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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아직 못 읽은 책들이 침대 옆에 오십 센티미터는 쌓였고, 책장에도 책사태를 공모중인데 자꾸만 읽었던 책을 또 뒤척이는 건 무슨 심리일까? 그럼 책을 사지 말던가!
최근 몇 차례 읽은 책을 또 읽으며 깨달은 당연한 두 가지.
기억력. 이거 항상 제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코 아닌 부류에 속한다는 것, 어김없이. 한동안 흐름을 타고 희미한 기억을 들추어내기 전까지 정말 새롭기만 하다.
그래서 재미있는데, 일정 부분 알고 있고, 일정부분 망각이라는 베일에 가려있기에 책읽기가 한층 흥미롭다는 것. 읽는 동안 살짝 정신줄을 놓아도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미 읽은 것이기에 가능한 것. 순전히 책읽기의 재미만 따지다보면 두 번째 읽기가 늘 더 재미있다.
작품. 더 잘 보인다. 말하자면 작가의 능수능란한 솜씨가 더 잘 보인다. 인물과 사건을 쫓던 첫 번째 읽기와 달리 여유를 갖고 출발하는 책읽기는 자연히 행간을 살펴본다. 그래서 처음보다 훨씬 이야기를 만든 사람에게 가까이 가게 된다.
다시 읽은 폴 오스터의 <리바이어던>(그러니까 <거대한 괴물>)도 이런 이유로 두루두루 재미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건 또 다른 <문 팰리스>(그러니까 <달의 궁전>)이었다. 당연히 <거대한 괴물>은 <달의 궁전>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거대한 괴물>은 아직 친숙하지 않은 작가의 낯선 작품이었기에 필요이상으로 긴장하며 이야기를 쫓아갔을 것이다. 홀로 낯선 여행지를 헤매는 배낭여행자처럼.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해도 한번 왔던 곳이라 두렵지도 않다. 공들여 보지 않고 휘휙 지나쳐도 이전에 왔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이곳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기억나질 않지만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순전히 재미있다. 감동과 흥분보다 재미 말이다. 오호라, 여기 내가 지난번에 왔을 때 끼적거린 낙서(밑줄)가 아직도 남아있군. 그때 내가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이상한 곳(글귀)에 낙서(밑줄)를 하다니!(긋다니!)
의외로 <거대한 괴물>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화자인 내가 얼마 전 폭발사고로 죽은 삭스라는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의 전부다.
1장. 우리 처음 만난 날.(무슨 노래 제목이구나.) 삭스와 나는 이렇게 처음 만났다.
2장. 나의 도큐멘트.(또 노래 제목인가?) 삭스와 우정을 쌓아가는 동안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 즉 나는 이런 놈이며, 삭스와 나는 이런 사이야.
3장. 삭스에게 일어난 불의사고는 삭스의 삶을 뒤바꿔 놓는다. 그리고 그는 실종된다.
4장. 나는 삭스는 숨어버린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된다. 그에게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었고, 그것은 그를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몰고 간다. 그는 다시 한 번 종적을 감춘다.
5장. 나는 삭스와 다시 만난다. 그는 지난 이야기, 그가 벌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시 사라진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다.
이 단순한 구성이 전혀 뻔하지 않게 읽히는 것은 곳곳에 담겨있는 다양한 이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바로 인물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화자인 나와, 삭스, 그리고 주변인물 그 어느 것 하나도 밋밋하게 만들지 않았다. 하나같이 괴짜들이지만 그들은 정말이지 살아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울고, 웃고, 싸우고, 섹스하고, 어리석은 짓을 한다. 보편적인 괴짜들? 아~ 사랑스러운, 매력적인 인물들! 이것이 소설의 매력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