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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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거라곤 사랑밖에 없는 남자에게서 그 사랑마저 빼앗아간 여자는 죽어 마땅하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문장이다. 

어디서 주워 읽었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모골이 송연해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배신과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이보다 더 자극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이제 남자의 복수는 피할 수 없는 임무가 되었고, 그 수단은 폭력일 것이며, 그의 모든 행위에는 정당성이 부여되리라. 왜 폭력이 동원되어야만 하는지, 어째서 선악의 분별보다 성별의 차이가 더 부각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은 설자리를 잃는다.

 

 

오늘날 문화 상품의 흥행여부는 이성적 판단이나 윤리적 규범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자극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녹터널 애니멀스>는 인간 대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파충류의 뇌'를 정확하게 명중시킨다. 만약 이 소설이 출판된다면 실패한 소설가 지망생이자 수잔의 전남편이었던 에드워드는 어쩌면 돈방석에 앉고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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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의 엄마이자 심장수술 전문의를 남편으로 둔 수잔에게 어느날 전남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녀의 전남편이었던 에드워드는 로스쿨을 다니다가 전업작가가 되려고 공부를 그만두었지만 결국 소설가가 되지 못한 채 보험 영업으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는 20여 년 만에 전처인 수잔에게 자신이 쓴  소설 원고를 보내온다. 소설의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 성공한 대학교수('토니')가 아내('로라')와 십대 딸('헬렌')을 데리고 여름 휴가를 떠났다가 고속도로에서 만난 3인조 강도에게 아내와 딸을 잃고 혼자 살아남아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진부한 내용이지만 이야기는 제법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읽기를 주저하던 수잔은 서서히 물 속으로 잠영해 들어가듯 책 속으로 빠져 든다. 전남편 에드워드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는 그녀를 과거 속으로 이끈다. 마치 바닷속처럼 나른함과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수잔이 처음에 에드워드의 책을 읽기로 동의했을 때 그 책이 그녀에게 이런 영향력을 발휘하리라는 걸 알았어야 했다. 지난 20년이란 시간이 하나도 흘러가지 않은 것처럼 에드워드가 부활하리란 점을 예측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나면서 이혼과 초기의 아놀드와 그녀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다른 질문들도 떠오를 것이란 점을 예견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안스런 흥분을 느낄 거라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을까? 그녀는 지금의 이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불안은 그 원인에 비해 터무니없이 심각하다. 그녀는 이 소설 속 토니의 이야기가 에드워드를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활시켰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또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니의 이야기 어딘가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게 뭔지 혹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집안일을 하는 동안 기억을 뒤져 그걸 찾아보려고 애썼다.  -292쪽

 

 

 

"이 퍼즐에서 빠진 조각을 찾아봐."

에드워드의 요청대로 그의 소설 속에서 빠진 걸 찾아보려던 수잔은 어느덧 자신의 인생에서 빠진 게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토니의 세계는 수잔의 세계와 닮았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폭력만 빼면. 그런데 그 폭력 때문에 둘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런 불운을 목격하도록 유도돼서 내가 얻는 게 뭘까? 수잔은 궁금했다. 이 소설은 토니의 인생과 내 인생 사이의 차이를 확대시키는 걸까, 아니면 우리 둘을 합치는 걸까? 이건 날 위협하는 걸까, 아니면 달래주는 걸까? 그런 질문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갔지만 잠시 독서를 중단했는데도 아무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333쪽

 

 

 

수잔은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소설을 읽게 만든 진짜 의도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에드워드는 소설속 인물인 토니를 내세워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아놀드')에게 가버린 수잔에게 복수하려는 걸까?

소설속 주인공 토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수잔이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아놀드와의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게 목적일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토니와 수잔>을 읽은 독자라면, 특히 이 작품을 쓴 오스틴 라이트가 무려 40여 년 간이나 대학에서 소설작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독자라면, 고개를 가로 저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즉 오스틴 라이트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토니와 동료 교수 프란체스카 후턴의 대화를 통해, 복수야말로 가장 저열하고 원시적인 방식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녹터널 애미널스17]

 

토니는 점심을 먹으며 프란체스카 후턴에게 말했다. "우리가 두 놈을 잡았어요. 내가 한 놈의 신원을 확인했고 경찰이 다른 놈을 죽였죠."

(....)

"당신은 놈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알기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거기엔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요. 당신은 놈이 당신을 그런 식으로 다치게 해놓고 그냥 빠져나갈 순 없다는 걸 알리고 싶은 거예요. 당신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놈이 내게 그런 짓을 해놓고 그냥 빠져나갈 순 없어요."

"이제야 솔직해지는군요."

그녀가 손에 얼굴을 기대자 금발 머리가 얼굴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생각을 대변해주고 있는 그녀의 눈이 진지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헬렌이 로라와 나에게 복수가 얼마나 원시적인 감정인지 설교하던 기억이 나요. 우린 복수와 정의를 아주 아슬아슬하게 구분했죠. 그때 나는 우리가 얼마나 문명인인가,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신은 문명인이에요. 문명인이 아닌 건 레이예요."

"그건 나에게 부담되는 말이에요." 토니가 말했다.

"당신이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247~250쪽 中-

 

 

 

결국 토니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준다. 에드워드 역시 수잔에게 자신이 받은 수모와 모멸감을 똑같이 되돌려준다. 이보다 더 공평하고 통쾌한 복수극은 없으리라.  

 

그런데 오스틴 라이트는?

그도 정말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치명적이고 세련된 복수극'으로만 읽고, 즐기고, 기억하길 바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작품이 단순히 치명적이고 세련된 복수극으로만 읽혀지지 않는다. 

오스틴 라이트는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구조를 통해,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학생들에게)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은 '쓰는 자(작가)'와 '읽는 자(독자)' 둘 다 존재해야 마침내 완성되지만, 작가와 독자는 같은 시공간 속에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철칙이 있다. 쉽게 말하면, 작가는 글쓰기 과정에서는 철저히 독자를 무시(?)해야 한다. 독자를 의식한 순간, 더 이상 내가 쓰지만 내 글이 아닌 (그들의) 글이 되어버릴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수잔 또한 에드워드처럼 자신도 글을 쓰고 싶어했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글쓰기 자체보다는 누군가에게 보여진다는 걸 스스로 의식함으로써 자신의 글을 자가검열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사실도 떠올린다.

 

 

 

 

 

 

 

글을 쓰는 대신, 그녀는 독자로써 남편 에드워드의 글들을 비평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순수하고 헌신적인 마음가짐으로 남편의 글을 대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에드워드가 말한다. 그러니까 말해봐. 내 책에 빠진 게 뭐지? 그녀는 대답한다. 그걸 몰라, 에드워드? 당신 눈엔 보이지 않아? 그 생각에 그녀는 잠시 옆길로 빠진다. 그녀의 삶에 빠진 건 뭘까? 그녀는 살아생전 다시 아놀드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보게 될지 궁금했다. 설사 그게 증오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아주 오랜 세월 그랬던 것처럼 습관의 힘이 그녀를 다시 잡아당기는 걸 느낀다. 지저분한 갈색 흙더미가 올라오는 겨울 잔디밭을 내다보면서, 아직도 에드워드를 용서하고 칭찬하고 비판하는 편지를 쓸 거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어떻게 아놀드를 좀 더 강하게 대할 수 있는지, 좀 더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수잔 모로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481쪽

 

 

 

작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오스틴 라이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말해봐. 당신 인생에서 빠진 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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