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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평점 :
저자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그의 책 <단속사회>를 읽은 바 있다. 물론, <단속사회>는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 빚진 바
크지만...
암튼,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으나 '청춘'에 발목 붙잡혀 있는 나로서는, 책 제목에 '청춘'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가면 일단 읽고 보는 증상을
앓고 있다. 이 책도 신중하게 취사 선택되었다기보다는 아무 생각없이(?) 읽은 책으로, 2010년도에 나왔으니 벌써 5년차 되시겠다.
사회과학서로 분류될만한 책이니 5년이면 상당히 긴 시간이다. 어쩌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이제는 더 이상 현실과 부합되지 않을
위험성(?)도 크다. 그만큼 우리사회는 빠르게 움직인다. 겉모습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속모습까지 빠른 속도로 변해서 내가 미처 '변화'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사라져간 '변화'들도 참 많다.
이 책은 저자가 두 곳의 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과 소통한 '결과물'이다. 수강생들이 제출한 리포트, 수업 중 토론한
내용들을 정리한 보고서와 영화를 보고 제출한 영화평 및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답안지 등등...
교양필수인 대형 강의로 계단식 강의실에 수백명이 앉아 있는 그런 모습이 한눈에 펼쳐졌다. 겉핥기식 수업. 교수도 학생도 모두 '삽질'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시간과 공간들...
'어? 앗!'
그런데 뜻밖에도 이 책은 내가 상상했던 이런 강의실의 이미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십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이며...지극히 감상적이고... 소비지향적일 뿐만 아니라...글도 제대로 못읽고 못쓰며... 자신의
생각일랑은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한마디로 한심한 존재라는... 나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내 안의 무의식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단 한방에 깨트려주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앞으로 오랫동안 고마운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특히, 함께 한다는 건 즉 공동체란 동일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니라 같은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우리는 그동안 해답들만 찾아오지 않았던가...?
이 사람이 해답을 줄것 같으면 이 사람을 따라가고... 저 사람이 해답을 줄 것 같으면 저 사람을 쫓고... 이 말이 옳은가? 싶다가고,
저 말이 더 맞는 것 같고...
결국은 '결론 없음이 결론'이 되는, 고민만 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마치 '최대 다수의 선택이 최선'이라는 착각 속에서 '평범이야말로
평온'이라는 인생관을 신봉해오지 않았던가.
남들 다 가니까 학교에 가고... 남들 다 하니까 취업을 하고...남들 다 하니까 결혼을 하고... 역시, 남들 다 하니까 아이를
낳고... 그리고, 남들처럼 자식을 키워서 꼭 나, 너 그리고 우리같은 사람을 복제해 내지 않았던가.
질문을 공유한다는 건,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며 해답 역시 하나일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어떤 삶이 바른 삶인가? 라는 동일한 질문에 각기 다른 '답'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답'만'을 고수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답'도'
인정해 주는 것. 공동체란 이런 것이다. 다른 질문에 같은 결론과 같은 해답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질문에 각기 다른 해답을 용인하고
인정해 주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청춘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입장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걸까?
질문을 공유하는 쪽일까? 아니면 해답을 공유하는 쪽일까?
어째서 이십대 청춘은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그들도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데...
어째서 자식은 부모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식이 부모와 똑같았다면 인류는 진화할 수 있었을까...
어째서 20대는 4,50대의 20대 시절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각주구검의 고사가 떠오른다. 배가 움직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해안가에 배가 당도하자마자 뱃전에 표기해둔 곳으로 바다 한가운데에서 빠뜨린
검을 주우러 들어가는 어리석음 말이다. 기성세대가 20대에 자신이 가졌던 잣대로 현재의 20대를 판단하려는 건 각주구검과 같은 우(愚)를 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까닭은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질문이 아닌 해답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86들이 탈정치화되었다고 비난하는 20대, 그들은 분명 소위 '잉여'의 시대에 진입한 첫번째 세대다. 고속 경제성장을 하던
시대에 인간은 노동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가 미덕인 세상이 도래하자 인간은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재가
인정되고 가치를 부여받는 존재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리고 이 사회는 그들(20대)에게 노동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한다. 쉽게 말해, 노동(일/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오라는 의미다.
대학도 못 나온 내가 이만큼 잘 살게 되었으니 대학 나온 넌 최소한 나보다는 더 잘 살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것들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면서....
청춘은 할 말이 없어진다.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청춘의 열정이 삽질이 될 수 밖에 없는 매카니즘이 작동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대학진학률이 80%를 넘고 안정적인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청춘은 자신이 잉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넘어
이미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신들이 잉여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경험하며 자학한다.
이들에겐 공부도 취업도 심지어 사랑도 허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게 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이런 사회구조를
바꾸기위해서라도 청년들은 당장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온다. 그럼, 어디 한번 '톡' 까놓고 말해보자. 수 천년 인류 역사상 정치가
세상을 올바르게 바꾼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혁명?
누굴 위한 혁명인가?
프랑스 파리대혁명은 나폴레옹이라는 전쟁광을 불러왔고, 중국의 신해혁명은 마오쩌둥이라는 독재자를 탄생시켰으며, 우리나라의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은 또 어떤가? 모두 군사 쿠데타와 독재자들을 지도자로 모셔오지 않았는가?
혁명의 깃발 아래 모이느니 차라리 홍대 클럽으로 가는 게 훨씬 더 청춘답고... 훨씬 더 건전하지 않을까?
정치에 냉소적인 20대는 더 이상 정치가, 세상을 자신이 처한 입장과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우친 셈이다.
어떤 가치를 내세우더라도 이미 정치는 쇼이고 선동이라는 점이다. 이는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불신과 냉소이다. 이들은 정치가 우리의 삶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약속하는 그 모든 정치적 언어를 불신한다. 이들은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만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안다. 너무 잘 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냉소한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다.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p85-
나도 안다.
정치가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제도가 그나마 인류가 발견해낸 가장 착한(?) 제도라는 데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의 민주 제도에 입각한 정치적 활동, 소위' 투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 청춘들에게 이 점을 강조한 기성세대 중
한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데 청춘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관심과 투표불참으로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한다는 걸...
모든 이들의 의사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한다면, 누가 더 비민주적인 걸까? 당연히 내쪽이다.
연애와 사랑 그리고 가족에 대한 청춘의 생각들 역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은 부모의 등골이나 빼먹고 보살핌을 받기만 할뿐 보답할 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아니었다.
사랑이 '무너짐'이라면 무너져야 온당치 않은가.
그러나 이 시대에 무너짐이란 곧 '찌찔함'이다. 사랑은 자존심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자아의 무너짐이 아니라 무너질지도 모르는 자존심을
어떻게해서든 추스러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쿨함은 이 시대 젊은이에게 도덕이자 미학이다. 쿨하지 못하면 최소한 쿨한 척이라도 해야한다.
이들은 오늘을 즐기고 실연과 같은 내일의 불상사에 쿨해지려고 한다. 실연은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닌, 그저 운명이다. -p132
실연 또한 일대 사건이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을 실연의 바로 그 순간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대부분의 실연은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이다. (...)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실연의 상실을 견뎌내는 법까지,
이것을 통해 인간은 성장해간다. 사랑과 실연이 성장의 드라마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렇기에 상처는 인간의 성장에서 필수적이다. 상처는 인간에게
삶은 감수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삶은 '그래서'로 이어지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연결되는 윤리의 드라마임을 배우게 된다. -149
가족이 가족답지 않게 변해버린 건, 가족을 가족답게 만들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한데 그 노력을 가족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노력이란 소위
'감정노동'이라고 불리며 과거엔 주로 '엄마'의 몫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가족 중 아무도 감정노동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집에 들어오면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할 뿐, 집에서조차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마음은 있으나 너무 피곤해서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밖에서 너무 시달리고 힘이 들어서...
인간은 특별한 사이일수록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 오히려 외부사람, 이웃사람에게 친절하기가 더 쉽다. 왜나하면 그들과의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닌, 가벼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가족, 너무 편하다. 그런데 너무 서로 모른다. 서로 가장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그 가장 많이 알 것 같은 만큼 가장 많이 모르는 것이
가족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서로 가장 오래 함께 있지만 가장 모르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꼽으라면 가족들을 많이 꼽는데 왜 가장 소중한
존재이면서 서로 모르는 걸까? 왜 가장 중요한데 가장 무관심한 존재가 되는 걸까? -p132
물론, 우린 알고 있다.
부유한 중산층일수록 가족애가 살아있다는 걸... 안락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가사노동은 돈주고 타인의 노동을 사면 되고, 가족들이
직접 쏟지 않으면 안되는 감정노동이라는 것 역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가족만 진짜 '가족'다울 수 있는 것이다.
또 다시 돈 타령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하는 거의 대부분의 고민거리가 그러하듯 돈은 언제 어디서나 빠지지
않는다.
시대가 이러할진대, 가족이 가족답지 못해진 책임을 가족과 가정에게만 물을 수 있겠는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건 신념도 지식도 아닌 바로 돈이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진 않지만 돈이 없으면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돈은 행복이 아닌 자유다.
우리는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지만 돈이 없다면 삶이 고립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 이상이다. 그것은 자유의
박탈이고 존재의 박탈이다.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행복을 좇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p199~201
어느덧 나는, 나도 모르게 한때의 내가 온몸으로 거부했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받아들인 기성세대가 되었다. 청춘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연민도 동정도 아닌, 말 그대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미묘함이다. 어쩌면, 청춘이 아니면서 청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의 머리로 생각하고...
청춘의 언어로 읽고 말하며...
청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청춘의 심장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청춘'이야말로 죽지 않은 정신, 바로 '영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