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디의 아이들 - 성장과 발전의 인간적 대가에 대하여
캐서린 부 지음, 강수정 옮김 / 반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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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이틀에 걸쳐 읽고 다시 닷새가 흘렀건만...

읽혀지기를 기다리는 책들은 한가득 쌓여있건만...

새로운 책을 읽을 엄두가 도무지 나질 않는다.


'예상외로 좋았던 책'이라는 리뷰 문장 덕분(?)에 어느 정도 '예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상'마저 훨씬 뛰어넘을 만큼 좋았던 책이다. 


끝까지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이야기는 극적이고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감정이 절제된 문장들은 투명한 바람처럼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캐서린 부는 인도 뭄바이의 안나와디라는 빈민촌에서 2007년11월부터 2011년 3월까지 머물면서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기록한다. 그녀는 관찰대상에 대한 자기 연민과 기만에 빠지지 않기위해 노력하면서 최대한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했고, 완벽하게 성공했다.



 

#-1


북부 농촌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무슬림이자 여성인 아샤는 약자가 좀더 약한 약자를 착취하는게 세상의 질서임을 일찌감치 파악한 후, 부패한 민주주의에서 살아남는 길을 택한다.



아샤는 자녀들에게 말했다. "높은 사람들은 우리가 가난하니까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아샤는 많은 걸 이해했다. 그녀는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허상의 게임, 가난과 질병, 문맹과 아동 노동 같은 인도의 해묵은 문제들을 공격적으로 처리하는 그 게임의 참가자였다. (...)

서구와 인도의 일부 엘리트들은 부패라는 말을 순수하게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했다. 그건 현대화와 세계화를 향한 인도의 야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부패로 아주 많은 기회가 약탈되는 나라에서 부패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몇 안 되는 순수한 기회였다. -67쪽


#-2


열한 살이 넘은 남자 아이들은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고아원에서 쫓겨났지만, 수닐은 자신을 쫓아낸 수녀를 원망하기보다는 영어로 100까지 셀 수 있는 것과 세계 지도에서 인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다른 소년들은 이 옥상에 올라와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작으냐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수닐은 위에서 보면 왠지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마음껏 쳐다볼 수 있는데, 지상에서는 그게 가능하지 않았다. 지상에서 그렇게 빤히 쳐다봤다간 시선을 들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296쪽


#-3


미나는 툭하면 남자 가족들에게 맞았고 지참금을 최대한 많이 받기위해 수시로 선을 봤지만 그 무엇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비극은 여성이라는 선천적인 조건과 가난이라는 후천적인 조건이 만나면 사람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절망할 수 있는지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여자들이 관습을 거부하며 열정적으로 산다는 그 새로운 인도에 갈 수 있는 건지, 미나는 알 길이 없었다. 대학을 나온 만주라면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만주 말고는 대학 나온 여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히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미린다 광고를 보면서 미나는 이따금 자신이 껍데기뿐인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276쪽


#-4


스물살 청년인 압둘은 넝마주이들로부터 폐품를 사들여 중간상에게 넘기는 일을 한다. 그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하지만 이웃 여자의 어처구니 없는 분노로 자신의 노동과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물과 얼음은 성분이 같았다. 압둘은 사람도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압둘 자신도 경찰과 특수 행정관, 칼루의 사인을 조작한 시체 안치소의 의사처럼 냉소적이거나 부패한 사람들과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재활용품을 분류하듯 실질적인 성분으로만 인류을 분류한다면 거대한 하나의 더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얼음은 원래의 성분인 물과 다르며, 압둘이 보기엔 물보다 나았다.


압둘도 자신이 이루어진 성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뭄바이의 더러운 물 속에서 얼음이 되고 싶었다. 이상을 갖고 싶었다. 이기적인 이유에서 발로한 것이겠지만 그가 바라는 가장 큰 이상은 정의 실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323쪽


신이 주사위를 던질 때, 그저 운이 조금 나빴을 뿐 특별히 악하지도 특별히 선하지도 않은 사람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에 눈물 흘리는 건 타인의 삶을 한낱 구경거리로 삼는 일밖에는 되지 않으리라.  아픈 환자에게는 함께 울어줄 정 많은 이웃보다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의사가 더 많은 도움이 되는 법이다. 


 

캐서린 부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는 빈곤을 특수한 지역과 계층에 국한된 일시적인 현상이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빈곤을 바라보는 시야를 이 세계를 이루고 움직이는 요인과 인간 본성의 내면으로까지 깊숙히 확대시킨다.

 


 

미국과 영국의 굵직한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금이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었다. 싱가포르와 상하이가 번영하는 동안 뭄바이가 누린 이윤은 그에 못 미쳤다. 이곳에도 젊고 저렴하면서 숙련된 노동자들이 넘쳐났지만 인도의 금융 수도인 이 도시는 슬러바이라고 불릴 만큼 빈민촌이 많다는 사실에서 기회비용이 발생했다.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뭄바이 광역 생활권 주민 가운데 절반 이상이 임시 주택에 살았다. 뭄바이 공항을 이용하는 글로벌 기업의 임원 중에는 빈민촌을 혐오스럽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풍경을 제 기능을 수행하며 적절히 관리되는 도시의 증거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86쪽

 

무력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똑같이 무력한 다른 개인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가끔은 서로를 무너뜨리려고 안간힘을 썼고, 가끔은 그 과정에서 파티마처럼 스스로 무너졌다. 아샤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로채서 팔자를 고쳤다.

뭄바이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다른 곳에도 만연했다. 전 세계로 무대를 확대한 시장 자본주의 시대에도 희망과 불만은 협소한 지역안에서 옹색하게 이해됐고, 공통된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연대하지 않았다. 일시적이고 알량한 이익 앞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리고 하류 도시의 이런 투쟁은 전반적인 사회구조에 희미한 파장을 일으키다 잦아들었다. 투쟁은 부자 동네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어쩌다 소동을 일으킬 뿐, 그곳에 균열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정치인들은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무시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불평등한 도시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그럭저럭 이어갔다. -348~349쪽



 

이 책은,

인도 사회의 부패와 이기적인 개개인을 탓하기에 앞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놀랍게도,

슬픈 이야기지만 이상하게 희망적이다. 


압둘처럼 나를 이루는 성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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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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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지난 계절, 죽을 듯이 울어대던 그 많던 매미들은 결국 죽고 말았다.

일년도 아니고 여름 단 한철을 위해서 짧게는 2년 길게는 17년씩 땅속에 묻혀 지낸다는 매미...

그래서 어떤 시인은 '미움, 미움' 하고 운다고 했던가.

지도 더 살고자픈데 더 살 수 없는, 지 팔자가 너무 서럽고 미워서 '미움, 미움'하고 운단다...


어쩌다 보니 소설책만 읽고 기록한 내가 미워져서 간만에 철학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다 읽은 후, 매미처럼 '미움, 미움'하고 울고 싶어졌다.

이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척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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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신해철이 십대 시절에 읽고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反기독교 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보기엔 종교 비판서 더 나아가 서양 문명史에 가까운 것 같다. 



 

정말로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적 이론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주된 이유다.

그럼 그 다음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를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다. -1장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중-


두려움은 종교적 독단의 기반이다. 그밖에 많은 인간생활의 기초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사람들의 두려움은 우리의 사회생활의 많은 부분을 지배한다.  -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



 

모든 종교는 자연에 대한 무지와 존재에 대한 불안을 숙명처럼 떠안은 인간의 본질적 성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러셀의 주장은 100여 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에도 과격하게 들린다. 하지만 눈부신 과학적 성과들과 지적인 성장을 거듭한 현대인이라면 이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진 못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와 종교의 역할에 회의적이면서도 지극히 신학적(?)인 인간으로 기꺼이 살아가는 까닭은 습관화되었거나 용기가 없어서다.   


한편, 러셀은 종교와 일정한 거리를 둔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다. 그 함정이란, 다름 아닌 '불변의 진리에 대한 맹신'이다. 


 

어떤 사람의 말 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말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고 이 전문가들은 어김없이 권력을 차지한다. 진리의 열쇠를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특권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점에 있어 다른 특권층보다 더 질이 나쁘다. 과거에 단 한 번 완벽하게 만인 앞에 계시됐던 불변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지적, 도덕적 진보의 반대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갈릴레오와 다윈을 반대하였고 바로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프로이트에 반대하고 있다. 한때 그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시절에는 한술 더 떠서 지적인 생활까지도 반대했다. -2장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중-


'영원한 진리' '영원한 법칙' '영원한 사랑' 등등...

이처럼 변치 않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가 인간을 얼마나 독단적으로 만드는지 역사는 잘 말해준다. 


 

나는 내가 죽으면 썩어 없어질 뿐 나의 에고 따위가 남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내 나이 젊지는 않지만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허무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공포로 몸을 떠는 모습에 대해선 경멸한다.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 건 그것에 끝이 있기 때문이며, 사고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제 가치를 잃는 것도 아니다. -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

 


그렇다고해서 러셀을 숙명론자로 볼 순 없을 것 같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지극히 자유롭고 쾌락적인 삶을 영위한 인물이다.

그에게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지식과 사랑은 둘 다 무한히 확대되는 성질을 지녔다. 그러므로 어떤 삶이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그보다 좀더 나은 삶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지식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지식도 훌륭한 삶을 낳을 수 없다. -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

 


사랑은 있되 지식이 없으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지식은 있되 사랑이 없으면 지식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는 러셀의 지적은 소위 '지성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구분하자면,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진 않지만 '신의 존재'만큼은 남몰래 갈구해왔던 사람 중 한명에 속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디 '신'으로 불리우는 절대자가 있어서 이 세상을 구원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내 마음이 미약한 존재의 울부짖음에 다름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미움, 미움'하고 아무리 시끄럽게 울어대도 결국 죽고마는, 매미의 숙명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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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책이란 나를 더욱 굳건하게 지켜주는 방패가 아니라 나를 철저하게 부수는 도끼와 같은 책이다. 

일찍이 '마왕' 신해철을 부수웠고 오늘 나를 깨트렸던 이 한 권의 책이 또다시 그 누군가를 깨우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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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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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straw dogs)와 같이 여긴다. -노자, [도덕경] 中-

 

 

이런 책이 있다. 

읽는 도중 딱히 답을 얻은 것도 아닌데 통쾌해지는... 그러나 종국엔 무릎이 꺾일 만큼 허무해지는...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가 바로 이런 책이다.

 

저자의 주장이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기존 철학자들의 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후 생각을 정리한 일종의 '에세이'에 가깝지만, 그의 주장의 상당부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윈의 말을 빌어 보자면, 생물종은 서로서로, 그리고 변화하는 환경과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다. 생물종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생물종은 실존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류의 진보'를 운운할 때마다 이 사실은 잊혀진다. 이 신념은 현실을 벗어난 관념이 되어 버려서,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이 기독교적 희망의 변종은 아닌지 의심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p16~17


 

동물들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다 죽는다. 그게 다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르(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인격체person며, 우리의 행동은 스스로 내린 선택 결과(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다른 동물은 자신의 삶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지만 우리는 의식적conscious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러한 이미지는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의식consciousness과 자아selfhood와 자유의지freewill며, 이것들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모든 생명체보다 우월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라는 뿌리 깊은 믿음에서 나온다.-p59


 

'인류의 진보는 환상이며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건 고대 서양 철학과 기독교가 만들어낸 '정념'에 불과하다'

얼마전에 읽은, 진화론을 다룬 과학서적도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동물과 큰 차이가 없으며,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한 다음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먼저 행동하고 그 행동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낼 뿐이다.  

 

한편, 이 책의 원서 제목(Straw Dogs: '추구' 즉, 짚으로 만든 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인 존 그레이는 동양의 도교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닮은 철학이라고 보았다.


 

삶을 잘 살아가는 솜씨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도교는 좋은 삶에 대한 지침을 얻기 위해 다른 동물로 눈을 돌렸다. (...) 도덕에 속박된 사람들에게는, 좋은 삶이란 영속적인 분투를 의미한다. 그러나 도교에서의 좋은 삶은 애를 쓰지 않고 본성에 따라 사는 삶이다. 가장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이유들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결코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여러가지 대안들을 놓고 재느라 고생하기보다는, 상황이 흘러가는대로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선택한 대로 살기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가는 이치대로 산다. -p152

 

동양사상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몰입의 경지'에 이르렀을때 인간은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며 최고의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몰입이란 다름아닌 '물아일체(物我一體)'가 아니던가. 마치 동물(본능)처럼 기계처럼 존재하는 것 말이다.


나를 잊어버린다는 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모든 이성적 활동의 부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동물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기존의 인간 중심적 사고 즉 휴머니즘이 얼마나 오만하고 단편적 사고인지를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고를 심어준 게 다름 아닌 종교라는 점. 그리고 운명과 우연으로 불안에 떠는 인간을 지켜주겠다고 주장하는 종교와 정치가 어떻게 서로 빼닮았는지를 확인하는 순간, 깊은 회의감과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실제로는 기만과 환상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자유롭고 의식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자신이 그러하다고 믿는 바로 그 모습(자유로운 존재)에서 도망치려고 끊임없이 애를 쓴다.

인간의 종교는, (정작 인간이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자유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다. 20세기에는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유토피아가 이 기능을 수행했다. 그리고 정치가 오락으로조차도 관심을 못 끄는 오늘날에는 과학이 인류를 구원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p157~158 中 발췌-

   

자신은 현실 정치도 종교도 믿지 않으니 그럴 일은 없다고 단정 짓지 마시라. 

왜냐하면 종교와 정치로부터 톡톡히 쓴맛을 본 배신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일수록 테크롤로지를 신봉하기 쉬운데, 과학기술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고통없는 삶' 더 나아가 '불로(不老)와 불멸(不滅)의 삶'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철학과 대부분의 종교와 상당수의 과학이, 인간의 구원에 대해 지치지도 않고 절박한 관심을 보여왔다.


과학은 인간이 가장 오래도록 가져왔던 환상이 드디어 실현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질병과 노화가 없어지고, 결핍과 가난도 사라지며, 인류는 불멸할 것이라고 말이다. 예전에 기독교가 그랬듯이, 오늘날의 과학이라는 신념도 기적을 바라는 희망을 먹고 살아간다. 하지만 과학이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마술을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휴머니즘의 '환상'에 대해, 시간은 나약하고 정신없고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라는 '현실'을 들이대며 보복한다. 과학이 가난을 없애고 질병을 완화할 수 있다해도, 정작 쓰이는 곳은 독재를 정교하게 하고 전쟁의 기술을 완벽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p161

 

과학은 인간이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도와준다. 그렇지만 인간의 욕구를 바꾸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욕구는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지식에는 발전이 있지만 윤리에는 없다. 과학, 역사, 그리고 세계의 모든 종교가 이를 증명한다. (...)


역사란 진보나 쇠락의 과정이 아니라 얻다가 잃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지식의 발전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역사를 보면 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p196~199 中 발췌

 

책이 종반부로 향할수록 안타깝게도 '그래, 정말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일 뿐이구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만다.


그리고...

어느덧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 한복판으로 '오기'같은 게 솟구친다.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 움직이는 나란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좋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렇게 살아도 되겠네...?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종교를 만들어내고 도덕을 만들어내고 철학을 만들어냈다고 치자.

저자의 주장대로 다 거짓이고 관념에 불과할 뿐이지만,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진지한 자세로 삶에 임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까지 부인할 순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지한 삶의 자세란 뭘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뎌내는 삶일까?

(아니다...)

 

타인과 집단을 위해 기꺼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일까?

(아니다...)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내키는대로 사는 걸까?

(아니다...)

 

 


고통스런 오늘을 보낸다고 더 나은 내일이 보장되는 건 절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삶...

개인의 존재에 깊은 의미나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확신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심신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 삶...

인간의 삶은 이성적 판단과 선택보다는 우연과 운명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미신에 천착하지 않는 삶...

불투명한 미래와 허튼 희망에 모든 걸 내맡기지는 않되, 매순간 살아있음을 만끽하고 영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

 

 


진지한 삶의 자세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닐런지...


 


왠지 이 책은 카잔차스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철학에세이 버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찾아온 것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야말로 존 그레이가 주장하는, 하찮은 인간일 뿐인 '호모라피엔스'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삶을 산 인물이니까.

그는 나에게...

진정한 자유란, 불안과 불안전함을 받아들이고 생명과 인생(시간)에 대해 초연해지는 순간 찾아온다는 걸 깨닫게 해주리라.  


 

    

참고로,

이 책의 저자인 존 그레이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저자와는 동명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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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좋은 이별 후에 온다 - 더 나은 나를 위한 이별 심리학
선안남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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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지금 난, 이별(?)중임으로...

 

이별의 순간을 조금 더 유예시킬 수는 있어도 이별을 피할 수는 없다.

단지 사람과의 이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정들었던 장소(직장)나 환경, 물건 혹은 애완동물 등과도 언젠가는 이별의 순간이 오고야 만다.

상담심리사인 저자는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이별일지라도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따라서 상처를 줄일 수도 있고 오히려 더 한층 성숙해질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녀의 속삭임은 메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 빗물처럼 가슴 깊이 스며든다.

 

이별은 우리가 아이일 때 품었던 원초적이면서도 맹목적인 아픔을 건드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를 어른스럽게 만들어 준 모든 사고의 진화와 통제력을 이별 앞에서는 잃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이로 퇴행한다. 퇴행이란 '미성숙하고 아이 같다고 생각되는 마음으로 돌아가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나의 퇴행은 물론 타인의 퇴행도 가만히 지켜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별은 크나큰 사건이니 이별 앞에서는 나 자신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조금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p23

 

 

'그래, 조금은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

 

그렇지만 전문가인 그녀 역시 몇 번의 이별을 겪으면서, 이별은 아무리 여러번 겪는다하더라도 익숙해지지도 아픔이 줄어들지도 않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이별은 '처음'일 수밖에 없기에 한 번 해봤다고해서 이별이 쉬워지지 않으며, 이전의 이별이 그 다음 이별의 '예행연습'이 될 수도 없고 모든 이별은 그저 '실전'일 뿐이다. -p30

 

♡ 과거에 이별을 경험했다고 해서 현재의 이별 익숙해지거나 그 아픔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깨달은 첫번째 통찰이다.

이별은 아무리 반복 연습을 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라는 거... 그리고 애착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이별의 상처도 커지며 애도의 기간 또한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

 

애도는 모든 의미있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다. 애도란, 있었다가 사라진 것, 머물렀다가 떠나간 것,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 알았다가 잊어버린 것, 품었다가 밀쳐 낸 것, 살았다가 죽어 버린 것 등 세상의 모든 변화에 대한 아쉬움, 상실감, 그리움을 의미한다. -p246

 

마음껏 울고 충분히 아파하는 애도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밥도 먹고 웃기도 하고 또 다른 만남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 속 이별의 대상이 영원히 지워지는 건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스토킹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별 후의 흔적은 처음엔 피가 철철 나는 상처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잊고 싶은 아픈 기억이지만, 여기서 또 다시 시간이 흐르면 아련한 추억이 된다. 사랑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굳이 지워버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세월에 흐릿해지다가 결국엔 망각(?) 속으로 빠져 나간다. 그러나 지구가 하루에 한번씩 회전하여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듯... 잊혀졌던 망각은 어느날 불쑥 떠오른다. 

 

추억이란 실제 일어났던 혹은 겪었던 사실에 개인의 감정과 해석이 뒤섞여 마음 속 깊숙히 가라앉은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과 추억은 엄연히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별은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추억과 행복을 전해주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님은 갔지만 님을 떠나보내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여유로워질 수 있다. 만약 '이별'이라는 게 없었다면, 이 세상 모든 예술작품은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때는 내 눈앞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사람들은 모두 어디엔가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몫을 다하며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와 이별했다고 해도 우리들 마음속에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리울 때마다 사람들은 눈을 감는 것인지도 모른다. -p71

 

♡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말없이 떠난 이별만큼 당사자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일도 없다

 

과거의 이별은 현재의 만남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관계가 어떠했는지, 특히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끝이 났는지에 따라 우리는 다음 관계를 잘 해 나갈 수도, 못 해 나갈 수도 있다. 잘 이별해야 잘 만날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와 이별을 할 때, 그 이별의 방식이 상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고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별이 이토록 중요함에도 사람들은 이별 앞에서 쉽게 비겁해지고 염치없어지고 유치해진다.

 

이별이 끝을 의미하고 또 이별을 하고 나면 잘못을 만회하거나 설명하거나 번복할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별은 만남보다 더 강도 높은 예의를 갖춰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이별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게 되는 아픈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남보다 더 신중하게 이별의 방식을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다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기습적으로 쪽지만 달랑 남겨 놓고 도망치는 것은 남겨질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면 상대방 역시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됨으로써 제대로 이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별 앞에서 작아지고 마음 약해진 탓에 예의를 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이별 앞에서 비겁하고 무례하며 성급하게 등을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이별 방식으로 자존심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다.

 

이별앞에서 버겁해지고 예의를 차리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고 이를 이야기할 내면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힘이 약한 사람은 '진지함과 솔직함'이 필요한 순간에 도망치거나 변명하기 바쁘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거나 불편한 진실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그 결과를 감수할 만큼의 결단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p93~95

 

'이별의 방식이야말로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이 문장 앞에서 오랫동안 서성였다.

 

그동안 나의 뒷모습은 어떠했을까...? 

상대방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겨졌을까...? 아니면,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만큼 안 좋았을까...? 

 

사랑하면 누구나 아이처럼 유치해지지만, 이별 앞에서 만큼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 또 공감한다.

 

 

♡  만남이 아닌 이별에 이르러서야 한 사람의 본질과 그 만남(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결단력과 용기는 이별을 고하는 예의 바른 어른들 뿐 아니라 사랑을 원하는 모든 어른들이 갖춰야할 마음의 덕목이다. (...) 물론 마음을 다시 열어도 또 상처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는 결단과 용기는 원하는 관계와 만남(사랑)을 얻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우리는 이렇게 상처를 딛고 서는 경험을 통해 이별하고도, 또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이별을 해도 괜찮다고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누군가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며 '함께'를 약속할 수 있다. 그 약속은 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에게 어른이 되어 준다면 그 약속은 지켜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 -p99~100

 

사랑을 얻기 위해서만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사랑에 이별을 고할 때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예의 바른 어른으로서 예의 바른 뒷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만남이 아닌 이별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한 사람의 본질과 그 만남(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  이별은 발 밑에, 사랑은 심장 위에

 

 

이처럼 이별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이별을 참 쉽게도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재미있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외면한 채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관계에서는 명백한 권력자이자 상처의 가해자이며 잔인한 폭군과 같았던 인물도 다른 관계에서는 맥없이 가슴을 짓밟히는 고통을 감내하고, 그러면서도 상대를 원하고, 그럼으로써 무기력한 피해자가 된다. 권력을 덜 가졌거나 혹은 권력을 전혀 갖지 못한, 이미 피해자이거나 앞으로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랑의 포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관계에 있어서는 항상 권력자가 되는 일도 항상 포로가 되는 일도 불가능하다. -p133

 

'관계는 곧 권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모든 관계에는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뜻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오래 마음을 준 사람이 언제나 더 아플 수밖에 없는 게 사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이치란 말인가. 그래서 차라리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굳이 분류하자면 나 역시 이런 부류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잃어버리는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애초부터 관계에 많은 기대를 걸지 않고 스스로를 단독 행동에 익숙해지도록 훈련해 온 사람이 있다. 또 한편에는 관계가 끝나기도 전에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 여러 관계에 발을 디디고 서 있거나, 하나의 관계가 끝나면 충분히 애도할 시간도 가지지 않은 채 허겁지겁 다른 관계에 발을 내딛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별이 두려워 혼자임을 택하는 것도, 이별이 올까 봐 서둘러 다른 만남을 준비하는 것도 결국에 마음에 상처가 된다. -p247

 

 

인생은 '그래서'로 이어지는 인과적 관계가 분명한 과학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이어지는 윤리적 관계 즉, 철학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에서 이별이 아무리 아픈 상처를 수반한다 하더라도 만남과 사랑을 피할 수 없다면, 정답은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할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하자

 

사랑한 만큼 아프겠지만 또 아픈 만큼 굳건해진다.

상실을 두려워한다면 다시 사랑할 수 없다. 여전히 아프고 아직도 아프지만 언제나 새로운 만남과 이별을 해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끝이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만날 수 있는 동안 만남에 충실했듯, 이별 후에는 충분히 애도함으로써 상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p253

 

 

책으로부터 많은 위안과 위로를 받곤 했지만, 이번만큼 도움이 되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사람과의 인연처럼 책 역시 인연, 즉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잊기로 했고 잊었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별 것 아니지만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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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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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그의 책 <단속사회>를 읽은 바 있다. 물론, <단속사회>는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 빚진 바 크지만...

 

암튼,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으나 '청춘'에 발목 붙잡혀 있는 나로서는, 책 제목에 '청춘'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가면 일단 읽고 보는 증상을 앓고 있다. 이 책도 신중하게 취사 선택되었다기보다는 아무 생각없이(?) 읽은 책으로, 2010년도에 나왔으니 벌써 5년차 되시겠다. 사회과학서로 분류될만한 책이니 5년이면 상당히 긴 시간이다. 어쩌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이제는 더 이상 현실과 부합되지 않을 위험성(?)도 크다. 그만큼 우리사회는 빠르게 움직인다. 겉모습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속모습까지 빠른 속도로 변해서 내가 미처 '변화'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사라져간 '변화'들도 참 많다.

 

이 책은 저자가 두 곳의 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과 소통한 '결과물'이다. 수강생들이 제출한 리포트, 수업 중 토론한 내용들을 정리한 보고서와 영화를 보고 제출한 영화평 및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답안지 등등...

교양필수인 대형 강의로 계단식 강의실에 수백명이 앉아 있는 그런 모습이 한눈에 펼쳐졌다. 겉핥기식 수업. 교수도 학생도 모두 '삽질'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시간과 공간들...

 

'어? 앗!'

그런데 뜻밖에도 이 책은 내가 상상했던 이런 강의실의 이미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십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이며...지극히 감상적이고... 소비지향적일 뿐만 아니라...글도 제대로 못읽고 못쓰며... 자신의 생각일랑은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한마디로 한심한 존재라는... 나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내 안의 무의식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단 한방에 깨트려주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앞으로 오랫동안 고마운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특히, 함께 한다는 건 즉 공동체란 동일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니라 같은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우리는 그동안 해답들만 찾아오지 않았던가...?

이 사람이 해답을 줄것 같으면 이 사람을 따라가고... 저 사람이 해답을 줄 것 같으면 저 사람을 쫓고... 이 말이 옳은가? 싶다가고, 저 말이 더 맞는 것 같고...

결국은 '결론 없음이 결론'이 되는, 고민만 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마치 '최대 다수의 선택이 최선'이라는 착각 속에서 '평범이야말로 평온'이라는 인생관을 신봉해오지 않았던가.

남들 다 가니까 학교에 가고... 남들 다 하니까 취업을 하고...남들 다 하니까 결혼을 하고... 역시, 남들 다 하니까 아이를 낳고... 그리고, 남들처럼 자식을 키워서 꼭 나, 너 그리고 우리같은 사람을 복제해 내지 않았던가.

 

질문을 공유한다는 건,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며 해답 역시 하나일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어떤 삶이 바른 삶인가? 라는 동일한 질문에 각기 다른 '답'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답'만'을 고수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답'도' 인정해 주는 것. 공동체란 이런 것이다. 다른 질문에 같은 결론과 같은 해답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질문에 각기 다른 해답을 용인하고 인정해 주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청춘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입장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걸까?

질문을 공유하는 쪽일까? 아니면 해답을 공유하는 쪽일까? 

 

어째서 이십대 청춘은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그들도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데...

 

어째서 자식은 부모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식이 부모와 똑같았다면 인류는 진화할 수 있었을까...

 

어째서 20대는 4,50대의 20대 시절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각주구검의 고사가 떠오른다. 배가 움직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해안가에 배가 당도하자마자 뱃전에 표기해둔 곳으로 바다 한가운데에서 빠뜨린 검을 주우러 들어가는 어리석음 말이다. 기성세대가 20대에 자신이 가졌던 잣대로 현재의 20대를 판단하려는 건 각주구검과 같은 우(愚)를 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까닭은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질문이 아닌 해답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86들이 탈정치화되었다고 비난하는 20대, 그들은 분명 소위 '잉여'의 시대에 진입한 첫번째 세대다. 고속 경제성장을 하던 시대에 인간은 노동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가 미덕인 세상이 도래하자 인간은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재가 인정되고 가치를 부여받는 존재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리고 이 사회는 그들(20대)에게 노동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한다. 쉽게 말해, 노동(일/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오라는 의미다.

대학도 못 나온 내가 이만큼 잘 살게 되었으니 대학 나온 넌 최소한 나보다는 더 잘 살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것들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면서....

 

청춘은 할 말이 없어진다.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청춘의 열정이 삽질이 될 수 밖에 없는 매카니즘이 작동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대학진학률이 80%를 넘고 안정적인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청춘은 자신이 잉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넘어 이미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신들이 잉여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경험하며 자학한다.

 

이들에겐 공부도 취업도 심지어 사랑도 허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게 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이런 사회구조를 바꾸기위해서라도 청년들은 당장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온다. 그럼, 어디 한번 '톡' 까놓고 말해보자. 수 천년 인류 역사상 정치가 세상을 올바르게 바꾼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혁명?

누굴 위한 혁명인가?

프랑스 파리대혁명은 나폴레옹이라는 전쟁광을 불러왔고, 중국의 신해혁명은 마오쩌둥이라는 독재자를 탄생시켰으며, 우리나라의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은 또 어떤가? 모두 군사 쿠데타와 독재자들을 지도자로 모셔오지 않았는가?

 

혁명의 깃발 아래 모이느니 차라리 홍대 클럽으로 가는 게 훨씬 더 청춘답고... 훨씬 더 건전하지 않을까?

정치에 냉소적인 20대는 더 이상 정치가, 세상을 자신이 처한 입장과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우친 셈이다.

 

어떤 가치를 내세우더라도 이미 정치는 쇼이고 선동이라는 점이다. 이는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불신과 냉소이다. 이들은 정치가 우리의 삶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약속하는 그 모든 정치적 언어를 불신한다. 이들은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만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안다. 너무 잘 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냉소한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다.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p85-

 

나도 안다.

정치가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제도가 그나마 인류가 발견해낸 가장 착한(?) 제도라는 데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의 민주 제도에 입각한 정치적 활동, 소위' 투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 청춘들에게 이 점을 강조한 기성세대 중 한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데 청춘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관심과 투표불참으로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한다는 걸... 

모든 이들의 의사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한다면, 누가 더 비민주적인 걸까? 당연히 내쪽이다.

 

 

연애와 사랑 그리고 가족에 대한 청춘의 생각들 역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은 부모의 등골이나 빼먹고 보살핌을 받기만 할뿐 보답할 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아니었다.

 

사랑이 '무너짐'이라면 무너져야 온당치 않은가.

그러나 이 시대에 무너짐이란 곧 '찌찔함'이다. 사랑은 자존심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자아의 무너짐이 아니라 무너질지도 모르는 자존심을 어떻게해서든 추스러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쿨함은 이 시대 젊은이에게 도덕이자 미학이다. 쿨하지 못하면 최소한 쿨한 척이라도 해야한다. 이들은 오늘을 즐기고 실연과 같은 내일의 불상사에 쿨해지려고 한다. 실연은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닌, 그저 운명이다. -p132

 

실연 또한 일대 사건이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을 실연의 바로 그 순간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대부분의 실연은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이다. (...)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실연의 상실을 견뎌내는 법까지, 이것을 통해 인간은 성장해간다. 사랑과 실연이 성장의 드라마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렇기에 상처는 인간의 성장에서 필수적이다. 상처는 인간에게 삶은 감수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삶은 '그래서'로 이어지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연결되는 윤리의 드라마임을 배우게 된다. -149

 

 

가족이 가족답지 않게 변해버린 건, 가족을 가족답게 만들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한데 그 노력을 가족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노력이란 소위 '감정노동'이라고 불리며 과거엔 주로 '엄마'의 몫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가족 중 아무도 감정노동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집에 들어오면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할 뿐, 집에서조차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마음은 있으나 너무 피곤해서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밖에서 너무 시달리고 힘이 들어서...

 

인간은 특별한 사이일수록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 오히려 외부사람, 이웃사람에게 친절하기가 더 쉽다. 왜나하면 그들과의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닌, 가벼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가족, 너무 편하다. 그런데 너무 서로 모른다. 서로 가장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그 가장 많이 알 것 같은 만큼 가장 많이 모르는 것이 가족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서로 가장 오래 함께 있지만 가장 모르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꼽으라면 가족들을 많이 꼽는데 왜 가장 소중한 존재이면서 서로 모르는 걸까? 왜 가장 중요한데 가장 무관심한 존재가 되는 걸까? -p132

 

물론, 우린 알고 있다.

부유한 중산층일수록 가족애가 살아있다는 걸... 안락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가사노동은 돈주고 타인의 노동을 사면 되고, 가족들이 직접 쏟지 않으면 안되는 감정노동이라는 것 역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가족만 진짜 '가족'다울 수 있는 것이다.

 

또 다시 돈 타령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하는 거의 대부분의 고민거리가 그러하듯 돈은 언제 어디서나 빠지지 않는다. 

시대가 이러할진대, 가족이 가족답지 못해진 책임을 가족과 가정에게만 물을 수 있겠는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건 신념도 지식도 아닌 바로 돈이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진 않지만 돈이 없으면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돈은 행복이 아닌 자유다. 

우리는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지만 돈이 없다면 삶이 고립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 이상이다. 그것은 자유의 박탈이고 존재의 박탈이다.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행복을 좇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p199~201

 

 

어느덧 나는, 나도 모르게 한때의 내가 온몸으로 거부했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받아들인 기성세대가 되었다. 청춘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연민도 동정도 아닌, 말 그대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미묘함이다. 어쩌면, 청춘이 아니면서 청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의 머리로 생각하고...

청춘의 언어로 읽고 말하며...

청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청춘의 심장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청춘'이야말로 죽지 않은 정신, 바로 '영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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