중 첫 번째인 <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읽고 나서 고민에 빠졌다. 계속 읽자니 그의 글들이 너무 방대하고 난해해서 그가 쳐놓은 선들을 따라가다가 나도 모르게 미궁에  빠져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그만 읽자니,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엄청나게 길고 요란한 문장들을 구사하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작가의 인력(引力)에 저항하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나는 하루를 쉬어 갔다.  다들 어렵다고 하지만 나는 다시 읽고 싶은 이런 글을 쓴 저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면서...


 


 


 

 

 

알고 보니, 그는 십대 때 우울증을 앓았고 알콜중독에 시달렸으며 카프카와 도스또옙스키를 흠모했고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를 숭배했으며 조너선 사프란 포어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후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상태였다. 

이 말인 즉슨,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글들은 어쩌면 이 단 한 권으로 끝날 소산이 지극히 크다는 뜻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이 추가로 번역 소개될 여지는 10% 미만이라는 데에 한표 던진다. 그의 문체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고 단번에 익숙해지긴 힘들지만 일단 마음을 열고 나면 놀라운 흡입력으로 빠르게 읽힐 뿐만 아니라 뜻밖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우와, 내가 이런 문장을 한번에 읽고 단숨에 이해하다니...'


그만큼 그는 유능한 작문 강사였고, 자타가 공인하는 어법 전문가였다. 브라이언 A 가너가 편찬한 <현대 미국 영어 어법 사전>(글제목: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에 대한 그의 서평을 읽어 보라! 글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할지라도 문장의 형식과 관점의 올바름에는 완전히 감동하고 감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서 이 책을 번역한 번역가의 이름에도 눈길이 한번 더 갈 것이고, 그 이름 석자를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앞으로 읽을 책을 선택할 때 또하나의 기준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부디 그러길 바라마지 않는다.



끝으로, 이런 글들을 쓴 작가도 작가지만 이런 글들을 실어 준ㅡ그것도 원고료까지 주면서ㅡ 미국의 잡지사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다른 한편으론 이점 역시 지극히 미국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나라는, 어느 때 보면 더할나위 없이 야만적이고 어느 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문명적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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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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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영화평을 읽기 위해 일주일을 꼬박 견뎠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나는 스스로 좀 덜 망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듯 한편의 영화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권의 책이 한사람의 세계를 바꿀 수 있듯 한편의 영화가 전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된 것도 순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로 인해 내 삶의 명도가 한 단계 더 밝아졌다고나 할까. 


 

이십 년 전에도 그녀의 글에 감탄했었는데 이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감탄하게 된다. 다만, 이번엔 영화가 아니라 그림이다.


 


 

    불꽃이 작렬할 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멈춘다. 꼬리를 흔들며 솟구치는 불씨의 '피융'하는 비명에 귀 기울인다. 불꽃놀이란 대개 군중 속에 섞여 보게 되지만 개인의 내밀한 기억으로 애장되곤 한다.


    왜일까?

    우선 소중한 사람과 함께 구경하는 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고된 불꽃놀이를 부러 탐탁지 않은 사람과 보러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불꽃놀이는 찰나적이다. 그리하여 우리 의식에 지워지지 않는 점을 찍는다. 불은 적극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동시에, 사로잡힌 대상을 태워 무화시키는 이율배반적 원소다. 완성의 순간 곧 수십만 개의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이다. 흡사 벚꽃의 미학이다.


    불꽃놀이는 색종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일가를 이룬 일본 화가 야마시타 기요시(1923~71)의 평생에 걸친 탐닉이었다. 같은 소재를 다룬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여기 소개한 그림은 불꽃의 활짝 뻗친 살이 유난히 가늘고, 밤하늘 장관을 올려다보는 구경꾼이 남자 한 명뿐이라는 점에서 도드라진다. 흰 윗도리에 검은 바지, 귀가 드러난 머리 모양을 한 그림 속 남자는 화가 본인이다. 그림 속 그는 너무 조그마해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붉고 노랗게 만개한 꽃불들은, 수면의 반영과 다정이 쌍을 이루지만 남자는 혼자다. 그날 밤 야마시타는 정녕 혼자였을 수도 있고, 깊이 고독했던 나머지 혹은 불꽃의 흥취가 도저히 남과 나눌 수 없을 만큼 충만해 사람 무리를 짐짓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63쪽


  

우선 알록달록한 둥근 원형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면 맨 아래 사람의 뒷모습같은 건 주의깊게 보지 않았으면 놓치고 말았을 게 분명하다. 그녀의 지적 덕분에 눈길이 머문다. 그리고 다시 보니 지적 장애와 평생 다리를 절었다는 작가의 외로움이 불꽃으로 화하여 형형히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소멸함으로써, 존재가 증명되는 불꽃의 이미지는 일말의 오차도 없이 작가의 삶과 겹쳐진다. 기억되지 못하고 불꽃처럼 사라져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만약 불꽃이 예술 작품이라면 이렇다할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불꽃을 이루는 작은 불씨들일 터. 결국 (나란 존재는) 한송이 꽃도 못되는, 꽃잎에 불과하다는 걸 기어이 깨닫게 만든다. 



 

일간지나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출간한 책들은 어딘지 모르게 현시성(現時性)이 떨어진다. 

김빠진 맥주나 식어버린 튀김같다고나 할까. 아무리 고급진 재료와 수준 높은 솜씨로 만들었다 한들 이미 그 본연의 맛을 잃어버린 셈이다. 이 책 역시 <씨네21>에 실렸던 글을 모았단다. 그렇지만 이 책만큼은 가뿐히 시간을 초월한다. 어디 이 책 한권 뿐이랴. 김혜리의 영화 평론집 『영화를 멈추다』 역시 나온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건만 다시 읽어봐도 세월의 무상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언급된 영화 작품조차도 마치 최근 개봉한 영화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김혜리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영화는 내가 알고 있던 그 영화가 아니라 전혀 다른 또다른 영화로 탈바꿈한다.


잘 쓰는 줄은 익히 알았지만, 이토록 잘 쓰는 줄은 몰랐다.




 

타인의 몸이 아주 가까워져 마침내 나와 그의 거리가 제로, 나아가 마이너스가 될 때 인간의 육체는 홀연 하나의 장소로 변모한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코를 묻은 아빠의 등은 너른 평원이고, 최적의 자세로 포옹한 연인에게 서로의 품은 경건한 성당이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도입부에서 거대한 사막의 능선을 보여주는데, 잠시 후 변화한 카메라 앵글은 그 풍경이 여인의 벗은 몸이었음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상대의 몸을 극접사로 더듬는 이의 시각과 촉각에 감각된 연인의 겨드랑이는 그 어떤 바다보다 완벽한 곡선을 지닌 만이며, 쇄골에 패인 웅덩이는 애틋한 해협이다.

타인의 육체만이 아니다. 심한 통증이 엄습하면 우리는 갑자기 몸을 하나의 공간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자궁은 동굴이 되고 내장은 협곡이 된다. 격심한 감정은 혈관을 달리며 전신에 메아리친다. 영혼과 의식이 거주하는 우리 안의 차원 없는 공간이 불현듯 실루엣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 159쪽




 

달큰시큰한 몸내음과 손끝에 어릴듯 말듯한 솜털들 그리고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의 크레마가 입안에 감도는 것만 같다. 


물론 나도 글을 읽고 감동하고 그림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나 이렇게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녀는 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이다. 아니, 그냥 단순히 잘 쓰는게 아니라 가장 관능적으로 잘 쓰는 사람이다.  정말 인간적으로 까놓고 말해서, 사랑에 '풍덩' 빠지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글을 써낼 수 있단 말인가. 결코 제정신(?)으로 빚어낼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마치 조물주는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똑같이 부여한 건 아니라는 걸 재확인시켜주는 것만 같다. 조물주는 정말 그녀처럼 특별한 심미안을 갖춘 이들에게만 자신을 대신해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여성학자 정희진 등등 쟁쟁한 문장가들조차 그녀의 글에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건 이처럼 조물주의 편애가 유독 그녀 한사람에게만 향한 건 아닌지 하는 의심도 한몫 했으리라. 


 


   

     프란스시코 데 고야(1746~1828)가 그린 '검은 그림' 연작의 한 작품인「개」는 천진한 무방비함의 초상이다.  14점의 벽화로 이뤄진 검은 그림 연작은 의뢰나 대중에게 공개될 계획 없이 그려졌다.

 

    화가는 광대한 배경에 몹시 조그만 개 한 마리를 떨어뜨려놓았다.

  

    배경인 창백한 황색 허공과 암갈색 바닥은, 형체와 스케일을 헤아릴 수 없어 더욱 위압적이다. 지평선 혹은 수평선으로 나뉜 위아래 공간의 극단적 비율은 배경을 우물이나 벼랑 바닥처럼 보이게 한다. 개의 네 다리를 집어삼킨 어둠은 홍수에 불어난 물 같기도 하고 유사(流沙)같기도 하다.  

 

    공포의 근원이 하늘에서 오는지 땅에서 오는지조차 불분명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개를 구해줄 지푸라기 하나 없다. 순종의 표시로 귀를 뒤로 젖힌 개가 주시하는 오른쪽 허공에는 어렴풋한 음영이 어른대는데 상상력을 발동하면 인간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의 눈빛에는 원망도 호소도 없다. 그저 영문을 모른 채 곧 내려질 심판에 한없는 신뢰를 보일 뿐이다. 그것이 자기를 끝장낼지언정.


     돌이켜보건대 우리 모두도 한 번쯤은 이 개처럼 연약하고 맹목적이었다. 고야의「개」는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깊은 우물에 빠져 허덕였던 인생의 연약했던 한 철을 상기시킨다. 또한, 신의 뜻과 그 종착점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걷고 있는 이 길의 풍경을 멈추어 돌아보게 한다. -189~192쪽 



 

 


 

사실 나는 이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리뷰는 불가능하다는 걸 예감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온몸으로 통과하며 쓴 글들을 나는 온몸을 내던져 느끼고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그껏해야 벗은 신발을 양손에 움켜쥐고 모래 사막 위를 걷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게 고작일 뿐이었다. 행여나 발이 데지는 않을까 물집이 잡히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말이다. 


이렇듯 나는, 나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나를 내던지고 타인을 문학을 예술을 사랑할 여력도 자격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남기는 건,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 말 한마디 때문이다.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부디, 그녀처럼 세상을 무한히 신뢰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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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반양장)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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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여름의 태양은 태양이 아니다.
이 정도라면 가히 죽음을 부를 만한 '흉기'다.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한낮의 햇볕 아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강렬한 태양 아래서 아랍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이방인'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 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화영 옮김, 민음사 69~70쪽-

 

사실 나는 지금까지 카뮈의  『이방인』을 서너 차례 읽었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을 죽여놓고, 고작 그 이유가 태양과 땀과 권태 때문이라니...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내가 올 여름 카뮈의  『이방인』을 또다시 집어든 것은 기록적인 폭염 탓도 크지만 우연히 눈에 띈 한 권의 책 제목 때문이었다.

'뫼르소, 살인사건'

카멜 다우드라는 알제리 출신 작가가 카뮈의 『이방인』을 재해석했다는 작품 소개 문장을 보고는 '옳지, 바로 이거다!' 싶었다.  드디어 뫼르소가 응당의 벌을 그것도 피지배 지역 출신 작가에게 받는다고 생각하니, 마치 잘못 내려진 판결이 재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듯 통쾌했다. 그동안 나를 철저히 소외시켰던  『이방인』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말해주지. 두 번째 망자, 피살당한 그자가 바로 내 형이라네. 형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는 게 없어. 형을 대신해 여기 이 바에 죽치고 앉아 있는 나 말고는. 결코 아무도 베풀어주지 않을 조의를 기다리며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내 꼴 좀 보게. 자네가 들으면 웃겠지만, 이건 어느 정도 내 사명이기도 하다네. 객석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무대 뒤의 침묵 속에 감춰진 내막을 떠벌리는 것 말일세. 내가 이 언어를 배워서 말하고 쓸 줄 알게 된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지. 그러니까, 죽은 자를 대신해서 얘기를 하려는 거야. 형이 하려던 얘기를 어느 정도라도 계속해보려는 거지. 살인자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얘기는 너무 잘 써져서 나로선 감히 흉내 낼 엄무도 못 내겠더군. 그건 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언어였던 거야. 이제 나도, 이 나라가 독립한 이후로 흔히 볼 수 있었던 짓을 한번 저질러 볼까 하네. 내 동포들이 프랑스인이 살던 옛집의 돌 등을 하나하나 가져다 자기만의 집을 새로 지었듯이, 나도 살인자가 썼던 단어들과 표현들을 가져다 내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거지. - 카멜 다우드  『뫼르소, 살인사건』 7~8쪽

카멜 다우드는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아랍인의 동생 하룬을 내세워 형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려 한다. 어머니와 함께 죽은 형의 분신처럼 살아야만 했던 하룬은 1962년 7월의 어느날 미처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프랑스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달이 훤히 비치는 새벽 2시였다.  그는 체포되어 군장교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 장교는 프랑스인을 왜 죽였는지 묻지 않고 어째서 7월5일 이전이 아닌 , 이후에 죽였는지만을 따져 묻는다. (참고로, 1962년 7월5일은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날이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고 그 다음날 데이트와 해수욕을 즐겼다는 이유만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듯, 하룬 역시 프랑스인을 죽인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가 독립하기 이전이 아닌 이후에 죽였는지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알제리 독립 이전이었다면 프랑스인 한 명을 죽인 건 얼마든지 독립운동으로 둔갑될 수 있다는 뜻이리라. 20여 년 전 프랑스인이 해변에서 식민지 청년을 쏘아 죽였을 당시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듯이 말이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말년에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거기에서도, 삶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곳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쓸쓸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이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쫓아내고, 희망을 비워 낸 것처럼, 처음으로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 앞에서,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위하여, 내가 혼자임이 덜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카뮈  『이방인』  이정서 옮김, 새움 165~166쪽


내가  그 책에서 찾으려 한 건 형의  흔적이었는데, 정작 발견한 건 내 반영이었지. 내가 살인자와 똑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마침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어." (....) 내 처형 날에는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날 맞아주기를 바라는 일만 남았다. " 맙소사, 이거야말로 내가 얼마나 바랐던 일이었는지 아나! 분명히 구경꾼은 많았었지만 그건 그의 죄 때문이었지 재판을 구경하려는 건 아니었어. 게다가 구경꾼들이란 게 어떤 자들이었나! 열성팬들, 우상숭배자들! 그 숭배자들의 무리 속에선 중오의 함성 따위는 전혀 없었지. 이 마지막 문장은 나를 뒤흔들어놓았어. 걸작은 걸작이지. 내 영혼을 비추는 거울.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가 알라(이슬람교의 유일신)와 권태 사이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거울을 들이대고 보여주는 것 같았어. - 카멜 다우드  『뫼르소, 살인 사건』 180쪽


마치 햇볕에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결국 하룬 역시 뫼르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사회제도와 규범과 인습에 철저히 소외된 '이방인'일 뿐이었다.


결국, 이 작품은 카뮈의  『이방인』을 전복시킨 게 아니라 재현한 셈이다.

구성과 문장 등에 있어서 원작을 충실히 모방했으니 패러디요, 카뮈가 주장한 '부조리'라는 주제를 그대로 살렸으니 오마주에 가깝다.


잘 알다시피, 카뮈의  『이방인』에는 세 명의 망자(亡者) 와 세 개의 죽음이 등장한다. 

하나는 뫼르소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연사고, 두번째는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아랍인으로 타살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뫼르소 자신의 죽음으로, 사형을 언도받지만 뫼르소가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살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진정한 자살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즉, 아이스커피에 샷 하나 추가하듯 그렇게 개인의 자발적 의지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살은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순간에 단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삶의 선택지 같은 건 아닐까? 이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건 오직 죽음밖에 없다면 과연 그와 같은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뫼르소가 휴가를 얻기 위해 모친의 부고 사실을 알리자 사장이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뫼르소는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국선 변호사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던 건 너무 당황해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변호하겠다고 하자 뫼르소는 "안됩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요. " 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말한) 뫼르소는 정말 매정하고 사악한 인물일까?

(그래서) 그는 정말 죽어 마땅한 걸까?

(그렇다면) 그의 죽음으로 얻는 건 무엇인가?


양로원 원장과 예심 판사와 변호사와 배심원을 불쾌하게 만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아니 한때는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일찌감치 내던져버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뫼르소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출세와 권력에서는 한걸음 물러나 푸른 바다와 태양에 마음껏 몸을 맡길 줄 알고,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며,  비굴하게 용서를 구하거나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는 뫼르소의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가 괘씸했던 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렸던 건 뫼르소의 삶에 대한 권태가 아니었을까.

사실 권태로움은 예나 지금이나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전유물이다. 먹고 살기 위해 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계급에게서나 풍겨나오는 고상함 바로 삶의 여유로움이다.

만약 뫼르소가 좋은 교육을 받았고 높은 사회적 신분과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장례식에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은 그의 태도는 몰인정이 아닌 슬픔을 억누를 줄 아는 세련된 태도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가족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비유한계급(Non leisure class)인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하늘이 무너진듯 슬퍼하고 통곡해야 한다. 일개 선박회사 직원이라는 별볼일 없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일망정 그 속에서ㅡ주어진 기회 속에서ㅡ라도 최고가 되고 고소득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야 옳다.


 

그런데 뫼르소는 어떤가?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장례식에서 딱히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가식적으로라도 울었어야 했건만 굳이 그렇게까지 연극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높은 연봉과 승진이 보장된 파리 지사로의 파견근무를 사장이 제안했을 때도 여기서 계속 일하는 것과 파리에서 일하는 것에 별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파리는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워서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우연히 권총을 소지하고 해변을 산책하다가 태양 아래서 아랍인이 치켜든 흉기가 예리하게 번쩍거리자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땀이 눈으로 들어가 시야를 가리자 (아랍인이 자신에게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당연히 정당방위였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처벌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카뮈의 『이방인』은 어처구니 없는 재판 과정을 거쳐 주인공에게 사형 판결을 내림으로써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만인 앞에 구현해 낸다. 하지만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면 할수록 개인은 소외되는 부조리만 더욱 가시화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 역시 이슬람 교리에 따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복수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복수의 교리를 강조하면 할수록 부정의(不正義)는 오히려 확대된다는 역설을 재확인시켜 줄 뿐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재미없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작품일수록 내 지적수준의 낮음과 집중력 부족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다. 이런 책들이야말로 나를 또 한 걸음 앞으로 내딛게 만들어준다는 걸.... 비록 강렬한 태양과 무더위를 피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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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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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은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정원과 포도밭을 거닌다.
신발은 흠뻑 젖었다. 시내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산타 파비올라에서는 6시에, 다른 어떤 곳에서는 6시에서 1분이 지난 뒤에.

물이 뚝뚝 듣는 포도나무 사이에 홀로 선 그녀는 뭔가가 분명히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잡아낼 수가 없다.
그녀의 생각 속에는 텅 빈 곳도 있고,
동시에 빽빽하게 엉켜 혼란처럼 느껴지는 곳도 있다.

러다 마침내 깨닫는다. 수태고지는 비 온 뒤에 그린 것이다.

아치들 사이로 흘끗 보이던 그 먼 풍경은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순간의 표정을 짓고 있다.
천사가 온 것은 비 온 뒤였다.

그 첫 서늘한 순간을 택한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비 온 뒤> 139쪽 

 

 

 

 

 

 

연인과 막 헤어진 해리엇은 열 살 무렵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왔던 산타 파비올라를 다시 찾는다. 
그녀는 그 뜨겁던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끝나버릴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연애가 끝나면 생각은 늘 혼란스럽고 진실은 안개에 싸여 있다. 진실은 아예 없다, 종종 그렇게 보인다. 사랑이 기대를 저버렸다. 관계가 또다시 부서져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p124)


 

여기까지 읽었을 때, 어디선가 빗속을 구르는 바퀴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내리던 비는 어느덧 그쳤고, 이른 아침의 고요함을 뚫고 종소리가 멀어져 갔다. 

해리엇에게 '비 온 뒤' 깨달음이 찾아왔듯, 나에게도 깨달음이 찾아온 걸까?  
 

             
우연히 읽은 <여름의 끝>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좋고 또 좋았다. 
'첫작품의 감동을 능가하는 후속작은 없다'거나 '한계효용의 법칙' 따위의 그럴 듯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소위 '개인적 취향'에 저격당했다고나 할까. 
한 단락... 한 단락...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나만 간직하고 싶은 그런 느낌을 품게 만들었다.  

이미 고인이 된 윌리엄 트레버는 글로써 표현되어질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는 무모한 시도 대신 표현되어질 수 없음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은 처음 읽으면 아무런 느낌이 없다가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빗소리처럼 서서히 마음을 적신다. 


그는 떠날 것이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눈을 뜨면 분홍색으로 칠한 벽과 빈 벽난로 위의 성화, 그리고 창가에 놓아둔 자신의 옷이 지금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사라질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가 떠났다는 사실은 부엌에서도, 마당에서도,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 테고, 레이번 스토브에 넣을 무연탄을 부엌으로 옮길 때도, 교유기를 끓일 때도, 암탉에게 모이를 줄 때나 토탄을 쌓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들판에서도, 달걀을 들고 사제관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때도, 코널티 양이 동전을 세는 동안에도, 보청기를 낀 남자가 단열용 전기제품 보호구나 소젖 패드 등을 찾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 옆에 누워 있을 때도,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빵을 자를 때도, 올드타임 춤곡이 흘러나올 때도.     -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185~186쪽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날 것임을 직감하고 약속과는 달리 결국 자신은 그를 따라나서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는 슬픔이, 옮겨지는 시선을 따라 차곡차곡 차오른다. 처음엔 벽난로 위의 성화와 창가에 놓아둔 옷에, 그 다음엔 마당과 외양간과 부엌에, 그리고 집밖의 들판과 사제관에, 결국은 일상 전체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행복해야 할 미래의 어느 순간조차도 슬픔으로 뒤덮힐 것임을 암시한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는 그 사실을, 그들이 만나지도 않았고 레이프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려 했다. 그녀에게는 그가 난데 없이 나타난 것 같았기에 그가 라하단을 떠나면 난데없는 곳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잊지 못할 터였다. 평생 그간의 수요일 오후들,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기억할 터였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레이프가 꾸며낸 존재였고 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고 믿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어차피 기억을 꾸며낸 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트레버<루시 골트 이야기> 187쪽

"너는 네 만족스러운 삶으로 돌아가야 돼. 내 삶의 손님이 되는 게 아니라, 너는 내 삶에서는 손님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야. 레이프, 내가 너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 우리 몫이 아닌 걸 훔치고 있는 거야. 달링 레이프, 우리는 기억으로 만족해야 돼." (...)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기억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네 말이 맞아. 너는 그러면 안 돼. 그건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나는 우리 사랑의 기억이 전부인 삶을 살 거야. 나는 눈을 감고 내 입술 위에 네 입술을 다시 느낄 거고 매일 파도를 보듯 또렷하게 네 웃는 얼굴을 볼 거야. 우리는 놀라운 친구였어. 레이프! 이 여름이 끝나지 않기를 우리가 얼마나 바랐는지! 앞으로 오는 여름은 다를 거야. 우리 둘 다 그걸 알아."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203~205쪽             

                                                                                             



만약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견뎌낼 수 있다면 아직 젊거나  여전히 젊다고 생각하는 거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는 건, 가진 거라곤 시간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남겨진 시간이 터무니 없이 짧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미래에 대한 기대 대신 과거로부터 소환된 추억을 현재의 거울로 삼는다. 미래의 어느날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오늘이 부끄럽지 않도록 애쓴다. 이것이 곧 영원히  돌고 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시간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반성과 속죄로, 추억과 연민으로, 그리고 한없는 그리움으로...


'모든 인연은 언젠가 끝이 나겠지만,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윌리엄  트레버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그려낸다. 
나는 작가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윌리엄 트레버의 문장들 덕분에 예정된 이별에 대한 직감들과 다가올 슬픔에 대한 예감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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