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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피로사회>에 이어 <투명사회>를 읽었다.
쉽지 않은 용어들과 개념들로 읽기가 쉬운 책은 절대 아니지만, 반드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피로사회>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열정'이 어떻게 자기착취적 노동으로 변질되어 가는지를 고발했던 저자는
<투명사회>에선 투명성을 강조하는 '투명사회'가 어떻게 감시와 통제를 체계화시켜나가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투명성은 열정과 마찬가지로 긍정성을 대표하지만 이러한 긍정성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오히려 상호 감시를 조장하게 된다. '전부
공개하라!'고 투명성을 요구하는 건 그만큼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이 팽배해 있는 소위 '불신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여, 국가기관이건 국회의원이건
기업이건 개인이건 할 것없이 투명성이라는 이름 하에 상대방을 발가벗기고 스스로도 발가벗고 있다. 이처럼 서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사회는 점점 더 투명해지고 있다.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한병철, <투명사회> p26~27 中-
평소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과 투명성을 곧잘 연관짓곤 하던 나, 멘탈 붕괴 제대로 경험했다.
투명하게 정보(혹은 '사실')가 공개되서 우리가 얻은 건 뭘까?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투명해진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과거보다 얼마나 더 행복해졌을까?
'모르는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다.
'알면 알수록 좋다'라는 인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말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더 나은 선택과 결과를 얻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는 게 병'이라는 말처럼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올바른 선택을 방해하여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와 사실에 집착하는 건,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면 손해'라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우리사회의 집단심리구조는 불평등한 사회를 거쳐온 구성원일수록 '평등'과 '공평'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는 한편으론 평등지향적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강력한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일정한 평등치에 도달한 사회에서 지나치게 투명성을 강조한다면
오히려 '획일화'와 '통일성'으로 나아가기 쉽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경쟁하듯 자발적으로 투명성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을 공개하고 드러내
놓는다. 바로 '전시사회'의 모습이다.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트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않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
-P34~35 中-
인터넷의 개인 블로그나 SNS를 보라.
개인의 사생활들이 얼마나 신속하고도 보기 좋게 올라오고 있는가. 마치 온라인 쇼핑몰의 상품들을 바라보듯 지인이 올린 SNS 속
사진들을 훑어보는 우리 개개인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오늘의 통제사회는 특수한 파놉티콘적 구조를 보여준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 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피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든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주체가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가발전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를 노출할때,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 날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한병철, <투명사회> p26~27 中-
노출증과 관음증 그리고 포르노적 과시...
다소 거칠고 불편한 표현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사회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정의한 문장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마치 시장에 전시된 상품을 바라보듯 서로가 서로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너무나 개인적인 사생활들이 서로
제한없이 공유되기 때문에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선마저 무너졌다. 경계가 없어졌으니 더욱 친밀해졌다. 서로 모르는 것 없이 너무 친한 사이일수록
상처를 주고받기 쉬우며 서로에 대한 존경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폐해는 뜻밖에 크고 깊다.
타인을 존경하는 사람은 함부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존경의 전제는 떨어져 있는 시선, 거리의 '파토스'이다.
오늘날 존경심이 사라지면서 거리를 알지 못하는 구경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은 스펙터클의 특징이다. 스펙터클의 어원인 라틴어 동사
spectare는 거리를 둔 배려와 존경(respectare)없이 관음증적 태도로 쳐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p115-
존경은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 익명성과 존경은 양립할 수 없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촉진되고 있는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하고 있다. 악플 역시 익명적이다. 바로 이 점에 악플의
폭력성이 있다. 이름과 존경은 서로 엮여 있다. 이름은 인정의 기반이다. 인정은 언제나 기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책임지기, 신뢰하기, 약속하기와
같은 행위 역시 기명성과 연관되어있다. 신뢰란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p117~121 中-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근원이 다름 아닌 바로 지나친 '친밀감'에서 비롯됐다는 저자의 지적에 소름이 돋을만큼 공감했다.
진정 어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낯익은 가족이나 오프라인 친구와는 의미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낯선 불특정 대중과는 불안정하고
불규칙적인 '소통'과 '접속'을 이어간다.
왜?
서로 존중할 필요가 없으니까... 즉, '만남'에 있어서 어떠한 '의무'나 일말의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감정과 느낌을 드러냄으로써, 즉 영혼을 노출함으로써 영혼의 투명성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 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제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 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가지 표현 형식이다. -p73~74 中-
서로의 체온을 느끼기 위해 다가가지만, 상대에게 닿자마자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반대쪽으로 통과하여 나온다. 이제 대인관계는 마치 SF영화
속 한장면처럼 투명하게 이루어진다.
인터넷 컴티 활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하리라. 동일한 관심사로 이루어진 컴티 안에서 조금만 다른 의견을 내는 회원에게 얼마나 많은
분노의 댓글이 쏟아지는지를...
그렇다!
우리는 너무도 손쉽게 격분한다. 격분하여 댓글을 달고 마녀사냥식 인신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같은 감정적인 격분으로는 사회의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모인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한곳을 향해 행진하는 시위군중이 아닌, 그저 일시적이고 단말마적인 불특정한 '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격분의 물결은 사람들의 주의를 동원하고 묶어내는 데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하지만 매우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운 까닭에 공적인 논의와 공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한다.
격분사회는 스캔들의 사회다. 이런 사회에는 침착함, 자제력이 없다. 격분의 물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반항기, 히스테리,
완고함은 신중하고 객관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대화도,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반면, 분노는 일정한 행동을 촉발하기에 서사적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격분의 물결에서 나타나는 감정인 화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디지털적 격분은 행동도 이야기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행동의 힘도 펼치지 못하는 감정적 상태일 뿐이다. 강력한
의미에서의 분노는 감정적 상태 이상의 것이다. 분노는 기존의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렇게 해서 분노는 미지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격분하는 군중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량과 중력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하지 못한다. -P124~126 中-
사실, 대다수 사람들이 인터넷 컴티의 무의미함과 예의 없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고 소통하는데 있어서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의 효과에 대해선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저자의
해석대로 투명사회가 통제사회요 감시사회이며 전시사회고 격분사회일지라도 이제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시대에 진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저자는 투명사회의 도래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던 인류가 '자유로움'를 최고의 가치로 정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류의
진화는 곧 자연으로부터 오는 제약과 사회로부터 오는 제약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후기근대사회(포스트모던이즘)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더 한층 자유로워졌다. 인터넷 역시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인류에 의해 개발되고 받아들여졌다.
그릇에 담겨 있는 물은 자유롭게 흘러가지 못하고 갇혀 있으니 부자유스럽다. 반면, 그릇에 담겨 있지 않은 물은 자유롭게 흐른다. 그렇지만
이처럼 아무것에도 담겨 있지 않은 물은 자신을 가두는 '틀'이 없어서 자유로운 대신, 땅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리기도 쉽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을 가두는 '틀'이 실은 물의 소멸을 막아준 '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담'을 한병철은 우리의 자유를 거스르는 '부정성'이라고
표현한다. 다음은 이 책을 번역한 역자의 해석이다. 다소 길지만 철학도들도 울고 간다는 이 책 <투명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인용하기로 한다.
부정성 개념은 한병철의 저술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꼽는다면 '타자', 즉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의지와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것, 나에게 거역하는 것,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혐오스러운 것, 심지어 나를 공격하고 파괴하려고 위협하려는 적, 이 모든 것이 부정성의 범주에 속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부정성과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문명의 진보는 곧 부정성의 축소인 것이다. (...)
사회적 차원과 자연적 차원에서 모두 부정성의 축소 과정이 충분히 진행되어 개개인이 그것이 낳은 자유의 과실을 만끽하게 된 사회가 바로 후기
근대적(포스트모더니즘적)사회인 셈이다. 사회가 이 단계에 이르면 어떻게 남아 있는 부정성을 더 축소시킬 것인가보다 부정성의 퇴각이 남긴 빈
공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사람들의 더 큰 관심사가 된다. 인간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커다란 자유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대답까지 자동적으로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병철은 우리의 당면 위기가 궁극적으로 부정성이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병철은 근대가
철저하게 퇴치하려고 싸워온 부정성이 사실은 인간의 삶을 떠받쳐온 버팀목이었다고 본다. 싸워야 할 적으로서의 부정성도, 또는 반드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자연적 전제로서의 부정성도, 모두 인간의 삶에 일정한 위치와 방향과 의미를 정해주는 중요한 기능을 해왔다는 것이다. 부정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반면 오늘날 막대한 자유 공간을 확보한 인간의 의지는 정박할 닻을 내리지
못하고 방향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그것이 이 시대가 당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불투명성의 옹호> 역자 김태환 해제 中-
부정성은 긍정성과 대척점에 서 있다.
과잉 긍정이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었듯, 지나친 부정성의 부정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위협한다.
너무나도 손쉽게 나와 비슷한 것과 익숙한 것만을 취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우리는 지나친 부정성의 부정이야말로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깊이 숙지해야만 한다.
나와 다른 것과 낯선 것 심지어 불편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접촉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새롭게 하고 가치를 창출하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의 개별적 직접성에 대한 부정을, 무한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타자의 부정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긍정성은 "죽은 존재"로 쪼그라든다.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관계"에서 탈출하는 정신만이 경험을 할 수
있다. 고통이 없고, 타자의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만 과다한 경우에 경험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어디나 돌아다니지만 경험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수를 세지만 이야기 할 줄 모른다. 사람들은 온갖 것에 대한 정보를 얻지만 어떤 깨달음도 얻지는 못한다. 타자에 직면할 때
찾아오는 문턱의 감정, 즉 고통은 정신의 매체다. 정신은 고통이다.
-p186~187 中-
나는 올 한해가 시작되는 즈음에 소박하지만 나름 의미 있는 '한해 목표'를 세운 바 있다. 그 목표 중 하나가 바로 멘토를 만나는
것이었다.
멘토란 누구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존의 지식 위에 우뚝 서 있는 나를 뒤흔드는 사람이다.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려는 나를 그 질서 너머 또 다른 질서가 존재한다는 걸 일깨워주는 사람이다.
자연수 너머에는 정수가 있고 정수 너머에는 유리수가 그리고 유리수 너머에는 무리수가 있으며, 숫자의 끝으로 알았던 무리수의 세계 너머에
허수와 미적분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다.
기존 지식과 질서에 대한 부정과 도전은 파괴가 아닌, 더 큰 세상과 조우하기 위한 용기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다.
이 책을 만나려고 올초부터 나는 그렇게 멘토를 갈구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