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혁명가의 회고록 빅토르 세르주 선집 1
빅토르 세르주 지음, 정병선 옮김 / 오월의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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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890년에 태어난 빅토르 세르주라는 낯선(?) 인물이 1906년부터 1941년까지 겪었던 내용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그는 벨기에에 망명한 러시아 혁명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노동과 독서로 세상을 배웠다.

자연 과학이나 인문적 기초 교육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차별적 독서와 자유분방한 토론은 혁명가를 탄생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으리라.

아나톨 프랑스와 알베르 리베르타드에 열광하고, 장 조레스의 <위마니테>를 읽던 저자는 자연스럽게 아나키스트가 된다. 참고로, <위마니테>는 공산당 중앙기관지다. 



우리는 아나키즘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나키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했고, 동시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아나키즘이 밝힐 수 없는 삶의 측면이란 있을 수 없었다. 적어도 우리한테는 그렇게 보였다. 사람은 가톨릭교도일 수도 있고, 신교도일 수도 있으며, 자유주의자, 급진파, 사회주의자, 심지어 생디칼리스트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인생, 나아가 전반적인 삶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적당한 신문을 골라 읽는 것으로 충분했다. 만약 그 또는 그녀가 더 엄격하다면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는 경향과 조류를 지지하는 카페에 자주 드나들기만 하면 된다. 아나키즘은 모순으로 점철되었고, 각양각색으로 산산이 분열돼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말과 행동의 통일을 요구했다. (기실 말과 행동의 통일은 모든 이상주의자가 요구하는 바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 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시에) 가장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조류를 택했다. 우리가 채택한 아니키즘은 자체의 혁명 논리를 통해 혁명의 필요성을 폐기해버렸고, 거기에는 변증법의 논리가 단호하게 동원됐다. 우리는 온건하고 학술적인 아나키즘을 혐오했고, 어느 정도는 그 때문에도 언행일치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60~62쪽





벨기에의 아나키스트는 이제 파리로 향한다.

예술과 자유의 도시 파리에 도착한 저자는 뭐라도 이룰 수 있을 것 같고 뭐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콤했던 첫키스는 어느덧 끈적거리는 숨막힘으로 바뀌고 만다.




파리는 "탈출구가 없는" 도시였다. 파리는 엄청난 정글이었다. 그곳에서는 원시적 개인주의가 모든 관계를 지배했다. 우리의 것과는 방식이 달랐고, 그래서 위험천만했다. 우리의 개인주의는 긍정적 의미의 다원주의적 생존 투쟁이었다. 우리는 빈곤의 굴욕에 작별을 고했지만 다시금 그것과 싸우고 있었다. 스스로에 충일하라는 계명은 소중했고, 아마도 그게 가능했다면 고귀한 성취였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절박한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스스로에 충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욕구가 절박하면 다른 사람들에 공감하기보다는 짐승처럼 바뀐다. 우리는 음식과 거처와 입을 옷을 혼신의 힘을 다해 마련해야 했다. 그런 다음에는 또 읽고, 생각할 시간도 여투어야 했다. 집도 절도 없이 뿌리가 뽑혔거나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이상주의로 "몸이 달은"(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무일푼의 젊은이인 우리로서는 이 문제를 사실상 해결할 수가 없었다. 다수의 동지가 이내 '불법 행위'에 빠졌다. 사회의 주변부가 아니라 도덕성의 주변부에서 살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착취하지도, 착취당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자기들이 계속해서 그 둘 다임을 깨닫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이제 쫓기게 된다. 그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을 때 감옥에 가기보다는 자살을 택했다. -64쪽




"목숨을 잃는 게 나쁘다거나 빼앗는 것이 범죄일 만큼 삶이 그렇게 대단한 은전이나 혜택인 것은 아니다.(아나톨 프랑스)"

자유는 곧 무질서요 퇴폐였다.

감옥에서의 5년에 관해서는 '피정'이라는 말로 간략하게 표현한다. 사람은 자신을 무너뜨릴 만큼의 고통과 직면해서 무너지지 않으면 더한층 강해지듯, 감옥은 그의 정신을 순화시키기보단 되려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활동과 노력만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도 않는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가장 사적인 사유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수천 가지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

당신은 스스로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도 않는다. 당신은 우리 대다수가 하는 가장 내밀한 생각이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결부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더구나 발언하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대변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는 사람이다. 다만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게는 아나키즘의 패배가 아주 분명하게 이해됐다. 개인주의자들의 일탈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했다. 하지만 나는 탈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109쪽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맑스의 예측과는 달리 농업국이었던 유럽의 변방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 러시아계 이방인의 마음을 이보다 더 곧추시키는 일은 또다시 없었으리라.

베를린을 거쳐 1919년 1월 마침내 꿈에 그리던 페트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당도한다.

그토록 기대했던 혁명의 나라 러시아에 대한 저자의 첫인상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우리는 얼어 죽은 세계로 들어섰다. 눈이 반짝이는 핀란드 역은 사람이 없었다. 레닌이 장갑차 위로 올라가 군중 연설을 한 광장은 황량한 설원일 뿐이었다. 주변 가옥들도 사람이 안 살았다. 넓고 곧게 뻗은 간선 도로들과 얼음장 위로 눈을 이고 있는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보자 하니, 버려진 도시 같았다. 우리가 맨 처음 목격한 사람은 회색 외투를 걸친 수척한 군인이었다.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숄을 두른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유령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안중에 없다는 듯 조용한 채였다.

우리는 시내로 향했고, 유령 같은 삶의 흔적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지붕 없는 썰매를 굶주린 말이 끌었다. 눈밭 위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자동차는 거의 한 대도 안 보였다. 행인은 드물었고, 있다고 해도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표정이었다. 얼굴들이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넝마를 걸친 군인들은 밧줄을 단 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런 부대가 단위 부대를 상징하는 적기를 들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탁 트인 시야의 끝 얼어붙은 운하들 앞으로 버티고 선 제정 시대의 궁전들은 활기가 없었다. 더 육중한 다른 궁전들도 볼 수 있었는데, 그 옛날 열병식과 행진이 이루어진 광장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왕실 처소의 세련된 바로크 풍 파사드는 거무칙칙하고 진한 빨강으로 칠해져 있었다. 극장, 군 사령부, 옛 부처 건물들은 전부 제정 양식이었는데, 오랫동안 빈 채로 방치되었음에도 열주 덕분인지 웅장하다는 느낌이었다. 성 이삭 성당의 도금 지붕도 보였다. 아치형의 지붕을 떠받친 붉은색 화강암 기둥들이 장대한 위용을 뽐냈다. 페트로그라드는 황폐한 도시였고, 높이 솟은 돔은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듯했다. 우리는 표트르-파벨 요새의 총안과 노란 첨탑을 바라보았다. 바쿠닌과 네차예프 이래로 투쟁을 거듭하다가 거기서 스러져간 온갖 혁명가가 우리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세계가 이제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페트로그라드는 추위의, 굶주림의, 증오의, 그리고 인내의 메트로폴리스였다. 주민이 불과 1년 만에 100만 명에서 겨우 70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우리는 수용 시설에 도착했고, 흑빵과 말린 생선을 기본 식량으로 배급받았다. 우리 가운데서 그때까지 그렇게 참담한 음식을 먹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53쪽




이곳이 고골과 푸시킨과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크의 나라란 말인가.

그토록 열망했던 혁명이 성공했건만 빈곤은 더한층 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제정 러시아 시절의 소박한 활력마저 잃어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신흥 관료를 간단히 언급한 편지에는 "소비에트의 쓰레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줄곧 악화된 것은 공안통치가 지속되면서 참을 수 없는 잔혹 행위가 보태졌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투사들이 감탄이 나올 만큼 올곧고 객관적이고 사심이 없지 않았다면, 그들이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그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겠다고 단호히 결의하지 않았다면 희장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위대하고, 지적으로 탁월하다는 점이 무한한 자신감이라는 악습으로 부상했다. 이중의 책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때 깨달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교훈이었다. 사회주의는 적과 구체제에 맞서 싸우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체의 내부 반동과도 싸워야만 한다. 혁명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암괴처럼 보일 뿐이다. 허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면, 최선의 요소와 최악의 요소가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급류와 같다. 반혁명의 흐름이 실재한다는 것도 불가피한 현실이다. 혁명은 구체제의 낡은 무기를 쓰도록 강요받는다. 그런데 그 무기는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자체의 폐해, 월권, 범죄, 반동의 순간들을 경계해야 한다. 혁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비판, 반대, 시민적 용이가 사활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1920년에 그런 요소가 크게 부족했다.

레닌이 자주한 유명한 말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는 영예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민족에게 닥치다니 참으로 불운하다" -225~226쪽




볼셰비키는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혁명엔 성공했지만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엔 실패했다. 당연하다. 볼셰니즘은 혁명을 위해 특화되었을 뿐 사회 조직과 운영을 위한 정치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한 혁명가가 저절로 훌륭한 정치가가 되는 건 아니었다.

저자는 교조주의에 빠진 스탈린주의와 멘세비키에 대한 볼셰비키의 숙청과 독재를 비판했지만 만민의 평등과 행복은 볼셰비키만이 달성할 수 있다고 고집하면서 끝까지 볼셰비키 당원으로 남았다.




어느 누구도 각자의 지분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혁명이 일어나 관료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바로 우리 손에서 새로운 전제 국가가 출현해 우리를 분쇄하고 있으며, 결국 온 나라가 끽 소리도 하지 못하는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에 관해서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우리 대오의 그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알마아타 유배지에서 침잠 중이던 트로츠키도 소련 체제가 여전히 우리의 것이라고 단언했다. 비록 병들기도 했어도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적이고, 여전히 사회주의라는 것이었다. 당이 우리를 제명하고, 투옥하고, 살해했지만, 그 당은 여전히 우리의 당이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당 덕택이었다. 우리는 당을 위해 살아야 했다. 왜냐하면 당을 통해서만 혁명에 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당을 사랑하다가 침몰하고 말았다. 우리는 당을 사랑해서 반란에 나섰고, 그러다가 우리 자신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444쪽





1920년 백군과의 내전이 끝나기 전부터 전시 독재를 이어가던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끝낼 생각도 방법도 잊어버렸다.

농촌 인구의 50%는 집단농장 안에서 각종 직함을 가진 비농민이 되어 있었다. 거대한 관료주의의 탄생이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절대적으로 줄고 군인을 포함하여 농민의 노동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하나같이 볼셰비키 당원들이었고 배급 라인을 장악하고 배급품을 착복했다.

이들이야말로 혁명을 가로막는 반혁명 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반혁명 세력 척결을 위해 가동한 조직(체카)은 오히려 볼셰비키를 비판하는 정치 세력만을 잡아들였다.

자신의 부정부패를 가리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희생양을 찾는 것이고 최적의 희생양은 다름아닌 최고 권력자의 경쟁자와 다른 정치 세력이었다. 건전한 토론과 비판으로 쇄신을 거듭해오던 볼셰비키는 이런 식으로 급속하게 타락해 간다.


여러 번의 수색과 구금을 겪고 재판도 없이 볼가강 유역으로 쫒겨난 저자는 어린 아들과 함께 비참한 생존을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인간의 존엄마저 잃어갔고 작은 설탕 한 조각을 두고도 아귀다툼을 벌였다. 자급자족을 중시하는 농촌의 생산 구조를 무시한 채 콜호스(집단농장)로 만들고 헐값에 곡물을 강제 징발해버린 결과였다.



저자는 운이 좋았다.

여러 잡지들에 끊임없이 글을 투고하고 책들을 내서 외부 세계에 이름이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소비에트를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17년 전 소비에트에 처음 진입했을 때의 첫인상과 소비에트를 떠나 서구 세계에 진입한 순간 받았던 인상이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특히, 서구에서의 삶을 모르는 그의 아들이 받았을 충격이라니...




폴란드 국경을 넘어서자 예쁜 집들이 보였다. 파리, 베를린, 런던, 뉴욕에서 발행된 신문과 잡지가 가판대에서 팔리고 있었고, 철도원들의 복장이 말쑥했으며, 사람들의 표정은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다. 밤이 깃들자 조명이 켜졌고, 바르샤바는 장대한 위용을 뽐냈다. 간간히 박힌 파랑색 전등이 아취를 더했다. 마르잘코프스카 가를 걷는 사람들이 걸친 옷은 우아해 보였다. 번화가의 분주함에서는 무심함과 번영이 느껴졌다. 상점에는 사람들이 꿈꾸는 모든 게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변변찮은 협동조합과 비교해, 단연 돋보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마음이 아팠다. 나치가 장악한 독일을 횡단할 때는 기차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나만 한 돌출 교각에서 어떤 광장을 잠깐 볼 수 있었다. 베를린의 슐레지엔 역 인근이었던 그 광장을 나는 알고 있었다. 독일은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곳이 효율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깔끔했다. 건물들은 사생활을 지향하거나 순전히 크기에 몰두했고, 정원은 공들여 조성돼 있었다. 나는 유대인 여행자 몇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은 삶이 두렵다고 대꾸했다. 독일에서는 테러가 아주 비밀스럽게 행해졌고, 나라도 아주 컸다. 그런 나라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 중이던 사람들이었으니, 체제의 어두운 면을 거의 모른다는 게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아무튼 내가 러시아인이었고, 그래서인지 그 별것 없는 내용조차도 그들은 나와 나누는 걸 저어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련을 영광스런 나라도 인식했다.

우리는 브뤼셀에 도착했고, 니콜라스 라제레비치의 집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라제레비치는 부모가 러시아인인 생디칼리스트 투사로, 수즈달에 투옥되었다가 소련에서 쫓겨난 친구였다. 그는 실업수당으로 먹고살았다. 시청에 가서 실업자들에게 최소 가격으로 제공되는 식사를 받아먹었다. 그가 내게 나눠준 식사는 진한 스프, 스튜, 감자였고,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러시아에선 당 고위 관료들만 이렇게 먹을 수 있는데!" 그의 집은 방이 세 개였고, 자전거와 축음기도 있었다. 그 벨기에인 실업자는 소련에서 보수가 괜찮은 기술자만큼 쾌적하게 살고 있었다. -579쪽





1937년 당시 유럽은 대공황을 겪고 서서히 회복기에 있었으며, 새로운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한편으론, 러시아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놀라움과 함께 부러움을 보이고 있었다. 저자가 열차 안에서 만났던 독일인처럼 말이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실제 삶은 혁명 전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예술이나 사상 방면에선 더한층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에서는 이를 눈치채는 사람들이 드물었는데 여기에는 볼세비키의 외교전술이 주효했다.

볼셰비키의 최대 목표라 할 수 있는 전세계 공산화를 위해선 볼셰비키의 타락상과 소비에트의 빈곤과 독재가 외부에 들어나선 안 되었다. 소비에트 볼셰비키는 다른 나라의 공산당 조직에 보조금을 지급함과 동시에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서 선전전을 펼친다.


버나드 쇼는 너무 나이가 든 나머지 소비에트의 실상을 보고도 보지 못한다. 웨버 부부는 찬양 일색이었고 유명 작가인 존 스타인 벡은 긴가민가 의심했으며, 버트런드 러셀만은 소비에트의 허상을 폭로한다.

그 많은 지식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수 있었는지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었다.

일단, 자신이 지지했던 공산주의 혁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지식인은 일단 사고와 검증을 통해 확정된 것에 대해선 철회하거나 오류가 발생해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틀렸다고? 그럴 리가 없다.'가 바로 지식인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이들의 독단과 이기심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생명을 잃게 만들지에 대해선 '내 알 바 아닌 것'인 셈이다.

그렇게나 많은 인문 철학서들을 읽고 자기 희생과 인류애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종교의 원리와 공산주의의 공통점을 분별해내지 못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볼셰비키 당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자와 같은 이들의 양심 선언이나 폭로에 대해서까지 귀를 닫았다는 점이다.



빅토르 세르주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며 살았고 그 꿈을 품고 죽었다는 점에서 골수까지 혁명가였다. 그는 정말 볼셰비키가 만민의 평등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을까?

일단, 평등과 행복 사이에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다.

'모두가 평등해지면 다같이 행복해진다'는 말은 타고난 신분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사회에서 내세를 약속하면서 민중을 달래고 안심시키던 성직자들의 전용 멘트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남들과 같지 않을 때 불안해하고 같아지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남들과 같아지면 그 순간부터 남들과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걸 공산주의자들은 인식하지 못했거나 무시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패배한 게 아니라 개인주의에 패배한 셈이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인내의 연속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크고 작은 사건들의 실타래 속을 헤맸다.

'공인된 러시아 혁명사가 아니라 한 개인의 체험담을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개인의 삶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조형된다는 점이다. 당연한 말인데 이게 참 실감되지가 않는다. 현재 나의 하루 하루가 사회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 사회 구조는 다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결정된다는 걸 쉽게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빅토르 세르주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19세기와 결별하고 20세기를 맞이했던 유럽의 일부분을 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당시 우리나라 조선인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국제적으론 테러리스트로 알려진 안중근 의사와 이봉창 열사며, 가두시위 주모자들 중 한 명이라고 소개되었을 뿐인 유관순 열사 등등... 개개인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는 과정은 몇월 며칠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역사적 사건을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분명 지어낸 이야기지만 또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파친코>가 그 어떤 역사다큐멘터리보다도 더 당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실증하는 것처럼....



삶은 언제나 역사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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