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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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것 처럼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 아무리 조물주가 사람을 만드셨고 자유의지를 주셨다고는 하나, 현실에서는 슈퍼 히어로 같은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정직하고 바보같은 사람은 대체로 남들한테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삶은 왜 이토록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들 투성일까. 근면하고 성실하게 내 할일만 묵묵히 하다보면 좋은 날이 올거라 믿었던 기대가 흔들릴 때면,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지곤 한다. 갑자기 기분도 울적해지고 말이다.       

 
 주인공 래리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아픔을 가진 인물이다. 래리에게 죽음은 일종의 트라우마 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양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대체적으로 평범한 어린 시절을 거쳐 청년으로 자란다. 하지만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군에 자원하여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된다. 군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단짝이 한순간 눈앞에서 목숨을 잃는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래리는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 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p.84)"

 
 인생이란 무엇이고, 선과 악이란 무엇인지...  래리는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질문과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래리가 겪은 비극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가 왜 무기력해 보이는 생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지, 왜 예전의 그로 돌아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전쟁 직후 미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가고 있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기회를 노리던 시기였다. 전쟁이 휩쓸고 간 후, 정신적으로는 황폐함을 겪었을지 몰라도 물질적으로는 한없이 풍요로운 시기였던 것이다. 래리는 자신을 위해 펼쳐진 미래를 버리고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이 책은 무엇보다 시점이 독특하다.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을 통한 1인칭 시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지적 작가 시점도 아닌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던 작가인 '나'의 관점으로 씌여졌다. 그런 이유로 특정 인물에 대해 설명하거나 사건을 이야기할 때 주관적이기도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는 회고식으로 서술되었고, 먼 과거와 최근의 일들이 시간순서와 상관없이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책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일 것이다. 래리의 주변 인물들 부터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을 살펴보면 사랑보다 현실적인 안락함을 선택했던 약혼녀도 있고, 내면적인 것 보다는 철저하게 보여지는 삶을 살았던 인물도 있다.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음탕했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몸을 파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말로 표현못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여인도 있었다. 저마다 다른 이상과 가치관을 가진 모습을 통해 삶이란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고 미묘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게 영원한 존속을 요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p.459)"


 책을 한참 읽을 때만 해도 화자인 '나'가 서머싯 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래리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머싯 몸은 화자로서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현하기도 하고, 래리인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다시말해 화자와 래리 두 사람다 서머싯 몸인 것이다. 책을 읽은 직후 작가가 전쟁에 참여했었고 방랑벽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확실해 졌다. 끝으로 '나'가 래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까지도 그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이것은 래리의 대답이자 노작가의 고백이기도 하다. 
 

 짧은 순간 삶에 있어서 답이란 것이 있긴 한 것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깨달음' 을 얻기 위한 과정이요, 그 답이란 것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허락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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