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개정 증보판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이우형 지음 / 페이퍼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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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90년 대 이후 언론 표현의 자유와 함께 현대사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동안 잘못 알려졌거나 몰랐던 현대사들을 기록하고 있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하고 정치가 바로 서지 못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쓰여진 반쪽짜리 역사 교과서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나에게 현대사는 마치 희뿌연 안개가 잔뜩 껴있는 것처럼 희릿하고 헷갈렸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 하나씩 퍼즐이 맞춰졌다. 그동안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미친듯이 분노하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제대로 알았으니 제대로 평가하고 분노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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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사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책은 1863년 고종 직위 즉 흥선대원군의 집권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60년 세도정치를 끝낸 후 흥선대원군의 초기 10년 집권기는 어쩌면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잘 알다시피 뼈속까지 전근대적 인물일 뿐이었다. 


젊은 고종과 민비가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것까진 좋았으나 역시 미래를 내다보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기에는 식견이 부족했고 주변엔 매관매직으로 제대로된 관리와 인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왕과 왕비 주변에 모여드는 건 권력의 단물을 빨아먹는 간신배들 밖엔 없었다.


그러나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면서 외국을 경험하게 된다.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면서 메이지유신으로 환골탈퇴한 일본을 보게 된다. 


어쩌면 이때가 마지막 터닝포인트였을 수도 있다.  

당시 일본에선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탈아입구론이 대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탈아입구론이란, 일본이 앞장서서 아시아의 영국이 되고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를 서유럽처럼 발전시키겠다는 말 그대로의 '대동아발전론'이다. 만약 이때 1854년 미국이 일본을 강제 개항시켰을 때 일본처럼 개국을 택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조선은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만다. 

결과론적이지만, 갑신정변이 설령 성공했다치더라도 조선의 개국과 발전이 일본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일단, 조선에겐 일본이 15~16세기 서양과 교류했던 경험 자체가 부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일본은 짓밟고 올라설 수 있는 조선이라는 디딤돌이 있었고 임진왜란을 통해 일찌감치 이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조선에겐 그런 존재 자체가 없었다.  

결국, 구한말 조선에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악의 상황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20세기 초, 조선은 선진국처럼 발전과 경쟁의 역사 대신 대립과 저항의 역사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선 지역이나 세대에 상관없이 심지어 남북한 모두 일치된 견해와 목소리로 가르치고 배운다. 물론, 개별 사안이나 사건 혹은 인물들에 관해선 자료 부족이나 해방 이후 시대적 정치적 이유들로 날조 왜곡된 경우는 예외로 한다.


문제는 해방 이후의 역사다. 

사람마다 세대마다 내용과 편차가 너무 커서 마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제각각이다. 

단일 민족이 그것도 현대사에 대해 이처럼 이질적이고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다.

나는 우리나라가 국토나 인구 및 경제력과 문화 수준에 비해 내부 분열이 심각한 원인 역시 해방 이후의 역사 인식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동아일보의 모스크바 3상 회의 오보 사건이었다.

1945년 12월16일 모스크바에서 미국, 러시아, 영국의 외상이 모인 회의로, 이 회의에서 미국은 신탁 후 독립을 주장한 반면 러시아는 즉각 독립을 주장했었는데 이 사실이 정식으로 공표되기 하루 전날 동아일보가 미국은 즉각 독립을 주장한 반면 러시아는 신탁 후 독립을 주장했다고 정반대로 보도를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단순한 착오였을까?'


조선인이 신탁통치를 반대할 것이라는 건 명약관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남북한 전역에서 동시에 신탁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바로 이틀 뒤, 소련이 들어와 있는 북한에선 찬탁으로 돌아선 반면 남한에선 반탁 시위가 확산되고 있었는데, 이때 친일파들이 모여 만든 한국민주당이 가장 활발하게 반탁 시위를 전개하면서 '찬탁=빨갱이, 반탁=애국자'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면서 친일파에서 반공친미파로 신분 세탁에 성공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부터 외교독립 운운하며 있지도 않는 나라의 자치권을 미국에 구걸했던 친미파 이승만이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선다. 

한반도에 공산주의 독립정부가 들어설 것을 우려해서 신탁을 주장했던 미국으로선 최악을 피할 수 있는 차선책이었고, 8.15 해방 직후 미국이 자국의 이득을 지켜줄 대리인으로 내세웠던 이승만은 철저하게 미국과의 약속을 수행한 것에 불과했다.  전범국인 일본이 독일처럼 분할되었어야함에도불구하고 미국이 태평양 전략으로 일본을 살리고 조선을 희생시킨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본토를 공격한 적국임에도 처음부터 일본편이었고 오늘날에도 이 정책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결국, 우리는 강대국이 진행하는 게임판의 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도 다른 말(일본)을 위해 내놓는 한낱 '쫄'에 불과했다. 


이준 열사가 죽음으로서 참가하고자 했던 헤이그만국평화회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외친 안중근 열사의 '코레아 우라!'...

끝까지 조선 독립군의 2차대전 참전를 반대했던 연합국들... 

상하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김구선생님의 입국조차 막았던 미군정...


이 모든 게 그저 역사의 불운이요 우연이었을까?

주사기 던지기처럼 다시 던지면 또다른 경우의 수가 나올 수 있을까?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일어날까?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

조선 스스로 변하지 않는 한, 상대는 바뀔지 몰라도 우리가 겪어야 하는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식민지배를 받았을 것이며, 분할되었을 것이고, 내전을 치러야했을 것이다. 


역사는 주사위 던지기가 아니라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유튜브에서 동영상 한 편을 봤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부가 직접 연주하고 부른 존레논의 <Imagine>이었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고, 의도를 알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뿐, 그저 안타까운 연민이었다. 

그리곤 뒤이어 예기치 못했던 깨달음과 마주쳤다.


'이준열사의 할복 기사 사진과 내용을 접한 세계인들이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나간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접한 세계인들은 어리둥절했겠구나!'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평화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타인의 시혜에 의한 행복 역시 그림의 떡일 뿐이다.

 



2010년 이후부터 각양 각색의 역사책과 강좌 및 관련 TV 프로그램이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현대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세대별로 다르게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 원인은 그동안 역사 교과서가 제대로된 역사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만 탓할 게 아니다. 



그저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앞으로 30년 60년이 흐른 뒤 내 자녀와 손주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세상이길 바라는지 그때 그들에게 어떤 조상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한번쯤은 꼭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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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범 지음 / 페이퍼로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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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국사다.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이어 인도와 중국 및 일본의 역사를 훑어본 후, 마침내 한국사에 이르렀다.

한국사는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대적 상황과 저자의 관점에 따라 같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다르게 설명되며 나 또한 나이 먹어 감에 따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2000년 대 초반에 나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우리 역사 책으로, 80~90년 대 좌파적 역사 사관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선 누락(?)되었던 발해를 통일신라와 같이 한반도의 역사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라는 표현 대신 '남북국시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발해에 대해선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를 쓰면서 처음으로 우리 역사로 인식되었단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 80년 대까지 우리나라 역사계에선 철저히 무시되었다가 2000년 대 초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로 발해를 완전한 한반도 역사로만 편입시키려는 주장이 펼쳐졌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발해사는 어느 한 나라의 역사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100% 고구려인이 아닌 혼혈이었으며 인구수로만 보면 말갈 등 북방 유목민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본 역사서 등에서도 확인되는 바,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분명히 밝히고 신라와 당에 대해선 끝까지 적대적이었다. 

저자의 지적처럼 앞으로 발해사에 대해선 러시아, 중국, 남북한의 더욱 활발한 공동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건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였다. 

소수림왕이 다지고 광개토대왕 때 드넓은 영토를 정복해서 장수왕 때는 국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어째서 갑자기(아무런 설명도 없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걸까? 

저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으로 장수왕의 평양 천도를 꼽고 있다.


"15년(427년)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중 <고구려본기>, 장수왕조 (p48)


잘 알다시피,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에서 기록된 역사서다. 그러니 고구려에 대해서 중립적일 수는 없지 않았을까. 김부식이 이렇게 짧게 사실만을 남겨놓은 건 실제로 이유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거나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라와 백제를 치기 위해서 15년(427년)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 


당시 중국 대륙은 588년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5호 16국 혼란기였다. 그러므로 장수왕은 당연히 우선 등 뒤를 안전하게 만든 후 대륙 진출을 노렸을 것이다.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 백제를 한강 이남으로 밀어냈지만 백제의 저항과 군사력이 만만찮았고 수, 당과의 연이은 전쟁으로 힘이 빠졌는데 이때 신라가 당나라와의 연합이라는 신의 한수를 꺼내들면서 고구려는 진퇴양난에 빠져 급격히 기울고 만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게 고구려의 국운이었을 뿐이다. 만약,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전혀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겠지만 그게 반드시 고구려의 삼국통일과 대륙 차지라는 영광의 역사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한반도와 대륙 사이에 자리한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대륙 세력과 맞부딪혀 먼저 무너졌다면 백제와 신라까지 오늘날엔 중국 대륙과 한 나라가 되어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장수왕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연개소문에 대해 살펴보자.

북방 오랑캐를 물리친 자랑스런 고구려 장수에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매국노(?)라는 혹평까지 고대사 인물들 중 연개소문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이도 드물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연개소문이 영양왕을 퇴위시키고 보장왕을 왕으로 추대한 가장 큰 이유로, 영양왕을 필두로 한 대신들이 당에 대해 사대주의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수 문제 시절 먼저 수나라를 공격했다가 수 양제 때 세 차례에 걸쳐 침략을 당하지만 모두 잘 막아냈다. 그 유명한 살수대첩과 안시성 싸움 등이 모두 선비족인 탁발 씨가 세운 수나라에 대한 승리였다. 고구려 정벌과 패배로 국력이 급격히 떨어진 수가 멸망한 뒤 들어선 당나라 역시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 당 태종과 고종 모두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도 연개소문이 잘 막아냈다. 하지만 신라 김춘수 등이 당과 연합하여 백제(660년 멸망)에 이어 고구려(668년 멸망)도 무너지고 만다. 연개소문은 666년 사망할 때까지 대륙의 공격을 꿋꿋히 버텼지만 그가 죽은 후 세 아들이 모두 나라를 나누어 당과 신라 등에 갖다바쳤다.

결과적으로,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연개소문 (가문)이 고구려를 팔아먹었다는 말이 아주 근거 없는 건 아니다. 



한편, 찬양 위주로만 배웠던 (통일)신라에 대해서도 빛과 그림자가 모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외세인 당을 끌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의 영토 2/3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는 게 '신라의 그림자'라면, 일찌감치 당의 야욕을 파악해 당과의 전쟁을 미리 준비해 물리쳤다는 건 '신라의 빛'이라 하겠다.

만약, 이때 신라의 기득권층이 19세기 말 조선처럼 스스로 자강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사치와 세도정치를 일삼으면서 민란마저 청과 일본 군에 의지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국사력과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부족했지만 지도층의 솔선수범으로 약점을 보완하여 백성들의 희생과 일치단결을 이뤄냈다.

나는 (경상도 출신이 절대 아니지만) 신라의 아니 우리민족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점이라고 생각한다. 

똘똘 뭉치는 것!

어렵고 불가능할수록, 똘똘 뭉쳤다. 

직면한 난관의 종류와 상황에 따라 협력의 규모가 가족이나 씨족, 마을, 국가 등으로 확대되어 언제나 우리끼리 똘똘 뭉쳤다. 

집안에선 싸우던 형제 자매도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선 하나로 뭉치듯 나라 안에선 티격거려도 밖에선 하나가 되는 게 바로 우리민족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신라가 운좋게 삼국을 통일했다는 말은 역사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했던 말이요 믿었던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중세인 고려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나는 '무기를 내려놓고 문화인이 되어 간 시기'라고 하겠다. 

모든 문명은 풍요 속에서 싹터 사치와 향략 속에서 발전한다

덕분에 고려인은 현대 기술로도 재현해내지 못한다는 비취빛 고려청자와 일독하는데 30년이나 걸린다는 팔만대장경 등 빼어난 문화유산을 남겼지만 무를 버리고 문을 숭상했기에 나약했다. 사람이 약하면 비굴해듯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거란족으로부터 외교 담판으로 서희가 강동 6주를 얻어낸 것과 강감찬 장군의 살수대첩 승리는 거친 야만의 시대가 저물어갈 때 마지막으로 타오른 불꽃이었다.   

저자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서희의 담판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그러나 나는 우리 민족의 기개가 이때 정점을 찍고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국력은 겉으로 들어나는 역사적 사실이 전부가 아니다. 행동은 과감했고 결과는 좋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호연지기로 가득차 부풀어오르는지 아니면 온힘을 다한 위기의 순간이 끝나고 '휴~'하고 한숨을 몰아쉬는 상황은 분명 다르다.


전자라면 계속 도전하면서 실패와 발전을 거듭해 성장해 나가지만, 후자라면 모든 일에 겁부터 집어먹고 머뭇거리면서 후퇴하게 된다. 


경제는 파탄났고 무신의 난을 불러왔으며, 이는 신분 질서의 파괴로 이어졌다.



고려는 결국 몽골 제국의 지배와 간섭기에 들어갔다. 물론, 강화도에서 항쟁하다가 강화를 하고 나왔기 때문에 조선의 인조처럼 아홉번 무릎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려야하는 '친조의 예'를 강요당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한 번 꺾인 기상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패배 의식에 갇혀 버렸다. 

범죄자들이 실제로는 모지리에 찌지리들이 많듯이 악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가 행하는 법이다. 짙은 패배감은 마음속 열등감으로 자라나 약한 자들에게 가혹한 행태로 뿜어져 나왔다.  


지배 계층은 단순히 넘쳐나는 풍요를 누리고 즐기는 사치에서 벗어나 다 쓰지도 못하고 다 먹지도 못할 곡식들을 창고에 쟁여놓았다.

쌓고, 쌓고, 또 쌓고....

탐욕의 시작이었다. 

마음이 빈곤하면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듯 백성들을 아무리 수탈하고 짜내도 문벌귀족들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은 그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공민왕의 개혁에 대한 반기임에는 분명하다. 몽골이 무너져 내정간섭도 없으니 신돈을 내세운 공민왕의 개혁이 성공한다면 고려는 다시 일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몽고 간섭기에 성장한 문벌귀족 등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너무나도 거샜다.  

하여, 나는 조선의 건국 자체에 대해선 찬성표를 던지고 싶다. 그러나 건국이념을 성리학에서 찾았다는 게 악수라면 악수였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으니 이념으로 시작한 조선은 결국 이념 논쟁에 빠져 침략을 당했고 또한 무너졌다. 

500년 동안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었지만 백성과 후손에겐 비극이었다. 


이 책이 출판된 2000년 대 초반부터 갑자기 문사철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어엿한 하나의 시장을 형성한 것 같다.

공자 및 소크라테스 등등 동서양의 고대 철학과 칸트와 니체 관련 책들과 강연들이 한동안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트로이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 등으로 강력했던 그리스 폴리스들이 소크라테스 등장 이후 이념과 철학 논쟁에 빠져 무너졌다는 걸 알기나 하고 열광하는 걸까?

혼란한 춘추전국 시대에 탄생한 백가쟁명은 평화로운 시기엔 하등 쓸모가 없건만 중앙집권화와 과거제도의 실시로 절대불변의 진리가 되어버렸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에 도전하기보다는 "공자 왈, 맹자 왈" 암기만 열심히 하고 있으니, 그 넓은 땅에 그 많은 인구에 그 발달한 상공업을 가졌던 나라치고는 그 뒤의 역사가 너무 비극적이지 않은가. 

좀 심하게 표현하면, 문사철의 인기는 인문사회계열 출신 386세대들의 지적허영에 찬 글쓰기와 토론문화를 하나의 상품과 산업으로 만든 것뿐이다.

무슨 새로운 발견이나 철학 혹은 이론이나 책임있는 주장이 아니다.

그 옛날 주희가 더 옛날 책들을 읽고 토를 달았듯, 그들도 똑같이 이미 쓰여진 책들을 읽고 해석할 뿐이다. 다만, 오늘날엔 그 대상이 동양에만 머물지 않고 서양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교육방송의 <위대한 수업> 시리즈는 반갑고도 놀라웠다.

과학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인문 분야에서도 기존 이론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독창적 사상이나 깊이있는 관찰과 분석적 사고를 통한 철학을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성리학으로 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율곡 이이를 따르는 서인과 퇴계 이황을 따르는 동인에서 출발해,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나누었다. 

왕을 퇴위시키는 것도 모자라 독살하고 서로 모함하여 떼죽음으로 내몰고, 그러다 전쟁 나면 도망가기 바빴다. 조선의 양반들은...  다 부질없는 탁상공론과 트집잡기에 사람 목숨만 날아갔던 헛된 입씨름들만 한평생 하다가 갔다. 

나는 지금까지도 조선의 당쟁과 사화가 헷갈린다.  열심히 기억할 일말의 가치조차 없지만...



정조라는 어질고 유능한 임금 한 사람만으론 기울어가는 국운을 되돌려 놓기에는 너무 멀리 그리고 오래 흘러왔다. 


청이 건륭제를 끝으로 19세기 내내 몰락한 것처럼 조선도 정조 대왕이 이른 나이에 죽자마자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글자 하나 모르는 강화도령을 임금으로 앉히질 않나... 두 살짜리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켜 달라고 무너져가는 청의 서태후와 리훙장에게 수십 만 개의 금은괴를 보낸 왕비가 있질 않나.... 5년 동안 관리에겐 봉록을 지급하지 못하고, 군대에게 13달치 밀린 봉급 중 그것도 기껏 한 달치만 지급하면서 모래와 돌을 섞질 않나... 나라 곳간은 텅텅 비었건만 금강산 1만1천 봉 한 개마다 쌀 한 섬과 베 한 필을 바쳤다 하니, 그런 나라가 아니 망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 힘들어서 더이상은 못 쓰겠다.

이 다음부터의 역사는 이미 흘러간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일어나 겪고 있는 현실인 것마냥 힘들고 괴롭다.   

어째서 우리나라 역사 특히 근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괴롭고 슬픈걸까? 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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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 - 18세기 산업혁명에서 20세기 민족분쟁까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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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알면 현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750년 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21세기 초까지 세계사의 큰 흐름을 집어준다. 

세계사임에도 마치 유럽 근현대사처럼 느껴지는 건, 그만큼 18~20세기가 아시아와 중동이 아닌 유럽의 세기였고 그때 구축된 질서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등 나라명 하나만 봐도 두 민족 이상이 결합되었다는 걸 알 수 있고, 결국 오늘날 분쟁이 일어나는 원인도 19세기부터 시작된 영토를 기본으로 한 국가 체제에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 발 앞서 국가 시스템을 구축한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민족과 지역에 개입했음은 물론이다.


어느 민족이 어느 민족을 침략했고 어느 나라가 영토를 잃었으며 또 넓혔는지를 따지는 건 역사 인식의 과정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결과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오늘날의 관점으로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는 것 역시 역사를 올바르게 대하는 자세가 아니며, 자연법칙과 같은 불변의 인과률을 역사 속에서 찾아 현대와 미래에 대입시켜 적용하려는 것도 위험하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는 평화롭지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뒷물결이 앞물결을 힘차게 밀어내며 강물이 흘러가듯, 크고 작은 물리적 충돌들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원동력이었다. 




모든 건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학창시절 벼락치기식 암기로 끝냈던 역사적 사건들의 발생 원인과 과정 및 영향 등을 쭉 훑고 나니, 역시 역사 공부는 암기가 아닌 이해라는 것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역사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흥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나로선 소중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저자의 감상이 배제된 건조한 문체가 익숙치 않고 불편했는데, 한 줄 한 줄 한 문단 한 문단 꼼꼼하게 읽고 나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런 걸 균형감각이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평소 역사 관련 TV프로들을 즐겨 보면서 유명한 이들이 쉽고 재밌게 설명해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는데, 이게 마치 설탕에 중독된 것처럼 나쁜 습관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자꾸만 다른 이들의 해석과 설명에 의지하게 되면, 스스로 비교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출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역사는 잘 몰라."

"나는 정치는 잘 모르는데..."

라는 말은 결코 겸손이 될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선택한 우리나라에서 대표를 제대로 뽑으려면 당연히 정치를 잘 알아야 한다. 정치란, 한 마디로 '지금 세상이 굴러가는 상황과 이치'라 할 수 있다. 과거를 알고 있으면 현재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니, 과거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되며, 더더욱 타인의 판단과 해석에 맡겨서도 안된다.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



나는 역사를 배우고 알고 싶어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상이 누구이며 어떤 삶의 과정을 살았는지를 안다면 현재의 내 모습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랑에 반드시 이해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이해하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 과거를 잘 알고 제대로 이해한다면 현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현재를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더 나은 오늘과 미래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인생과 같아서 항상 즉흥적이다.'라는 카보우르의 말은 틀렸거나 해석(번역)이 잘못됐다. 

역사는 때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 즉흥적으로 보일 뿐, 즉흥적인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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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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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야말로 가깝지만 먼 나라다.

우리나라처럼 일본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나 창구가 막혀 있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TV를 켜면 미국영화나 중국영화는 그냥 흘러나오건만 일부러 찾아보려해도 일본에 관한 프로는 어째서 찾아 볼 수가 없는건가. 

그 많고 많은 시사, 교양 프로에선 일본인과 그들의 문화나 역사 등에 대해서는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누락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진작 <어쩌다 어른>이나 <책읽어주는 나의 서재> 등에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던 내가 그 많고 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알게 되고 빠른 시일 내에 읽게 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   

한 국가나 민족의 운명 역시 불변의 법칙보다는 지정학적인 요소가, 피지배민의 행불행은 개인의 실력이나 노력보다는 지배층과 최고지도자의 정치적 선택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발전은 이와 같은 역학을 역전시키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이집트나 그리스가 아니라 로마인가?"

"산업혁명은 왜 유럽에서 일어났는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만 제국으로 성장한 이유는 뭘까?"

"찬란하고 유구한 문화유산을 가졌다는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되어야만 했을까?" 



지나온 과거에 대한 이런 의문들은 어쩌면 다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답을 찾았다한들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안다는 건 과거로부터 배우겠다는 것이고 그 목적은 보다 나은 미래를 희망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보다 나은 미래란 어떤 미래인가?

보다 나은 앞에 '내가 겪고 있는 지금'이라는 수식어가 은연 중에 붙는 건 아닐까? '나'라는 관점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역사 인식의 전제조건이건만 이를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나를 벗어나 나를 객체로써 바라봐야하는데 이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 다른 사람의 시선을 빌려 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건 한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우리나라의 역사만 보아선 안된다.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보다 타민족의 역사 속에 비친 우리나라의 모습이 진실에 더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인이지만 그동안 익숙했던 항일 반일의 정서가 아니라 최대한 객관적인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더불어 국내 자료보다는 대부분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논문 및 고문서들을 참고하고 있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관점이다. 



이 책은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시대를 평정하는 16세기 중반부터 시작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16세기 초반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진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단 세 가지였다. 황제의 영광(Glory), 가톨릭 포교(God), 금(Gold)이었다. 

그당시 아프리카와 브라질 등 신대륙에서는 크고 작은 왕국들이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앞선 무기를 갖춘 유럽인들은 이들을 분열과 이간질 시켜 결국 식민지배를 할 수 있었던 반면, 오다 노부나가로 인해 전국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던 일본으로선 내전을 끝내고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또한, 일본보다 더큰 먹잇감(?)이었던 명,청 제국 공략에 공을 들이고 있던 것도 일본으로선 행운이었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로 이른 생을 마친 후,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전면에 나선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히데요시는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무사가 되어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중국 대륙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지배하려는 거대한 포부를 가진 남자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를 일으켰지만 1살짜리 아들에게 후계를 잇게 하겠다는 너무나도 소박하고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조카의 가족 전부를 몰살시킨 '친족연속살인자'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살인자'라는 공식은 참 끈질기게도 잘 맞아떨어지는구나...' 



히데요시가 예상 밖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등장한 인물이 에도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쇼군이 된 그는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서유럽 세계와 교류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챙겼지만 빠르게 확산되는 가톨릭에 위기감을 느낀다.

현대인에게는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교리는 가난과 질병 및 탄압에 고통받던 근대 이전 대다수 사람들에겐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었던 것 같다. 

'쇼군에 복종하지 않고 나라밖 교황에게 복종한다는 가톨릭교도들을 그대로 놔둘 순 없었겠지...'

결국, 이에야스는 서양인들을 내쫓은 것도 모자라 일본인 가톨릭신자(기리기스탄)들까지도 필리핀 루손섬으로 이주시켜버린다. 뿐만 아니라 아예 해외로 나가지 못하다록 대형 선박의 제조마저 금지시키는데, 이건 콜럼버스보다 60여 년 앞선 1440년 대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해상 원정에 나섰던 명나라가 영락제 사후 선박 제조를 금지한 것과도 일치한다. 



태평양을 건너갈 수 있었던 대형 선박을 제조할 수 있었던 당시 일본의 선박제조술은 이렇게 사장되고 만다. 

내치를 위해 즉 지배층이 자신들의 지배를 영구히하기 위해 쇄국을 한 것. 바로 이것이 아시아의 비극이요, 식민지배라는 슬픈 역사를 갖게 된 민족과 나라의 공동된 선택이었다.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아도 등 따듯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 왜 굳이 힘들게 모험을 하겠는가?'

부모가 남겨줄 집 한 채 값만으로도 한평생 먹고 살 수 있다면 굳이 능력도 실력도 부족한 데 죽기 살기로 경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MZ세대의 심리 또한 이와 비슷하리라...    



반면, 유럽 특히 서유럽의 섬나라인 영국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국토뿐만 아니라 자원도 인구도 부족했기에 밖으로 나가 운명을 시험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설령, 그곳이 망망대해일지언정 앉아 죽으나 나가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여겼겠지. 물론, 대중을 호도하고 안심시키는 종교도 한몫을 했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하다. 

이데올로기는 철학이나 사상과는 다르다. 

철학이란 의심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를 잘못 알고 잘못 쓰고 있는 것 같다. 흔히 "저 사람은 철학이 있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저 사람은 남달리 믿는 바가 있다'는 식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과학 철학자든 사회 철학자든 진짜 전문가는 확신과 확답을 피한다. '왜?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정치인과 종교인 들은 늘 확신하고 확약한다.  대다수 하층 대중은 이를 곧이 곧대로 믿더라도, 의심하고 검증한 후 알리는 건 언제나 지식인의 몫이다.  



에도 시대의 일본이 비록 쇄국으로 접어들긴 했지만 네덜란드어 통역관과 난의학자 등 지식층들 사이에선 비록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이라는 단 하나의 좁은 창구였지만 서양의 의학서들과 기술서 들을 부지런히 수입해서 읽고 번역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도 부산 등지에 왜관이라는 무역관이 세워졌는데 우리는 일본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아이들도 불에 한 번 데고 물에 한 번 빠지면 조심하는 법인데 두 번의 전쟁으로도 배우지 못했으니 이때부터 조선과 일본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이 전국시대라는 혼란기에조차 서유럽 상인들 및 가톨릭 선교사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을 당시, 조선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유학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돈독히 하는데만 급급했다.

300명 노비를 직접 거느리면서 드넓은 땅을 경작하여 가산을 늘리는 것에 밝았고, 일일 노동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노비에게 곤장 300대를 치면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했으며, 본인 소유의 노비 수를 늘리기 위해 양천교혼(良賤交婚: 양민과 천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천민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조선 초 노비의 수를 대폭적으로 증가시킨 분... 이분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숭앙해 마지 않던 퇴계 이황 선생님이시다. 

반면, 일본의 번주(다이묘)들은 쌀 생산량이 줄어들자 번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들을 대량으로 환량시켜 자유롭게 결혼하여 소가족을 이루도록 하였다. 가족 규모로 농사를 짓도록 한 결과 대규모 노비에 의한 경작보다 생산성이 높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한 만큼 내몫이 늘어나니 힘들어도 흥이 났고 그전에는 자식을 낳아봤자 노비 밖에 더 안되니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았으며 심지어 낳은 자식조차 태어나자마자 엎어 질식사시키지 않아도 되니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인구도 늘어났다고 한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멸망했어야 옳다.

나는 27명의 조선 왕조 왕들 중, 최악의 왕으로 선조와 인조 그리고 고종을 뽑겠다. 선조의 수명이 길었던 것과 인조가 왕위에 올랐던 것이 조선의 첫번째 불운이라면,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오래도록 장수한 것이 마지막 불운이었다. 셋 다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이기적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인과 자식들조차 안중에 없었다. 

1867년 에도 막부는 자신들의 운명이 다한 줄을 알고는 메이지 덴노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형식으로 무혈충돌을 피했다.

'꽃이 질 때를 알아야 꽃다운 거고, 사람도 물러날 때를 알아야 사람다운 것이다'    



나는 요즘 조선 왕조를 다루는 TV프로나 책들이 지나치게 많을 뿐만 아니라 과찬하고 미화하는 역사 학자들을 마주하곤 할 때마다 '이제 대한민국이 발전의 정점에 섰는가?'하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는가를 보면 현재를 읽을 수 있다. 고려 이전 시대에 대한 사료 자체가 얼마 없다 보니 학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문헌학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조선시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무게 중심을 두고 싶은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안정된 일자리나 경제적 이득을 얻고 싶은 목적에서 시작한 찬양가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건 분명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이고 결국엔 사회가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혁명에 성공한 뒤 옆 나라는 2천 년 이상을 모셔온 공자를 '부관참시'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공자를 다시 모셔왔다.

'왜일까?'

혁명을 위해선 기존 질서와 사상을 버려야했지만 이젠 지배 구조와 질서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아름다운 미풍양속이기 이전에 실제로는 기득권 세력이 가장 좋아하고 선호하는 가치관이다. 




흔히들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 될 것이면 결국엔 그렇게 될 것이니 지금은 시기상조라는 말도 자주 한다.

심지어 자연과학계조차 관찰과 실험을 거쳐 사실로 증명이 된 것임에도 기존 이론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은가. 

뉴턴의 만유인력을 철저히 신봉하던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바로 받아들인 게 아니고, 빅뱅이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도 기존 과학계에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반성하고 기존의 이론을 수정하거나 버려서 새로운 이론들이 받아들여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이 죽으면서 후배 과학자들이 더이상 그들의 이론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이 신봉했던 이론이 폐기된 것일 뿐이다.   

아무래도 '나 죽거들랑....'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서히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지배층이 개혁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때쯤에는 이미 거세게 휘몰아치는 변화의 물꼬를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대부분이다. 

천천히 변하겠다는 건 결국엔 곪을 대로 곪은 다음 무너지겠다는 말과 같다. 

로마제국이 그러했고, 대청제국이 그러했다. 물론, 변화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기회를 놓쳤던 조선왕조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고 난 지금 지지했던 대선후보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불연듯 든다. 


이미 지나온 길로 되돌아가는 것보단 어디로 이어진 길인진 몰라도 안가본 길을 선택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후손들에게 최소한 내가 지금, '조선은 양반층이 지은 죄가 깊구나...' 하며 덧없는 한숨을 내쉬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 죽은 다음엔 너무 늦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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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터키사 -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터키 처음 읽는 세계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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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사는 이란의 페르시아와 자주 혼동하지만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한 축을 이뤘던 튀르크족의 역사다.

한자로는 돌궐(厥)이라 불렀으며, 중국 역사서에는 한무제가 북방의 흉노를 막기 위해 장건을 월지국에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발전할 무렵인 6세기경, 튀르크족은 우수한 철 생산 기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연(몽골 지방에 살던 고대의 유목 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 이때 튀르크족을 이끌던 사람은 부민(토문)이었다. (유연의 공주와 결혼을 하려 했으나 아나괴가 거절하자) 이 기회를 노려 부민은 스스로 '일릭-카간', 즉 '나라를 세운 왕'의 지위에 올랐다. 그뒤 중국(당시는 서위)과 손잡고 유연을 공격했다. 이들의 공격을 받은 유연은 멸망했고, 아나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국 <자치통감>이라는 역사책에서 이 일을 "돌궐의 토문이 유연을 습격해서 크게 격파하다. 유연의 아나괴(두병가한)가 자살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드디어 부민은 튀르크인의 나라가 탄생했음을 선언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인 552년의 일이다. 이때 부민이 세운 나라가 튀르크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로, 터키는 이해를 건국의 해로 기념하고 있다. -69쪽 




역사적으로 현대에 좀더 가깝게는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가 바로 이들 민족이 세운 제국들로 아나톨리아지방 뿐만 아니라 아랍과 북아프리카까지 다스렸다. 특히, 비잔틴제국과 셀주크 투르크 사이에 1077년 또다른 튀르크족이 룸 셀주크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고원 지대인 콘야로 수도를 옮기고 십자군을 막아내면서 명실상부 아나톨리아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현재 터키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룸 셀주크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으면서 늙어가는 비잔틴 제국을 위협했지만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진다. 중앙 초원에서 불어닥친 폭풍이 사그라든 뒤 오스만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나타나서 다시 튀르크족을 통합하여 오스만 튀르크를 세웠다. 이 오스만 제국의 4대 술탄인 메메드 2세에 의해 비잔틴 제국은 멸망하고 일찌기 그리스인이 세웠던 도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이 튀르크족의 손안에 들어온다. 

도시 이름도 이슬람의 도시라는 뜻인 '이스탄불'로 다시 한 번 바뀐다.


그리스정교회의 상징인 성소피아성당과 토프카프궁전 및 여섯 개의 미나레트가 돋보이는 블루모스크가 공존하는,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고 역동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200여 년이 지나면서 제국은 성장을 멈추고 정체되기 시작하는데, 그 첫걸음은 지혜와 용기로 제국을 이끌었던 술탄들의 무능과 향락 그리고 군대(예니체리)의 부패와 타락이었다. 

때마침 유럽은 길고 긴 암흑기를 지나고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 및 러시아와 독일 등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온도가 높아지는 물속에 있는 개구리처럼 변화하는 세상을 눈치채지 못한다. 물론, 몇 차례의 크고 작은 개혁 시도는 있었지만 그때마다 귀족과 예니체리 등 기득권층의 저항에 물러나고 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개혁의 주체인 술탄이 스스로 개혁의 대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만 제도를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치 두 차례의 커다란 외침을 받고도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는 왕위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선조와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을 보는 것만 같다.  이때부터 조선이 정조대왕이라는 뛰어난 왕이 뒤늦게 나타났지만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되돌리지 못하고 19세기 내내 내리막길을 걸었듯이, 오스만 제국도 솔로몬의 이름을 딴 슐레이만이라는 술탄 때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터트리지만, 이집트와 불가리아, 그리스 등이 차례로 제국에서 떨어져나가 독립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여러 제국 가운데 환자가 있다."
1851년 페테르부르크 궁전에서 영국 대사를 만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라고 비꼬았다.  세 대륙을 주름잡고 동지중해를 호수로 삼으면서 서유럽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유럽의 놀림감이 되었고, 심지어 작은 나라인 그리스와의 싸움에서도 쩔쩔매는 종이호랑이로 풍자되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던 데 비해 오스만 제국은 정체와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쪽



당시 유럽에 오스만이라는 환자가 있었다면,  아시아엔 청이라는 환자가 있었다. 

둘 다 엄청난 영토와 인구를 거느린 제국이었지만 넘쳐나는 부와 지속되는 평화에 안주해버린 결과였다.

프로이센(독일)이 유럽의 풍운아로 빠르게 성장 발전하면서 주변국에 위협을 가했다면 아시아에선 일본이었다.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인 영국 그리고 정통의 강대국인 프랑스는 그렇다치더라도 유럽 변방의 농업국가에 불과했던 러시아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군대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놀랍고 신기했다. 다음 번 세계사 여행(?)은 러시아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렵사리 실현된 의회민주제마저 경제성장에 불만을 품은 민중의 시위를 틈타 일어난 쿠데타와 술탄의 복귀로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다시 30여 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버리면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삼국동맹(독일, 폴란드-헝가리, 이탈리아)편에 서서 패전국이 되고 만다. 그나마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젊은 장교의 리더십으로 오스만 제국은 술탄과 이슬람주의라는 썩은 부위를 잘라내고 1923년 세속주의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터키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터키는 이슬람국가 중에서 가장 세속적이며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다. 하지만 쿠르드족 탄압과 중개무역에 뿌리내린낡은 경제구조로 1960년과 1971년 그리고 1980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여전히 제자리를 잡지 못한 모습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2인자들(독일, 러시아, 일본 등)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인류의 역사를 좀더 길고 멀리 본다면 더 큰 변곡점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9세기~20세기에 걸친 200여 년이라는 시간은 제국이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엔 서서히 내리막길을 내려간 시간에 불과했다.  


터키는 한국전쟁 때 연합국 편에 서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1만5천 명을 참전시켰던 나라라고 한다. 그런 터키가 현재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성장한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심정이 어떨까? 

'피를 나눈 형제국'이라는 인삿말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때 제국이었던 나라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부심으로 마음을 채우기 전에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역사의 순환 과정에서 최저점은 각 민족마다 제각각이지만 최정점만큼은 '이제 이만 하면 됐다'라는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순간이라는 거다. 


한 국가(왕조)의 탄생과 성장 및 멸망을 보통 300년으로 본다. 

우리나라는 1950년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했으므로 그뒤 100년은 재건과 성장의 시간이 될 테고 우린 그 시기를 잘 헤쳐오고 있다. 앞으로 100년 동안 국력을 더한층 응축시켜 발산시켜 나갈지, 아니면 거란의 요나 발해 및 티무르 제국처럼 100년 제국으로 끝나고 말지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 자체가 눈 내리는 광야에 절망 대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이듯, 우리도 먼훗날 백마타고 올 초인을 위해 희망의 씨를 뿌려야하지 않겠는가.



역사를 배운다는 건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과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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