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처음 받아들고 두툼한 두께감과 묵직함 때문에 살짝 압도되었다. 우선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색인 파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하늘빛 표지가 맘에 들었고 장대끝에 불안하게 매달린 소녀에게서도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무언가 갈망하는 듯한 눈빛이 맘에 걸렸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런데 띠지를 벗겨내는 순간 너무 당황했다. 소녀가 매달린 장대의 아랫 부분이 누군가의 엄지 손가락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적절한 균형' 이라는 제목과 너무나 절묘하게 매치된 설정이긴 했지만 보는 이를 조마조마 하게 만드는 것 같아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위태로움이 단순한 설정인줄만 알았지 소설 속에 언급된 장면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소설의 배경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기 전 종교와 이념의 갈등으로 어수선하던 시절로 거슬로 올라간다. 주인공 디나 달랄은 의사인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밑에서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인물이다. 그녀는 상류층의 자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교육을 받았고 미래가 총망되는 아가씨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기력해져 버렸고 그녀의 오빠는 그녀를 더이상 학교에 보내지도 않았고 결혼을 강요한다. 디나는 오빠가 정해준 혼처를 마다하고 스스로가 선택한 결혼을 하지만 짧은 행복을 뒤로하고 미망인이 된다.

 

 오빠에게 신세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디나는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대학생 마넥에게 하숙을 내어주고 재봉사인 이시바와 그의 조카인 옴프라카시를 고용해서 옷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을 시작한다. 마넥은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아낌없는 보살핌을 받은 도련님이지만 아버지와의 갈등과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들 때문에 심리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재봉사들은 당시만 해도 천민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기술을 배워 가족의 자랑, 마을의 자랑이 되었으나 분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고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이다.  

 

 계급이란 것이 참 그렇다. 어느 나라든지 역사를 되짚어 보면 계급이 없었던 시대가 없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시민 사회가 되자 자연스럽게 계급이 없어지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유독 인도라는 나라는 아직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 계급이 존재하며, 소설에서도 법적으로는 계급이 없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우리로 치면 조선시대 양반들이 거의 무임금으로 사람들을 부리고 노비를 사고 판다든지, 천민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상황과 매우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더한 경우도 많다. 복잡한 상황에서 종교적인 갈등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냥 마을에서 계급이 높고 공적인 힘이 된다 싶은 사람의 눈밖에 나면 일가족이 몰살당해도 어디가서 하소연 할데가 없다. 경찰은 도리어 무고죄로 잡아가둔다며 피해자를 윽박지르니 말이다. 당시 공무원들의 실상이란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빈민촌으로 내몰고 빈민촌 사람들을 강제로 태워다가 선거 유세장에 데려다 놓고 박수를 치게 만들었다가 다시 그들을 거리로 내모는 정책을 펼쳤다. 심지어는 산아제한을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다가 불임 수술을 시키고는 실적이라고 내세울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랴.   

 

"희망이야 항상 있죠. 우리의 절망에 균형을 맞출 만큼 충분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끝장이죠. (p.803)"

  

 책을 읽다보면 '희망'이라는 단어를 자꾸만 잊어버리게 된다. 아이를 장대 끝에 매달아 위태로운 연기를 하면서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이란 것이 있을까. 그 아이들을 데려다가 불구로 만들어 구걸을 시키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마음이 어지럽혔다. 우울한 분위기 때문인지 흡입력있는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진도가 더디어 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디나의 작은 집에서 솟아났던 희망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고 생각했던 순간, 그래도 매일 웃을 수 있다던 그녀를 보면서 나 자신이 너무나 비겁하고 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절망을 대신할 수 없는 것 처럼 희망도 타인의 시선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인데 말이다.

 

 로힌턴 미스트리라는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지만 최근에 읽었던 인도와 관련된 소설들이 무척 감동적이었기에 이 책도 관심이 갔었다. 물론 각종 수상경력과 함께 오프라 원프리의 북클럽 선정 도서라는 점도 기대감을 더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 것이다." 라는 말이 정말이었던 것이다. 다양한 계층의 주인공들,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네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인도 사회 전반에 걸친 계급 문제와 정치인들의 부패, 사회의 부조리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책을 덮는 순간에야 깨달았다. 내가 손꼽던 최고의 인도 소설이 바뀌었다는 것을. 정말 슬프고도 감동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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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 2009-12-20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절망 속에 한줄기 희망의 빛이라..정말 아름답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