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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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에 이어 <투명사회>를 읽었다.

쉽지 않은 용어들과 개념들로 읽기가 쉬운 책은 절대 아니지만, 반드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피로사회>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열정'이 어떻게 자기착취적 노동으로 변질되어 가는지를 고발했던 저자는 <투명사회>에선 투명성을 강조하는 '투명사회'가 어떻게 감시와 통제를 체계화시켜나가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투명성은 열정과 마찬가지로 긍정성을 대표하지만 이러한 긍정성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오히려 상호 감시를 조장하게 된다.  '전부 공개하라!'고 투명성을 요구하는 건 그만큼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이 팽배해 있는 소위 '불신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여, 국가기관이건 국회의원이건 기업이건 개인이건 할 것없이 투명성이라는 이름 하에 상대방을 발가벗기고 스스로도 발가벗고 있다. 이처럼 서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사회는 점점 더 투명해지고 있다.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한병철, <투명사회> p26~27 中-

 

평소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과 투명성을 곧잘 연관짓곤 하던 나, 멘탈 붕괴 제대로 경험했다. 

 

투명하게 정보(혹은 '사실')가 공개되서 우리가 얻은 건 뭘까?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투명해진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과거보다 얼마나 더 행복해졌을까?

 

'모르는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다. 

'알면 알수록 좋다'라는 인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말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더 나은 선택과 결과를 얻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는 게 병'이라는 말처럼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올바른 선택을 방해하여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와 사실에 집착하는 건,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면 손해'라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우리사회의 집단심리구조는 불평등한 사회를 거쳐온 구성원일수록 '평등'과 '공평'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는 한편으론 평등지향적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강력한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일정한 평등치에 도달한 사회에서 지나치게 투명성을 강조한다면 오히려 '획일화'와 '통일성'으로 나아가기 쉽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경쟁하듯 자발적으로 투명성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을 공개하고 드러내 놓는다. 바로 '전시사회'의 모습이다.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트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않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

-P34~35 中-

 

인터넷의 개인 블로그나 SNS를 보라.

개인의 사생활들이 얼마나 신속하고도 보기 좋게 올라오고 있는가. 마치 온라인 쇼핑몰의 상품들을 바라보듯 지인이 올린 SNS 속 사진들을 훑어보는 우리 개개인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오늘의 통제사회는 특수한 파놉티콘적 구조를 보여준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 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피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든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주체가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가발전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를 노출할때,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 날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한병철, <투명사회> p26~27 中-

 

노출증과 관음증 그리고 포르노적 과시...

다소 거칠고 불편한 표현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사회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정의한 문장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마치 시장에 전시된 상품을 바라보듯 서로가 서로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너무나 개인적인 사생활들이 서로 제한없이 공유되기 때문에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선마저 무너졌다. 경계가 없어졌으니 더욱 친밀해졌다. 서로 모르는 것 없이 너무 친한 사이일수록 상처를 주고받기 쉬우며 서로에 대한 존경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폐해는 뜻밖에 크고 깊다.

 

타인을 존경하는 사람은 함부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존경의 전제는 떨어져 있는 시선, 거리의 '파토스'이다. 오늘날 존경심이 사라지면서 거리를 알지 못하는 구경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은 스펙터클의 특징이다. 스펙터클의 어원인 라틴어 동사 spectare는 거리를 둔 배려와 존경(respectare)없이 관음증적 태도로 쳐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p115-

 

존경은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 익명성과 존경은 양립할 수 없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촉진되고 있는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하고 있다. 악플 역시 익명적이다. 바로 이 점에 악플의 폭력성이 있다. 이름과 존경은 서로 엮여 있다. 이름은 인정의 기반이다. 인정은 언제나 기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책임지기, 신뢰하기, 약속하기와 같은 행위 역시 기명성과 연관되어있다. 신뢰란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p117~121 中-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근원이 다름 아닌 바로 지나친 '친밀감'에서 비롯됐다는 저자의 지적에 소름이 돋을만큼 공감했다.

 

진정 어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낯익은 가족이나 오프라인 친구와는 의미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낯선 불특정 대중과는 불안정하고 불규칙적인 '소통'과 '접속'을 이어간다. 

 

왜?

서로 존중할 필요가 없으니까... 즉, '만남'에 있어서 어떠한 '의무'나 일말의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감정과 느낌을 드러냄으로써, 즉 영혼을 노출함으로써 영혼의 투명성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 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제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 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가지 표현 형식이다. -p73~74 中-

 

서로의 체온을 느끼기 위해 다가가지만, 상대에게 닿자마자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반대쪽으로 통과하여 나온다. 이제 대인관계는 마치 SF영화 속 한장면처럼 투명하게 이루어진다.

 

인터넷 컴티 활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하리라. 동일한 관심사로 이루어진 컴티 안에서 조금만 다른 의견을 내는 회원에게 얼마나 많은 분노의 댓글이 쏟아지는지를...

 

그렇다!

우리는 너무도 손쉽게 격분한다. 격분하여 댓글을 달고 마녀사냥식 인신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같은 감정적인 격분으로는 사회의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모인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한곳을 향해 행진하는 시위군중이 아닌, 그저 일시적이고 단말마적인 불특정한 '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격분의 물결은 사람들의 주의를 동원하고 묶어내는 데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하지만 매우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운 까닭에 공적인 논의와 공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한다.

격분사회는 스캔들의 사회다. 이런 사회에는 침착함, 자제력이 없다. 격분의 물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반항기, 히스테리, 완고함은 신중하고 객관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대화도,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반면, 분노는 일정한 행동을 촉발하기에 서사적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격분의 물결에서 나타나는 감정인 화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디지털적 격분은 행동도 이야기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행동의 힘도 펼치지 못하는 감정적 상태일 뿐이다. 강력한 의미에서의 분노는 감정적 상태 이상의 것이다. 분노는 기존의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렇게 해서 분노는 미지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격분하는 군중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량과 중력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하지 못한다. -P124~126 中-

 

사실, 대다수 사람들이 인터넷 컴티의 무의미함과 예의 없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고 소통하는데 있어서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의 효과에 대해선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저자의 해석대로 투명사회가 통제사회요 감시사회이며 전시사회고 격분사회일지라도 이제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시대에 진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저자는 투명사회의 도래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던 인류가 '자유로움'를 최고의 가치로 정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류의 진화는 곧 자연으로부터 오는 제약과 사회로부터 오는 제약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후기근대사회(포스트모던이즘)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더 한층 자유로워졌다. 인터넷 역시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인류에 의해 개발되고 받아들여졌다.

 

 

그릇에 담겨 있는 물은 자유롭게 흘러가지 못하고 갇혀 있으니 부자유스럽다. 반면, 그릇에 담겨 있지 않은 물은 자유롭게 흐른다. 그렇지만 이처럼 아무것에도 담겨 있지 않은 물은 자신을 가두는 '틀'이 없어서 자유로운 대신, 땅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리기도 쉽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을 가두는 '틀'이 실은 물의 소멸을 막아준 '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담'을 한병철은 우리의 자유를 거스르는 '부정성'이라고 표현한다. 다음은 이 책을 번역한 역자의 해석이다. 다소 길지만 철학도들도 울고 간다는 이 책  <투명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인용하기로 한다. 

 

부정성 개념은 한병철의 저술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꼽는다면 '타자', 즉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의지와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것, 나에게 거역하는 것,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혐오스러운 것, 심지어 나를 공격하고 파괴하려고 위협하려는 적, 이 모든 것이 부정성의 범주에 속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부정성과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문명의 진보는 곧 부정성의 축소인 것이다. (...)

 

사회적 차원과 자연적 차원에서 모두 부정성의 축소 과정이 충분히 진행되어 개개인이 그것이 낳은 자유의 과실을 만끽하게 된 사회가 바로 후기 근대적(포스트모더니즘적)사회인 셈이다. 사회가 이 단계에 이르면 어떻게 남아 있는 부정성을 더 축소시킬 것인가보다 부정성의 퇴각이 남긴 빈 공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사람들의 더 큰 관심사가 된다. 인간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커다란 자유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대답까지 자동적으로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병철은 우리의 당면 위기가 궁극적으로 부정성이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병철은 근대가 철저하게 퇴치하려고 싸워온 부정성이 사실은 인간의 삶을 떠받쳐온 버팀목이었다고 본다. 싸워야 할 적으로서의 부정성도, 또는 반드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자연적 전제로서의 부정성도, 모두 인간의 삶에 일정한 위치와 방향과 의미를 정해주는 중요한 기능을 해왔다는 것이다. 부정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반면 오늘날 막대한 자유 공간을 확보한 인간의 의지는 정박할 닻을 내리지 못하고 방향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그것이 이 시대가 당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불투명성의 옹호> 역자 김태환 해제 中-

 

부정성은 긍정성과 대척점에 서 있다.

과잉 긍정이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었듯, 지나친 부정성의 부정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위협한다.

너무나도 손쉽게 나와 비슷한 것과 익숙한 것만을 취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우리는 지나친 부정성의 부정이야말로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깊이 숙지해야만 한다.

나와 다른 것과 낯선 것 심지어 불편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접촉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새롭게 하고 가치를 창출하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의 개별적 직접성에 대한 부정을, 무한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타자의 부정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긍정성은 "죽은 존재"로 쪼그라든다.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관계"에서 탈출하는 정신만이 경험을 할 수 있다. 고통이 없고, 타자의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만 과다한 경우에 경험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어디나 돌아다니지만 경험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수를 세지만 이야기 할 줄 모른다. 사람들은 온갖 것에 대한 정보를 얻지만 어떤 깨달음도 얻지는 못한다. 타자에 직면할 때 찾아오는 문턱의 감정, 즉 고통은 정신의 매체다. 정신은 고통이다.

 

-p186~187 中-

 

 

나는 올 한해가 시작되는 즈음에 소박하지만 나름 의미 있는 '한해 목표'를 세운 바 있다. 그 목표 중 하나가 바로 멘토를 만나는 것이었다.

멘토란 누구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존의 지식 위에 우뚝 서 있는 나를 뒤흔드는 사람이다.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려는 나를 그 질서 너머 또 다른 질서가 존재한다는 걸 일깨워주는 사람이다.

자연수 너머에는 정수가 있고 정수 너머에는 유리수가 그리고 유리수 너머에는 무리수가 있으며, 숫자의 끝으로 알았던 무리수의 세계 너머에 허수와 미적분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다.

기존 지식과 질서에 대한 부정과 도전은 파괴가 아닌, 더 큰 세상과 조우하기 위한 용기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다.

 

이 책을 만나려고 올초부터 나는 그렇게 멘토를 갈구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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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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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알려진 책이다.

진보 혹은 양심적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저자가 제대로 알려주는 진짜 경제이야기다. '경제'라고 하니 뭔가 거창해보이지만 실은 '밥벌이'(고상하게는 사회생활이라고 하지...)을 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깨닫게 되는 잔혹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가 되건만, 학교에서는 노동자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경제학 역시 경제 주체를 생산자와 소비자로만 구분하기 때문에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기보다는 '소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낮은 소득을 벌충하기 위한 강도 높은 노동은 인간으로서 자존감까지 갉아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낮은 소득과 장시간 노동이 공존하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소득-장시간 노동이 존재하는 다른 이유 한 가지를 더 들자면 소비자들이 자신의 편익을 극대화하고자 한다는 것, '톨레랑스(tolerance)'가 매우 작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직접 물건을 사서 들고 오기보다는 자기 집 현관까지, 그것도 빠른 시간 안에 배달되는 상태를 반길 것임에 틀림없다. 그 소비자가 택배노동자보다 더한 강도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라 하더라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이렇듯 쉴 새 없이 충돌한다. 물론 소비자들에게 '톨레랑스'를 가지라고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착한 소비'나 '윤리적 소비'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경제 자체가 끊임없이 이윤을 늘리기 위한 구조로 탈바꿈해왔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p138~140 中-

 

이 부분을 읽으면서 격하게 공감했다. 

확실히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경제가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어째서 더 피폐해지기만 하는지...?

취업스펙은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정규직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은 왜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는지...?

노동계에서는 왜 대기업 정규직의 권익만 수호할 뿐,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외면하는지...?

가장 절실하게 연대와 도움이 필요한 자영업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노동자'가 아닌 '소자본가'로 인식하면서 몰락해 가는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현실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정신없이 혹은 열심히 일만 할 뿐, 현실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 일만 하느라 책 읽을 시간조차 없다. 책 읽을 시간은 커녕 이런 책이 출간되어 있기나 한건지 인터넷을 검색할 짧은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숙지하고 있던 바다.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내가 새롭게 깨달은 건, 나를 포함하여 짬을 내서 이 책과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노동의 혜택을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우리가 이런 책들을 읽고 생각을 깊고 폭넓게 하면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이런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일만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건비가 오르지 않는건,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는 건, 쥐꼬리보다도 더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면서 '자기착취식'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착취식 노동'이라는 표현이야말로 신자유주의 구조 속에서의 노동을 잘 설명해준다.

과거에는 생산의 3요소 중,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을 소유한 노동자간의 계약 '관계'가 성립되었다. 하여, 자본과 노동의 소유 구도가 명확했다. 반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본질은 노동자이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자본가인 '거래'가 성립된다.

 

00택배 유니폼을 입은 택배기사들은 00택배소속 직원이 아니다. 택배기사들이 사용하는 택배 차량은 00택배회사 소유가 아니라 개별 택배기사들의 소유다. 그러므로 택배 기사들은 자본(차량)을 소유한 자본가임 셈이다. 

 

많은 학원강사들은 학원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개인사업자들로 퇴직금은 물론이고 4대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엄연한 개인사업자 즉 '사장님'이거나 그 이름도 거창한 '프리랜서'이다.

 

회사의 영업사원도 출판사의 편집자도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개인 사업자들이다.

 

일한만큼 능력만큼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미사여구로 이들의 노동은 착취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잔혹한 진실이 담겨 있다. 그건 바로 과거에는 사장이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건, 그들이 리스크를 감수하기 때문이다. 즉, 장사가 잘 안 되도 직원 월급을 책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처럼 '고용'이 아닌 '거래'로 노동 형태로 바뀌면서 사장이 당연히 짊어져야하는 책임 즉 리스크를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극적인 효과가 숨어 있다. 그러니 마치 노동에 따른 소득이 적은 건 개인의 무능력과 게으름의 소산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자기착취식 노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이와 같은 것들을 알게 되자, 나는 조급함에 더 빨리 책장을 넘겨나갔다.

마치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을 읽듯이...

그러나 추리소설은 끝까지 읽으면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지만 이 책은 끝까지 읽어도 문제 해결책을 알려 주지 않는다. 물론, 저자가 해결책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일상에 균열을 내라!'는 저자의 주문은 무지개처럼 어렴풋하고 까마득하게 여겨질 뿐, 도저히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얼마전 TV를 통해 본, 어느 인문학자의 마무리 말이 함께 떠오르면서 허탈해졌다.  

 

여러분!

돈을 위해 살고 싶지 않으시죠?! 인간답게 살고 싶으시죠? !

그렇다면 생산과 소비,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직장에 출근하지 않으면 즉 노동을 '보이콧'하면 자본주의는 더이상 굴러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모두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회사(공장)가 망하기 때문에 역시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생명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강신주 TV 강연 中-

 

다소 황당했다.

이건 돈을 거부할 선택의 여지가 우리에겐 아예 없으며 마찬가지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 역시 없다는 말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일하기 전에 몰랐던 것들'을 알려주었던 저자가 내놓은 해결책이라면 해결책이요 대안이라면 대안이 나에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당장 우리의 일터를 꿈의 직장으로 만들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일의 어느 순간 어느 국면에서 우리의 꿈을 실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관계를 거래로 만들어가는 경향을 한 번에 되돌리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거래 상대와 동료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한다면 짧은 순간이나마 어느 순간에는 거래에서 관계로 역전하는 것도 가능하다. 비록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고 금세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다고하더라도 그러한 시도를 끊임없이 할 때 비로소 장기적으로도 새로운 삶의 방식이 등장할 전망을 열어젖힐 수 있는 것이다.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p274 中-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므로 쉽게 찾을 해답이 있을 턱이 없다는 점 역시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건, 그만큼 저자의 대척점에 서 있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절박하고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엉뚱한데로 흘러가긴 하지만...

 

대기업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동남아 어느 도시에 머물면서 현지인을 가정부와 운전사로 고용하고 외동딸은 현지 국제학교에 입학시킨 친구가 오랫만에 한국에 나와 학교 동창들을 모아놓고는 한국의 사교육 한심하다는 둥... 해외에서 바라본 한국은 정말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둥... 한국인은 가족이기주의가 너무 심하고 양보할 줄 모른다는 둥... 심지어 자신은 한국에 있을 때에도 영어 사교육 한번 시키지 않았다는 둥...  입을 놀려대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 아는 것도 많고 유식하고 성격도 활발하고 다 좋은데...

왠지 이 친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이라도 진실처럼 안 들린다.

한국 사회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할 때,

그럼, 연봉 1억이 넘는 신랑을 둔 넌, 이 사회를 위해서 무슨 양보를 했고 어떤 희생을 했는데? 하고 되묻고 싶었다. 

 

근데, 정말 뜬금없이 이 좋은 책을 읽고 나서 왜 이런 못된 생각이 떠오른 걸까?

 

(누구는...

정년과 두둑한 퇴직금이 보장된 국립대 교수이며,

이런 말 저런 말 다 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없고,

오히려 잘만하면 사회적 명성과 인세로 한몫 챙길 수 있겠지...???)

 

혹시,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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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소시오패스 - 차가운 심장과 치밀한 수완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M. E. 토머스 지음, 김학영 옮김 / 푸른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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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무서운 책을 읽었다.

소시오패스(sociopath)가 직접 쓴 소시오패스에 대한 책이었다. 

 

저자는 백만 명 이상이 방문한 블로그 소시오월드닷컴의 운영자로 M.E. 토마스라는 이름은 물론 당연히 가명이다. 저자에 대해 공개된 건, 성별과 나이 그리고 종교와 직업 정도다.

 

내 호기심을 끌었던 건, 저자의 성별이 뜻밖에도(?) 여성이라는 점과 그녀가 금욕주의로 유명한 몬르몬교도라는 점이었다.

 

여기서 잠깐 소시오패스에 대해 언급하자면,  소시오패스는 사이코패스(psychopath)와 함께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일컬으며, 양자의 차이는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굳이 구분하자면, 사이코패스는 범죄 용어로 자주 등장하여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반면, 소시오패스는 드라마나 영화 속 캐릭터 등을 통해 최근에야 알려지기 시작한 용어라고나 할까? 다만, 내가 보기엔 사이코패스는 잔악한 범죄자의 전형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반면, 소시오패스는 '멋있고 쿨한 성격'으로 미화된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전형적인 특징은 '공감 능력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입장 등에 대해서 느낄 수 없고 느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극단적으로 이기적이며 대인관계를 이용하는데에 능숙하다.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타인의 감정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거짓과 위선으로 타인의 행동을 조정한다. 

 

클렉클리는 사이코패스를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느끼고 소망하며 기대하고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탈월한 능력을 갖춘 반사회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사실상 사회에서 그들을 분간하기는 어렵다. 사이코패스는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에 탁월하다. 클렉클리가 말하는 사이코패스는 비범하리만큼 매력적이고 위트가 있다. 또한 차분하면서도 말이 유창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물론, 이처럼 '온전한 정신의 가면' 뒤에는 거짓말쟁이, 교활한 조종자, 책임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이 숨어 있다.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워 잘 흥분하고 똑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는 사람, 자아도취에 빠져 감정적으로 진정한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대개 자연스러운 감정을 조악하게 모방한다. 클렉클리는 이 독특한 인격적 특징의 조합은 사이코패스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범죄의 세계에서 악명 높은 사람들의 특징과도 일치한다고 인정했다.

나는 반세기도 훨씬 전에 쓴 클렉클리의 임상학적 프로파일보다 더 내 안의 소시오패스를 잘 설명한 글을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M.E. 토마스 <나, 소시오패스> p55~56 中-

 

그런데 불행하게도 무한경쟁사회에서는 소시오패스의 특성들이 탁월한 성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사람들을 정리해고해야 하는 기업의 CEO... 

롤러코스터를 타는 객장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어마어마한 투자를 할 수 있는 펀드매니저...

의뢰인의 유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교묘하게 배심원과 판사의 공감과 동정을 얻어내느냐에 집중하는 변호사...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외과의사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빚독촉을 하는 채권추심원...

그리고 포커패이스에 능해야하는 운동선수와 달콤한 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일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까지...

 

이 책의 저자 역시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로펌회사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근무하다가 현재는 법학과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30대 초반의 새파란 나이에 그것도 보이지 않는 성차별을 극복해야하는 여성으로서 말이다.

 

이 쯤해서 고백해야겠다.

솔직히 나,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공부하지 않아도 우등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며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서 유일한 여성 드럼 연주자로 활약하다가 충동적으로 타악기를 전공으로 선택한 뒤, 대학 졸업후 빈둥거리다가 남들은 죽도록 공부해야 합격한다는 명문 로스쿨에 들어가는가 하면, '난다 긴다' 하는 수재들을 제치고 우등 졸업과 동시에 LA최고의 로펌에 신참 변호사로 입사한다. 그런데 일이 재미없어서 회사 경비로 테니스 레슨 비용을 결재하는 등 악행을 일삼다가 2년만에 해고된다. 그리고 대학교수로 화려하게 부활....

 

나는 필요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삶의 성공 지표를 손에 넣었다. 시험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고 이력서는 완벽했다. 내 출세 곡선은 그야말로 눈부실 지경이었다. 사기처럼 보여 더 눈부셨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런 게임을 좋아했고 어렸을 때도 전 과목 A학점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를 짜릿하게 만든 것은 A학점을 받을 최소한의 노력의 선이 어딘지 찾는 일이었다.

변호사가 되는 것도 똑같았다. 애초에 나는 진심으로 변호사가 될 마음이 없었고 그저 변호사처럼 연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p55~56 中-

 

소시오패스 기질은 내게 타고난 경쟁적 이점이다. 뇌에 독특한 사고방식이 내장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내 능력을 확신한다. 또한 나는 집단 내에서 영향력과 힘의 흐름을 결코 놓치지 않은 매의 눈을 갖고 있다. 덕분에 중대한 위기가 닥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장담컨대 세상에는 소시오패스에게 유리한 일이 매우 많다. 소시오패스인 나는 대중 앞에서의 연설이 두렵지 않고 감정적 폭식을 할 가능성도 별로 없다. 가끔은 내게 공포나 감정이 있는지 나조차 모를 때가 있지만 그런 것이 보통 사람과 달리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두려움이 없고 확신에 가득 찬 모습, 카리스마, 무자비함, 뛰어난 집중력처럼 21세기에 성공의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특질을 보이는 소시오패스는 성공 확률이 높다. 나는 이러한 특질을 이용해서 부적응 어린이에서 재능있는 연주자로, 성공한 법학도로, 두둑한 연봉을 받는 변호사로 계층 이동을 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특질이 장차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M.E. 토마스 <나, 소시오패스> p219 中-

 

게다가 그녀는 스스로 밝히길 타고난 미모는 아니지만 반짝이는 눈동자와 호기심 어린 표정 그리고 새하얀 이가 보이도록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수준높은 철학과 미학을 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윈드 서핑 등 악기와 스포츠에도 능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단연코 눈에 띄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녀에게 반해서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을 일일히 손으로 열거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단다.

 

사랑은 어려운 속임수가 아니다. 섬세함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사랑에 너무 굶주려 있기 때문에 평범한 술수, 즉 가벼운 접촉, 감정이나 관심을 표현하는 모호한 몇 마디, 헤어질 때의 열정적인 포옹 한 번이면 충분하다. 드라마 한 편만 봐도 사랑을 알 수 있다. 덧없는 탓에 세상에서 가장 감질 나는 것이 사랑이란 사실을 말이다.  (......)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아무라도 사랑할 수 있고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한동안(하룻밤, 일주일 혹은 몇 주라도)만이라도 삶의 이유로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수단에 비해 사랑이 더 많은 힘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을 더 많이 이용할 수는 있다. 사랑에는 당길 수 있는 지렛대와 누를 수 있는 버튼이 많고 방법도 무한하다. 사랑은 내가 일방적이고 직접적으로 고통을 야기했다는 씁쓸한 기분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나는 그들을 조종하거나 속였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 M.E. 토마스 <나, 소시오패스> p295~302 中-

 

 

이처럼 그녀는 고백과 변명 사이를 교묘하게 왔다갔다 한다.

심지어 그저 재미삼아 타인의 인생을 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살인이나 기타 치명적인 불법행위를 단 한번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을 강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학교 선생님이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을 아동성희롱범으로 몰아 고소한다든지, 자신에게 빠진 남자를 꼬드겨 그 남자를 짝사랑하는 또 다른 여자에게 거짓 고백을 하게 만들어 그녀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려놓고도 일말의 반성이나 후회는 없다.

 

왜?

그녀는 소시오패스니까... 

 

특히, 나는 대다수 소시오패스들이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고려하여 자신의 성향을 부인하거나 감추고 싶어할 때 그녀는 당당히 소시오패스 관련 블로그를 오픈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넘치는 자신감과 우월감...

남앞에서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구...

자신들은 비정상적인 뇌구조를 타고나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소시오패스를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은 만인의 자유를 위해서도 옳지 못하다는 논리...

 

(신이시여, 이들을 어찌하시렵니까?)

(이들을 기어이 인류의 'X맨'으로 만드시렵니까?)

 

 

이기적인 소시오패스적 성향이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생존에 훨씬 더 유리하다. 그래서 어쩌면 소시오패스적 DNA가 끈질지게 살아남아 후손에게 유전되고 또 유전되어 먼 미래에 현생 인류를 대체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불을 사용할 줄 알았으며 혹독한 빙하기에도 살아남았던 네안데르탈인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미개했던 현생인류에게 멸종당했고, 고도로 발달된 제국을 만들었던 잉카와 마야인들이 유럽인들에게 멸종되었듯이 말이다.

 

전체 인구의 4%, 즉 스물 다섯 명 중 한명이라는 그들...

지극히 소수여서 우려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인간이므로 다수로부터 이해받고 심지어 보호받아야 하는걸까?

인간에게 부여되는 생존추구권과 행복하고 사랑할 권리를 그들에게도 똑같이 부여해야 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얼마전에 본 영화의 한장면이 떠오른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서 유인원의 우두머리 시저에게 총을 쏜 후 반란과 전쟁을 일으킨 코바가 인간의 도움으로 살아난 시저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다.

까막득히 높은 철제 빔에 간신히 매달린 코바가 마지막으로 시저의 양심에 호소한다.

"Apes do not kill Apes.(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

 

평소 자신의 신념이 담겨 있는 이 말을 들은 순간, 시저의 눈빛이 잠깐 흔들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꼭 붙잡고 있던 코바의 손을 놓는다. 

"You are not Apes.(넌, 유인원이 아니다)"

 

 

소시오패스에게는 심장은 있지만 양심은 없다.

 

양심이란 때론 거추장스러워서 휴지조각처럼 내던지고 싶은 것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반드시 부여잡아야하는 인간의 마지막 감각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양심을 일컬어 오감과 육감에 이은 제7감각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제 인간(human)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거나 직립보행을 한다거나 하는 특징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 바로 양심의 유무를 포함시켜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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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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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만큼 전세계를 무대로 고령화를 전반적으로 다룬 책은 없는 것 같다.

단행본으로는 다소 부담스러운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한줄로 요약하면, '이제 인류는 의료보건 기술의 발달(수명연장)과 개개인의 선택(저출산)이 불러온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을 피할 수 없다.'라고 하겠다.

 

 

날씨가 따듯한 남부의 플로리다 노인주거단지로 이주하는 북미의 노인들....

 

한때 독일 등으로 젊은층을 수출(?)했으나 노령연금을 받는 계층이 늘어나면서

제정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

 

'자식이 늙은 부모를 봉양한다'는 유교식 사고방식에서 일찌감치 벗어난 일본의 고령사회 풍경...

 

연금과 부동산 폭등 혜택을 누리고 있는 도시거주 노년층과 

외지로 떠난 자식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간신히 살아가는 농촌 노년층의 격차가 극명한 중국...

 

 

각 지역마다 고령화는 발등의 불이 된 것 같다.

 

미국은 드넓은 영토와 자원 그리고 여전히 세계 각지역 사람들이 선호하는 나라로, 고령화와 저출산에 따른 젊은 노동력 부족 문제를 그나마 잘 헤쳐나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미국 역시 일자리 창출과 빈부격차 등을 겪고 있지만,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노년층을 돌보는 일자리를 필리핀과 동유럽에서 건너온 여성 인력이 채우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일자리에 대한 미국인 특히 젊은층의 눈높이는 여전히 높아 보인다.  

 

이에 반해, 일본의 경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얼마전 일본의 무연사를 집중적으로 다룬 NHK의 <무연사회>라는 책을 통해 일본 고령사회의 단면을 살펴본 나로서는 각 나라의 고령화 현황과 대응을 다룬 부분들이 유난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유럽과 북미 선진국과는 달리, 일본은 외국인 이민이나 인력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수동적인 나라다. 이와 동시에 '세계 최장수 국가'라는 타이틀도 함께 갖고 있다.

그렇다면 초고령사회인 일본은 고령 인구를 어떻게 부양하고 있는 걸까?

중국처럼 자식에게 부양의 책임을 지우는가?

 

<무연사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은 한국, 중국처럼 동아시아 국가지만 유교 전통에 입각한 가족 구조와 가치관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은 노후를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후 고도성장을 통해 획득한 자산과 연금 등에 힘입어 전문주거단지나 각종 기관들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을 돌보는 인력은 외국인이 아닌 거의 일본인이라고 한다. 일본의 젊은층은 부모 세대가 공장이나 회사에 취업했던 것과는 달리, 제가방문목욕 서비스나 노인전문도시락 배달 등등의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특이했던 점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남미로 이민을 갔던 일본인 후손들을 역이주 시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미국, 스페인의 노인들이 타인종 혹은 타민족에 의해 돌봄을 받고 있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한편, 중국의 고령 문제는 중국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70억 세계 인구의 1/5 혹은 1/4를 차지하는 중국의 인구구조 변화는 전 세계에 미치는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 자체적으로도 인구는 자고이래로 통치계급의 주요 현안이었다. 식량 부족 문제를 걱정했던 중국 정부는 1970년대 후반부터 '한자녀 낳기'정책으로 인구 증가를 억제해왔으나, 얼마 전 이 정책의 폐지를 공식 선언한 바 있다. 지난 30년간 젊고 값싼 노동력에 의지해 경제성장을 이룩한 중국으로선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는 부양해야 할 인구의 증가와 함께 일할 노동력의 부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릴 확률이 크다.

 

중국은 복지제도가 공평하고 일률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역간 격차도 너무 큰 나라다. 여기서 지역간 차이란 도시와 농촌에 대한 차별적 정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내가 알기로, 중국의 퇴직금제도는 도시 근로자 위주로 구축되어 있다. 이는 농지를 국가로부터 임대 형식으로 소유(?)하고 있는 중국 농민은 기본적으로 퇴직연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는 바, 연금이 필요없다는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의 도농 분리 정책은 소수의 도시인들에게 혜택이  쏠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국가로서는 통치세력을 지탱해주는 도시의 엘리트 집단만 부양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농민을 경제와 국가 발전의 '희생양'으로 삼은 측면이 없지 않다.  

 

물론, 저자는 중국의 농촌에는 여전히 자식이 부모를 부양한다는 유교적 전통이 짙게 남아 있어 정부의 이와같은 정치적 결정이 현재까지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는 윈샹옌의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사행활>이란 책을 인용하여, 외동이 자녀가 출산한 손주를 돌봐주느라 바쁘고 힘겨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중국 노인들과 부모로부터 경제적 도움과 무급 육아 및 가사 노동을 제공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중국 젊은층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중국의 노인 특히 농촌 노년층이 처한 비극을 놓치지 않는다.

끝으로, 저자는 현인류를 문명과 기술 발달의 혜택을 누린 첫번째 장수세대이며 고령화는 분명 인류 최고의 행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여러나라와 지역을 두 발로 뛰어다니면서 두 눈으로 직접 살펴본 저자에게 비친 고령화는 책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쇼크'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책에서는 한국의 상황을 직접 겨냥하여 기술한 부분은 없지만 한국 역시 고령화의 위협과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고 하겠다. 

일본처럼 노년층이 경제적 육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력과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으면서, 동시에 부모 부양이라는 유교적 전통은 중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노인으로 산다는 건 비애와 우울을 넘어 비참함의 극치가 아닐까 싶다. 

 

 

굳이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더라도, 무병장수와 수명연장에 사활을 걸었던 인류의 이기심이 결국은 고령화라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류의 보건과 건강 증진을 위해 노력했던 일부 정책 결정자들과 제약회사 및 의약분야 연구자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인류 발전과 진보를 기대했던 그들의 행동이 오히려 자칫하면 전인류를 혼란과 비극으로 빠뜨릴지도 모르는 고령화에 단초를 제공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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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 -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NHK 무연사회 프로젝트 팀 지음, 김범수 옮김 / 용오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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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일본 NHK가 방송한 특집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은 책이다. 우리나라도 EBS의 <명의>처럼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거나 지속적인 관심을 일으킬 만한 방송 프로그램의 경우 이처럼 책으로 엮어내기도 하는데, 이는 영상매체보다는 책이라는 형식이 '시간적 제약'을 덜 받기 때문일 것이다.

 

무연사회(無緣社會)란, 말 그대로 인연이 끊어진 사회를 말한다. 

이와 같은 무연사회는 필연적으로 '무연사(無緣死')와 '무연감(無緣感)'을 불러온다. 무연사란 '홀로 맞이한 죽음'과 '아무도 인수하지 않아 갈 곳 잃은 유골'을 모두 포괄하며, 무연감이란 가족 및 사회적 인연이 아주 미약하거나 완전히 끊어졌다고 느끼는 감정 상태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건, 혼자 살면서 늙어가는 노년층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도 무연감을 깊게 느끼고 있으며, 무연사를 자신의 머잖은 미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NHK 취재팀은 무연사회의 등장과 심화를 핵가족화와 미혼율 및 저출산율의 증가 탓으로 돌리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일본의 무연사회를 야기시킨 가장 커다란 원인은 이와 같은 사회적 원인 뿐만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라는 일본인 특유의 인식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 책에는 '짐이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가족이 없는 사람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 심지어 자식이 있는 경우에도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홀로 살다가 결국 무연사를 맞이하는 일본인의 모습은 같은 동아시아 국가이자 유교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다소 충격적이다. 특히,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남에게 절대로 폐를 끼치지 않는 일본인'의 모습을 성숙한 시민의식의 상징이자 본받아야할 태도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인에 반해서 한국인은 지나치게 타인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수시로 사생활을 침해하는 예의 없는 민족이라고 여겨져왔지 않았던가?

명절이면 예외없이 나타나는 '교통체증'과 인맥, 지연, 학연 등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식구 제사람 챙기기'라는 의식구조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사회보장제도와 시민의식이 우리보다 훨씬 발전한, 일본의 현실은 애잔함을 넘어 당혹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빨리 배우고 모방하는 우리사회의 특징(?)으로 볼 때, 무연사는 더 이상 이웃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죽은지 한참만에 발견되는 소위 '고독사'가 언론매체를 통해 알려지고 있는 현실 역시 이와 같은 불안감이 터무니 없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또 다른 점은 고독하게 노년을 살아가는 일본의 노년층들은 비록 외로움을 느끼긴 하지만 극단적인 경제적 빈곤을 호소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연사회 속 무연자들을 위한 NPO(비영리단체)의 결성과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최소한 일본에서는 비록 홀로 늙어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굶어 죽을 걱정, 얼어 죽을 걱정만큼은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라는 부러움이 든 것 또한 사실이다.

 

이에 반해, 우리 사회는 다른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노년층의 외로움과 고독사라는 사회적 현상은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무관심 이면에는, 고독하게 살아도 좋고,,, 홀로 죽음을 맞이해도 좋으며,,, 죽은 후 유골이 무연고묘에 안장되어도 괜찮으니,,, 일단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만이라도 배 고프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만 해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게 비단 나만의 환청(幻聽)일까?

 

일본의 현실에 애잔하게 떨리던 가슴이 우리의 현실 앞에선 여지없이 막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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