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미래 - 10년 후, 나는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린다 그래튼 지음, 조성숙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이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내일을 예측할 여유도 주어지지 않은 채, 오늘 하루에 적응하기에도 숨이 가쁘다.

물론, 인류는 역사적으로 여러번의 기술혁신과 사회 변혁을 거쳐왔고 초기의 혼란이 없진 않았지만 변화에 잘 적응해왔다고 볼 수 있다. 


린다 그래튼의 <일의 미래>는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를 '일'에 초점을 맞춰 살펴본 수작이다.

그녀는 일의 변화를 다섯가지 원동력 즉 기술발전, 세계화, 인구통계와 구조, 사회변화, 에너지 자원이라는 큰 주제로 묶어 통찰력있게 그려내고 있다. 


일단,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화석 연료가 귀해지면서 에너지 비용 증가로 재택근무가 일반화된다는 점이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전형적인 직장인의 모습이란 깔끔한 정장에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일어나자마자 클라우딩으로 연결된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개인 아바타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동료(?)와 가상회의를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등의 모습일 것이다. 고용 형태 역시 지금과 같은 회사 즉 조직에 소속되어 있기보다는 개별적 신분 아마도 현재의 프래랜서와 비슷한 고용형태가 널리 확산되리라. 24시간 올(All) 로그인 세상인 펼쳐지면서 일과 휴식의 경계는 더한층 불명확해지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업무량을 처리하게 되겠지만, 수준 높은 기술을 갖춘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일만시간의 법칙'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관찰력과 집중력 그리고 상당히 긴 시간의 연마가 필요한데, 24시간 로그인 상태에서는 한가지 일에 몰입하고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상태를 '3분이 한계인 세상'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즉, 한가지 일에 3분이상 할애하지 못하고 또 다른 작업을 처리하기 위해 기존의 작업을 중단한다는 뜻하다. 

그러고 보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SNS나 문자 착신음 속에서 수시로 하던 일을 방해받고 있다.


이 밖에도 재택근무가 일반화되면서 발생하는 또 다른 모습은 개인의 파편화와 소외다.

직접 만나지 않고 일처리가 가능해지면서 인간 관계는 더한층 기계화, 파편화될 것이다. 그 누구도 직접 만나지 않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사이버상의 커뮤니티가 인간 소외를 어느 정도 메꾸어 주고 일말의 행복감을 전해줄 순 있겠지만 현재와 같은 일대일 대면 접촉으로 얻는 정신적인 만족감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 리가 맞이할 미래는 역설적이다. 미래의 세상은 연결성이 증가하고 세계화하지만 동시에 점점 더 파편화되고 고립된다. 이런 문제를 헤쳐나갈 방법을 찾는 것은 의미와 가치가 있는 업무 생활을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하다. 과거에는 인간관계와 네트워크가 발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미래에는 자연스러운 발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제공해주는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자신과 여러 면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사람들과 기꺼이 교류하며, 키케로처럼 진실한 우정을 찾아내고 유지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태도 및 습관을 길러야 한다.


-린다 그래튼, <일의 미래> p 302~303-


앞으로 인류가 직면하게 될 일의 미래는 생각보다 암울해 보인다.

저자 역시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듯, 일에 대한 정의와 목적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과 거 우리는 일에 대한 댓가로 제공되는 금전적 보상으로 탐욕적인 소비를 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면 이제부터는 의미 있는 경험과 생산적인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저자의 외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 그렇다면 앞으로 변화할 일의 미래에 대비하여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저 자는 의미 있는 혁신과 발견 등 뜻밖의 성과들은 주로 일이 아닌 놀이의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하기 싫고 따분해하지만 만약 놀이라고 한다면 흥미를 갖고 재미있게 즐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일로써 성공하려 한다면 아니러니하게도 놀아야 한다. 그것도 아주 재밌고 신나게...


광 고 에이전트, 작가, 디자이너, 설계자, 사회이론가 같은 창의집단은 상상력과 공상을 통해 창의성에 불을 지핀다. 운동선수는 시합을 하고, 컨설턴트와 학자는 탐구를 하고, 수학자는 퍼즐을 풀고, 심리치료사들은 치료 게임을 이용한다. 이들은 놀이 없이는 진정으로 전문성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의 일에서 전문성을 기르려면 놀 준비를 해야 한다. 자신의 일에 열광해야, 전문성을 쌓기까지 따르는 긴장감을 사랑해야 그리고 도전의식을 발휘해야 일에 필요한 전문 능력을 쌓을 수 있다. 일의 미래에는 일과 개인생활, 일과 놀이를 구분하는 장벽이 계속해서 무너지게 될 것이다.


-린다 그래튼, <일의 미래> p 244~245-


일과 놀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려면,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 설령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자신의 흥미와 취미를 살려 끝없이 배우고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 하다보면 일의 외연이 넓어지고 확장된다.

우리는 기자에서 작가로 번역가에서 소설가로 공무원에서 배우로 은행원에서 다큐멘터리 작가로 변신한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일 의 미래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면 그 일에 헌신하고 일 자체를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커진다. 특히 탐욕적인 소비에서 생산적인 경험으로 옮겨가려 할 때는 그런 선택이 더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미래에서는 재미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도전에 응하고 의미를 창조해주는 경험으로의 전환이 무대의 중심으로 올라온다. 생산적 경험과 의미가 보수와 소비를 대신해 일의 주요 동력이 된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떤 능력을 계발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식, 창의성, 혁신은 우리가 미래의 삶을 선택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일을 대하는 태도와 감정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 일을 싫어하거나 중요하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다. 자기 일이 따분하거나 똑같은 일상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보살피거나 코치를 해줄 수 없다. 물론 별 탈 없이 일을 할수는 있겠지만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생기는 에너지는 절대 발휘할 수 없다.


-린다 그래튼, <일의 미래> p 240~241-


자, 이제 결론은 하나다.

우 리 앞에 펼쳐질 일의 미래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변하겠지만 일적으로 성공하려면 남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 하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개개인의 작업 공간이 파편화되어 있고 집단 지성과 정보가 공개되어 있는 미래의 세상에서는 중세 길드와 같은 동종 업종 종사자끼리 이익을 보장하고 독점해주는 '방어벽'이 끊임없이 공격받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예를 들면, 학위만 따면 그저 그런 교수로 대학에 자리잡아 먹고 살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인터넷 강의가 보편화되면서 다른 교수의 수업을 '카피'하거나 그저 그런 교수는 자리를 보존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미래 사회에서 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역시 전문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문성이란 장시간의 수련을 통해 연마되는 것이므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승산이 있다. 일을 놀이처럼 즐겨야 한다는 건 비단 과거와 현재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린다 그래튼의 <일의 미래>는 폭풍질주하는 현대사회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미래 직업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친절한 안내서라 할만 하다.

다 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와 같은 책들이 그렇듯이 주로 사무, 연구직의 미래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래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먹어야 하고 사랑을 나누고 문화 생활을 즐겨야 할것이므로 누군가는 식량을 재배하고 가공하고 배달하고 음식으로 만들어야 하며, 누군가는 가상 공간이 아닌 현실 공간에서 대면 접촉을 준비하고 진행해야할 것이고, 누군가는 인간에 의한 따뜻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또한 뜨거운 피와 땀을 흘리는 감정적인 존재라는 점 역시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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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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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의 이름 석자를 들어 알게 된 건 십년하고도 몇 년이나 더 전의 일이었지만 난 그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깎지 않은 수염과 봉두난발한 헤어스타일하며 제멋대로 껴입었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옷차림 등등...

노숙자인지 원시인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는 그에게 사람들 특히 젊은 것(?)들이 '총수'라는 존칭까지 붙여가며 칭송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 그가 최근 불쑥 내 삶에 들어왔다.

십여년이 넘도록 잊혀졌던 그의 이름이 어떻게 내 머리속에 떠올랐으며, 검색창에 그 이름을 입력하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다.

 


간단한 프로필-그는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과 함께 그가 쓴 책들이 나왔다.

그의 책, <건투를 빈다>는 과거 몇 년동안 인터넷 방송을 통해 해온 '고민&상담'들 중, 일부를 추려 묶은 청춘상담서라 하겠다. 2008년 겨울에 출판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하게도 청춘상담서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도 무려 2년이나 먼저 나온 셈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김어준과 김난도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인(였)다.

한쪽이 엄친아 출신 교수라면 다른 한쪽은 문제아 출신 소장파 유명인사로 분류될 수 있겠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특별히(?) 엄친아/엄친딸들을 위한 인생안내서라면, <건투를 빈다>는 엄친아/엄친딸이 될 수 없었던 젊은 '루저들'을 위한 인생상담서라고 하겠다. 또한, 전자가 교육적 목적에 충실한 감동적인 책이라면, 비속어가 아슬아슬하게 난무하는 후자는 불량도서에 가깝다.


우선, 10대에게 고하는 그의 불량스런 외침부터 들어보자.


두발 자유화. 이 쌍팔 년도 이슈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란다. 참, 후지다. 바리깡으로 학생 관리하겠다는 발상이 여전히 유효한 교육정책이 된다는 거, 정말 후지다. (......) 해서 결심했다. 사실대로 고백하기로, 10대들, 지금부터 잘 들어주시라. 이거 어른들끼리 암묵적 합의로 당신들에겐 그 접근을 원천 차단해온 기밀 되겠다. 먼저 두발과 공부의 상관관계, 한마디로, 없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머릴 왜 길러, 왜 못 길러, 다리 털, 겨드랑이 털, 꼬추 털과는 다르게 두개골 털에는 DHA함유되어 있나. 그냥 이유는 털이 아니라 통제권 문제다. 머리털 내주면 쥐고 있던 학생 통제권 상실할까 두려운 거다. 선생님 자신들도 그 방식으로 육성됐다. 물론 자신들도 싫어했다. 하지만 편하다. 통제에 용이하니까. (......) 말 나온 김에 딴것도 고백하자. 공부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된다? 거짓말이다. 우리나라 공교육 열심히 따라가면 시험 잘 치는 사람된다. 그럼 시험 잘 치면 훌륭한 사람 되나? 아니다. 시험 잘 치면 점수 잘 나온다. 하지만 점수와 훌륭한 사람과의 상관관계, 없다. 단, 점수 높으면 연봉 높을 확률, 상대적으로 높다. 그건 맞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또 아니다. 돈 버는 능력과 공부 능력, 별개다. 그럼 왜 어른들이 공부 공부 하나. 불안해서. 공부 외에 어떻게 훌륭한 사람 되는 건지 어른들도 모르니까.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지, 어른들 모른다. 물론 공부 잘 하면 좋다. 유용하다. 하지만 공부와 훌륭한 사람, 관계 없다.


-김어준, <건투를 빈다> p42~43 中-



'어헛! 어디서 감히... 어른들끼리의 비밀을 폭로하고 난리야! 애들 버릇 나빠지게스리...'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기성세대이고 뼛속 깊이 '모범생 DNA'가 새겨져 있으니까...

 

그러나 인정할 건 하기로 한다.

그의 말, 하나도 틀리지 않다. 다 맞다. 그러나 10대란 아직 머리도 마음도 다 자라지 않은 불안전한 존재로써 10대시절의 선택은 성인이 된 후 후회할 가능성 90% 넘는다는 사실 또한 알려줬어야 한다.

 

그리고 10대의 김어준 역시 모범생에 우등생 출신이었을 개연성 심히 높아보인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2학년까지 미국에서 보냈으며, S대를 목표로 삼수를 했던 그의 '과거'는 그 당시 세대로서는 소수의 특권층만 누릴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눈에는 이십대 사이에 불어닥친 '난도 열풍' 못지 않게, 십대들의 '총수님 추앙' 또한 위험해 보인다. 

 

사실, <건투를 빈다>는 십대가 아닌, 20세 이상 40세 미만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 김어준의 열성팬들이 주로 집결해 있는 연령층으로, 이들이 직면한 고민에 대한 그의 답변은 솔직하고 멋지다. 특히, 원시인(?)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깊이 있는 통찰력과 지성미가 돋보인다.


삶을 장악하라!


키 때문에 결혼을 못 할지도 모른다고? 아니지. 문제의 본질은 뼈의 길이가 아니라, 그로 인한 자존심의 결여다. 본능적으로 최고 우성 유전자를 판독해내는 여자들이 기가 막히게 구분해내는 건, 기장이 아니라, 바로 그 결여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스스로를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릴 만큼 견고하고 대범한 자기인식은, 그 자체로, 졸라 섹시하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당신을 진정 안 섹시하게 만드는 범인은 뼈의 길이가 아니라, 그로 인해 스스로 주눅 드는, 당신의 자기인식인 게다.-p59~60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지만 당신은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이다. 그러는 거 효도라 착각 마시라. 효도 아니다. 공포다. 부모 낙담시키고, 기대 저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하여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분리되는 데 대한 공포. -p125

가족 구성원 간 과잉 감정은 이 자폐적이고 방어적인 가족주의의 필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과도하게 기대하고 요구하며 또 그로 인해 과도하게 상처받고 실망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도 이상의 감정 비용을 지불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바가지를 쓰고 있다고 여긴다. 모두가 모두에게 그렇게 채무관계로 결박되어 있다. 명절은 이제 씨족 행사도, 집단 귀향도 아니다. 평소 마땅한 분량의 가족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들이 그 죄의식을 탕감받으러 가는 날. 그러니 길이 막혀 다행이다. 부모는 신분이 아니라 실체다. 가족극의 배역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와 남자다. 그들은 숭고한 효의 대상이 아니라 애틋한 관심의 대상이다. -p109


정말 비겁한 건 자신이 비겁하다는 걸 인정 못하는 거다.


삶과 미래가 실천과 계획에 의해 대부분 결정 난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어느날 갑자기 닥쳐온 우연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선택으로 인한 비용과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겠다면, 자신이 그 정도로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란 걸 스스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감수할 의사와 용기가 있다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쁜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선택에 마땅히 따르는 이러한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는 경우 부지기수다. 핑계를찾고 이유를 찾는다.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결정적 차이는 거기서 만들어진다. 그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갖가지 거짓과 사기의 결과는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좀먹는다. -p138~139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기꺼이 감당할 마음가짐이 먼저다.


진짜 문제는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 결과를 감당하는게 두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하기 싫어 아예 선택 자체를 피해버린다. (...)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후회될 땐 잘못된 선택을 되돌아볼 때가 아니라 그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을 때다.-p223~224


단언컨데, 그의 지적인 능력은 탄탄한 정규교육과 폭넓은 독서 그리고 배낭여행 덕분이었을 것이다.  

반면, 그에게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균형 감각'과 '표현 방식'이 아닐까 싶다.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이 몸이 거부할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선택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곧 책임이다.'식의 솔루션은 마음의 갈등과 번민, 그리고 후회, 반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해지는 인간의 정신적 성장과정을 지나치게 소홀히 다룰 소지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솔직한 표현 방식은 높이 살만 하나, 지나치면 이 또한 '예의'에서 벗어난다.

'인간에 대한 예의'란 상대방의 옳고 그름이나 도덕적 성품의 높낮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보여주는 태도, 즉 예의인 것이다. 내가 싫어도, 나와 맞지 않아도,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것! 그게 바로 예의다. 인간에 대한 예의...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젊은 세대는 김어준을 '총수님! 총수님!' 하고 따르고, 기성세대들은 '또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그 이유를 말이다. 

 

일탈과 반항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젊은 세대의 특징이 그의 무교양(무례) 및 탈규범적 생활방식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욕망과 책임 사이에서 방황하던 2,30대를 거쳐 40대에 도달한 기성세대는 욕망 대신 책임을 선택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제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그들에게 자유란 곧 안정이다.  이런 기성세대들에게 김어준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또 한명의 '피터팬 증후군' 환자로 보일 따름이다. 

 

그는 자유로워보인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그런 그에게 꼭 한마디만 하련다.

'최대한 본능에 충실하자'는 본능지상주의는, 사실 본능을 최대한 억제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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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쩌자고 내 속옷까지 들어오셨는가 - 다큐PD 왕초의 22,000킬로미터 중국 민가기행
윤태옥 지음, 한동수 감수 / 미디어윌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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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확' 잡아 끄는 제목 덕분(?)에 처음에는 중국인의 본심에 대한 책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책 제목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유령(劉伶)이라는 술꾼에 얽힌 일화에서 따온 것이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유령은 만취하면 옷을 벗어제끼곤 했단다. 이를 보다못한 어떤 사람이 그의 집을 찾아가 그를 꾸짖자, '나는 천하가 내 옷이고, 집이 속옷인데 당신은 어쩌자고 내 속옷까지 들어왔소?'라고 댓구를 했단다. 

고대 중국인들의 담대함과 해학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중국인의 속옷(?) 즉 집에 대한 기행 감상 기록문이다. 

'속옷'과 '집'을 연관시켜 책제목으로 삼을 정도이니, 일단 저자의 감각과 안목은 검증된 셈이다.

 

잘 알려진 베이징의 사합원에서 출발하여, 푸젠성의 방어용 집체가옥인 '토루(土樓)'와 광둥성 출신 화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지었다는 동서합벽(東西合壁)의 대명사 '조루(碉楼)' 그리고 소수민족 좡족의 계단식논과 간란주택, 합창으로 유명한 둥족의 풍우교(風雨橋)를 살펴보고, 당나라에 노예로 끌려갔던 고구려 후예일지도 모르는 구이저우 먀오(苗)족의 조각루(弔脚樓)까지...

 

투로우! 중국의 원조   광서자치구여행: 12.유

<푸젠성 토우>                                                 < 간란주택>

 

 

청양 풍우교

                                                            <풍우교>

                           

 

인간에게 집이란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는 곳이 아닌, 문화와 역사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탈골하지 않고 높은 절벽에 받침대를 수평으로 꽂고 관을 그 위에 올려놓는 현관장(懸棺葬)과 동굴 안에 관을 쌓아놓는 동장(洞葬)을 하는 먀오족만의 독특한 장례풍습은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조상의 관까지 들고 가겠다는 먀오족의 귀향에 대한 염원과 고난한 이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만약....

그들이 중국 대륙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발해의 후예들이라면......?

정녕...

우리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그들을 대해야 할까?

 

 

저자가 손과 발로 직접 엮은 '중국민가기행'을 읽고 있노라면, 당장 배낭을 짊어지고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행동파를 배려하기 위해 저자는 교통수단과 숙박 등 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정보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저자가 운영하는 개인 블로그인 '왕초일기http://blog.naver.com/kimyto' 등에서도 관련 정보들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이처럼 블로그 등으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면 나는 분명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반드시 한권을 구입했을 것이며, 서평 역시 훨씬 더 꼼꼼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미래를 위한 정보 제공과 기록의 목적으로 말이다. 

 

 

 

정말, 여행이란 아는 만큼 보고 느끼는 것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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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력이다 - 인지심리학자가 10년 이상의 체험 끝에 완성한 인생 독소 처방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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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 한 학생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이었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하고는 읽게 되었다.


크게 보면, 어느 지식인(저자는 우리나라 1호 인지과학박사란다)의 '자기개발(성장?)경험기'라고 하겠다. 한가지 독특한 점은 난관에 부딪힌 사람들이 직면하곤 하는 '무기력'이라는 문제를 폭넓게 살펴보고 극복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무기력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질병이지만 스스로 감지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갔다. 무기력과 관련된 실험을 주도한 마틴 셀리그만은 무기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내렸다.

'무기력이란 인간이나 동물이 통제 불가능한 상태를 경험하며 겪는 동기, 인지, 정서, 행동 장애를 나타내는 현상이다.'


 

특히, 마틴 셀리그만의 이론과 그 이론을 뒤받침해주는 많은 실험 결과를 인용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본인이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주변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뚜렷하게 외부로 드러나는 명백한 무기력이 있는 반면, 자각하지 힘든 '은밀한 무기력'도 있다. (......) 중요한 일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부수적인 데 쓰는 이들도 사실은 무기력한 사람이다.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무기력이지만, 집중해야 할 일 대신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도 무기력의 결과다. 자기 일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그만큼 에너지를 허투로 낭비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다. 당장은 자신이 열심히 산다고 착각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박경숙, <문제는 무기력이다>p36~38 中-


 

 

마틴 셀리그만은 여러 실험 결과, 인간은 외부로부터 무기력을 배운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여기서 '배운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주변 환경과 주위 사람들에 의해 무기력지며 그와 같은 상태에 익숙해지기 메커니즘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즉, 놀랍게도 무기력은 학습되는 것이다!

 

그가 실시한 전기충격을 가하는 개실험과 날지 못하는 독수리 등의 실험을 통해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설령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마치 조건반사처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식하고는 아무런 대응도 반응도 못한 채 무기력해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간과 동물은 이처럼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함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무기력해진다.



그렇다면 무기력은 왜 발생하는걸까?


<문제는 무기력이다>의 저자는 어린 시절의 소외와 방치, 그리고 소외와 고립 및 경쟁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가 무기력을 더욱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명문대 교수들과 그들로 이루어진 연구소 등에서 저자가 직접 보고 겪은 무기력 체험담들은 저자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경쟁 속에서 1등만을 기억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구성원 전체를 패배의 공포와 무기력의 늪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1등 역시 영원히 1등일수없으므로 패배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경쟁과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는 결국 필연적으로 구성원 전부를 무기력 속으로 몰아넣는다. 


나 역시 교육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시험 결과에 대해 칭찬을 받은 아이들이 과정에 칭찬을 받은 아이들보다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실험 결과를 보고는 경악했던 적이 있다. 특히, 상을 주거나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았던 경우에 자발적으로 실험을 즐겼던 참가자들이 보상을 제공한 경우에는 오히려 결과에 집착하면서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보상이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자발성과 흥미 모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그동안 효과적이라고 추앙받으며 우리 사회 곳곳에 적용되어왔던 미국식 제도들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무기력을 은밀하게 학습시켜왔던 것이다!


<문제는 무기력이다>의 가장 큰 장점은 대부분의 자기개발서들이 문제(여기에서는 무기력) 발생 원인을 개개인에게 돌리고 있는 반면, 저자는 개인의 성격 못지 않게 사회적 제도와 환경에도 책임을 묻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후반부는 저자의 경험에 입각하여 무기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일단 무기력은 동기, 정서, 인지, 행동 등 네가지 기제에 문제가 발생할 때 야기된다고 보고, 각각에 대해 구체적인 심리치료법을 제시하고 있다.  심리치료란 말 그대로 마음을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삶의 동기를 잃었다면 가장 중요한 일이나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는 것 등이다. 삶에 대한 의지 못지 않게 중요한 건 바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임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켜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일찍이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이 체험했고 제시했던 '로고테라피'다.


이틀 동안 틈틈이 짬을 내서 다 읽었다.

흥미진진하고 인상적인 책이었지만 생각만큼 여운이 길진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저자의 무기력 체험담이 지나치게 개인적이라서....?

저자가 연구를 통해 새롭게 도출해낸 기발한 주장이라기보다는 국내외의 각종 서적들의 내용들을 혼합해 놓아서...?

 

글쎄 잘 모르겠다.


내가 너무 냉담해진걸까? 아니면 독자로서 까다로워진 걸까?

그나저나 냉담함도 무기력의 초기증상에 해당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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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의 인문학 - 사장이라면 평생 가져야 할 인문학 키워드 30
이현숙 지음 / 팬덤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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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직장인이 쓴 서평 수필집이라고 해야 할 것같다.

다분히(?) 미래 고객을 염두에 둔 제목이 다소 거슬리긴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책출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좋을 것 같다.

요즘은 블로그 등 개인 미디어 매체가 발달되어 있으니 약간의 글쓰기 솜씨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는 시대다. 특히, 서평류의 책들이 많이 출판되는 것 같다.

 

이 책의 지은이 역시 직장생활(현직 은행원이란다)를 병행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주로 4,50대 그것도 (중소기업) '사장님'을 주요 독자층으로 한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읽다가 도중에 포기한 카잔차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죽기 전에 다시 한번 꼭 읽어봐야겠다.

 

내용은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다음과 같다.

 

멕시코 만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째 단 한마리도 낚지 못한다. 이틀 동안 망망대해에 떠 있던 산티아고의 낚시바늘을 큼지막한 청새치가 덥썩 물었다.

노인이 탄 조각배보다도 훨씬 더 큰 5.5미터짜리 청새치는 마치 노인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리 저리 배와 배위의 노인을 끌고 바다를 누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낚싯줄을 잡은 노인의 손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내리고 마침내 청새치는 움직임을 멈춘다. 

일생 일대의 대어를 낚은 노인은 청새치를 뱃전에 묶고 항구로 돌아가는 도중 피냄새를 맡은 상어떼의 공격을 받는다.  노인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포획물을 상어떼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건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수는 없어."

상어떼의 공격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나 육지에 도달한 노인에게는 살점 하나 남지 않은 청새치 뼈다귀뿐이었다.

 

노인은 비록 자신의 노획물을 지켜내진 못했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포기하기 전까진 실패도 패배도 없는 법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두고 <사장의 인문학>의 저자는 '승리란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는 서평을 남겼다. 

 

시련과 역경은 우리 주변에 상주하는 반갑지 않은 식객이다. 우리의 희망을 야금야금 씹어 먹으며 절망으로 되갚아 주기도 하고, 삶의 의지를 주저앉히기도 하며, 때론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기도 한다. 상어 떼와 피나는 싸움을 벌이면서도 산티아고는 자신의 나이와 고독, 악조건에 굴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애써 잡은 노획물을 상어 떼들에게 빼앗기면서도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을 긍정하고 자신감을 놓지 않았다. 승리란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것, 죽을 힘을 다해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노인과 바다>는 보여주고 있다.

백조는 평생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번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내고 죽는다고 한다. 흔히 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백조의 노래 swan song'라 하는데, <노인과 바다>는 엽총으로 자살한 헤밍웨이가 남긴 백조의 노래이다.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는 1953년에 퓰리처상을,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는 <노인과 바다>를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현실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존경심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 삶의 환희와 허무, 영광과 상처, 강인한 생명력을 굵고 강렬한 필치로 그려 내고 있다. 그가 풀어내려고 하는 것들은 삶의 뜨거운 요소들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거둔 산티아고의 승리가 더욱 찬란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현숙, <사장의 인문학> p203~205 中 -

 

 

집중해서 읽어야 할 두툼한 책을 위한 연습용 독서였을 뿐인데...

늦은 저녁, 불면증을 몰아내기 위해 집어든 책이었을 뿐인데...

어느덧 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삶에 대한 진리 하나가 가슴에 와 박힌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다. 파멸할지언정 포기할 수는 없다."

"승리란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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