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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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 번역서 제목인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도 꽤 잘 지은 문구다. 책의 내용은 제목처럼 우리가 그동안 ‘지구(환경)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실은 환경을 보호하는 데 큰 효과가 없는(종종 악화시키는) 일이었다는 것이니까.


     영문 원제목은 조금 더 강렬하다. "Apocalypse Never". 오랫동안 기독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서양에서, Apocalypse라는 단어는 거의 즉각적으로 세상의 종말에 관한 예언으로 알려진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이 단어에 큰 격변과 함께 찾아오는 종말이라는 뉘앙스가 담기게 되었는데, 책은 여기에 Never라는 강력한 부정어를 붙여서 그런 상황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환경 종말론자’에 대한 반박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몇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책의 초반과 중반 대부분을 차지하는 1~9장은 이대로 두면 곧 지구환경이 파멸을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을 검증하면서 그것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음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이 부분이 메시지에 대한 팩트체크라면, 나머지 10~12장은 그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에 대한 검증을 담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동기에는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또는 개인적인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 다만 개인적으로는 책의 전반부의 팩트체크 부분이 좀 더 인상적이다. 후반부의 내용은 찌라시에나 실릴만한 내용인데다가, 정말로 그들에게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그것을 따르는 게 맞는 거니까.

 


     환경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몇 개 있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고, 대규모 기후변화가 일어나서 온갖 자연재해들로 인한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 하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이 주장에 반박을 가한다. 1920년대 이래로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수는 92퍼센트가 줄어들었고, 심지어 이 기간 세계의 인구는 4배로 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는 이야기.


     환경운동가들은 경제발전과 환경문제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처럼 서술하기를 즐겨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역시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밀림, 원시림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무를 베지 못하게 금지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찌되었건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과정에서 연료를 얻고(장작), 농지를 늘리거나(화전), 목장을 만들기 위한 벌목은 어차피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 지역에 발전소(수력, 화력)를 건설해 주민들에게 좀 더 효율적이고 깨끗한 에너지를 공급해주고, 경제발전과 효율적 기술전수를 통해 좀 더 적은 땅에서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대답한다. 물론 환경주의자들은 이 모든 것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펄쩍 뛴다. 그들은 보호구역의 고릴라를 지키기 위해 조상 대대로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추방시키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오히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환경보호가 가능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흔히 환경에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 중 하나로 플라스틱을 꼽는다. 그러나 플라스틱이 나오기 이전 그 자리는 거북의 등껍질이나 코끼리의 상아 등이 사용되었다. 훨씬 싼 대체재(플라스틱) 덕분에 동물들에 대한 남획이 줄었다는 말이다. 비슷한 예로 새로운 화학제품들이 나오면서 고래 사냥은 경제성이 떨어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포경금지에 관한 국제적 규제도 가능해졌다.

 





     요새 한창 유행하는 친환경 에너지도 저자는 피해가지 않는다. 태양열이나 풍력 같은 자연적인 힘으로 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세상에 나온 지 제법 오래 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것들이 에너지 밀도가 낮아서 충분한 전기를 생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태양열 패널이나 풍력 터빈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엄청난 규모의 환경 파괴가 일어나기도 한다는 점도 지적된다.


     책에서 저자는 가장 좋은 대안으로 원자력 발전을 제시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탄소를 적게 배출하고, 대규모 환경파괴도 일어나지 않으며, 발전비용 역시 저렴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공포는 핵무기에 대한 공포에 의한 착시현상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 사실 원자력 발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방사능 유출, 방사성 폐기물 문제도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는 식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정말 그런지 의심이 생긴다.


     특히 일본 후쿠시마가 ‘방사능 청정지역’이라는 구절에서는 책의 앞 부분에서 읽어온 과학적 수치들까지 살짝 흔들리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지금도 종종 언론사나 개인들이 직접 방사선 측정기구를 들고 그 지역에 가서 실제 방사선량을 측정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누가 준 자료를 근거로 이런 태평한 소리를 하는 건지... 물론 갑상선과 관련된 암에 대한 위기의식이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점은 기억해 둘만 하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된 여러 자료와 수치들을 일일이 검증할 능력은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반대로 이제까지 환경보호주의자들이 말해왔던 수치들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며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책을 읽으며 주목했던 것, 인과관계에 대한 논리적인 정합성 부분이었다. 일체의 경제발전을 위한 조치들이 환경을 파괴할 것이라는 생각은 과연 옳을까.


     10년 전만해도 아직 70억이 되지 않았던 세계 인구는 이제 벌써 80억 명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그 중 상당수는 절대빈곤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느 정도 경제발전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일부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인구가 이렇게 늘어난 상황에서 경제발전을 막는다면, 그들은 환경에 더욱 좋지 않은 방식으로(장작 사용, 화전과 농장을 만들기 위한 벌목 등) 살아갈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생존 자체에 큰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다. 고릴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추방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은 경제발전이 환경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자연이 이용되는 것은 불가피하며, 어느 정도 경제가 발전하면 오히려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지극히 현실론적 주장을 하고 있다. 섣부른 친환경정책들(예컨대 태양열 발전이나 바이오매스 발전 같은)은 ‘자연적인 것이 선한 것’이라는 도그마에 근거할 뿐, 실제로는 환경에 큰 도움이 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도 중요하고.

 


     여전히 나는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한 생활 속 노력(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않거나, 물병을 들고 다니거나, 생수 대신 정수기를 이용하거나 하는)을 할 것 같다. 저자는 이런 노력들이 전체 플라스틱 폐기물을 줄이는 데 큰 기여를 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건 정말로 큰 문제들에는 손을 놓고 있으면서 작은 문제들만 크게 부각시키는 태도에 관한 비판으로 본다.


     문제는 엉뚱한 데 화력을 집중하면서 정말로 집중해야 할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이다. 부유한 나라의 환경운동가들이 선진국들의 삶의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면서, 가난한 나라들의 개발과 발전을 억누르려고 하는 건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에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이다.(저자는 환경문제를 방치하자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책 말미에 ‘자연스러움’, 혹은 ‘자연적임’에 관한 저자의 정의가 인상적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모양의 생태를 ‘좋은 것’으로 여기고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절대선인 양 생각할 때가 많지만, 지구적 규모로 보면 이미 자연은 수많은 종들이 멸종되고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되곤 해왔다는 것. 우리가 선택한 시점의 환경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인간의 오만일지도 모르겠다.


 

     환경 문제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 준 책. 읽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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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일생 - 책 파는 일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에 관하여
야마시타 겐지 지음, 김승복 옮김 / 유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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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케쇼보’라는 이름의 개인 서점을 운영했던 저자가 서점을 시작하고 문을 닫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쓴 책이다. 대학에 떨어진 뒤 무작정 집을 나와 도시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마음에 맞는 동료를 만나 함께 직접 손으로 잡지를 만들고, 이런 저런 회사에서 일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서점을 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런저런 이름의 독립서점들이 문을 열고 있다.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서점에 비해 구비할 수 있는 도서의 종류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개인서점의 현실상, 이들 서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엔 대체로 서점주인의 취향이 많이 개입되는 것 같지만, 또 한 발을 물러나서보면 비슷해 느낌일 때가 많다. 처음엔 자기의 취향으로만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지만, 결국 물건이 팔려야 계속 운영을 할 수 있는 거고, 어느 정도 대중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인 야마시타 겐지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개인서점 운영에 관한 계획을 오랫동안 준비한 것은 아니었는데(사실 우리 삶의 중요한 결정들은 종종 이렇게 갑작스러운 기회를 만나 이루어지기도 한다), 매장 전면에 자동차를 반으로 잘라 디스플레이를 했을 정도로 개성이 강하게 들어간 운영을 시도했던 듯하다.


     하지만 소수의 취향은 생계와 직결되는 일에 적용하기 어려운 법. 점차 운영에 어려움이 더해갈 즈음, 우연히 만나 영입한 두 명의 직원들의 분투로 서점은 제 궤도를 찾아가게 된다. 결국 핵심은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이에 부응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는 것. 책에서 저자는 가게와 손님의 관계는 ‘대화’와 같다고 말한다.

 


     내가 읽은 여러 작은 서점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문을 닫는 이야기로 마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서점도 마찬가지여서, 서점 운영이 10년 쯤 지날 무렵부터 저자는 폐업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개인 사업이라는 것이 갖는 고단함과 수익에 대한 압박감이 주요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책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서점운영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 매출을 올리고 있었던 저자는 곧바로 새로운 가게를 연다. 책을 주력으로 팔긴 하지만, 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오리지널 소품들도 함께 팔고 있는 일종의 안테나샵. 그것도 앞서의 책방을 문 닫은 직후(사실 이름을 바꾼 이전에 가깝다) 곧바로 시작했다고 하니 저자의 끊임없는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무슨 큰돈을 벌어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다. 사람들 곁에서, 나와 비슷한, 혹은 나와는 조금 다른 사람들의 취향에 공감하면서 책을 매개로 대화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작은 서점들의 중요한 꿈이 아닐까(물론 생계는 유지되어야겠지만). 그래서 거리마다 이런 가게들이 늘어갈 때, 사회는 좀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서점 운영의 구체적인 방식보다는, 어떤 콘셉트를 가지고 운영할 때 효과적일지, 또 개인서점을 운영한다는데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같은 것들을 안내받은 느낌이다. 전국의 모든 작은 서점 사장님들에게 응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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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번영하려면 한 사회는 

사람, 지식, 그리고 신뢰를 갖춰야 한다. 

그리고 이 자원들은 

상당 부분 무보수 가사노동의 결과로 양성된다.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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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에드 스크레인 외 출연 / 디온(The On)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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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


영화 ‘미드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제 사이에서 벌어졌던 해전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다. 일제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는 그제까지 명목상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이 전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진주만이나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드웨이나 모두 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섬들이다. 미국이 왜 그렇게 진주만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명들이 있지만, 이 넓은 바다에서 적들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 점은 결국 일제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패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날처럼 고성능의 인공위성과 레이더 등을 통한 감시도 빠져나갈 구멍이 얼마든지 있는 상황에서, 60년 전이야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 정찰기를 수차례 날려 보내서 육안으로 파악되는 결과를 모으는 게 가장 큰 정보자산 중 하나인데, 그 넓은 바다를 정찰기로 감시한다는 건 처음부터 한계가 많았다.


옛 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퇴’라는 개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물러서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만큼 정확한 정보와 상황인식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는 말이다. 문득 오늘날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지피지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상대도, 나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좁은 시야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양 날뛰는 사람들을 보면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게 그저 자기 한 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끔찍한 일이 아닌가.

 





희생.


희생이라는 가치는 이 즈음 그리 선호되는 덕목은 아니다. 다분히 개인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회 속에서 살면서, 우리는 ‘나’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 속 세상에서는 조금 달랐다. 전쟁이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 죽을 지도 모르는 비참한 이벤트이지만, 그 안에서 실제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들은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감당할 뿐이다. 뭐 대단한 대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지만, 군인으로서 맡은 사명을 감당한다. 전쟁의 승리는, 그리고 국가와 같은 공동체는 이런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결과다.


당장에 무기를 없애고, 군대를 없애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그림이 당장에라도 이뤄질 것처럼 생각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런 과격한, 혹은 극단적인 평화주의에서는 군대와 군인들에 관한 비난과 공격이 일어나기도 한다.(평화주의는 자신들의 행동에는 해당이 안 되나 보다. “우리는 평화운동가이니 우리가 하는 행위는 폭력일 수 없다”는 걸까)


C. S. 루이스는 전쟁의 정당성과 그 안에서 실제 전투행위를 하는 군인들의 용기를 분리해서 볼 것을 제안한다. 국가는 때로 정당하지 않은 무력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국제법상 규정된 전쟁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면, 그 안에서 명령에 따라 용기를 바탕으로 의무를 수행하는 군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물론 이들이 미얀마나 홍콩에서 벌어지는 식의 민간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에 참여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제복을 입은 이들의 희생과 용기는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단순한 물질적 보상을 넘어 합당한 명예가 주어지는 것이 옳다. 애써 영웅을 만들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공동체의 요구에 따라 최선을 다한 이들은 그럴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전쟁영화.


역사를 배경으로 제작되는 영화는 어느 정도 ‘고증’이라는 문제를 마주치게 된다. 특히아 이런 전쟁을 주제로 하고 있는 영화는 소위 ‘밀덕’들의 집중 분석의 대상이 된다. 다만 나처럼 그저 관심을 가진 애호가 수준이라면 이 영화는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일단 전쟁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엄청난 긴장감을 주는 데다, 서로의 사정을 파악하려는 첩보전과 동료를 위한 희생,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주는 캐릭터들이 더해지면 오락영화로서는 기본은 할 수 있으니까.


바다 한 가운데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보니,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항공모함과 함재기들을 통해 다양한 그림들을 그려낸다. 급강하폭격기들의 시선을 따라 적의 항모를 향해 떨어져 가기도 하고, 반대로 항모의 승조원이 되어 공격을 막기 위해 애쓰기도 하는 등, 그림도 다양하다.


다만 전쟁을 지나치게 ‘오락’의 차원에서만 접근해서는 문제가 될 수 있는데, 특히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런 영화의 경우 더더욱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묵직하게 이끌어 가면서, 단순한 오락꺼리로 전쟁을 보려는 시선을 차단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제대로 웃을 수 있는 건, 전투가 끝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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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K. 체스터턴의 정통 ㅣ G. K. 체스터턴의 영성 고전 시리즈 1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지음,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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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S. 루이스가 기독교로 회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몇 사람이 있다. 우선 옥스퍼드 영문학과 동료교수였던 톨킨이 있었고, 루이스가 직접 선집을 만들기도 했던 조지 맥도널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선배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체스터턴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는 이 작가를 그저 추리소설 작가로만 알고 있었다. 브라운 신부라는 주인공이 온화한 얼굴로 사건 현장을 돌아다니며 척척 해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그런데 그 작가가 이런 날카로우면서도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책을 쓰다니. 심지어 그가 쓴 대부분의 책들은 비서를 통해 구술형태로 작성된 후, 따로 퇴고조차 하지 않았다니 놀랄 수밖에. 확실히 유유상종인가보다.

 


     체스터턴은 가톨릭 신자였다. 영국인답게 어린 시절에는 성공회에 속해 있었지만(정말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관해 쓴, 일종의 신앙적 자서전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적인 자서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일단 꽤나 날카로운 풍자와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은 통상 ‘순한’ 신앙적 자서전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분이다. 여기에 책의 구성도 일어난 사건들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기 보다는(예컨대 루이스의 『예기치 못한 기쁨』은 이런 식으로 쓰였다), 주제에 따라 구분하고 있어서 그냥 읽으면 동시대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비판서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체스터턴은 자기파괴적인 당대의 주류 사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예컨대 유물론은 “미친 듯이 단순한 이론”으로, 자기논리에 갇혀 있는 일종의 자폐적 사상이다. 그 이론은 모든 것이 물질에서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어야만 한다는 한 번도 검증된 적 없는(검증될 수도 없는) 확신에 근거한다. 철학의 주류였던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저자는 비판적이다. 그들이 가장하고 있는 ‘가짜 겸손’은 결국 “아예 일하는 것 자체를 멈추게” 만들 뿐이다. 또 한 편에 놓여있는, 법과 제도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려는 무정부주의는 이름만 번지르르 할 뿐, 정작 자신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배경으로서의 규칙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보들의 사상이다.


     체스터턴은 ‘전통’의 가치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오늘날에는 더 이상 효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얄팍한 생각은 어리석은 착각일 뿐이다. 오히려 오랜 시간 검증되어 온 전통은, 우리가 간단히 생각해 내지 못한 진리가 담겨있을 가능성이 높다. 오래된 진리인 기독교를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고 내다버리는 건 경솔한 일이다.


     저자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 틀로서의 기독교를 제시한다. 세상은 다양한 오류와 문제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기독교와 그 사상이 진술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제까지 조화시킬 수 없었던 다양한 현실들이 마치 흩어졌던 퍼즐이 연결되듯 하나의 그림으로 형성된다. 그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이 점은 루이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고백되는 이유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실제로는 비판자 자신들을 향한 비판에 불과함을 날카로운 풍자로 드러낸다. 그들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이유로 기독교를 비난하고, 실은 기독교가 말하는 것과 상관 없는 이유로 기독교를 몰아세우려고 한다.

 


     곳곳에서 루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이 보인다. 확실히 루이스가 영향을 많이 받았던 저자라는 걸 알 수 있는 부분. 일부 내용은 풍자의 형식이기에 표면적인 문장 그대로 읽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신앙을 당당하게 드러냈던 위대한 작가의 글을 읽는 건, 꽤나 짜릿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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