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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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갑자기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단편집(이라기 보다는 중단편집)을 읽게 된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책 <봄의 제전>의 프롤로그에서 그의 유명한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미학이 어떻게 전쟁과 연관되는지를 다룬 <봄의 제전>에서 저자는 토마스 만과 발레 '봄의 제전'의 기획자인 댜길레프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의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인공인 구스타프 아셴바하와 댜길레프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많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미학적 경험, 예를 들면 베니스와 바그너와 같은 영향력이 이 두 사람에게도 작용했기에 이런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그 어떤 것도 지어낸 것은 없다고 하면서, 1911년 구스타프 말러의 서거 소식을 듣고 주인공의 이름을 그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밝혔다.

이야기가 살짝 삼천포로 빠졌는데, 요점은 <봄의 제전>을 읽다가 독일이라는 나라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고, 따라서 '20세기 초 독일의 가장 위대한 작가'인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게 됐다는 것.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번, 토마스 만 단편선에는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토니오 크뢰거>와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100페이지가 넘는 중편이고 나머지도 대부분 40~50페이지로 단편치고는 긴 편이다.

8편의 작품들이 모두 인상적이고 독특하지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시민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이다. 


이런 두 세계의 대립은 그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아버지는 독일 북부 뤼벡의 부유한 상인이자 시의 참사위원으로 부와 명예, 권력을 모두 가진 전형적인 독일인이었고, 어머니는 독일인과 브라질인의 혼혈로 자유로운 예술가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 만은 아버지로부터는 시민의 냉철함과 도덕성을, 어머니로부터는 예술적인 기질을 물려받음으로써 자기 안에 '시민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게 된다. 시민 사회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자라서 예술의 세계에 발을 담근 토마스 만은 늘 이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며 그 어느 곳에서도 안주할 수 없었고, 그의 소설들은 크고 작게 자신의 이런 체험을 토대로 삼고 있다. 


1903년 발간된 <토니오 크뢰거>는 바로 이런 토마스 만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이다. 토마스 만은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를 통해 시민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년 토니오는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친구 한스의 건강한 삶을 동경하고, 금발의 잉에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다. 


[너처럼 되고 싶구나! 다시 한번 시작하여, 너처럼 올바르고 즐겁고 순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하느님과 세계의 동의를 얻으면서 자라나서, 악의없고 행복한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으면서, 잉에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와 같은 아들을 두고 싶구나! 인식해야 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구나! (p.98,99)]


이국적인 느낌의 '토니오'라는 이름과 독일적인 성 '크뢰거'로 나타나듯이 시민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토니오 크뢰거는 자연스러운 시민 사회의 삶을 동경하지만 자신은 그런 그들과 어울릴 수도 없고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 

일반 사람들에게 예술가는 '그 무엇인가 낯선, 이상한 느낌을 주는 별난 존재'(p.48)이며, 토니오는 예술가라는 직업은 '운명으로 정해진 저주받은 직업'(p.47)이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의 삶을 동경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없어 늘 멀리서 바라보며 괴로워해야 하는 토니오는 고백한다. 자신은 삶을 사랑한다고... 


그렇다면 예술 세계는 어떤가? 오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며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한' 예술가들은 '시민적 양심'(p.106)을 지닌 그를 '동경이 없다'(p.107)며 자신들의 세계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애인이자 화가인 리자베타는 이런 토니오를 '길 잃은 시민'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러나 토니오는 '모든 예술성 속에서, 모든 비상한 것과 모든 천재성 속에서 무엇인가 매우 모호한 것,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며 이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시민적 양심'(p.106) 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절대성을 의심하는 토니오를 자만심으로 가득 찬 '미의 숭배자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토니오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안주할 곳이 없다. 그는 외롭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p.106)]


토니오는 여행을 떠나 리자베타에게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는 편지를 쓴다. 그는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예술을 거부하기로 한다. 토니오는 예술가를 진정한 예술가로 만들어 주는 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p.107)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랑을 기반으로 자신은 더 나은 것을 만들어보겠다고 작가로서 새로운 각오를 밝힌다.


인간의 속된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로서 다시 태어난 토니오 크뢰거는 초기 토마스 만이 추구한 예술가 상이며 그 어떤 소설보다도 토마스 만의 작가로서의 소명과 진실함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한 예술가가 아닌 '시민적 사랑'을 간직한 예술가가 되리라는 토니오 크뢰거의 말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이렇듯 토마스 만은 그의 초기 중단편 소설들에서 일반적인 시민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예술가 또는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민성과 예술성,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건강과 병 등, 두 세계의 갈등과 조화를 주로 그리고 있다. 


토마스 만이 1894년 발표한 첫 단편 <타락>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한 젊은이의 여배우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그 파멸을 다룬 작품으로 액자소설의 형식은 소설의 주제를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리오와 마술사>는 토마스 만이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다음 해인 193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파시즘의 본성을 예술에 빚대어 폭로한 작품으로서 파시즘 독재자를 일종의 예술가인 마술사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는 <봄의 제전>에서 저자가 나치즘을 정당이 아닌 이벤트라고 단정하며, 히틀러를 나치즘이라는 예술의 '뛰어난 배우'라고 한 점과 겹쳐져 작품을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행복에의 의지>는 1895년 발표한 소설로 이 작품으로 토마스 만은 문단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토니오 크뢰거처럼 부모로부터 상이한 기질을 물려받은 병약한 예술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인간의 삶과 의지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젊은 시절의 토마스 만의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1898년 발표한 작품으로 예술가의 또 다른 변형인 한 불구자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한 불구자의 슬픈 내면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당시 독일 시민사회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사회 약자들에게 잔인했는지를 보여준다. 


1897년 발표한 <어릿광대>는 삶과 예술 사이에서 홀로 떨어져 사는 한 딜레탕트적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다. 역시 토마스 만의 실제 체험이 많이 녹아 있는 작품으로 작가가 자신의 예술가 기질을 지나치게 희화해 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토마스 만도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트리스탄>은 <토니오 크뢰거>와 비슷한 시기의 작품으로 역시 병적인 예술가 정신과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시민적 삶의 대립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20세기 초의 바그너 숭배를 패러디하고 슈피넬이라는 작가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함으로써 무조건적인 예술주의를 희화화한다.


마지막 작품은 1971년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1912년 발표된 작품으로 역시나 독일 시민의 전형인 아버지와 보헤미안적 기질을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시민의 성실성과 예술가의 열정을 내면에 지닌 작가, 구스타프 아센바하를 주인공으로 한다. 

'끝까지 견뎌라!'(p.427)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예술을 위하여 자신의 감각적인 기질을 억눌러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작가로 성공한 그는 휴가 차 떠난 베니스에서 타치오라는 미소년을 만나 그 완벽한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존경받는 작가로서 가식적인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과 예술을 되돌아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센바하는 자신이 그동안 쓴 글에서 '엿보이는 대가다운 태도는 허위이고, 어릿광대의 짓'(p.525)임을 인정한다. 예술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금지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술가들은 '천성적으로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고, 그 경향을 어떻게 달리 개선시켜 볼 수도 없'(p.525)기 때문이다. 

아센바하가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이끈 것은 아름다운 타치오의 모습이다. 타치오는 에로스가 현실 인물로 나타난 것으로, 그동안 아센바하 내면에서 억눌려 왔던 감성을 되살려 지적인 세계에만 머물러 있던 그를 감각적인 세계로 넘어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눈 앞에 나타난 아름다움 앞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진 아센바하의 철옹성 같던 삶과 예술의 세계.

예술가의 본성을 억누르고 가식적으로 쌓아올린 예술의 생명력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깨닫게 된다. 

'열정이 곧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며 우리의 동경은 반드시 사랑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p.525)된다는 아센바하의 마지막 고백은 사랑과 열정이 없는 지적인 능력만 있는 예술가는 껍데기일 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토마스 만은 선뜻 책을 집어 들기엔 조금은 부담스러운 작가였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8편의 중단편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작품 속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토마스 만의 품위가 느껴지는 <토니오 크뢰거>를 시작으로 너무나도 매혹적인 <베니스에서의 죽음>까지 그야말로 토마스 만에게 반하고 빠져든 시간이었다. 독일 문학의 특징답게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가는 어떤 존재이며, 이 사회 속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해야 하는지...' 를 다룸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나의 삶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으며 한시도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아센바하가 '신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칭송하던 타치오 역의 비요른 안데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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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6-16 20: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기서 ‘토니오 크뢰거‘만 읽었는데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고뇌와 함께 외로움을 느꼈어요. 우리가 당면한 현실같기도 해서 공감을 했어요.
다른 단편도 좋을 것 같네요^^
책을 읽고 그 책과 연관된 독서를 하는 것 또한 책읽기의 즐거움 같아요**

coolcat329 2022-06-16 20:45   좋아요 4 | URL
네 중단편이라 비교적 수월하게 읽었는데, 장편이 이런 식이면 좀 골이 아프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첫 이야기 토니오 크뢰거부터 푹 빠져서 읽었습니다. 독일 문학의 거장이라는 말 실감했습니다.

그레이스 2022-06-16 22: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봄의 제전> 때문에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읽었어요. 인상적이었던 작품이었죠. 하나만 읽고 다시꽂아놓았는데 언젠가 기회를 봐서 읽어야겠어요.

coolcat329 2022-06-17 06:37   좋아요 2 | URL
그러셨군요. 프롤로그 베네치아 이야기가 참 강렬했죠. 책 속으로 확 잡아당기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

새파랑 2022-06-17 08: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토니오 크뢰거> 읽고 나서 요 책을 샀는데 아직 못읽었어요. 특유의 독일 느낌? 이 많이 느껴지던데 쉽게 손이 안가더라구요 ㅎㅎ 쿨캣님이 극찬하시니 다시 시도해봐야 겠습니다~!!

coolcat329 2022-06-17 09:17   좋아요 2 | URL
독일을 좀 느껴보고 싶어서 읽었는데 묘하게 빠져들더라구요~

바람돌이 2022-06-17 1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베니스의 죽음 영화에 나오는 저 소년. 진짜 아름다워요. 예전에 영화보면서 진짜 미모에 빠져들수밖에 없었던.... 이제 쿨캣님 덕분에 토마스 만도 읽고 싶은 작가로 올려야겠네요.

coolcat329 2022-06-17 23:10   좋아요 0 | URL
그쵸? 정말 토마스 만 묘사가 과장이 아닌 바로 그 아름다움이에요. 바람돌이님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mini74 2022-06-17 19: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책이 책을 부르는군요. 리뷰 읽으니 새롭습니다 ~ 소년 묘하게 성을 뛰어넘는 미모가 느껴져요.

coolcat329 2022-06-17 23:15   좋아요 2 | URL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입니다. 😊
성을 뛰어넘는 외모 맞아요.
근데 저 미모가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예쁜 걸 가만놔두질 않습니다.ㅠ 미니님도 즐거운 주말되세요😚

scott 2022-06-19 00: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베네치아에 나온 배우
현재 멋지게 늙었습니다 ㅎㅎㅎ



토마스 만은 중편도 훌륭한데

장편 도전을 사알 짝 추천 합니다 ^^

coolcat329 2022-06-20 19:14   좋아요 2 | URL
네~장편도 도전해 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6-20 10: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맨 끝 사진은 <베니스에서 죽다>
에 나온 배우 사진이 아니었던가요.

그 영화 보다가 지루해서 죽을 뻔
했답니다 ㅋㅋㅋ

명작이라고 하는데 재미는 없더라
구요.

coolcat329 2022-06-20 19:16   좋아요 3 | URL
네 맞습니다. 저는 유툽에서 조금만 봤는데 풀영상은 지루할듯도 하네요. ㅎ

mini74 2022-07-08 18: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잘생김이 떠오르는 리뷰군요 ㅎㅎ 축하드립니다 *^^*

coolcat329 2022-07-08 19:01   좋아요 3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요~☺️

그레이스 2022-07-08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쿨캣님~♡

coolcat329 2022-07-08 19:01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시길요~☺️

새파랑 2022-07-08 1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 천재 쿨캣님 축하드려요. 토마스 만은 어렵지만 쿨캣님 리뷰는 너무 좋습니다~!!
 
봄의 제전 -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 걸작 논픽션 23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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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5월 29일 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러시아 발레단의「봄의 제전」초연이 무대에 펼쳐졌다. 세르게이 댜길레프가 기획하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안무를 맡았다.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살아있는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스트라빈스키가 처음에 붙인 제목은 '제물(Victim)'이었다. 

이 날 공연장은 충격과 놀라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멜로디가 없는 음악은 '폭력성과 불협화음'으로 귀에 거슬렸고, '모든 기교가 제거'된 안무는 쿵쿵거리는 걸음과 왜곡된 동작으로 가득했다. 테마,의상,안무,음악 모두가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라트비아 출신의 캐나다 역사학자 모드리스 엑스타인스(Modris Eksteins 1943~)가 1989년 발표한 <봄의 제전>은 현대 예술의 출발을 알리는 혁명적인 발레「봄의 제전」의 소개로 시작한다. 제물로 선택된 처녀는 '그 자신이 의미하는 다산성과 생명이라는 특징들을 기리기 위해'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쓰러진다. 이것은 '죽음을 통한 삶에 대한 찬가'(p.79)로서 슬픔이 아닌 성스러운 죽음이다.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죽어간 이름 없는 병사들을 '스트라빈스키의 제물'이라 말한다. 


이 책의 부제는 '세계대전과 현대의 탄생'으로 저자는 서문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얽힌 관심사와 감정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p.10)고 밝히면서 예술, 문화, 도덕, 관습으로 나타나는 한 시대의 정신을 분석한다. 그 과정을 통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전쟁 속 끔찍한 참호전의 모습, 전쟁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봄의 제전>은 '20세기 전반기에 우리의 현대적 의식, 해방에 대한 우리의 강박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출현했는지'(p.9), 또 그러한 의식과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 탐구함으로써 현대의 탄생 과정을 살피는 책이다. 


<봄의 제전>은 3막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파리와 베를린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의 변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모습과 진행 과정을 보여주고 종전 후 전쟁이 유럽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다루면서 왜 제1차 세계대전이 '현대세계가 전환되는 축'(p.401)이 되었는지 파헤친다.

또한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겪고 서서히 광기를 드러내던 나치즘의 흥망도 다루면서 1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도 살펴본다. 저자는 '나치즘은 이성이나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 자아, 감정, 경험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p.520)고 하면서 나치즘이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성장했고, 그 결과 폭력과 살인이 미학적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전략과 무기, 정치인, 군인의 활약으로 바라 본 일반적인 전쟁사가 아닌 문화,예술, 가치관과 같이 한 시대의 정신을 통해 바라본 색다른 전쟁사로서 독자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출판사 홍보 문구 중 "기존의 전쟁사와 격이 다르다"라는 글이 눈에 띄었는데, 정말 수백 번 동감한다. 예술과 전쟁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엮어 유려한 문체로 설득력 있게 풀어간 저자의 작가로서의 능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작년에 읽은 <피에 젖은 땅>과 이번에 읽은 <봄의 제전>으로 글항아리 출판사의 '걸작 논픽션' 시리즈에 관심과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특별히 두 번을 읽으려고 다시 읽는 중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현대는 이러한 모습이 되었는지 알려주는 '격이 다른' 전쟁과 예술에 관한 멋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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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6-14 00: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걸작 논픽션 시리즈 정말 탐나는 거 많죠!

coolcat329 2022-06-14 08:54   좋아요 2 | URL
네~앞으로 눈여겨 봐야 겠습니다.😊

새파랑 2022-06-14 06: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군요~!! 저는 이런 장르? 의 책을 잘 안읽었는데 이 책 좋다는 분들이 많으셔서 읽어보고 싶네요~!!

coolcat329 2022-06-14 08:56   좋아요 3 | URL
이 책에 1929 전쟁 붐 설명하면서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가 대표 사례로 나오는데 새파랑님 관심 가실거 같네요~^^

바람돌이 2022-06-14 2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도 진짜 읽어야 되는 책이었네요. 왜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 것이야 원망이 막.... 좋은 리뷰덕분에 읽을까말까 망설이던 책을 확 찜하게 됩니다.

coolcat329 2022-06-15 16:30   좋아요 0 | URL
이 책 후회 안 하실 거에요. 정말 좋은 책이 너무 많죠? 😭

scott 2022-06-15 00: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완독하게 만드는 이 책!

쿨켓님 리뷰도 👍👍👍👍

coolcat329 2022-06-15 16:33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기본 지식이 없어서 빨리 읽지는 못했습니다. ㅠㅠ 근데 내용이 너무 참신해 재미있게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2-06-15 09: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간내서 재독하려고 합니다.

coolcat329 2022-06-15 16:37   좋아요 1 | URL
끝까지 읽고 처음부터 다시 읽으니 확실히 이해가 더 잘 되네요. 그레이스님도 이 책 좋아하시니 기분이 좋네요😁

페넬로페 2022-06-15 13: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문화와 음악에 버무려 표현한 책이군요.
걸작 논픽션 시리즈 좋은데 자꾸 미뤄지는 것 같아요 ㅠ

coolcat329 2022-06-15 16:42   좋아요 2 | URL
아무래도 내용과 두께가 있어 부담이 가죠? ㅎ 그래도 이 책은 참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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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 1888~1953)이 사망하고 3년 후인 1956년 발표되어, 다음 해 그에게 네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열두 번째 결혼 기념일에 아내에게 바치면서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이 극의 원고를 당신에게 바치오"라고 고백했다. 

오닐은 이 작품을 '사후 이십오 년 동안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리지 말라'고 아내에게 당부했지만, 아내 칼로타는 고인의 뜻을 따르지 않고 1956년 이 작품을 발표했다. 

아내에게 바친 헌사에서 알 수 있듯이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 오닐의 아픈 가족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1912년 8월, 티론 가족이 여름 휴가 차 방문한 그들의 유일한 집인 별장에서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으로 고생 끝에 연극배우로 성공하지만 돈에 대한 집착으로 가족과 배우로서의 자신의 인생도 망치는 아버지 제임스 티론, 에드먼드를 낳고 몸의 통증을 없애기 위해 의사가 놔 준 모르핀에 중독이 된 어머니 메리,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인생을 사는 장남 제이미, 배를 타고 떠돌며 방황하다 폐병에 걸린 둘째 아들 에드먼드가 그들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모인 이들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묘한 긴장과 불안이 안개처럼 깔리기 시작한다. 이들은 서로를 탓하며 원망하고 분노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체념하기를 자정까지 반복한다.


[티론 _ 어디서 그런 헛소리들을 지껄여대! 그 더러운 입으로 시골뜨기니, 습지니, 오두막이니 하면서 아일랜드를 비웃다니! 에드먼드의 병 얘기는 안 하는 게 양심에 덜 찔릴 거다. 누구보다도 네 책임이 크니까! (p.39)


메리 _ 난 여기가 내 집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어.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니까. 순 싸구려로 지은 집이야. 네 아버지는 집을 제대로 꾸미는 데 돈을 쓴 적이 없어. 여기에 친구가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야. 손님을 초대하기도 부끄러운 집이니까.(p.51)


에드먼드 _ 폐병 걸린 아들 일인데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돈이 아까워서 벌벌 떠는 노랭이 짓을 해야겠어요? (...)아버지 땅 살 돈 아껴주려고 주립 요양소 같은 데 들어갈 줄 아냐고요! 이 지독한 노랭이 영감......! (p.179)


제이미 _ 네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마약을 시작한 거야. 네 탓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너에 대한 증오를 억누를 수가......! (p.207)]


이렇게 티론의 가족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주며 괴로워한다. 그러다 다시 마음이 약해져 서로를 이해하는 듯 하다가 또다시 싸우는 일을 반복, 그들의 갈등은 끝이 없어 보인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 소중함을 잊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비난하며 상처를 주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왜 유진 오닐이 이 작품을 '눈물로, 피로 쓴 작품'이라고 했는지 알 듯도 했다. 


유진 오닐은 왜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이렇게 작품으로 만들었을까? 오래되어 곪은 상처를 터트려 치유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록 고름을 터트리는 그 과정이 아프고 힘들어도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 가족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 그 고통을 자세히 들여다 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주는 사람들. 잘못의 경중은 있겠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또 위로가 되는 게 가족이다. 티론 가족도 각자 저마다 잘못이 있고 누구 잘못이 더 큰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아픔의 의미를 깨닫는 게 우선이 아닐까... 그리고 난 후 서로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보면 치유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존재, 가족. 이 작품은 우리에게 '당신의 가족은 어떤가요?' 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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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26 1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의 발표에 저런 배경이 있었군요. 가족이 가장 가까워야하는데 어떨때는 또 멀게 느껴지기도 하드라구요. 가족이든 친구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게 중요한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5-26 16:21   좋아요 2 | URL
대부분의 가족은 이렇게 싸우기 보다는 서로 피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더 많을 거 같아요. 모든 관계는 다 어렵습니다. ㅠㅠ

청아 2022-05-26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족들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25년이란 기간을 둔 것일까요? 안그래도 읽고 싶던 책인데 궁금해요^^*

coolcat329 2022-05-26 16:22   좋아요 1 | URL
그런거 같습니다. 작가가 자신을 위로하기 하기 위해 쓴 작품같아요.

잠자냥 2022-05-26 14: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진 오닐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coolcat329 2022-05-26 16:26   좋아요 2 | URL
네~~잠자냥님 애나 크리스티 리뷰 읽고 자극받아 드뎌!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희곡읽으니 좋았습니다😁

페넬로페 2022-05-27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으로의 긴 여로에 대한 배경에 이런 사연들이 있었군요.
작가 사후에 발표되고 퓰리처상까지 받다니 대단한 작품이네요~~
가족이 정말 그래요.
제일 가까우면서도 젤 먼 존재들
공감합니다.
그 누구보다 더 노력해야 할 관계 같아요^^

coolcat329 2022-05-27 12:42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알았는데 유진 오닐이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받았더라구요. 대단한 작가의 작품입니다😁

scott 2022-05-27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닐 작품 좋아 합니다

연극 관람 강추!ㅎㅎ
오닐이 그린 가족들의 삶은 슬프고도 먹먹함이 ㅠ.ㅠ

coolcat329 2022-05-27 12:45   좋아요 1 | URL
연극 꼭 보고 싶어요. 유툽에서 찾아보니 제시카 랭, 제레미 아이언스가 나오더라구요.
연극으로 하면 보러가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5-3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퓰리처상은 고인이 된 작가
에게도 주는가 보네요.

작가에게는 모든 이야기들
이 소재가 되지 않나 조심
스레 추정해 봅니다.

coolcat329 2022-05-31 19:40   좋아요 0 | URL
네~ <바보들의 결탁> 작가도 사후 수년이 흐른 후 퓰리처상 받았지요.
 
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세계문학 10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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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쓴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 후기 걸작 장편들이 담고 있는 사상의 모태가 되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소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1863년 체르니셰프스키가 쓴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가 큰 영향을 주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간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과학적, 합리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작가가 자신의 정치적인 사상을 담은 소설이다. 근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낙관적인 유토피아 소설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그에 대한 반박으로 1864년 <지하에서 쓴 수기>를 잡지에 연재하고 1865년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지하에서 쓴 수기>는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주인공 '나'의 생각, 특히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합리적, 과학적 사상을 비판하며 자신이 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지 독백 형식의 글로 보여주고 2부는 젊은 시절 자신이 경험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일인칭 소설 형식으로 보여준다. 


1부, 첫 시작부터 흥미롭다.


['나는 병자다......나는 못된 인간이다. 나는 매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나는 간이 안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병 따위에 추호도 관심이 없으니, 나에게 병이 있다는 것도 분명히 모를 수 있다.'(p.9)]


'나'는 마흔 살로 '관청에서 근무하는 8급 공무원'이었는데, 1년 전 먼 친척이 6000루블의 유산을 남겨준 덕에 지금은 도시 변두리 '방구석에 쳐박혀 하루하루 연명하며'(p.12) 지내고 있다. 볼품 없는 외모에 소심하고 자존심은 매우 강하나 열등감은 심하고, 극심한 피해 망상과 자의식 과잉 등 한 마디로 사회 생활이 힘든 성격 장애를 가진 비호감 인물이다. 


'나'는 당시 사회에 만연하던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한 합리주의적인 사고를 조롱하고 비난한다.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을 계몽해 그에게 제대로 된 진짜 이익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면 그는 곧바로 너저분한 짓을 중단하고, 착하고 고상한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나'는 이 모두가 '허황된 꿈'이며 '유치한 발상'(p.38)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나'는 '인간의 이익이란 완벽하게 계산된 것일까'(p.39) 반문하며 인간의 이익을 계산할 때 '행복, 재산, 자유, 평안' 같은 것들이 고려되는데, 현자들은 한가지 중요한 이익을 간과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만의 욕구, 제멋대로 보일 수 있는 심한 변덕, 때로는 광기에 근접하는 듯한 환상'(p.46)같은 '유익한 이익'으로 인간은 바로 이런 것들을 위해 '이성, 명예, 평안, 행복까지 포기할'(p.41)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합리적인 것을 따른다는 근거는 없으며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익보다 소중한 것이 있는 법',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욕구'(p.46)라고 말한다. 


2x2는 반드시 4가 되는 세상에서 인간의 의지가 끼어들 틈바구니는 없다. 그러나 2x2=4라는 수학적 확실성만을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계는 죽은 세계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완벽한 건축물을 짓는 개미와는 다르며, 목적 자체보다는 그 과정을 사랑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수학공식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변덕과 욕망을 가진, 자신의 고통마저도 사랑하는 존재이며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2x2=4보다 무한대로 우월한 인간의 의식이 있다. 


<지하에서 쓴 수기>의 '지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주인공 '나'가 실제로 지하에 사는지는 책에 나와 있지 않다. 여기서 의미하는 지하는 인간 의식의 반대 편에 있는 '우리 스스로 감추고 있거나 외부로 나타내지 않는 우리의 참의식, 즉 진짜 속마음'이다. (작품해설 p.220) 또한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외부와 단절된 자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2x2=4와 같은 불변의 진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무념의 상태'(p.60)에 빠질 뿐이다. 비록 인간의 의식이 삶에 어떤 이익도 가져다 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적어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2x2=5가 될 수 있는 삶이며, '무념의 상태'에 빠져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인 것이다. 


인생은 인간의 욕망과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지하에서 쓴 수기>의 '나'는 시종일관 비이성적,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독자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2부에서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나'가 24살에 겪은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왜 이 사람이 결국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는지는 알 수 있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술집에 들렸다가 어느 장교에게 모욕을 당하고 복수를 다짐하나 결국 어깨를 맞부딪히는 것 외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여기서 '나'는 복수를 완벽하게 했다며 혼자 기뻐한다. 또한 초대받지 않은 동창 송별연에 굳이 참석하여 온갖 모멸을 당하고, 급기야 돈까지 빌려 유곽까지 따라가는데 거기서 리자라는 매춘부를 만난다. '나'는 어린 나이에 매춘을 하는 리자에게 '너는 쇠사슬에 묶인 몸'이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며 노예와 같은 지금의 삶으로부터 나오라고 온갖 훈계를 늘어 놓고, 자기 집에 놀러 오라며 주소를 적어 준다. 근데 집으로 돌아와서는 혹시나 리자가 정말 집으로 찾아 와 자신의 이 누추한 꼴을 보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다가 평소 마음에 안 들던('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음에 안 든다) 하인과 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 추잡한 순간에 리자가 '나'의 집을 방문한다. '나'는 누더기 실내복 차림으로 하인과 싸우던 바로 그 순간에 리자가 찾아 온 것에 엄청난 수치를 느끼고 히스테리성 발작까지 일으켜 연기까지 해가며 온갖 변명과 신세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리자는 그런 '나'의 불행을 이해해주고 '나'는 역할이 뒤바뀐 '기이한 상황'에 놀라 그녀를 '지배하고 소유하고 싶은 욕구'(p.204)를 느낀다. 결국엔 그녀에게 증오와 열정의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을 느끼고 그녀와 관계를 갖는데, 이 부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묘사가 정말로 대단하고 느꼈다. 


'나'는 시종일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러면 안되는 줄 본인도 알지만 결국엔 행동으로 옮긴다.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도 자신의 열등감과 자의식이 너무 강하다 보니 이상하게 행동하고 자신의 힘을 행사하기 위해 연기까지 하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나'의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행동은 어떤 이익은 커녕 결국엔 고립된 삶을 살게 한다. 자신의 이 모든 이야기가 유쾌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살아 있는 삶에서 이탈해 있기에'(p.211) 진짜 살아 있는 삶에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지하에서 쓴 수기>의 주인공의 모든 행동은 실패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극단적인 '나'의 행동과 의식에서 우리의 진짜 모습도 언뜻언뜻 보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사실, 다만 그것을 감추기 위해 '비겁함을 분별력이라 하며 자신을 기만하면서 자위해왔던 것'(p.212)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식이 없는 인간은 진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진짜 삶의 시작은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받아들일 때 시작된다. 그리고 고통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의식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의식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불행'(p.60)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신이 우리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p.212)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 1부를 읽을 때는 너무나 이상한 사람이 밑도 끝도 없이 이상한 말을 늘어놓아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2부의 '나'의 젊은 시절 경험을 담은 이야기는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엄청난 자의식으로 똘똘뭉친 '나'의 심리 묘사는 정말 대단했고, 왜 니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심리학자로 인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앙드레 지드는 이 작품을 두고 '도스토에프스키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소설'이라고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떠오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하세계,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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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22 11: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참 도끼샘 책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들이
왜 이리 많은지요...

자극은 받지만 시작만
하고 마무리 짓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아서 -
크하

coolcat329 2022-05-22 21:30   좋아요 2 | URL
저야말로 집에 있는 책들 다 읽을 수 있을까...가끔 생각한답니다.ㅎㅎ 시간은 점점 더 빨리 가는 거 같구요. 편한 밤 되세요~

새파랑 2022-05-22 12: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창비 버젼으로 읽으셨군요~! 전 이 책 화자의 찌질함(?)이 너무 좋더라구요. 왠지 남 이야기 같아 보이지 않았어요 ㅋ 이 책을 기점으로 후기 명작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coolcat329 2022-05-22 21:32   좋아요 2 | URL
대박 캐릭터입니다! ㅋㅋ 이 책 읽었으니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읽어야 하는데 너무 양이 많아 손이 안가네요. 좋은 밤 되세요~

scott 2022-05-22 1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하세계 만세😊
도끼옹 만만세🤗

coolcat329 2022-05-22 21:33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도끼옹 만세!

페크pek0501 2022-05-24 17: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흥미롭게 읽었던 작품이에요. 도스토를 더 가깝게 느끼게 된 작품이기도 하고요. ^^

coolcat329 2022-06-10 11:56   좋아요 1 | URL
아 페크님 댓글을 이제야 봤습니다. 이 책 읽으셨군요~ 저도 이 책 읽고 도선생님과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답니다.☺️

mini74 2022-06-10 0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다만 책 ㅠㅠ 꼭 다시 도전하리라 생각만하고 있어요 ㅠㅠ 축하드려요 *^^*

coolcat329 2022-06-10 12:03   좋아요 1 | URL
아! 이 책 이군요. 저는요...ㅋㅋ 어떤 글이 당첨이 됐는지 늘 모르는데 이렇게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읽다 만 책이군요. 1부에서 화자가 이상한 말들을 늘어놔서 좀 그렇죠? ㅎ
근데 2부는 웃기고 재밌습니다. 다시 도전해 보세요~^^

새파랑 2022-06-10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선생님 애제자 쿨캣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coolcat329 2022-06-10 12:04   좋아요 2 | URL
애제자 ㅋㅋㅋ도선생님 수제자님이신 새파랑님 덕분에 저도 도선생님 근처를 조금 어슬렁거리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
 
죄와 벌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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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가 8년간의 유형생활을 마치고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이어 1866년에 두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고 말했을 정도로 범죄자의 심리 묘사가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다.

 

<죄와 벌>은 1860년대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페테르부르크는 급격히 늘어난 인구로 인해 열악한 주거난과 빈부 격차, 실업 문제, 각종 범죄, 대기 오염 등의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더운 7월의 어느 저녁, 한 청년이 페테르부르크의 혼잡한 거리를 걷고 있다. 청년의 이름은 라스콜니코프. 23세의 법학도이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휴학 중인 그는 더럽고 악취나는 이 도시가 혐오스럽다. 누추한 골방, 누더기 같은 옷은 주위의 비웃음을 사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자신을 위해 온갖 수모를 참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사악한 전당포 노파를 죽여 그 돈으로 수많은 가난한 사람을 구하자는 생각이다.

그가 보기에 노파는 남의 목숨을 좀먹는 '이(蝨)나 바퀴벌레'만도 못한 존재이다.

 

그는 인간을 두 부류, 즉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나누는데 평범한 사람은 법을 지키고 순종하며 살아야 하지만, 비범한 사람은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법을 어기고 전 인류에게 구원이 되는 사상을 실행할 권리를 갖는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들로 '리쿠르고스, 솔론, 마호메트, 나폴레옹'을 거론하며 이들 모두가 '전부 범죄자였다' (1권 p.468)고 말한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말 할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그 본성상 반드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1권 p.469)으며, 그들은 '더 나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하길 요구'(p.470)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을 하려는 배경에는 바로 이런 사상이 깔려 있다. 그는 자신이 '비범한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 결국 노파 알료나를 죽이고, 우연히 범죄 현장에 나타난 노파의 이복 여동생 리자베타까지 죽이는 우를 범한다.

 

대의를 실천한다는 의지로 저지른 살인, 그러나 살인을 저지른 후 그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목격자도 없고 증거도 없지만 예리한 예심판사 포르피리의 범죄 심리 분석은 라스콜니코프를 조금씩 조여오고, 포르피리는 괴로워하는 그에게 자백할 것을 권한다. 또한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몸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소냐에게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데, 소냐 역시 그에게 자수할 것을 권유한다. 라스콜니코프는 결국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냐를 통해 자신의 지난 잘못을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다.

 

라스콜니코프는 왜 사람은 두 부류,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나뉜다는 사상에 빠져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일까?

대도시 속 가난에 찌든 대학생 라스콜니코프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돈이었다. 장남으로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책임지려면 돈이 필요한데 현실은 당장 낼 방값도 없는 실정이다. 빈민들로 득실거리는 더러운 대도시는 그에게 혐오감만을 줄 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한 인물(스비드리가일로프)은 페테르부르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젠장! 민중은 술이나 퍼마시고, 교육받은 청년들은 무위에 시달리며 실현할 수 없는 꿈과 몽상으로 타들어 가다가 이론의 불구자가 됩니다. 어디선가 유대인들이 몰려들어 돈을 감추고 나머지는 몽땅 음탕에 절어 살지요. (2권 p.377)]


이런 현실은 라스콜니코프에게만 적용되는게 아니라 당시 제정 러시아의 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일개 군인에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나폴레옹의 신화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특히 라스콜니코프처럼 예민하며 생각이 많은 젊은이에게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나폴레옹처럼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여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싶었을 것이고 자신에게도 그런 의지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세상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 노파 한 명 죽여서 자신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그에게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는 그만큼 그의 삶이 절망적이었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노파를 살해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계획을 행동으로 옮길지 말지를 고민하는데, 그래도 결국 그를 살인으로 이끄는 그 일련의 과정이 참으로 흥미롭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라스콜니코프는 인류에 공헌한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를 움직이는 것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포함한 주변의 극빈자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이라는 점이다.

우연히 들른 술집에서 하급 관리인 마르멜라도프를 만나 찢어지게 가난한 그의 가족과 그 가족을 위해 매춘을 하는 딸 소냐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음 날 그는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고, 여동생이 돈 때문에 쪼잔하고 비열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하며, '반드시 뭐든 해야 한다'(1권 p.87)고 다짐한다. '한낱 몽상에 불과했던 생각'(1권 p.88)이 현실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결정적 장면이다. 또한 길에서 술 취한 어린 소녀를 보며 여동생 두냐를 떠올리고, 공황상태에서 돌아다니다 숲에서 잠이 들어 사람들이 말을 때려 죽이는 꿈을 꾸게 되고 공포에 사로 잡힌다. 


['설마, 설마 내가 정말로 도끼를 들고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게 될까. (...)나는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견뎌 내지 못할 거야! (...) 주여! 저에게 길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저 빌어먹을......저의 몽상을 단념하겠습니다!' (1권 p.113)]


잔인하게 맞아 죽은 말의 꿈을 꾸고 난 후 그는 사람을 죽이는 범죄는 자신의 본성과 맞지 않음을, 자신은 그 일을 견뎌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선택받은 소수라 생각하고 법을 뛰어 넘어 큰 일을 해보려던 그는 자신이 그런 일을 감당할 인간, 즉 '비범한 인간'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들른 센나야 광장에서 내일 저녁 7시에 노파의 유일한 동거인인 리자베타가 집을 비우고 노파가 집에 혼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다시는 없을 절호의 기회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생각의 자유도, 의지도 없'(1권 p.117)이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살인이 일어난다.


<죄와 벌>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벌인지 묻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라스콜니코프가 저지른 죄를 밝히고 그 죄에 걸맞는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내용의 소설이 아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백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는 자신이 그 큰 일을 견뎌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기를 기만해 가면서 기어코 그 일을 한 데에 있지 사람을 죽인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죄라고? 무슨 죄? 저 추잡하고 해로운 이(蝨)를, 가난한 자들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전당포 노파를 죽였으니 마흔 가지 죄악은 용서받을 텐데, 그것이 죄라고? 나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죄를 씻을 생각도 없어. 그런데 왜 다들 사방에서 나에게 '죄야, 죄!'하며 손가락질을 하느냔 말이야. 다만 내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옹졸했다는 것쯤은 이제 톡톡히 알겠고, 그래서 이제 저 불필요한 수치를 감내하러 갈 결심을 한 거야! 그저 나의 천함과 무능함 때문에 이런 결심을 한 것이지." (2권 p.443,444)]


이런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는 인물은 소냐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에게 자신의 범죄를 고백했을 때 소냐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속죄'(2권 p.265)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꺼이 그가 짊어질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그의 고통을 나누겠다고 한다. 라스콜니코프는 그 순간 소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에 고통을 느끼지만, 나중에 자수하러 가기 전 소냐의 말대로 땅에 입을 맞추고 눈물을 쏟으며 생각한다. '소냐는 이제 영원토록 그와 함께할 것이며 운명이 그를 어디로 이끌든 세상 끝이라도 그를 따라갈 것임을...'(2권 p.458)


라스콜니코프가 자수하면서 6부가 끝나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그의 유형 생활이 나온다. 몸이 아파 병동에 있던 어느 날 라스콜니코프는 꿈을 꾸는데 인류가 선모충이라는 미생물에 감염되어 모두가 자기만 옳다고 외치며 서로 싸우고 죽이는 세상이 된다. '다들 불안에 떨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누구나 자기 하나만 진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2권 p.492)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고 모든 것을 파멸로 몰아간다. 이런 꿈을 꾸고 깨어난 라스콜니코프는 그동안의 자신의 사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비범하지도 않은 인간이 자신이 비범하다고 나설 때 얼마나 큰 혼돈을 초래하는지 깨닫고 괴로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병실 창밖을 보다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소냐를 보았을 때, 그는 뭔가가 심장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소냐를 찾고 기다린다. 

퇴원한 후 그는 그녀 앞에 쓰러져 그녀의 무릎을 끓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향한 한 인간의 희생과 사랑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소냐도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 마침내 이 순간이 도래했다'(2권 p.496)고 느낀다. 


[그들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둘 다 창백하고 여위었다. 하지만 병색이 완연한 이 창백한 얼굴에서 이미 새로워진 미래의 아침놀이,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아침놀이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2권 p.496)]


그들 앞에 남은 칠 년의 세월, 이제 두 사람은 자신들 앞에 펼쳐진 시간 속에 수많은 고뇌와 행복이 있을 것임을 알지만 그들은 다시 태어났기에 참고 견디기로 한다. 그날 밤 라스콜니코프는 동료 수인에게 마음을 열고 먼저 말을 건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았던 그가 '정녕 이제는 모든 것이 변해야 하지 않을까?'(2권 p.497) 생각하며 세상과 소통하려는 것이다.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2권 p.498)한 것이다. 

자신은 이(蝨)가 아닌 '비범한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살인을 저질렀던 라스콜니코프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죄를 짓고 벌을 받음으로써 다시 태어난 한 사람의 이야기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전기 작품 두 편 <가난한 사람들>,<분신>만 읽어 봤는데, 작가의 후기 걸작 장편 중 하나인 이 작품이 왜 그토록 유명하고 문학의 대명사로 칭송받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묵직함과 깊이가 확실히 전기 작품을 능가하고 심오한 작가의 세계관은 읽는 내내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보낸 츠바이크의 찬사로 글을 마친다.


"당신이 고통을 알게 한 인간들 내면에서 당신은 승리했다. 어두운 밤에서 낮, 고통에서 사랑을 창조했고, 지옥에서 성스러운 찬송가를 가져왔다. 가장 열정적인 사람만이 모든 것을 아는 자이다. 당신을 아는 사람은 당신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분은 당신을 깊이 통찰했다. 보라, 그분은 어느 누구보다 당신을 입증했고, 어느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던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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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5-14 23: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라스콜니코프가 처한 현실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과 과학은 날로 발전해서 Ai시대 이지만
인간의 삶은 수세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능 ㅠ.ㅠ

coolcat329 2022-05-15 13:05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돈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이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페넬로페 2022-05-14 23: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읽은 죄와 벌과 당시 페테르부르크의 상황을 알고 나서 읽은 죄와벌은 느낌이 또 달랐어요.
도스토옙스키 완독을 목표로 하고 읽는데 죄와 벌을 다른 버전으로 또 읽어야 할 것 같아요^^

coolcat329 2022-05-15 13:09   좋아요 2 | URL
어릴 때 읽으셨군요. 도스토예프스키 완독을 멋진 목표입니다.
어떤 출판사로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음사 김연경님 번역 저는 참 좋았습니다.☺️

페넬로페 2022-05-15 14:02   좋아요 1 | URL
열린책들로 읽었는데 다음엔 민음사나 문학동네로 읽어 볼까 합니다^^

blanca 2022-05-15 10: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다시 읽고 전율함요. <죄와벌>은 고전 정도가 아니라 어떤 현실에서도 다시 재생시키고 곱씹을 수 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coolcat329 2022-05-15 13:14   좋아요 3 | URL
저 이번에 읽으면서 정말 뭐랄까요...도스토예프스키를 왜 위대하다고 하는지 조금 알게됐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그 내면을 깊이 탐색하는 과정이 참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블랑카님 다시 읽으셨군요. 저도 나중에 다시 읽어 봐야겠습니다. 중언부언 늘어놓은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2-05-15 10: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선생님 마니아 쿨캣님 드디어 이 좋은 작품을 읽으셨군요~!! 저도 다시 한번 읽어야 하는데 시간이 안되네요 ㅋ 역시 명작은 시대를 초월해도 명작인거 같아요 ^^

coolcat329 2022-05-15 13:18   좋아요 3 | URL
도선생님 찐 마니아 새파랑님! 드디어 읽었습니다. 참으로 읽고 싶은 작품이었는데 이제서야 읽었네요. 😂

물감 2022-05-15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이제 도끼옹 전작 패기 하시는가요ㅎㅎ 에고 전 언제쯤 도전을...

coolcat329 2022-05-16 06:45   좋아요 2 | URL
이번에 읽고 후기 걸작들 다 읽어 보고 싶어졌는데...다 기본 천 페이지가 넘네요. 😿
겨울에 <백치>를 도전해볼까 합니다. 물감님도 도전해보시길요~^^

레삭매냐 2022-05-16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죄와 벌> 짱이지 싶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두 번 읽은 도끼샘
책이 바로 <죄와 벌>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