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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보는 눈 - 한국 사회 빈곤에 대한 편견을 깨자 ㅣ 세상을 읽는 눈
신명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
"빈곤은 인류사회의 필요악이다"
"가난한 사람은 다 가난한 이유가 있다"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니까 가난한 거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누구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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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나는 그동안 이런 말들을 나도 모르게 내면화시켜 오지 않았나 싶다.
우리사회에서 빈곤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담론이 되기에 앞서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빈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냉대와 모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며, 빈자 역시 가난이 무슨 죄인냥(물론, 자랑 또한 아니지만) 침묵하고 숨어들기에 급급한
게 현실이다. 종종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이나 논객들이 빈곤을 언급하곤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이슈나 피상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을
뿐이다.
나 역시, 확고한 세계관을 갖기 위해 부던히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빈곤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마치 빈곤은 나와는 아주 먼 일인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읽은 신명호의 <빈곤을 보는 눈>은 빈곤에 대한 나의 식견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재조정해준 고마운 책이다.
저자는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이론적이지도 않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빈곤의 정의와 원인 그리고 해결방안에 대해 설명한다. 그의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분석과 지적은 단순히 빈곤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을 뛰어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이 어째서 全지구적으로
빈곤이라는 거센 파도 앞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까지 알려준다.
이런 책들을 일컬어 '사회과학서'라고 하겠지만 나에게 이책은 '빈곤은 더 이상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이자 정치적
문제'라는 점을 새롭게 일깨워준 '인문철학서'라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시절 십여년 넘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쌓은 내공과 중년을 지나면서 무르익은 저자의 학문적 깊이가 돋보인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좌파진영의 선전선동 구호도 보수를 대변하는 언론매체의 교묘한 말장난보다도 더 귀 기울이게 된다.
빈곤이란 단순히 소득이 적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속한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비해 굶어죽는 사람이 없으므로 우리사회에서 빈곤은 퇴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언이라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그렇다면, 빈곤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지극히 게으르거나 질병 혹은 예기치 못한 사고 등 개인적 불운이 겹쳤기 때문일까? 물론, 이와 같은 이유들 역시 사람을 빈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겠지만 절대적인 원인이라고 볼 순 없다. 만약, 이상과 같은 이유들을 빈곤의 절대적인 이유로 본다면, 일을 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위 '워킹 푸어'계층의 증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빈곤의 발생 원인을 저자는 지난 70년대 서구 영미 사회에서 나타난 이후 8,9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신자유주의
노선'에서 찾고 있다. 신자유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이윤추구를 위해서 자본과 노동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고, 경제행위에 따른 각종
규제가 완화되고 풀린 사회를 말한다. 자본이 극단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시장(자본)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시장의 편에 서서 국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왔다. 과거에
비해 세계 경제는 더욱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퇴치되기는 커녕 더 한층 강화, 확대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투자와 고용창출을 위해 세금을 줄이고...'
'수출 기업을 돕기위해 고환율 정책을 쓰며...'
'고용시장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하고...'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공공분야를 민영화하고...'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복지예산은 축소시키고...'
그러고보니, 우리 정부가 한 일들도 하나같이 국민이 아닌 시장(자본)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민주사회인 우리나라의 정부
대표는 선거를 통한 투표로 뽑이지 않는가? 숫적으로 소수인 자본가(부자)들이 아무리 몰표를 준다고 해도 그들만을 위한 대표가 선출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빈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펼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정책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미국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전통적으로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 유색인종 등을 대변하는 정당인 민주당과, 부유층 자본가 보수적 백인층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의
양당구조에서, 2000년 대선 때 극도로 가난한 농촌 지역이 극우파 후보 조지 W. 부시에게 80%가 넘는 표를 몰아준 현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빈곤층 보수화 현상의 원인이 궁금했던 토마스 플랭크(『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의 저자)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는 방대한 조사와 분석 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문화와 신앙이었다. 공화당과 보수주의 세력은 전략적으로 그렇게 몰아갔다. 그들은 경제 문제를 정치와
분리시키면서 진짜 문제는 낙태와 동성애와 총기 규제를 찬성하고 애국심을 우습게 아는 민주당과 리버벌리스트에게 있다고 공격했다. 그들은 진정한
미국인은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으며 사명감과 애국심이 충만하다는 문화적 프레임을 만들어 민주당 지지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표리부동한지를
부각시켰다. (중략)
빈곤은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문제라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영혼의 위기"라는 공화당 의원의 주장이 오히려 먹혀들어갔다.
(중략)
미국의 서민들은 자신들의 경제가 왜 악화되었는지를 따지기보다는 '강한 미국'과 '경건한 미국인'이라는 오래된 가치를 선택했다. 공화당 정부
아래에서 부자를 위한 감세 조치가 내려지고 실업자가 늘어나는데도, 경제위기는 불가항력적인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미국을 망치는 불경스러운
진보파들의 작태라는 우파의 선전이 대중에게 설득력을 얻었다.
-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p268~271
中-
미국 역시 OECD국가 중 빈민층의 비율이 매우 높고, 각종 사회보장제도가 북서부 유럽에 비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인 공화당이
득세한 이유를 아주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90년대 초반, 민주당 출신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빌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는 선거 구호가 떠오른다. 그래, 맞는
말이다. '경제는 곧 정치요, 정치는 곧 경제인 것'이다.
한편, 저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그동안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영/호남이라는 지역주의와 세대간 갈등이 주요 이슈였기 때문에
빈자가 보수정당을 지지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다만, 그는 한국에서는 서민 밀집지역의 투표율이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의 투표율보다 낮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에 덜
적극적인 것은 정치가 자신들의 처지를 바꿔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기권한 사람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정치층의 잘못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민주당이나 진보당을 자신들의 정당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그 정당들이 새누리당과 다름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노무현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정치인 노무현의 서민적 풍모를 사랑하고 지역감정과 권위주의를 타파하고자 기울였던 눈물겨운 노력을
칭송한다. 필자는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진정성에 존경의 염마저 품는 자이지만, 그의 경제정책이 서민대중의 편에 섰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권력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은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물론, 안다. 소를 죽이지 않으면서 휘어진 뿔을
바로잡아야하는 대수술의 고민과 어려움을 어찌 짐작 못할까? 그러나 정권은 오직 정책의 결과로서 말할 뿐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가 '국정과제
어젠다'로 둔갑하고 재벌 개혁을 위한 초기 정책들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사실을 가난한 사람들은 모른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그저 민주당
정권이 진정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에 남는 게 없을 뿐이다. 집권 기간 중 집값 폭등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는, 정치 공급자의 천연덕스러운 변명을 수요자인 가난한 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니 '정치'가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고객의 무심함을 나무라서는 안 될 노릇이다. 노무현의 말처럼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빈곤의 문제는 결국 정치의 문제이다. 빈곤의 문제는 정치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를 통해서 풀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p280~281 中-
"빈곤의 문제는 결국 정치의 문제다."라는 저자의 말에 어지러운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랏님이 구제해야 할 의무가 있고...
빈곤은 인류사회의 필요악이라는 말은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교묘한 거짓말일 뿐, 가난은 인류의 절대악으로 반드시 퇴치되어야 하며...
가난은 게을러서도 일을 안해서도 아닌,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짜여진 사회구조와 질서 때문이라는 걸...
현재 우리 사회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학력자본이라고 불리는 공부(성적) 역시 '개천에서 나는 용은 더 이상 없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자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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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를 고민하기에 앞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저마다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한다면,
나는 과연 양보를 할 수 있는지...?
양보를 한다면,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갖고 있는 것)들 중,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변하길 원한다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