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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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된 책읽기란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권의 책을 완독하면  그때부터 생각이 깊어진다.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의 한 조각을 움켜잡고 억지로라도 글로 옮겨보면 뜻밖에도 생각이 정리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곤 한다. 두서없이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니던 생각들이 글로 옮겨지는 과정 속에서 더 한층 성숙해진다고나 할까... 암튼, 각설하고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대부분의 애독자(愛讀者)들이 독서 자체보다는 독서 후의 글쓰기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가보다. 

 

 

나 역시 한 권의 책을 다 읽으면 또 다른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독후감을 쓰는 편이다. 보통 이틀을 넘기지 않는 편이지만, 책을 뗀지(?) 하루 이틀 심지어 일주일이 지나도 도무지 독후감을 쓸 엄두가 나지 않는 책들이 있다. 충격이나 감동의 깊이때문일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엔 주로 내용의 방대함 혹은 난해함이 더 큰 이유라 하겠다.

 

엄기호의 <단속사회> 역시 그런 책 중 하나다.

 

저자는 우리사회를 '같고 비슷한 것에만 접속하고 나와 다른 것은 철저하게 차단'하는 사회라고 진단하고, 이런 사회를 '단속사회'라고 일컫는다. 단속사회는 낯섦을 통한 성장과 성숙이 차단되어 있기에 삶의 연속성이 끊어지고, 나와 타인의 경험을 통한 창조 또한 불가능한 사회다.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실존적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관계의 부재다. 이런 관계가 부재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남도 듣고 창조하면 좋을 이야기로 만드는 능력 또한 전승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창조점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사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누군가의 창조점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 존재감을 획득하고 공적인 존재로 설 수 있다.

-엄기호, <단속사회> p26~27 中-

 

'나의 경험이 그 누군가의 창조의 시작이 되고, 나의 성장은 타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어쩌면 이렇게 단 한줄로 소통의 중요성을 표현해 놓았을까... 

 

단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적어 놓은 인용문이 이번처럼 많은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책 속의 인용문을 적어놓은 것만도 A4 용지 앞뒤를 가득 채우고도 남으니 말이다. 하나같이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다. 

 

사냥꾼의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침묵하는 전략을 택한 것은 안전의 목적과 의미가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낯선 존재들을 만날 때에야 비로소 익숙한 것을 상대화하게 되고 때로는 '친숙한 관념과 기성 진실을 뒤집어 놓을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것을 배워가면서 우리는 낯선 것에 도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동일성에만 숨어들게 되면서 우리의 경험은 축소되고 성장의 기회는 봉쇄된다. 이것이 사냥꾼의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안전의 댓가다.

-엄기호, <단속사회> p59~61 中-

 

정글에선 누구나 사냥감이 아닌 사냥꾼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냥꾼은 언제나 극소수다. 물론, 사냥꾼은 사냥감보다 강하다. 그런데 다수의 사냥감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을만큼 강할까? 

만약, 다수인 사냥감들이 '난 사냥감이 아니야!' 라거나, 혹은 '언젠가는 나도 사냥꾼이 될 수 있을 거야!' 등등의 허튼 기대와 희망을 품지 않게 된다면 어찌될까?

다수의 사냥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모든 사냥꾼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답을 찾아낸다.

 

통치는 개인의 초조함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상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조함의 원인으로 자신의 부족을 탓하게끔 조장한다. 사람들은 만성적인 초조함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왜 자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초조해하는지를 돌아보지 못한다. (...)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이는 사적인 것을 넘어 공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조함이 자신의 바깥을 돌아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보편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이 또한 통치 전략 중 하나다.

 

엄기호, <단속사회> p237~238 中-

 

 

모든 자기개발 서적과 소위 '멘토링'이니 '힐링'이니 하는 말들로 포장된 강연들은 하나같이 "니가 지금 이모양 이꼴인 것은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면서, "앞으로 기회는 많으니 정신적 안일함과 무책임함에서 벗어나 더 열심히 매진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는 거지?'

'그리고 도대체 앞으로 뭘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거지?'

 

과거에는 말이 곧 폭력이었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이제 말은 '사기'에 불과하다. 이전에는 말의 뜻을 새길 필요가 없었다면, 이제는 그것의 의도와 배후를 의심해야 한다. 또한 이전에는 권력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했다면, 이제는 그들이 우리의 말을 못 들은 척 묵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소통에 대한 요구'는 자연스럽게 말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요구로 치환되었다.

 

-엄기호, <단속사회> p177~178 中-

 

 

'현대인은 긍정과잉과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며 피로감을 느낀다'고 주장한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떠오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단속사회>의 저자는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상과 철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제 근대 국가는 제약없이 행사되는 시장의 힘에 의해 초래된 소실과 피해를 제한하고, 약자들을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고, 불확실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유경쟁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체제유지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가장 주된 임무가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국가는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경제적 영역이 아니라 비경제적 영역에서 다시 찾아야 했고, '안전'을 통해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엄기호, <단속사회> p59 中-

 

바우만은 액체 근대로 진입하면서 세가지 범주의 신뢰가 모두 붕괴했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두번째는 타자에 대한, 세번째는 제도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 제도와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불신할 때 안전을 위해 자기가 자기를 감시하고 검열하는 자기단속 현상은 확산된다. 

-엄기호, <단속사회> p177~178 中-

 

 

요즘 인문학 특강 등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단어 중 하나를 꼽으라면 '파놉티콘'이 아닐까 싶다. '파놉티콘'이란 영국의 법학자인 제레미 벤담이 주장한 감옥으로, 감시와 통제로 대표되는 근대사회의 핵심 키워드라 하겠다.

 

정보의 공유와 편리함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개인정보수집과 범죄의 예방과 안전에 대한 요구 및 우려와 함께 등장한 CCTV 설치논란 등등을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생존'을 위해 '자유'를 포기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안전'을 댓가로 '자유'를 포기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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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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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얼마 전에 읽은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인 한병철교수는 재독 철학자로 90년대에 독일로 건너가 서양 근대 철학을 전공한 인물인데, <피로사회>라는 짧은 에세이를 통해 독일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연대 조한혜정교수의 추천도서 목록에서 이 책을 본 것 같다.

 

 

그의 주장은 신선하고 정확하다.

그는 후기 현대 사회를 긍정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긍정과잉의 성과사회'라고 진단한다. 인류는 명령과 복종의 '규율사회'를 지나 긍정과 자유를 추종하는 '피로사회'로 진입했다는 그의 주장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긍정과 자유는 추구되고 높이 평가되어 온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지나친 자기 긍정과 성과주의에 빠져 스스로를 착취하는 상태에 빠져버렸으며, '부정성'이 결여된 '긍정성'으로 인해 피로하다는 그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p11~12 中-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p27~28 中-

 

성과와 긍정 과잉의 시대에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노동하는 노예로 전락해 버렸다는 주장은 참으로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와 같은 자발적인 성과주의와 긍정과잉 시대가 도래하게 된 건, 생산과 소비가 극에 다다른 자본주의가 (발전과 확대를 지속시키기 위해) 스스로 자가 발전한 결과라는 점이다.

 

긍정과잉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어쩔 수 없이 우울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감정은 발췌문에서 보다시피 '무엇을 할 수 없는' 통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왜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에서 기인한다.

 

특히 저자는 여전히 현대 사회의 주요 분석 코드로 자리잡고 있는 푸코의 '규율사회'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 등 기존 철학 이론들이 더 이상 후기현대사회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서양근대철학의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사회에서 그의 이와같은 주장들이 거부되지 않고 수용/지지된다는 점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전,후기현대사회의 폐해를 직접 체험한 당사자의 관점이라는 점도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그만큼 독일 사회가 한국 사회보다 수평적이고 평등하며 자유롭게 '부정성'을 표출할 수 있다는 면에서 훨씬 더 건강한 사회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사회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한병철, <피로사회> p66 中-

 

그렇다!

우린 긍정과잉과 성과주의를 부르짖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방안은 없는 걸까? 이 질문에 저자는 과잉 긍정을 불러오는 원인은 극단적으로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사회 구조에 있는데, 사회구조란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개개인이 바로 이점을 명확하게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말로써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면, 결국엔 또 다시 정치 문제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결론은 민주시민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며 성숙한 시민의식은 또한 민주주의라는 토양 속에서 자라란다고 할 수 있겠다.

 

 

끝으로,

엄기호의 <단속사회>는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를 언급하고 있으나, 내가 이해한 그 책의 주제는 역설적이게도 '피로사회'의 도래와 위험성을 경고하기보다는 단속과 규제로 통칭되는 과거 '규율사회'의 타파를 핵심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우리사회가 '피로하지 않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규율사회에서 확실하게 벗어난 서구 유럽에 비해 여전히 규율사회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읽혀진다. 

 

그렇다면,

우리사회가 아직 '피로사회'에 진입하지 않았음을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구조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서구보다 뒤처지고 뒤늦었음을 슬퍼해야 하는가?

 

 

오랜만에 제대로된 철학서적을 읽었다.

요즘의 화려한 디자인과 고급 종이로 중무장한 책과는 달리,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하게 생겨서 깜짝 놀랐고, 널리 알려진 평판에 비해 너무 얇아서 두번 놀랐으며, 끝으로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상과 원인을 적확하게 짚어내서 놀랐다. 철학책에 익숙하지 않아도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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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스민과 석유
송재욱 지음 / 애플트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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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0년이던가...

아무튼 몇 년전 중동지역에는 민주화 열풍이 거샜더랬다. 그 시작은 튀니지의 젊은 대졸 노점상의 분신이었다. 튀니지와 이집트, 리비아의 독재자들이 줄줄이 물러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중동...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멀고 먼 나라다. 이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자 선택한 책이 바로 <자스민과 석유>이다. 비교적 최근에 나왔고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된 책이었다.

 

'중동의 경제: 석유와 복지의 넥서스'라는 부제를 단 1부에선 중동 국가의 경제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20세기초까지 대부분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이 지역 국가들은 독립하여 나라가 세워지는 초기 과정에서 석유 자원이 개발되면서 소위 '지대경제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지대경제구조'란 토지를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는 것처럼 노동이나 생산없이 석유를 팔아 나온 돈으로 운영되는 경제구조를 말한다.

 

석유매장량이 많고 인구규모가 적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산유부국들은 '오일머니'로 세금 없이 정부가 운영되고 국민들에게 높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하면서 정권을 유지하는 한편, 석유자원이 비약하고 인구가 많아 비교적 가난한 이웃 중동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원조한다. 주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이들 비산유국들은 외부의 경제 원조에 의지하면서 쿠데타 등으로 집권한 사람들이 군사력을 이용하여 장기독재 체제를 구축했는데, 리비아의 카다피 등이 대표적이다.

 

 

2부는 '아랍의 봄' 즉 '자스민 혁명'으로 명명되는 중동의 민주화 열풍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 그리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혼란한 상태를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국가가 나서서 부자에게 고율을 세금을 부과하고 그 돈으로 저소득층의 생활기반을 튼실하게 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부의 재분배라는 '경제 민주화' 논리를 적용해 시장의 고유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는 시장의 재편과 일자리 창출 과제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풀어내라고 숙제를 던져 준 것이다. 반면 아랍의 시민들은 자본과 자원을 독점하고 경제를 비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국가가 보다 생산적인 시장에 자리를 양보하라는 주문을 내어놓고 있다.

 

-송재욱, <자스민과 석유> p117 中-

 

정부의 역할을 자유방임으로 한정할 것이냐? 아니면 적극적인 개입과 조정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거리다. 자유방임의 경우 시장에게 주도권이 넘어가 '무한경쟁'을 야기시키고 '부의 재분배'라는 국가 본연의 임무는 소홀히 하면서 이로써 작아진 국가의 존재 이유를 치안에 두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범죄예방과 치안이라는 이름으로 국민 개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감시하는 사회가 될 개연성이 커진다. 반면, 정부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관리하면서 시장의 역할을 자처한다면 과거 계획경제 사회주의나 중동 산유국의 전철을 밟게 된다.

 

 

3부는 아랍 국가들의 왜곡된 경제구조와 이로 인한 문제점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중동의 석유 중심 경제구조는 제조업등의 발전을 정체시켜 결국 청년실업문제 및 국제유가와 식량 생산량에 따라 크게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허약한 경제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1970년대 석유 국유화 조치이후 아랍의 독재국가들은 석유수출을 통해 번 돈으로 과도한 복지 시스템을 경쟁적으로 도입하면서 권력을 지탱해왔다. 국가가 독점하는 공기업을 통해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빵과 주택에 대한 과도한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려 온 것이다. 하지만 청년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낡은 산업구조가 개선되지 않아 실업률이 증가했고 불안정한 국제유가가 바닥을 칠 때마다 서민복지에 쏟아 붓는 돈이 고갈되었다.

 

-송재욱, <자스민과 석유> p186 中-

 

 

4부에서는 중동의 복잡다단한 현대사를 설명하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닮은 구석이 엿보였다. 제국열강의 식민지였으며, 독립 후에도 유럽과 미국 등 열강세력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등등...

 

특히, 석유자원을 둘러싼 갈등은 중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석유 자원의 중요성을 모르던 시절에는 동서양 간의 중개무역 등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한때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던 지역이 오히려 석유로 인해 국민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복지정책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그 대신 정부의 부패와 장기 독재를 용인하는 비극을 초래했으니 말이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유럽을 중심으로 한 열강들은 팔레스타인 문제 처리에 부심했다. 1947년 UN이 제시한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면 아랍과 유태인 국가의 분할과 예루살렘을 국제도시화하는 '두 국가 체제'를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아랍국가들의 거부로 무산되고 결국 1948년 5월14일 위임통치가 사실상 종료되자 유태인들은 독립국가인 이스라엘을 선포하였고 다음날인 5월15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연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진주하면서 제1차 중동전이 발발한다. (...)

1957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고 이에 맞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공격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공군기지를 공격하면서 제2차 중동전이 발발한다. 제2차 중동전은 오스만 제국이 붕괴한 후 이 지역을 대표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미국과 소련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냉전체제가 중동지역에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

1967년 제3차 중동전으로 이스라엘은 시리아로부터 요충지인 골란고원을, 요르단으로부터는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이집트로부터는 시나이반도를 획득하게 된다. (...)

제4차 중동전쟁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면서 세계적인 오일파동을 불러왔다.

 

-송재욱, <자스민과 석유> p165~170 中 요약함-

 

전반적으로 중동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신문 기사 등을 자료로 활용해서 그런진 몰라도 통계자료 등을 직접 인용한 부분이 너무 많고, 지나치게 미국적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중동측 자료나 입장은 누락(?)된 채, 미국의 언론매체에 실린 자료만 참고/인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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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섬으로 점심먹기 - 한·중 문화비교론
김혜원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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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문화비교론: 中韓文化談>이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중국 밖의 중국' 혹은 '중국 아닌 중국'인 홍콩과 한국을 비교한 것이다. 불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1997년부터 홍콩에서 거주하면서 홍콩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강의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이후, 중국을 여행하는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폭증하고  중국에서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과 주재원 등이 늘어나면서 중국 대륙을 소개하는 책들이 봇물을 이룬 것과는 대조적으로 홍콩에 대한 읽을 거리는 주로 관광 안내서 위주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혜원의 <딤섬으로 점심먹기>는 홍콩(인)과  한국(인)을 비교 분석한 보기 드문 인문서라 하겠다. 

 

언어와 문화에서부터 생활방식과 의식의 차이까지 상당히 여러 분야를 아우르면서도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아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관심을 끈 건 문명과 문화의 차이와 한국어와 중국어를 비교한 부분 그리고 한류가 인기 있는 이유를 설명한 부분이었다. 

 

우선, 저자는 도입부에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언급하면서 소위 '문명'이란 인류 전체에게 적용되는 기술적 진보인 반면, 문화란 특수한 민족이나 지역인들이 오랫동안 고수해와서 쉽게 바뀌지 않는 일종의 '습관'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아랍(이슬람교)과 미국(기독교) 간의 충돌을 주로 설명하고 있는 앞의 책 제목은 당연히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화의 충돌'이라고 해야 옳다고 지적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원래는 '동양' 혹은 '동양적 사고'를 일컬는 Oriental 혹은 Orientalism이 이제는 '서양인에 비친 혹은 서양인이 보고 싶어하는 동양'이라는 의미로 바뀌었는데, 이는 서구 문명과 문화가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한 발상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동양인이 바라보는 '동양' 혹은 '동양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

 

얼마 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한국인들은 자못 문화적 우월감에 빠졌더랬다. 그러나 과연 한국 가수가 부른 한국어 노래가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고해서 한국 문화가 소위 '세계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한국 가수나 그룹의 노래 및 드라마와 영화 등 문화 컨텐츠가 아시아를 넘어 서구 사회에서도 환영받는 것은 '서구화'에 성공한, 즉 다시 말하면 서양인이 기대하는 아시아의 모습이자 서양을 본받고 싶어하는 아시아인의 내재적 욕망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류'로 통칭되는 한국산(産) 문화 상품에 열광하는 아시아와 서구 사회를 보면서 한국 문화의 우수함이자 세계화의 성공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밖에도 100년 넘게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홍콩이지만 여전히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혹은 단체주의)가 강하고 아시아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점은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중국 대륙의 '콴시'는 매우 폐쇄적인 집단주의인 반면 한국의 집단주의(온정주의)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세력을 외부에 과시하는 성향이 더 강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알면 알수록 한국인과 중국인은 엇비슷 한 듯 하면서도 무척 다른 것 같다.

 

중국어를 맨 처음 배운던 당시, 나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어가 시제를 표현할 수 없고, 한국어에서는 조사 등으로 간단하게 전달되는 것을 중국어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알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찍이 한 저명한 언어학자가 '중국어는 언어가 아니라 기호'라고 한 말이 지나친 비약은 아닌 셈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중국어와 한국어의 차이가 어떻게 두나라의 언어 발달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한다.

 

언어유형학에서는 중국어를 '고립어(孤立語)'로 분류하는데, 이는 중국어에는 어휘의 형태적 변화 또는 활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인이 한자를 계속 사용하는한, 그들의 말인 중국어는 계속 고립어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표의문자인 한자로는 어휘의 형태적 변화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말(소리)을 표기하기에 아주 제한적이며 또한 표기될 수 없는 말은 자연히 살아남지 못하게 되므로, 결국 말로서의 중국어(漢語)는 그의 문자인 한자로 표기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진화할 수 있다. 즉, 한자라는 글이 그들의 말 중국어의 진화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김혜원, <딤섬으로 점심먹기> p86~87 中-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한글이 정말로 배우기 쉽게 체계적으로 잘 만들어진 문자라는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말인)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기가 정말 힘들겠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김혜원, <딤섬으로 점심먹기> p94 中-

 

일본어와 한국어 두 언어를 모두 배워 본 외국인이면 한결같이 한국어가 훨씬 더 배우기 어렵다고 말한다. 비슷한 문법구조를 가진 일본어와 비교해도 한국어에서는 배워야 할 문법이 너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우기 쉬운 한글이 한국어의 문법을 어렵게 만든 측면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자는 너무 앞서 가는 말의 진화를 제어(또한 여과)함으로써 그 문법구조를 체계화시킬 수 있는데, 한글은 그러하지 못했다. (중략)

 

요약하자면, 한국어의 문법체계가 지금처럼 복잡하고 방만해진 이유 중 하나는, 한글이 너무 유연하고 또한 '오백년 밖에' 안 된 젊은 문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문법적 진화를 가로막았던 한자와 결별하고 한글을 만나서 지난 오백 년 동안 많은 진화 과정을 겪었다. 그러한 진화 과정에서, 소리를 음소단위로 구별하여 표기할 정도로 유연하고 또한 신생문자였기 때문에, 한글은 중구난방으로 마구 진화하며 한국어를 '충분히' 제어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어의 문법 체계가 더 나은 짜임새를 갖추려면 좀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바로 중국어이다. 중국어에는 어미의 활용과 같은 문법적 기능이 없고 문법이 아주 단순한데, 이는 보수적인 한자가 중국어의 문법적 진화를 '지나치게' 제어했기 때문이다.  -김혜원, <딤섬으로 점심먹기> p96~97 中-

 

 

이 밖에도, 한국인과 중국인이 돈과 외모에 집착하는 이유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때문이라고 설명한 부분에도 공감이 갔다.  외모 역시 학벌과 마찬가지로 '돈벌기 경쟁'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이니 말이다. 그 동안은 이와 같은 학벌지상주의와 외모중시풍조를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동양적 집단주의나 유교적 가치관 탓으로 돌렸으나, 이보다는 '경제적 이유'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성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복지제도가 한국보다 훨씬 더 잘 구축되어 있는 싱가포르와 자본주의 역사가 오래된 홍콩은 한국처럼 학벌와 외모를 중시하는 정도가 훨씬 더 미약하다는 점 역시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반면, 사회주의식 복지제도 대신 자본주의식 시장경제를 선택한 중국 대륙의 경우 학벌과 외모를 중시하는 풍조에 있어서 한국을 가장 빠르게 닮아가고 있다는 점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편, 저자는 한국인의 집단주의(단체의식, 그중에서도 일체감)를 강력한 평등주의와 연관지었다. 즉, 단체의식이 강하면 구성원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고, '남과는 다르기 위함'이나 '남보다 나은'이 아닌 '남들만큼은 나도 해야 한다'는 평등주의가 결국 '남들이 하면 나도 한다'로 변질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점은 아시아에서는 제일 먼저 선진국으로 발전한 일본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일본인의 경우도 집단주의가 발달한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집단주의는 한국처럼 평등의식에서 출발한 것일까?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문화적 스텍트럼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일본은 동양적인 집단주의적 성향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이는 한국처럼 극단적인 평등주의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발로라기보다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서구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양적 습관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읽혀질 수 있을 것 같다.  

 

아시아는 서구에 비해 공통점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다름'을 '차별'이나 '격차'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반면,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서구의 문화는 오히려 '다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바로, 서구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동경과 컴프렉스(complex)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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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보는 눈 - 한국 사회 빈곤에 대한 편견을 깨자 세상을 읽는 눈
신명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

"빈곤은 인류사회의 필요악이다"

"가난한 사람은 다 가난한 이유가 있다"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니까 가난한 거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누구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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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나는 그동안 이런 말들을 나도 모르게 내면화시켜 오지 않았나 싶다. 

우리사회에서 빈곤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담론이 되기에 앞서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빈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냉대와 모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며, 빈자 역시 가난이 무슨 죄인냥(물론, 자랑 또한 아니지만) 침묵하고 숨어들기에 급급한 게 현실이다. 종종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이나 논객들이 빈곤을 언급하곤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이슈나 피상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을 뿐이다. 

 

나 역시, 확고한 세계관을 갖기 위해 부던히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빈곤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마치 빈곤은 나와는 아주 먼 일인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읽은 신명호의 <빈곤을 보는 눈>은 빈곤에 대한 나의 식견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재조정해준 고마운 책이다.

 

저자는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이론적이지도 않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빈곤의 정의와 원인 그리고 해결방안에 대해 설명한다. 그의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분석과 지적은 단순히 빈곤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을 뛰어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이 어째서 全지구적으로 빈곤이라는 거센 파도 앞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까지 알려준다.

 

이런 책들을 일컬어 '사회과학서'라고 하겠지만 나에게 이책은 '빈곤은 더 이상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이자 정치적 문제'라는 점을 새롭게 일깨워준 '인문철학서'라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시절 십여년 넘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쌓은 내공과 중년을 지나면서 무르익은 저자의 학문적 깊이가 돋보인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좌파진영의 선전선동 구호도 보수를 대변하는 언론매체의 교묘한 말장난보다도 더 귀 기울이게 된다.

 

 

빈곤이란 단순히 소득이 적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속한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비해 굶어죽는 사람이 없으므로 우리사회에서 빈곤은 퇴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언이라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그렇다면, 빈곤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지극히 게으르거나 질병 혹은 예기치 못한 사고 등 개인적 불운이 겹쳤기 때문일까? 물론, 이와 같은 이유들 역시 사람을 빈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겠지만 절대적인 원인이라고 볼 순 없다. 만약, 이상과 같은 이유들을 빈곤의 절대적인 이유로 본다면, 일을 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위 '워킹 푸어'계층의 증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빈곤의 발생 원인을 저자는 지난 70년대 서구 영미 사회에서 나타난 이후 8,9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신자유주의 노선'에서 찾고 있다. 신자유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이윤추구를 위해서 자본과 노동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고, 경제행위에 따른 각종 규제가 완화되고 풀린 사회를 말한다. 자본이 극단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시장(자본)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시장의 편에 서서 국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왔다. 과거에 비해 세계 경제는 더욱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퇴치되기는 커녕 더 한층 강화, 확대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투자와 고용창출을 위해 세금을 줄이고...'

'수출 기업을 돕기위해 고환율 정책을 쓰며...'

'고용시장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하고...'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공공분야를 민영화하고...'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복지예산은 축소시키고...'

 

그러고보니, 우리 정부가 한 일들도 하나같이 국민이 아닌 시장(자본)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민주사회인 우리나라의 정부 대표는 선거를 통한 투표로 뽑이지 않는가? 숫적으로 소수인 자본가(부자)들이 아무리 몰표를 준다고 해도 그들만을 위한 대표가 선출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빈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펼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정책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미국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전통적으로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 유색인종 등을 대변하는 정당인 민주당과, 부유층 자본가 보수적 백인층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의 양당구조에서, 2000년 대선 때 극도로 가난한 농촌 지역이 극우파 후보 조지 W. 부시에게 80%가 넘는 표를 몰아준 현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빈곤층 보수화 현상의 원인이 궁금했던 토마스 플랭크(『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의 저자)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는 방대한 조사와 분석 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문화와 신앙이었다. 공화당과 보수주의 세력은 전략적으로 그렇게 몰아갔다. 그들은 경제 문제를 정치와 분리시키면서 진짜 문제는 낙태와 동성애와 총기 규제를 찬성하고 애국심을 우습게 아는 민주당과 리버벌리스트에게 있다고 공격했다. 그들은 진정한 미국인은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으며 사명감과 애국심이 충만하다는 문화적 프레임을 만들어 민주당 지지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표리부동한지를 부각시켰다. (중략)

빈곤은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문제라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영혼의 위기"라는 공화당 의원의 주장이 오히려 먹혀들어갔다. (중략)

미국의 서민들은 자신들의 경제가 왜 악화되었는지를 따지기보다는 '강한 미국'과 '경건한 미국인'이라는 오래된 가치를 선택했다. 공화당 정부 아래에서 부자를 위한 감세 조치가 내려지고 실업자가 늘어나는데도, 경제위기는 불가항력적인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미국을 망치는 불경스러운 진보파들의 작태라는 우파의 선전이 대중에게 설득력을 얻었다.

 

-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p268~271 中-

 

미국 역시 OECD국가 중 빈민층의 비율이 매우 높고, 각종 사회보장제도가 북서부 유럽에 비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인 공화당이 득세한 이유를  아주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90년대 초반, 민주당 출신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빌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는 선거 구호가 떠오른다. 그래, 맞는 말이다. '경제는 곧 정치요, 정치는 곧 경제인 것'이다.

 

한편, 저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그동안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영/호남이라는 지역주의와 세대간 갈등이 주요 이슈였기 때문에 빈자가 보수정당을 지지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다만, 그는 한국에서는 서민 밀집지역의 투표율이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의 투표율보다 낮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에 덜 적극적인 것은 정치가 자신들의 처지를 바꿔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기권한 사람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정치층의 잘못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민주당이나 진보당을 자신들의 정당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그 정당들이 새누리당과 다름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노무현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정치인 노무현의 서민적 풍모를 사랑하고 지역감정과 권위주의를 타파하고자 기울였던 눈물겨운 노력을 칭송한다. 필자는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진정성에 존경의 염마저 품는 자이지만, 그의 경제정책이 서민대중의 편에 섰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권력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은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물론, 안다. 소를 죽이지 않으면서 휘어진 뿔을 바로잡아야하는 대수술의 고민과 어려움을 어찌 짐작 못할까? 그러나 정권은 오직 정책의 결과로서 말할 뿐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가 '국정과제 어젠다'로 둔갑하고 재벌 개혁을 위한 초기 정책들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사실을 가난한 사람들은 모른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그저 민주당 정권이 진정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에 남는 게 없을 뿐이다. 집권 기간 중 집값 폭등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는, 정치 공급자의 천연덕스러운 변명을 수요자인 가난한 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니 '정치'가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고객의 무심함을 나무라서는 안 될 노릇이다. 노무현의 말처럼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빈곤의 문제는 결국 정치의 문제이다. 빈곤의 문제는 정치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를 통해서 풀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p280~281 中-

 

"빈곤의 문제는 결국 정치의 문제다."라는 저자의 말에 어지러운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랏님이 구제해야 할 의무가 있고...

빈곤은 인류사회의 필요악이라는 말은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교묘한 거짓말일 뿐, 가난은 인류의 절대악으로 반드시 퇴치되어야 하며...

가난은 게을러서도 일을 안해서도 아닌,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짜여진 사회구조와 질서 때문이라는 걸...

 

현재 우리 사회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학력자본이라고 불리는 공부(성적) 역시 '개천에서 나는 용은 더 이상 없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자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

.

.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를 고민하기에 앞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저마다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한다면,

나는 과연 양보를 할 수 있는지...?

양보를 한다면,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갖고 있는 것)들 중,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변하길 원한다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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