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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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년세대(1950~1960년생): 산업역군으로 통칭되며 산업화세대라고 부른다. 이들 중, 특히 1955년~1963년도에 태어난 이들을 베이비붐세대라고 한다.

- 386세대(1960~1970년생): 민주화세대 혹은 민주화 1.0세대라고 하며,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 X세대(1970~1980년생): 서태지와 HOT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를 본격적으로 소비한 세대로, 신세대 혹은 정보화 1.0세대라고 부른다.

- N세대(1980~1990년생): 문화적으로 X세대의 계보를 잇고 있으며 십대에는 N세대 혹은 웹 1.0세대로 불리웠다. 2013년을 기점으로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인 이들은 소위 '88만원 세대'로 통칭된다.

- G세대(1990년대~2000년대생): 대한민국 수립 이후, 가장 많은 경제적 자원이 투입된 십대를 보낸 세대로 외국어 능력과 컴퓨터 및 모바일 기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이제 막 20대 초반에 접어든 이들의 미래 또한 바로 직전 세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 같진 않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을 읽었다.

이 책은 2013년 책이 출판된 시점을 기준으로 30대 초반인 저자가 20대 중반 정확하게는 2007년부터 발표한 글들을 엮은 책이다. 2007년도는 소위 '88만원 세대' 담론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책을 직접 읽지는 않았으나 당시 사회적으로 교류하던 대다수 사람들이 88만원 세대라는 특수한 환경 덕분에 나는 88만원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88만원세대'란 19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십대를 보내고 2000년대에 이십대에 접어든 이들로, 이들이 십대를 보내던 시기엔 N세대로 불리웠다. 이들은 전쟁의 폐허위에서 산업화를 거둔 장년세대의 자녀들로 대중문화를 최초로 소비한 세대인 X세대의 뒤를 이어 출현했다. X세대란 197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두 차례의 올림픽을 보면서 십대를 보내고 대학진학률이 채 50%가 되지 않던 90년대 초중반 대학에 입학한 후, 1997년 IMF가 터지기 직전 취업을 한 세대를 말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이들을 소위 '88만원 세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월드컵과 노무현 정부의 탄생과 더불어 이십대를 맞이했다. 6,70년대의 산업화와 80년대의 민주화 그리고 90년대의 대중소비문화를 거친 한국사회에 화룡정점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지도 않았건만 이들의 취업 상황은 녹록찮았다. 

 

저자인 한윤형에 따르면 '88만원세대'는 2007년 당시 88만원을 벌던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88만원 세대론'은 원래부터 88만 원을 벌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는데도 88만 원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위한 담론이었다. 그것이야말로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베스트 셀러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179-

 

상승과 발전의 시대만을 거쳐온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처음으로 하락과 정체 심지어 쇠퇴를 경험했거나 하게될 세대다.

바로 이와 같은 특징으로 인해,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이들을 위로하는 책들이 볼 물 터지듯 쏟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우석훈과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윤형은 이와 같은 '청춘 상담'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그리고 이들의 지적은 현실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김난도의 조언이 결국 그의 강의가 대상으로 하는 서울대생들에게나 최적화된, 80년대 대학을 다닌 기성세대의 꼰대질이라 말해야 할까? 자못 진보적인 척하는 김어준과 김형태의 조언이,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과 동떨어진, 서구 68세대나 한국 386세대의 추억을 더듬는 퇴행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할까? 엄기호는 이들과는 전혀 다르게 강의실의 청춘들의 생각을 수렴하여 시대를 모색하는 방법을 택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20대들의 멘토가 될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할까? 물론 이 모든 말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질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의 담론이 소비되는 양상이 이런 식의 조언의 내용에 대한 비판과 전혀 다른 층위에 놓여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139-

 

저자의 지적처럼 20대는 말을 잃은 세대다. 그들은 침묵함으로써 스스로를 규정한다.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서의 여당 승리를 두고는 '개념없는 20대의 정치 무관심'과 '20대의 보수화'를 원인으로 지목한 목소리들이 한동안 울려퍼졌더랬다. 그러나 20대의 정치무관심과 보수화를 언급하기에 앞서, 소위 386세대의 보수화와 기득권화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민중해방과 조국통일을 부르짖던 그들....

80년대에 대학에 입학했던 그들은 소비문화에 젖어 있다며 90년대 학번들을 꾸짖으면서 자신들의 낮은 학점을 마치 계급장처럼 자랑했더랬다. 학사경고가 누적되고 학점이 바닥을 기어도 그들은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노조가 있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IMF때에는 비교적 젊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조기퇴직의 철퇴를 운좋게 피해갔을 뿐만 아니라 대량 퇴직한 50대의 빈자리를 빠르게 차지하면서 예상보다 빠른 승진과 연봉 상승의 혜택을 입은 세대다. 그리고 '양키 고 홈!'을 외치던 그들은 결혼하자마자 2세를 위해 원정출산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육의 부조리를 일갈하면서 기꺼이 기러기 아빠가 되길 자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에 의해 탄생한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상승을 막지 못하자 부동산 투기의 막차에 올라탔고,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선 부동산 가격 하락을 막아줄 것 같은 보수여당에 몰표를 주면서 중산층으로서의 기득권을 필사적으로 수호하고자 했다.

 

이 정도면 거의 '386 X새끼론'에 버금가지 않을까?

'20대 X새끼론'을 이야기한다면 얼마든지 '386 X새끼론'도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 이게 바로 세대 충돌과 세대 담론이 생산되고 확대되는 공식이라 하겠다.

실제로 일부 50대이상 보수 장년층은 386세대와 20대를 세대 갈등의 전위병으로 삼으려 시도한 바 있으며, 이와 같은 시도는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한윤형은 서서히 한국 사회에 뿌리잡기 시작한 세대 담론 속에는 사회문제를 특정 세대의 책임으로 전가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있다고 지적한다. 정말이지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세대론에서 설득력을 느끼는 이들의 불안감이 폭로하는 사회문제는 어떤 진보적인 가치 지향에서 잡히는 그런 문제가 인다.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했고, 약해진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 왔다. 적나라하게 요약하자면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중산층 자신들의 자녀조차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168-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가 팽배한 지금. 세대 갈등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심정이다. 

그러나 정치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아니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은 지금. 우리는 또 다시 정치를 논해야 하지 않을까?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게 정치라면 이 세상을 바꾸는 것도 결국은 정치이기 때문이다.

 

20대는 산업화 세대가 더 이상 산업화가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신들을 지목해도, 민주화 세대가 더 이상 민주화가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신들을 지목해도, 군소리 없이 듣기만 했다. 어쩔 때는 자기네들 스스로 그 말이 좋다고 여기저기 퍼다 나르는 마조히즘적인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시대를 잘 만나 예술을 그 정도로 할 수 있었다 평할 수 있는 김형태나 신해철 같은 이들이 청년의 무기력함이나 정치 무관심을 질타해도 그게 옳은 말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부모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았으나 그 투자를 회수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20대들은 부채감에 시달린다. 그 부채감이 그들로부터 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현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고 자신들을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사회에서 겉돌게 된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284-

 

정치적으로 무능한 오늘날 20대의 현실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비평'의 대상이다. 그리고 비평을 넘어 상황의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정치적 행동이 절실하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290-

 

 

이글을 마주한 순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20대는 훈계를 해야할 철모르는 다 큰 아이도 아니고 개념없다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이들도 아닌, 그저 내 손주고 자녀이며 조카고 후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십대의 선배라는 사실이 불연듯 가슴 깊숙히 파고 들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다같이 고민해야 한다.

지금 당장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말이다.

미래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각오가 기성세대에게서부터 피어올라야 하는 건 아닐까....?

그게 나이 한살이라도 더 먹은 이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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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 전2권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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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의 글들은 어딘지 모르게 남다르게 다가온다.

아마도 시대공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4도에 나온 <청춘의 문장들>이 다시 화제다. 아마 지난 5월 후편 격인 <청춘의 문장들 +>가 나왔기 때문이리라. 십년이라는 시차에서 오는 느낌이나 감동이 남다르기 때문에 이런 시리즈물 아주 좋아한다. 하물며 나와 동년배인 작가가 쓴 것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목록 중 하나다.


작가가 서른넷에 출판된 <청춘의 문장들>은 이십대를 막 지나 직장생활을 거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직후까지의 작가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유년시절과 사춘기의 추억들 그리고 시인으로 등단하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및 습작의 세월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열정적이고 치열하다. 뭔가 이루고자 하는 충만함이랄까...? 확실히 청춘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당시 나 역시 막 서른에 접어든 시기였다. 그때를 떠올리면 십대와 이십대의 방황과 낯섦에서는 많이 벗어났지만 여전히 막막했으며 여전히 헤매이고 있었더랬지...


그때 그시절 내 곁에 있었던 김광석 역시 작가를 찾아갔던 모양이다. 그에 대한 작가의 애상에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뚝ㅡ'하고 비명을 지른다. 팽팽하게 작동하던 방어기제가 순식간에 무장해제되는 순간이었다. 김광석만 나오면 이 모양이다. 우리 세대는....  작가 김연수만 만나도 역시 이 모양이지. 우리 세대는...

어....?!

아니다.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20대 심지어 10대조차도 김광석은 레전드인 것 같다. 그리고 <청춘의 문장들> 플러스가 올해 다시 출판된 걸 보면, 김연수 역시 여전히 2,30대에게도 사랑받는 작가인 것 같다.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우리 세대와 우리 윗세대는 공감대가 너무 없었다. 성장한 환경 차이가 너무 많이 났으니까... 그러나 그 이후 세대들끼리는 의외로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는 걸 나도 느낀다. 인간의 감성이 진화하는 속도는 생각보다 느리다. 최소한 경제 성장 속도보다는 확실히 느리다. 감성 즉 문화란 어느 정도 경제가 발전한 다음에 형성되고 향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90년대 이후 완만한 경제성장속도만큼이나 우리의 문화적 감수성 코드 역시 천천히 바뀌어 온 게 아닐까 싶다. 즉, 5,60년대 청춘을 보낸 세대와 7,80년대 청춘을 보낸 사람들은 서로 공유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8,90년대 청춘들과 2000년대 이후 청춘들과는 의외로 공감대가 크고 넓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즘은 띠동갑과 친구가 되는 게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게 되었다. 아이유와 김창환이 듀엣으로 <너의 의미>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석은 젊어서 죽고 2003년을 기점으로 나는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게 됐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141 -


<청춘의 문장들 +> 발문을 쓴 작가 김애란은 이를 두고, "세상의 모든 인연들은 두 번 만난다. 한번은 각자의 나이로, 또 한번은 상대방의 나이가 되서..."라고 표현했다.

순간 머리속이 '멍'해졌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땅이 쑥 꺼지는 것 같은... 이런 기분, 언젠가 느꼈던 적이 있었더랬지....

내가 우리 엄마가 날 낳았던 그 나이가 되었을 때, 그해 내 생일날, 난 엄마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엄마가 엄마가 아닌, 나처럼 꿈을 갖고 있는 여자로, 오롯한 하나의 인격체로 다가왔더랬지... 그순간 엄마를 향한 솟구치던 미안함과 애틋함과 고마움과 연민과 사랑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작가는 이런 마음을 <청춘의 문장들 +>에서 이처럼 풀어놓았고, 난 그만 눈물줄을 놓아 버렸다.

부모가 된다는 건 자기 인생을 희생하면서 아이의 인생을 떠맡는 거예요. 우리 부모 세대들은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자기 삶의 일부를 희생한다는 뜻이에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고...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38 -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나의 탄생과 성장은 그 누군가의 삶의 희생 일부 위에 세워진 것이었구나....

어쩌면, 일부가 아닌 전부였던 그 누군가의 삶...


부모가 된다는 건 바다를 건너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다. 망망대해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유일한 위안은 우리 부모님이 나보다 앞서 그 바다를 건너갔다는 사실 단 한가지 뿐.


마음에 시퍼런 멍이 든다는 건, 이럴 때 하라고 존재하는 표현인가 보다.



<청춘의 문장들> 곳곳엔 고전과 한문, 한시가 자주 등장한다.

익숙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낯선 것들이다. 작가는 몇 백년 혹은 그보다도 훨씬 더 먼 옛날 옛적 사람들의 생각과 삶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해냈지만, 난 아쉽게도 그와 같은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너무 고풍(?)스러워서 책장을 덮으라치면, 등장하곤 하는 빼어난 문장들... 문장들...


나도 모르게 손을 놀려 백지에 옮겨 적어 본다. 

작가가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문장들... 그리고 그 문장들을 소개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 역시 밑줄 긋고 백지에 옮겨 적는 문장들...

이런 문장들은 사소하지만 때론 조각배를 타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건너갈 때 '노'가 되어 주기도 한다는 걸 잘 안다. 이런 건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알 수 없으니 절대로 글로 표현할 수도 없다는 사실. 중년에 접어든 내가 깨달은 거라곤 이점 하나뿐이다.  

 

아!

나 또한, 벌써 이만큼이나 바다를 건너왔구나.    

이런 걸, 알만큼...

 

내가 아는 건 바로 이점이다. 

아! 이런 걸 알만큼, 나 또한 벌써 이만큼이나 바다를 건너왔나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나고...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242 -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영어 가정법 문장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배웠고 3차 방정식을 그래프로 옮기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일 수 있는지 알게 된 일이다. 내 안에는 많은 빛이 숨어 있다는 것,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란 그 빛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이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195 -


재촉하는 만큼 빨리 흐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나이가 들고 싶다는 아이의 소원쯤이야 들어준다는 것. 삶이 너그러운 건 그때 뿐이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210 -


흘러간다. 세월은, 그렇게, 그렇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 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의 속도이지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212 -


<청춘의 문장들> 이후, 다시 십년이 흘렀다.

나도 작가도 이젠 중년이다. 원치 않아도... 누가 뭐래도....

그렇지만 지난 십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십대와 이십대는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오르건만 삼십대는 도무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에 없다.

왜, 일까?


<청춘의 문장들 +>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겪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사람을 스무 살 무렵에 다 만났으며 그 모든 길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걸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그 모든 슬픔을, 그 모든 환희를, 그 모든 외로움을, 스무 살 무렵에.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42 -


내가 삼십대에 만났던 사람들...

내가 삼십대에 겪었던 일들은...

모두 내 이십대의 연장이자 그림자였구나! 

그래서 삼십대에 본 하늘은 이십대에 봤던 하늘만큼 강렬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으니 기억에도 없는 것이구나!

내 생애 가장 푸르른 하늘은 바로 이십대에 봤던 그 하늘,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구나!



저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들을 청춘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은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가능한 거죠.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165~166 -


그래, 맞다!

지금 돌이켜보면,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갖고 있는 거라곤 시간밖에 없었던 나에게 어른이란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서어서 시간이 흘러서 청춘이란 이 혼란한 시기가 빨리 내 인생에서 지나가기만을 바랬더랬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청춘의 시간들은 참 느리게도 흘러갔을 것이다. 내가 '흘러 갔을 것'이라고 추측형을 쓴 건, 그 당시에는 시간의 흐름이 결코 느리다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춘의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먼 훗날의 깨달음이었다. 


피는 꽃이 좋았던 시절에는 그 꽃잎들이 지는 걸 굳이 지켜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나도 나이가 들고, 이제는 지는 꽃은 모두 화려한 옛 시절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심규선과 덕원의 <왜죠>라는 노래를 들었다. '꽃처럼 한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왜 꽃처럼 내 곁을 떠나려 하는 건가요?라는 가사처럼, 수없이 반복된, 꽃지는 시절의 이별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떨어지는 꽃잎 앞에서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지 못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191 -


인생이란 알지 못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이란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지...?

당신도 나와 엇비슷하게 문학을 공부했을 뿐이잖아!

당신도 나와 똑같은 음악을 듣고 똑같은 책을 읽었을 따름이잖아!

당신도 나와 똑같은 하늘아래 똑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나이 먹었을 뿐이잖아!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은 느끼고 표현하는데.... 나는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하는 걸까...? 


그래서 당신은 작가가 된 것이고, 나는 못 된 것이겠지...



당신은 언제 눈물을 흘리는가? 적어도 나는 짐작과는 다른 일들을 겪을 때 눈물을 흘린다. 대체적으로 삶이란 짐작과는 다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나는 삶을 추측하는 일을 그만 뒀다. 삶이란 추측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날 뿐이다. 소설은 그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이다. 짐작과 달랐던 일들의 의미를 나와 당신이 함께 납득해가는 과정이다. 삶의 어느 순간에, 당신이나 내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혹은 진심으로 기뻐하게 만들었던 그 일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당신과 내게 납득시키는 일이다. 당신이나 나나 이제 다른 존재가 돼 살아가겠지만, 그 일들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100~101 -


나 또한 젊은 시절, 세상이 나만 미워한다고 생각했더랬다.

난 이렇게 간절하건만....

난 이렇게 혼신을 다하고 있건만...

난 이렇게 온몸으로 아파하고 있건만...

세상의 빛은 늘 다른 사람들 차지였지.... 그런 널, 난 참 많이도 원망하며 미워했더랬지... 


그런데 지나고 보니 세상이 나에게도 너그러움 한움큼은 베풀어주었구나...싶다.

일단, 세상은 나에게 좋은 문장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난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았더랬지... 나에게 책읽기는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혜로워지다가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런 게 사람이라면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하겠는데요,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사람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좋아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빠지지도 않은 것 같아요. 뛰어난 사람들만이 시간이 갈수록 좋아질 수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빠질 가능성이 더 많아요. 조금만 방심하면 나빠지게 돼 있는 게 인간이거든요.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35 -


인류가 계속되는한, 청춘의 무지는 반복될 뿐이에요. 그러니까 <청춘의 문장들>을 읽는다고 해서 젊은 독자들이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야겠다, 뭐,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란다는 건 무리겠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았으니까 대충 살아도 됩니다. 이것저것 다 해보기도 하고, 그냥 시간만 보내기도 하고요. 청춘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너무 잘 살아보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거잖아요. 젊었을 때는 천 년을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았으며 해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보고 싶은 거 다 보고요.


하지만 그런 낮을 보낸 날에도 밤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고, 그 밤에 대개 우리는 혼자겠죠. 그런 밤이면 아마 시간이 너무 많아서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거예요. 맞아요 .그래서 청춘은 무거워요. 빨리 늙었으면 싶기도 하고요. 그럴 때 저는 저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가 마음이 동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문장들에 줄을 그었죠. 그렇게 책에다 몇 번 밑줄을 긋다가 잠들고 나면, 또 새로운 날이 시작됐죠. 역시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은 나날 중의 첫번째 날, 누군가에게 <청춘의 문장들>은 그 새로운 날에 돌이켜보는, 지난 밤의 밑줄 그은 문장 같은 것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197 -


지난 주말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청춘의 문장들>과 <청춘의 문장들 +> 두권의 책을 내리 읽었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그저 참 좋다... 라는 말밖에는...


이 책에 대해서 김애란 작가는 발문에 이렇게 적어 놓았더라.

<청춘의 문장들>은 누군가 오래 본 문장, 앞으로 누군가 오래 볼 문장, 바로 청춘의 문장들이다. 라고...

한권의 책에 바쳐지는 발문으론, 최고 중에 최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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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 집을 나가다 - 가족 밖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스물여덟 가지
언니네트워크 엮음 / 에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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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여성주의 책들을 읽었다.

모두 세 권이지만 어떻게 보면 한 권 같은 책이다.

 

이들 책들을 알게 된 건, 우주처럼 넓고 넓은 인터넷 세상에서 솔직하게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찾아들어간 사이트에서였다. 그 사이트 안의 여러 카테고리 중, '자기만의 방'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블로그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위험성을 차단하면서도 비공개 글쓰기가 아니라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 조만간 그곳에 입주(?)하려고 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을 무렵, 2000년 문을 연 이래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공간과 소통을 추구해왔던 그 사이트가 경제적인 이유등으로 올 11월 폐쇄된다는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아, 이런...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난, 참 운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여성이면서도 이쪽 방면으로는 자의반 타의반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 사이트의 '자기만의 방'에 쓰여졌던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 2007년도에 출판된 적이 있음을 알아냈고, 마침내 이용하는 공공도서관에서 절판된 <언니네 방> 1권과 2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니네 방> 후속작을 표방하고 2009년도에 출간된 <언니들, 집을 나가다>라는 책도 더불어 찾아내 읽는 기쁨을 맛봤다.  특히, <언니들, 집을 나가다>는 미혼도 기혼도 아닌 비혼을 선택한 사람(남자도 포함되어 있다.)들의 목소리가 충실하게 담겨 있다. 그러므로 미혼이나 기혼뿐만 아니라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과 앞으로 선택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여성이기에 받아야만 했던 차별과 고통과 학대와 폭력의 경험들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 한켠이 아려오면서 동시에 분노가 치민다. 남성의 이중성과 이 사회의 집단기만뿐만 아니라 여성의 체념과 저항까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너무 가감없이 다가와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면서도 평소 사회 제도에 냉소적이던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사회 발전을 위해 도대체 넌 무슨 일을 했니?' 하고 자문하고 부끄러워하는 고질병을 또 다시 앓아야만 했다. 이 책들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잠잠한 곳에 싸움을 붙이는 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스스로 잘살고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페미니스트들은 같은 여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 책들은, 그동안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잡고 있었던 반(反)여성주의를 확인하는 기회 또한 제공해주었다. 

고백하자면 대학 재학 시절부터 나름 총명함(?)을 자랑하던 나는 여성주의에 대해 알게 모르게 반감을 갖고 있었더랬다. 각종 집회와 시위에서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동성인 내가 보기에도 왠지 불편하고 거북했다. 나조차도 충분히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던 불편하고 거북한 '느낌'들....

인간은 낯선 것에 대해선 본능적으로 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처럼 나에게 여성주의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낯설고 어색한 그 무엇, 그래서 피하기만 했던 그 어떤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지도 잘못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느낌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가면서 세월과 함께 익숙해져 내 안에서 더욱 돈독해져만 갔다.  

 

이 책들을 읽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조차도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그 '느낌들'은 바로 수천년 간 인류가 주장하고 공고히 해온 전통이자 문화이며 규범이요 제도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걸...


여자는 순종적이고, 양보해야 하며, 참고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뭔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건 전통문화와 사회제도를 전복시키려는 되먹지 못한 행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가 남자처럼 큰소리로 뭔가를 말하고, 뜻대로 행동하는 건 전통을 해치고 국가와 사회를 망치는 길이다... 등등...

.

.

.

바로 이와 같은 사회 규범들로 인해서 여성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반여성주의자로 길러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한 후 명절에 일만 하던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며느리에게만 일을 시키고...

차별과 학대 받으며 성장한 여자 아이는 엄마가 되어 또 다시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ㅡ쫄병은 원래 몰매를 맞는 거야!

ㅡ나도 쫄병일 땐 조리돌림 당했어.

ㅡ억울하면 너도 선임되서 그대로 하면 되잖아.


그래, 바로 이런 거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치'(혹은 '원리'?)로 인해 '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말이 무슨 과학적 근거라도 있는 양, 공공연하게 확산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여성(쫄병)으로서 차별 받으면서 느낀 분노를 엉뚱하게도 며느리(후임자)에게 전가하는 이와 같은 고질적인 악순환은 어째서 일어나는 걸까? 

그 이유는 남성우월(위계질서)과 여성비하(집단주의)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기만만하던 젊은 여성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혹은 직장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희생한 다음, 여성이라는 지위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고 거부하게 만든다. 그래서 차별받은 딸이 엄마가 되어 다시 딸을 차별하고, 학대받은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 다시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전가시키는 것이다.  뭔가 잘못됐지만 큰소리로 '잘못됐다!'고 주장하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도 어서 빨리 피해자 신분에서 가해자 신분으로 전환되기만을 학수고대한다.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아는데, 모두가 그렇게 하니 나도 어쩔 수 없다....?!'


남들이 모두 걸어가는 길이 반드시 옳은 길도 유일한 길도 아니다.

오히려 모두 잘못된 길임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혹은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게 억울해서 다른 사람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 전통과 규범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잘못된 길로 먼저 걸어들어선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외쳐야 한다.

여긴 잘못된 길이라고... 그러니 이쪽이 아닌 다른 길로 가라고...

   

이땅의 많은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에게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길을 잃지 말라고 조언하며 타이른다.

 

내가 걸어온 길 그대로 밟아서 따라오면 된다고... 그럼, 힘도 덜 들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엇보다도 혹시나 길 위에서 뭔가 잘못되더라도 길 탓을 하면 된다고...  그렇지만 만약 되바라지게 어른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걸어갔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스스로 책임질거냐고....

 

그런데 여기에 대해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있다.

원래 길이란 없는 거라고.... 그러니 잃을 길 따위도 없으니 걱정 마시라고... 내 두발로 걸어가는 길, 내가 알아서 갈 터이고 책임도 내가 질 거라고... 그러니 어르신이나 가시던 그 길 계속 쭉 가시라고... 

 


 

어느 학자가 ' 한강의 기적을 라인강의 기적과 비교하는 건 한국에게 모욕이다''라고 한 말이 불연듯 떠오른다.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최강대국에게 도전장을 내밀만큼 강대국이었던 독일의 경제성장과 식민지 약소국에 내전까지 치러야했던 한국의 경제성장은 그 난이도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

나도 한국인이지만 우리 한국인 정말 대단하다.

특히 20세기 중후반 현대사는 '기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난 한국인인게 정말 자랑스럽다.


그러나,

내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울수록 한국이 선진국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창피함도 동시에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남다름'이란 칭찬이 결코 아니다.

남과 다름은 곧 '죽음'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를 배려하지 않는다. 한국과 비슷한 경제 수준을 갖고 있는 나라와 비교하면 이런 면에서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언급해야 할 경우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넘어서 분노를 느낄 정도다.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이웃나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가 여전히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는 중국과 비교해봐도 남여 성차별은 여전히 심각한 편이다. 


OECD 국가 중,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하위권에 머물러 있으며, 남여 임금격차도 40%씩이나 차이나고, 비정규직의 2/3는 여성들이라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이 정도가 언론에서 언급되는 수준이다. 즉, 이는 남자든 여자든 전국민이 체감하는 성차별 지수란 의미다. 만약,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 사회의 성차별은 생각보다 뿌리 깊고 광범위하다.

.

.

.

새로운 계절과 함께 나를 찾아온 이 책들은 좋은 책이기에 앞서 훌륭한 책들이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집단주의에 무릎 꿇지 않고 잘못된 역사에 편승하지 않기 위해서 개인적 위험과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혹은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한 사람들의 고백이고 다짐이기 때문이다. 

난, 이런 사람들을 인생의 진정한 승자라고 생각하며 진짜 용기있는 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책들, 꼭 읽어야할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안 읽어도 되는 사람들만 죽어라 읽어댄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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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의 종말 - 특별한 자와 아무것도 아닌 자의 경계를 넘어서
로버트 풀러 지음, 안종설 옮김 / 열대림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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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학력차별, 외모차별, 경력차별 등등...

 

우린 모두 다양한 차별을 겪고 있으며 다들 '차별'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리고 자신은 절대 '~~차별 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신분주의는 민족이나 종교, 피부색, 성별 등과 같은 표면적인 차이와는 무관하게, 신분에 근거한 힘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권력의 차이, 그 자체가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신분의 차이는 단순히 권력의 차이를 반영할 뿐이기 때문에 신분의 차이 역시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낳지는 않는다. 피부색이나 성별의 차이가 생래적인 문제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학대와 조롱, 수탈과 정복의 구실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예는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부하 직원을 못살게 구는 직장 상사, 웨이터를 괴롭히는 주방장이나 손님, 선수를 들들 볶는 코치, 교사를 모욕하는 교장, 조교를 착취하는 교수, 학생을 조롱하는 선생, 급우를 따돌리는 학생, 자녀를 얕잡아보는 부모, 용의자를 학대하는 형사, 병자를 아무렇게나 다루는 간호사... 신분주의는 아랫사람을 마치 투명인간처럼, 노바디로 대함으로써 그들의 존엄성에 상처를 준다.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p28~30 中 선별 발췌-

 

 

2004년 출판되었다가 2009년도에 재출간된 로버트  풀러의 <신분의 종말>을 읽는 과정은 뜻밖의 깨달음과 함께 통렬한 고통을 동반한다. 

 

인류는 여전히 '신분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나 역시 이와 같은 '신분주의' 사회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살아왔다는 깨달음은 생각보다 뼈아픈 고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태어나면서 곧 '신분'이 결정되었다. 귀족신분으로 태어나면 귀족이고, 노예로 태어나면 노예인 것이다.

인류는 이와 같은 불평등에 맞서왔고, 보기좋게 신분 차별의 철폐를 가져왔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터는 '신분차별'이란 말을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타고난 신분제 사회는 종말을 고했다. 그 뒤에 펼쳐진 세계는 능력에 따른 사회로, 소위 능력껏 신분(지위)를 쟁취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모순이 숨겨 있다. 언뜻 공정하고 평등해 보이는 능력위주사회야말로 절대적으로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린 솔직히 평등하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력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된 신분 즉 지위는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신분(지위)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과 불평등은 인간 존엄성에 위배되므로 마땅히 지양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20세기 들어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던 것과는 달리 신분주의의 타파는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저자는 그 이유를 신분이 고정불변하지 않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신분주의에 따른 '희생자' 소위 '아무것도 아닌 자'인 '노바디'들이 신분주의를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서, 만약 당신이 유색인종이라면 당연히 인종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여 성차별적인 사회에 'No'라고 말하리라. 그런데, 만약 당신이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바디'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다음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노바디의 땅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대개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그곳은 인구밀도가 아주 높은 곳이다. 노바디가 스스로 노바디임을 잘 밝히지 않는 이유는 남들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치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분을 숨기고 싶은 바로 그 욕구 때문에 노바디는 더욱더 무력해진다. 좀처럼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지만, 막다른 골목에까지 몰리면 그들도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다. 노바디들은 서로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신분 때문에 학대받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 남을 학대하려 한다.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p123 中-

 

그럼, 특별한 자인'섬바디'와 아무것도 아닌 자인 '노바디' 사이의 차별은 당연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둘 사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신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건 마치 남여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남성과 여성에 따른 차이 자체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저자는 인류 사회 발전을 위해서 신분은 당연히 존재해야 하며 신분에 따른 차이 역시 당연히 받아들이되, 신분의 차이가 신분적 차별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선 먼저 '섬바디'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누구나 섬바디에서 노바디가 될 수 있으며, 노바디에서 섬바디도 될 수 있다.  즉, 섬바디에 대한 노바디의 과도한 환상과 숭배를 떨쳐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곧 우상의 신화화를 극복하라는 주문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어째서 신을 숭배하는 것도 모자라 같은 인간마저 숭배하려 하는걸까?

어찌하여 인간 존엄성이라는 숭고한 지위를 스스로 내던지고 섬바디가 되어 노바디를 학대하려는 걸까?

 

그 이유는 바로 신분주의 그 자체에 있다. 신분적 차이가 차별이 되면, 섬바디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유동적인 신분구조를 고착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놓쳐선 안될 점은 바로 소수 섬바디들의 신분구조 고착화에 다수인 노바디들 또한 동조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노바디도 언젠가는 섬바디가 되어 그런 지위를 누리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옛속담에 '시집살이 혹독하게 당한 며느리일수록 혹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란 말인가?

 

고맙게도 저자는 이와 같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해주고 있다.

 

모든 사람은 섬바디들이 명예를 얻는 대가로 자율권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바디가 되지 않기 위한 보험에 가입하고 싶어한다. 명예에 대한 갈망은 실제로는 아주 방어적인 속성을 가진다. 그 대가는 자기 자신의 개성을 희생하고 하나의 역할 모델로, 혹은 본보기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봉사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바디는 그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들은 무대 바깥에서, 화려한 조명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어떤 실험이나 실패, 변화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자유를 누린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노바디는 섬바디를 꿈꾸고 섬바디는 노바디를 꿈꾼다.  창의력을 발휘하고,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노바디로서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신분주의가 설 땅을 잃은 세상에서도 취향과 기술, 재능의 차이가 다양한 개인적 편차를 보여주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바디와 섬바디가 다같이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또한 섬바디와 노바디는 정기적으로 서로 자리를 맞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특정한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른 사람을 섬바디라 부르고, 밑바닥을 차지한 사람을 노바디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에게는 이미 섬바디가 자신의 성공을 영구적인 권력의 장악으로 확장시킬 것이라는 낡은 생각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섬바디'와 '노바디'라는 개념이 지금과 같은 의미를 상실하고 각각 '공적인 사람'과 '사적인 사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p289~291 中 선별 발췌-

 

 

요즘 우리 사회에 '인정투쟁'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인정투쟁이란 헤겔의 철학 이론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점잖게 행동하려는 이유는 한결같이 인정받기 위해서다. 

 

가족으로부터의 인정...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인정...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인정...

 

인정이라함은 남과는 다른 특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의 특별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남을 이기고 좌절시킴으로써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정은 곧 존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설령 우리가 신분차별에 익숙한 섬바디를 두려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존경하진 않는다. 그런데 차별을 일삼는 섬바디들도 사실은 인정받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들 역시 그저 존경받고 싶을 따름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 또한 명확해 보인다.

.

.

.

사실, 신분주의 타파는 다양한 표현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일찍부터 주장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간과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함으로써 신분주의의 철폐야말로 존중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최대치로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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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의 소시오패스 -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이름
마사 스타우트 지음, 김윤창 옮김 / 산눈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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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전, 소시오패스의 자전적 책인 M.E 토마스 <나, 소시오패스>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은 게 계기가 되었을 게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결론적으로 전문가가 진단하고 기술한 소시오패스는 훨씬 더 객관적으로 다가왔다. 객관적이라는 건 감정에 호소하는 정도가  덜 하다는 뜻이고, 이는 그만큼 덜 재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사 스타우트는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무죄의식'으로 봤다.

4%인 그들을 제외한 96%에 해당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죄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 죄의식은 바로 '양심'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양심이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는 하나의 뿌리 깊은 인간구분, 어쩌면 지능이나 인종, 심지어 성별보다도 더욱 중요한 구분이다. (...)

우리들 가운데 96%에게, 양심이란 따로 생각을 기울이지도 않을 만큼 근본적인 어떤 것이다. 양심은 대부분 반사적으로 작동한다. 유혹이 극도로 크지 않은 한(고맙게도 평범한 일상에서 심사숙고할 만큼 커다란 유혹을 느끼는 경우는 흔치 않다.)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도덕적 질문들을 결코 일일이 숙고하지 않는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진지하게 자문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급식비를 줄까 말까? 오늘 동료의 서류 가방을 훔칠까 말까? 오늘 배우자를 버릴까 말까? 양심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 모든 결정들을 그토록 조용하게, 자동적으로, 끊임없이 내리기 때문에, 제아무리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치더라도 우리는 결코 양심 없는 존재의 심상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정말로 양심 없는 선택을 할 경우, 우리는 진실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설명만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급식비 주는 것을 깜빡 잊었을 거야. 그 사람의 동료가 서류가방을 잘못 놓아두었겠지. 그 배우자는 분명 함께 살기 불가능할 정도로 문제가 있을 거야. 아니면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는 전혀 알수 없는 그의 반사회적인 행동을 거의 설명해주는 꼬리표들을 가져다 붙인다. 그는 별나거나, 예술적이거나, 너무 승부욕이 강하거나, 게으르거나, 멍청하거나, 늘 악동 같다.

우리가 이따금 텔레비전에서 보는, 살인마 같은 무시무시한 사이코패스 괴물들을 제외하면, 양심 없는 사람들은 보통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마사 스타우트, <당신옆의 소시오패스> p27~28-

 

'그래, 맞다!'

생각해보면,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한두명쯤은 언제나 있었던 것 같다.

다소 무례하고 뻔뻔하고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이 들통나거나 타인의 질책 앞에선 눈물을 흘리며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말이다.

천만다행스럽게도 난 이런 사람들을 천성적으로 끔찍하게 싫어하는 편이었다.

어렸을때부터 '넌, 왜 그렇게 냉정하고 차갑기만 하냐?' 등의 말들을 집안 어른들로부터 곧잘 듣는 편이었고, 지금도 가족간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감정이나 친분'보다는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쪽이다. 아주 가까운 사이에도 'Give & Take'가 좋고, 필요이상의 관심이나 친절을 타인에게 베푸는 법도 없으며 타인으로부터 받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순간 나에게 뻗쳐왔던 소시오패스의 작업(?)들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는 소시오패스가 그만큼 많다기보다는 우리가 지나치게 소시오패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고, 이와 같은 무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과 입장에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 있는 사람들은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20여년 넘게 임상심리상담을 해온 글쓴이가 주로 만나는 대상은 이처럼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았다가 인생이 제대로 꼬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심리적 회복을 도우면서 동시에 양심적인 96%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비양심적인 4%의 사람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를 고민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 한권의 책이라고 하겠다.

 

꼭 읽었으면 좋겠다.

만약, 당신이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사랑의 다이얼'을 자주 누르는 사람이거나, 지하철의 구걸인들에게 빈번히 연민을 보이는 유형이라면 말이다.

 

 

소시오패스는 치료될 수 있을까?

치료란, 특히 심리적 차원의 문제일 경우엔 더더욱 당사자의 치료 희망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소시오패스가 치료 받기를 원한다면, 이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시오패스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과 그 삶에 아주 만족하며, 법정에 회부되었거나 또는 환자라는 점으로부터 얻어질 어떤 부차적 이득이 있을 때만 치료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소시오패스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인식하고 있느냐? 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역시 안타깝게도 '그렇다!'이다. 소시오패스는 '자기통찰' 능력이 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판단으로 분명 사악한 어떤 사람이 스스로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경우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곧 현실인 듯하다.'

 

그러므로 우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 중에는 진짜 '구제불능'이 있다는 걸 말이다. 그 어떤 노력과 희생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구제불능의 인간이 있다는 건, 같은 인간으로서 소름 돋는 일이지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이다.

 

그렇다면, 소시오패스는 어째서 탄생하는 걸까?

이기적 유전자가 이타적 유전자보다 생존과 진화에 유리하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소시오패스는 진화의 산물이며 앞으로 더 많이 살아남아 현생인류를 대체하진 않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은 '개체'로 보면 소시오패스의 생존이 유리하지만, '집단'으로 보면 상호이타주의가 훨씬 더 생존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는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들에게 훨씬 더 이타적인데, 그 이유는 나와 1/2 혹은 1/4 심지어 1/16의 유전자를 나누어 갖고 있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족이나 집단을 위한 개체의 희생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유리한 행동이라 하겠다. 이와는 반대로, 소시오패스처럼 이기적 유전자는 집단 안에서 끝없이 투쟁하기 때문에 결국 집단 전체가 멸종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양심은 때론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욕망과 욕구 만족을 강력하게 방해한다. 하여, 때론 양심을 갖고 있다는게 경쟁에서의 패배와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과 비양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당연히 양심을 선택할 것이다. 

 

양심은 우리에게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 굳건한 동지애를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랑'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이 부재한 소시오패스는 불쌍하다.

가장 숭고하고 강력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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