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굴레 - 헤이안 시대에서 아베 정권까지,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
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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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나라'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던 일본과 일본인을 가장 섬세하게 분석한 책이다. 

그동안 단순히 문화적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일본인에 대한 '언캐니함'의 근원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외부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대 일본의 수많은 모순은, 에도 시대에 존재하던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회의 간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인 동시에 꽉 막힌 이름 없는 관료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오사카 상인 집안들과 점점 경직화되던 사무라이 계급의 선례를 생각하면 그다지 혼란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충성과 자기 부정을 광기의 수준으로까지 가져가면서(사무라이들의 자기희생 컬트,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과로사할 때까지 일하는 현대의 샐러리맨), 또 한편으로는 기괴한 비디오 게임이나 헨타이(변태적 성욕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망가, 괴상한 패션으로 대변되는 엉뚱하고 전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뿌리도 에도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모순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모두가 겉으로만 중시하는 척하는 사회적 평화를 위해 유지하는 가면(다테마에)과, 믿을 만한 사람과 술 한 잔 나눌 때가 아니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그 밑의 현실세계(혼네) 사이의 충돌을 묘사하기 위한 단어들도 생겨났다. -102쪽



일본의 근대는 1868년 메이지유신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근데 이상하지 않은가?

메이지 유신이란 다름아닌 왕정 복고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천황에게 권력을 되돌려 주는 게 근대를 여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일반적인 역사의 흐름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시민혁명에 의해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일본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200년 넘게 이어져 온 긴 평화 속에서 지배층은 매너리즘에 빠졌고 세심한 조율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쿠가와의 몰락은 보통 페리 제독이 방문했던 1853년에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1838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해, 오시오 헤이하치로라는 이름의 오사카 사무라이가 다양한 계층의 군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오사카의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
오이시는 "알고서 행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知而不行只是未知)"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명나라 유학자 왕양명(1472~1529년)의 추종자였다. 언행일치를 강조하는 왕양명의 사상(양명학)은 청나라와 도쿠가와 일본의 주류 사상이던 신유학, 즉 주자학과 충돌했다. 왕양명의 저술에 깔린 급진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수많은 개혁사상가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 -113쪽



조선 역시 영정조 시대가 끝난 직후인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몰락한 양반출신이었던 홍경래는 10여 년 동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몽 개혁 사상을 전파하면서 반란을 준비했다. 비록 두 사람이 일으킨 반란은 실패했지만 두 나라가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오시오의 난으로 일본은 사무라이가 지배하던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력이 복구불능 상태로 빠졌고, 조선 역시 홍경래의 난으로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신분질서에 구멍이 뚫린다. 


오시오의 난 이후 일본은 사쓰마와 죠슈번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혁명이 배양되기 시작한 반면, 조선에선 서학을 배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이 잉태된다. 한쪽은 칼(武)을 다른 한쪽은 책(文)을 들면서 두 나라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갈리게 된다. 물론, 한국과 일본 사이에 피상적 접촉이나 일시적 충돌은 있었지만 겹치고 포개진 채 뒤섞인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두 물결이 합쳐져 흐르다가 다시 갈라지면서 나타나는 문화적 혼합과 문명의 융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웃한 단일 민족이 기나긴 세월 동안 공존하면서 한국와 일본처럼 이질적인 경우도 드물다.

 

두 나라는 일찌감치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섰다.     

헤엄쳐 건널 수 있는 그 짧은 바닷길이 참으로 넓어 보인다. 

넓지 않은 그 바다 덕분에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었고 서로가 의도치 않은 접촉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구의 물결은 두 나라 모두에게 엇비슷하게 몰려왔다. 

역사의 무대 위에선 때론 능력이나 기회보다는 의도와 의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서로를 이해할 의지와 기회가 없었던 한국과 일본은 두 나라를 개국(또는 정벌)시키려는 확고한 의지와 의도를 가진 서양 세력 앞에서 각자 필살기(?) 무기로 대응했다. 

조선은 대륙에 조공을 바치던 선비의 나라답게 외세 의존으로 기운 반면, 명목상일지언정 사무라이 사회였던 일본은 스스로 자력갱생의 길로 나아간다. 

조선의 지배층은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신의 목숨과 기득권이 우선이었다. 여차하면 대륙으로 도망갈 수 있었던 그들에 비해 일본의 지배층에겐 깊은 바다 뿐이었다. 위기의 순간엔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다가 옥쇄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걸어온 길은 언제나 '모 아니면 도'식의 타협할 줄 모르는 막다른 길이었다. 저자는 메이지 유신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정치 체제는 주권재민이 아닌 천황을 겉으로 내세운 집단지도체제였고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나미가 밀어닥친 일본을 보면서 전세계는 질서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줬던 숭고한 일본인에 감탄함과 동시에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모습에 경악했던 근본적인 이유와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지도자들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로, 일본 정치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명확한 통치권을 갖는 권력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경쟁관계에 있는 권력 집단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온전히 합법적인 판단을 내려줄 제도적인 절차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이 전혀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 또한 공개적인 정치 절차가 없었던 데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정책의 대부분은 그 입안의 구심점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설사 정책을 끌고 가는 일관된 동력이 있다고 해도 이는 정부의 공식 기관이 주도해가는 것이 아니다. 해외로부터의 압력과,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한 국내 각종 이익집단의 요구에 좌우된다. 4장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이런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브레이크도 나침반도 없는 나라가 힘을 갖게 되면 자국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들에도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사실이 1930년대에 일어난 사건들로 증명되었음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424쪽



사실, 태평양 전쟁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일전쟁의 발발은 어처구니 없는 사소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는가. 일본은 계획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고 수행한 게 아니었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전쟁을 결정한 사람이 없었기에 끝내야 할 사람도 없었다.  패전이 짙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당시 일본인들의 고려 사항 속엔 항복은 없었다. 그들에겐 오직 끝까지 싸우다가 다같이 죽는다는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  

일본인은 어째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진다는 근대인의 특성을 거세당한 채, 석기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적일 수가 있을까. 

그 해답 역시 태가트 머피가 들려준다.



왜 일본이 자생적 부르주아 혁명에 실패했는가에 대한 대답의 일부는 도쿠가와 막부가 잠재적인 반대 세력들을 회유했던 천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회유의 정치 문화는 막부 멸망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일본 정치의 중요한 특징으로 이어지고 있다. 집권층은 상인 계급이 부의 축적을 통해 사무라이와 다이묘들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는 만사의 위계를 중시하는 그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부가 상인들의 일에 직접 관여하고 나섰다면 절대 권력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일깨워 유럽에서처럼 부르주아 단결의 도화선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대신 막부는 이 부분이 중요한 포인트인데, 상인 조합과 관련 단체들이 스스로를 자율감독하는 것을 전제로 그들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이러한 자율 감독은 상업활동을 기존 권력 구조에 노골적인 도전이 되지 않는 암묵적인 테두리 안에 묶어두는 역할을 했다. 재산권은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는 근대적 개념을 몰랐던 일본의 상인들은 권력에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스스로 해낼 만한 이론적 틀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도쿠가와 통치를 관통하는 신유학(주자학) 정치 이론은 현존하는 위계질서를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다. 달리 말하자면, 현존하는 정치적 관계를 초월하는 어떤 질서가 존재해서 그 정치적 관계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신성한 왕권'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절대 왕정 제도는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군주의 권리가 더 높은 존재인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개념(왕권신수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군주 자체는 신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사상에서는 정당하게 설립된 정치 권력 자체가 신성을 지닌다. 도쿠가와 막부는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오래된 개념을 적극 장려해서 어느 누구도 막부의 통치에 도전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했다.  -117쪽 



'천황=신'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신(神)인 파라오 앞에 엎드려 있는 고대 이집트인들을 보는 것만 같다.  

저자는 일본의 굴레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의 탁월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는데 이를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첫 단추에 지고지순한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한다는 건 일본과 일본인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체와 근원이 없는 일본적이고 일본다움에 집착하게 되면서 일본 문화는 그 세밀함과 정교함이 나날이 더해만 갔다. 별것 아닌 시시한 것에 대해서도 아니 어쩌면 별것 아닌 것이기 때문에 더한층 가꾸어 꾸미고 더 잘하려고 애쓴다. 가끔씩 우리가 일본에 대해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하고 느끼는 근원 또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든다던지...

혼을 바쳐 일하는 장인 정신이라던지...

소름 돋을 만큼 아름다운 문방구들과 악섹세리라든지...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자세와 서비스라든지...


일본인은 끝까지 계속해서 '~척'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가짜일수록 진짜에 집착하는 것일까?



메이지 시절 종교가 겪었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걸었던 길을 여러 면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적이지 않다'고 낙인찍어 기존 질서를 파괴하며, 사실상의 신흥 종교를 '순수하고' 자생적인 전통으로 포장하여 만들어내고,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에 열광한 소수의 엘리트들이 그 제도적 유산을 오래도록 일본에 남기게 된다. 또 '일본적인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데 집착했던 메이지 일본은, 일본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대륙의 영향을 애써 지우고자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많은 서양 문화를 허겁지겁 받아들여 미숙하게 소화시켰다. 그 결과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서양에 대한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에 빠졌고, 이러한 모순은 이후 비참한 정치적 결말을 가져온다. -143쪽



우리나라도 정치가 늘 말썽이고 여당과 야당 모두 주장하는 바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굳이 해석이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심한 관찰자라면 그 속을 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는 가끔씩 앞뒤가 맞지 않는 직소퍼즐을 보는 것 처럼 순간 '멍'해진다. 도무지 해석은 커녕 해독이 필요한 암호같다.  



지역구를 자손들에게 물려 주는 것도 그렇고...

테러와 확성기가 등장하는 각종 혐오 시위들도 그렇고...

너무나 자주 바뀌는 총리들인데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일본 정치의 비정상(?) 역시 근원은 메이지 유신에서 비롯되었지만 미군정에 의해 틀이 짜여진 후 미국에 의해 공고해지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일본 정치사를 논하는 부분은 다소 지겹고 따분하다.

고이즈미와 아베가 나오자 반갑기까지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정치인들의 이름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사회당, 공명당 및 민주당 등이 있지만 일본엔 자민당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그 이상함이 당연함으로 귀결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실패를 인정하고, 책임지고, 청산하는 데 특히 어려움을 겪어왔다. 왜냐하면 충성의 행동 규범은 상사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면 당신이 자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규범은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CEO가 회사 문제에 대해 '책임지고' 사임한다든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납품 업체가 있는데도 회사가 기존 업체로부터 계속 납품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이 그 사례들이다. (...) 좋은 일본인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상호, 의존관계나 의무 또는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또는 조직)을 배신하기보다는 '주주 가치'나 '공공의 선' 같은 추상적인 원칙을 위반하는 쪽을 택한다. (...)
물론 이런 신자유주의적 관행들은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공익 전반을 약탈하는 행위를 용이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미국이나 영국에서 드러나듯 사회적 위험 요소로서 점점 심각해지는 소득 격차 문제와 불가분하게 엮여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에서 기업 인수합병 시장이나 주주 가치를 통해 경제적 정치적 결과가 좌우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혁명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이다. 일본 비즈니스 세게의 근본적인 개혁을 옹호하는 사람은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혁명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는 것과 같다. -355~357쪽 중




일본은 정치인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관료들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정치인의 진짜 본업은 유권자로부터 표를 적당히 얻어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이고 그 다음엔 직업정신과 투철한 소명감으로 똘똘 뭉친 엘리트들로 이뤄진관료집단에게 권한을 주고 행정을 일임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일이 발생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게 된다. 공무원이 공무를 집행했다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선출직 정치인 역시 투표에 의해 뽑히긴 하지만 천황의 이름으로 임명되기 때문에 업무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건 결국 임명권자인 천황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인데 살아있는 신(神)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은 철저한 관료사회라 할 수 있고 전 후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이런 관료들과 일란성 쌍생아라 할 수 있는 샐러리맨들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희생을 해야 하는 농촌 지역엔 '하얀 코끼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선심성 지역 공공 사업을 몰아주고, 격무와 저인금에 시달리던 도시 직장인들에게는 종신고용이라는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저항 세력은 원천봉쇄 당하고 만다. 그 결과 잘못 끼워진 단추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의존과 종속 관계 또한 공고해졌다. 



미국의 외교 정책과 노선을 함께하고 일본 내 미군기지 비용을 부담하는 한, 일본의 엘리트 지도층은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 보안 당국의 은밀한 협조를 얻어가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려왔다. 아베 입장에서는 미국이 그토록 요구하던 것들을 다 들어주었으니, 이제는 세계 최강인 미군의 무조건적인 후원을 믿고 중국을 향해 내키는 대로 대응해도 된다는 생각했던 듯싶다. (...) 미국은 물론 일본이 중국과 독자적인 친분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오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중국과 정면 대치의 갈등 상황으로 치닫는 시기와 조건 또한 일본의 뜻대로 선택하도록 놔두지 않으려 했다. -574쪽 

 


결론부터 말해 보겠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든 동해 표기 문제든 위안부 문제든 역사왜곡 문제든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분쟁에 있어서 미국은 언제나 일본 편에 섰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이 확실하다. 

누가 더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국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이 언제까지나 외교와 국방을 미국에 맡겨놓을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전통적인 강대국이 건재하며 이 둘 사이엔 남한과 북한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역학 관계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고, 미국은 현재 일본(가끔씩 한국)을 지렛대 삼아 동북아시아 역내 문제에 개입하고 있지만 결국엔 역외 국가일 뿐이다. 

일본이 열도를 움직여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가 아시아를 탈출할 수 없는 한, 일본은 언제까지나 동북아시아에 남아 있어야 하고 미국은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다.  


당장 미국과 손절하라는 뜻이 아니다. 일단, 미국과의 관계에 특별한 영향을 주지 않는 분야 특히 역사와 영유권 분쟁 등에서 일본이 미래지향적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인정함으로써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야말로 일본으로선 가장 효과적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십대 때 처음 일본 땅을 밟은 후 40여 년 동안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인 저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일본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단순히 상대의 좋은 것만 좋아하는 제한적 사랑이 아니라 단점과 트라우마까지도 이해하고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행간마다 느낄 수 있었다. 부러웠다. 한국에 대해 이 정도의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외국인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K-pop을 즐기고 BTS에 열광하며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것 말고 한국인의 내면에 새겨진 결과 무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외국인 말이다. 앞으로 십 수 년이 흐른 뒤라면 모를까 지금까지는 없는 것 같다.


'일본의 굴레'를 보면서 '한국의 굴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본이 짊어진 그 굴레는 한국의 어깨 위에도 얹혀 있었다. 




참고로, 나는 마리우스 잰슨의 <현대일본을 찾아서>를 읽은 직후 바로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두 책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었다.

<현대일본을 찾아서>는 일본에 관한 저술로는 명저 중의 명저로 손꼽히기에 손색이 없었다. 역사 서술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다소 학문적이고 후자보다는 조금 더 클래식하다면,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는 역사보다는 전쟁 이후의 현대 일본 사회와 정치를 기술하는데 더 많이 치중했다. 전자보다는 훨씬 더 읽기 쉽고 조금 더 캐주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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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이타주의자 - 세상을 바꾸는 건 열정이 아닌 냉정이다
윌리엄 맥어스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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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맥어스킬은 옥스퍼드대 철학과 부교수이자 비영리 단체 '기빙왓위캔(Giving What We Can)', '8만시간'의 공동 설립자다. 먼저 이렇게 저자의 이력부터 살펴보는 건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을 땐 자칫 분별력을 잃고 저자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좀비' 독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딱히 성공 확률이 높은 것 같지도 않지만...  

 

윌리엄 맥어스킬은 철학과 교수답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기부 단체들을 소개 평가할 뿐만 아니라 기부자들의 심리까지 파헤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재해구호에 기부금이 몰리는 쏠림현상의 폐해와 공정무역상품 구매가 오히려 득(得)보다는 실(失)이 더 많다는 점이었다.

 

특히, 윤리적 소비를 한 경우 선행을 덜 실천하는 방식으로 '도덕적 허가' 효과가 발생한다는 지적은 날카로웠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져서 무례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기부라는 것 자체가 가장 저렴하게(?) '심리적 면죄부'를 구매하는 방식이라고 여겨왔던 평소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직업적으로, 그 만큼은 열정이 이끄는 삶을 살다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잡스의 배신(?) 또한 충격적이었다.

 

 

이상의 객관적 증거들로 볼 때 열정에 맞는 직업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거라 넘겨짚고 진로를 선택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일 자체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면 열정은 자연히 뒤따라온다.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였다. 잡스는 젊었을 때 선불교에 열성적이었다. 인도를 여행했고 LSD(마약성 환각제)를 자주 복용했으며 삭발을 한 채 법복을 입고 다니는가 하면 승려가 되려고 일본행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잡스가 기술 분야에 발을 들인 건 열정 때문이 아니었다.

올원팜 All-One Farm이라는 공동체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기술에 밝은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의 사업을 부업으로 도운 게 계기가 됐다. 애플컴퓨터조차 우연의 산물이었다. 잡스와 워즈니악은 도락가들에게 서킷 보드를 판매하다 어느 컴퓨터 상점 주인이 완전 조립된 컴퓨터를 사겠다고 하자 돈을 벌려고 그 일에 뛰어들었다. 애플사와 컴퓨터 기술에 대한 잡스의 열정이 불타오른 것도 사업이 관심을 끌고 성공을 거둔 뒤부터다. - 211쪽

 

 

 

스탠포드대 졸업식장에서 열정이 이끄는 삶을 살라! 고 역설했던 스티브 잡스...

하긴, 어디 스티브 잡스뿐이랴.

수많은 정치인들, 성공한 CEO들과 종교 지도자들 역시 하나같이 열정을 강조하고 열정에 호소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은 열정이 아닌, 냉정과 이성에 따라 살면서 말이다.

 

 

 

자, 이제 본론이자 결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여러 사업에 관여하는 대형화된 비영리단체들(예: 월드비전, 유니세프 등등) 보다는 비용효율성과 투명성이 높은 사업에 집중하는 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낫고, 재해구호보다는 개발도상국의 보건위생 향상에 애쓰는 단체를 선택해서 지속적으로 기부하는 편이 세상을 좀더 이롭게 바꾸는데 기여하는 최선의 방법을 제시해준다.  

 

 

따라서 자원봉사에 지원하거나 직업을 선택하거나 윤리적인 소비를 실천할 때는 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들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을 얼마나 개선시킬 수 있을까?

이는 남을 돕는 일에 한정된 시간과 돈을 분배해야 할 때 고려해야 할 최우선 사항들이다. 이를 염두에 두었다면 이제는 가장 효율적인 선행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65쪽

 

 

 

만약 당신이 굶주린 아프리카 어린이가 나오는 광고만 보면 지체없이  ARS 번호를 누르는 유형이거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기부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는 편이라면 혹은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특히, 열정이 이끄는 삶이 전부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는 유형이라면 더더욱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삶을 이루는 건 폭죽과 같은 한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파도처럼 쉼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일상(습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더이상 열정에 휘둘릴만큼 젊지도 어리석지도 않지만 내가 하는 작은 선행들이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가 되는 건 아닌지 늘 궁금했고 불안했는데 이 한 권의 책이 소중한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물론, 저자가 제시해준 방법들이 정말 최선의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 by Bertrand Russ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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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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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부터 쿡방 먹방 들이 이렇게 많아진 거지?'

어쩌다 TV 앞에 앉으면 뉴스를 제외하고는 음식과 연관이 없는 프로그램은 손에 꼽을 정도다. 

채널마다 음식점 소개 혹은 요리 관련 프로가 방영되고, 심지어 홈쇼핑에서도 여차하면 먹거리들을 판매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미식의 시대를 너머 탐식 심지어 폭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만 같다.  


'저 많은 프로그램들이 정말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걸까?'

'저렇게 다양하고 고급진 음식들을 직접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건강식은커녕 끼니조차 제때 챙겨먹기 어려운 게 대다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지 않을까?'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데에는 먹방만한 게 없다는 것일까?'

'음식 방송이야말로  방송국 입장에선 저비용으로 손쉽게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이란 말일까?' 

 

나도 모르게 넋놓고 TV 화면을 바라보다가 순간 수치스러워졌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고민과 질문들을 모두 뛰어너머 그저 '먹고 산다'는 것, 생명체라면 벗어날 수 없는 그 고된 숙명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밀려왔다.


'식(食)'과 '생(生)'

'먹고 산다'는 이 한마디만큼 단순 명료하게 인간을 정의내릴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모두 '먹는 인간'일 뿐이다.

 


 

1949년에 마닐라에서 열린 전쟁범죄 재판에 나가 증언하기도 한 농민 칼메리노 마햐야오가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았다. 1946년부터 1947년 초까지 이 마을과 주변에서만 서른여덟 명이 잔류 일본병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들 중 대부분이 먹혔다. 머리 부분 같은 잔해 혹은 먹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증언으로 사실은 명백해졌다. 하지만 일본 측은 단 한 번도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67쪽


1993년도 소말리아 부흥과 인도적 문제 해결을 위한 원조 금액이 1억 6600만 달러인데, 그에 따르는 유엔의 군사 활동에 15억 달러가 넘게 든다고 한다. 식량 1달러당 군사비가 10달러. 이상하다.  겉보기에도 그렇다. 유엔 활동단에 참가한 각 군의 장갑차나 헬리콥터의 소음이 모가디슈를 내리누르고, 주민들은 굶주린 배를 안고 웅크린 채로 있다. - 202쪽


1993년에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외국 통신사나 일본의 잡지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알았다.

함대의 훈련 기지에서 신병 수십 명이 영양실조로 입원하고 그중 네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그 원인으로 함대의 재정 악화, 식량의 부정 유출 가능성을 암시하는 보도가 있었다. -247쪽


체르노빌에서 '먹는다'는 것은 여기까지 다다른 끝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행위다. 우크라이나는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를 맞고 있고, 월간 인플레이션율은 50퍼센트를 넘었다. 먹는다는 것은 오염 여부를 따지기 전의 절박한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면 눈앞의 풍경이 애절하고도 비장하게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 길에서 살짝 측정기를 보았다. (한 시간당) 1.0마이크로시벨트가 나왔다, 도쿄의 열 배가 넘는다. -293쪽



 

『먹는 인간』은 기자인 저자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세계 각 지역의 음식 문화(?)를 취재하고 작성한 기사문들을 모은 책이다. 다만, 여타의 현지 음식 취재와는 달리 이 책의 시선은 먹는 '즐거움'이 아니라 먹는 '괴로움'에 모아져 있다.


저자의 카메라에는 사탕수수나 야생동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의 인육을 먹었던 일본 병사들과 식량원조 지원을 위해 진행된 군사 행동에 식량원조보다 열 배나 더 되는 돈을 쓰는 유엔평화유지군 및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버섯을 캐먹고 물고기를 잡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체르노빌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는 부자들이 먹고 남긴 음식들을 사먹는 빈민들이 존재하며, 러시아에서는 경제개혁 실패와 권력층의 부패로 영양실조에 걸린 병사들과 구걸하는 첼로 소녀를 만날 수 있고, 태국에서는 애완동물 사료공장에서 자신이 만든 통조림 값보다 조금 더 많은 급료를 받으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소녀도 있다.



 

이건 저자가 취재를 하던 당시의 모습일 뿐이라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 년이나 지난 일일 뿐이라고... 오늘날 세상은 훨씬 나아졌을 거라고... 항변해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해마다 30%의 음식(13억톤, 약1조달러)이 버려지고 있으며, 유엔의 <2017 세계 식량안보 및 영양 상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 기아인구는 전체인구의 약 11%인 8억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 속에 소개된  전 세계 각 지역의 에피소드들이 '빈곤과 기아'라는 단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는 건 아니지만, 인간이란 결국 먹고 사는 존재ㅡ살고 먹는 존재가 아니라ㅡ라는 부인할 수 없는 본질을 보여준다.  그래서 정확한 통계 수치나 기아 난민을 찍은 자료 화면들보다 훨씬 더 실체적으로 단 한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바로,

굶주림은 굶주리는 사람이나 배부른 사람 모두를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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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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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는 한참되었지만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죄책감까지는 아니어도 해야할 중요한 일을 하지 않은 기분이랄까.

 

일단, 저자 유시민은 내가 한때 열렬히 좋아했었고 또다른 어느 한때엔 죽도록 싫어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에 대한 미움조차 '팬심'의 일부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2011년도에 나왔고 2017년인 올해초 개정판이 나왔다. 드문 일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개정판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촛불집회'로 대변되는 정치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무관치 않으리라.


그동안 나는 유권자로서 어떤 후보를 찍어야 하고 어떤 정부가 올바른 정부일까? 에 대한 고민은 했었지만, 국가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국가란 당연히 '실재'하는 것으로, 국가가 아닌 혹은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두려움 때문에 애써 외면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두려움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인의 피 속에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으니까...


국가의 탄생은 바로 이와같은 대중의 혼란과 공포로부터 기원했다. 

 

'자연상태'란 곧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질서도 법도 선악의 판단기준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국가가 출현하기 전 인간의 삶이 실제로 그러했는지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국가 출현 이전 인간의 삶은 홉스가 묘사한 '자연상태'와 비슷했을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생활의 단위를 중심에 두고 보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진화생물학자들은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20만 년 동안 혈연으로 맺어진 작은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다른 작은 공동체와 적대적 경쟁을 벌였다고 말한다. 사자와 늑대, 하이에나, 침팬지 같은 포유동물의 일반적 생활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다른 동물과 달리 높은 인지능력과 학습능력, 소통능력을 발현함으로써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었다. 그게 바로 국가였다. 불안하고 고독하고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두가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공동의 권력을 세운 것이다. -30쪽


 

 

홉스는 국가의 탄생을 <사회 계약설>의 토대 위에서 찾았다. 물론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전제군주정의 시대에 살았던 홉스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핵심을 꿰뚫어봤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그후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 자유주의 국가론를 불러왔고, 19세기 중반엔 마르크스 유물론에 입각한 전체주의 국가론이 대두한다.

 

 

로크가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면서 국가와 국민은 천부적으로 맺어진 고정불변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면, 루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와 정부를 분리하고 정부가 계약을 위반했다면 국민은 그 정부를 무너뜨릴 권리('계약을 해지할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로크와 루소가 다진 자유주의 국가론의 토대 위에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최고의 선(善)으로 규정하고 이를 해칠 수 있는 모든 국가 권력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 국가론은 당시 신생 국가였던 미국의 헌법 제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세워진 대한민국 또한 이와같은 미국의 법치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주의 국가론과 자유주의 국가론이 국가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고 그 위에서 국가의 역할과 목적에 대해 논했다면, 유물주의 국가론은 국가란 계급 투쟁의 산물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국가가 사라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이론에 기초하여 일어난 공산주의혁명은 마땅히 국가주의를 물리쳐야만 한다. 하지만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은 오히려 국민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도구로써 국가 중심주의를 더더욱 강화하였다. 바로 전체주의 국가론이다. 


 
마르크스는 '빅 브라더'나 철학자, 가장 지혜로운 자 또는 어떤 선택된 계급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였다. 계급적 적대관계가 없고, 삶의 주체로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개인들이 서로 상생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세상, 이보다 더 멋진 사회를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유럽인의 삶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문화적 토대를 존중해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을 의미한다. 이런 사회는 더 이상 운동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체일 뿐, 더는 '투쟁하는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다. 내부에 적대적 계급관계나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사회에는 운동과 변화의 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역사가 종결됨으로써 결국 역사 그 자체가 종결된다.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역사 그 자체를 종결하는 마지막 혁명이 되는 것이다. -90~91쪽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은 1945년에 출간되었다. <동물동장>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 예브게니 쟈마찐의 소설 <우리들>은 1921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1년에 나왔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혁명은 1949년에 완성되었다.

나는 늘 궁금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세계를 그린 책들이 이미 여러 권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19세기까지 무려 수백 년간 세계 문명의 중심 국가였고 수천 년 간 종교 대신 철학을 신봉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라는 허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우리나라 일부 386세대는 마오쩌둥 사후 바로 역사의 오점으로 지적된 중국 대륙의 문화혁명을 찬양하고 공산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을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나의 질문들에 유시민은 이렇게 답한다. 

 
현실적 위력은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생명력은 다 타버린 화로 밑바닥의 불씨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진화의 시간이 아닌 역사의 시간에 그것이 큰 불길로 다시 살아날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좌절한 인류의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에 대한 꿈은 언제든 사람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다. -100쪽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상상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만의 독특한 특질이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이런 특질들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믿음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특징도 함께 발달시켰다. 그래서 현대인은 늘 변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국가 권력 아래 순종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를 향한 의지 못지 않게 강렬하다. 어쩌면 불안한 자유보다는 안정적인 독재를 더욱 선호하도록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원래 국가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으며 평화와 안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법을 만들어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고, 때론 폭력을 동원해서 강자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국가 권력이 끝없이 확대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탄생했으며, 국가의 정의와 목적을 찾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은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갖춘 나라이다. 이 제도들을 제대로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지를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뽑아놓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좋지 않은 제도라고 불평할 수 없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악을 저지른다고 해도 위축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언제든,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 이 가능성을 말살하면 독재정부가 된다. 압도적인 민심의 압력이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2016년12월9일, 우리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재확인했다. -118쪽

 

한때 우리 사회는 진보정당과 종북세력을 구분하지 못했던 무지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옹호하는 소수 운동권 세력이 국회에 진출했다가 물러나는 해프닝이 벌어졌는가 하면, 반정부 발언과 보수 언론을 일갈하는 일부 지식인들을 향해서 '혹시 빨갱이 아닐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유시민 역시 그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종종 너무 급진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들리거나 남성중심주의적 사고로 오해받을 만한 발언들을 했던 그가 참으로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이를 또다른 각도에서 보면, 누군가의 자유로운 발언으로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와 역할 또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국가론과 목적론적 국가론은 결합할 수 있으며, 그 결합을 통해 각자의 결점을 제거하고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다. 나는 진보정치세력에게 필요한 국가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국가에 대한 다섯 번째 질문이다. 내가 찾은 답은 이러하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이다. -225쪽


 

이 책은, 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서들을 탐독하고 고민한 결과이다. 
국가의 탄생과 발전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들을 밝힌다. 

 

그저 앎(知)이라는 지적인 만족에만 머물지 않고 앎을 실천(行)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본보기와 같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일독을 권한다. 만약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만족한다면 읽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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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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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사람을 세 번 미치게 한다. 

한 번은 제목에, 다른 한 번은 내용에,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그 파급력에...

아마 나뿐만은 아니리라.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읽을 수 '없는' 이 책을, '읽어버린' 사람이라면, 이미 '미쳤'거나 곧 '미쳐'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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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의 싯구에서 인용했다는 제목을 보고는 종교서적인 줄로만 알았다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보고는 책의 혁명이나 혁명에 관한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종교 서적도 혁명에 관한 이론서도 아니었고, 서평집은 더더욱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은 '혁명서'다.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일, 바로 혁명을 선동하고 촉구하는 책이다.

 

 

 

 

 

16세기초 루터는 성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까지 절대진리라고 믿어왔던 준거들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성직자들이 주장한 것들은 성서에는 적혀 있지 않거나 다르게 적혀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이나 선지자들처럼 침묵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직자를 통해 전해듣기만 했던 성서를 직접 읽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중세는 무너지고 문예부흥을 거쳐 인류 역사는 근대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다.  


사실, 인류의 혁명은 개인의 책읽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이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처럼 뻔한 주장을 반복함에도불구하고 전혀 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러가지로 이야기해왔습니다만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정당하게도 어딘가에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검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독서의 묘미'가 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知)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정보로서 읽는다면 괜찮겠지만, 그것이 과연 '읽는다'는 이름을 붙일 만한 행위일까요. 그렇게 정보로 환원되는 것밖에 상대하지 않으니 당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42~44쪽

 

 

TV 방송 보듯 그냥 습관적으로 봤을 뿐(watch),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거나 내면의 불편한 감정들을 억누르면서 진짜 읽었다(read)고 할 수 있는 책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책들 중, 반은 읽으나 마나 한 책들이었고, 그 반 중 반은 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책들이었으며, 나머지 반 중 반만 진짜 읽은 책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이마저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을, 바로 읽을 수 '없는' 이 책을, 읽어버렸으므로.


'책을 읽는다'는 건,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책들은 무의식적으로 걸러내고 회피하게 된다. 소위 '취향적 독서'란, 내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착한(?) 책들만 보는 걸 말한다. 이런 책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엔 안성맞춤이겠지만 읽으나 마나하거나 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진통제와 같아서 일시적으로 통증을 잊게 해주지만 치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병을 악화시킨다.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식견의 끄트머리에 섰을 때, 인간은 두려움에 몸부림친다.  

소멸을 두려워하고 소멸과 동시에 모든 건 끝이라는 편협한 개인적 사고야말로 우리를 이기주의자로 만들고 종말론자로 만들며, 종말론은 전쟁조차 불사하게 만든다.  


이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훨씬 거대하고 유구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내 삶의 의미를 찾지 마라.

내 삶속에 남과 다른 특별한 의미 따위는 없다.

누구에게나 삶, 그 자체가 바로 의미다. 

 

 

 

 

좋은 약은 입에 쓰듯 좋은 책도 쓰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위안을 주는 책이 아니라 이처럼 나를 뒤흔드는 책이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매우 취약한 상태여서 달콤한 목소리로 구원과 행복을 약속하며 다가오는 손길이 있다면, 주저않고 맞잡을 것이므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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