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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8
제임스 웰든 존슨 지음, 천승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우연히 초창기 미국 흑인문학의 대표작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미국 문학도 잘 모르는데 미국 흑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종종 무장해제 상태일 때 그 작품을 더 솔직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임스 월든 존슨의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을 흥미롭게 읽는 법을 하나 제안해봅니다. 저와 같은 미국 흑인문학의 문외한인 독자들에게요.
일단 이 얄팍한 책을 무작정 펼쳐들고 읽습니다. 뭐 제목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필립 로스의 <휴먼스테인>과 비슷한 소재의 작품입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제도가 폐지된 직후 옛날 옛적 미국이 배경인 것이 다르기 하지만요. 그냥 <엉클 톰의 오두막>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듯 걍~ 읽습니다. 백인처럼 생긴 흑인 청년, 그러니까 자서전의 주인공이 살아온 삶을 쫓아가는 것이 나름 재미도 있습니다. 동시에 ‘옛날 옛적 미국은 그랬었나?’ 싶습니다. 쉴 새 없이 잘난 척 하는 저자(주인공)가 조금 재수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 얄팍한 책을 절반 쯤 읽었을 때 잠시 숨고르기를 합니다. 그리고 책 말미에 실린 해설을 읽어봅니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성실한 해설입니다. 어라? 근데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겪은 일은 순전히 뻥인 거죠. 제목에 드러난 것처럼 자서전이 아닙니다. 작품 속 주인공이 저자 제임스 월든 존슨과 동일인물이 아니란 겁니다. 해설을 좀 더 읽어보면 작가는 출판 당시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진짜 자서전인양 익명으로 출판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여기서 서둘러 해설 읽기를 멈추고 다시 작품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이 얄팍한 책의 나머지 절반을 읽어봅니다. 작품은 자꾸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내’가 겪은 자서전이라고 말하는데, 독자인 저는 이게 모두 ‘뻥!’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게다가 당시 흑인들이 받은 핍박과 사회적 위치,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백인처럼 생긴 흑인 주인공의 고뇌가 가짜로 보입니다. 이러다가 주인공은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몸을 던지며 행동하는 흑인이 되었다는 거야? 그래봤자 가짜일 뿐이잖아. 그런데 뜻밖에도 이야기는 끔찍한 파국으로 치닫고, 서둘러 어정쩡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약간의 스포일러성 노출을 하면, ‘가짜 자서전’의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 흑인이라는 걸 숨기고 ‘비겁하게’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거든요. 뭐 이래? 이게 다야??하는 순간 작품에 담긴 아이러니가 슬금슬금 힘을 발휘합니다.
이제 다시 해설의 중요부분을 꼼꼼히 읽어봅니다. 그리고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가짜 자서전의 주인공이 비겁하게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던지 더욱 강력한 호소라는 것을 말이죠. 작가가 택한 가짜 자서전의 전략, 익명 출판 등의 전략이 멋지게 먹혀든 겁니다. 킹 목사와 말콤 엑스만큼 똑똑한 흑인은 많았을지언정 그들처럼 왜 위대한 사람이 드물 수밖에 없었는지 이 가짜 자서전이 일깨워주는 듯 했습니다.
이 작품이 지금 시대에 비슷한 방식으로 출간되었다면 그 당시처럼 강력한 역설을 발휘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책이 처음 진짜 자서전 행세를 하며 세상에 나타났을 때는, 흑인들은 절대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가 될 수 없었으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흑인조차 백인이 분장을 하고 연기했었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산 채로 불태워지던 때였으니까요.
암튼 전 낯선 이 작품을 이렇게 읽었고, 뜻밖에 울림을 받았습니다. 작품이 지닌 역사성을 떠나 선택 받은 엘리트 흑인이었던 저자의 고뇌와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