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신학 -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성경적 지침
폴 스티븐스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크리스천 창업가들과 교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스타트업 대표들과 함께 독서모임도 시작했는데, 그 모임에서 읽을 책을 찾던 중에 전부터 눈여겨보던 폴 스티븐슨이라는 저자를 선택했다. 사실 잘은 알지 못했었고,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 한 구절을 적어둔 게 있었는데, 그걸 기회로 이 책을 만나게 됐다.


일터 신학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크게 보면 일과 직업의 영역에서 어떻게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에 관한 내용이지만, 좀 더 좁게 들어가면 사업가들에게 주는 조언으로 채워져 있다. 그야말로 이번 모임에 딱 맞는 책이었던 것.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인 1부에는 “의미”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비즈니스라는 영역에 담긴 기독교적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저자는 여전히 교계에 남아있는 성속 이원론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사업이야말로 가난한 자에게 다음 끼니를 제공할뿐더러 새로운 부를 창출하게 함으로써 가난을 극복하게 돕는 최상의 장기 전략”이라고 말한다(25).


저자는 사업은 더 거룩한 어떤 일을 지원하기 위핸 도구적 가치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업 그 자체가(일을 만들고, 고객을 상대하고,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등의 그 모든 제반 업무가) 하나의 거룩한 일, 나아가 소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저자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 맞닿아 있다.


후반부에는 “동기”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제 사업이라는 영역을 기독교적으로 해 낼 수 있는지, 여기에 필요한 영적 조언들이 담겨 있는 부분으로 느껴졌다. 때문에 신학적인(또 성경적인) 접근이 자주 보인다.


저자는 사업이라는 영역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기에 정기적으로 잠시 뒤로 물러나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 진실함과 창조성,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제안한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책에서 하는 말이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올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온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고,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원래의 창조 목적을 회복하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특정한 종류의 신성한 일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다시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었고.


물론 최근에는 목사와 선교사가 하는 일이 가장 거룩하고, 교회의 제단에서 하는 일만이 신성하고 하는 식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고수하는 신자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바른 신학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룩의 영역을 지워버리는 세속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나타난 결과인 경우가 좀 더 흔하다. 결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둘은 전혀 다른 매커니즘이다.


맨 처음 말했던 모임에서 함께 교제할 기회를 누리면서, “사업의 영역에서 신앙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있구나,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팔팔한(?) 분들이” 하는 놀라움이 컸다. 그들이 신앙과 일터를 통합하는 관점에 얼마나 갈급해 있는지도 와 닿았고. 이 책은 바로 그런 독자들에게 꽤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좋은 신학적 바탕 위에 비즈니스라는 영역을 훌륭히 녹여냈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일터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다는 경험도 여기에 한 몫을 했을 것 같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신 거부 부모들은 좋은 부모가 되는 것에 골몰한다.

그들은 대학교육을 받았고 대개 중산층의 구성원이다.

그들은 다수의 육아 책을 읽었으며

아마도 이웃이나 온라인상의 육아 단체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동료들과의 토론을 통해 어떤 부모가 될 것인지 결정을 내렸다.

모유냐, 우유냐? 공립학교냐, 사립학교나?

그들은 자신을 ‘애착’이나 ‘자연’ 육아에 관심이 있는

‘깐깐한’ 부모로 생각할 수도 있다.


- 조나단 M. 버만, 『백신 거부자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터 스캔들의 일부는 그가 성직자 형제들을 제쳐놓고

좀 더 폭넓은 대중에게 호소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루터의 많은 논적은

오히려 신학적 논쟁이 이런 방식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일반 대중의 언쟁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개탄했다.

그들은 신학적 논의는 학문적 토론의 언어인

라틴어로 진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 앤드루 페트그리, 『루터, 브랜드가 되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보의 역설 - 우리는 왜 더 잘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레그 이스터브룩 지음, 박정숙 옮김 / 에코리브르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인류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전반적으로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물론 이 발전의 열매가 세계 전체에 골고루 분배되지는 않고 있지만, 그 전반적인 발전의 양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적어도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다.


책의 첫 두 장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아지고 있는 지표에 관해 말하고 있다. 몇몇 통계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과 조금 달라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오늘날 고등학교 졸업자 중 2/3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고, 고등학교 중퇴자 비율은 10% 이하라고 한다. 반면 1940년대까지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일을 시작했다. 또, 미국인의 14% 정도만이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는데, 그 14%도 전혀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그에 반해 우리는 미국의 공교육은 사실상 무너졌고, 의료보험 체제도 비참할 정도라는 식의 과장된 수사들을 쉽게 접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면 왜 현대인들은 이렇게 발전한 사회에서 살면서도 그토록 불행하다고 느낄까? 저자는 다분히 심리적인 차원의 요인들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은 과거 사람들은 앞으로 좀 더 많은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현실의 불편함을 버텨낼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있어서 그 이상의 것을 얻겠다는 기대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을 꼽는다. 또, 이미 이룬 성과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붕괴 불안 심리도 작동하고.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불평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다. 언론은 범죄 현황에 대한 과장된 보도를 즐겨하고, 보통 사람들은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사는 부자들의 생활에 관한 정보가 쉽게 퍼지는 것도 불평을 늘리는 원인 중 하나다. 사람들은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더 사치스러운 삶을 추구하는데, 당연히 모두가 그 기준치를 충족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말한다. 우리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사랑, 우정, 존경, 가족, 지위, 재미)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고, 어떤 것에 가격을 매길 수 없다면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통계에 따르면 어느 정도의 수입 증가는 행복감을 늘려주지만, 연간 약 1만 달러의 수입을 전후해서 그 효용감은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즉 돈은 행복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저자는 우리가 물질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좀 더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감사와 용서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심리적인 해결책만 제시하는 건 아니다. 책의 후반 두 장 정도는 최저임금을 좀 더 올려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대기업 CEO들이 악랄한 한탕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도 보인다. 또, 국제적인 관계에서는 이른바 공정무역이나 저개발국가에 대한 관세 인하 같은 정책의 필요성도 주장한다. 물론 이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비판과 지적이긴 한데,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약간 이질적이라는 느낌도 준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심리적인 것에 할애해 왔으니까 말이다.


“진보의 역설”이라는 책의 제목은, 경제적으로는 분명 크게 상황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진보 때문에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을 느낀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발전을 하려고 하는 걸까?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물질적인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해 온,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해 온 지난 한 세기 인류의 주류적 사고가 낳은 부작용일 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질적인 차원에만 집중하는 건(물론 우리는 물질적인 번영도 필요하다) 최종적인 답은 아닐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