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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반양장)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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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여름의 태양은 태양이 아니다.
이 정도라면 가히 죽음을 부를 만한 '흉기'다.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한낮의 햇볕 아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강렬한 태양 아래서 아랍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이방인'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 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화영 옮김, 민음사 69~70쪽-

 

사실 나는 지금까지 카뮈의  『이방인』을 서너 차례 읽었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을 죽여놓고, 고작 그 이유가 태양과 땀과 권태 때문이라니...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내가 올 여름 카뮈의  『이방인』을 또다시 집어든 것은 기록적인 폭염 탓도 크지만 우연히 눈에 띈 한 권의 책 제목 때문이었다.

'뫼르소, 살인사건'

카멜 다우드라는 알제리 출신 작가가 카뮈의 『이방인』을 재해석했다는 작품 소개 문장을 보고는 '옳지, 바로 이거다!' 싶었다.  드디어 뫼르소가 응당의 벌을 그것도 피지배 지역 출신 작가에게 받는다고 생각하니, 마치 잘못 내려진 판결이 재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듯 통쾌했다. 그동안 나를 철저히 소외시켰던  『이방인』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말해주지. 두 번째 망자, 피살당한 그자가 바로 내 형이라네. 형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는 게 없어. 형을 대신해 여기 이 바에 죽치고 앉아 있는 나 말고는. 결코 아무도 베풀어주지 않을 조의를 기다리며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내 꼴 좀 보게. 자네가 들으면 웃겠지만, 이건 어느 정도 내 사명이기도 하다네. 객석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무대 뒤의 침묵 속에 감춰진 내막을 떠벌리는 것 말일세. 내가 이 언어를 배워서 말하고 쓸 줄 알게 된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지. 그러니까, 죽은 자를 대신해서 얘기를 하려는 거야. 형이 하려던 얘기를 어느 정도라도 계속해보려는 거지. 살인자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얘기는 너무 잘 써져서 나로선 감히 흉내 낼 엄무도 못 내겠더군. 그건 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언어였던 거야. 이제 나도, 이 나라가 독립한 이후로 흔히 볼 수 있었던 짓을 한번 저질러 볼까 하네. 내 동포들이 프랑스인이 살던 옛집의 돌 등을 하나하나 가져다 자기만의 집을 새로 지었듯이, 나도 살인자가 썼던 단어들과 표현들을 가져다 내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거지. - 카멜 다우드  『뫼르소, 살인사건』 7~8쪽

카멜 다우드는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아랍인의 동생 하룬을 내세워 형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려 한다. 어머니와 함께 죽은 형의 분신처럼 살아야만 했던 하룬은 1962년 7월의 어느날 미처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프랑스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달이 훤히 비치는 새벽 2시였다.  그는 체포되어 군장교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 장교는 프랑스인을 왜 죽였는지 묻지 않고 어째서 7월5일 이전이 아닌 , 이후에 죽였는지만을 따져 묻는다. (참고로, 1962년 7월5일은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날이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고 그 다음날 데이트와 해수욕을 즐겼다는 이유만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듯, 하룬 역시 프랑스인을 죽인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가 독립하기 이전이 아닌 이후에 죽였는지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알제리 독립 이전이었다면 프랑스인 한 명을 죽인 건 얼마든지 독립운동으로 둔갑될 수 있다는 뜻이리라. 20여 년 전 프랑스인이 해변에서 식민지 청년을 쏘아 죽였을 당시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듯이 말이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말년에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거기에서도, 삶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곳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쓸쓸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이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쫓아내고, 희망을 비워 낸 것처럼, 처음으로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 앞에서,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위하여, 내가 혼자임이 덜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카뮈  『이방인』  이정서 옮김, 새움 165~166쪽


내가  그 책에서 찾으려 한 건 형의  흔적이었는데, 정작 발견한 건 내 반영이었지. 내가 살인자와 똑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마침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어." (....) 내 처형 날에는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날 맞아주기를 바라는 일만 남았다. " 맙소사, 이거야말로 내가 얼마나 바랐던 일이었는지 아나! 분명히 구경꾼은 많았었지만 그건 그의 죄 때문이었지 재판을 구경하려는 건 아니었어. 게다가 구경꾼들이란 게 어떤 자들이었나! 열성팬들, 우상숭배자들! 그 숭배자들의 무리 속에선 중오의 함성 따위는 전혀 없었지. 이 마지막 문장은 나를 뒤흔들어놓았어. 걸작은 걸작이지. 내 영혼을 비추는 거울.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가 알라(이슬람교의 유일신)와 권태 사이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거울을 들이대고 보여주는 것 같았어. - 카멜 다우드  『뫼르소, 살인 사건』 180쪽


마치 햇볕에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결국 하룬 역시 뫼르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사회제도와 규범과 인습에 철저히 소외된 '이방인'일 뿐이었다.


결국, 이 작품은 카뮈의  『이방인』을 전복시킨 게 아니라 재현한 셈이다.

구성과 문장 등에 있어서 원작을 충실히 모방했으니 패러디요, 카뮈가 주장한 '부조리'라는 주제를 그대로 살렸으니 오마주에 가깝다.


잘 알다시피, 카뮈의  『이방인』에는 세 명의 망자(亡者) 와 세 개의 죽음이 등장한다. 

하나는 뫼르소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연사고, 두번째는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아랍인으로 타살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뫼르소 자신의 죽음으로, 사형을 언도받지만 뫼르소가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살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진정한 자살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즉, 아이스커피에 샷 하나 추가하듯 그렇게 개인의 자발적 의지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살은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순간에 단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삶의 선택지 같은 건 아닐까? 이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건 오직 죽음밖에 없다면 과연 그와 같은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뫼르소가 휴가를 얻기 위해 모친의 부고 사실을 알리자 사장이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뫼르소는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국선 변호사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던 건 너무 당황해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변호하겠다고 하자 뫼르소는 "안됩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요. " 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말한) 뫼르소는 정말 매정하고 사악한 인물일까?

(그래서) 그는 정말 죽어 마땅한 걸까?

(그렇다면) 그의 죽음으로 얻는 건 무엇인가?


양로원 원장과 예심 판사와 변호사와 배심원을 불쾌하게 만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아니 한때는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일찌감치 내던져버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뫼르소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출세와 권력에서는 한걸음 물러나 푸른 바다와 태양에 마음껏 몸을 맡길 줄 알고,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며,  비굴하게 용서를 구하거나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는 뫼르소의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가 괘씸했던 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렸던 건 뫼르소의 삶에 대한 권태가 아니었을까.

사실 권태로움은 예나 지금이나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전유물이다. 먹고 살기 위해 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계급에게서나 풍겨나오는 고상함 바로 삶의 여유로움이다.

만약 뫼르소가 좋은 교육을 받았고 높은 사회적 신분과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장례식에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은 그의 태도는 몰인정이 아닌 슬픔을 억누를 줄 아는 세련된 태도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가족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비유한계급(Non leisure class)인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하늘이 무너진듯 슬퍼하고 통곡해야 한다. 일개 선박회사 직원이라는 별볼일 없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일망정 그 속에서ㅡ주어진 기회 속에서ㅡ라도 최고가 되고 고소득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야 옳다.


 

그런데 뫼르소는 어떤가?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장례식에서 딱히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가식적으로라도 울었어야 했건만 굳이 그렇게까지 연극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높은 연봉과 승진이 보장된 파리 지사로의 파견근무를 사장이 제안했을 때도 여기서 계속 일하는 것과 파리에서 일하는 것에 별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파리는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워서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우연히 권총을 소지하고 해변을 산책하다가 태양 아래서 아랍인이 치켜든 흉기가 예리하게 번쩍거리자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땀이 눈으로 들어가 시야를 가리자 (아랍인이 자신에게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당연히 정당방위였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처벌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카뮈의 『이방인』은 어처구니 없는 재판 과정을 거쳐 주인공에게 사형 판결을 내림으로써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만인 앞에 구현해 낸다. 하지만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면 할수록 개인은 소외되는 부조리만 더욱 가시화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 역시 이슬람 교리에 따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복수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복수의 교리를 강조하면 할수록 부정의(不正義)는 오히려 확대된다는 역설을 재확인시켜 줄 뿐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재미없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작품일수록 내 지적수준의 낮음과 집중력 부족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다. 이런 책들이야말로 나를 또 한 걸음 앞으로 내딛게 만들어준다는 걸.... 비록 강렬한 태양과 무더위를 피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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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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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다가 개학을 얼마 안 남겨놓고 몰아쳐서 하는 방학 숙제처럼 읽었다.  사실 마크 트웨인의 작품들 뿐만 아니라 내용을 잘 알고 있어서 당연히 원작을 읽었다고 오랫동안 착각했던 작품들이 제법 많다. 어린시절 읽었던 아동용 문고들은 원작을 그대로 옮기지 않은 축소판이 대부분이라서, 올해 독서계획은 '읽은듯 (하지만) 안읽은 책읽기'로 정해놓고 보니, 본의 아니게 고전명작들을 찾아 읽게 된다. 원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만 읽으려 했으나, 톰을 빼놓고는 헉을 이야기할 순 없을 것 같아서 먼저 씌여진 <톰 소여의 모험>부터 읽었다. 

 

 

일단, 톰의 눈에 비친 헉은 이런 아이다. 
  

허클베리는 동네 어머니들이 하나같이 몹시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상스럽고 질이 좋지 않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동네 아이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고 어른들이 말려도 그와 어울려 놀고 싶어 하면서 그 애처럼 되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다른 점잖은 집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톰도 허클베리와 같은 화려한 떠돌이 생활이 부러웠지만, 그 아이하고는 절대로 같이 놀아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톰은 기회만 생기면 그와 함께 놀았다. 허클베리는 언제나 어른들이 입다 버린 헌옷을 입고 다녔는데 넝마 조각 같은 누더기 옷을 사시사철 피는 꽃처럼 펄럭거리고 다녔다. 모자는 낡아 빠진 폐물로, 천이 큼지막하게 떨어져 나간 챙이 초승달 모양으로 너덜거렸다. 외투를 걸칠 때면 옷자락이 발뒤꿈치까지 내려와 닿았고, 뒤쪽에 달린 단추는 등 아래쪽 엉덩이 근처에 매달려 있었다. 멜빵 하나로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킨 바지는 엉덩이 부분이 나지막하게 축 쳐져 있어 마치 빈 부대를 걸치고 있는 듯했다. 술 장식을 단 밑단은 접어 올리지 않을 때는 진흙에 질질 끌렸다.  - <톰 소여의 모험> 84쪽

 


톰은 폴리 이모와 동생 시드 등과 같이 살았지만 헉은 비록 아버지가 있어도 술주정뱅이여서 학교도 교회도 안가고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자는 등 떠돌이와 다름없이 생활한다. 말하자면, 헉은 백인이지만 비기독교인에 비문명인으로 배척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톰과 헉은 평등한 친구사이라기보다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고 리드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헉 역시 두뇌회전이 빠르고 겁이 없는 톰을 자신보다 한수 위라고 추켜세우면서 고분고분 톰의 말을 따르기만 한다.

 

더글러스 과부댁은 나를 양자로 삼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아줌마가 어찌나 매사에 엄격하고 격식을 따지는지 밤낮 그 집안에서 지내는 일이 갑갑해서 죽을 맛이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나는 그만 그 집에서 토껴버렸지요. 옛날에 입던  헌 누더기옷과 설탕을 담던 큰 나무통으로 되돌아와 다시 한번 자유를 누리는 몸이 되었지요. 그러나 톰 소여가 끝내 나를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갱단을 조직하는 중인데 만일 내가 과부댁 집에 다시 돌아가 얌전히 굴면 이 갱단에 끼워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왔지요.  -<허클베리핀의 모험> 16쪽

 

 

내 기억 속의 헉 역시 늘 지저분하고 불량한 아이로, 그저 주인공 톰을 빛내주는 조연 정도로만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원작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톰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동일뿐이지만 헉은 아니었다. 헉은 굳이 주일학교에 가지 않아도,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아도, 선한 지혜로움을 발휘하는 인물이었다. 


톰이 겉으로는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돈과 명예를 숭상하는 세속주의와 영웅주의에 물들어 있는 반면, 헉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남몰래 도와주고 흑인 노예를 고발하지 않는 등 사회적 가치보다는 인간적  가치를  우선시한다. 특히, 도망치는 흑인 노예를 고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헉의 갈등과 결심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 중에 백미로 꼽힌다.  헉은 자신이 타인의 재산인 검둥이가 도망가도록 방조하는 건 법을 위반하는 행위로 당연히 벌을 받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헉은 영웅심에 젖어 나중에 칭찬을 받기 위해 용기를 발휘한 게 아니라 법과 질서 대신 자신의 양심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슬아슬한 고비였습니다. 나는 종이를 집어 손에 쥐었습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나는 숨을 죽이고는 생각한 끝에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그러고는 편지를 북북 찢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끔찍스런 생각이었고 무서운 말이었지만 벌써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뱉은 말을 취소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그러고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마음을 고쳐 먹는 일에 대해서 신경을 끄기로 했습니다. 그 모든 생각을 머리에서 말끔히 씻어버렸지요. 다시 나쁜 짓을 하기로 하자고 했습니다. 나란 놈은 자라나기를 그런 식으로 자라났으니 나쁜 짓이 내 천성에 맞고, 착한 일은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맨 첫번째 일로 나는 짐을 다시 한번 노예 상태에서 훔쳐내자,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일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것도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나쁜 짓을 하기로 한 이상, 더구나 끝까지 하기로 한 이상, 철저하게 해내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 <허클베리핀의 모험> 451~452쪽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키우기로 결심했을 때, 어린시절 읽었던 허클베리핀의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라는 말이 그무엇보다 큰힘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60년대 전후(戰後) 힘들었던 일본사회는 장애아는 국가와 후손을 위해서 자연도태시키는 게 암묵적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애국자가 아니며 반민족주의자로 인식되었다.


우리는 흔히 남이 하려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용기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용기란 결국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혹 순수하게 타인의 이익을 위해 나서기도 하지만, 그대가로 자신에게 심각한 불이익이 따른다면 '오지랖' 이니 '만용'이니 하면서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감옥에 갇히거나 벌금을 내는 등 속세의 처벌을 두려워할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옥에 가야 할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르는지도 모르겠다.


천당과 지옥이 신의 영역이라면 감옥은 인간의 영역이다.
만약 헉이 "지옥은 내가 가겠어!" 라고 외치지 않고 "감옥은 내가 가겠어!"라고 외쳤더라도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읽히면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으리라.
이런 의미에서 헉은 단순히 동시대의 규범적 제약만 뛰어넘은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가로막는 벽을 허문 것이다. 종종 법과 질서로 대표되는 악이라는 '벽' 말이다.


오늘날에야 흑인노예제도의 비합리성이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마크 트웨인이 살았던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흑인 노예를 풀어주거나 도망친 노예를 숨겨주는 것은 국가 정의를 훼손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중대 범법 행위로 처벌이 뒤따랐다.  그래도 헉은 '나쁜 짓'을 하기로 한다. 그것도 끝까지 제대로 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댓가로 신이 자신을 지옥에 떨어뜨린다면 기꺼이 지옥에 가겠노라고 결심한다. 헉은 인간이라면 모르겠으나 신이라면 인간의 생명을 구한 자신을 결코 지옥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선과 악은 본능이다.
나는 인(간)성에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대다수가 선을 선택하지 못하는 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 혹은 내가 속한 집단(대표적으로 가족)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올까 두렵기때문이다.  선이라는 본성은 악이 아니라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안정 등을 내세우는 법과 규정 등에 가로막힌다. 


마크 트웨인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논란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헉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작품의 초입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내걸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20세기 초반까지 수십 년이 넘도록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청소년에게 욕설과 불법과 악행을 사주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禁書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이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이 루이자 메이 올컷이란다.  바로 <작은 아씨들>로 여전히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그분'이다.  


고전명작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하는 자 기소당할 것이다.
고전명작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자 추방당할 것이다.
고전명작에서 웃음을 찾으려고 하는 자 총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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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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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草처럼 꾸불꾸불 이어진 書架 사이 사이

손끝이 닿는 곳마다 감겨오는 숨결들


끝없는 세월을 거슬러 오르고 수많은 난관을 헤쳐온

차곡차곡 강바닥에 쌓인 모래알같은 이야기들


그 속에서 나는 보았네

은빛 가득한 수면 위에 홀로 금빛으로 빛나는 단 한마리

바로 황금 물고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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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살짝 벗어나 책 속으로 숨어든 이 순간만큼은 '나'를 잊어버릴 수 있어서 좋다. 골치 아픈 세상만사 다 제쳐두고 오롯이 책 속의 등장인물과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절대자유의 순간이랄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으며, 누구든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훨씬 더 자주 흔들렸을 테고 더 깊이 절망했으리라.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관계에 더 한층 집착했을 것이며 현실을 외면하고 미래에만 매달렸으리라.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답없는 질문들 앞에서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비관(판)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어렸던데다가 그 후에 살아온 모든 나날이 그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 일은 차라리 꿈이랄까, 아득하면서도 끔찍한 악몽처럼 밤마다 되살아나고 때로는 낮에도 나를 괴롭힌다. 햇살에 눈이 부시고 먼지가 날리는 텅 빈 거리, 푸른 하늘, 검은 새의 고통스런 울음소리, 그때 갑자기 한 남자의 손이 나를 잡아 커다란 자루 속에 던져 넣고, 나는 숨이 막혀 버둥거린다. 나를 산 사람은 랄라 아스마이다. -9쪽


 

 

노벨상 수상 작가인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는 유괴당했을 때 초승달 귀걸이를 하고 있어서 '밤'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불리게 된 라일라의 이야기다.


라일라는 유대인 노부인의 수발이 되어 살아가다가 그녀가 죽자 창녀촌과 빈민촌을 떠돌아 다닌다. 품을 팔아 의식주를 해결하기도 하고 좀도둑질을 하기도 한다. 의지하는 어른을 만나기도 하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를  얻기도 하지만 늘 그녀를 붙잡으려는 그물이 사방에서 던져진다.  그녀는 그때마다 사력을 다해 도망을 쳐야만 한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더이상 도망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으면 아무곳에나 숨어들어 사흘 밤낮을 깊은 잠속에 빠져든다. 


사람들은 지친 그녀를 정성껏 보살펴 준다.

그러나 그녀가 기력을 회복하면 꼭 그녀를 가두거나 통제하려고 한다. 

그녀는 윤이 나는 검은 피부와 청량한 목소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빛났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극한의 생존 조건 속에서도 그녀는 책을 읽었다. 책 속에서 또다른 세상을 만났고 또다른 삶을 보았다.  라일라에게 책은 좋은 친구처럼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모든 걸 알려주었다.



 

나는 몇 달 동안 닥치는 대로, 어떤 순서도 따르지 않고, 나 자신의 기분에 따라, 원하는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지리학과 동물학에 관한 책을 읽었고, 졸라의 『나나』와 『제르미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세 가지 이야기』,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  슈바르츠 바르의 『마지막 의인』,  얌보 우올로겜의 『폭력에 대한 의무』,  벤 젤룬의  『모래의 아이』,  크노의  『내 친구 피에로』, 엑스브라야의  『모랑베르 패거리』,  바슐르리의  『벙어리 여인들의 섬』,  뱅스노의 『혼돈』,  상드라르의 『모라바진』 같은 소설들도 읽었다.  또한 번역본으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  『잘나의 탄생』 『내 예쁜 손가락이 내게 말해줬어요』 『순결한 성자들』도 읽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책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이었다.  밖은 여전히 더웠지만 도서관은 무척 조용하고 시원했으며, 그곳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73~80쪽 중-



불행으로 점철되는 라일라의 기구한 운명과 때론 자포자기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고 내내 가슴을 졸이던 나는 그녀를 믿게 되었다. 그 어떤 가혹한 시련이 라일라를 덮쳐도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보라! 그녀는 에밀 졸라와 빅토르 위고와 카뮈와 플로베르를 만나지 않았는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가장 좋아하는 소녀가 어떻게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은 사람이 어떻게 선을 악으로 갚으며, 졸라와 모파상을 만난 소녀가 어떻게 허영심과 순수함을 구별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라일라는 '나'이기를 기꺼이 포기한 순간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고, 악착같이 움켜쥔 양 손의 힘을 뺀 순간 두 발로 땅 위에 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연주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누군인지 알고 있었다. 내 왼쪽 귀 안쪽의 작은 뼈 하나가 부러졌다는 사실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옛날의 그 검은색 자루, 새하얀 거리, 불길한 새의 잔뜩 쉰 울음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조라도, 아벨도, 들라예 부인도, 저프도, 도처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뒤쫓고 그물을 치는 그 모든 사람들도, 나는 잊어버렸다.  -247쪽


 

허용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탐하고 취하는 사람들 속에서 라일라는 오히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고, 보호와 속박으로 포장된 사랑에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웠으며, 타인의 연민과 욕망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홀로 설 수 있었고, 조건없는 도움과 선의에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과 행복을 양보함으로써 보답할 줄 알았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리고 약한 물고기에 불과했던 라일라는 마침내 길고 긴 여정을 마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간다.


 

더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십오 년 전에, 영겁의 시간 전에, 물 때문에 생긴 분쟁, 우물을 놓고 벌인 싸움, 복수를 위하여 힐랄 부족의 적인 크리우이가 부족의 누군가가 나를 유괴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 물살을 거슬러올라가 어느 강의 물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막 먼지에 손을 올려놓으며,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275쪽



삶이란 누구에게나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아무도 돌아가는 길을 기억하지 못한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그옛날 그길을 따라 바다로 나갔었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바다로 떠난 연어들이 모두 되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듯 누구나 떠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난을 극복한 ㅡ혹은 '선택(구원)'받은 ㅡ특별한 존재만이 귀향을 허락받는다. 


 

영국인 어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르 클레지오는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서구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프랑스의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줄곧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를 떠돌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돌아갈 '그곳'은 어디일까? 아프리카일까? 프랑스일까? 아니면 영국일까? 작가의 이와 같은 체험은 낙인처럼 그의 정신 세계에 새겨져 그의 작품은 늘 '구원과 귀향 그리고 치유'라는 패턴을 갖는다. 



 『황금 물고기』의 라일라 역시 '유괴'라는 사건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향 등지를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작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1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읽힌다. 독자는 주인공인 라일라에게 동화되기보다는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동행자이거나 목격자로서의 위치에 놓여진다.  

 

그래서 책이 끝나면서 라일라의 여정은 끝나지만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독자로서의 나의 여정은 새롭게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책을 읽기 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겠지만 그 일상 속의 나는 책을 읽기 전의 나와는 다른 나일 수밖에 없으리라. 여전히 나는 귀향 중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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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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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Germinal)'은 공화력의 일곱 번째 달(月)로 3월21(22)일~4월19(20)일이며, '씨앗' '희망' 혹은 '싹이 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르미날은 혹독한 추운 겨울이 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달'이지만, 우리에게 4월은 유난히 '잔인한 달'이다.

4.3 제주 항쟁과 4.19 학생 의거가 있었고, 천안함과 세월호도 제르미날에 가라앉았다.



 

이런 제르미날에 에밀 졸라의『제르미날』을 읽게 된 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내 독서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역사란 무엇인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 '아'는 나를 말하고 '비아'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말한다. 

역사는 곧 나와 다른 사람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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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이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깊은 밤 르 보뢰 탄광으로 흘러들어온 건 우연이었다. 그는 배가 고팠고 갈 곳이 없었으며 아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탄광촌 몽수에서는 열 살이 지나면 누구나 갱에 내려가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려 50년 넘게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 본모르 영감도 그랬고, 그의 아들 마외도 그랬으며, 또 그의 아들 쟈사르와 장랭 그리고 딸 카트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탄을 캤고, 탄을 캐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탄광촌 밖으로는 나가본 적도 없고 탄광일 이외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오락이란, 그저 사랑을 나누고 아이들을 낳는 것 뿐이었다.

 


한편, 탄광촌 사장 엔보 씨와 주주인 그레구아르 가족 역시 주어진 환경과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따름이다. 재력을 바탕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사악하지 않고, 욕망과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히려 그들의 연민과 자비심이 그들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도화선이 되고 만다.  

 


 

​이렇게 비참한 삶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고된 노동 끝에 파김치가 된 아직 어린 여자들이 저녁이면 또다시 끝없는 노동과 고통에 시달릴 생명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그녀들이 항상 굶주림으로 고통받을 생명들로 자신을 채워간다면 이런 악순환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다가오는 불행을 막는 것처럼, 배를 틀어막고 허벅지를 꽉 조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 201쪽

그레구아르 가문은 그들의 탄광에 대해 변치 않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주가는 다시 오를 터였다. 신이라도 앞날을 확실히 알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인 믿음에, 한 세기 전부터 가족이 무위도식할 수 있게 해준 가치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그들이 보유한 주식은 그들에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극진히 섬기는 신이자, 그들로 하여금 커다란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먹음직스러운 식탁에서 살찌울 수 있게 해주는 그들 가정의 수호자였다. 그런 삶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존재를 의심하며 운명을 거스르고자 애쓴단 말인가. -128쪽



 

결국, 두 달 넘게 이어졌던 총파업은 군대의 발포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끝이 났다.

회사는 다시 문을 열었고, 사람들은 예전처럼 갱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자 수바린의 테러로 갱이 무너져 또다시 사상자가 발생하고 탄광은 땅속으로 꺼져버린다.



 

러시아식 혁명주의 소설과 같은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오늘날의 현실과 너무도 똑같이 작품이 끝나버리자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파업이었고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단 말인가?'


 

 

어쩌면 그들은 패배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돈과 목숨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리는 르 보뢰 탄광에서 울려퍼진 총성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치유될 수 없는 그 상처로부터 제정의 피 또한 흘러내리게 될 것이다. 산업의 위기가 끝나고 공장이 하나둘씩 다시 가동한다고 해도 전쟁 상태는 계속될 것이며, 더이상 평화로운 해결이란 있을 수 없다. 광부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고, 자신들의 힘을 시험하면서 정의를 향한 외침으로 프랑스 전역의 노동자들을 흔들어놓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들의  패배를 보며 마음을 놓지 못했다. 몽수의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승리 한가운데서도 파업 다음날에 대한 은밀한 불안감에 휩싸인 채, 주위의 깊은 침묵 속에 자신들의 종말이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혁명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어쩌면 내일이라도 총파업과 함께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른 것이다. 공제조합 기금을 확보한 노동자들은 한데 힘을 모아 몇 달 동안 굶주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무너져가는 사회에 거센 충격을 가한다면, 부르주아들은 그들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충격이, 계속해서 또다른 충격이 아래에서부터 가해지면서 낡은 건물이 흔들리고 무너져 르 보뢰 탄광처럼 심연으로 빨려들어가고 말 것이다. - 2부 366~367쪽



 

이 작품은 파업을 위한 작품도 파업에 대한 작품도 아니었다.

나는 작품이 너무나 오늘날의 현실을 쏙빼닮아 있는 나머지 이 작품을 우리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작품은 파업에 따른 결과보다는 파업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개체로서의 개인은 (파업에) 실패할지언정, 전체로서의 인류는 (파업을 통해) 진보한다.



 

에밀 졸라는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인간도 주어진 환경과 타고난 성격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인식의 바탕 위에 루공 마카르 총서를 기획하여 무려 이십여 년에 걸쳐 총 20권의 총서를 완성했다. 『제르미날』은 총서의 열세 번째 작품이며, 주인공 중 한명인 에티엔은 일곱번 째 작품인『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의 아들이며, 그 유명한『나나』는 총서의 아홉번 째 작품으로 제르베즈의 딸이다. 그러므로 에티엔과 나나는 남매지간인 셈이다.


제르베즈가 알콜중독에 빠져 삶이 불행해진 것인지 아니면 삶이 불행해서 알콜에 의존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듯, 에티엔과 나나 그리고 카트린의 삶이 어찌하여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분별력과 예의를 갖춘 마외 부부가 파업에 앞장서고 평소 순박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에밀 졸라조차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그는 수천 년 인류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무대에 서보지 못했던 하층민 중에서도 최하층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몸짓과 목소리를 기록했을 따름이다. 그 기록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었다.



 

에티엔은 밀밭 아래, 산울타리 아래 그리고 어린나무 아래에서까지 도처에서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하늘 높이 떠오른 4월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출산의 기운을 머금은 산허리에서 삶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나무의 새순들이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초록빛  나뭇잎을 터뜨리고, 새로운 풀들이 대지를 뚫고 나올 때마다 들판 전체가 가늘게 떨렸다. 사방에서 따뜻한 기운과 빛을 갈망하는 씨앗들이 부풀어오르고 키가 자라면서 땅을 뚫고 들판 위로 솟구쳤다.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나무의 수액이 넘쳐흘렀고, 싹트는 소리는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은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 2부 369~370쪽



 

에티엔은 분명 들었다.

그 소리는 무너진 갱속에 갇혔을 때 울려온 희망의 소리요, 새봄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생명의 소리였다. 


1902년 에밀 졸라가 가스중독으로 사망하자 프랑스 북부 탄광촌에서 달려온 수백 명의 광부들이 그의 관을 둘러싸고 연호했던 바로 그 소리였다.  


'제르미날! 제르미날!'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그 이전의 수많은 실패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6년 촛불집회와 2017년 대통령 탄핵이 가능했던 건 그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실패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거에 비해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그건 앞선 이들의 실패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고, 오늘 우리가 투쟁한다면 그 결과는 후손들이 기억해 줄 것이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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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소설이란 무엇인가?

17세기까지 고전주의자들은 소설을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교훈적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반면,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은 고단하거나 따분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자극제로써의 소설의 역할만을 중시했다. 그러나 19세기 리얼리스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곧 소설이라고 생각했으며, 20세기 예술지상주의자들에게 소설이란 작가와 독자의 정신적 유희('희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술로서의 소설이 인간의 정신적 유희의 결과이자 목적이라면, 인간은 소설을 통해서 어떻게 예술적 감흥을 경험하는가?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정신적 충격과 함께 깊은 희열을 느끼곤 한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ㅡ리ㅡ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서 있는 사 피트 십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고전 명작이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작품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그만큼 오해와 착각도 많이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백경>과 <모비딕>이 사실은 같은 작품이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로리콤(롤리타 콤프렉스)'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롤리타>에는 롤리타가 없다는 것 등등...


아무튼, 여러가지 이유 등으로 고전 명작은 읽기가 쉽지 않다. 설령 어렵사리 읽었다 하더라도 재미나 감동을 받기는 더더욱 어렵다. 고전 명작이니까 무언가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치(고정관념)'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 여러 번의 결심과 상당한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롤리타』는 우려했던 것만큼 불쾌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음 편히 읽히는 작품도 아니었다. 야하거나 충격적인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의외였다. 예술과 외설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치고는 너무 非외설적이라고나 할까.


일단,『롤리타』는 메타픽션의 시조격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메타픽션이란 작가가 독자에게 '지금부터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글쓰기 기법을 말한다. 지금이야 이와 같은 메타픽션이 널리 알려져있지만 『롤리타』가 씌여지고 출간되던 당시에는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꾸며서 독자로 하여금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도록 작품을 쓰는 것이 작가의 임무요 소설의 진리처럼 받들여지던 시대였다. 이를 감안해 볼 때, 나보코프가 그 당시 『롤리타』라는 작품을 통해서 얼마나 전복적인 글쓰기를 시도했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보코프는 이미 소설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고,『롤리타』를 완성한 후 외설 시비가 일자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소설이 이렇게 쓰여질 수도 있구나! 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썼는지보다는 무엇을 썼는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소재는 주제를 위한 하나의 도구 혹은 장치일 뿐, 주제를 압도하거나 넘어서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일까?

작가가 처음부터 명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써내려간 소설을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에 있어서 만큼은 나보코프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흔히 <저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니면 좀 덜 점잖은 표현으로 <그 친구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야?> 하는 질문을 떠올리기가 쉽다.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이 책을 끝내버리겠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없는 그런 작가이다. 어떻게 그걸 쓰게 되었느냐,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등의 질문을 받았을 때, 영감과 배합의 상호작용이라는 낡은 용어들에 의지하는 그런 작가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은, 내가 한 가지 요술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요술을 부리는 마술사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 423쪽-



 

작가가 특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하겠다는 불순한(?) 의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누군가가 '어떤' 생각과 느낌을 누군가로부터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의도를 처음부터 가지고 쓴 작품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독자)로서 매우 불쾌하기 그지없다. 



 

『롤리타』는 분명 페도필리아(pedophillia)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이를 찬양하지도 조장하지도 않는다. 성적 금기를 다룬 정도와 강도만 놓고 본다면,『롤리타』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귄터 그라스의『양철북』이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는다. 『양철북』은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반전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재에 대한 외설시비 논란을 거뜬히(?) 잠재우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사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역시 얼마든지 서구사회에서 환영받는 반전 혹은 반공산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태생으로 볼셰비키 혁명 이후 타국으로 망명했으며, 그의 부친은 러시아 공산주의자에게 저격 당해 사망했고 형은 독일 내 나치 캠프에서 굶어 죽은 슬픈 가족사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의 아내 베라는 심지어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남다른 신분이나 과거를 이용(?)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예술이 현실에서 지나치게 벗어나 미화되는 것 역시 문제지만 현실참여라는 미명 하에 정치적 색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 역시 反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잣대로 예술을 재단하거나 예술가에게 도덕적 임무를 부여하고 요구하는 사회 역시 위험하다.  과거 전체주의 국가와 오늘날 일부 사회주의 국가를 보라. 그들의 예술은 얼마나 도덕적이고 교훈적인가. 선이든 악이든 어떤 경우든 예술이 목적성을 띠게 되면 그 목적을 위해 복무하는 시녀로 전락할 따름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작품이다. 한편, 내가 생각하는 정말 좋은 작품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반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작품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나에게『롤리타』는 이런 작품 중에 하나다.   
  

 

나는 그녀에게  현찰로 사백 달러, 그리고 수표로 삼천육백 달러가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조심스럽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는 내 작은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는 아름답게 꽃피었다.  『정말』 그녀는 고통스럽게 힘주어 말했다. 『사천 달러를 주시는 거예요?』 나는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싸안고 지금까지 흘렸던 어떤 눈물보다 더 뜨겁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 턱으로 흘러내렸고 몸은 불덩이가 되었으며 코가 막혀 왔다.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자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날 만지면 그대로 죽을 것 같다. 넌 정말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같이 갈 희망이 전혀 없는 거야? 그것만 말해 줘.』

『네』 그녀는 말했다. 『네, 여보, 전혀 없어요』

그녀는 전에 한번도 나를 여보라고 부른 적이 없다.

『가지 않아요. 그건 분명해요. 큐에게 돌아가는 게 차라리 나아요. 제 말은ㅡ』

그녀는 이 상황에 알맞은 말을 찾고 있다. 내가 마음속으로 그 말들을 대신해 준다 (<그는 내 마음을 망가뜨렸고, 아빤 그저 내 삶을 망가뜨렸어요.>) 

『 제 생각엔』 그녀는 말을 잇는다ㅡ『아이쿠』ㅡ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주워올린다.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 돈만 있으면 우린 다음주쯤, 떠날 수 있어요. 제발 울지 마세요. 이해해 주세요, 아빠. 맥주를 더 갖다 드릴게요. 아, 제발 울지 마세요. 그동안 너무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런 게 삶인가 봐요.』

나는 내 얼굴과 손가락을 씻었다. 그녀는 선물을 보고 웃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딕을 부르려고 했다. 나는 곧 갈테니 그를 부르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화에 궁색해진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 381쪽-


험버트 험버트,

그는 짐승으로 살았지만 인간으로 죽었다.

비록, 사랑이었지만...


돌로레스 헤이즈,

그녀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기에 결코 정복당하지 않았다.

설령, 사랑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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