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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을 입은 여인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박노출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주인공 월터 하트라이트는 친구인 페스카를 통해 리머지리가의 자매들에게 수채화를 가르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명망있는 집안, 느슷한 계약조건등에도 불구하고 왠지 알 수 없는 거부감에 사로잡힌 월터는 순전히 경제적인 상황등 현실적인 이유로 그림교사 자리를 수락한다. 런던을 떠나기 전날 밤 우연히 '흰 옷을 입은 여인'과 마주친 월터는 누군가로부터 쫓기는듯한 그 여인을 도와주게된다. 한 밤중에 '흰 옷을 입은 여인'을 만난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경험이리라.
리머리지가에서의 생활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언니인 마리안은 붙임성있고 괘활하며 지혜로운 여인이고, 동생 로라는 분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갸날픈 여인이다. 월터는 그 전에도 그림을 가르친 경험이 많았고, 계약서상에 명시된 사항을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상류층 가정의 여인들을 상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도 어쩔수 없을만큼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으니 자매들중 동생인 로라와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이기에 결국 월터는 리머리지가를 떠나게 되고, 로라는 집안에서 정한 혼처인 퍼시벌 경과 결혼을 하게된다.
후에 로라의 죽음을 전해들은 하트라이트는 그녀의 무덤에서 마리안과 로라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로써 하트라이트와 마리안은 로라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주기 위해, 복수를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내용이 전개되면서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흰 옷을 입은 여인' 임을 알게 된다. 그 시대의 이름있다 하는 가문이 그러하듯 리머리지가의 가계도 또한 매우 복잡하다. 간단히 말하면 마리안의 어머니는 로라의 아버지와 재혼한 사이로 마리안에게는 재산이 없었지만, 로라는 결혼 당시 이미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할 만큼 부유했다. 결국은 그 사실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18,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대하다보면 신사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참으로 신사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너무나 친절하고, 교양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로라의 남편과 그의 친구 포스코 백작이 사실은 얼마나 사악하고 잔인한 사람인지 느끼는 순간 자꾸만 꼬여가는 스토리가 답답하기까지 하다. 다만 고전적인 추리소설이 대부분 권선징악적이고 해피앤딩이라는 점을 떠올리며 꿋꿋하게 읽어나갔고 짐작이 빗나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흰 옷을 입은 여인> 우선은 고전적인 문체가 기억에 남는다. 앞부분에 페스카가 리머리지가로부터 계약서를 받아와서 월터의 가족들에게 읽어주는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오버스러움이 느껴지고, 월터와 로라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도 흥미롭다. 월터와 로라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서로가 마음으로 느낄뿐 입밖으로 내어 확인한 사실도 없고, 어떠한 신체적 접촉도 하지 않은 상태로 눈빛을 통해서만 느끼는 조선시대식(?)의 사랑법도 특이했거니와 당시 상류층의 생활,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등 빅토리아 시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장 특이한 점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이 월터나 로라만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말해 내용이 전개되는 시간순서에 따라 여러 등장인물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증언해 나가는 방식이다. 화자는 월터에서 리머지리가의 변호사인 길모어, 마리안, 로라의 숙부, 심지어 저택 관리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증언한 후 뭔가 의문점을 남기면 다음 사람의 증언에 의해 의문이 해결되고, 다시 또다른 의문점이 제기되는 방식이 반복되면서 내용이 펼쳐진다. 조금은 음산한듯 갈길이 멀어보이는 분위기였지만 쉽사리 손을 놓기가 힘든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