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저 너머에 -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저 너머에
M. 스캇 펙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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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리고 저 너머에>는 1978년스캇 펙 박사의 첫번째 책인 <아직도 가야할 길>이 출간된 지 이십여년만에 나온 책으로 <아직도 가야 할 길>의 후속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결코 좁혀질 것같지 않은 종교와 과학의 경계를 허문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에서 스캇 펙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참된 종교인으로의 삶의 자세로 해석한 것 같다. 


사실, 종교와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까지도 어쩌면 그 출발점은 같다. 

바로 '생각(思惟)라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무지 풀릴 길 없는 수수께끼 앞에서 인류가 창조자(신)를 '창조'해낸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유 과정의 결과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유의 과정 속에서 인류의 종교가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한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리고 경험과 사실에 입각한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란 다른 생물체와 마찬가지로 수분 단백질 등등의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체일 뿐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과 <그리고 저 너머에> 등 스캇 펙 박사의 저서들은 이상의 세 가지 궁금증을 정신과 상담의라는 저자 자신의 직업적 특징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종교인으로서의 관점을 조화롭게 결합시켜 해답을 찾아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특히, 정신과 의사로서의 관점은 일찍이 유대인 수용소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정신과 전문의로서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을 떠올리게 하며, 사랑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종교적 관점은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릭 프롬을 떠올리게 한다. 굳이 차이라고 한다면 각기 다른 시대에서 태어나 각기 다른 경험을 했다는 시공간적 차이와 스캇 펙 박사가 훨씬 더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띄고 있다는 것 정도다.  하여, 비종교인으로서 스캇펙 박사의 책을 부담없이 읽어내려간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자의 영적인 경험과 주장들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 악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분석과 해석에는 십분 공감하는 바이다. 


악의 문제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내가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삶의 목적이 그저 고통 없는, 곧 언제나 편안하고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문제 해결에는 고통이 다르고 차원 높은 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은 쉽지 않다.

(......)

우리들 대부분은 죄, 실패, 결함 등의 증거가 드러나 몰리게 되면 우리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칼 융이 사용하는 '거부'라는 단어의 의미는 훨씬 적극적인 그 무엇을 포함한다. 죄와 악의 경계선을 넘어 버린 사람들의 특성은 자신들의 죄의식을 분명히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결함은 양심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양심의 고통을 인내하지 않고 거부해 버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를 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죄가 아니라,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86~94 中-


저자는 자신의 본질적 실체와 마주하려하지 않는 '거부'야말로 악의 근원이요 죄의 시작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양심의 가책'이란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진정한 죄란 바로 양심에 위반된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 자체를 회피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용서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린 사실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훨씬 더 많이 속이며 살아간다. 바로 자기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우리는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한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더 강하다. 물론 두 가지 형태의 부정직함은 서로를 부추겨 거짓의 상승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일정한시간 동안 일부의 사람들을 속일수 있지만, 자기 기만은 잠재적으로볼때 무한계로 나타날수 있다. 물론 우리가 악 또는 광기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한도 내에서이다.

자기 기만은 스스롱게 온유한 태도를 취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이고, 자아의 '그림자'를 증대시키며, 동시에 자아에 대한 어둠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와는 반대로 스스로에게 정직해진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자아를 사랑하는 행위를 선택한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210 中-


스캇 펙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신(조물주)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선에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악에 복종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혹시 선과 악의 경계선 언저리에 머물기를 선택할 순 없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저자는 C.S루이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주에 중립 지대란 없다. 어떤 곳에서나 어떤 순간에서나 산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거나 또는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고 있다"

아 마도 우리는 선과 악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신과 악마의 중간 지점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선택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며, 불복종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210~211 中-



공교롭게도 스캇 펙 박사의 <그리고 저 너머에>와 셔윈 뉴랜드의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라는 책을 동시에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죽음을 가장 가깝게 지켜봐 온 의사의 근무일지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죽음의 양태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스캇 펙 박사가 <그리고 저 너머에>에서 언급하고 있는 '죽음'이 추상적인 차원이라고 한다면, 셔윈 뉴랜드 박사가 다루고 있는 '죽음'은 현실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생을 인위적으로 끝내고자 하는 결정은, 반드시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누구든지 그 죽음이 피치 못한 것이었음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교수였던 브리지맨은 1946년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로 말기 증세에 이른 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79세의 나이로 쓰러질 때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7권짜리 저서의 색인작업을 마무리한 후 권총으로 자살했다. 브래지맨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수행할 수 밖에 없음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직접 어떤 원칙을 세웠으면 좋겠네. 피할 수 없는 종말이 다가왔을때, 의사에게 끝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말일세"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224~225 中-


죽어가는 환자를 돕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불가항력적인 고통속에서 죽음으로 향해가고 있는 환자의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줄여주는 것 역시 의사의 역할이라 하겠다.  마땅히 합당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된다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낼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의 마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반면, 안락사에 대한 스캇 펙 박사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안락사를 삶의 의지 부족이나 순간의 판단 착오로 이루어지는 자살과 같은 차원에서 접근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내가 말하는 품위 있는 죽음이란 안락사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안락사란 태생적으로 산란한 것을 깨끗하게 처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죽음에 따른 실존적 합법적인 고통을 줄이고, 그럼으로써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거부의 태도 또한 아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거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느낌에 대해 입을 닫는다거나 심지어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면서 아예 모르는 척하는 등의 제자각거부 형태를 보인다. 죽음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불가피한 죽음을 의식해야 되는 고통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의미 있는 의사소통의 기회를 막아 버리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가면서까지 배움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다.

품위 있게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죽음을 배움의 기회로 삼는 것이며, 영혼의 진정한 존엄성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육체적 파멸을 자기 삶의 정화 과정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210~211 中-




흔히, 인생을 뒤흔드는 책들이 그러하듯 한번 읽기만으로는 역부족인 것 같다.

특히, 나의 편견 혹은 짧은 지적 수준으로 말미암아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집중력이 종종 흐트러졌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다시 되돌아가 읽기라는 초소한의 노력마저 하지 않았더랬다. 다시 읽어봤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는 나태인가 교만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모든 악의 시작은 나태와 교만이라고 일갈한 스캇 펙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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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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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이와 같은 질문에 그 누구도 정답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만약 인간이 선하기만 한 존재라면 이런 질문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인간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라는 질문 자체야말로 인간에게는 선한 면 못지 않게 악한 면도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인간은 선한 면보다는 악한 면을 더 많이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과 전문의로 정신분석과 상담 및 치료를 실시해온 스캇 펙 박사 역시 인간에게는 악한 면이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직업적으로 인간의 선한 모습보다는 악한 모습을 마주한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저자에게,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1983년도에 쓰여진 그의 명저, <거짓은 사람들>은, 인간은 왜 악한 걸까? 아니면 인간은 어떻게 악해지는 걸까? 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거짓의 사람들>에서 스캇 펙 박사가 예로 든 사람들은 병리학적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니다. 이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상처로 정신적 퇴행이나 투사 혹은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 폐해가 크지 않다. 스캇 펙 박사가 주목한 '거짓의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자신을 위해 타인의 삶을 망치거나 사회에 크나큰 폐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식을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부모들 역시 스캇 펙 박사가 말한 '거짓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으며, 국민과 대중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인들 역시 '거짓의 사람들'에 포함된다. 

 

흔히,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만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스캇 펙 박사가 지적했듯,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갇혀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비록 입으로는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형량을 낮추기 위한 자구책일뿐,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잘못을 안다는 건 바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죄책감이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면서 인류가 처음 느꼈던 감정 역시 바로 이 부끄러움이였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스로의 모습과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에서 용서가 시작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종교적 가르침도 바로 이와 같은 이치에서 나온 것이리라.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은 스캇 펙 박사가 말한 '거짓의 사람들'이 아니다. 악을 일삼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동이 '잘못'되었으며,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째서 악에 굴복하는 마는 걸까?

 

어떤 식으로든 말할 수 없는 고통, 보통 사람들이 겪는 것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랆들이 대부분 정신적으로는 누구 못지않게 건겅하고 진보된 사람들이다. 위대한 지도자들 중에는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극심한 고통들을 견뎌 내는 이들이 많다. 거꾸로, 정서적 질환의 가장 밑바닥을 파 보면 감정적인 고통을 겪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마음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우울과 회의와 혼란과 절망을 고스란히 경험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감 있고 편안하고 자신에 만족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건강할 수 있다. 사실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확실한 질병에 대한 정의이다.

악한 사람들은 투사와 희생양 찾기(책임전가)를 통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남에게 떠너밈으로써 죄책감의 고통을 깨끗이 거부한다. 죄책감은 자신의 죄, 부적절성, 불완전성을 일깨워 주는 고통스러운 인식인 까닭에서다. 이로써 그들 자신은 고통이 없을는지 몰라도 대신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고통 유발자이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병 든 사회의 축소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 p166 中-

 

마음의 고통을 거부할 때, 악과 손을 잡는다.

자신의 미흡함과 부족함을 직시하지 않고 부정하고 외면할 때가 바로 악한 모습이 발현되는 순간인 것이다.


악한 개인은 나약한 영혼일 뿐이다. 그러나 악이 하나 둘 모여 집단을 이루면 어떻게 될까? 바로 영혼을 잃어버린 집단의 악이 만들어진다. 인류 역사상 자행된 전쟁과 학살은 모두 하나같이 집단 악의 발로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끄는 존재가 아닌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은 집단 속에서 훨씬 더 안정감을 느끼고 집단의 이름으로 잔인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스캇 펙 박사는 베트남의 밀라이 학살 사태를 예로 들어 개인의 악이 어떻게 집단의 악으로 표출되는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다.

 

전문화란 집단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이점이다. 집단이 개인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다. 제너럴 모터스사는 직원들이 업무부, 설계부, 생산부, 조립부 등으로 전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토록 엄청난 수의 자동차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고도의 생활 수준도 그 기반은 전적으로 우리 사회의 전문화에 놓여 있다. 전문화 자체를 악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시대의 많은 악들이 이 전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철저한 확신을 갖고 있다. 전문화가 집단의 미성숙과 집단 악의 잠재성에 이바지하는 양상은 몇 가지 기제를 통해 다양하게 나타난다. 집단 내 개인들의 역할이 전문화될수록 개인이 도덕적 책임을 집단의 다른 부분에 전가시키는 일은 가능해지며 쉬워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버리는 것은 물론 집단 전체의 양심도 너무 분해되고 희석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될 수 있다.

 

-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 p292~ 294-

 

이 밖에도 저자는 베트남전 초기 미국 사회의 '골치거리들'이 어떻게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되는지, 그리고 '골치거리들'만 집단적으로 모아 놓은 '군대'가 어떻게 이성을 잃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잔인한 학살을 하고도 그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스캇 펙 박사는 미국의 베트남 반전 시위가 본격화된 건 1967년 이후 그러니까 '골치거리들'이 다 군대에 입대한 후 더이상 보낼 사람들이 없어지자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사회적 '골치거리들'이 아닌, '모범시민들'이 군대에 끌려가게 되자, 들불처럼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까 미국 사회의 망썽쟁이들이 군대에 갈 때에는 미국 사회 전체가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지지하다가, 법과 질서를 잘 시키는 모범시민들이 군대에 가게 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집단 이기심과 집단 악이 발현되는 메커니즘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미국 사회의 '골치거리들'은 집단 악의 희생자이자, 집단 악의 집행자인 것이다.

 

 

스캇 펙 박사는 이처럼 집단 악이 발현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을 꼽고 있다.

 

게으름이란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은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투표로 뽑은 정치인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지켜보며 감시하는 것을 귀찮아한다. '알아서 잘 하겠지...'하는 마음은 사실 '믿음'의 발로라기 보다는 '귀찮음'의 소산인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성찰과 죄책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악은 바로 자기 성찰과 죄책감을 회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르시시즘은 어떻게 집단의 악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바로 집단의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외부의 적에 대한 집단 증오심과 적개심을 조장하고 실패와 패배를 모욕으로 받아들이며 무차별 보복을 감행한다.

 

무의식적이든 고의적이든 나르시시즘의 이용은 악한 것일 수 있다. 악한 개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이라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다 비난하고 파괴하려 함으로써 자신들의 자기 성찰과 죄책감을 피한다. 이처럼 악독한 나르시시즘적 행동이 집단에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실패한 집단이 가장 악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패는 프라이드에 손상을 가져온다. 짐승도 상처를 입으면 악해진다. 건강한 유기체에서라면 실패는 자기 성찰과 비판에 자그제가 도리 것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자기 비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어ㄸ너 양상으로든 불가피하게 격렬히 분노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실패의 시간이다. 집단도 마찬가지다. 집단의 실패 및 자기 비판에 대한 자극은 집단의 프라이드와 응집력을 해치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집단 지도자들에게는 실패의 시절이 오면 다른 나라 사람이나 '적'을 향한 집단의 증오심을 한층 끌어올림으로써 집단 응집력을 강화하려 하는 것이 기본이다.

 

-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 p303~304-

 

스캇 펙 박사는 전문화가 갖고 있는 악의 잠재성과 함께 집단이 갖고 있는 악의 잠재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가 집단 안에서 조금만 더 개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책임감을 갖는다면, 우리가 평소 나태함에서 벗어나 조금만 더 진리와 선을 추구하기 위해 부지런해지고 교만 대신 겸손함을 배운다면, 집단 악이 탄생할 가능성 또한 현저하게 낮아지리라.

 

'결코 쉽지 않은 책'이라는 추천사처럼 이 책은 정말 쉬운 책이 아니다.

처음에는 저자의 '고백'처럼 지나치게 종교적 색채가 강해서 거부감이 일었으나, 책장을 넘길수록 저자의 주장에 귀 기울이게 된다. 첫 페이지부터 좀 더 마음을 열고 읽어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처음 질문인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라는 원론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본다면, 인간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선으로 향할 것이냐 아니면 악으로 향할 것이야 는 전적으로 우리의 판단과 자유의지 그리고 행동에 달려 있다.

 

저자의 지적처럼, 이책은 위험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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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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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고 진부함과 신선함이 교차했다.  

진부함이란 저자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 특정 종교의 색채를 남김없이 발산한다는 점이고, 신선함이란 성인 남성의 일탈과 중산층의 이중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자의 또다른 저작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찾아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법학 교수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 속 인권 이야기다.


국내외의 다양한 영화 속 장면과 대화 혹은 줄거리 및 등장인물 설정에는 우리도 모르게 소수자의 인권이 무시되거나 심지어 유린되기까지 한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예를 들면, 영화 <300>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키면서까지 배신자인 에피알테스를 꼽추 장애인으로 설정한 점과 뇌성마비 장애인 여성과 전과자 남성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역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은연중에 스며들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영화 <오아시스> 속 장애인의 관점이 사실은 장애인이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장애인은 이러할 것이다'라는 정상인의 상상 혹은 추측이야말로 이미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맹점'인 것이다. 


공주는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뇌성마비 장애인 중에 일부가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주의 경우 의사표현이 분명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지적장애가 동반되지 않은 뇌성마지 장애인입니다. (......) 그런데 영화 속의 공주는 남자친구가 교도소에 가는데도 무기력하게 그냥 방치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 공주는 경찰서에서 몸을 부딪치며 저항해본 것을 마지막으로 남자친구를 구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합니다. (......) 종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동의에 의한성관계였다는 점은 전과3범인 그가 당연히 주장해야 하는 내용입니다.입증이 어려운 상태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영화는 '사회적 편견'떼문에 공주와 종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사회의 편견 대무에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시각 자체야말로 편견입니다. 이창동 감독이나 문소리가 뇌성마비 장애인의 외적인 모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대로 재현해내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뇌성마비 장애인의 내면을 제대로 읽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147~149 中-



장애인에 대한 인권 유린뿐만이 아니다.

' 드라마 천국'이라 할만한  이 땅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사랑으로 어떻게 미화되고 있는지 그 궤적을 따라가 보면 심각한 남성우월주의와 마주하게 되고, 노동 관련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는 노사갈등이 어떻게 노노갈등으로 변질되었으며 노동운동단체들의 권력지향성과 이중성을 접하게 된다. 특히, 울산현대자동차 식당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 전원을 해고한 과정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밥, 꽃, 양>은 그 제목만으로도 한동안 명치끝이 아파왔다.


우리나라에는 비정규직들이 겪는 이런 기막힌 상황을 그린 훌륭한 다큐멘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분야의 선구적인 영화로는 1998년부터 3년간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린 임인애, 서은주감독의 <밥, 꽃, 양>(2002)을꼽을 수 있지요. 1998년 8월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정리해고에 반발하여 36일간 파업을 계속합니다. 이 파업의 결과로 노사는 277명만 정리해고하는 데 합의했고, 파업의 평화적인 종결은 새로운 노사문화의 창출로 기록되었습니다. 원래 노사는 식당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 276명 전원과 남성직원 한명을 해고하는데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식당 여성노동자 132명이 위로금을 받고 자진퇴사하자, 뒤늦게 그 빈자리르 여러 부서의 남성 노동자들로 채워넣었습니다. 이 식당 여성노동자들은 평상시뿐만 아니라 파업기간중에도 동료 남성노동자들을 위해 밥을 지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노사는 이들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평화로운 노사화합을 이끌어냈습니다. 정규직에서 잘린 여성노동자 144명은 현대자동차가 아니라 노조의 하청노동자로 재고용되었습니다. 월급은 60%깎였고 인원도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이듬해 현대자동차가 4천억원의 순이익을 내자 식당 여성노동자들은 함께 해고되었던 생산직 남성노동자들과 함께 복직투쟁에 나섰는데, 회사는 남성노동자들만 다시 채용하고 여성노동자들과는 아예 협상에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노조는 이 모든 과정에서 침묵했습니다.

(......)

우리나라에서도 대기업 노조와 소규모 노조,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자기들끼리 싸우게 하는 '이노제노(以老制老)'정책이 성공을 거두기시작한 것입니다.

' 밥'을 짓다가 파업의 선봉에서 투쟁의 '꽃'이 되었고, 결국 남성중심의 노조와 회사측의 협상에 희생'양'이 되고 만 아줌마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싸움의 희생양은 일차적으로 <밥, 꽃, 양>의 식당 여성노동자들이었지만, 결국 남녀를 불문한 비정규직전체로 확산되었고, 앞으로는 정규직 노조로 이어질 게 분명합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아직 자기 힘을 유지하고 있지만, 회사가 정규직 자체를 잘 뽑지 않는 상황에서 정규직 노조의 입지도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189~191 中-


'노동계의 이해집단 속에서 외면받아온 다큐멘터리 <밥, 꽃, 양>이 만들어진지 1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살펴보면, 결국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노조공동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저자의 이 한 마디야말로 오늘 우리가 직면한 이 땅의 노동 시장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많이 배우고 공부했으며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직업 안정성이 우선되어야 하며 더 많은 보수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김두식 교수가 책에서 밝힌 것처럼 철도공사 직원 월급이 교수보다 더 많아도 된다는 데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해먹고는 내팽개치는 '짓'만큼은 어떤 말로도 용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노동계를 이끄는 노동운동가들은 반드시 이 점을 직시해야 하리라.


일본 제조업의 위력은 장인 정신에 밑바탕이 있다.

장인 정신이란 , 내가 만든 물건에 혼(魂)을 담아내는 것이다. 대량 생산 체제 속에서도 자부심을 갖고 있는 노동자의 손을 거친 물건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중국산 제품은 이제 전세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지만 '위조와 저질'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다. 물건과 먹거리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전문가도 있다.

"사형제도가 건재하며 중형을 면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국사회애서 먹거리에 가해지는 불법행위는 전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인들에게는 장인정신 즉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와 특정 종교인 및 여성과 외국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그동안 얼마나 편협하고 이기적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불편'함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다소 엉뚱한 책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많은 것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편견의 시작은 불편함 즉 마음의 불편함에서 시작되고 편견이 곧 차별과 폭력을 부른다. 그러므로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개인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내재되어있는 불편함을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리라.


2012년 임진년 한해를 마감하고 2013년 계사년 새해를 맞이하는 길목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명저를 한편 만난 것 같아 기쁘고도 고맙다. 



참!

여담이지만 한마디 남기자면, 외래어 표기법 원칙과는 다소 다른 표기법이 마음에 걸렸다. 예를 들면, 씨나리오, 씨애틀, 후쎄인, 메씨지, 씨스템, 쿄오또, 초오센진, 스딸린식 등등 외국어 표기에 있어 된소리되기가 혀용된 언어는 베트남과 타이어뿐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하나같이 외국어 표기법을 무시했나 싶다. 특히, 영국의 대처 수상을 '마가릿 새처'로 표기한 데에 이르자 정말 하마터면 화가 날뻔  했고 정말 그 이유가 궁금했다. 물론, 이와 같은 표기법은 저자의 의도라기보다는 출판사의 의도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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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 모르면 당하는 확률과 통계의 놀라운 실체
카이저 펑 지음, 황덕창 옮김 / 타임북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사서 추천 코너에서 고른 책이다.

'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직절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에 끌려 집어들었지만 페이지를 몇 장 넘기다가 복잡다단한 통계적 설명에 금방 질려버리고 말았다. 스스로 끝까지 다 읽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는데 일요일저녁시간에 인내심을 갖고 한장 두장 읽다 보니 마지막까지 완독(完讀)을 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일명 '새빨간 거짓말'로 상대방을 해치는 일반적인 나쁜 거짓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새하얀 거짓말'로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하는 선한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가 바로 '통계'란다.

숫자에 쉽게 속아넘어가는 사람의 심리를 정확하게 꼬집은 말이라 하겠다.


카이저 펑 역시 자신의 책에서 통계의 함정 혹은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디 즈니가 장시간 대기행렬에 대한 타계책으로 채택한 '패스트패스'제도가 실제로는 대기 시간이 줄기는 커녕 더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만족도를 끌어 올렸다는 사실과 '녹색불이 들어오면 한대씩'이라는 램프 미터링이 운전자들의 격렬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고속도로의 차량 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었다는 점 등은 매우 놀라웠다.


이 밖에도 각종 서비스센터는 실제 대기시간보다 다소 길게 고객과 약속을 잡음으로써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처리를 빨리 해주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꾸며 왔다는 저자의 지적 역시 행동심리학 혹은 행동경제학 분야에서도 이미 검증된 사실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를 포함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숫자와 통계에 속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어이가 없다.


도핑테스트와 거짓말탐지기의 불편한 진실이라든지 비행기추락사고에 대한 대중의 과도한 불안과 복권당첨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모두 우리가 얼마나 손쉽게 숫자에 조정당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검사관은 겁을 먹게 된다. 두 가지 오류가 각각 치러야 할 대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거짓 양성 반응은(미국반도핑기구 CEO트레비스 티가트가 말했듯이 사실은 모든 양성 반응이 다 해당된다) 호된 법정 공방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양성 판정이 뒤집힌다면 반도핑 기구는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게 되고 검사 프로그램에 대한 믿음도 추락할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음성 반응은 리즈처럼 선수 당사자가 실포해야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따라서 거짓 음성 반응은 대부분 들어나지 않은채 그냥 묻히고 만다. 선수나 검사관이나 결국은 거짓 음성 반응이라는 편리한 커튼 뒤로 숨어버릴수 있는 것이다. 


-카이저 펑, <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中 p189~190-


도핑테스트의 정확도가 99%라고 한다면 1%의 오류 또한 존재하리라. 이 1%의 오류로 인해 불명예의 나락으로 떨어진 스포츠 스타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는 거짓 양성반응에 대한 '불운'보다는 거짓 음성 반응의 '혜택'을 더 많이 누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자면 이렇다.


어떻게 스테로이드 검사는 한 명 잡을 때마다 열 명을 놓치는가?

(1000명의 선수 중 약물 부정을 저지르는 선수가 10%라면...)



선수 (1000명)

                   약물부정(100)                                   약물부정 아님(900)

                                                                                                                                             

         진짜양성반응(9)    거짓음성반응(91)      거짓양성반응(1)       진짜음성반응(899)

                                                              

                             놓친 약물 부정 선수            〓   91   〓    10

                           잡아낸 약물 부정 선수                  9           1


진짜 양성과 거짓 양성은 합쳐서 1%(검사 대상 1,000명에서 10명의 양성 반응에 해당하는 비율)가 되어야 한다. 거짓 양성 반응이 더 많이 나오면 진짜 양성 반응은 줄어들고, 이는 거짓 음성 반응이 더 많이 나오는 결과를 낳는다.



-카이저 펑, <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中 p184 도표-



이와 같은 결과는 스파이 한 명을 잡기 위해 111명이 누명을 쓰는 상황(거짓말탐지기)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특히, 일보예보에서 자주 접하는 "100년만의 한파" 혹은 "10년만의 무더위"등과 같은 표현은 전형적인 인식의 함정을 불러온다고 한다. 100년만의 한파란 일어날 확률이 1/100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빈도를 따져 볼때 최근 10년 동안 일어날 가능성은 무려 10%라고 한다. 이는 인류가 자연 재해의 발생 가능성을 지나치게 낮게 생각하도록 만들며, 재해보험회사까지 파산으로 내모는 주범(?)이라 하겠다. 한편,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할 확률과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약 천만분의 일로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추락 사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한편,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은 높게 보는 것 역시 대다수 사람들이 통계 수치를 얼마나 왜곡시켜 받아들이는 지를 설명해준다.


통계 수치를 분석하고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다.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이 통계 수치에 놀아났는지 통계를 낸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아마도 상당히 놀라운 결과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통계 수치는 모두 거짓일까?

아니다!

통계는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통계를 다루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선의 혹은 악의적 착오를 불러 일으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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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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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진지함에서 벗어나 유쾌하게 읽은 책이다.

미스터리 추리소설에서 최근 진화학과 사회학에 관한 책들을 읽게 되면서 순식간에 재미에서 지식습득을 위한 독서가 되어버린 터였는데, 법학자 김두식교수의 고백에 마치 물이 스펀지에 스며들듯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제목이 말해주듯, 저자의 주장은 단순명백하다.

바로, 욕망을 억누르려고만 하지 말고 적절하게 분출하고 살아야 한다! 이다.

일명 모범생으로 대표되는 '계(戒)'의 세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정한 상황과 마주하면, 어느 순간 욕망을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 '색(色)'의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고 한다.


그 실례로 저자는 2007년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학력위조 사건과 스캔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로 '신정아와 변양균 스캔들'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학벌주의와 엘리뜨주의로 똘똘 뭉친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이요 초상이라는 저자의 지적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그 당시 스캔들의 주인공들을 맘껏 술안주로 삼았음은 물론이요, 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유명 인사들의 '학력커밍아웃'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마음껏 즐기지 않았던가. 내면속에 가라앉아 있는 내 욕망의 표출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거대한 욕망의 늪이라 하겠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깊숙히 발목이 잡힌다. 저자가 보기에 신정아 역시 학벌이라는 늪에 빠진 피해자 중 하나다. 여기에서 '피해자'란 그녀가 아무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행한 '죄'보다 훨씬 가혹한 '벌'을 받지 않았나 하는 의도에서 나온 표현일 뿐이다. 저자 역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학벌이란 무시무시한 장벽 앞에선 누구나 한번쯤 거짓말의 유혹을 느낍니다. 출신학교 이야기를 할 때 누구도 증명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거짓말을 해보면 주변 분위기가 당장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신 정아씨도, 윤석화씨도 처음 시작은 그랬을 겁니다. 우리 모두가 느끼는 똑같은 열등감, 유혹 앞에서 조금씩 선을 넘다보니 그렇게 망가지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희생양 사냥이 시작되고 나면, 누구나 느끼는 학벌 앞의 우월감, 열등감, 유혹의 존재를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한 사람만 죽일 놈, 미친 놈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망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며 더 맹렬한 사냥을 벌입니다. 그 과정에 분명한 쾌감이 있습니다.


-김두신, <욕망해도 괜찮아>중 p62-


왠지 숙연해진다.

칸 자스대학 졸업장도 없는 신정아로 하여금 예일대 박사학위까지 위조하게 만든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모든 걸 다 걸만큼 그렇게 절박하게 예일대 박사학위가 필요했단 말인가? 그건 바로 내 안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학벌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열등감이리라.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못 바꾼다'라는 말로 귀결되는 바로 그 열등감말이다.


한편, 스캔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변양균에 대해서 저자는 "제때 불태우지 못한 소년의 열정"이라는 말로 정곡을 찌른다. 학벌지상주의 사회에서 그 학벌을 갖춘 사람들은 모범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생 계(戒)의 세계에서 살아오면서 내면의 욕망을 억눌러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연히 내면의 욕망이 자극을 받자 하염없이 무너지고 만다. 보통은 아무런 일없이 혹은 집안의 풍파 정도로 끝이 나지만 변양균 전실장은 운이 없었다면 없다 하겠다.


이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계(戒)' 즉, 규범의 세계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늘 칭찬받았으며, 규범을 어긴 일이란 기껏 과속딱지 몇번 끊은 게 전부입니다. 법을 만들어 적용하고 집행하며 평생을 살아온 살마들도 있습니다.

(......)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리에 너무 '훌륭한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깊은 내면에서 이들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제때 불태우지 못한 '소년'입니다.


-김두신, <욕망해도 괜찮아>중 p86-


제때 불태우지 못한 소년의 열정은 결국 중년에 접어들어 '일탈'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일탈의 길에 빠져들지 못한 소년들의 반대편에는 '사냥꾼이 된 소년들'이 기다리고 있단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계(戒)'의 결정판인 이들은 남의 사생활에 유난히 관심이 많아서 억눌린 욕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엿보기'를 선택한단다.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족들-주로 저자의 모친-을 회상하면서 우리 사회에 고착되어 있는 '중산층 신화'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평생 부부교사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는 저자의 모친이야말로 '중산층 신화'의 희생양이라 하겠다.


어 머니로 상징되는 중산층은 규범을 만들고 바꿀 의지도 힘도 없으면서 규범의 화신처럼 살ㄹ아온 사람들입니다. 신사보다, 귀족보다, 재벌보다 훨씬 강하게 규범을 내면화한다는 점에서 포리스티어 대위아 똑같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상류층보다는 오히려 중산층입니다.

(......)

그들은 정직이 최선의 덕목이라고 믿고 자랐지만 하루하루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내면화된 규범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돈이란 성실히 살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지 굳이 추구할 목표가 아니라는 고상한 가르침을 진짜로 믿고 실천하지만 이상하게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분노가 쌓이지만 표출할 방법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기껏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이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다른 당나귀를사냥하는 것입니다. 그게 지금 인터넷 공간에서 매일처럼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김두신, <욕망해도 괜찮아>중 p156~p157-



나보다 윗세대이긴 하지만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언급된 저자의 유년기와 사춘기 시절은 상당히 익숙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현기증이 일었다. 바로 질투다. 저자의 부친은 중학교 교장선생님이었고 엄마는 여상 윤리선생님이란다. 누나는 수학박사에 교수남편을 두었고 형은 저저와 마찬가지로 미국 유학파에 대학교수이다.


저자는 또한 어떠한가? 교수 아내를 둔 사법고시 통과하고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석사를 땄단다. 이 정도 수준의 집안이 대한민국의 평균은 결코 아니다. 정말 아주 잘 나가는 집안이라 하겠다. 재벌과 비교하며 중산층의 비애를 운운하는 것 같아 솔직히 불편하다. 물론, 이 땅의 중산층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획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지만 세대를 거듭하며 놀고 먹어도 될 만큼 풍족한 자산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노동자'로 볼 수는 있겠지만 이마저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서민이라 불리우는-이 대다수이다. 


생존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야하는 이들에게 '욕망'은 사치일 뿐이다. 그들에게 욕망해도 괜찮다는 저자의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하여, 이 책은 중산층을 위한 책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종교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저자가 가하는 종교적 비판(?) 은 상당한 수위의 통쾌감을 전해주는 한편, 선(線) 밖의 사람들에게는 역시나 상당히 억지스럽게 다가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교회오빠 출신의 자기반성처럼 들리니 말이다. 그러나 법학자로서 종교를 바라보는 저자의 태도에는 상당히 날이 서 있다.


이와 같은 작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 모두 한두가지는 갖고 있는 욕망이 자극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꼭꼭 숨겨져 있는 욕망들과 하나씩 마주하는 것은 상당히 불편하고 정신적 피곤함을 불러오지만 또한 신선하고 흥미로운 작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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