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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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지난 계절, 죽을 듯이 울어대던 그 많던 매미들은 결국 죽고 말았다.

일년도 아니고 여름 단 한철을 위해서 짧게는 2년 길게는 17년씩 땅속에 묻혀 지낸다는 매미...

그래서 어떤 시인은 '미움, 미움' 하고 운다고 했던가.

지도 더 살고자픈데 더 살 수 없는, 지 팔자가 너무 서럽고 미워서 '미움, 미움'하고 운단다...


어쩌다 보니 소설책만 읽고 기록한 내가 미워져서 간만에 철학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다 읽은 후, 매미처럼 '미움, 미움'하고 울고 싶어졌다.

이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척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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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신해철이 십대 시절에 읽고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反기독교 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보기엔 종교 비판서 더 나아가 서양 문명史에 가까운 것 같다. 



 

정말로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적 이론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주된 이유다.

그럼 그 다음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를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다. -1장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중-


두려움은 종교적 독단의 기반이다. 그밖에 많은 인간생활의 기초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사람들의 두려움은 우리의 사회생활의 많은 부분을 지배한다.  -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



 

모든 종교는 자연에 대한 무지와 존재에 대한 불안을 숙명처럼 떠안은 인간의 본질적 성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러셀의 주장은 100여 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에도 과격하게 들린다. 하지만 눈부신 과학적 성과들과 지적인 성장을 거듭한 현대인이라면 이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진 못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와 종교의 역할에 회의적이면서도 지극히 신학적(?)인 인간으로 기꺼이 살아가는 까닭은 습관화되었거나 용기가 없어서다.   


한편, 러셀은 종교와 일정한 거리를 둔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다. 그 함정이란, 다름 아닌 '불변의 진리에 대한 맹신'이다. 


 

어떤 사람의 말 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말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고 이 전문가들은 어김없이 권력을 차지한다. 진리의 열쇠를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특권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점에 있어 다른 특권층보다 더 질이 나쁘다. 과거에 단 한 번 완벽하게 만인 앞에 계시됐던 불변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지적, 도덕적 진보의 반대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갈릴레오와 다윈을 반대하였고 바로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프로이트에 반대하고 있다. 한때 그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시절에는 한술 더 떠서 지적인 생활까지도 반대했다. -2장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중-


'영원한 진리' '영원한 법칙' '영원한 사랑' 등등...

이처럼 변치 않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가 인간을 얼마나 독단적으로 만드는지 역사는 잘 말해준다. 


 

나는 내가 죽으면 썩어 없어질 뿐 나의 에고 따위가 남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내 나이 젊지는 않지만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허무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공포로 몸을 떠는 모습에 대해선 경멸한다.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 건 그것에 끝이 있기 때문이며, 사고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제 가치를 잃는 것도 아니다. -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

 


그렇다고해서 러셀을 숙명론자로 볼 순 없을 것 같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지극히 자유롭고 쾌락적인 삶을 영위한 인물이다.

그에게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지식과 사랑은 둘 다 무한히 확대되는 성질을 지녔다. 그러므로 어떤 삶이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그보다 좀더 나은 삶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지식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지식도 훌륭한 삶을 낳을 수 없다. -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

 


사랑은 있되 지식이 없으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지식은 있되 사랑이 없으면 지식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는 러셀의 지적은 소위 '지성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구분하자면,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진 않지만 '신의 존재'만큼은 남몰래 갈구해왔던 사람 중 한명에 속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디 '신'으로 불리우는 절대자가 있어서 이 세상을 구원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내 마음이 미약한 존재의 울부짖음에 다름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미움, 미움'하고 아무리 시끄럽게 울어대도 결국 죽고마는, 매미의 숙명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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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책이란 나를 더욱 굳건하게 지켜주는 방패가 아니라 나를 철저하게 부수는 도끼와 같은 책이다. 

일찍이 '마왕' 신해철을 부수웠고 오늘 나를 깨트렸던 이 한 권의 책이 또다시 그 누군가를 깨우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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