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것 처럼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 아무리 조물주가 사람을 만드셨고 자유의지를 주셨다고는 하나, 현실에서는 슈퍼 히어로 같은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정직하고 바보같은 사람은 대체로 남들한테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삶은 왜 이토록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들 투성일까. 근면하고 성실하게 내 할일만 묵묵히 하다보면 좋은 날이 올거라 믿었던 기대가 흔들릴 때면,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지곤 한다. 갑자기 기분도 울적해지고 말이다.       

 
 주인공 래리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아픔을 가진 인물이다. 래리에게 죽음은 일종의 트라우마 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양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대체적으로 평범한 어린 시절을 거쳐 청년으로 자란다. 하지만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군에 자원하여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된다. 군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단짝이 한순간 눈앞에서 목숨을 잃는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래리는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 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p.84)"

 
 인생이란 무엇이고, 선과 악이란 무엇인지...  래리는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질문과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래리가 겪은 비극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가 왜 무기력해 보이는 생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지, 왜 예전의 그로 돌아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전쟁 직후 미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가고 있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기회를 노리던 시기였다. 전쟁이 휩쓸고 간 후, 정신적으로는 황폐함을 겪었을지 몰라도 물질적으로는 한없이 풍요로운 시기였던 것이다. 래리는 자신을 위해 펼쳐진 미래를 버리고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이 책은 무엇보다 시점이 독특하다.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을 통한 1인칭 시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지적 작가 시점도 아닌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던 작가인 '나'의 관점으로 씌여졌다. 그런 이유로 특정 인물에 대해 설명하거나 사건을 이야기할 때 주관적이기도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는 회고식으로 서술되었고, 먼 과거와 최근의 일들이 시간순서와 상관없이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책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일 것이다. 래리의 주변 인물들 부터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을 살펴보면 사랑보다 현실적인 안락함을 선택했던 약혼녀도 있고, 내면적인 것 보다는 철저하게 보여지는 삶을 살았던 인물도 있다.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음탕했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몸을 파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말로 표현못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여인도 있었다. 저마다 다른 이상과 가치관을 가진 모습을 통해 삶이란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고 미묘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게 영원한 존속을 요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p.459)"


 책을 한참 읽을 때만 해도 화자인 '나'가 서머싯 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래리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머싯 몸은 화자로서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현하기도 하고, 래리인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다시말해 화자와 래리 두 사람다 서머싯 몸인 것이다. 책을 읽은 직후 작가가 전쟁에 참여했었고 방랑벽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확실해 졌다. 끝으로 '나'가 래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까지도 그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이것은 래리의 대답이자 노작가의 고백이기도 하다. 
 

 짧은 순간 삶에 있어서 답이란 것이 있긴 한 것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깨달음' 을 얻기 위한 과정이요, 그 답이란 것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허락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를 리뷰해주세요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윤용인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아무리 이해할려고 노력해도 안되는 남편의 미스테리한 행동 몇가지가 있다. 요즘 시절이 얼마나 수상한데 하며 밤길 혼자 다니면 안된다고 난리치는 사람이 모임에만 가면 오밤중에 전화해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는 고기집에서 술먹었다는 사람이 집에만 오면 밥 달라, 라면 끓여달라 저녁 내내 굶은 사람처럼 먹을 것을 찾는다.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몇날 며칠을 졸라서라도 꼭 가져야만 하고, 어떤 일을 하든지 '적당히' 라는 단어를 모른다. 가장 열받는 것은 툭 터놓고 이야기좀 할려고 하면 사람 말을 꼬아서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다. 들어오라고 전화하면, 나갈 때 붙잡지 않았다고 쌩 난리~ ;; 

 
  "겹핍이지 뭐... ^^"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는다. 어느날인가 단둘이 호프집에서 맥주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는데 '도저히 이해못할 행동'에 대해 이유를 물었었다. 자식 사랑이 극진하셨던 시부모님 덕분에 자신만큼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도 없을 거라 말하면서도 어머님이 일을 하셨기 때문에 늘 외로웠고 뭔가가 부족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한때는 숨 돌릴 결흘도 없이 지나가 버렸고, 중년에 접어드니 이런저런 압박감으로 다시금 공허감이 느껴지나 보다. 문제는 그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사람 '나'라는 사실. 허헛~ ^^ 사춘기 아들 키운다는 생각으로 마인드 컨트롤 하라는 조언이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닌 것이다.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책 읽으면서 내내 '희한하다' 라는 생각을 했다. 남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면...;; 아마도 중년이라는 공통점이 그 이유가 아닐까 추측하면서도 하여튼 내 남자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잘 설명하고 있어서 놀랐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기를 지금까지 남자의 심리를 다룬 책들을 살펴보면 외계인이나 외국인을 등장시킨 경우가 많았는데 이 책에서는 자신과 주변인물들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심리학 관련 책을 읽는다는 생각보다 그냥 '대한민국에서 중년 남자로 산다는 것' 정도에 해당되는 에세이 처럼 느껴진다. 

 
 내용중에 명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거나 누군가를 처음 소개받는 경우가 생기면 명함을 주고 받는 것이 예의처럼 되어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을 겪어 보기도 전에 명함 한장으로 결정나버리는 사회, 그 작은 종이 한장을 위해 오늘도 전쟁터 같은 사회로 발을 내딛는다. 그 외에도 가장이기에 감수해야하는 삶의 무게와 외로움, 사회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형'과 '아우'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자 보다 더 소심하다가도 때론 질투의 화신이 되는 남자들의 이야기에 줄곧 공감하면서 읽었다.

 
 "내가 발견했던 중년의 품격은 이런 것들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진 노인을 가장 먼저 부축하던 초로의 신사, 약소 모임 장소에 먼저 나와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던 머리 희끗한 나의 일 년 후배,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큰 파티 모임에서 호스트 역할을 완벽히 해내던 어느 선배의 세련된 여유에서 나는 중년의 품격을 봤다. (p.288)

 
 남자에게 중년이라는 나이는 그런 것 같다. 체력은 예전 같지 않지만 사회적으로는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해야 하는 시기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낙오자 취급받기 쉽고, 침 튀기며 정치인들 욕하다가도 가족을 위해서는 비굴함도 감수해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결과로 판단되는 삶을 산다. 하지만 저자는 중년의 남자에게 빠져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것이 '품격' 이라고 말한다.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멋진 차를 굴리는 것도 좋지만 삶에 있어서의 포커스라고 해야하나 '가치'를 어디에 두는지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 것이 있다면 적어도 내 남편은 보통의 범주에 드는 평범한 남자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근데 좀 억울하다. 나도 힘든데... 궁시렁 궁시렁~  이 참에 책 한 권 내버려? 제목은 '심리학 여자를 말하다' ㅎㅎ 이렇게 말하면서 웃고는 있지만 내 남자에 대한 솟구치는 측은지심을 주체할 길이 없다. ㅠ.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왕자의 귀환>을 리뷰해주세요
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 흔한 것이 장미라지만 '그 장미'는 오직 하나 뿐임을... "길들여 진다는 것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 이 말 한마디가 보석이 되어 내 심장에 박히는 순간 어린왕자와의 인연은 질기게도 이어져 왔다. 읽지도 못할 책을 욕심내어 쌓아가면서 때론 버거움을 느낄 만큼 활자를 읽으면서도 누군가 내게 '단 한 권의 책'을 말해달라고 하면 주저없이 <어린왕자>가 튀어 나온다. 왜 그럴까? 남녀노소 불문하고 세월의 흐름에도 변치않는... 어린왕자는 그렇게 만인의 왕자님이다. 

 
그런데 너무했다. 개그 프로에 어머님들 환상, 연인들의 환상을 깨주겠다던 코너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이 책은 잔혹동화이자 철저히 깨지게 만드는 내용이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그림 있지? 모자 처럼 생긴 것. 그게 사실은 말야~ 그래그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말할 줄 알았어. 근데 그거 알아? 보아뱀이 삼킨 것은 '돈다발'이야!!" 라고 말이다. 
 

작은 별에 살고 있던 남수와 주영은 은하철도를 타고 여행하는 나그네의 말만 듣고 자신들이 살아온 방식을 바꾸기로 한다. 이름하여 '신자유주의', 누구나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꿈을 이룰 수 있다는데 누가 혹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량은 많아지고 급여는 오르지 않고, 고용 안정도 보장되지 않는 계약직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별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까지 내몰린 두 사람은 나그네를 찾아 이유를 설명듣기로 한다. 

 
 저자는 말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사람 뒤통수 치는 것이라고, 이론적으로는 근사하지만 성공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는 가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들어 소금과 우산 모두를 생산하던 두 별이 자유무역을 하기로 하면서 한 쪽은 소금만, 또 한 별은 우산만 집중적으로 만들어 필요한 만큼 교환하기도 했다고 가정하자. 얼핏보면 생산력이 향상되고 보다 합리적인 무역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만약 한 쪽에 자연재해나 파업과 같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그로인한 경제적 타격이 다른 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두 별이 아니라 여러 별인 경우에는 우주적인 경제 불황이 닥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예는 책에 언급된 내용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남수와 주영이 여행을 하면서 방문한 별들은 이미 나그네가 퍼뜨린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황폐화 되어 있었다. 저자는 남수와 주영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자유무역의 허와 실, 경영자와 노동자, FTA 문제, 비정규직, 공기업의 민영화 등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진단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책에 수록된 만화들이 1999년부터 10여년간 여러 곳(주로 대학의 교지)에 연재된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도대체 무얼하고 있었는지. --;;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모든 국민은 평등하며 누구나 노력하면 기회가 주어지고 성공할 수 있다고 말이다. 오늘날 그 말을 믿는 젊은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부터 학원으로 내돌리며 공부에만 매달려야 하는 상황을 이겨내고 대학 졸업장에 각종 자격증까지 갖추어 사회에 나오면, 기다리는 것은 '실업', '비정규직' 이라는 차가운 현실이 아닌가.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거나 방관한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그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린왕자의 귀환> 만화라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제, 사회문제를 만화로 읽으니 생활 속의 일부분처럼 쉽게 이해가 된다. 각 장의 끝부분에 우석훈님의 해제를 통해 보다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룬 점도 좋았다. 결과적으로 피부에 직접 와닿으니 서글프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피튀기는 장면 하나 없는데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선진국에 의해 주도된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말한 믿고 덥썩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수정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조금은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중근 불멸의 기억
이수광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해마다 3.1절이면 기분이 우울하다. 독립을 위해 애쓰신 분들을 기리느라 마음이 숙연해지는 이유도 있지만, 그 때가 되면 어김없이 친일파의 후손과 독립 투사들의 후손이 비교되곤 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팔았던 사람들은 일제치하에서 호의호식한 것도 모자라 그 후손들까지도 잘 먹고 잘만 사는데 독립 투사들의 후손은 하나같이 비참하게들 산다. 가족이 독립 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못 먹고 못 배우는 등 온갖 고초를 다 겪은 것으로 모자라 자식에 자식까지 가난과 고통이 되물림 되고 있다. 
 

 광복 당시 국내에 세력이 없었던 이승만은 친일파들을 끌어모아 정권을 세웠고,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그 후로도 오늘날까지 우리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있다. 혹자는 말한다. 이미 지나간 일을 자꾸 들추어서 무엇하느냐고, 과연... 그럴까? 개인을 위해 나라를 버린 이들을 내버려두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신 이들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가 또다시 위험에 처했을 때 누가 자신을 내던지겠는가 말이다.  

 
 <안중근 불멸의 기억> 이 책은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된 책으로,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애써왔던 이수광님이 러시아 독립 운동의 대부 최재형과 안중근 의사가 활동했던 독립운동지를 둘러보고 글로 엮은 것이다. 다가오는 10월 26일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한다. 의거 당시의 나이는 불과 서른 한 살, 한 여자의 남편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솔직히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알지도 못했을 사실이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 

 
장부가 세상에 태어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대업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차가우나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장부가>, 안중근

 

  이야기는 러시아령 자루비노로 떠나는 페리호의 갑판에서 시작된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 직전에 썼다는 장부가를 떠올리며 출항을 기다리는 장면을 읽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한 것이 긴장감과 숙연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내용면에서 보면 기행문 형식의 글과 안중근 의사 1인칭 시점의 글이 교차되고 있다.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안중근 의사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는 내용으로 독립 투사 안중근과 한 인간으로서의 안중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아내를 그리는 마음이 애틋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 시대에 남성상과는 어울리지 않아 어색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전첵적으로는 재현이 적절하게 가미된 한편의 역사 다큐를 보는 듯 흥미로웠다. 

 
 안중근 의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결혼하여 처자를 둔 가장의 몸이었으나 일본에 유린당하는 나라를 두고 볼 수 없어 독립군을 조직하기로 한다. 최재형의 힘을 빌어 독립 자금을 마련하고, 일본에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동포들을 설득하여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도 거두었지만 쓰라린 패전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겪는다. 무장 투쟁에 실패한 후 한동안 방황하던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3년 안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죽이지 못하면 자결하겠다는 혈서를 쓴다. 그날의 의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직후 "우라 코레아!!(대한제국 만세)"를 외쳤던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독립군 소속이며 일본과의 전쟁 포로로 대우해 줄것을 요구하였다.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의 만행과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열거하며 사건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단순 살인범으로 몰았고, 단 여섯 차례의 불공정한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른다. 
 

 그날의 의거는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으며, 국제사회가 주목했던 세기의 사건이었다. 잊지 말아야 할것은 그날의 의거를 위해 희생했던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자금을 마련하는 것부터 의거 이후에도 많은 이들의 희생 뒤따랐다는 사실에 또 한번 마음이 숙연해 졌다. 안타까운 것은 죽은 후에라도 광복된 조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재형을 비롯한 연해주의 교민들이 유해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일본은 유족에게 조차 알리지 않고 매장해 버렸다고 한다. 책을 덮은 후에도 죄스러움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문득 학창 시절, 국사수업 시간이 생각난다. 방학을 앞둔 시점이라 다들 마음이 풀려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선생님께 노래를 불러달라며 떼를 쓴 적이 있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선구자'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고, 아이들은 멍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그 심각한 표정에 오히려 큭큭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1절이 끝나고 2절, 3절로 이어지자 웃음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가슴 뭉클함을 경험했던 기억이 난다. 

 
 비소설 분야 읽으면서 이렇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책을 읽으면서 '선구자'의 가사를 다시 한번 음미해보니 가사 한 구절마다 새롭게 다가왔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노라 다짐했던 선구자들, 이름도 빛도 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바친 이들을 떠올리니... 심장이 죄여오는 것만 같다. 안중근 의사는 그들을 대신하는 대명사로서 우리의 선조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지켜내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불멸의 기억, 불멸의 가치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둥근 돌의 도시 - 생각이 금지된 구역
마누엘 F. 라모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9세기를 상상해 본 사람이 있을까? 솔직히 십수년 뒤에 49세가 되는 내 모습도 예측이 안되는데 49세기라니...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지하게 생각이 많거나 아니면 멍때리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 돌이켜보니 아주 어릴 때는 머나 먼 미래에 대해 가끔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특히 ET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미래인들이 우주선을 타고 블랙홀로 빠져들어가 다시 현재로 온다는 그런 상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가면서 인생이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어느 순간 코앞의 일만 걱정하는데 급급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ET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ET의 외모가 미래인의 모습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미래에는 기계화로 인해 인간들이 몸을 움직일 일이 거의 없어지고, 근육같은 기관들이 퇴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키는 크지 않고, 팔과 다리는 마르고, 머리 크기는 그대로인 현대인들의 눈으로 보면 기형적인 모습이 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오히려 49세기가 되면 생각이 없어진다고 한다. 전 우주가 하나로 통합되고 사회 시스템이 완벽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범죄에서 사랑까지 고민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미래인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단조로움 그 자체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없는 단조로운 삶은 인간을 더욱 미치게 만들기 마련이다. 주인공 카르멜로 프리사스가 내리막길만 보면 내달리게 되는 이유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날도 내리막길이 눈 앞에 펼쳐졌을 뿐이고, 평소처럼 냅다 달렸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 앞을 달리는 한 남자를 발견하는 순간 경쟁심리가 발동하게 되었고 격렬한 몸싸움 끝에 두 사람 다 자동차에 치이고 만다. 알고보니 상대는 대통령의 가방을 훔친 도둑이었고 카르멜로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된다. 언론은 앞다투어 카르멜로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고, 사람들도 영웅 카르멜로에게 열광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세계의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자들의 음모에 휘말린 카르멜로는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내용 전개에 있어서는 미스테리, 추리소설의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너무 정신이 없고 산만하다. 이야기하다가 자꾸만 삼천포로 빠지는 수다쟁이와 함께 앉아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거기다 주인공만 보면 좋아라하는 여자들도 이해가 안되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친구가 자기를 납치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식의 허무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러고보니 주인공이 차에 치이고 붕대를 감고 깁스를 한다는 표현부터 49세기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인류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던가. 그 때 쯤이면 순간이동 기계도 나와주어야 하고, 치료 캡슐정도는 언급해줘야 되는거 아닌가 말이다. 49세기라는 설정은 파격적이었는데 상상력을 좀더 발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니까 블랙코미디, 라고 말하면 할말없지만 애초에 사라마구의 도시 시리즈를 연상하게 만든 제목이 문제라면 문제겠지.       

 
"이거 아시는지?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둥근 돌'에 불과하다는 것을. (p.226)"

 
둥글다는 것은 모호하다. 성격이 둥글다는 말은 두루 무난하다는 뜻이겠지만, 뭔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확실한 듯 하면서도 예측불가인 인간들처럼 이 세상은 그렇게 불확실함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둥글다는 것은 하나의 면위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고 다시 되풀이 된다는 의미도 된다. 오늘날이나 49세기나 물질적인 것은 변화할지 몰라도 인간의 내면 탐욕, 거짓, 욕망, 사랑, 희망... 이런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감정들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인간만이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