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이타주의자 - 세상을 바꾸는 건 열정이 아닌 냉정이다
윌리엄 맥어스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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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맥어스킬은 옥스퍼드대 철학과 부교수이자 비영리 단체 '기빙왓위캔(Giving What We Can)', '8만시간'의 공동 설립자다. 먼저 이렇게 저자의 이력부터 살펴보는 건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을 땐 자칫 분별력을 잃고 저자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좀비' 독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딱히 성공 확률이 높은 것 같지도 않지만...  

 

윌리엄 맥어스킬은 철학과 교수답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기부 단체들을 소개 평가할 뿐만 아니라 기부자들의 심리까지 파헤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재해구호에 기부금이 몰리는 쏠림현상의 폐해와 공정무역상품 구매가 오히려 득(得)보다는 실(失)이 더 많다는 점이었다.

 

특히, 윤리적 소비를 한 경우 선행을 덜 실천하는 방식으로 '도덕적 허가' 효과가 발생한다는 지적은 날카로웠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져서 무례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기부라는 것 자체가 가장 저렴하게(?) '심리적 면죄부'를 구매하는 방식이라고 여겨왔던 평소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직업적으로, 그 만큼은 열정이 이끄는 삶을 살다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잡스의 배신(?) 또한 충격적이었다.

 

 

이상의 객관적 증거들로 볼 때 열정에 맞는 직업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거라 넘겨짚고 진로를 선택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일 자체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면 열정은 자연히 뒤따라온다.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였다. 잡스는 젊었을 때 선불교에 열성적이었다. 인도를 여행했고 LSD(마약성 환각제)를 자주 복용했으며 삭발을 한 채 법복을 입고 다니는가 하면 승려가 되려고 일본행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잡스가 기술 분야에 발을 들인 건 열정 때문이 아니었다.

올원팜 All-One Farm이라는 공동체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기술에 밝은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의 사업을 부업으로 도운 게 계기가 됐다. 애플컴퓨터조차 우연의 산물이었다. 잡스와 워즈니악은 도락가들에게 서킷 보드를 판매하다 어느 컴퓨터 상점 주인이 완전 조립된 컴퓨터를 사겠다고 하자 돈을 벌려고 그 일에 뛰어들었다. 애플사와 컴퓨터 기술에 대한 잡스의 열정이 불타오른 것도 사업이 관심을 끌고 성공을 거둔 뒤부터다. - 211쪽

 

 

 

스탠포드대 졸업식장에서 열정이 이끄는 삶을 살라! 고 역설했던 스티브 잡스...

하긴, 어디 스티브 잡스뿐이랴.

수많은 정치인들, 성공한 CEO들과 종교 지도자들 역시 하나같이 열정을 강조하고 열정에 호소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은 열정이 아닌, 냉정과 이성에 따라 살면서 말이다.

 

 

 

자, 이제 본론이자 결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여러 사업에 관여하는 대형화된 비영리단체들(예: 월드비전, 유니세프 등등) 보다는 비용효율성과 투명성이 높은 사업에 집중하는 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낫고, 재해구호보다는 개발도상국의 보건위생 향상에 애쓰는 단체를 선택해서 지속적으로 기부하는 편이 세상을 좀더 이롭게 바꾸는데 기여하는 최선의 방법을 제시해준다.  

 

 

따라서 자원봉사에 지원하거나 직업을 선택하거나 윤리적인 소비를 실천할 때는 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들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을 얼마나 개선시킬 수 있을까?

이는 남을 돕는 일에 한정된 시간과 돈을 분배해야 할 때 고려해야 할 최우선 사항들이다. 이를 염두에 두었다면 이제는 가장 효율적인 선행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65쪽

 

 

 

만약 당신이 굶주린 아프리카 어린이가 나오는 광고만 보면 지체없이  ARS 번호를 누르는 유형이거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기부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는 편이라면 혹은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특히, 열정이 이끄는 삶이 전부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는 유형이라면 더더욱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삶을 이루는 건 폭죽과 같은 한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파도처럼 쉼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일상(습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더이상 열정에 휘둘릴만큼 젊지도 어리석지도 않지만 내가 하는 작은 선행들이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되는 건 아닌지 늘 궁금했고 불안했는데 이 한 권의 책이 소중한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물론, 저자가 제시해준 방법들이 정말 최선의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 by Bertrand Russ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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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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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부터 쿡방 먹방 들이 이렇게 많아진 거지?'

어쩌다 TV 앞에 앉으면 뉴스를 제외하고는 음식과 연관이 없는 프로그램은 손에 꼽을 정도다. 

채널마다 음식점 소개 혹은 요리 관련 프로가 방영되고, 심지어 홈쇼핑에서도 여차하면 먹거리들을 판매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미식의 시대를 너머 탐식 심지어 폭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만 같다.  


'저 많은 프로그램들이 정말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걸까?'

'저렇게 다양하고 고급진 음식들을 직접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건강식은커녕 끼니조차 제때 챙겨먹기 어려운 게 대다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지 않을까?'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데에는 먹방만한 게 없다는 것일까?'

'음식 방송이야말로  방송국 입장에선 저비용으로 손쉽게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이란 말일까?' 

 

나도 모르게 넋놓고 TV 화면을 바라보다가 순간 수치스러워졌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고민과 질문들을 모두 뛰어너머 그저 '먹고 산다'는 것, 생명체라면 벗어날 수 없는 그 고된 숙명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밀려왔다.


'식(食)'과 '생(生)'

'먹고 산다'는 이 한마디만큼 단순 명료하게 인간을 정의내릴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모두 '먹는 인간'일 뿐이다.

 


 

1949년에 마닐라에서 열린 전쟁범죄 재판에 나가 증언하기도 한 농민 칼메리노 마햐야오가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았다. 1946년부터 1947년 초까지 이 마을과 주변에서만 서른여덟 명이 잔류 일본병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먹혔다. 머리 부분 같은 잔해 혹은 먹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증언으로 사실은 명백해졌다. 하지만 일본 측은 단 한 번도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67쪽


1993년도 소말리아 부흥과 인도적 문제 해결을 위한 원조 금액이 1억 6600만 달러인데, 그에 따르는 유엔의 군사 활동에 15억 달러가 넘게 든다고 한다. 식량 1달러당 군사비가 10달러. 이상하다.  겉보기에도 그렇다. 유엔 활동단에 참가한 각 군의 장갑차나 헬리콥터의 소음이 모가디슈를 내리누르고, 주민들은 굶주린 배를 안고 웅크린 채로 있다. - 202쪽


1993년에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외국 통신사나 일본의 잡지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알았다.

함대의 훈련 기지에서 신병 수십 명이 영양실조로 입원하고 그중 네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그 원인으로 함대의 재정 악화, 식량의 부정 유출 가능성을 암시하는 보도가 있었다. -247쪽


체르노빌에서 '먹는다'는 것은 여기까지 다다른 끝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행위다. 우크라이나는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를 맞고 있고, 월간 인플레이션율은 50퍼센트를 넘었다. 먹는다는 것은 오염 여부를 따지기 전의 절박한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면 눈앞의 풍경이 애절하고도 비장하게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 길에서 살짝 측정기를 보았다. (한 시간당) 1.0마이크로시벨트가 나왔다, 도쿄의 열 배가 넘는다. -293쪽



 

『먹는 인간』은 기자인 저자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세계 각 지역의 음식 문화(?)를 취재하고 작성한 기사문들을 모은 책이다. 다만, 여타의 현지 음식 취재와는 달리 이 책의 시선은 먹는 '즐거움'이 아니라 먹는 '괴로움'에 모아져 있다.


저자의 카메라에는 사탕수수나 야생동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의 인육을 먹었던 일본 병사들과 식량원조 지원을 위해 진행된 군사 행동에 식량원조보다 열 배나 더 되는 돈을 쓰는 유엔평화유지군 및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버섯을 캐먹고 물고기를 잡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체르노빌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는 부자들이 먹고 남긴 음식들을 사먹는 빈민들이 존재하며, 러시아에서는 경제개혁 실패와 권력층의 부패로 영양실조에 걸린 병사들과 구걸하는 첼로 소녀를 만날 수 있고, 태국에서는 애완동물 사료공장에서 자신이 만든 통조림 값보다 조금 더 많은 급료를 받으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소녀도 있다.



 

이건 저자가 취재를 하던 당시의 모습일 뿐이라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 년이나 지난 일일 뿐이라고... 오늘날 세상은 훨씬 나아졌을 거라고... 항변해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해마다 30%의 음식(13억톤, 약1조달러)이 버려지고 있으며, 유엔의 <2017 세계 식량안보 및 영양 상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 기아인구는 전체인구의 약 11%인 8억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 속에 소개된  전 세계 각 지역의 에피소드들이 '빈곤과 기아'라는 단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는 건 아니지만, 인간이란 결국 먹고 사는 존재ㅡ살고 먹는 존재가 아니라ㅡ라는 부인할 수 없는 본질을 보여준다.  그래서 정확한 통계 수치나 기아 난민을 찍은 자료 화면들보다 훨씬 더 실체적으로 단 한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바로,

굶주림은 굶주리는 사람이나 배부른 사람 모두를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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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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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는 한참되었지만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죄책감까지는 아니어도 해야할 중요한 일을 하지 않은 기분이랄까.

 

일단, 저자 유시민은 내가 한때 열렬히 좋아했었고 또다른 어느 한때엔 죽도록 싫어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에 대한 미움조차 '팬심'의 일부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2011년도에 나왔고 2017년인 올해초 개정판이 나왔다. 드문 일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개정판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촛불집회'로 대변되는 정치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무관치 않으리라.


그동안 나는 유권자로서 어떤 후보를 찍어야 하고 어떤 정부가 올바른 정부일까? 에 대한 고민은 했었지만, 국가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국가란 당연히 '실재'하는 것으로, 국가가 아닌 혹은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두려움 때문에 애써 외면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두려움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인의 피 속에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으니까...


국가의 탄생은 바로 이와같은 대중의 혼란과 공포로부터 기원했다. 

 

'자연상태'란 곧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질서도 법도 선악의 판단기준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국가가 출현하기 전 인간의 삶이 실제로 그러했는지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국가 출현 이전 인간의 삶은 홉스가 묘사한 '자연상태'와 비슷했을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생활의 단위를 중심에 두고 보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진화생물학자들은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20만 년 동안 혈연으로 맺어진 작은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다른 작은 공동체와 적대적 경쟁을 벌였다고 말한다. 사자와 늑대, 하이에나, 침팬지 같은 포유동물의 일반적 생활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다른 동물과 달리 높은 인지능력과 학습능력, 소통능력을 발현함으로써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었다. 그게 바로 국가였다. 불안하고 고독하고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두가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공동의 권력을 세운 것이다. -30쪽


 

 

홉스는 국가의 탄생을 <사회 계약설>의 토대 위에서 찾았다. 물론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전제군주정의 시대에 살았던 홉스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핵심을 꿰뚫어봤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그후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 자유주의 국가론를 불러왔고, 19세기 중반엔 마르크스 유물론에 입각한 전체주의 국가론이 대두한다.

 

 

로크가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면서 국가와 국민은 천부적으로 맺어진 고정불변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면, 루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와 정부를 분리하고 정부가 계약을 위반했다면 국민은 그 정부를 무너뜨릴 권리('계약을 해지할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로크와 루소가 다진 자유주의 국가론의 토대 위에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최고의 선(善)으로 규정하고 이를 해칠 수 있는 모든 국가 권력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 국가론은 당시 신생 국가였던 미국의 헌법 제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세워진 대한민국 또한 이와같은 미국의 법치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주의 국가론과 자유주의 국가론이 국가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고 그 위에서 국가의 역할과 목적에 대해 논했다면, 유물주의 국가론은 국가란 계급 투쟁의 산물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국가가 사라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이론에 기초하여 일어난 공산주의혁명은 마땅히 국가주의를 물리쳐야만 한다. 하지만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은 오히려 국민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도구로써 국가 중심주의를 더더욱 강화하였다. 바로 전체주의 국가론이다. 


 
마르크스는 '빅 브라더'나 철학자, 가장 지혜로운 자 또는 어떤 선택된 계급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였다. 계급적 적대관계가 없고, 삶의 주체로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개인들이 서로 상생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세상, 이보다 더 멋진 사회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유럽인의 삶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문화적 토대를 존중해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을 의미한다. 이런 사회는 더 이상 운동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체일 뿐, 더는 '투쟁하는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다. 내부에 적대적 계급관계나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사회에는 운동과 변화의 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역사가 종결됨으로써 결국 역사 그 자체가 종결된다.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역사 그 자체를 종결하는 마지막 혁명이 되는 것이다. -90~91쪽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은 1945년에 출간되었다. <동물동장>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 예브게니 쟈마찐의 소설 <우리들>은 1921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1년에 나왔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혁명은 1949년에 완성되었다.

나는 늘 궁금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세계를 그린 책들이 이미 여러 권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19세기까지 무려 수백 년간 세계 문명의 중심 국가였고 수천 년 간 종교 대신 철학을 신봉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라는 허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우리나라 일부 386세대는 마오쩌둥 사후 바로 역사의 오점으로 지적된 중국 대륙의 문화혁명을 찬양하고 공산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을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나의 질문들에 유시민은 이렇게 답한다. 

 
현실적 위력은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생명력은 다 타버린 화로 밑바닥의 불씨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진화의 시간이 아닌 역사의 시간에 그것이 큰 불길로 다시 살아날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좌절한 인류의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에 대한 꿈은 언제든 사람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다. -100쪽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상상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만의 독특한 특질이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이런 특질들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믿음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특징도 함께 발달시켰다. 그래서 현대인은 늘 변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국가 권력 아래 순종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를 향한 의지 못지 않게 강렬하다. 어쩌면 불안한 자유보다는 안정적인 독재를 더욱 선호하도록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원래 국가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으며 평화와 안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법을 만들어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고, 때론 폭력을 동원해서 강자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국가 권력이 끝없이 확대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탄생했으며, 국가의 정의와 목적을 찾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은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갖춘 나라이다. 이 제도들을 제대로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지를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뽑아놓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좋지 않은 제도라고 불평할 수 없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악을 저지른다고 해도 위축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언제든,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 이 가능성을 말살하면 독재정부가 된다. 압도적인 민심의 압력이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2016년12월9일, 우리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재확인했다. -118쪽

 

한때 우리 사회는 진보정당과 종북세력을 구분하지 못했던 무지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옹호하는 소수 운동권 세력이 국회에 진출했다가 물러나는 해프닝이 벌어졌는가 하면, 반정부 발언과 보수 언론을 일갈하는 일부 지식인들을 향해서 '혹시 빨갱이 아닐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유시민 역시 그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종종 너무 급진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들리거나 남성중심주의적 사고로 오해받을 만한 발언들을 했던 그가 참으로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이를 또다른 각도에서 보면, 누군가의 자유로운 발언으로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와 역할 또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국가론과 목적론적 국가론은 결합할 수 있으며, 그 결합을 통해 각자의 결점을 제거하고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다. 나는 진보정치세력에게 필요한 국가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국가에 대한 다섯 번째 질문이다. 내가 찾은 답은 이러하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이다. -225쪽


 

이 책은, 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서들을 탐독하고 고민한 결과이다. 
국가의 탄생과 발전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들을 밝힌다. 

 

그저 앎(知)이라는 지적인 만족에만 머물지 않고 앎을 실천(行)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본보기와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일독을 권한다. 만약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만족한다면 읽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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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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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람을 세 번 미치게 한다. 

한 번은 제목에, 다른 한 번은 내용에,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그 파급력에...

아마 나뿐만은 아니리라.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읽을 수 '없는' 이 책을, '읽어버린' 사람이라면, 이미 '미쳤'거나 곧 '미쳐'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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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의 싯구에서 인용했다는 제목을 보고는 종교서적인 줄로만 알았다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보고는 책의 혁명이나 혁명에 관한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종교 서적도 혁명에 관한 이론서도 아니었고, 서평집은 더더욱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은 '혁명서'다.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일, 바로 혁명을 선동하고 촉구하는 책이다.

 

 

 

 

 

16세기초 루터는 성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까지 절대진리라고 믿어왔던 준거들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성직자들이 주장한 것들은 성서에는 적혀 있지 않거나 다르게 적혀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이나 선지자들처럼 침묵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직자를 통해 전해듣기만 했던 성서를 직접 읽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중세는 무너지고 문예부흥을 거쳐 인류 역사는 근대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다.  


사실, 인류의 혁명은 개인의 책읽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이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처럼 뻔한 주장을 반복함에도불구하고 전혀 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러가지로 이야기해왔습니다만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정당하게도 어딘가에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검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독서의 묘미'가 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知)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정보로서 읽는다면 괜찮겠지만, 그것이 과연 '읽는다'는 이름을 붙일 만한 행위일까요. 그렇게 정보로 환원되는 것밖에 상대하지 않으니 당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42~44쪽

 

 

TV 방송 보듯 그냥 습관적으로 봤을 뿐(watch),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거나 내면의 불편한 감정들을 억누르면서 진짜 읽었다(read)고 할 수 있는 책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책들 중, 반은 읽으나 마나 한 책들이었고, 그 반 중 반은 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책들이었으며, 나머지 반 중 반만 진짜 읽은 책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이마저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을, 바로 읽을 수 '없는' 이 책을, 읽어버렸으므로.


'책을 읽는다'는 건,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책들은 무의식적으로 걸러내고 회피하게 된다. 소위 '취향적 독서'란, 내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착한(?) 책들만 보는 걸 말한다. 이런 책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엔 안성맞춤이겠지만 읽으나 마나하거나 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진통제와 같아서 일시적으로 통증을 잊게 해주지만 치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병을 악화시킨다.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식견의 끄트머리에 섰을 때, 인간은 두려움에 몸부림친다.  

소멸을 두려워하고 소멸과 동시에 모든 건 끝이라는 편협한 개인적 사고야말로 우리를 이기주의자로 만들고 종말론자로 만들며, 종말론은 전쟁조차 불사하게 만든다.  


이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훨씬 거대하고 유구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내 삶의 의미를 찾지 마라.

내 삶속에 남과 다른 특별한 의미 따위는 없다.

누구에게나 삶, 그 자체가 바로 의미다. 

 

 

 

 

좋은 약은 입에 쓰듯 좋은 책도 쓰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위안을 주는 책이 아니라 이처럼 나를 뒤흔드는 책이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매우 취약한 상태여서 달콤한 목소리로 구원과 행복을 약속하며 다가오는 손길이 있다면, 주저않고 맞잡을 것이므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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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와디의 아이들 - 성장과 발전의 인간적 대가에 대하여
캐서린 부 지음, 강수정 옮김 / 반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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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이틀에 걸쳐 읽고 다시 닷새가 흘렀건만...

읽혀지기를 기다리는 책들은 한가득 쌓여있건만...

새로운 책을 읽을 엄두가 도무지 나질 않는다.


'예상외로 좋았던 책'이라는 리뷰 문장 덕분(?)에 어느 정도 '예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상'마저 훨씬 뛰어넘을 만큼 좋았던 책이다. 


끝까지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이야기는 극적이고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감정이 절제된 문장들은 투명한 바람처럼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캐서린 부는 인도 뭄바이의 안나와디라는 빈민촌에서 2007년11월부터 2011년 3월까지 머물면서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기록한다. 그녀는 관찰대상에 대한 자기 연민과 기만에 빠지지 않기위해 노력하면서 최대한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했고, 완벽하게 성공했다.



 

#-1


북부 농촌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무슬림이자 여성인 아샤는 약자가 좀더 약한 약자를 착취하는게 세상의 질서임을 일찌감치 파악한 후, 부패한 민주주의에서 살아남는 길을 택한다.



아샤는 자녀들에게 말했다. "높은 사람들은 우리가 가난하니까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아샤는 많은 걸 이해했다. 그녀는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허상의 게임, 가난과 질병, 문맹과 아동 노동 같은 인도의 해묵은 문제들을 공격적으로 처리하는 그 게임의 참가자였다. (...)

서구와 인도의 일부 엘리트들은 부패라는 말을 순수하게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했다. 그건 현대화와 세계화를 향한 인도의 야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부패로 아주 많은 기회가 약탈되는 나라에서 부패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몇 안 되는 순수한 기회였다. -67쪽


#-2


열한 살이 넘은 남자 아이들은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고아원에서 쫓겨났지만, 수닐은 자신을 쫓아낸 수녀를 원망하기보다는 영어로 100까지 셀 수 있는 것과 세계 지도에서 인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다른 소년들은 이 옥상에 올라와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작으냐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수닐은 위에서 보면 왠지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마음껏 쳐다볼 수 있는데, 지상에서는 그게 가능하지 않았다. 지상에서 그렇게 빤히 쳐다봤다간 시선을 들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296쪽


#-3


미나는 툭하면 남자 가족들에게 맞았고 지참금을 최대한 많이 받기위해 수시로 선을 봤지만 그 무엇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비극은 여성이라는 선천적인 조건과 가난이라는 후천적인 조건이 만나면 사람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절망할 수 있는지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여자들이 관습을 거부하며 열정적으로 산다는 그 새로운 인도에 갈 수 있는 건지, 미나는 알 길이 없었다. 대학을 나온 만주라면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만주 말고는 대학 나온 여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히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미린다 광고를 보면서 미나는 이따금 자신이 껍데기뿐인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276쪽


#-4


스물살 청년인 압둘은 넝마주이들로부터 폐품를 사들여 중간상에게 넘기는 일을 한다. 그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하지만 이웃 여자의 어처구니 없는 분노로 자신의 노동과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물과 얼음은 성분이 같았다. 압둘은 사람도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압둘 자신도 경찰과 특수 행정관, 칼루의 사인을 조작한 시체 안치소의 의사처럼 냉소적이거나 부패한 사람들과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재활용품을 분류하듯 실질적인 성분으로만 인류을 분류한다면 거대한 하나의 더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얼음은 원래의 성분인 물과 다르며, 압둘이 보기엔 물보다 나았다.


압둘도 자신이 이루어진 성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뭄바이의 더러운 물 속에서 얼음이 되고 싶었다. 이상을 갖고 싶었다. 이기적인 이유에서 발로한 것이겠지만 그가 바라는 가장 큰 이상은 정의 실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323쪽


신이 주사위를 던질 때, 그저 운이 조금 나빴을 뿐 특별히 악하지도 특별히 선하지도 않은 사람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에 눈물 흘리는 건 타인의 삶을 한낱 구경거리로 삼는 일밖에는 되지 않으리라.  아픈 환자에게는 함께 울어줄 정 많은 이웃보다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의사가 더 많은 도움이 되는 법이다. 


 

캐서린 부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는 빈곤을 특수한 지역과 계층에 국한된 일시적인 현상이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빈곤을 바라보는 시야를 이 세계를 이루고 움직이는 요인과 인간 본성의 내면으로까지 깊숙히 확대시킨다.

 


 

미국과 영국의 굵직한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금이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었다. 싱가포르와 상하이가 번영하는 동안 뭄바이가 누린 이윤은 그에 못 미쳤다. 이곳에도 젊고 저렴하면서 숙련된 노동자들이 넘쳐났지만 인도의 금융 수도인 이 도시는 슬러바이라고 불릴 만큼 빈민촌이 많다는 사실에서 기회비용이 발생했다.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뭄바이 광역 생활권 주민 가운데 절반 이상이 임시 주택에 살았다. 뭄바이 공항을 이용하는 글로벌 기업의 임원 중에는 빈민촌을 혐오스럽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풍경을 제 기능을 수행하며 적절히 관리되는 도시의 증거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86쪽

 

무력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똑같이 무력한 다른 개인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가끔은 서로를 무너뜨리려고 안간힘을 썼고, 가끔은 그 과정에서 파티마처럼 스스로 무너졌다. 아샤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로채서 팔자를 고쳤다.

뭄바이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다른 곳에도 만연했다. 전 세계로 무대를 확대한 시장 자본주의 시대에도 희망과 불만은 협소한 지역안에서 옹색하게 이해됐고, 공통된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연대하지 않았다. 일시적이고 알량한 이익 앞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리고 하류 도시의 이런 투쟁은 전반적인 사회구조에 희미한 파장을 일으키다 잦아들었다. 투쟁은 부자 동네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어쩌다 소동을 일으킬 뿐, 그곳에 균열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정치인들은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무시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불평등한 도시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그럭저럭 이어갔다. -348~349쪽



 

이 책은,

인도 사회의 부패와 이기적인 개개인을 탓하기에 앞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놀랍게도,

슬픈 이야기지만 이상하게 희망적이다. 


압둘처럼 나를 이루는 성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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