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straw dogs)와 같이 여긴다. -노자, [도덕경] 中-

 

 

이런 책이 있다. 

읽는 도중 딱히 답을 얻은 것도 아닌데 통쾌해지는... 그러나 종국엔 무릎이 꺾일 만큼 허무해지는...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가 바로 이런 책이다.

 

저자의 주장이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기존 철학자들의 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후 생각을 정리한 일종의 '에세이'에 가깝지만, 그의 주장의 상당부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윈의 말을 빌어 보자면, 생물종은 서로서로, 그리고 변화하는 환경과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다. 생물종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생물종은 실존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류의 진보'를 운운할 때마다 이 사실은 잊혀진다. 이 신념은 현실을 벗어난 관념이 되어 버려서,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이 기독교적 희망의 변종은 아닌지 의심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p16~17


 

동물들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다 죽는다. 그게 다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르(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인격체person며, 우리의 행동은 스스로 내린 선택 결과(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다른 동물은 자신의 삶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지만 우리는 의식적conscious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러한 이미지는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의식consciousness과 자아selfhood와 자유의지freewill며, 이것들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모든 생명체보다 우월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라는 뿌리 깊은 믿음에서 나온다.-p59


 

'인류의 진보는 환상이며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건 고대 서양 철학과 기독교가 만들어낸 '정념'에 불과하다'

얼마전에 읽은, 진화론을 다룬 과학서적도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동물과 큰 차이가 없으며,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한 다음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먼저 행동하고 그 행동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낼 뿐이다.  

 

한편, 이 책의 원서 제목(Straw Dogs: '추구' 즉, 짚으로 만든 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인 존 그레이는 동양의 도교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닮은 철학이라고 보았다.


 

삶을 잘 살아가는 솜씨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도교는 좋은 삶에 대한 지침을 얻기 위해 다른 동물로 눈을 돌렸다. (...) 도덕에 속박된 사람들에게는, 좋은 삶이란 영속적인 분투를 의미한다. 그러나 도교에서의 좋은 삶은 애를 쓰지 않고 본성에 따라 사는 삶이다. 가장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이유들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결코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여러가지 대안들을 놓고 재느라 고생하기보다는, 상황이 흘러가는대로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선택한 대로 살기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가는 이치대로 산다. -p152

 

동양사상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몰입의 경지'에 이르렀을때 인간은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며 최고의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몰입이란 다름아닌 '물아일체(物我一體)'가 아니던가. 마치 동물(본능)처럼 기계처럼 존재하는 것 말이다.


나를 잊어버린다는 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모든 이성적 활동의 부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동물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기존의 인간 중심적 사고 즉 휴머니즘이 얼마나 오만하고 단편적 사고인지를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고를 심어준 게 다름 아닌 종교라는 점. 그리고 운명과 우연으로 불안에 떠는 인간을 지켜주겠다고 주장하는 종교와 정치가 어떻게 서로 빼닮았는지를 확인하는 순간, 깊은 회의감과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실제로는 기만과 환상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자유롭고 의식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자신이 그러하다고 믿는 바로 그 모습(자유로운 존재)에서 도망치려고 끊임없이 애를 쓴다.

인간의 종교는, (정작 인간이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자유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다. 20세기에는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유토피아가 이 기능을 수행했다. 그리고 정치가 오락으로조차도 관심을 못 끄는 오늘날에는 과학이 인류를 구원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p157~158 中 발췌-

   

자신은 현실 정치도 종교도 믿지 않으니 그럴 일은 없다고 단정 짓지 마시라. 

왜냐하면 종교와 정치로부터 톡톡히 쓴맛을 본 배신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일수록 테크롤로지를 신봉하기 쉬운데, 과학기술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고통없는 삶' 더 나아가 '불로(不老)와 불멸(不滅)의 삶'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철학과 대부분의 종교와 상당수의 과학이, 인간의 구원에 대해 지치지도 않고 절박한 관심을 보여왔다.


과학은 인간이 가장 오래도록 가져왔던 환상이 드디어 실현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질병과 노화가 없어지고, 결핍과 가난도 사라지며, 인류는 불멸할 것이라고 말이다. 예전에 기독교가 그랬듯이, 오늘날의 과학이라는 신념도 기적을 바라는 희망을 먹고 살아간다. 하지만 과학이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마술을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휴머니즘의 '환상'에 대해, 시간은 나약하고 정신없고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라는 '현실'을 들이대며 보복한다. 과학이 가난을 없애고 질병을 완화할 수 있다해도, 정작 쓰이는 곳은 독재를 정교하게 하고 전쟁의 기술을 완벽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p161

 

과학은 인간이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도와준다. 그렇지만 인간의 욕구를 바꾸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욕구는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지식에는 발전이 있지만 윤리에는 없다. 과학, 역사, 그리고 세계의 모든 종교가 이를 증명한다. (...)


역사란 진보나 쇠락의 과정이 아니라 얻다가 잃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지식의 발전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역사를 보면 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p196~199 中 발췌

 

책이 종반부로 향할수록 안타깝게도 '그래, 정말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일 뿐이구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만다.


그리고...

어느덧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 한복판으로 '오기'같은 게 솟구친다.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 움직이는 나란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좋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렇게 살아도 되겠네...?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종교를 만들어내고 도덕을 만들어내고 철학을 만들어냈다고 치자.

저자의 주장대로 다 거짓이고 관념에 불과할 뿐이지만,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진지한 자세로 삶에 임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까지 부인할 순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지한 삶의 자세란 뭘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뎌내는 삶일까?

(아니다...)

 

타인과 집단을 위해 기꺼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일까?

(아니다...)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내키는대로 사는 걸까?

(아니다...)

 

 


고통스런 오늘을 보낸다고 더 나은 내일이 보장되는 건 절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삶...

개인의 존재에 깊은 의미나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확신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심신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 삶...

인간의 삶은 이성적 판단과 선택보다는 우연과 운명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미신에 천착하지 않는 삶...

불투명한 미래와 허튼 희망에 모든 걸 내맡기지는 않되, 매순간 살아있음을 만끽하고 영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

 

 


진지한 삶의 자세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닐런지...


 


왠지 이 책은 카잔차스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철학에세이 버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찾아온 것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야말로 존 그레이가 주장하는, 하찮은 인간일 뿐인 '호모라피엔스'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삶을 산 인물이니까.

그는 나에게...

진정한 자유란, 불안과 불안전함을 받아들이고 생명과 인생(시간)에 대해 초연해지는 순간 찾아온다는 걸 깨닫게 해주리라.  


 

    

참고로,

이 책의 저자인 존 그레이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저자와는 동명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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