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지리의 힘 1~2 - 전2권 지리의 힘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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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말그대로 '지리'를 중심에 뒀지만 '지리'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정학적 못지 않게 지경학적 위치가 한 나라의 성장과 쇠퇴 및 외교 관계까지 결정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일단, 큼직하게 대륙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유럽 대륙이 일찍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운행이 가능한 하천들이 많이 분포했다는 점이다. 라인 강, 다뉴브 강, 센느 강 등등 대륙을 가로 지르면서 풍부한 수량과 완만한 흐름으로 운송과 소통에 기여했다. 물론, 이런 강의 존재는 계곡과 산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이런 자연물들은 자연스럽게 천연 장벽이 되어 국경을 이루기도 한다. 그래서 유럽은 이렇게 뻗어나가고 저렇게 퍼져나간 산맥과 강줄기들 사이사이로 크고 작은 민족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면서 오늘날 여러 국가들로 발전했던 것이다.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바 강을 제외하면 유럽의 주요 강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왜 유럽이 상대적으로 소규모 국가들이 많은지 이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대다수 강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탓에 어떤 면에선 이 하천들이 천연 국경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저마다 권리에 따라 경제적 영향권을 형성했다. 이런 양상은 각 하천 유역마다 적어도 하나의 주요 도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여기서 성장한 일부 도시가 수도들이 되었다. (...)
오늘날의 수도들인 비엔나,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 부다페스트 그리고 베오그라드(세르비아의 수도)가 다뉴브 유역에서 탄생했다. 한편 이 경로는 서로 이어지는 두 개의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천연 국경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국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각 민족들이 부상하더니 마침내 민족 국가들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다뉴브 지역의 지리, 특히 최남단의 지리를 보면 북유럽평원의 큰 나라들에 비해 왜 유독 이 지역에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들이 많은지 수긍이 간다. -<지리의 힘 1권> 92쪽




반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러시아의 경우엔 동서로 가로지르는 강이 없다. 그래서 교류와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고 여기에 혹독한 기후까지 더해지면서 오랫동안 그리고 현재까지도 성장이 지체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지리적 조건은 전략적 깊이가 너무 길어서 외부 세력이 공격해 들어오면 후퇴하면서 기력을 모아 되받아칠 수 있는 방어엔 적합하지만(물론, 몽골 기마병에게는 이 전략도 통하지 않았다) 외부 세계로 힘을 투사하려면 보급선과 전선이 길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된다. 그래서 러시아는 대국인 건 분명하지만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췄다고 할 순 없다. 




우랄 산맥으로 유럽 대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 북한은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과 해상 경계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아시아의 맹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지리의 힘 1권> 130쪽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영토가 넓은 우크라이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지리의 힘> 1, 2권 모두 우크라이나를 위한 독립적인 챕터는 없다.  하지만 2022년 6월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동남부 지역과 돈바스 지역을 함락시켰다.  팀 마샬이  '순망치한' 관계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해 언급한 그대로 진행된 셈이다.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가 수도 키에프를 계속 지배하는 한 러시아는 자국의 완충지대가 손상되거나 북유럽평원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부동항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항의 임대차 계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신중한 중립국의 행보만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를 용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중립적 행보의 폭을 점차 넓혀가는 우크라이나가 괘씸하더라도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고 나토와 유럽연합이라는 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하려는 야심을 품고 러시아 선박의 흑해 항구 입항에 반대한다면? 한술 더 떠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군함을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물론 이는 현재로서는 어불성설에 가깝다. (...)
러시아의 외교 정책 엘리트가 보기에 유럽연합 가입은 나토 가입의 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일종의 레드 라인(불화나 협상 시 한쪽 당사자가 양보하지 않으려는 쟁점이나 요구)을 넘는 행위로 본다. -<지리의 힘 1권> 137쪽




어불성설이라고 했던 일들이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는 순진했고 국민은 성급했다. 대통령은 공약을 지키려다가 전쟁을 야기시켰고 국민은 나토와 EU가입이라는 눈 앞의 당근에만 현혹되어 등 뒤에서 휘두르는 러시아의 채찍은 잊었다. 

현재 러시아 지배로 들어간 지역을 우크라이나가 자력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나토나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 같지도 않고...




한편, 혜택 받은 유럽 대륙과 가장 흡사한 대륙을 꼽으라면 북아메리카 대륙일 것이다.

북아메리카 대륙은 미시시피 강이 남북으로 흐르면서 수송로 역할을 톡톡히 할 뿐 아니라 대서양으로 흐르는 강줄기들이 수로처럼 잘 발달해 있어 18세기 산업혁명 당시 증기선들이 오르내리기에 수월했다. 여기에 중부와 남부의 대평원은 대규모 곡물 재배를 가능케했다는 점 또한 미국이 최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지리적 조건이었다. 여기에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양차 대전에서 영국은 비록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에 휘말려든 반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미국은 전쟁의 포화는 받지 않은 채 전쟁 특수로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영국으로부터 전세계 거점 지역들을 인계받아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발단까지 마련한다. 




"훌륭한 기지들이군. 이제 우리가 가져야겠어."
가격은 적절했다. 1940년 가을에 영국은 더 많은 군함들이 절실했다. 반면 미국에게는 50척 정도의 여분이 있었다. 결국 기지 협상을 위한 구축함들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은 강대국이 될 수 있을 능력을 전쟁을 계속 수행하게 하는 도움과 맞바꿔 버렸다. 이렇게 해서 서반구의 영국 해군 기지 대부분이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 -<지리의 힘 1권> 72쪽




사실, 영국은 지경학적으로 볼 때 두 가지의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첫째는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강력한 분리 독립 세력이 무려 두 개나 존재한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국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를 이루는 북쪽과 웨일즈와 잉글랜드를 이루는 남쪽은 원래 각기 다른 대륙이 충돌하면서 떨어져 나왔단다. 그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아일랜드가 섬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지형을 이룬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인류가 그곳에 거주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1만 년 전의 일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 지역은 높은 협곡과 산맥 및 그 사이의 계곡을 흐르는 강들로 천연 국경선이 그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영국(브리튼)은  단순히 지방색이라고 하기엔 무색한 지역간 차이가 매우 큰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민족이 각기 다른 역사와 고유한 문화를 간직하며 발전해온 상태에서 심지어 종교까지 다르다면 오히려 통합 대신 분리와 독립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영국이 대영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내부에서 단결해서 외부로 뻗어나간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와 신대륙을 필두로 한 식민지배를 통해서였다. 부가 나라 안으로 모여들 때까지는 다름과 차이라는 틈은 돈으로 충분히 메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접착제가 공급되지 않자 틈은 갈라지고 벌어졌다. 영국 본토가 브렉시트를 감행함으로써 북아일랜드라는 조각을 잘라냈고, 이를 지켜본 스코틀랜드 역시 분리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원래 스코틀랜드는 아일랜드의 소코티 부족이 점령했던 곳으로 스코틀랜드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이들 지역이 종교와 민족 및 역사와 문화 등에서 모두 잉글랜드적이지 않은 건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한편, 아프리카와 호주 대륙은 물이 부족한 대륙이다. 특히, 아프리카는 인류가 최초로 기원한 지역으로 그 출발이 빨랐고 크기 또한 유럽과 신대륙 및 아시아 대륙을 능가함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나일강 문명을 제외하면 별다른 문명을 이룩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이 황하 문명을 인도가 인더스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풍부한 수자원과 이용할 수 있는 수로가 존재했던 지리적 혜택 덕분이었다.




이집트는 어디까지나 지역 강국에 지나지 않았다. 국토의 3면이 사막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지중해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 테지만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나무가 귀하다는 점이다. 대다수 역사에서 나무가 귀한 나라치고 세력을 과시할 만한 강한 해군력을 구축한 나라는 없었다. 물론 이집트에 해군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이집트는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고 레바논에서 삼나무를 수입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대양 해군이 돼 보지는 못했다. -<지리의 힘 1권> 236쪽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이집트는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중 한 곳이고 기원전 10세기에 이미 거대 왕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중해와 맞닿아 있으면서 그리스가 지중해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바다로 진출조차 시도해보지 못했다. 아니 딱 한 번 시도하긴 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바다에 닿자마자 바로 도망가지 않았던가. 

이집트가 바다와 친하지 않았던 이유가 늘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알게 되었다.

이집트에는 배를 만들 수 있는 나무가 없었던 거였다. 



오늘날에도 이집트는 물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의 '급수탑'으로 불리는 에티오피아가 그랜드 르네상스 댐을 건설하면서 청나일강의 물길을 장악할 수 있게 되자 이집트로선 언제라도 생명선을 위협받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물을 덜 사용하는 작물 쪽으로 농업을 개편하고 에티오피아가 물을 무기로 사용할 수 없도록 백나일강의 진원지인 수단과 연합할 수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어 보인다. 




이제 또다른 고대 제국 중 하나인 중국을 살펴볼 차례다.

사실 저자는 <지리의 힘> 제1권 첫 번째 챕터를 중국에 할애할 만큼 중국을  중요한 나라로 보고 있다. 중국은 4천 년만에 대륙세력에서 대양세력으로 거듭나고 있는데 만약 중국의 도전이 성공한다면 차세대 강대국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영토, 인구, 시장, 신기술 등등 강대국이 갖춰야할 지리 외적 요건까지 겸비했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은 20세기 들어 새로 갖춘 것들이 아니다.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넓은 영토에 엄청난 인구와 서양을 능가하는 기술 대국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난 한 세기 동안 중국은 강대국의 조건을 가졌음에도불구하고 강대국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더 정확하게는 강대국이었으나 강대국의 지위에서 밀려난 것이다.

저자뿐만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무섭게 성장하는 현대 중국을 바라보면서 '중국이 어떻게 저렇게 빨리 성공할 수 있지?'라면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러나중국은 강대국이 될 조건들을 이미 다 갖추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중국은 어떻게 그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서도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을까?'라고 물어야 옳지 않을까.



지경학적으로 강대국의 조건을 갖춘 나라가 강대국이 되는 과정과 원인을 찾아보는 건 특별할 게 없다.  1+1=2 처럼 지극히 당연한 섭리니까. 오히려 중국과 같은 나라가 강대국이 아닌 게 더 이상하고 비정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의 조건을 갖지 못했거나 부족함에도 강대국이 되었거나 그 반대로 강대국의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강대국이 되지 못한 나라를 살펴보는 게 더욱 중요하다. 

영국과 스페인은 전자에 가깝고, 러시아와 브라질은 후자에 가깝다.  




중국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14억 가지는 된다. 또한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없는 이유도 14억 가지는 된다. 1930년대에 미국에 몰아친 대공황 같은 사태가 중국에서도 발생한다면 중국은 수십 년은 후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세계 경제라는 틀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중국은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이 만들지 못하게 되는 순간 엄청난 실업 사태가 발생한다. 이 대량 실업 사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도시 지역에 사람들이 주로 몰려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커다란 사회적 동요를 피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중국에서 보이는 여타의 모든 현상처럼 이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사회적 동요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다. -<지리의 힘> 1권, 53쪽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없는 14억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중화사상'이다. 

쇄국은 곧 쇠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고립이든 의도적인 선택이 되었든, 경계를 세우고 안과 밖을 구분한다는 건 결국 제2의 만리장성을 쌓는 것이다.  천하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성벽을 세워 스스로를 천하 속에 가둔 진나라는 멸망했다.  

14억 인구가 많긴 하지만 60억 인구와 분리시켜 권외 지역으로 남는다면, 전세계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중국 자신에겐 득보단 실이 더 많을 것이다. 




한편,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대국과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일본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지리의 축복보다는 재앙을 입은 경우가 더 많았다. 저자는 이런 우리나라의 지리적 운명을 '경유지'로 표현했다. 

한반도는 국경을 여러 나라와 맞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유지라는 이유만으로 일찌기 몽골 제국이 일본 열도를 침공할 때 길잡이로 앞장서야 했으며 일본이 대륙을 침공할 때도 유린당했다. 



고려 이전까지는 외부로 힘을 투사하고 뻗어나가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반도 내의 여러 부족들이 서로 다투면서 힘을 소진시켰고 결국 힘겹게 얻은 대륙의 북쪽도 지키지 못하고 한반도에 주저앉아 버렸다. 고려는 자주적으로 국정을 이끌면서 몽골에 30년이나 저항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지만 조선에 이르러선 강대국의 속국이라는 지경학적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약하고 심지어 한심한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구한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결과에 따른 평가이고, 어쩌면 조선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무모한 도전이나 명분 대신 평화와 안정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개입없이 조선이 단독으로 일본을 상대했다면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다. 청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도 군사력으로는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다만, 유목민족이 세운 청나라는 과거 수, 당과 몽골이 한반도 공략에 대대적으로 나섰지만 모두 실패하면서 왕조의 멸망을 자초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복해서 직접 통치하는 대신 조공을 받는 속국이나 자치적인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어쨌든 두 가지 모두 한반도는 경제적 이득보다는 군사적 방어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반도는 어떠한가?

위치도 바뀌지 않았고 이웃한 나라 역시 그대로다. 

강대국의 군사 방어용이라는 지리적 가치 또한 변하지 않았다. 




18세기에 한국이 얻은 <은자의 왕국>이라는 별칭은 수세기에 걸친 정복과 점령, 약탈 혹은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경유지의 대상이 된 뒤에 이 나라가 스스로 고립을 택한 데서 나온 명칭이다. 만약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이 북쪽에서 내려오면 일단 압록강을 건넌 뒤 해상까지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천연 장벽은 거의 업다. 반대로 해상에서 육로로 진입한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런 배경에서 몽골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나갔고 이어 명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그리고 일본도 수차례나 침입했다. 한국이 여러 교역로들과 단절하고 홀로 있기를 희망하면서 바깥 세계와 엮이지 않는 편을 택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 일본이 다시 들어왔고 1910년에는 아예 이 나라를 통째로 합병해 버렸다. (...)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북위 38도선을 따라 분단되었다. (...)  
역사학자 돈 오버도퍼 교수는 38도선에 따라 이 나라를 남북으로 임의로 분할한 것은 여러 모로 불운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945년에 미국 정부는 8월10일의 일본 항복에만 정신이 팔려서 한반도에 대한 명확한 전략을 수립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한반도에 북쪽에서 소련군의 이동이 포착되자 미 백악관은 한밤중에 다급하게 회의를 열었고 오로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발간한 지도만을 지참한 두 명의 하급 관리는 북위 38도선을 손으로 찍었다. 즉 이 나라를 반쯤 내려온 소련군의 남하를 중단시킬 지점으로 북위 38도선을 찍은 것이다. 
이 자리에는 어떤 한국인도 또는 한국 전문가들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인 제임스 번스에게 그 선은 약 반세기 전인 1904년에서 1905년에 치른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상의하던 선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미국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소련은 미국 측이 러일전쟁 당시 소련의 주장을 사실상 승인했으며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과 북쪽의 공산 정권도 용인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국 거래는 성사됐고 이 나라는 분단되었다. -167~168쪽





이 내용이 실제 팀 마샬의 영어 원서에도 그대로 나와 있는지 모르겠다. 

원서에서는 일본만 언급했다가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다니까 은근슬쩍 그것도 일본보다는 앞부분에 그러나 분량은 적게 삽입해서 생색만 낸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저자와 에이전트의 약삭빠름을 지적하기보다는, 만약 그렇다면 21세기 초 현재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 또한 그정도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다.  

한국산 가전과 K-콘텐츠 및 한국인들이 국제 무대에서 선전한다고 해서 마침내 한국이 세계 TOP10에 들었다거나 지역 강국이 되었노라고 벅찬 자부심과 애국심에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초대받고는 독립국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진정한 우방으로 조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던 고종과 민영환의 '우물안 개구리'식 세계관에서 단 1cm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때와 다른 약간의 변화라고 한다면 중국 대신 미국의 품으로 들어갔고,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양 대국이 서로 힘이 투사하는 과정에서 등거리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주변국과의 관계 즉 일본의 외교는 여전히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과거사의 그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서로를 비난하지만, 과거사에 발목잡혀 있는 건 둘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건 일본이 친 장벽보다 우리가 친 장벽이 더 높다는 점이다.  우리가 중국을 향해 친 장벽보다 중국쪽에서 친 장벽이 더 높은 것처럼 말이다. 더 높은 장벽 안에 갇힌 사람의 시야가 더 좁을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혐한정서는 극우 정치인이 표출하고 일부 보수단체만 적극적으로 호응할 뿐이지만 한국에서의 반일감정은 전국민에게 퍼져있어서 집권 세력들이 가장 쉽게 손대는 정치 이슈 중 하나다. 중국의 혐한정서는 14억 명의 정신 세계를 장악하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반중정서는 중국처럼 노골적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내가 까치발을 세워 장벽 너머 보이는 상대보다 상대가 나를 더 많이 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먼저 사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용서할 순 없는 걸까?

용서란 강자가 약자에게 베풀 수 있는 아량이다.  먼저 용서할 수 없다면 상대보다 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은 아직은 '넘버3'일 뿐이다. 





5년 만에 출간된 <지리의 힘> 2권은 1권에서 빠졌던 지역들과 세계 곳곳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좀더 자세하게 파고 들었다. 제1권이 역사와 지리를 결합한 조감도에 가깝다고 한다면, 제2권은 현상과 원인 및 예측을 논하는 끝장토론이라고나 할까. 특히, 발칸과 중동 및 사헬 지역의 끊이지 않는 폭력과 테러는 부족과 지역간 차이와 다름에서 야기된 듯 보이지만 결국은 '쩐(錢)의 전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종교와 민족이 다르고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중은 이런 사실들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 하여, 이들 지역 사람들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혹은 아무도 차지하지 못하게) 무력을 사용한다. 영토도, 원유도, 물도, 심지어 인구마저도 모두 이권다툼의 목적이자 원인일 뿐이다. 




사헬이라는 단어는 해안 또는 해변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나왔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건조한 사하라 사막을 건너려던 초창기 여행자들이 이 지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이 해안은 바위가 많은 관목지, 덤불로 덮인 모래벌판, 낮게 자라는 풀과 나무들로 이뤄져 있다. (...) 이곳 사헬은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가로질러 홍해와 대서양까지 연결되는 장장 6천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경로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는 낭만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팀북투(말리의 중부에 위치한 도시)나 카르툼(수단의 수도) 같은 큰 도시로 볼 수 있지만, 세계 시장으로 팔려가는 광물에 생계를 의지하는 작고 지저분하고 후미지고 파리가 들끓는 동네도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카에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길을 이용하는 투아레그족과 플라니족 같은 유목민족을 지나치고 최근에 국경선이 그려진 나라들을 건너면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이념과 폭력성으로 무장한 수많은 무장단체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지리의 힘 2권> 295~296쪽 




사우디아라비아는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나라다. 

그리고 국명은 사막 한 가운데를 지배하던 토후 가문의 이름이기도 하다. 



1744년에 종교학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게 바야, 즉 충성 맹세를 했다. 그는 무슬림이라면 군말 없이 지도자에게 충성해야 하며, 대신 지도자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슬람교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운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두 측의 합의에는 사우드 가문은 정치를, 종교적 측면은 와하비파의 영역이라는 입장이 담겨 있었다. -<지리의 힘 2> 123쪽




이렇게 탄생한 와하비즘(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은 소수인 국왕 일가가 3천5백 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을 용사로 키워내고 알카에다의 탄생을 불러왔다. 9.11테러로 빈 라덴과 알카에다는 소탕되었지만 소멸된 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의 대테러 작전과 러시아 및 이란 등의 맞대응이 IS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테러 단체들의 탄생을 도와주고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TV뉴스 등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시뻘건 피와 총격음이 난무하는 잔인한 장면들만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가치판단을 방해한다. 물론, 이유는 테러범이든 방송사 운영진이든 정치인이든 똑같이 '돈'과 '권력'을 위해 폭력을 상품화하거나 도구화할 뿐이다.  




한편, 영국 못지 않게 대제국이었던 스페인과 고대 문명의 산실인 그리스는 지리의 축복과 재앙을 한꺼번에 받은 나라들이다. 이 두 나라의 성장과 쇠락이야말로 지리의 공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특히,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을 쟁취했으나 내전의 진흙탕 속에 빠졌던 그리스의 근현대사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만하다.  



터키에 남겨진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미래를 정치인들이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민간인 학살과 마을 파괴가 횡행하면서 로잔조약(1923년 터키와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이 맺은 조약)이 맺어지기 몇 달 전에 이미 적어도 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떠났다. 소수계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그리스와 터키 양측의 발언이 나온 후로 로잔조약은 강제로 주민들을 교환하는 데 합의했다. (...)
(그리스) 테살로니키는 발칸 지역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도시였다. 그런데 난민들이 밀려들어 오자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졌고 이를 기회로 반유대주의 정서가 촉발됐다. 그러자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온주의 운동과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새로 온 이주자들 다수가 정착한 곳은 지난 10여 년간 그리스로 편입된, 즉 <새로운 그리스>로 알려진 열악한 곳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뒷날 많은 이들이 공산당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궁극적으로 군사 정변과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하는 빌미를 가져왔다.
1920~1930년대는 지속되는 분열과 불안정 그리고 파시즘과 손발을 맞추는 군사 통치의 시대였다. 그리스는 독재자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의 지휘 아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애당초 그는 그리스가 중립을 지키는 걸 원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침공에서 고배를 마신 뒤 그리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 군대에 의한 가혹한 점령기를 보내게 된다. 그나마 이 나라의 지리 덕분에 점령군은 내륙 전체를 지배하진 못했고 그리스는 결사적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악지형을 십분 활용해서 지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 기간에 행해진 적군의 식량 징발로 수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굶어 죽었고, 7만 명이 처형당했으며, 레지스탕스 공격에 협조한 죄로 수백 곳의 마을이 파괴됐다. 또 6만여 명의 그리스계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많은 이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테살로니키의 유대인들은 겨우 9%에 불과했다.
1944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독일군이 철수하자 영국군이 군중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아테네로 입성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안도도 몇 주밖에 가지 못했다. 그해 12월, 아테네 거리에 다시금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리스 내전의 전조를 알리는 소리였다. 이 갈등의 시초는 적어도 왕당파와 반왕당파로 국론이 갈라진 20세기 초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간헐적으로 협력하기는 했지만 양대 레지스탕스 그룹인 공산주의 EAM-ELAS와 중도우파 EDES는 독일군이 철수하고 난 뒤 그리스에 다른 통치 권력이 들어서는 것에 대비하고 있지 않았다. -<지리의 힘 2권>, 228~230쪽




결국, 소련의 지원이 끊기자 공산주의자들은 이웃한 공산권 국가인 알바니아로 도망가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그리스 땅에 곧바로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내전으로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꽃피운 그 땅에서 민주주의는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민선 지도자들와 정부 관료들은 무능했고 부패했다. 군부 쿠데타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 근현대사와 닮아도 너무 닮은 거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우리와는 털끝만큼도 닮은 점이 없는 강대국들의 역사는 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자세히 배우고 가르치면서 정작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면,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해전이나 미국 링컨 대통령의 남북전쟁보다는 그리스나 베트남의 독립전쟁과 내전 등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데 말이다.    



트라팔가 해전이 나왔으니 나폴레옹의 프랑스나 넬슨의 영국 입장 말고 스페인의 입장에서 이 전쟁을 살펴보자. 사실, 트라팔가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인 영국이나 프랑스 지도에는 없다.  지브롤터 해협의 스페인 쪽 갑곶을 이르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폴레옹과 넬슨은 왜 자기 나라도 아닌 스페인까지 와서 싸운 걸까?




1600년에 850만 명이었던  이 나라 인구는  한 세기 만에 6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매년 평균 1만 명의 군인들이 사망한 데다 식민지로 이주한 또 다른 5천 명까지 더해진 탓이다. 극도의 빈곤과 되풀이되는 역병은 성장으로 가는 발목을 붙잡았다. 1700년대로 접어들어도 스페인은 여전히 전 세계에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대국이었지만, 원래 갖고 있던 것을 자키기에도 벅찬 데다가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유럽 내에서도 많은 영토를 잃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그리고 1704년에는 지브롤터까지 영국에 빼앗겼다. 
갈등이 한 세기를 괴롭혔다. 스페인은 원래 프랑스와 싸우다가 나중에는 한편이 되는데 1805년에 트라팔가에서 두 나라의 연합 함대는 영국 해군에게 패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3만 명의 프랑스 군대가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해 들어오면서 이른바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게릴라라는 단어는 실상 이 전쟁에서 나온 말로, 스페인어에서 전쟁을 뜻하는 게라(guerrilla)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말은 당시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스페인의 비정규군 무리를 지칭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396쪽




단테의 <신곡>에서 가장 끔찍한 9옥은 '배신자'들이 가는 곳으로, 입구엔 신을 배반한 악마 루시퍼가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와 의부인 카이사르를 죽인 부르투스와 카시오스를 잡아 먹고 있다. 그만큼 배신을 가장 나쁜 죄악으로 본 것인데, 그렇다면 스페인을 배신한 나폴레옹은 9옥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배신과 침략이 없었다고 스페인이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엔 신진 세력인 영국의 부상이나 카리브해 식민지의 독립 전쟁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20세기 초 대영제국이 무너지는 것과 비슷한 지경학의 공식이 스페인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일단 스페인은 지도 상으로만 보면 피레네 산맥으로 유럽과 경계를 이루며 3면은 대서양과 지중해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지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남쪽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무어인과 북쪽으로는 산맥을 넘어 밀려들어온 고트족 등등 여러 민족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는 점이다. 영국이 1704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합쳐지면서 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듯이 스페인도 146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라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한 후 그라나다 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아랍왕국을 몰아내면서 대제국으로써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흘러들어오는 은을 동방의 사치품을 구입하고, 유럽 내 분쟁에 쓰기 위해 군비를 확장하는 데 '몰빵'하기 시작한다. 결국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힘의 영역을 넘어서까지 제국이 확대되자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카리브의 해적들도 은을 가득 싣고 귀환하는 스페인 함대를 노략질했으니 그들도 제국 쇠락에 한몫했다과 봐야하나). 그러자 각 지역에서 분리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원래 다른 민족으로 각기 다른 왕국들이었으니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북쪽의 갈리시아, 그 옆의 바스크 지방,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가 특히 심했다.  독재자였던 프랑코 장군의 출신지가 갈루시아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무려 36년의 전체주의 통치 끝에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군부에 기대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대신 스페인에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 주기로 한다. 




"스페인은 유럽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스페인 국민은 유럽인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유럽의 일부가 되려면 스페인은 먼저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만 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감수하고서라도 기존의 정치 체제를 해체할 생각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모든 분파들을 향해 발언을 해야 한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모든 스페인 사람들의 왕>이 될 거라고 말했다. 이는 어찌 보면 수세기 동안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려는 과업이 실패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카를로스 국왕의 다음 행보는 카탈루냐와 갈리시아를 방문해서 그들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코의 출시지인 갈리시아에서 국왕은 스페인어보다 포르투갈어에 더 가까운 갈리시아어로 짤막하게 연설까지 했다. 그는 "갈리시아 만세! Viva Galicia!"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지리의 힘> 2권, 407쪽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와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로 대표되는 스페인 프로축구 시합은 단순히 스포츠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걸핏하면 관중들의 집단폭력사태가 일어나는 이유 역시 각 지역의 민족들이 서로 싸우던 과거의 전쟁이 집단 기억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지역 감정은 저리가라 할 정도인데도 어째서 한국인들은 서로 뭉치지 못하고 헐뜯기만 한다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는건지 모르겠다. 

물론, 이 말은 일본인이 구한말 의병활동과 3.1독립운동으로 단합하는 조선인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말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은 서로 잘 싸운다'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요즘엔 특히 해외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중장년층 교포 출신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것 같다. 교포들은 오랫동안 해외에 거주해서 국내의 상황들을 체험하기가 쉽지 않고 그저 피상적으로만 접하다가 현지인이나 다른 외국인의 관심이나 질문을 받게 되면 그제서야 외국인의 눈에 비쳐 반사된 한국의 모습을 보고는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물론, 이 외국인들의 의식과 생각에 일본의 소프트 파워가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 잘 싸운다'는 말은 일본 열도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해서 캘리포니아 해안 절벽에 부딪힌 후 반사되어 다시 한국과 한국인에게 되돌아온 셈이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 영국 사람들과 스페인 사람들도 지역적으로 독립을 주장할 정도로 서로 분열되어 있지만 세계  어디에서도 "영국 사람들은 서로 잘 싸워", "스페인 사람들은 단합하지 못해." 등등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지리의 힘> 1권 마지막 챕터가 북극이라면 제2권의 마지막 챕터는 우주다. 

과거와 현재를 살펴 보고 이해하게 되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북극과 우주는 인류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건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만이 미지수일 뿐...



아마 인류 4천 년 역사가 지구 표피층에 만들어진 지형과 대기층의 온도에 따라 결정되었다면 앞으로의 4천 년 인류 역사는 태양계와 그 너머 우주 공간에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또다른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주 공간이 가상의 적을 더 잘 관찰하고 더 빨리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우주 경쟁에는 늘 군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 개척자 둥 한 사람인 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우주 비행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1930년대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까지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했지만 로켓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나치는 폰 브라운의 연구를 지원했고 그 결과물인 V-2 로켓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에 투하됐다. 1944년에 최초로 우주 공간에 쏜 발사체가 된 V-2는 수직 이륙 후 고도 176킬로미터까지 날아올랐다. 종전 후 폰 브라운과 120명의 과학자들은 문제의 V-2와 함께 미국으로 옮겨가서 미국의 우주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
러시아인들 또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이 경주에서 앞서가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독학자이자 은둔형 과학자로 알려진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우주 비행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우주 공간에 도달하기 위한 중력권 탈출 속도는 초속 8킬로미터가 돼야 하며 액체 연료와 다단계 로켓을 사용하면 가능하리라는 가설을 처음으로 세웠다. 또한 그는 우주 정거장과 에어론, 산소 시스템의 청사진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의 논문들 다수가 비행기가 최초 비행을 하기도 전에 출판됐다. 그가 우주 여행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있다. 1911년에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지구는 인간의 요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요람에서만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은 달의 뒷면에 있는 분화구에 특별히 그의 이름을 붙여서 그를 기억하려고 한다. -428쪽




지구의 모래알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고 그 한 알 한 알들의 사이가 수 조 킬로미터에 달할만큼 넓고 넓은 우주 공간에서  80%가 금으로 이뤄진 지구만한 행성이나 혹성을 마주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지금은 갈등과 전쟁의 주된 원인인 원유와 천연자원 및 물 등등은 앞으로 우주에서 무한대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금, 은, 우라늄, 철, 구리 등등 주기율표에 나와 있는 원소들 대부분은 우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을 이루는 요소들도 모두 우주에서 기원했음은 물론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 말을 이렇게 바꿔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읽는 만큼 보인다.' 



팀 마샬의 <지리의 힘> 은 지리와 역사를 결합한 교양서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역사 지식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의식적으로 역사책들을 읽은 덕을 톡톡히 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과거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해 보고 현재 상황에 대입해 보면서 새롭게 깨닫고 인식하게 되어 스스로도 신기하고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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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혁명가의 회고록 빅토르 세르주 선집 1
빅토르 세르주 지음, 정병선 옮김 / 오월의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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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890년에 태어난 빅토르 세르주라는 낯선(?) 인물이 1906년부터 1941년까지 겪었던 내용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그는 벨기에에 망명한 러시아 혁명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노동과 독서로 세상을 배웠다.

자연 과학이나 인문적 기초 교육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차별적 독서와 자유분방한 토론은 혁명가를 탄생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으리라.

아나톨 프랑스와 알베르 리베르타드에 열광하고, 장 조레스의 <위마니테>를 읽던 저자는 자연스럽게 아나키스트가 된다. 참고로, <위마니테>는 공산당 중앙기관지다. 



우리는 아나키즘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나키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했고, 동시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아나키즘이 밝힐 수 없는 삶의 측면이란 있을 수 없었다. 적어도 우리한테는 그렇게 보였다. 사람은 가톨릭교도일 수도 있고, 신교도일 수도 있으며, 자유주의자, 급진파, 사회주의자, 심지어 생디칼리스트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인생, 나아가 전반적인 삶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적당한 신문을 골라 읽는 것으로 충분했다. 만약 그 또는 그녀가 더 엄격하다면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는 경향과 조류를 지지하는 카페에 자주 드나들기만 하면 된다. 아나키즘은 모순으로 점철되었고, 각양각색으로 산산이 분열돼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말과 행동의 통일을 요구했다. (기실 말과 행동의 통일은 모든 이상주의자가 요구하는 바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 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시에) 가장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조류를 택했다. 우리가 채택한 아니키즘은 자체의 혁명 논리를 통해 혁명의 필요성을 폐기해버렸고, 거기에는 변증법의 논리가 단호하게 동원됐다. 우리는 온건하고 학술적인 아나키즘을 혐오했고, 어느 정도는 그 때문에도 언행일치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60~62쪽





벨기에의 아나키스트는 이제 파리로 향한다.

예술과 자유의 도시 파리에 도착한 저자는 뭐라도 이룰 수 있을 것 같고 뭐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콤했던 첫키스는 어느덧 끈적거리는 숨막힘으로 바뀌고 만다.




파리는 "탈출구가 없는" 도시였다. 파리는 엄청난 정글이었다. 그곳에서는 원시적 개인주의가 모든 관계를 지배했다. 우리의 것과는 방식이 달랐고, 그래서 위험천만했다. 우리의 개인주의는 긍정적 의미의 다원주의적 생존 투쟁이었다. 우리는 빈곤의 굴욕에 작별을 고했지만 다시금 그것과 싸우고 있었다. 스스로에 충일하라는 계명은 소중했고, 아마도 그게 가능했다면 고귀한 성취였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절박한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스스로에 충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욕구가 절박하면 다른 사람들에 공감하기보다는 짐승처럼 바뀐다. 우리는 음식과 거처와 입을 옷을 혼신의 힘을 다해 마련해야 했다. 그런 다음에는 또 읽고, 생각할 시간도 여투어야 했다. 집도 절도 없이 뿌리가 뽑혔거나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이상주의로 "몸이 달은"(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무일푼의 젊은이인 우리로서는 이 문제를 사실상 해결할 수가 없었다. 다수의 동지가 이내 '불법 행위'에 빠졌다. 사회의 주변부가 아니라 도덕성의 주변부에서 살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착취하지도, 착취당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자기들이 계속해서 그 둘 다임을 깨닫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이제 쫓기게 된다. 그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을 때 감옥에 가기보다는 자살을 택했다. -64쪽




"목숨을 잃는 게 나쁘다거나 빼앗는 것이 범죄일 만큼 삶이 그렇게 대단한 은전이나 혜택인 것은 아니다.(아나톨 프랑스)"

자유는 곧 무질서요 퇴폐였다.

감옥에서의 5년에 관해서는 '피정'이라는 말로 간략하게 표현한다. 사람은 자신을 무너뜨릴 만큼의 고통과 직면해서 무너지지 않으면 더한층 강해지듯, 감옥은 그의 정신을 순화시키기보단 되려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활동과 노력만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도 않는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가장 사적인 사유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수천 가지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

당신은 스스로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도 않는다. 당신은 우리 대다수가 하는 가장 내밀한 생각이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결부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더구나 발언하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대변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는 사람이다. 다만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게는 아나키즘의 패배가 아주 분명하게 이해됐다. 개인주의자들의 일탈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했다. 하지만 나는 탈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109쪽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맑스의 예측과는 달리 농업국이었던 유럽의 변방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 러시아계 이방인의 마음을 이보다 더 곧추시키는 일은 또다시 없었으리라.

베를린을 거쳐 1919년 1월 마침내 꿈에 그리던 페트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당도한다.

그토록 기대했던 혁명의 나라 러시아에 대한 저자의 첫인상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우리는 얼어 죽은 세계로 들어섰다. 눈이 반짝이는 핀란드 역은 사람이 없었다. 레닌이 장갑차 위로 올라가 군중 연설을 한 광장은 황량한 설원일 뿐이었다. 주변 가옥들도 사람이 안 살았다. 넓고 곧게 뻗은 간선 도로들과 얼음장 위로 눈을 이고 있는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보자 하니, 버려진 도시 같았다. 우리가 맨 처음 목격한 사람은 회색 외투를 걸친 수척한 군인이었다.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숄을 두른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유령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안중에 없다는 듯 조용한 채였다.

우리는 시내로 향했고, 유령 같은 삶의 흔적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지붕 없는 썰매를 굶주린 말이 끌었다. 눈밭 위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자동차는 거의 한 대도 안 보였다. 행인은 드물었고, 있다고 해도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표정이었다. 얼굴들이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넝마를 걸친 군인들은 밧줄을 단 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런 부대가 단위 부대를 상징하는 적기를 들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탁 트인 시야의 끝 얼어붙은 운하들 앞으로 버티고 선 제정 시대의 궁전들은 활기가 없었다. 더 육중한 다른 궁전들도 볼 수 있었는데, 그 옛날 열병식과 행진이 이루어진 광장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왕실 처소의 세련된 바로크 풍 파사드는 거무칙칙하고 진한 빨강으로 칠해져 있었다. 극장, 군 사령부, 옛 부처 건물들은 전부 제정 양식이었는데, 오랫동안 빈 채로 방치되었음에도 열주 덕분인지 웅장하다는 느낌이었다. 성 이삭 성당의 도금 지붕도 보였다. 아치형의 지붕을 떠받친 붉은색 화강암 기둥들이 장대한 위용을 뽐냈다. 페트로그라드는 황폐한 도시였고, 높이 솟은 돔은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듯했다. 우리는 표트르-파벨 요새의 총안과 노란 첨탑을 바라보았다. 바쿠닌과 네차예프 이래로 투쟁을 거듭하다가 거기서 스러져간 온갖 혁명가가 우리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세계가 이제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페트로그라드는 추위의, 굶주림의, 증오의, 그리고 인내의 메트로폴리스였다. 주민이 불과 1년 만에 100만 명에서 겨우 70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우리는 수용 시설에 도착했고, 흑빵과 말린 생선을 기본 식량으로 배급받았다. 우리 가운데서 그때까지 그렇게 참담한 음식을 먹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53쪽




이곳이 고골과 푸시킨과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크의 나라란 말인가.

그토록 열망했던 혁명이 성공했건만 빈곤은 더한층 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제정 러시아 시절의 소박한 활력마저 잃어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신흥 관료를 간단히 언급한 편지에는 "소비에트의 쓰레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줄곧 악화된 것은 공안통치가 지속되면서 참을 수 없는 잔혹 행위가 보태졌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투사들이 감탄이 나올 만큼 올곧고 객관적이고 사심이 없지 않았다면, 그들이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그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겠다고 단호히 결의하지 않았다면 희장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위대하고, 지적으로 탁월하다는 점이 무한한 자신감이라는 악습으로 부상했다. 이중의 책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때 깨달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교훈이었다. 사회주의는 적과 구체제에 맞서 싸우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체의 내부 반동과도 싸워야만 한다. 혁명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암괴처럼 보일 뿐이다. 허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면, 최선의 요소와 최악의 요소가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급류와 같다. 반혁명의 흐름이 실재한다는 것도 불가피한 현실이다. 혁명은 구체제의 낡은 무기를 쓰도록 강요받는다. 그런데 그 무기는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자체의 폐해, 월권, 범죄, 반동의 순간들을 경계해야 한다. 혁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비판, 반대, 시민적 용이가 사활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1920년에 그런 요소가 크게 부족했다.

레닌이 자주한 유명한 말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는 영예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민족에게 닥치다니 참으로 불운하다" -225~226쪽




볼셰비키는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혁명엔 성공했지만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엔 실패했다. 당연하다. 볼셰니즘은 혁명을 위해 특화되었을 뿐 사회 조직과 운영을 위한 정치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한 혁명가가 저절로 훌륭한 정치가가 되는 건 아니었다.

저자는 교조주의에 빠진 스탈린주의와 멘세비키에 대한 볼셰비키의 숙청과 독재를 비판했지만 만민의 평등과 행복은 볼셰비키만이 달성할 수 있다고 고집하면서 끝까지 볼셰비키 당원으로 남았다.




어느 누구도 각자의 지분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혁명이 일어나 관료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바로 우리 손에서 새로운 전제 국가가 출현해 우리를 분쇄하고 있으며, 결국 온 나라가 끽 소리도 하지 못하는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에 관해서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우리 대오의 그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알마아타 유배지에서 침잠 중이던 트로츠키도 소련 체제가 여전히 우리의 것이라고 단언했다. 비록 병들기도 했어도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적이고, 여전히 사회주의라는 것이었다. 당이 우리를 제명하고, 투옥하고, 살해했지만, 그 당은 여전히 우리의 당이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당 덕택이었다. 우리는 당을 위해 살아야 했다. 왜냐하면 당을 통해서만 혁명에 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당을 사랑하다가 침몰하고 말았다. 우리는 당을 사랑해서 반란에 나섰고, 그러다가 우리 자신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444쪽





1920년 백군과의 내전이 끝나기 전부터 전시 독재를 이어가던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끝낼 생각도 방법도 잊어버렸다.

농촌 인구의 50%는 집단농장 안에서 각종 직함을 가진 비농민이 되어 있었다. 거대한 관료주의의 탄생이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절대적으로 줄고 군인을 포함하여 농민의 노동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하나같이 볼셰비키 당원들이었고 배급 라인을 장악하고 배급품을 착복했다.

이들이야말로 혁명을 가로막는 반혁명 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반혁명 세력 척결을 위해 가동한 조직(체카)은 오히려 볼셰비키를 비판하는 정치 세력만을 잡아들였다.

자신의 부정부패를 가리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희생양을 찾는 것이고 최적의 희생양은 다름아닌 최고 권력자의 경쟁자와 다른 정치 세력이었다. 건전한 토론과 비판으로 쇄신을 거듭해오던 볼셰비키는 이런 식으로 급속하게 타락해 간다.


여러 번의 수색과 구금을 겪고 재판도 없이 볼가강 유역으로 쫒겨난 저자는 어린 아들과 함께 비참한 생존을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인간의 존엄마저 잃어갔고 작은 설탕 한 조각을 두고도 아귀다툼을 벌였다. 자급자족을 중시하는 농촌의 생산 구조를 무시한 채 콜호스(집단농장)로 만들고 헐값에 곡물을 강제 징발해버린 결과였다.



저자는 운이 좋았다.

여러 잡지들에 끊임없이 글을 투고하고 책들을 내서 외부 세계에 이름이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소비에트를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17년 전 소비에트에 처음 진입했을 때의 첫인상과 소비에트를 떠나 서구 세계에 진입한 순간 받았던 인상이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특히, 서구에서의 삶을 모르는 그의 아들이 받았을 충격이라니...




폴란드 국경을 넘어서자 예쁜 집들이 보였다. 파리, 베를린, 런던, 뉴욕에서 발행된 신문과 잡지가 가판대에서 팔리고 있었고, 철도원들의 복장이 말쑥했으며, 사람들의 표정은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다. 밤이 깃들자 조명이 켜졌고, 바르샤바는 장대한 위용을 뽐냈다. 간간히 박힌 파랑색 전등이 아취를 더했다. 마르잘코프스카 가를 걷는 사람들이 걸친 옷은 우아해 보였다. 번화가의 분주함에서는 무심함과 번영이 느껴졌다. 상점에는 사람들이 꿈꾸는 모든 게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변변찮은 협동조합과 비교해, 단연 돋보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마음이 아팠다. 나치가 장악한 독일을 횡단할 때는 기차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나만 한 돌출 교각에서 어떤 광장을 잠깐 볼 수 있었다. 베를린의 슐레지엔 역 인근이었던 그 광장을 나는 알고 있었다. 독일은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곳이 효율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깔끔했다. 건물들은 사생활을 지향하거나 순전히 크기에 몰두했고, 정원은 공들여 조성돼 있었다. 나는 유대인 여행자 몇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은 삶이 두렵다고 대꾸했다. 독일에서는 테러가 아주 비밀스럽게 행해졌고, 나라도 아주 컸다. 그런 나라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 중이던 사람들이었으니, 체제의 어두운 면을 거의 모른다는 게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아무튼 내가 러시아인이었고, 그래서인지 그 별것 없는 내용조차도 그들은 나와 나누는 걸 저어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련을 영광스런 나라도 인식했다.

우리는 브뤼셀에 도착했고, 니콜라스 라제레비치의 집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라제레비치는 부모가 러시아인인 생디칼리스트 투사로, 수즈달에 투옥되었다가 소련에서 쫓겨난 친구였다. 그는 실업수당으로 먹고살았다. 시청에 가서 실업자들에게 최소 가격으로 제공되는 식사를 받아먹었다. 그가 내게 나눠준 식사는 진한 스프, 스튜, 감자였고,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러시아에선 당 고위 관료들만 이렇게 먹을 수 있는데!" 그의 집은 방이 세 개였고, 자전거와 축음기도 있었다. 그 벨기에인 실업자는 소련에서 보수가 괜찮은 기술자만큼 쾌적하게 살고 있었다. -579쪽





1937년 당시 유럽은 대공황을 겪고 서서히 회복기에 있었으며, 새로운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한편으론, 러시아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놀라움과 함께 부러움을 보이고 있었다. 저자가 열차 안에서 만났던 독일인처럼 말이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실제 삶은 혁명 전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예술이나 사상 방면에선 더한층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에서는 이를 눈치채는 사람들이 드물었는데 여기에는 볼세비키의 외교전술이 주효했다.

볼셰비키의 최대 목표라 할 수 있는 전세계 공산화를 위해선 볼셰비키의 타락상과 소비에트의 빈곤과 독재가 외부에 들어나선 안 되었다. 소비에트 볼셰비키는 다른 나라의 공산당 조직에 보조금을 지급함과 동시에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서 선전전을 펼친다.


버나드 쇼는 너무 나이가 든 나머지 소비에트의 실상을 보고도 보지 못한다. 웨버 부부는 찬양 일색이었고 유명 작가인 존 스타인 벡은 긴가민가 의심했으며, 버트런드 러셀만은 소비에트의 허상을 폭로한다.

그 많은 지식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수 있었는지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었다.

일단, 자신이 지지했던 공산주의 혁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지식인은 일단 사고와 검증을 통해 확정된 것에 대해선 철회하거나 오류가 발생해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틀렸다고? 그럴 리가 없다.'가 바로 지식인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이들의 독단과 이기심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생명을 잃게 만들지에 대해선 '내 알 바 아닌 것'인 셈이다.

그렇게나 많은 인문 철학서들을 읽고 자기 희생과 인류애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종교의 원리와 공산주의의 공통점을 분별해내지 못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볼셰비키 당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자와 같은 이들의 양심 선언이나 폭로에 대해서까지 귀를 닫았다는 점이다.



빅토르 세르주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며 살았고 그 꿈을 품고 죽었다는 점에서 골수까지 혁명가였다. 그는 정말 볼셰비키가 만민의 평등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을까?

일단, 평등과 행복 사이에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다.

'모두가 평등해지면 다같이 행복해진다'는 말은 타고난 신분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사회에서 내세를 약속하면서 민중을 달래고 안심시키던 성직자들의 전용 멘트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남들과 같지 않을 때 불안해하고 같아지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남들과 같아지면 그 순간부터 남들과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걸 공산주의자들은 인식하지 못했거나 무시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패배한 게 아니라 개인주의에 패배한 셈이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인내의 연속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크고 작은 사건들의 실타래 속을 헤맸다.

'공인된 러시아 혁명사가 아니라 한 개인의 체험담을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개인의 삶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조형된다는 점이다. 당연한 말인데 이게 참 실감되지가 않는다. 현재 나의 하루 하루가 사회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 사회 구조는 다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결정된다는 걸 쉽게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빅토르 세르주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19세기와 결별하고 20세기를 맞이했던 유럽의 일부분을 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당시 우리나라 조선인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국제적으론 테러리스트로 알려진 안중근 의사와 이봉창 열사며, 가두시위 주모자들 중 한 명이라고 소개되었을 뿐인 유관순 열사 등등... 개개인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는 과정은 몇월 며칠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역사적 사건을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분명 지어낸 이야기지만 또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파친코>가 그 어떤 역사다큐멘터리보다도 더 당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실증하는 것처럼....



삶은 언제나 역사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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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1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 PEACE by PEACE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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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 특히 중,후반의 역사는 미국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보통 사람의 세기'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결국 '미국의 세기'를 만들고야 말았고, 결과는 냉전은 종식되고 적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적을 스스로 만들어 내면서 전쟁의 시대를 연장시켰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만큼 무의미한 건 없다지만 아니할 수가 없다.


만약, 2차 대전을 종식시켰던 루스밸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부통령 트루먼 대신 월리스가 부통령이 되었더라면?


만약,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과 함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핵무기의 위험을 깨달은 케네디가 저격당하지만 않았더라면?


만약, 라틴아메리카가 하나의 국가라고만 알고 있던 무식한 배우 출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지만 않았더라면?


만약, 플로리다주 선거인단이 공화당 지지자의 폭력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검표를 강행했더라면?




미국은 양차 대전을 통해 19세기식 유럽의 식민주의 체제를 비판했지만 자신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친미독재정권을 지원하는 식으로 간접 통치를 강화해나갔다. 인권, 자유, 평화 등등 보편적 인류 가치는 언제나 립서비스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국제적인 상호 협정을 깨는 건 언제나 그들이었고, 심지어 그 원인을 상대편에게 돌리기 일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전세계인을 상대로 대량살상무기로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수시로 했고, 실제로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생명을 빼앗아왔다.


미국은 탄생 자체가 폭력이었다.

지난 200년 동안 미국은 인디언과 흑인 및 라틴아메리카인들을 희생시켜 성장의 발단을 닦았고, 이를 영구히하기 위해 전세계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구와 우주까지도 공격과 지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결국 누군가는 나서야 하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면죄부를 부여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마녀 사냥과 종교 전쟁으로 얼룩졌던 중세에서 단 한 발자국도 진보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 책은 언론과 증언 및 위키리크스 등을 통해 공개된 자료와 내용들을 바탕으로 엮여졌다. 

덕분에 현장감과 사실성은 높지만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이 부족한 상태에선 공포와 분노만 키울 뿐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데는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가 이 책으로부터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폭력은 공포와 분노를 먹고 산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폭력으로 얻겠다는 미국의 발상과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끝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만 누락되어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다음 둘 중 하나이리라. 

너무 완벽해서 흠잡을 게 없거나 아니면 한통속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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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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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는 어느 불운한 철학자의 기록에서 발췌되어 무분별하게 편집되고 적용되어 계급 투쟁과 권력의 도구로 쓰였다가 폐기처분된 이론이다.

'공산주의'라는 단어부터 부정확하고 자의적으로 통용될 정도로 미숙하고 오류 투성이인 사상이 체계적인 연구나 검증을 거치지도 않고 한 세기에 걸쳐 인류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폐해를 끼쳤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레닌의 권고는 앞뒤가 맞지 않았고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공산주의 정책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사회주의 개혁과 '유럽 사회주의 혁명'도 요구했다. 극좌 진영에서는 오직 좀 더 지적 수준이 높은 활동가들만 이 레닌의 이론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항상 사상과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심지어 아나키즘 같은 용어들이 어느 정도 겹치지 않은 때가 한 번도 없었다. 레닌은 자신의 정당과 사상을 나머지 정치적 좌파와 구분하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특히 마르크스주의 논쟁을 독점하고자 했다. -111쪽


볼셰비키는 1917년에 스스로 '러시아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차이를 강조했다. 레닌의 이론적 논설은 이 분열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사회주의'란 미래의 인류 발전에서 '공산주의'의 하위 단계였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여전히 자신들을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라고도 불렀다. 그 결과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은 자기 나라의 사회당을 공산당과 구별할 수 없는 당으로 색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된 혼란이었다. -174쪽


마오쩌둥은 자신의 국가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아니고 '인민민주주의'도 아닌 '인민민주주의 독재'라고 규정했다. 소련의 정치 사전에는 없는 용어였다. 조용히 그는 소련의 정신적 보호와 감독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이 주요 혁명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지주들을 파멸시킬 의향은 있지만 자본가 계급 일반과는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사용하는 수단이 독재적이긴 해도 그것이 자신의 뒤에 인민들ㅡ또는 그 구성 분자들의 대부분ㅡ을 단결시키고 있다고 역설했다. -446쪽




자연의 법칙이란, 말그대로 '자연히 되는 것(自然)'이다. '자본주의의 멸망ㅡ>프롤레타리아 혁명ㅡ>공산주의 사회'가 자연의 법칙이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지 않겠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연의 법칙처럼 인류의 역사 발전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내놓은 가정은 불완전했고 모호했는데 사상적으로 완전해지기도 전에 불안정한 세기말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야심가들에 의해 재해석되면서 왜곡, 확산되었다.



레닌은 무장 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해 '부르주아 국가'가 산산이 부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서진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국가가 창설되어야 했다. 그는 이 새로운 국가가 1905년과 1917년에 러시아에서 목격했던 토대, 즉 소비에트 위에 건설되기를 기대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스스로 선출하고 조직했기 때문에, 레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중핵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었다.

레닌은 그것은 무조건 독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외의 다른 어떤 것도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은 필연적으로 반혁명을 지지할 것이며 그들이 머리를 쳐들 때마다 억압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시민권은 철회되어야 했다. 레닌은 독재가 국가 터러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무심결에 말을 흘렸다. 그러나 레닌은 이 말을 일단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으면 '인민들'의 권력이 반혁명 세력에 단호히 맞설 것이라는 예측과 결합시켰다. 혁명은 꽤 쉬운 일이 될 것이다. 내전이 발발하더라도 곧 종결될 것이다.

<국가와 혁명>은 좌파 정치의 담론을 영구히 변화시켰다. 1917년 이후 모든 사회주의 그룹이 반박 대상으로라도 레닌주의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사상을 형성할 수 없었다. 신성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텍스트에 끊임없이 의존하면서 레닌은 자본주의 통치를 전복한 후에는 두 개의 역사적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고 상정했다. 제1단계는 사회주의 단계이며 제2단계는 공산주의 단계일 것이라고 마르크스주의는 가르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단계 자체는 중간 계급의 권리를 억압하고, '능력에 따라 각자로부터, 노동한 만큼 각자에게로'라는 원리를 시행하면서 급진적인 사회, 경제적 개혁을 도입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시작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회의 이익에 기여한 만큼 보상받을 것이다. 당국의 강제적 요구 사항이 축소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득한 기억이 되면서,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될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그 자체일 것이다. 가정부도 자신에게 맡겨진 행정 업무를 처리할 것이다. 역사는 종말로 다가갈 것이다. 그리하여 공산주의 체제의 작동 원리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능력에 따라 각자로부터 필요에 따라 각자에게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언은 실현될 것이다.

이 담론은 마르크스주의를 성급하고 특이하게 해석한 것이었다. 레닌은 평화적인 사회주의 전략은 결코 실행 불가능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뒤따를 폭력적 봉기만이 유일하고 가능한 발전 경로라고 절대적으로 고집했기 때문에 공격받기 쉬웠다. 이에 못지않게 논쟁적인 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이해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레닌은 그들의 '제자'로서 부끄럼 없이 앞장섰다. -109~110쪽




루터의 종교 개혁이 중세를 끝장내고 새로운 사상(프로테스탄트)을 탄생시켰지만 마녀사냥과 신대륙 침략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던 것처럼, 근대가 끝나갈 무렵인 19세기 말 공산주의는 만인이 평등한 공동체 즉 종교에서 주장하던 천년왕국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기존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일당, 일인) 독재로 귀결되고 말았다. 차이가 없는 만인평등은 개인차를 무시하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과 인간은 개개인의 차이와 능력을 인정받는 사회에서 더한층 성장할 수 있음을 이보다 더 여실히 증명할 수는 없었다.



똑같이 만민평등과 천년왕국을 주장했지만 공산주의 혁명에선 종교에서는 배제되었던 '폭력'이라는 조건을 포함시켰다. 육체적인 고달픔을 마음의 평화에서 찾아왔던 신앙심 깊은 인간은 더이상 찾아 볼 수 없었다. 신이 죽은 자리엔 이성과 과학 대신 혁명(독재)과 폭력이 자리잡으면서 인간성이 말살되어 갔다. 다시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혼란스런 변화의 시기에 필요한 정신적 위안을 소비에트 체제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서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항상 먼 미래의 낙원을 예언했다. 종교 집단은 인민위원의 강압에 신음했다. 억압하지 않았더라면 없어졌을지도 모를 관습적인 믿음들이 새로운 열풍을 맞았고 주의에는 미신이 비이성적이라고 알려줄 사제나 이맘, 랍비가 거의 없었다. 이 추세는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것은 1970년 대 중반 캄보디아에 폴 포트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세상 모든 곳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기분 좋은 추세였다. 농민들은 집단 농장을 떠나 유급 일자리를 구하고자 도시로 흘러들었다. 농촌에서 지배적이던 태도도 따라서 도시로 옮겨왔고 그 태도는 제거하기 힘들었다. 종교의 자리를 비운 공산주의 관리들은 러시아에 기독교가 확산되기 전에 존재했던 관념들로 그 자리가 채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259쪽


너무 합리적이어서 레닌의 계획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당을 떠날 뿐이었다. 옛날에,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 천년왕국 운동들이 있었고 볼셰비키는 이 운동들 가운데 일부를 찬양했다. 그들은 16세기 독일 뮌스터의 제세례파를 찬양했다. 또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테러리스트들을 찬미했다. 톰마소 캄파넬라와 토머스 모어는 그들의 독서 목록에서 두드러진 인물들이었다. 볼셰비키는 거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영향을 받은 만큼이나 완벽한 사회에 대한 이들의 오랜 꿈으로부터도 영감을 얻었다. 볼셰비키는 이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14쪽




인류의 목표는 종교에서 위안을 얻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있지 종교적 소망을 실현시키는 데에 둬서는 안된다. '병들고 가난한 자'들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사회는 당연히 발전할 수 없고 오래 존속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주-자본주의사회는 능력에 따른 개인차를 존중하되 그 과정과 결과가 공정해야 한다.



과거 신분사회에서 신분이 세습되었듯이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의 세습을 당연시 하고 있는데, 이것이 불평등의 또다른 기원이 되고 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다면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 부자가 되는 것 또한 부당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불평등을 없애고 완전 평등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이 전부 실패로 판명난 지금, 인류 사회에서 불평등 자체는 영원히 소거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 불평등이란 세습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차이에서 발생해야함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난 두 세기가 수 천 년 인류사회를 지배해온 신분의 세습을 철폐하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의 세기는 자본의 세습을 막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천년왕국을 부르짓는 사이비 종교가 그렇듯이 공산주의는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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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사 강의 (리커버 에디션) -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박노자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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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근현대사를 알고자 한다면 러시아 혁명을 피해 갈 수는 없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러시아는 근대 혁명 사상의 실험장이었던 만큼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러시아 혁명사는 중심 키워드로 작용한다. 

그럼, 일단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러시아의 근대사에서부터 출발해보자.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자마자 러시아는 민중 혁명으로 전제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러시아의 사회와 경제 구조도 여전히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개혁의 대상인 황제와 귀족이 개혁의 주체가 되었으니 제대로 된 개혁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는 서구 열강 중 하나로 등장하지만 당시의 러시아는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후발주자인 일본에 비해서도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던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우선 지식층의 사상적 뒷받침과 민중의 시위 및 항쟁 그리고 새로운 체제라는 혁명 이후의 대안이 필요하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던 가장 큰 이유는 세 번째 요소 즉 혁명이 성공한 후 구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와 이를 실행할 정치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혁명이 싹트기 좋은 시대였다.

우선 마르크스라는 걸출한 사상가가 있었고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층이 탄생했다.

새로운 사상은 구체제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유럽의 젊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도시 노동자에게도 퍼져 나갔는데 특히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현대화가 가장 늦었던 러시아의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레닌과 트로츠키 등 많은 혁명가들이 러시아 출신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1) 러시아의 혁명가들


러시아의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모범생이었던 레닌이 반체제 사상에 빠져들었던 건 큰형이 황제 암살 모의를 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레닌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피해 일찍부터 해외에 나가 활동을 하게 되는데, 처음엔 독일 사민당의 카우츠키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차후에는 독일 사민당의 보수화를 비난한다. 



1914년까지만 해도 레닌은 엥겔스의 바통을 이어받아 독일 사민당의 공식적인 이론가가 된 카를 카우츠키(1854~1938년)를 자기 일생의 사상적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카우츠키는 레닌의 후원자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사상적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제2의 아버지이기도 했어요. 또한 레닌은 독일 사민주의자들을 자신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조해야 할 이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 사민당은 덩치를 키워나가면서 국회에서도 더 많은 지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체제에 안주하면서 철저히 보수화되고 있었지요. 사민당의 이론가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년)은 노골적인 수정주의 노선으로 선회하면서 잉여가치론을 부정했어요. -49쪽 



저자는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독점화 경향 이론을 획일적으로 받아들였다면서 창의력이 부족한 기계론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비판한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독점화 경향 이론을 고스란히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작은 기업이 큰 기업에 먹히고, 큰 기업이 인수 합병을 통해 더 커지고 ,국가가 하나 혹은 몇 개의 기업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기업과 국가가 하나가 되고, 자본가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 여러 나라에 있는 국가 규모의 기업을 합쳐나가고, 그래서 결국 세계화된 초국적 기업이 등장하면 그때 사민주의자들이 총선을 통해 권력을 잡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할 것도 없고, 그저 이 일련의 과정을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에 합법적으로 정권만 잡으면 되는 거예요. 사회주의를 거의 자연발생적이면서 불가역적인 것으로 본 셈이죠. -51쪽  



그런데 흥미로운 건, 마르크스가 예상한 대로 자본주의는 독점화 경향 이론에 따라 진행되어왔는데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20세기 초 독일 사민당이 정당으로써 일정한 의석수를 차지하자 투쟁과 혁명을 포기하고 보수화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전세계 노동자 농민의 권익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쪽으로 일찌감치 변질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러시아 사민당(사회민주노동당)은 혁명을 위한 전위적 정당을 주장한 레닌과 전국민을 참여시키는 대중 정당을 주장한 마르토프가 충돌하면서 각각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갈라서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파로 알려진 볼셰비키는 사실 투표에서 단 한 표 차이로 소수파로 알려진 멘셰비키를 이긴다. 레닌의 전위정당론이 독재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을 감지한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에 가입했지만 밋밋한 투쟁 방식에 불만을 품고 탈퇴하여 어느 정파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홀로 대국민 연설과 팸플렛 등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러시아도 참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 경제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동원령까지 발령되자 러시아 민중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른다. 

마침내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정마저 무너뜨리고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전쟁을 중단할 수도 없었고 민중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었다. 이때 레닌의 볼셰비키를 비롯해 사회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이 10월 혁명을 추진해 권력을 쟁취한다. 그 유명한 볼셰비키 혁명은 사실상 무혈혁명에 가까웠다.  



레닌은 처음부터 러시아 농민을 혁명의 세력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는 농민이 대다수(약75%)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드넓은 지역에 거주해서 조직화가 힘들었던 데 비해 도시노동자는 25% 남짓이었지만 이들은 대규모 생산공장에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촌보다 침투하기도 쉬웠고 농민보다 동원하기도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물론, 농민에 비해 문맹률 또한 낮았던 것도 주효했다. 



한편, 대중 연설의 귀재였던 트로츠키는 당 내에서의 영향력보다는 러시아 민중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레닌은 당시 가장 시급한 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로츠키를 소환한다. 트로츠키는 처음엔 외교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독일에게 엄청난 영토 할양을 약속하고 연합국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늪에서 빠져나온 뒤, 국방 인민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뛰어난 전략 전술로 구세력과의 내전마저 승리로 이끈다. 

국내 혁명에 성공한 볼세비키는 이제 본격적으로 혁명의 세계화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론 사상가로도 뛰어났던 트로츠키가 이때 주장한 게 '불균형 복합 발전론'이다.   




트로츠키는 정치적 불만이 크면서 노동자의 집중도가 높아서 급진적 사상이 퍼지기 쉬운 나라가 생기고, 그런 나라가 공동의 세계적 과정에 던져질 때 약한 고리가 되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질 위험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후진적인 열강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지요. 또한 국가 간의 경쟁과 전쟁 등이 계속되고 한 나라 안에서도 내부 세력들의 괴리가 지속된다면 혁명의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지겠지요. 당시에 독일의 사민주의자들은 선진국이 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봤습니다. 반면에 트로츠키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뚜렷하면서도 복잡한 나라, 후진성과 선진성이 교묘하게 얽히고설킨 나라, 가장 약하거나 가장 강한 나라가 아닌 그 중간의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거예요. 이게 바로 트로츠키의 '불균형 복합 발전론'입니다. 
20세기 후반에 혁명이 일어났던 나라인 이란을 살펴보면, 선진국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공업이 발전되어 있었고 지배계급의 장악력은 비교적 약한 나라였습니다. 도시 하층민과 농민들의 누적된 불만, 미국의 침략을 막을 만큼의 강력한 군사력, 기존 노동자계급의 좌파적 기반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트로츠키가 주장한 불균형 발전론과 잘 들어맞는 사례지요.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에서 민중운동이 활발했는데요,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은 선진성과 후진성이 공존하는 국가 주도형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파탄에 이르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민중운동 발전의 원동력이 커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혁명기의 러시아보다는 경제 상황이 좋았고, 제1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교육적 바탕도 있었으며, 국내의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 점 등 때문에 혁명이 만회될 수 있었습니다. -113~114쪽



트로츠키가 1940년도에 사망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1925년 레닌 사후, 트로츠키가 당 내에서 따돌림을 받고 권력이 스탈린에게 넘어간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춘 탓에 독불장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항우가 결국 범인(凡人)에 가까웠던 유방에게 무너진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저자 역시 스탈린에 대해선 '지극히 평범했다'라는 말로 개인적 설명을 일축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트로츠키가 레닌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세계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 즉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은 아주 날카로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은 다소 편향적이었어요. 사실 모든 인간에게 이런 측면이 있을 겁니다. 트로츠키의 사상이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 논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혁명의 국제성을 강조한 것은 분명 높이 살 만합니다. 하지만 국가나 당 등 유사 국가적 조직에 내재된 위험성에 상당히 무감각했고, 이를 과소평가한 채 국가 지상주의적 사고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어요. 대중의 민주적 자율성 문제를 간파하지 못한 것 역시 아쉬운 지점이고요. -122쪽



마르크스는 철학자 레닌은 사상가라고 한다면, 트로츠키야는 혁명가라고 하겠다. 

끝까지 자신을 믿었고 타협할 줄 몰랐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마저 파괴시키곤 하는데 트로츠키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극으로 마감한 것 또한 혁명가답다. 



반면, 레닌이나 트로츠키에 비해 스탈린은 평범 그 자체였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극심한 자격지심과 인간적 질투심을 끝까지 극복하지 못했다. 그가 트로츠키에 대해 취했던 지나친 조치들 역시 정신적 콤플렉스의  발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가 혁명의 완수 대신 국가의 안정을 최우선시했던 것 역시 인간다운 조치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위험에서 빠져나오면 더큰 모험을 하기보단 안위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 역시 국민을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스탈린에 의해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세상은 마치 수 백 년 된 사회처럼 빠르게 관료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제2차 세계대전만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최고 권좌에 머무르기는커녕 비참한 말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스탈린 체제는 분명 억압적이었지만, 제정러시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민 포섭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체제에 포섭된 대중들은 억압을 느꼈지만, 그에 대한 불만을 정치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어요. 결국 스탈린 치하의 소련 체제는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대민 포섭 능력이 뛰어나면서 고속 압축적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 단위의 非시장적 개발주의로 규정하는 게 정확할 겁니다. -161쪽



스탈린이 대중에게 묵인된 독재를 펼칠 수 있었던 건 5개년경제개발계획이 성공했기 때문이고 공산당 내에서 지위를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건 숙청 때문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숙청은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승진의 기회가 되었다. 혁명을 직접 겪었고 그 감각을 간직한 사람들 즉 스탈린이 非혁명적이라는 걸 알아차릴 만한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결국 혁명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간부로 발탁(?)되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년)다. 물론, 그 역시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전임자의 시신 위에 자신이 앉는 권좌를 올려놓는 걸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을 지지했고 나라가 해체된 뒤에도 과거 소비에트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는 향수에 젖어 있다.  마치 '그래도 전두환 노태우 시절이 서민들이 살기엔 가장 좋았다'는 식의 말들이 한국 사회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소련을 오랫동안 뒷받침해온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산업 경제 팽창이 만들어낸 폭력과 포섭의 연결고리였어요. 비교해보자면 박정희 시대의 한국은 소련이나 북한보다는 포섭의 기제가 너무나 약했습니다. 소련에서의 무상교육 같은 것을 한국에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요. 우골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 시대에는 대학 교육을 받으려면 부모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했습니다. 소련에서는 비록 양질은 아니었지만 노동자를 위한 무상의료 제도도 실시되었어요. 반면에 박정희 시대에 의료제도는 철저히 시장에 맡겼지요. 소련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연금제도가 자리 잡는데, 박정희 정권은 군인과 공무원에 한해서만 연금제도를 시작했고요. 박정희는 복지 혜택이라는 포섭 정책을 스탈린과는 비교 못할 만큼 훨씬 더 작게 실시한 겁니다. -167쪽



성장과 독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폭력과 포섭 또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전자가 한국을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후자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지역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결국, 20세기에 접어들어 인류가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던 두 개의 정치체제는 이름만 다를 뿐 구동되는 원리는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미군과 영군군이 프랑스에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공산당은 독자적인 군사력으로 독일군이 패퇴된 뒤에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겁니다. 프랑스 부르주아에게는 공산당을 막아설 힘이 없었어요.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과 함께 프랑스로 들어온 샤를 드골(1890~1970년) 장군이 부르주아 공화국을 부활시켜도 소련을 따르는 프랑스 공산당으로선 그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이렇게 놓쳐버린 것이지요. 보수화된 소련이 유럽의 부르주아들을 살렸다고도 볼 수 있고요. 소련은 이미 보수화되어 있었지만 사회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유럽 사회주의자들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자본가들은 이런 상황을 만든 소련에게 내심 고마워했을 거예요. -183쪽



그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레지스탕스 운동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엔 소련을 위한 투쟁 즉 '소련 지키기'의 성격도 강했다.

1958년 쿠바의 카스트로 1965년 베트남의 호찌민 그리고 1973년 칠레의 아옌데를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사회주의는 공식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제, 공산주의 혁명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까?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발달하면 공산주의 혁명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했던 마르크스는 '자본의 위력'은 알았지만 '돈의 위력'은 몰랐다. 그래서 자본의 위험성과 자본에 의한 개인의 파괴만을 강조했다. 개인이 돈에 매수되어 자본의 치맛폭에 스스로를 맡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여야할 적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진 게 아니라 개인주의에 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앞으로 영원히 살아남을까?

자본주의의 수명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에 달려 있다. 자본으로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까지는 살아남을 것이다. 문제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이다. 북유럽식 복지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완벽한 대체나 대안이 될 수 없다. 결국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복지도 경제 즉 자본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인류는 비록 사회주의 혁명엔 성공했지만 단 한번도 사회주의를 실현시켜보지는 못했다고...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대안은 여전히 사회주의가 될 수 있노라고... 


맞는 말이다.

만인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인류가 탄생한 순간부터 품어왔던 꿈이니까. 




현실적 위력은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생명력은 다 타버린 화로 밑바닥의 불씨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진화의 시간이 아닌 역사의 시간에 그것이 큰 불길로 다시 살아날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좌절한 인류의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에 대한 꿈은 언제든 사람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00쪽




이 책의 부제 역시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이다. 어떻게 다른 미래를 한번도 꿈꿔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꿈꾸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러나 '꿈만 꾸고 살 수도 없다.'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혁명이란 마치 사랑의 서약과도 같아서 지킬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걸 서로가 잘 알기에 지켜지지 않았다고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혁명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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