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사 강의 (리커버 에디션) -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박노자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러시아 근현대사를 알고자 한다면 러시아 혁명을 피해 갈 수는 없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러시아는 근대 혁명 사상의 실험장이었던 만큼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러시아 혁명사는 중심 키워드로 작용한다. 

그럼, 일단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러시아의 근대사에서부터 출발해보자.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자마자 러시아는 민중 혁명으로 전제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러시아의 사회와 경제 구조도 여전히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개혁의 대상인 황제와 귀족이 개혁의 주체가 되었으니 제대로 된 개혁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는 서구 열강 중 하나로 등장하지만 당시의 러시아는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후발주자인 일본에 비해서도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던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우선 지식층의 사상적 뒷받침과 민중의 시위 및 항쟁 그리고 새로운 체제라는 혁명 이후의 대안이 필요하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던 가장 큰 이유는 세 번째 요소 즉 혁명이 성공한 후 구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와 이를 실행할 정치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혁명이 싹트기 좋은 시대였다.

우선 마르크스라는 걸출한 사상가가 있었고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층이 탄생했다.

새로운 사상은 구체제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유럽의 젊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도시 노동자에게도 퍼져 나갔는데 특히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현대화가 가장 늦었던 러시아의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레닌과 트로츠키 등 많은 혁명가들이 러시아 출신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1) 러시아의 혁명가들


러시아의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모범생이었던 레닌이 반체제 사상에 빠져들었던 건 큰형이 황제 암살 모의를 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레닌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피해 일찍부터 해외에 나가 활동을 하게 되는데, 처음엔 독일 사민당의 카우츠키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차후에는 독일 사민당의 보수화를 비난한다. 



1914년까지만 해도 레닌은 엥겔스의 바통을 이어받아 독일 사민당의 공식적인 이론가가 된 카를 카우츠키(1854~1938년)를 자기 일생의 사상적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카우츠키는 레닌의 후원자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사상적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제2의 아버지이기도 했어요. 또한 레닌은 독일 사민주의자들을 자신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조해야 할 이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 사민당은 덩치를 키워나가면서 국회에서도 더 많은 지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체제에 안주하면서 철저히 보수화되고 있었지요. 사민당의 이론가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년)은 노골적인 수정주의 노선으로 선회하면서 잉여가치론을 부정했어요. -49쪽 



저자는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독점화 경향 이론을 획일적으로 받아들였다면서 창의력이 부족한 기계론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비판한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독점화 경향 이론을 고스란히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작은 기업이 큰 기업에 먹히고, 큰 기업이 인수 합병을 통해 더 커지고 ,국가가 하나 혹은 몇 개의 기업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기업과 국가가 하나가 되고, 자본가들이 이윤 추구를 위해 여러 나라에 있는 국가 규모의 기업을 합쳐나가고, 그래서 결국 세계화된 초국적 기업이 등장하면 그때 사민주의자들이 총선을 통해 권력을 잡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할 것도 없고, 그저 이 일련의 과정을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에 합법적으로 정권만 잡으면 되는 거예요. 사회주의를 거의 자연발생적이면서 불가역적인 것으로 본 셈이죠. -51쪽  



그런데 흥미로운 건, 마르크스가 예상한 대로 자본주의는 독점화 경향 이론에 따라 진행되어왔는데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20세기 초 독일 사민당이 정당으로써 일정한 의석수를 차지하자 투쟁과 혁명을 포기하고 보수화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전세계 노동자 농민의 권익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쪽으로 일찌감치 변질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러시아 사민당(사회민주노동당)은 혁명을 위한 전위적 정당을 주장한 레닌과 전국민을 참여시키는 대중 정당을 주장한 마르토프가 충돌하면서 각각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갈라서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파로 알려진 볼셰비키는 사실 투표에서 단 한 표 차이로 소수파로 알려진 멘셰비키를 이긴다. 레닌의 전위정당론이 독재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을 감지한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에 가입했지만 밋밋한 투쟁 방식에 불만을 품고 탈퇴하여 어느 정파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홀로 대국민 연설과 팸플렛 등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러시아도 참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 경제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동원령까지 발령되자 러시아 민중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른다. 

마침내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정마저 무너뜨리고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전쟁을 중단할 수도 없었고 민중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었다. 이때 레닌의 볼셰비키를 비롯해 사회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이 10월 혁명을 추진해 권력을 쟁취한다. 그 유명한 볼셰비키 혁명은 사실상 무혈혁명에 가까웠다.  



레닌은 처음부터 러시아 농민을 혁명의 세력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는 농민이 대다수(약75%)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드넓은 지역에 거주해서 조직화가 힘들었던 데 비해 도시노동자는 25% 남짓이었지만 이들은 대규모 생산공장에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촌보다 침투하기도 쉬웠고 농민보다 동원하기도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물론, 농민에 비해 문맹률 또한 낮았던 것도 주효했다. 



한편, 대중 연설의 귀재였던 트로츠키는 당 내에서의 영향력보다는 러시아 민중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레닌은 당시 가장 시급한 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로츠키를 소환한다. 트로츠키는 처음엔 외교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독일에게 엄청난 영토 할양을 약속하고 연합국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늪에서 빠져나온 뒤, 국방 인민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뛰어난 전략 전술로 구세력과의 내전마저 승리로 이끈다. 

국내 혁명에 성공한 볼세비키는 이제 본격적으로 혁명의 세계화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론 사상가로도 뛰어났던 트로츠키가 이때 주장한 게 '불균형 복합 발전론'이다.   




트로츠키는 정치적 불만이 크면서 노동자의 집중도가 높아서 급진적 사상이 퍼지기 쉬운 나라가 생기고, 그런 나라가 공동의 세계적 과정에 던져질 때 약한 고리가 되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질 위험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후진적인 열강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지요. 또한 국가 간의 경쟁과 전쟁 등이 계속되고 한 나라 안에서도 내부 세력들의 괴리가 지속된다면 혁명의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지겠지요. 당시에 독일의 사민주의자들은 선진국이 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봤습니다. 반면에 트로츠키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뚜렷하면서도 복잡한 나라, 후진성과 선진성이 교묘하게 얽히고설킨 나라, 가장 약하거나 가장 강한 나라가 아닌 그 중간의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거예요. 이게 바로 트로츠키의 '불균형 복합 발전론'입니다. 
20세기 후반에 혁명이 일어났던 나라인 이란을 살펴보면, 선진국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공업이 발전되어 있었고 지배계급의 장악력은 비교적 약한 나라였습니다. 도시 하층민과 농민들의 누적된 불만, 미국의 침략을 막을 만큼의 강력한 군사력, 기존 노동자계급의 좌파적 기반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트로츠키가 주장한 불균형 발전론과 잘 들어맞는 사례지요.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에서 민중운동이 활발했는데요,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은 선진성과 후진성이 공존하는 국가 주도형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파탄에 이르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민중운동 발전의 원동력이 커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혁명기의 러시아보다는 경제 상황이 좋았고, 제1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교육적 바탕도 있었으며, 국내의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 점 등 때문에 혁명이 만회될 수 있었습니다. -113~114쪽



트로츠키가 1940년도에 사망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1925년 레닌 사후, 트로츠키가 당 내에서 따돌림을 받고 권력이 스탈린에게 넘어간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춘 탓에 독불장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항우가 결국 범인(凡人)에 가까웠던 유방에게 무너진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저자 역시 스탈린에 대해선 '지극히 평범했다'라는 말로 개인적 설명을 일축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트로츠키가 레닌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세계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 즉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은 아주 날카로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은 다소 편향적이었어요. 사실 모든 인간에게 이런 측면이 있을 겁니다. 트로츠키의 사상이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 논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혁명의 국제성을 강조한 것은 분명 높이 살 만합니다. 하지만 국가나 당 등 유사 국가적 조직에 내재된 위험성에 상당히 무감각했고, 이를 과소평가한 채 국가 지상주의적 사고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어요. 대중의 민주적 자율성 문제를 간파하지 못한 것 역시 아쉬운 지점이고요. -122쪽



마르크스는 철학자 레닌은 사상가라고 한다면, 트로츠키야는 혁명가라고 하겠다. 

끝까지 자신을 믿었고 타협할 줄 몰랐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마저 파괴시키곤 하는데 트로츠키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극으로 마감한 것 또한 혁명가답다. 



반면, 레닌이나 트로츠키에 비해 스탈린은 평범 그 자체였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극심한 자격지심과 인간적 질투심을 끝까지 극복하지 못했다. 그가 트로츠키에 대해 취했던 지나친 조치들 역시 정신적 콤플렉스의  발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가 혁명의 완수 대신 국가의 안정을 최우선시했던 것 역시 인간다운 조치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위험에서 빠져나오면 더큰 모험을 하기보단 안위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 역시 국민을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스탈린에 의해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세상은 마치 수 백 년 된 사회처럼 빠르게 관료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제2차 세계대전만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최고 권좌에 머무르기는커녕 비참한 말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스탈린 체제는 분명 억압적이었지만, 제정러시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민 포섭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체제에 포섭된 대중들은 억압을 느꼈지만, 그에 대한 불만을 정치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어요. 결국 스탈린 치하의 소련 체제는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대민 포섭 능력이 뛰어나면서 고속 압축적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 단위의 非시장적 개발주의로 규정하는 게 정확할 겁니다. -161쪽



스탈린이 대중에게 묵인된 독재를 펼칠 수 있었던 건 5개년경제개발계획이 성공했기 때문이고 공산당 내에서 지위를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건 숙청 때문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숙청은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승진의 기회가 되었다. 혁명을 직접 겪었고 그 감각을 간직한 사람들 즉 스탈린이 非혁명적이라는 걸 알아차릴 만한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결국 혁명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간부로 발탁(?)되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년)다. 물론, 그 역시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전임자의 시신 위에 자신이 앉는 권좌를 올려놓는 걸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을 지지했고 나라가 해체된 뒤에도 과거 소비에트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는 향수에 젖어 있다.  마치 '그래도 전두환 노태우 시절이 서민들이 살기엔 가장 좋았다'는 식의 말들이 한국 사회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소련을 오랫동안 뒷받침해온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산업 경제 팽창이 만들어낸 폭력과 포섭의 연결고리였어요. 비교해보자면 박정희 시대의 한국은 소련이나 북한보다는 포섭의 기제가 너무나 약했습니다. 소련에서의 무상교육 같은 것을 한국에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요. 우골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 시대에는 대학 교육을 받으려면 부모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했습니다. 소련에서는 비록 양질은 아니었지만 노동자를 위한 무상의료 제도도 실시되었어요. 반면에 박정희 시대에 의료제도는 철저히 시장에 맡겼지요. 소련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 연금제도가 자리 잡는데, 박정희 정권은 군인과 공무원에 한해서만 연금제도를 시작했고요. 박정희는 복지 혜택이라는 포섭 정책을 스탈린과는 비교 못할 만큼 훨씬 더 작게 실시한 겁니다. -167쪽



성장과 독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폭력과 포섭 또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전자가 한국을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후자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지역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결국, 20세기에 접어들어 인류가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던 두 개의 정치체제는 이름만 다를 뿐 구동되는 원리는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미군과 영군군이 프랑스에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공산당은 독자적인 군사력으로 독일군이 패퇴된 뒤에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겁니다. 프랑스 부르주아에게는 공산당을 막아설 힘이 없었어요.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과 함께 프랑스로 들어온 샤를 드골(1890~1970년) 장군이 부르주아 공화국을 부활시켜도 소련을 따르는 프랑스 공산당으로선 그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을 이렇게 놓쳐버린 것이지요. 보수화된 소련이 유럽의 부르주아들을 살렸다고도 볼 수 있고요. 소련은 이미 보수화되어 있었지만 사회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유럽 사회주의자들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자본가들은 이런 상황을 만든 소련에게 내심 고마워했을 거예요. -183쪽



그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레지스탕스 운동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엔 소련을 위한 투쟁 즉 '소련 지키기'의 성격도 강했다.

1958년 쿠바의 카스트로 1965년 베트남의 호찌민 그리고 1973년 칠레의 아옌데를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사회주의는 공식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제, 공산주의 혁명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까?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발달하면 공산주의 혁명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했던 마르크스는 '자본의 위력'은 알았지만 '돈의 위력'은 몰랐다. 그래서 자본의 위험성과 자본에 의한 개인의 파괴만을 강조했다. 개인이 돈에 매수되어 자본의 치맛폭에 스스로를 맡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여야할 적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진 게 아니라 개인주의에 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앞으로 영원히 살아남을까?

자본주의의 수명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에 달려 있다. 자본으로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까지는 살아남을 것이다. 문제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이다. 북유럽식 복지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완벽한 대체나 대안이 될 수 없다. 결국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복지도 경제 즉 자본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인류는 비록 사회주의 혁명엔 성공했지만 단 한번도 사회주의를 실현시켜보지는 못했다고...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대안은 여전히 사회주의가 될 수 있노라고... 


맞는 말이다.

만인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인류가 탄생한 순간부터 품어왔던 꿈이니까. 




현실적 위력은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진 생명력은 다 타버린 화로 밑바닥의 불씨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진화의 시간이 아닌 역사의 시간에 그것이 큰 불길로 다시 살아날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좌절한 인류의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에 대한 꿈은 언제든 사람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100쪽




이 책의 부제 역시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이다. 어떻게 다른 미래를 한번도 꿈꿔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꿈꾸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러나 '꿈만 꾸고 살 수도 없다.'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혁명이란 마치 사랑의 서약과도 같아서 지킬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걸 서로가 잘 알기에 지켜지지 않았다고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혁명이란 이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