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 [책] 1세기 그리스도인의 선교 이야기

3일 - [책] 사본학 이야기

5일 - [영화] 시빌

9일 - [책] 우주의 구조

10일 - [책] 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11일 - [영화] 이미그레이션 게임

18일 - [책] 풀잎관2

25일 - [영화] 카오스 워킹



충분한 독서시간을 갖지 못하는 건,

일이 많아서일까

마음이 분주해서일까.

그래도 부동산 알아보는 데 들어갈 시간은

이제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 좀 나아지려나...


몇 달 만에 영화관에 가본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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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3-0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방을 얻으셨나 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노란가방 2021-03-02 08:29   좋아요 0 | URL
네. 이제 대출만 나오면 됩니다. ㅋ
 


불행은 엄연한 사유재산이다. 

불행도 재산이므로 버리지 않고 단단히 간직해둔다면 

언젠가 반드시 큰 힘이 되어 나를 구원한다.


-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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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2 - 2부 ㅣ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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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편의 첫 번째 중심인물은 드루수스다. 지난 권에서 카이피오 가문과의 결혼 때문에 동생과 갈등을 빚었던 그는, 동생이 죽고 나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건 이탈리아 반도 안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이었다.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여러 도시들에 차등적인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등급이 이탈리아인들에게 부여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참정권은 없는 대신 각종 세금과 십 분의 일세, 그리도 로마가 전쟁에 나갈 경우 병력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만이 부여되었다. 이런 불만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표를 중앙에 보낼 수 없었던 탓에 문제 해결은 요원했다.


     드루수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에게 호민관이 되어 시민권을 확대하는 법률을 입안하려 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남에게 나눠주는 걸 인색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 법. 흥미로운 건 가진 것도 별로 없었던 하층민들조차 이에 반대했다는 점이다.


     사실 시민권이라는 건 혈통과 관계가 없다.(그리고 ‘혈통에 대한 집착’이라는 게 얼마나 허구적인 고집인지는 과학적 분석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출생을 통해 시민권을 얻은 이들은 그 사회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거나, 심지어 해를 끼치더라도(예컨대 범죄자들도 국적박탈을 당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 권리를 누린다. 그렇다면 사회에 적절한 기여를 하는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도 아니다.


     최근에는 인도적인 이유로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이야기들도 있다. 이른바 난민들인데, 유럽 등지에서는 (그리고 아마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피부에 와 닿는 문제다. 다만 이 부분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경우(사회에 대한 기여)와는 달라서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인권과 시민권은 다른 개념이고, 시민권의 부여 대상은 그 사회가 결정하는 것이 보다 이치에 맞다고 본다. 어떻게 위기에 처한 사람의 인권을 적절히 보호하면서 사회의 역량을 해치지 않을 수 있을지 좀 더 실제적인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결국 드루수스의 암살로 더 이상 합법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이탈리아 사람들은 ‘동맹시 전쟁’이라고 불리는 반로마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술라였다. 이제까지는 마리우스라는 큰 그림자 안에서 역할을 담당하던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전쟁의 과정에서 작가는 로마의 지배층들이 가지고 있는 잔인성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물론 잔인성의 측면에서는 그 반대편 이탈리아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산 채로 사람을 뜯어 죽이거나, 한 도시의 남자들을 모두 학살하고, 여자들을 전리품으로 챙기는 식의 행동은 르네상스 시기의 문인들이 찬양해 마지않던 고대의 잔혹한 이면이다. 특히 모든 것을 ‘계약’의 차원에서만 이해했던 로마인들은 이런 행위에 대해 어떤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갈등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술라는 첫 번째 책에서부터 보여주었던 소시오패스적인 성격을 이번에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자신보다 누군가 위에 서는 것을 못 참고 어떻게든 끌어내리겠다고 거듭 다짐하는 그의 모습은, 후에 독재관이 되어 엄청난 사람들을 숙청하게 될 미래를 엿보게 되는 듯하다. 이번 책에서 그는 로마의 최고 훈장인 풀잎관을 마침내 머리에 쓰는데, 앞으로 능력 있는 소시오패스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게 될지 불안감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한편, 뇌졸중으로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마리우스와, 그런 마리우스를 곁에서 간호하며 조금씩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카이사르(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직 아무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훗날 로마의 정체를 변화시킬 그의 활약이 기대되는 모습들이 틈틈이 발견된다.

 





     결국 동맹시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지만, 시민권은 점차 이탈리아인들에게도 확대된다. 이렇게 될 거면 애초에 왜 전쟁까지 벌어지도록 방치했나 싶기도 하지만, 인간이란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기 전까지는 뻔히 보이는 현실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작가의 특성상 전장에서 칼과 창을 맞대고 벌어지는 싸움보다 원로원 회의장과 광장, 그리고 개인 저택 등에서 말로 벌이는 싸움을 좀 더 잘 묘사하고 있으니, 앞으로 벌어진 이야기에서도 기존에 알았던 내용들과 조금은 다른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된다.(마리우스가 등장해 벌이는 정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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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이 각각 구별된 영역을 차지한다는 개념은 

고대 희랍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후 산업혁명과 빅토리아 왕조 때에 인기를 얻었다. 

핵심 관념인즉 남성은 정부와 기업 등을 포함하는 

공공의 영역을 점유하고, 

여성은 자녀 양육과 가정 관리 및 교육이 전부인 

가정의 영역을 점유한다는 것이다. 

… (중략) …

불행하게도 이런 생각은 성경과 거의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 빅토리아 왕조를 거쳐 

현대의 성경적 가부장제로 이어진 관념인즉, 

여성은 본성상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이다.


- 송인규 외 4명,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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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 한국교회, 공교회성과 공동체서 그리고 공공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망한다
이도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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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이끌려서 손에 든 책이다. 코로나19는 지난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했고,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만 입었지만, 그래도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1년이나 이 사태를 겪으면서 나름 대응체제를 마련하고는 있지만, 충분한 대응여력이 없는 자영업자들 사이에는 피해가 누적되고만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대응능력이 부족한 업장(?)들 중 하나가 바로 교회다!(물론 교회는 단순히 수익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은 아니다.) 코로나 사태가 1년이 넘어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파악 없이, ‘곧 나아지겠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회로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고, 최근에는 짜증을 부리는 단계에 접어든 것 같기도 하다.(물론 그 마음이야 알겠지만, 어디 교회들만 고통을 감내하고 있던가.)

 





     책은 코로나 팬데믹이 불러온 사회적인 변화를 분석하고, 교회가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이 난국을 돌파해 나가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1장에서 저자는 코로나 팬데믹을 해석하는 기독교계의 관점이 지나치게 ‘신정론’에 치우쳐져 있다고 말한다. 신정론이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신앙적 고백을, 현실 속 악의 파괴성 앞에서도 여전히 유지시키기 위한 신학적 작업이다. 그러나 이건 교회 안,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내밀 수 있는 답변이지, 교회 밖 사람들에게 할 말은 아니다. C. S. 루이스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번역’작업이 필요한 건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필요한 건 신정론이 아니라 재난 상황에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세상이 욕하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다. 신정론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애쓰는 건 애초에 초점을 잘못 맞춘 것이다. 우리가 이 상황에서 말 도 안 되는 정치논리에 편승해 투덜대는 대신 제대로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교회를 향한 눈이 이렇게 악화되었을까?


     2장부터 4장은 각각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정의와 생태, 평화에 대응시켜 이 시대가 제기하는 과제에 어떻게 교회가 대답해야 하는가를 제안하는데, 문제분석과 인식에 좀 더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고, 그에 대한 해결책 부분은 조금 빈약한 느낌이다. 분석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책이나 신문을 찾아본 사람들은 충분히 알만한 내용들인지라 새로움도 덜하다.


     이데올로기의 전환(우에서 좌로의 가치 이동)을 다루는 5장으로 넘어오면 사회분석서로서의 이 책의 정체성이 좀 더 두드러진다. 개인적으로는 교회가 이런 부분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2~5장에서 분석하고 있는 문제들이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인해서 새롭게 나타난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이건 책의 내용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내용은 적절하다―책 제목에서 지목하고 있는 주제가 책 내용에서 잘 풀려나오고 있는가의 차원이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직접 다루고 있는 6장은 약간 다르다. 코로나19로 인해 심각해진 ‘불안’을 다루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파라볼로이”, 즉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로 정의한 저자는, 오늘날 교회에게 필요한 모습이 이것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저자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서 시행했던 다양한 노력들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좋은 도전을 받게 된다.

 





     덧셈과 뺄셈을 배우지 않고는 곱셈과 나눗셈을 배울 수 없다.(C. S. 루이스의 책에서 본 비유다). 하나의 단계를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한국교회의 과제들’은, 비록 그것이 꼭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코로나19 때문에 그 문제점이 더욱 커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 과제들을 적절히 풀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좀처럼 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할 것 같다. 끊임없는 과거로의 회귀와 이로 인한 정체, 그리고 퇴보라는 교과서적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여기저기 이 책의 저자와 비슷한 고민들을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점점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당장 내 동기들 중에서도 그런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들의 고민과 작은 실천에 박수를 보낸다. 좀 더 많은 이들이 이 고민과 문제풀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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