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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지리의 힘 1~2 - 전2권 ㅣ 지리의 힘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16년 8월
평점 :
이 책은 말그대로 '지리'를 중심에 뒀지만 '지리'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정학적 못지 않게 지경학적 위치가 한 나라의 성장과 쇠퇴 및 외교 관계까지 결정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일단, 큼직하게 대륙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유럽 대륙이 일찍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운행이 가능한 하천들이 많이 분포했다는 점이다. 라인 강, 다뉴브 강, 센느 강 등등 대륙을 가로 지르면서 풍부한 수량과 완만한 흐름으로 운송과 소통에 기여했다. 물론, 이런 강의 존재는 계곡과 산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이런 자연물들은 자연스럽게 천연 장벽이 되어 국경을 이루기도 한다. 그래서 유럽은 이렇게 뻗어나가고 저렇게 퍼져나간 산맥과 강줄기들 사이사이로 크고 작은 민족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면서 오늘날 여러 국가들로 발전했던 것이다.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바 강을 제외하면 유럽의 주요 강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왜 유럽이 상대적으로 소규모 국가들이 많은지 이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대다수 강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탓에 어떤 면에선 이 하천들이 천연 국경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저마다 권리에 따라 경제적 영향권을 형성했다. 이런 양상은 각 하천 유역마다 적어도 하나의 주요 도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여기서 성장한 일부 도시가 수도들이 되었다. (...)
오늘날의 수도들인 비엔나,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 부다페스트 그리고 베오그라드(세르비아의 수도)가 다뉴브 유역에서 탄생했다. 한편 이 경로는 서로 이어지는 두 개의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천연 국경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국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각 민족들이 부상하더니 마침내 민족 국가들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다뉴브 지역의 지리, 특히 최남단의 지리를 보면 북유럽평원의 큰 나라들에 비해 왜 유독 이 지역에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들이 많은지 수긍이 간다. -<지리의 힘 1권> 92쪽
반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러시아의 경우엔 동서로 가로지르는 강이 없다. 그래서 교류와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고 여기에 혹독한 기후까지 더해지면서 오랫동안 그리고 현재까지도 성장이 지체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지리적 조건은 전략적 깊이가 너무 길어서 외부 세력이 공격해 들어오면 후퇴하면서 기력을 모아 되받아칠 수 있는 방어엔 적합하지만(물론, 몽골 기마병에게는 이 전략도 통하지 않았다) 외부 세계로 힘을 투사하려면 보급선과 전선이 길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된다. 그래서 러시아는 대국인 건 분명하지만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췄다고 할 순 없다.
우랄 산맥으로 유럽 대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 북한은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과 해상 경계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아시아의 맹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지리의 힘 1권> 130쪽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영토가 넓은 우크라이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지리의 힘> 1, 2권 모두 우크라이나를 위한 독립적인 챕터는 없다. 하지만 2022년 6월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동남부 지역과 돈바스 지역을 함락시켰다. 팀 마샬이 '순망치한' 관계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해 언급한 그대로 진행된 셈이다.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가 수도 키에프를 계속 지배하는 한 러시아는 자국의 완충지대가 손상되거나 북유럽평원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부동항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항의 임대차 계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신중한 중립국의 행보만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를 용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중립적 행보의 폭을 점차 넓혀가는 우크라이나가 괘씸하더라도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고 나토와 유럽연합이라는 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하려는 야심을 품고 러시아 선박의 흑해 항구 입항에 반대한다면? 한술 더 떠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군함을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물론 이는 현재로서는 어불성설에 가깝다. (...)
러시아의 외교 정책 엘리트가 보기에 유럽연합 가입은 나토 가입의 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일종의 레드 라인(불화나 협상 시 한쪽 당사자가 양보하지 않으려는 쟁점이나 요구)을 넘는 행위로 본다. -<지리의 힘 1권> 137쪽
어불성설이라고 했던 일들이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는 순진했고 국민은 성급했다. 대통령은 공약을 지키려다가 전쟁을 야기시켰고 국민은 나토와 EU가입이라는 눈 앞의 당근에만 현혹되어 등 뒤에서 휘두르는 러시아의 채찍은 잊었다.
현재 러시아 지배로 들어간 지역을 우크라이나가 자력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나토나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 같지도 않고...
한편, 혜택 받은 유럽 대륙과 가장 흡사한 대륙을 꼽으라면 북아메리카 대륙일 것이다.
북아메리카 대륙은 미시시피 강이 남북으로 흐르면서 수송로 역할을 톡톡히 할 뿐 아니라 대서양으로 흐르는 강줄기들이 수로처럼 잘 발달해 있어 18세기 산업혁명 당시 증기선들이 오르내리기에 수월했다. 여기에 중부와 남부의 대평원은 대규모 곡물 재배를 가능케했다는 점 또한 미국이 최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지리적 조건이었다. 여기에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양차 대전에서 영국은 비록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에 휘말려든 반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미국은 전쟁의 포화는 받지 않은 채 전쟁 특수로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영국으로부터 전세계 거점 지역들을 인계받아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발단까지 마련한다.
"훌륭한 기지들이군. 이제 우리가 가져야겠어."
가격은 적절했다. 1940년 가을에 영국은 더 많은 군함들이 절실했다. 반면 미국에게는 50척 정도의 여분이 있었다. 결국 기지 협상을 위한 구축함들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은 강대국이 될 수 있을 능력을 전쟁을 계속 수행하게 하는 도움과 맞바꿔 버렸다. 이렇게 해서 서반구의 영국 해군 기지 대부분이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 -<지리의 힘 1권> 72쪽
사실, 영국은 지경학적으로 볼 때 두 가지의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첫째는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강력한 분리 독립 세력이 무려 두 개나 존재한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국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를 이루는 북쪽과 웨일즈와 잉글랜드를 이루는 남쪽은 원래 각기 다른 대륙이 충돌하면서 떨어져 나왔단다. 그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아일랜드가 섬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지형을 이룬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인류가 그곳에 거주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1만 년 전의 일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 지역은 높은 협곡과 산맥 및 그 사이의 계곡을 흐르는 강들로 천연 국경선이 그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영국(브리튼)은 단순히 지방색이라고 하기엔 무색한 지역간 차이가 매우 큰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민족이 각기 다른 역사와 고유한 문화를 간직하며 발전해온 상태에서 심지어 종교까지 다르다면 오히려 통합 대신 분리와 독립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영국이 대영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내부에서 단결해서 외부로 뻗어나간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와 신대륙을 필두로 한 식민지배를 통해서였다. 부가 나라 안으로 모여들 때까지는 다름과 차이라는 틈은 돈으로 충분히 메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접착제가 공급되지 않자 틈은 갈라지고 벌어졌다. 영국 본토가 브렉시트를 감행함으로써 북아일랜드라는 조각을 잘라냈고, 이를 지켜본 스코틀랜드 역시 분리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원래 스코틀랜드는 아일랜드의 소코티 부족이 점령했던 곳으로 스코틀랜드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이들 지역이 종교와 민족 및 역사와 문화 등에서 모두 잉글랜드적이지 않은 건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한편, 아프리카와 호주 대륙은 물이 부족한 대륙이다. 특히, 아프리카는 인류가 최초로 기원한 지역으로 그 출발이 빨랐고 크기 또한 유럽과 신대륙 및 아시아 대륙을 능가함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나일강 문명을 제외하면 별다른 문명을 이룩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이 황하 문명을 인도가 인더스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풍부한 수자원과 이용할 수 있는 수로가 존재했던 지리적 혜택 덕분이었다.
이집트는 어디까지나 지역 강국에 지나지 않았다. 국토의 3면이 사막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지중해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 테지만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나무가 귀하다는 점이다. 대다수 역사에서 나무가 귀한 나라치고 세력을 과시할 만한 강한 해군력을 구축한 나라는 없었다. 물론 이집트에 해군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이집트는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고 레바논에서 삼나무를 수입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대양 해군이 돼 보지는 못했다. -<지리의 힘 1권> 236쪽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이집트는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중 한 곳이고 기원전 10세기에 이미 거대 왕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중해와 맞닿아 있으면서 그리스가 지중해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바다로 진출조차 시도해보지 못했다. 아니 딱 한 번 시도하긴 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바다에 닿자마자 바로 도망가지 않았던가.
이집트가 바다와 친하지 않았던 이유가 늘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알게 되었다.
이집트에는 배를 만들 수 있는 나무가 없었던 거였다.
오늘날에도 이집트는 물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의 '급수탑'으로 불리는 에티오피아가 그랜드 르네상스 댐을 건설하면서 청나일강의 물길을 장악할 수 있게 되자 이집트로선 언제라도 생명선을 위협받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물을 덜 사용하는 작물 쪽으로 농업을 개편하고 에티오피아가 물을 무기로 사용할 수 없도록 백나일강의 진원지인 수단과 연합할 수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어 보인다.
이제 또다른 고대 제국 중 하나인 중국을 살펴볼 차례다.
사실 저자는 <지리의 힘> 제1권 첫 번째 챕터를 중국에 할애할 만큼 중국을 중요한 나라로 보고 있다. 중국은 4천 년만에 대륙세력에서 대양세력으로 거듭나고 있는데 만약 중국의 도전이 성공한다면 차세대 강대국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영토, 인구, 시장, 신기술 등등 강대국이 갖춰야할 지리 외적 요건까지 겸비했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은 20세기 들어 새로 갖춘 것들이 아니다.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넓은 영토에 엄청난 인구와 서양을 능가하는 기술 대국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난 한 세기 동안 중국은 강대국의 조건을 가졌음에도불구하고 강대국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더 정확하게는 강대국이었으나 강대국의 지위에서 밀려난 것이다.
저자뿐만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무섭게 성장하는 현대 중국을 바라보면서 '중국이 어떻게 저렇게 빨리 성공할 수 있지?'라면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러나중국은 강대국이 될 조건들을 이미 다 갖추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중국은 어떻게 그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서도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을까?'라고 물어야 옳지 않을까.
지경학적으로 강대국의 조건을 갖춘 나라가 강대국이 되는 과정과 원인을 찾아보는 건 특별할 게 없다. 1+1=2 처럼 지극히 당연한 섭리니까. 오히려 중국과 같은 나라가 강대국이 아닌 게 더 이상하고 비정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의 조건을 갖지 못했거나 부족함에도 강대국이 되었거나 그 반대로 강대국의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강대국이 되지 못한 나라를 살펴보는 게 더욱 중요하다.
영국과 스페인은 전자에 가깝고, 러시아와 브라질은 후자에 가깝다.
중국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14억 가지는 된다. 또한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없는 이유도 14억 가지는 된다. 1930년대에 미국에 몰아친 대공황 같은 사태가 중국에서도 발생한다면 중국은 수십 년은 후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세계 경제라는 틀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중국은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이 만들지 못하게 되는 순간 엄청난 실업 사태가 발생한다. 이 대량 실업 사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도시 지역에 사람들이 주로 몰려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커다란 사회적 동요를 피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중국에서 보이는 여타의 모든 현상처럼 이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사회적 동요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다. -<지리의 힘> 1권, 53쪽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없는 14억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중화사상'이다.
쇄국은 곧 쇠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고립이든 의도적인 선택이 되었든, 경계를 세우고 안과 밖을 구분한다는 건 결국 제2의 만리장성을 쌓는 것이다. 천하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성벽을 세워 스스로를 천하 속에 가둔 진나라는 멸망했다.
14억 인구가 많긴 하지만 60억 인구와 분리시켜 권외 지역으로 남는다면, 전세계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중국 자신에겐 득보단 실이 더 많을 것이다.
한편,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대국과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일본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지리의 축복보다는 재앙을 입은 경우가 더 많았다. 저자는 이런 우리나라의 지리적 운명을 '경유지'로 표현했다.
한반도는 국경을 여러 나라와 맞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유지라는 이유만으로 일찌기 몽골 제국이 일본 열도를 침공할 때 길잡이로 앞장서야 했으며 일본이 대륙을 침공할 때도 유린당했다.
고려 이전까지는 외부로 힘을 투사하고 뻗어나가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반도 내의 여러 부족들이 서로 다투면서 힘을 소진시켰고 결국 힘겹게 얻은 대륙의 북쪽도 지키지 못하고 한반도에 주저앉아 버렸다. 고려는 자주적으로 국정을 이끌면서 몽골에 30년이나 저항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조선에 이르러선 강대국의 속국이라는 지경학적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약하고 심지어 한심한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구한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결과에 따른 평가이고, 어쩌면 조선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무모한 도전이나 명분 대신 평화와 안정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개입없이 조선이 단독으로 일본을 상대했다면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다. 청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도 군사력으로는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다만, 유목민족이 세운 청나라는 과거 수, 당과 몽골이 한반도 공략에 대대적으로 나섰지만 모두 실패하면서 왕조의 멸망을 자초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복해서 직접 통치하는 대신 조공을 받는 속국이나 자치적인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어쨌든 두 가지 모두 한반도는 경제적 이득보다는 군사적 방어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반도는 어떠한가?
위치도 바뀌지 않았고 이웃한 나라 역시 그대로다.
강대국의 군사 방어용이라는 지리적 가치 또한 변하지 않았다.
18세기에 한국이 얻은 <은자의 왕국>이라는 별칭은 수세기에 걸친 정복과 점령, 약탈 혹은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경유지의 대상이 된 뒤에 이 나라가 스스로 고립을 택한 데서 나온 명칭이다. 만약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이 북쪽에서 내려오면 일단 압록강을 건넌 뒤 해상까지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천연 장벽은 거의 업다. 반대로 해상에서 육로로 진입한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런 배경에서 몽골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나갔고 이어 명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그리고 일본도 수차례나 침입했다. 한국이 여러 교역로들과 단절하고 홀로 있기를 희망하면서 바깥 세계와 엮이지 않는 편을 택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 일본이 다시 들어왔고 1910년에는 아예 이 나라를 통째로 합병해 버렸다. (...)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북위 38도선을 따라 분단되었다. (...)
역사학자 돈 오버도퍼 교수는 38도선에 따라 이 나라를 남북으로 임의로 분할한 것은 여러 모로 불운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945년에 미국 정부는 8월10일의 일본 항복에만 정신이 팔려서 한반도에 대한 명확한 전략을 수립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한반도에 북쪽에서 소련군의 이동이 포착되자 미 백악관은 한밤중에 다급하게 회의를 열었고 오로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발간한 지도만을 지참한 두 명의 하급 관리는 북위 38도선을 손으로 찍었다. 즉 이 나라를 반쯤 내려온 소련군의 남하를 중단시킬 지점으로 북위 38도선을 찍은 것이다.
이 자리에는 어떤 한국인도 또는 한국 전문가들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인 제임스 번스에게 그 선은 약 반세기 전인 1904년에서 1905년에 치른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상의하던 선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미국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소련은 미국 측이 러일전쟁 당시 소련의 주장을 사실상 승인했으며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과 북쪽의 공산 정권도 용인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국 거래는 성사됐고 이 나라는 분단되었다. -167~168쪽
이 내용이 실제 팀 마샬의 영어 원서에도 그대로 나와 있는지 모르겠다.
원서에서는 일본만 언급했다가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다니까 은근슬쩍 그것도 일본보다는 앞부분에 그러나 분량은 적게 삽입해서 생색만 낸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저자와 에이전트의 약삭빠름을 지적하기보다는, 만약 그렇다면 21세기 초 현재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 또한 그정도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다.
한국산 가전과 K-콘텐츠 및 한국인들이 국제 무대에서 선전한다고 해서 마침내 한국이 세계 TOP10에 들었다거나 지역 강국이 되었노라고 벅찬 자부심과 애국심에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초대받고는 독립국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진정한 우방으로 조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던 고종과 민영환의 '우물안 개구리'식 세계관에서 단 1cm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때와 다른 약간의 변화라고 한다면 중국 대신 미국의 품으로 들어갔고,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양 대국이 서로 힘이 투사하는 과정에서 등거리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주변국과의 관계 즉 일본의 외교는 여전히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과거사의 그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서로를 비난하지만, 과거사에 발목잡혀 있는 건 둘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건 일본이 친 장벽보다 우리가 친 장벽이 더 높다는 점이다. 우리가 중국을 향해 친 장벽보다 중국쪽에서 친 장벽이 더 높은 것처럼 말이다. 더 높은 장벽 안에 갇힌 사람의 시야가 더 좁을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혐한정서는 극우 정치인이 표출하고 일부 보수단체만 적극적으로 호응할 뿐이지만 한국에서의 반일감정은 전국민에게 퍼져있어서 집권 세력들이 가장 쉽게 손대는 정치 이슈 중 하나다. 중국의 혐한정서는 14억 명의 정신 세계를 장악하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반중정서는 중국처럼 노골적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내가 까치발을 세워 장벽 너머 보이는 상대보다 상대가 나를 더 많이 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먼저 사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용서할 순 없는 걸까?
용서란 강자가 약자에게 베풀 수 있는 아량이다. 먼저 용서할 수 없다면 상대보다 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은 아직은 '넘버3'일 뿐이다.
5년 만에 출간된 <지리의 힘> 2권은 1권에서 빠졌던 지역들과 세계 곳곳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좀더 자세하게 파고 들었다. 제1권이 역사와 지리를 결합한 조감도에 가깝다고 한다면, 제2권은 현상과 원인 및 예측을 논하는 끝장토론이라고나 할까. 특히, 발칸과 중동 및 사헬 지역의 끊이지 않는 폭력과 테러는 부족과 지역간 차이와 다름에서 야기된 듯 보이지만 결국은 '쩐(錢)의 전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종교와 민족이 다르고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중은 이런 사실들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 하여, 이들 지역 사람들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혹은 아무도 차지하지 못하게) 무력을 사용한다. 영토도, 원유도, 물도, 심지어 인구마저도 모두 이권다툼의 목적이자 원인일 뿐이다.
사헬이라는 단어는 해안 또는 해변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나왔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건조한 사하라 사막을 건너려던 초창기 여행자들이 이 지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이 해안은 바위가 많은 관목지, 덤불로 덮인 모래벌판, 낮게 자라는 풀과 나무들로 이뤄져 있다. (...) 이곳 사헬은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가로질러 홍해와 대서양까지 연결되는 장장 6천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경로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는 낭만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팀북투(말리의 중부에 위치한 도시)나 카르툼(수단의 수도) 같은 큰 도시로 볼 수 있지만, 세계 시장으로 팔려가는 광물에 생계를 의지하는 작고 지저분하고 후미지고 파리가 들끓는 동네도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카에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길을 이용하는 투아레그족과 플라니족 같은 유목민족을 지나치고 최근에 국경선이 그려진 나라들을 건너면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이념과 폭력성으로 무장한 수많은 무장단체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지리의 힘 2권> 295~296쪽
사우디아라비아는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나라다.
그리고 국명은 사막 한 가운데를 지배하던 토후 가문의 이름이기도 하다.
1744년에 종교학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게 바야, 즉 충성 맹세를 했다. 그는 무슬림이라면 군말 없이 지도자에게 충성해야 하며, 대신 지도자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슬람교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운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두 측의 합의에는 사우드 가문은 정치를, 종교적 측면은 와하비파의 영역이라는 입장이 담겨 있었다. -<지리의 힘 2> 123쪽
이렇게 탄생한 와하비즘(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은 소수인 국왕 일가가 3천5백 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을 용사로 키워내고 알카에다의 탄생을 불러왔다. 9.11테러로 빈 라덴과 알카에다는 소탕되었지만 소멸된 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의 대테러 작전과 러시아 및 이란 등의 맞대응이 IS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테러 단체들의 탄생을 도와주고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TV뉴스 등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시뻘건 피와 총격음이 난무하는 잔인한 장면들만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가치판단을 방해한다. 물론, 이유는 테러범이든 방송사 운영진이든 정치인이든 똑같이 '돈'과 '권력'을 위해 폭력을 상품화하거나 도구화할 뿐이다.
한편, 영국 못지 않게 대제국이었던 스페인과 고대 문명의 산실인 그리스는 지리의 축복과 재앙을 한꺼번에 받은 나라들이다. 이 두 나라의 성장과 쇠락이야말로 지리의 공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특히,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을 쟁취했으나 내전의 진흙탕 속에 빠졌던 그리스의 근현대사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만하다.
터키에 남겨진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미래를 정치인들이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민간인 학살과 마을 파괴가 횡행하면서 로잔조약(1923년 터키와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이 맺은 조약)이 맺어지기 몇 달 전에 이미 적어도 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떠났다. 소수계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그리스와 터키 양측의 발언이 나온 후로 로잔조약은 강제로 주민들을 교환하는 데 합의했다. (...)
(그리스) 테살로니키는 발칸 지역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도시였다. 그런데 난민들이 밀려들어 오자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졌고 이를 기회로 반유대주의 정서가 촉발됐다. 그러자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온주의 운동과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새로 온 이주자들 다수가 정착한 곳은 지난 10여 년간 그리스로 편입된, 즉 <새로운 그리스>로 알려진 열악한 곳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뒷날 많은 이들이 공산당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궁극적으로 군사 정변과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하는 빌미를 가져왔다.
1920~1930년대는 지속되는 분열과 불안정 그리고 파시즘과 손발을 맞추는 군사 통치의 시대였다. 그리스는 독재자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의 지휘 아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애당초 그는 그리스가 중립을 지키는 걸 원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침공에서 고배를 마신 뒤 그리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 군대에 의한 가혹한 점령기를 보내게 된다. 그나마 이 나라의 지리 덕분에 점령군은 내륙 전체를 지배하진 못했고 그리스는 결사적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악지형을 십분 활용해서 지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 기간에 행해진 적군의 식량 징발로 수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굶어 죽었고, 7만 명이 처형당했으며, 레지스탕스 공격에 협조한 죄로 수백 곳의 마을이 파괴됐다. 또 6만여 명의 그리스계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많은 이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테살로니키의 유대인들은 겨우 9%에 불과했다.
1944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독일군이 철수하자 영국군이 군중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아테네로 입성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안도도 몇 주밖에 가지 못했다. 그해 12월, 아테네 거리에 다시금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리스 내전의 전조를 알리는 소리였다. 이 갈등의 시초는 적어도 왕당파와 반왕당파로 국론이 갈라진 20세기 초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간헐적으로 협력하기는 했지만 양대 레지스탕스 그룹인 공산주의 EAM-ELAS와 중도우파 EDES는 독일군이 철수하고 난 뒤 그리스에 다른 통치 권력이 들어서는 것에 대비하고 있지 않았다. -<지리의 힘 2권>, 228~230쪽
결국, 소련의 지원이 끊기자 공산주의자들은 이웃한 공산권 국가인 알바니아로 도망가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그리스 땅에 곧바로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내전으로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꽃피운 그 땅에서 민주주의는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민선 지도자들와 정부 관료들은 무능했고 부패했다. 군부 쿠데타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 근현대사와 닮아도 너무 닮은 거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우리와는 털끝만큼도 닮은 점이 없는 강대국들의 역사는 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자세히 배우고 가르치면서 정작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면,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해전이나 미국 링컨 대통령의 남북전쟁보다는 그리스나 베트남의 독립전쟁과 내전 등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데 말이다.
트라팔가 해전이 나왔으니 나폴레옹의 프랑스나 넬슨의 영국 입장 말고 스페인의 입장에서 이 전쟁을 살펴보자. 사실, 트라팔가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인 영국이나 프랑스 지도에는 없다. 지브롤터 해협의 스페인 쪽 갑곶을 이르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폴레옹과 넬슨은 왜 자기 나라도 아닌 스페인까지 와서 싸운 걸까?
1600년에 850만 명이었던 이 나라 인구는 한 세기 만에 6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매년 평균 1만 명의 군인들이 사망한 데다 식민지로 이주한 또 다른 5천 명까지 더해진 탓이다. 극도의 빈곤과 되풀이되는 역병은 성장으로 가는 발목을 붙잡았다. 1700년대로 접어들어도 스페인은 여전히 전 세계에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대국이었지만, 원래 갖고 있던 것을 자키기에도 벅찬 데다가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유럽 내에서도 많은 영토를 잃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그리고 1704년에는 지브롤터까지 영국에 빼앗겼다.
갈등이 한 세기를 괴롭혔다. 스페인은 원래 프랑스와 싸우다가 나중에는 한편이 되는데 1805년에 트라팔가에서 두 나라의 연합 함대는 영국 해군에게 패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3만 명의 프랑스 군대가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해 들어오면서 이른바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게릴라라는 단어는 실상 이 전쟁에서 나온 말로, 스페인어에서 전쟁을 뜻하는 게라(guerrilla)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말은 당시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스페인의 비정규군 무리를 지칭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396쪽
단테의 <신곡>에서 가장 끔찍한 9옥은 '배신자'들이 가는 곳으로, 입구엔 신을 배반한 악마 루시퍼가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와 의부인 카이사르를 죽인 부르투스와 카시오스를 잡아 먹고 있다. 그만큼 배신을 가장 나쁜 죄악으로 본 것인데, 그렇다면 스페인을 배신한 나폴레옹은 9옥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배신과 침략이 없었다고 스페인이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엔 신진 세력인 영국의 부상이나 카리브해 식민지의 독립 전쟁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20세기 초 대영제국이 무너지는 것과 비슷한 지경학의 공식이 스페인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일단 스페인은 지도 상으로만 보면 피레네 산맥으로 유럽과 경계를 이루며 3면은 대서양과 지중해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지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남쪽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무어인과 북쪽으로는 산맥을 넘어 밀려들어온 고트족 등등 여러 민족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는 점이다. 영국이 1704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합쳐지면서 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듯이 스페인도 146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라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한 후 그라나다 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아랍왕국을 몰아내면서 대제국으로써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흘러들어오는 은을 동방의 사치품을 구입하고, 유럽 내 분쟁에 쓰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는 데 '몰빵'하기 시작한다. 결국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힘의 영역을 넘어서까지 제국이 확대되자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카리브의 해적들도 은을 가득 싣고 귀환하는 스페인 함대를 노략질했으니 그들도 제국 쇠락에 한몫했다과 봐야하나). 그러자 각 지역에서 분리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원래 다른 민족으로 각기 다른 왕국들이었으니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북쪽의 갈리시아, 그 옆의 바스크 지방,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가 특히 심했다. 독재자였던 프랑코 장군의 출신지가 갈루시아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무려 36년의 전체주의 통치 끝에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군부에 기대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대신 스페인에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 주기로 한다.
"스페인은 유럽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스페인 국민은 유럽인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유럽의 일부가 되려면 스페인은 먼저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만 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감수하고서라도 기존의 정치 체제를 해체할 생각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모든 분파들을 향해 발언을 해야 한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모든 스페인 사람들의 왕>이 될 거라고 말했다. 이는 어찌 보면 수세기 동안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려는 과업이 실패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카를로스 국왕의 다음 행보는 카탈루냐와 갈리시아를 방문해서 그들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코의 출시지인 갈리시아에서 국왕은 스페인어보다 포르투갈어에 더 가까운 갈리시아어로 짤막하게 연설까지 했다. 그는 "갈리시아 만세! Viva Galicia!"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지리의 힘> 2권, 407쪽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와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로 대표되는 스페인 프로축구 시합은 단순히 스포츠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걸핏하면 관중들의 집단폭력사태가 일어나는 이유 역시 각 지역의 민족들이 서로 싸우던 과거의 전쟁이 집단 기억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지역 감정은 저리가라 할 정도인데도 어째서 한국인들은 서로 뭉치지 못하고 헐뜯기만 한다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는건지 모르겠다.
물론, 이 말은 일본인이 구한말 의병활동과 3.1독립운동으로 단합하는 조선인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말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은 서로 잘 싸운다'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요즘엔 특히 해외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중장년층 교포 출신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것 같다. 교포들은 오랫동안 해외에 거주해서 국내의 상황들을 체험하기가 쉽지 않고 그저 피상적으로만 접하다가 현지인이나 다른 외국인의 관심이나 질문을 받게 되면 그제서야 외국인의 눈에 비쳐 반사된 한국의 모습을 보고는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물론, 이 외국인들의 의식과 생각에 일본의 소프트 파워가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 잘 싸운다'는 말은 일본 열도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해서 캘리포니아 해안 절벽에 부딪힌 후 반사되어 다시 한국과 한국인에게 되돌아온 셈이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 영국 사람들과 스페인 사람들도 지역적으로 독립을 주장할 정도로 서로 분열되어 있지만 세계 어디에서도 "영국 사람들은 서로 잘 싸워", "스페인 사람들은 단합하지 못해." 등등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지리의 힘> 1권 마지막 챕터가 북극이라면 제2권의 마지막 챕터는 우주다.
과거와 현재를 살펴 보고 이해하게 되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북극과 우주는 인류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건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만이 미지수일 뿐...
아마 인류 4천 년 역사가 지구 표피층에 만들어진 지형과 대기층의 온도에 따라 결정되었다면 앞으로의 4천 년 인류 역사는 태양계와 그 너머 우주 공간에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또다른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주 공간이 가상의 적을 더 잘 관찰하고 더 빨리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우주 경쟁에는 늘 군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 개척자 둥 한 사람인 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우주 비행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1930년대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까지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했지만 로켓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나치는 폰 브라운의 연구를 지원했고 그 결과물인 V-2 로켓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에 투하됐다. 1944년에 최초로 우주 공간에 쏜 발사체가 된 V-2는 수직 이륙 후 고도 176킬로미터까지 날아올랐다. 종전 후 폰 브라운과 120명의 과학자들은 문제의 V-2와 함께 미국으로 옮겨가서 미국의 우주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
러시아인들 또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이 경주에서 앞서가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독학자이자 은둔형 과학자로 알려진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우주 비행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우주 공간에 도달하기 위한 중력권 탈출 속도는 초속 8킬로미터가 돼야 하며 액체 연료와 다단계 로켓을 사용하면 가능하리라는 가설을 처음으로 세웠다. 또한 그는 우주 정거장과 에어론, 산소 시스템의 청사진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의 논문들 다수가 비행기가 최초 비행을 하기도 전에 출판됐다. 그가 우주 여행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있다. 1911년에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지구는 인간의 요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요람에서만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은 달의 뒷면에 있는 분화구에 특별히 그의 이름을 붙여서 그를 기억하려고 한다. -428쪽
지구의 모래알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고 그 한 알 한 알들의 사이가 수 조 킬로미터에 달할만큼 넓고 넓은 우주 공간에서 80%가 금으로 이뤄진 지구만한 행성이나 혹성을 마주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지금은 갈등과 전쟁의 주된 원인인 원유와 천연자원 및 물 등등은 앞으로 우주에서 무한대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금, 은, 우라늄, 철, 구리 등등 주기율표에 나와 있는 원소들 대부분은 우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을 이루는 요소들도 모두 우주에서 기원했음은 물론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 말을 이렇게 바꿔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읽는 만큼 보인다.'
팀 마샬의 <지리의 힘> 은 지리와 역사를 결합한 교양서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역사 지식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의식적으로 역사책들을 읽은 덕을 톡톡히 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과거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해 보고 현재 상황에 대입해 보면서 새롭게 깨닫고 인식하게 되어 스스로도 신기하고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