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닉 혼비의 <하이 피델리티>의 가장 큰 미덕은 로브와 친구들이 만드는 베스트5 리스트도 아니고, 작가의 영국식 개그도 아니고, 쉴 새 없이 출몰하는 뮤지션들에 대한 수다도 아닙니다.(이 세가지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 지루하기짝이 없는 소설이 될 겁니다.)
이 소설의 진짜 미덕은 찌질한 남성들의 속내를 까발리는 솔직함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역시 찌질남의 푸념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면 끔찍한 소설이 될 겁니다.)

35세 미혼남인 주인공 로브는 음악에 대한 광적인 몰입한다는 것을 빼고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물입니다. 나이만 먹었을 뿐 세상을 대하는 태도나 인간적인 성숙도는 18세 소년의 그것에서 올스톱 상태죠. 이 찌질한 남자는 함께 살던 여자 친구 로라에게 차입니다. 실연당한 찌질남의 징징거림이 <하이 피델리티>의 주요 내용이죠.

주인공 로브는 모든 여자들이 피해야할 남자입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똑똑한 덕분에 어느 정도 호감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뿐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인간관계에서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인 것이 없습니다. 회피, 서투름, 무책임이 그의 주특기죠. 특히나 심각한 건 지독히 이기적이라는 겁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똑똑한 이기주의자라는 거죠. 조심하십시오.

그런데 더욱 끔찍한 사실을 하나 폭로하면, ‘대부분의 남자가 로브처럼 찌질하다!’는 겁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느 정도 성공했고, 출중한 머리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로브같은 찌질함을 가지고 있을 확률은 거의 99프로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남자들의 찌질함은 언제든지 밖으로 튀어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섹스와 관련된 것이라면요! 닉 혼비는 수컷들의 이런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냅니다.(아~~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이만큼 솔직하기 힘듭니다. 닉 혼비는 주인공의 로브의 입을 빌어 남자들의 속성과 이중성, 어리석음을 미안할 정도로 털어놓는데... 읽다보면 쪽팔려 죽을 지경입니다. 그나마 핏대를 세우지 않고, 시니컬하지만 유머러스하게 자기비하(혹은 자기 고백)를 하는 통에 참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재미있습니다. 쪽팔린 건 쪽팔린 거구요.

소설을 읽다보면 로브의 미성숙과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재미있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음악(또는 책, 아마 영화와 연극도, 그리고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이든)을 삶에 중심에 놓으면 거기서 연애 생활을 분리해내기 힘들어지고, 연애조차 마치 음악 같은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계속 집적대고, 시끄럽게 하고, 또 집적대다 아주 결딴을 내서 다 뒤엎고 다시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 결과 적당히 만족할 수가 없다.
-p186
 
   

감성을 자극하는 일체의 행태가 우리(특히 남자들)를 철부지로 만든다는 작가의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로브의 찌질함에는 일말의 건강함이 엿보입니다. 완전 제대로 분명 어이없는 루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의 삶은 창조적이지는 않더라도 소모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쌓아올린 왕국이 좁다란 골방일 뿐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심플 마인즈와 앨튼 존을 좋아하는 인간들을 여전히 무시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다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서른다섯 살, 아무리 정신연령이 십대 후반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나이를 헛먹은 것은 아니란 말이죠. 이런 건강한 찌질이들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징징거리는 로브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 <하이 피델리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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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산책 2010-03-3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질, 회피, 서투름, 무책임.. 모두 제가 좋아하는 코드들인데여~ㅋㅋ
(빌 브라이슨의 친구 카츠가 생각나는 건 왜인지..ㅎㅎ)
이 책 진짜 재밌겠어여~~ㅇㅋ찜!!

lazydevil 2010-03-31 13:42   좋아요 0 | URL
소설 속 캐릭터로 좋다는 거지 실제로는 아니시죠? 큰일납니다~ㅎㅎ
빌 브라이슨의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카츠라는 인물이 무척 독특한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