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시대의 경제학 - 늙어 가는 세계의 거시 경제를 전망하다 부키 경제.경영 라이브러리 5
조지 매그너스 지음, 홍지수 옮김 / 부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고령화 사회에 대한 분석과 전망 및 나름의 해결방안을 모색한 의미있는 책이다.

우선 경제학자답게 저자는 유엔인구국(UNPD)의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전세계적 추세인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1,2 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포함한 서구사회는 산업화와 폭발적인 경제성장세에 힘입어 젊은층의 비율이 높아진 반면 유년층과 노년층에 대한 사회부양비는 낮아지면서 발생하는 경제적 혜택(소위 '인구 구조 배당금')을 누려왔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호시절은 지나가고 이제 인류는 고령화라는 직격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수명이 늘어나고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젊은층 인구는 줄어들고 노년층 부양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고 경제성장이 적체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다만, 부족자원이 풍족하고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과 같은 나라들은 서유럽에 비해 고령화에 따른 폐해를 덜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 역시 세계적인 초저출산 국가이자 매우 빠른 속도로 늙어가는 나라로 '고령화 문제'는 정치적 이슈이자 사회적 화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뚜렷한 해법은 없는 실정이다. 저자 역시 아시아에서 한국과 함께 이미 초고령사회인 일본과 경제가 미처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채 고령화에 직면할 가능성이 큰 중국은 하루 속히 대책을 강구하라고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

 

사실,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인구구조상 줄어든 생산가능인구(15~65세) 문제에 대체하기 위해 정년을 연장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경제계와 각종 이익단체들간의 팽팽한 대립 끝에 정년 연장 법안이 통과되었다. 기업은 젊은층 대신 노년층을 고용하면 생산성은 그만큼 낮아지고 비용은 그만큼 높아진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해 왔으나 이웃나라 일본만 보더라도 정년 연장은 기업이 존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고령화 사회를 헤쳐나갈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일할 청년층이 점점 부족해지고 숙련공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정년 연장 문제는 고용주와 피고용주 사이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세대간 갈등을 불러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 즉, 청년 실업을 해소시킬만큼 경제가 성장하여 고용이 확대되지 않는다면 젊은이와 노인이 일자리를 두고 경쟁할 수도 있고, 연로한 부모가 일을 해서 실업 상태인 성인 자녀를 '부양'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고령화 사회가 도래하면 취업 시장에서 청년층과 노년층이 경쟁하는 일이 일어날까?

저 자가 지적한 것처럼 실제로 청년층의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정년 단축이나 조기 퇴직 제도가 앞다투어 도입되었지만 젊은 세대의 고용 비율은 증가하지 않았다. 결국, 이와 같은 제도는 청년층의 실업율을 낮추지도 못한 채 조기 퇴직에 따른 연금 지급 등이 앞당겨 지면서 정부의 사회부양비만 높인 부작용를 초래할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청년층을 고용하기 위해 노년층을 노동시장에서 일찍 퇴출시켜야 한다는 기업의 주장은 신뢰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20대에 높고 30대에는 급격히 떨어지다가 다시 40대 이상에서 높아지는 U자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결혼과 출산으로 여성 인력이 취업 시장에서 대거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모자 보건과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걸까?  사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과 출산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하나로 묶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은 여전히 낮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이 높으면 출산율이 낮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일본, 동유럽과 러시아, 이탈리아, 독일, 유럽 연합은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지만 출산율도 가장 낮다. 반면, 스웨덴, 이이슬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 아일랜드는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과 출산율이 모두 높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가?

육아 시설이 열악하거나 이용료가 비싸고 세금 구조가 직장 여성들에게 불리하면 대부분의 여성이 육아와 직장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내몰리게 된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이 높은 출산율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정부나 기업이 나서서 적절한 육아 시설을 제공하고 더욱 가족 친화적이고 융통성 있는 근무 시간을 마련해 보다 많은 여성이 자녀를 돌보며 일할 수 있도록 해 주면 된다. 정부는 주택 마련 자금 융자 제도와 각종 유인책을 사용해 젊은이들이 부모에게서 독립해 되도록 일찍 가정을 꾸리도록 해 주면 된다.

-조지 매그너스, <고령화시대의 경제학> p97~98 中-

 

그동안 여성 인권 향상 차원에서만 바라보느라 번번히 벽에 부딪쳐야만 했던 직장내 여성 차별 문제가 고령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고용 시장에 존재하는 남여 성차별적 관행들이 사라져 여성의 경제활동이 확대되고 여성의 소득이 남성과 동등해지면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높아진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 거의 모든 나라의 연금제도는 말 그대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과 거 고속 성장으로 역사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웠던 시기에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현재 전후 세대야말로 경제성장의 첫번째 수혜자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 역시 청년층이하 세대가 자신의 부모세대처럼 부를 축적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3포세대' '88세대' 등의 신조어은 단순히 철이 덜 든 마마보이나 마마걸의 엄살이 결코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폭발적으로 늘어난 노년층의 부양 의무까지 전가시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고령화 사회의 해법은 없는걸까?

경 제 성장기에 혜택을 많이 본, 부자 노인들이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가난한 노인들의 부양비를 충당하도록 하는 방법이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짜피 부자 노인의 돈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니 부의 세대간 이동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는 부의 대물림과 빈부격차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밖에도 저자는 세계화와 인구문제를 하나로 아우르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선 진국에서 종종 고령화 시대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민 정책은 실(失)은 간과한 채 득(得)만을 강조한 감이 없지 않다. 신대륙 발견 이후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인구 이동은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초강대국 미국이야말로 이와 같은 '제1차 세계화'로 탄생한 국가이지 않은가.

 

그러나 경제성장이 과거보다 현저하게 둔화될 가능성이 큰 미래의 고령화 선진사회는 경제활동인구 확대라는 달콤함에 빠져 이미 정책을 확대했다가는 혹독한 댓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보통 이민은 상대적으로 경제발전수준이 낮은 국가에서 높은 국가로의 인구이동을 말하는데 이들은 거의 대부분은 피부양가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지식층이나 숙련공이 아닌 경우 이민자들은 거의 대부분 3D 직종의 저임금 업종에 종사하는데 선진국 정부의 세율과 복지제도는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층을 돌보는 것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어 이민자들이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앞으로 서유럽 등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국가는 단순 노동력이 아닌, 숙련공이나 기술인력 등만을 선별하여 받아들여야만 하고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한편, 세계화는 상품과 용역 자본 분야 뿐만 아니라 HIV/AIDS와 같은 전염병 분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은 인구구조상 젊은층이 절대적으로 많아 '인구 구조 배당금'을 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전염병의 만연으로 경제성장이 적체되어 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아프리카와 중동 및 인도 등은 인구구조상 젊은층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경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발전시켜 실업율을 낮추지 않는다면 비록 인구 고령화에 따른 직격탄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빈곤의 악순환과 그에 따른 사회적 혼란이라는 더 큰 시련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집약산업의 한계는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의 투입에 비례하여 발전한다는 점이다.

지금의 중국을 보라!

중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은 엄청난 인구를 기반으로 한, 저임금 노동집약형 산업을 발전시킨 덕분이었고, 그로 인해 전세계인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건들을 사고 버리는 과소비를 일삼아 왔다. 이와 같은 발전 방식은 반드시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비록 지역적으로 인구가 줄어들겠지만 전세계적 관점으로 봤을때,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도 그렇고 대부분 인구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이 뜻밖에도 이와 같은 문제는 소홀시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우리는 고령화 문제에 접근하는데 있어 이와 같은 기본적인 전제를 간과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고령화 사회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서둘러 고출산 정책을 난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구는 무한한 자원이 아니다. 무작정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다.

 

 

소제목만을 보면, 유엔인구국(UNPD)에서 제시된 각종 인구 통계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내놓은 짧은 보고서들을 한권으로 엮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인구 구조와 고령화 저출산 문제를 세계적으로 접근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지역별 상황과 특징 또한 놓치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이는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덕분'이 아닐까 싶다. 하여, 저자의 창의성이나 통찰력은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성공이 열정 하나만으로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면 반드시 읽어 봐야 할 책이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덤프트럭운전사, 네일아티스트, 정당이나 NGO단체의 상근 근로자 및 취업준비생들의 실제 삶을 추적하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을 이끌어 내는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기업체는 어째서 직원 연수에 외부강사를 초빙하여 동기부여 강연을 듣게 만드는지...

서점에는 어째서 자기개발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상위 자리를 차지하는지...

대중 매체는 어째서 하나같이 성공과 열정은 하나라고 주장하는지...


그 이유는, 바로 개인의 노동을 저렴한 가격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열정 노동의 확산은 IMF 사태라는 국내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창궐이라는 전 세계의 상황을 근간으로 한다. 국가와 자본은 사람들의 열정을 필요로 했다. 동시에 신자본주의는 '불안정함'이라는 운명을 새 시대에 부여했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거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요구되었다. 면접자에서도, 구직자가 열정을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인사 담당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널 대체할 사람은 많아'라고 이야기했다.


-한윤형외,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p186~187-



이 책은 '성공과 실패는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매우 당연하고도 의미 있는 담론이 사실은 갖은 거라고는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싼 값에 부려먹으려고 하는 고도의 계략에 다름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 계급사회가 출현하면서 노동의 가치가 중요해졌다. 원래 필요한 만큼만 노동을 했던 인간은 잉여 생산물을 만들고 축적하기 위해 노동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계급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더욱 많은 잉여 생산물을 갖기 위해 일반 대중들에게 노동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강압적인 폭력과 함께 등장한 것이 바로 자발적으로 노동하게 만드는 '의식화' 작업이었다. 노동은 이렇게 해서 신성함을 부여받게 되었고 노동에 대해 지불하는 댓가는 항상 노동을 재생산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제한되었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대중의 열정을 계속 불지피기 위해 일부 극소수의 사람들이 노동을 통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계급에 편입되는 것을 용인함으로써 일반 대중의 '본보기'로 삼았다.


"자, 저 사람을 봐라! 저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저 자리에 섰다. 너의 실패는 다 네가 열정을 불태워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마술 지팡이가 되었다. 


실업, 빈곤, 자살 등이 과연 모두 개인의 게으름과 나약함 때문일까?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사회 구성체 안에서 움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의 폭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국적과 성별 그리고 사회적 지위는 향후 개인의 후천적인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이와 같은 것들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흔히 타고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위인전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보기'로 등장하는 위인들은 하나같이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고 운명을 개척하지 않았던가. 세상은 우리에게 위인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반드시 누구나 위인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위인으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그저그냥 마음 편하게 일생을 살다가면 안되는 것일까? 물론,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에게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사실, 개개인은 매우 약하다. 전체 속에서 개인의 선택 여지는 생각처럼 크지 않다. 쉽게 말하면, 이미 정해져 있는 전체의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질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게임의 승자는 누굴까? 바로 게임의 규칙을 정한 사람이다.


'열정 노동의 전도사'들이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이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배틀 로얄>의 대사를 인용한다면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룰'에 가깝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김난도는 청춘들에게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고도 소설은 쓸 수 있다며 '작가적 자의식'으로 제 곤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청춘을 요구한다. 그보다 훨씬 많은 자기 계발의 전도사들은 당신에게 마치 스스로 사장인 것처럼 일하라고 할 것이다. 이들의 말은 잘못 되었는가?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상 우리에게 다른 대책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가장 가망 없는 열정 노동의 현장('사회운동')에 뛰어들거나,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다른 일에 열정을 불태우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열정의 반복이다. 열정의 착취로 인해 생긴 이 순환을 끊어 내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열정을 불러와야 한다.


-한윤형外,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p235-



자기개발'과 '동기부여'가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과 이유 역시 대중의 열정을 자극하여 소위 자발적(?) 노동을 이끌어 내려는 교묘한 전략에 다름 아니었다. 진실을 뒤덮고 있던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밝아졌으니 당연히 통쾌, 상쾌해야 마땅하건만 마음만은 더 한층 무거워졌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자본의 교활함에 대한 뒤늦은 자책과 깨달음도 앞으로의 대처 방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열정은 성공하고픈 사람들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희망의 불씨와 같은 것이었는데...

그 희망의 불씨마저 사그라진 지금.

마음 속에는 열패감과 함께 의혹의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에이, X같은 세상. 그런데 혹시 이 책 역시 '또 다른 열정'에 불을 붙이려는 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진홍의 사람공부 - 사람을 아는 것의 힘 정진홍의 사람공부 1
정진홍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주로 자기개발 방면 강연 등으로 이름을 얻은 저자의 경우, 저서는 강연을 그대로 옮겨 놓았거나 깊이가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저자들을 폄하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주장이 '글'보다는 '말'에 더 적합하다는 의미다.


<정진홍의 사람공부>는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三人行, 必有我師'로 요약된다. 즉, '타인의 삶을 거울 삼아 자신의 삶을 가꾸자'가 이 책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싶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법한 저자와 함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사람들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의 호수가 여러번 출렁거림을 피할 수 없다. 유명한 인물과 덜 유명한 인물들 예순 일곱명을 두 세명씩 묶어 그들의 열정적인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지 답이 보이는 것 같다.


때론 세월에 떠밀리듯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 같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다. 인생이란 살아 숨쉬는 매순간 온몸을 다바쳐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범한 사람은 평범한 듯 하지만 확실히 남다른 부분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드러낼 수는 없었으리라. 비범과 평범을 가르는 단 하나의 차이는 바로 '열정'이다. 책 속에 소개된 예순 일곱 개의 삶을 만든 건 원칙이 아니라 열정이었다!


이미 일본의 시대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음과 같은 말은 두고 두고 심금을 울린다.


하루키에게 있어서 달리기는 글쓰기와 닮았습니다. 달릴 때의 몸짓이 자아내는 반복적이면서 고통스런 신체표현이야말로 직업작가의 글쓰기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키는 말합니다. "문장을 쓰는 것 자체는 두뇌노동이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것은 육체노동이다"라고.


- 정진홍, <정진홍의 사람공부> p21中-


어디 하루키 뿐이겠는가.

장애아들에게 '하라키(일본어로 '빛'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숙제'를 끝까지 풀고 가겠다는, 그것도 '짐'으로서가 아니라 그 생명이 지닌 가능성이 만개하도록 돌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오엔 겐자부로의 인생은 그 자체가 인류를 밝히는 한줄기 '빛'이라 하겠다.  인생이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성실하게 완수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숙제는 과연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라는 숙제의 종류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어떻게'라는 숙제에 임하는 자세가 아닐까.


흔히, '감동이 있는 인생' '이야기가 있는 삶' 등이 대세인 세상이다.

이야기 하나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냐마는 진심이 담긴 인생.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인생이야말로 진짜 인생이라 하겠다.



이런 분야의 책들이 무릇 그렇듯, 책장을 넘길 때만큼은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며 마음이 마구마구 뒤흔들리다가도 책만 덮고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익숙한 일상으로 되돌아 오고 마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책 속에 소개된 삶들이 쉽사리 잊혀져도 될만큼 가벼워서라기보다는 이와 같은 자기개발서가 갖고 있는 '한계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한계성은 저자의 명성에 기대어 판매효과를 얻으려는 출판사의 무리수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겠고, 예순 일곱 명의 삶과 열정을 이해하고 본받으려는 저자 자신의 뼈아픈 노력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으리라.


독자가 받는 감동은 저자의 노력에 정비례한다.

저자가 단순히 예순 일곱명의 열정적인 삶을 소개하는데 그친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 자체가 큰 충격으로 휘청거렸는지는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 개정판
셔윈 B. 뉴랜드 지음, 명희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상당히 오랫동안 외면받고 금기시되어 왔다.

산 자에게 죽음이란 미루고 피할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미루고 피하다가 급작스럽게 맞부닥치는 '어떤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웰빙(Well-being)'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과 성찰 또한 확대되고 있다.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는 40여년간 의사로 근무하면서 마주한 다양한 죽음에 대한 생생한 임상보고서이자, 의학적 관점을 뛰어넘어 한 인간으로서 '죽음'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한 자기고백서라 하겠다.


언젠가는 죽고 말 우리, 마지막 순간을 향해 한 걸음씩 서서히 나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자신의 생이 남들에게 흉한 모습을 보이지않고 마감될 수 있다는 것은 진정 축복이다.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심장남이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신체 조직은 그 나름대로의 속도에 따라 죽음의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죽음이란 영혼이 빠져 나갈 때처럼,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과거에는 심장이 박동을 멈추는 순간을 완전한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심장의 침묵 뒤에도 완전한 죽음을 향해 진행되는 소리 없는 과정들이 있다.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74~74 中-


갑 작스러운 죽음은 주로 심장마비와 같은 심혈관 질환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심혈관 질환은 혈관 속을 돌아다니던 찌꺼기들이 혈관을 막으면서 발생한다. 이 밖에 교통사고 등에 의한 사망은 외상에 따른 과다출혈이나 상처 부위에 염증이 일어나 발생하는 패혈증 등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서서히 한걸음 한걸음씩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 본 인생이란 결국 죽음으로 향해가는 일련의 지난한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노화'로 더 한층 구체화된다. 


저자는 할머니의 노화가 어떻게 죽음과 맞닿아 있는지에 대해서 전 과정을 간략하고도 애잔하게 묘사하면서 노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나이가 많아도 얼마든지 진취적이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인간답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 있다. 문제는 그러한 구성 요소들을 부정하고 물리치려는 헛된 시도이다. 죽음에 대한 불필요한 저항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가슴을 해쳐선 안된다.

생 에 정해진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비로서 인생은 군형 있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즐거움과 성취감 그리고 고통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생의 틀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이 내린 한계를 억지로 뛰어넘으려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틀을 잃어버리게 된다.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133~134 中-


이 밖에도 저자는 노화의 불청객 중 하나인 '치매'에 대해서 구체적인 임상 사례를 빌려 자세히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인과 자살 그리고 안락사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특히, 날카로운 흉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경우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죽음의 고통이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방어하는 쪽으로 부지런히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극단적인 고통이 수반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에 실제로 직접 직면하게 되면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의 강도가 덜 하다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극심한 고통이나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인체에서는 고통을 잊게해주는 혹은 그 강도를 낮추어주는 호르몬 분비나 기타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되기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죽음에 이른 사람들의 마지막 표정이 고통으로 이그러져있기보다는 허탈함과 안도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다는 점을 저자 역시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에이즈 환자들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의학적으로 서술하는 한편, 사회적 비난과 가족의 외면 속에서도 에이즈 환자의 죽음이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동성애자들이 보여주는 연대의식으로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할 수 있는지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암에 의한 죽음을 논하면서 저자는 의사의 '욕심'이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고통으로 몰아가는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즉,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 그리고 암전문의들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인해 '자기 결정권'과 '심리적 자율권'을 행사하기를 포기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의 이와 같은 지적은 어째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을 해야 할 그 시간에 환자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고립된 채 각종 의료장비를 주렁주렁 매단 채 낯선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솔직한 답변이 되리라. 물론, 의료진들의 도전정신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의료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간의 헛된 희망과 오만함 또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의사인 저자는 바로 이 점을 '내부 고발자'와 같은 심정으로 밝힌 것이다.


의사들이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이유는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본능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본래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의학은 이들을 현대 장비와 새로운 약품 등으로 유혹하고 있다. 의사들은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의학의 치료 능력으로써 누를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에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는 환자, 그 환자들로부터 죽음의 마수를 떼어놓기 위해서 말이다. 의사들은 승리를 해야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승리하기 위해 우리 의사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학위를 따고, 힘든 수련 과정을 거쳐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

(......)

대부분의 의사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특질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합당하고 합리적인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느 선을 넘어 버릴 때, 다시 말해 통제력이 사라지게 될 때, 의사들은 자신의 무능력이 양산해낸 결과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의사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환자들보다 돌아가는상황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강요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일단 결정내리고 그 결정을 환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366~367 中-


인생은 '멋진 죽음'으로 완성된다. 물론, 멋진 죽음이란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어 한마디로 정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극심한 고통속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완치 가능성이 낮은 각종 화학 요법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집에서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벗들과 훌륭하게 보내고 죽음을 맞이한 것도 멋진 죽음일 수 있을 것이다. 차가운 병원이 아닌 온화하고 따듯한 가족의 품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또한 숭고하고 멋진 죽음이 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의사의 역할을 질병의 치료에만 두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환자가 고통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주는 것 또한 의사의 숭고한 사명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아는 중국은 없다 - 시진핑 시대 중국 경제의 위험한 진실
한우덕 지음 / 청림출판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저자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국 전문가다.

<우리가 아는 중국은 없다>에는 한중 수교 초창기부터 중국 대륙을 드나들면서 현장감을 익힌 저자의 눈으로 바라본 중국의 현재와 미래가 잘 담겨 있다.

1992 년 한중 수교는 한국의 수출구도를 바꾸는 일대 변화를 불러 왔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극복과 중진국 함정을 피할 수 있었던 건 '금모으기 운동' 때문이 아니라 바로 수교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대중 수출 덕분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90 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기업은 중국 현지에 생산 공정을 옮겨 놓고, 현지의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한국으로부터 수입해온 중간재를 조립 가공 후, 제3국으로로 수출함으로써 엄청난 이익을 거두어왔다. 이는 바꿔 말하면, 중국에 대한 한국 경제의 의존도가 확대되었다는 뜻이다.


빛과 어둠은 공존하는 법이다. 그동안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이득을 본 한국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즉, 중국의 성장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개혁개방 초기부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중국의 경제 성장은 대부분 개혁개방을 통한 대외수출 확대의 결과였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경제 악화로 중국의 성장은 더 이상 대외수출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경제를 견인하기 위해 그동안 수출로 거둬드린 달러를 내수시장 활성화와 인프라 건설 분야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13억 인구를 보유한 중국의 내수 시장 잠재력은 어마어마하다.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의 내수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사활을 건 경쟁은 물론이고, 기술이전이라는 '독배'조차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 최고의 수주량을 자랑하던 한국의 조선업이 중국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고, 유럽의 에어버스와 미국의 보잉사는 해마다 200여대의 여객기를 구매하는 VIP 고객인 중국 항공사(중국의 항공분야는 중국항공, 남방항공, 동방항공 등 국유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즉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서양의 자유방임자본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기업 대 기업 간 비지니스라기 보다는 기업 대 국가라는 형국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기업을 포함하여 글로벌 기업들이 상대해야 하는 건 바로 중국 기업이 아닌 중국 정부이다. 그것도 그냥 정부가 아니라 엄청난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으면서 '공산당'으로 대변되는 폐쇄적 집단통치제도를 굳건히 고수하고 있다. 이런 중국 정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기업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구글이 한때 중국 본토에서 '바이두'에게 시장을 내주고 철수까지 하게 된 것이나, 프랑스 최대 유통업체인 까르푸가 티베트 독립 시위를 후원한다는 근거없는 소문에 떠밀려 철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중국 내수 시장에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은 사라진지 오래다. 자유방임자본주의의 관점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접근한다면 말 그대로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공산당도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만 의지하여서는 거대 중국을 더 이상 이끌 수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 산층의 부상, 내수중심으로 성장 패턴의 전환, 공산당과 중산층의 타협, 그리고 다으이 연성화... 이같은 트렌드를 꿰뚫는 키워드는 '민부(民富)'다. 기존의 성장의 '국가 강성'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앞으로는 성장의 과실이 일반 국민에게 돌아가도록 짜일 것이다. 시진핑 시대 중국 공산당이 대외적으로 어던 슬로건을 내걸지는 아지 아직 알수 없다. 다만, 그 방향은 국가보다는 민간이 더 부유해지는 민부의 철학을 담게 될 것이다.


-한우덕, <우리가 아는 중국은 없다> p 113~114 中-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저자 역시 향후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동안 중국의 공산당은 중산층을 끌어안고 하층민의 반발을 완화시키기 위해 더 한층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빠져 나간 자리에는 민족주의가 들어설 공산이 크다. 한 나라의 민족주의는 이웃국가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민족주의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위차원인 수동적 측면이 아니라 힘을 과시하려는 확장/공격적 성격을 띄게 된다면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최근 중국이 일본 및 동남아시아 각국들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확장/공격적 외교 노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만약 민족주의에 기반한 확장/공격적 성향으로 바뀐다면 그 여파는 이웃국가에만 머물지 않고 전세계에게 미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여, 앞으로 한국은 단순히 돈을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공산당의 '입과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 대륙에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말은 지나간 옛말이 된지 오래다. 중국은 'rule-taker'에서 'rule-maker'가 되려고 한다. 즉, 기존의 국제 질서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꽌시'문화로 국제 질서를 바꾸려고 한다. 거대한 시장 규모만 보고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큰 코 다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 특히 중국의 지도층은 거대한 내수 시장을 외국에게 내줄 의향이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자국의 민영 기업을 키우려는 노력도 엿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내수 시장은 '국진민퇴(國進民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즉, 국가소유의 국유기업과 국가가 운영하는 국영기업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내수 시장의 핵심 산업을 독점하는 양상을 띄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익 배분의 결실은 자연스럽게 법을 정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갖고 있는 소수의 지배층에게 흘러 들어감으로써 빈부격차 심화와 권력형 부패라는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중국병'의 근원은 시장 경제 시스템 유지에 꼭 필요한 자율과 견제의 기능이 약하다는 데 있다. 정상적인 시장 경제 시스템이라면 각 경제 주체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이해관계의 타협점을 차즌ㄴ다. 그러나 중국은 그게 안 된다. 자신의 이익 행위가 사회 전체의 경제적 발전과 합치되지 않는다 .그래서 짝퉁이 성행하고 온갖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것이다. 이들을 몰아낼 수 잇는 시장의 자정기능은 턱없이 부족하다.

자율과 타협이 실종된 중국 시장경제 체제는 쉽게 '패자독식'의 구조로 빠지고 만다. 이긴 놈이 다 먹는 것이다. 센 놈이 약자의 것을 끊임없이 빼앗아 갈 수 있는 제도적 틀이 자리 잡고 있다. 약자는 죽어라 일해 모은 부를 자기도 모르게 빼앗긴다.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관리하고 유도해야 할 국가는 오히려 이익행위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국유기업을 앞세워 산업을 독점하고 국유은행을 매개로 자본을 장악한다. 이로 인해 민영기업들은 산업의 변두리에서 허덕이게 되고 힘없는 노동자들은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우덕, <우리가 아는 중국은 없다> p204 中-



한편, 인프라 건설 분야에서는 우선  먼저 세계 최장 길이를 자랑하는 중국의 철도 부문에 대한 투자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2006 년 베이징과 라싸를 잇는 '칭짱철도'의 개통을 시작으로 고속철도사업까지 철도는 말그대로 중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火车头(기관차)'였다. 그리고 뒤이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한 건설 특수가 한바탕 중국 대륙을 휩쓸더니, 최근 2~3년간은 주택 건설붐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진 모양새다. 물론, 이 엄청난 공정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자금은 중국의 국유은행들로부터 나온다. 중국 정부는 국유은행을 동원해서 인프라 건설 투자에 대한 대출을 확대시켜 내수시장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유은행의 부실화 그리고 돈을 빌린 주체인 지방정부의 부실화가 우려된다.


전세계 특히 유럽을 강타한 금융위기가 2008년 미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다음번 위기의 진앙지는 중국의 지방정부 파산과 이에 따른 은행 부실화를 꼽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물론, 이상의 시나리오처럼 중국이 자유방임국가인 미국처럼 자국의 경제 위기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도록 '방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중국은 이때야말로 '책임있는 국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 공산당의 권력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부상은 지금까지 세계 경제에 크나큰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13억 인구의 함수가 언제나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13 억 함수'가 이제 거꾸로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는 중국의 거대 인구가 주는 '풍요'를 누려왔다. 저장성의 허름한 공장에서 하루 10시간 재봉틀을 돌리는 '샤오제(小姐, 소녀)'의 희생이 있었기에 세계 소비자들은 싼 값에 셔츠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제 '노!'라고 말한다. 더 이상 싼 값에 노동력을 팔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원자재시장에서 자원을 쓸어가는 존재로 변했다. 서방에 풍요를 줬던 13억 인구가 이제는 고통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13억 함수의 패러독스다.

흔히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나라'로 표현한다. 땅이 크고 물산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턱도 없는 소리다. 인구와 경제 규모를 비교해 볼때 중국이야말로 전형적인 자원 빈국이다. 중국이 세계 ㄱ여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퍼센트 정도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세계 시멘트의 절반, 철광석의 약 3분의 1, 구리의 40퍼센트를 먹어치우고 있다. 중국은 2010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으로 등장했다. 상하이에 건설되는 빌딩의 숫자에 따라 국제 철강 가격이 좌우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2010년 중국의 에너지 소비량은 22억 5000만톤(석유로 환산)으로 미국보다 4퍼센트 많았다. 물도 문제다.

655개 주요 도시 중 400개 도시가 물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절반은 수돗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전력 사정도 열악하다. 상하이, 광둥 등에 진출한 한국 중소기업들은 자주 '개사정삼(開四정三)'처분을 받는다. 일주일에 4일만 전기를 공급하고 나머지 3일은 아예 끊겠다는 통보다. '전력난;으로 기업인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요 즘은 곡물 사정이 특히 심하다. 중국 인구가 세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퍼센트에 달한다. 그러나 경작지 보유 비율은 8퍼센트에 불과하다. 천생적으로 곡물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자연재해는 매년 치러야 하는 연례행사가 됐다. (......)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경작지에 자연재해까지 덮치니 식량 확보에 어려움이 많다. 식량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세계 곡물시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

돼지는 중국과 세계 경제의 역학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중국 각지역에서 키우는 돼지 수는 약 4억5000만마리에 달한다. 세계 전체 돼지 수의 절반에 해당하는수준이다. 돼지는 곡물 먹는 '기계'다. 돼지 몸무게 1킬로그램을 불리기 위해서는 약 3~4킬로그램의 곡물을 먹여야 한다. 특히 대형 기업 영농이 늘면서 중국에서도 사료 먹는 돼지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수년 동안 사료 수요는 연평균 20퍼센트 넘게 증가했다. 돼지고깃값이 오를 수 밖에 없다. 이는 중국 물가지수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인플레가 기승을 부리던 2011년 6월, 소비자 물가상승률 6.5퍼센트 중 1.5퍼센트포인트가 오로지 돼지고기값 때문에 발생했다. '돼재가 중국, 나아가 세계 인플레의 주범'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그야말로 '돼지 경제학'이다.


-한우덕, 우리가 하는 중국은 없다> p 218~221 中-


이와 같은 중국발 후폭풍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간단하다.

'made in china'에서  'made for china'로 바꾸어 중국인의 마음을 파고 드는 상품을 만들어 내수시장을 공략하라는 것이다. 각개의 우려 속에서 체결된 한중 수교가 한국에게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듯이 한중 FTA 역시 위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회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견 타당한 말이다. 달리는 사자를 따라잡으려 하지 말고 달리는 사자 등위에 올라타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용기와 배짱 그리고 기술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연구개발을 통한 최첨단 기술력 확보와 '한류'등 문화 컨텐츠로 문화와 경제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중국 소비자의 마음을 파고 들 상품 개발에 앞장서야 할 대기업들은 중국의 성(省) 하나보다도 작다는 국내시장에서 영세상인들과 경쟁이나 하고 있다. '땅 짚고 헤엄치겠다'는 식의 자세야말로 경쟁력 강화에 자신이 없다는 방증이다.

한국의 대기업들은각고의 노력으로 초석을 다진 1세대 경영인과 정경유착과 카르텔로 성장한 2세대 경영인을 거쳐 3세대 경영인으로 그 바톤이 넘어가고 있다. 

부디, '3대 가는 부자없다'는 속담이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