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닉 혼비의 <하이 피델리티>의 가장 큰 미덕은 로브와 친구들이 만드는 베스트5 리스트도 아니고, 작가의 영국식 개그도 아니고, 쉴 새 없이 출몰하는 뮤지션들에 대한 수다도 아닙니다.(이 세가지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 지루하기짝이 없는 소설이 될 겁니다.)
이 소설의 진짜 미덕은 찌질한 남성들의 속내를 까발리는 솔직함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역시 찌질남의 푸념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면 끔찍한 소설이 될 겁니다.)

35세 미혼남인 주인공 로브는 음악에 대한 광적인 몰입한다는 것을 빼고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물입니다. 나이만 먹었을 뿐 세상을 대하는 태도나 인간적인 성숙도는 18세 소년의 그것에서 올스톱 상태죠. 이 찌질한 남자는 함께 살던 여자 친구 로라에게 차입니다. 실연당한 찌질남의 징징거림이 <하이 피델리티>의 주요 내용이죠.

주인공 로브는 모든 여자들이 피해야할 남자입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똑똑한 덕분에 어느 정도 호감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뿐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인간관계에서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인 것이 없습니다. 회피, 서투름, 무책임이 그의 주특기죠. 특히나 심각한 건 지독히 이기적이라는 겁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똑똑한 이기주의자라는 거죠. 조심하십시오.

그런데 더욱 끔찍한 사실을 하나 폭로하면, ‘대부분의 남자가 로브처럼 찌질하다!’는 겁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느 정도 성공했고, 출중한 머리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로브같은 찌질함을 가지고 있을 확률은 거의 99프로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남자들의 찌질함은 언제든지 밖으로 튀어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섹스와 관련된 것이라면요! 닉 혼비는 수컷들의 이런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냅니다.(아~~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이만큼 솔직하기 힘듭니다. 닉 혼비는 주인공의 로브의 입을 빌어 남자들의 속성과 이중성, 어리석음을 미안할 정도로 털어놓는데... 읽다보면 쪽팔려 죽을 지경입니다. 그나마 핏대를 세우지 않고, 시니컬하지만 유머러스하게 자기비하(혹은 자기 고백)를 하는 통에 참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재미있습니다. 쪽팔린 건 쪽팔린 거구요.

소설을 읽다보면 로브의 미성숙과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재미있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음악(또는 책, 아마 영화와 연극도, 그리고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이든)을 삶에 중심에 놓으면 거기서 연애 생활을 분리해내기 힘들어지고, 연애조차 마치 음악 같은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계속 집적대고, 시끄럽게 하고, 또 집적대다 아주 결딴을 내서 다 뒤엎고 다시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 결과 적당히 만족할 수가 없다.
-p186
 
   

감성을 자극하는 일체의 행태가 우리(특히 남자들)를 철부지로 만든다는 작가의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로브의 찌질함에는 일말의 건강함이 엿보입니다. 완전 제대로 분명 어이없는 루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의 삶은 창조적이지는 않더라도 소모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쌓아올린 왕국이 좁다란 골방일 뿐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심플 마인즈와 앨튼 존을 좋아하는 인간들을 여전히 무시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다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서른다섯 살, 아무리 정신연령이 십대 후반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나이를 헛먹은 것은 아니란 말이죠. 이런 건강한 찌질이들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징징거리는 로브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 <하이 피델리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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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3-3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질, 회피, 서투름, 무책임.. 모두 제가 좋아하는 코드들인데여~ㅋㅋ
(빌 브라이슨의 친구 카츠가 생각나는 건 왜인지..ㅎㅎ)
이 책 진짜 재밌겠어여~~ㅇㅋ찜!!

lazydevil 2010-03-31 13:42   좋아요 0 | URL
소설 속 캐릭터로 좋다는 거지 실제로는 아니시죠? 큰일납니다~ㅎㅎ
빌 브라이슨의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카츠라는 인물이 무척 독특한가봅니다.
 
탐정 갈릴레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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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고 골치 아픈 작품(리뷰는 언제 올릴 지 기약 없습니다^^:)을 어렵게 끝낸 지라 뭐 말랑한 거 없을까 궁리하던 중, 반값 세일이라는 이벤트 혹해 <탐정 갈릴레오>를 덥석 물었습니다. 근데 되레 덥석 물린 기분입니다.
이 책은 어디를 살펴봐도 단편집이라는 글귀는 없습니다. 알라딘 소개글을 자세히 보니 ‘연작’ 형식이라는 말이 있네요. 그리고 다른 분 서재에서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암튼 애초에 단편집 형태의 탐정소설에 거는 기대가 희박한 독자입니다. 단편을 잘 쓰는 작가는 정말 뛰어난 작가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고, 특히 단편 형태의 탐정소설을 잘 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편견도 가지고 있던 터라, 단편집 <탐정 갈릴레오>를 읽기도 전에 쿨럭~했습니다.

재미는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잖아요. 늘 그렇듯 괜찮은 아이디어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볍게 술술 풀어내는 솜씨가 있는 작가죠. 단편집 <탐정 갈릴레오> 역시 딱 그 경우입니다. 살인을 둘러싼 아이디어는 괜찮은 편이고, 그 외는 ...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려진 것처럼 <용의자 X의 헌신>에 등장한 구사나기 형사와 물리학자 유가와 교수가 등장합니다. 일명 갈릴레오 선생으로 통하는 유가와는 천재 물리학자라는 것만 빼면 그닥 특이할 것도 없는 캐릭터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아쉬운 건 파트너로 등장하는 구사나기 형사랄까요? 성실한데 무능한, 더도 덜도 아닌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형사입니다. 이 사람한테 뭐 한 가지 뾰족한 게 있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말이죠.

다섯 가지 에피소드 중 앞에 둘을 읽으며 키득거렸는데요. 유가와 교수가 첫 등장하는 장면 때문입니다. 구사나기가 유가와의 연구실을 방문하면 뭔가 깜짝 과학 쇼를 하나씩 보여주며 놀려먹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구사나기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잠시 바보가 되는데...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재미있더라구요. 요거 이 단편 시리즈를 보는 재미 중 하나겠구나 싶었는데, 세 번째 에피소드부터 자취를 감췄습니다. 쩝~~. 이 시리즈가 드라마로도 나왔다고 하는데... 이런 설정이 매회 반복되면 재미있을 거 같아요. 매회 조금씩 변주되는 <심슨가족>의 오프닝 타이틀 개그처럼요.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거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에게는 점성(?性)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유가와 교수처럼 말입니다요. 이런 이유 때문인지 가볍게 술술 읽히기는 하지만 매번 매력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솔직히 그의 이력에서 드러난 것처럼, 엔지니어출신다운 작품 아이디어 빼놓고는 작가의 개성을 느끼기가 힘들어요. 뻔뻔할 정도로 전형적이고 동시에 깔끔한 이야기를 매번 생산해는, 그것도 매우 다작하는 작가죠. 신기하게도 매번 기본 이상의 재미도 보장하고요. 그러니까 인기작가죠.

이 작가, 매번 나름 재미있게 읽고 나서 딴소리하게 만듭니다. 훅이 없어!! 동시에 고민도 하게 만들죠. 다른 작품을 하나 더 읽어볼까? 말까? 아무래도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어야 좀더 본격적으로 이러쿵저러쿵 투덜거릴 수 있겠죠. <예지몽>도 반값 이벤트를 한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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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3-23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서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전집을 읽어 보시라능 -_- (미리 말해두자면, 단편집입니다ㅋㅋ)
데빌님이라면 5권 전권을 빌려드릴 용의도 있습니다만 ^^

근데 캐드펠 시리즈는 영 별로셨나봐요.
추천하고 낚은 사람으로서 괜한 책임감이 ㅎㅎㅎ
갈수록 비슷한 패턴에 약간 지루해질랑 말랑하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심슨 가족]의 오프닝 타이틀 같은 매력이 있긴 해서 전 계속 사모으고 있슴당 ㅋㅋ

딴소리 댓글..2 -_-;

lazydevil 2010-03-23 23: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브라운 신부님이 계셨군욧!! 빌리기보다 땡쓰투 드려야져~.ㅎㅎ
캐드펠은요, 아직 본격가동 안했어요. 대량 구입 후 아껴두고 있죠.
좀 여유가 생긴 꽃시절이 오면 신나게 읽으려구요. 잠시 들쳐보니 문학적 향취가 물씬~~ 풍기더군요^^ㅎㅎㅎ

카스피 2010-03-2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재미가 없으셨나 보군요.저는 읽지는 않았지만 케이블 방송에서 한 드라마는 그래도 재미있던것 같더군요^^

lazydevil 2010-03-24 10:3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했어요.^^
드라마까지 찾아보기는 그렇구, 가가 형사 시리즈를 찾아보려구요.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8
제임스 웰든 존슨 지음, 천승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우연히 초창기 미국 흑인문학의 대표작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미국 문학도 잘 모르는데 미국 흑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종종 무장해제 상태일 때 그 작품을 더 솔직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임스 월든 존슨의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을 흥미롭게 읽는 법을 하나 제안해봅니다. 저와 같은 미국 흑인문학의 문외한인 독자들에게요.

일단 이 얄팍한 책을 무작정 펼쳐들고 읽습니다. 뭐 제목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필립 로스의 <휴먼스테인>과 비슷한 소재의 작품입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제도가 폐지된 직후 옛날 옛적 미국이 배경인 것이 다르기 하지만요. 그냥 <엉클 톰의 오두막>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듯 걍~ 읽습니다. 백인처럼 생긴 흑인 청년, 그러니까 자서전의 주인공이 살아온 삶을 쫓아가는 것이 나름 재미도 있습니다. 동시에 ‘옛날 옛적 미국은 그랬었나?’ 싶습니다. 쉴 새 없이 잘난 척 하는 저자(주인공)가 조금 재수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 얄팍한 책을 절반 쯤 읽었을 때 잠시 숨고르기를 합니다. 그리고 책 말미에 실린 해설을 읽어봅니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성실한 해설입니다. 어라? 근데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겪은 일은 순전히 뻥인 거죠. 제목에 드러난 것처럼 자서전이 아닙니다. 작품 속 주인공이 저자 제임스 월든 존슨과 동일인물이 아니란 겁니다. 해설을 좀 더 읽어보면 작가는 출판 당시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진짜 자서전인양 익명으로 출판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여기서 서둘러 해설 읽기를 멈추고 다시 작품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이 얄팍한 책의 나머지 절반을 읽어봅니다. 작품은 자꾸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내’가 겪은 자서전이라고 말하는데, 독자인 저는 이게 모두 ‘뻥!’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게다가 당시 흑인들이 받은 핍박과 사회적 위치,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백인처럼 생긴 흑인 주인공의 고뇌가 가짜로 보입니다. 이러다가 주인공은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몸을 던지며 행동하는 흑인이 되었다는 거야? 그래봤자 가짜일 뿐이잖아. 그런데 뜻밖에도 이야기는 끔찍한 파국으로 치닫고, 서둘러 어정쩡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약간의 스포일러성 노출을 하면, ‘가짜 자서전’의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 흑인이라는 걸 숨기고 ‘비겁하게’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거든요. 뭐 이래? 이게 다야??하는 순간 작품에 담긴 아이러니가 슬금슬금 힘을 발휘합니다.

이제 다시 해설의 중요부분을 꼼꼼히 읽어봅니다. 그리고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가짜 자서전의 주인공이 비겁하게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던지 더욱 강력한 호소라는 것을 말이죠. 작가가 택한 가짜 자서전의 전략, 익명 출판 등의 전략이 멋지게 먹혀든 겁니다. 킹 목사와 말콤 엑스만큼 똑똑한 흑인은 많았을지언정 그들처럼 왜 위대한 사람이 드물 수밖에 없었는지 이 가짜 자서전이 일깨워주는 듯 했습니다.

이 작품이 지금 시대에 비슷한 방식으로 출간되었다면 그 당시처럼 강력한 역설을 발휘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책이 처음 진짜 자서전 행세를 하며 세상에 나타났을 때는, 흑인들은 절대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가 될 수 없었으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흑인조차 백인이 분장을 하고 연기했었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산 채로 불태워지던 때였으니까요.

암튼 전 낯선 이 작품을 이렇게 읽었고, 뜻밖에 울림을 받았습니다. 작품이 지닌 역사성을 떠나 선택 받은 엘리트 흑인이었던 저자의 고뇌와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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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3-2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채로 불태워지는 흑인이라, 영화 [스켈레톤 키]가 단연코 떠오르네요.
나쁜 카타르시스의 반전이 대단했는데..

아, 스포있는 리뷰지만 재밌게 읽었슴다 ㅎㅎ
[엉클 톰의 오두막]이 흑인문학이었군요,

딴소리만 ㅋㅋ

lazydevil 2010-03-22 19:15   좋아요 0 | URL
헉~ <스켈레톤 키>의 그런 멋진 장면이 나온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야 말로 스포~가 아닌가여...ㅠㅜ

<엉클 톰의 오두막>은 늘 드라마,영화,만화로만 봤지 저도 읽지 못했어요.

Forgettable. 2010-03-22 20:20   좋아요 0 | URL
아 ㅡㅡ 그런가요. 내용상 큰 스포는 아니어서 ^^;
미안합니다 ㅎㅎ

그리고 글케 멋진 장면은 아니구요 ㅠㅠ
영화는 재밌어용ㅋ

lazydevil 2010-03-23 10:02   좋아요 0 | URL
미안이라뇨~!! 포겟님의 화염 스포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는데..
덕분에 간만에 호러 한 편 보겠네요^^!!
 
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아직 못 읽은 책들이 침대 옆에 오십 센티미터는 쌓였고, 책장에도 책사태를 공모중인데 자꾸만 읽었던 책을 또 뒤척이는 건 무슨 심리일까? 그럼 책을 사지 말던가!

최근 몇 차례 읽은 책을 또 읽으며 깨달은 당연한 두 가지.
 
기억력. 이거 항상 제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코 아닌 부류에 속한다는 것, 어김없이. 한동안 흐름을 타고 희미한 기억을 들추어내기 전까지 정말 새롭기만 하다.
그래서 재미있는데, 일정 부분 알고 있고, 일정부분 망각이라는 베일에 가려있기에 책읽기가 한층 흥미롭다는 것. 읽는 동안 살짝 정신줄을 놓아도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미 읽은 것이기에 가능한 것. 순전히 책읽기의 재미만 따지다보면 두 번째 읽기가 늘 더 재미있다.

작품. 더 잘 보인다. 말하자면 작가의 능수능란한 솜씨가 더 잘 보인다. 인물과 사건을 쫓던 첫 번째 읽기와 달리 여유를 갖고 출발하는 책읽기는 자연히 행간을 살펴본다. 그래서 처음보다 훨씬 이야기를 만든 사람에게 가까이 가게 된다.

다시 읽은 폴 오스터의 <리바이어던>(그러니까 <거대한 괴물>)도 이런 이유로 두루두루 재미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건 또 다른 <문 팰리스>(그러니까 <달의 궁전>)이었다. 당연히 <거대한 괴물>은 <달의 궁전>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거대한 괴물>은 아직 친숙하지 않은 작가의 낯선 작품이었기에 필요이상으로 긴장하며 이야기를 쫓아갔을 것이다. 홀로 낯선 여행지를 헤매는 배낭여행자처럼.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해도 한번 왔던 곳이라 두렵지도 않다. 공들여 보지 않고 휘휙 지나쳐도 이전에 왔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이곳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기억나질 않지만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순전히 재미있다. 감동과 흥분보다 재미 말이다. 오호라, 여기 내가 지난번에 왔을 때 끼적거린 낙서(밑줄)가 아직도 남아있군. 그때 내가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이상한 곳(글귀)에 낙서(밑줄)를 하다니!(긋다니!)

의외로 <거대한 괴물>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화자인 내가 얼마 전 폭발사고로 죽은 삭스라는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의 전부다.
 
1장. 우리 처음 만난 날.(무슨 노래 제목이구나.) 삭스와 나는 이렇게 처음 만났다.
2장. 나의 도큐멘트.(또 노래 제목인가?) 삭스와 우정을 쌓아가는 동안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 즉 나는 이런 놈이며, 삭스와 나는 이런 사이야.
3장. 삭스에게 일어난 불의사고는 삭스의 삶을 뒤바꿔 놓는다. 그리고 그는 실종된다.
4장. 나는 삭스는 숨어버린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된다. 그에게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었고, 그것은 그를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몰고 간다. 그는 다시 한 번 종적을 감춘다.
5장. 나는 삭스와 다시 만난다. 그는 지난 이야기, 그가 벌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시 사라진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다.

이 단순한 구성이 전혀 뻔하지 않게 읽히는 것은 곳곳에 담겨있는 다양한 이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바로 인물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화자인 나와, 삭스, 그리고 주변인물 그 어느 것 하나도 밋밋하게 만들지 않았다. 하나같이 괴짜들이지만 그들은 정말이지 살아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울고, 웃고, 싸우고, 섹스하고, 어리석은 짓을 한다. 보편적인 괴짜들? 아~ 사랑스러운, 매력적인 인물들! 이것이 소설의 매력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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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합니다. 다 타버린 시가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무법자의 모습을 보고 반했습니다. 범죄자들을 향해 매그넘45를 무지막지하게 쏘아대는 강력계 형사에도 열광했고, 낡은 캐딜락에 침팬지를 태우고 텍사스 촌구석을 누비고 다니는 썰렁한 코미디조차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제목 <인빅터스>, 그러니까 ‘굴하지 않는~’라는 뜻의 이 제목은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몫입니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요? <용서받지 못한 자>부터 시작된 이스트우드의 감독 필모그래피는 그야말로 경이롭습니다. 특히 <미스틱 리버> 이후 더욱 확고해진 세계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클린트 할아버지는 이른바 ‘예술’을 하는 감독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최근 작품은 흔해빠진 감상을 자극하는 신파에 가깝죠. 그런데 정말 오묘합니다. 진부하기 그지없는 신파가 마음을 움직이니 말이죠. 민망하게도 이 아저씨의 영화를 보며 눈물 주르륵 주르륵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인빅터스>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가슴 한 켠이 짠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요?
아마도 클린트 할아버지의 신파에는 삶을 꿰뚫는 비범함이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은 예술가의 직관이기도 하고, 팔십 평생을 살아온 현인의 지혜가 스며있기 때문일 겁니다. 

 

 

 

 

 

 

 

클린트 할아버지의 최근작들을 보면 기교 따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냥 막 찍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에요. 각 씬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고 그냥 보여줍니다. 구차한 설명이나, 치장, 잔머리는 집어치우고 정공법으로 밀어붙입니다. 머리를 쓰기에 나는 너무 늙고 피곤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세련된 것하고는 거리가 멀죠. 달리 말하면 투박해요.

그런데 단 한 장면도 핵심을 놓치지 않고 있기에 감정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게다가 매 작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은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요. 결국 거칠고 투박한 신파는 후반으로 갈 수록 힘을 발휘합니다.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거죠. 진정한 장인입니다.

여기에 세상을 보는 건강한 영혼이 작품에 담겨있습니다.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미지는 매우 보수적입니다. 비록 미국의 가장 보수적인 장르인 서부극의 아이콘이고(비록 변종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스타가 되었지만!), 법보다 총을 먼저 들이미는 강력계 형사의 캐릭터로 유명합니다. <그랜토리노>의 주인공 코왈스키 영감처럼 꼬장꼬장한 보수적인 백인 할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해요.
그런데 그는 작품을 통해 늘 관용과 용서, 통합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습니다. 결코 제스추어 같지 않아요. 이는 그의 마지막 걸작이 될 지도 모를 <그랜토리노>에 가장 잘 드러나고 있죠.

<인빅터스> 역시 <그랜토리노>와 궤를 같이 합니다. 흑인 대통령, 백인 럭비팀 주장의 이야기죠. 이 영화에서 클린트 할아버지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요. 선은 있으나 악당은 없습니다. 비극의 중심에 있지만 희망을 보여줍니다.

즐겨 들리는 모님의 블로그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싸움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그리스는 다만 두 가지 사실에 의해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로 단결되어 있었다. 하나는 서사시였고, 다른 하나는 4년마다 한 번씩 올림피아 체전에 참가한다는 관습이었다.
- 허버트 조지 웰스 <웰스의 세계문화사> p99
 
   

즉 서사시(예술)와 올림피아(스포츠)가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건데, <인빅터스>는 순진할 정도로 이 두 가지에 충실한 작품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것이 그냥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라는 점이고, 신기할 것도 없는 것은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했다는 겁니다. 굳이 월드컵 축구, WBC 야구, 올림픽 등등 길게 열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빅터스>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넬슨 만델라를 보며, 어떤 대통령이 떠올랐습니다. 모건 프리먼과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보며 나이를 늙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럭무럭 피어올랐던 생각을 모조리 정리할 순 없지만 한가지만은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진심으로 여든 살이 된 이 할아버지 감독님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작품이 남기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축복일 테니까요.(갑자기 주성치에게도 이런 말을 해주고 싶네요. 제발 클린트 할아버지처럼 쉽게 쉽게 영화 좀 찍으슈~~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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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3-12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데빌님의 반가운 영화평이로군여~ 모님..ㅋㅋ
저도 클린트 할아버지 존경합니다.
저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때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이번 영화도 기대만땅이구여^^


lazydevil 2010-03-12 13:59   좋아요 0 | URL
영화보고 글로 정리하는 거 정말 귀찮아하는데 이 영화는 워낙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암튼 보면서 허버트 조지 웰스의 말이 번뜩 떠올랐습니다^^

느린산책 2010-03-16 15:47   좋아요 0 | URL
팔순이 넘은 클린트 할아버지..
요즘 러셀자서전을 읽고있는데 러셀은 팔십팔세때 대중적인 시민불복종 운동을 전개해 반전을 외쳤더군요.
얼마 전 아카데미를 휩쓴 캐서린 비글로우는 예순이 다 됐구여~

도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인쥐..ㅎㅎ 앞으로 살아갈 나이를 생각케 하는 요즘이어요^^

lazydevil 2010-03-17 19:59   좋아요 0 | URL
멋진 할아버지 할머니들!!! 러셀 정말 멋진 분이시군요^^
캐서린 할매도 뒤늦게 만개한 고로... 앞으로 활약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