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서 온 편지
시모어토핑 지음, 정회성 옮김 / 한문화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  요약 ]

 

        중국을 사랑하는 미국인 젠슨. 그는 도교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에 머물면서, 그 땅의 사람들, 건축물, 문화 등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점차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내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전쟁의 포화는 수많은 예술품과 건축물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심각한 타격은 중국인들 사이에 나타나는 극한의 대립이었다.

 

        전쟁은 젠슨의 연구도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중국을 떠나야 하는가 싶었던 젠슨에게 CIA 소속의 사람들이 접근해 온다. 그들은 젠슨의 중국거주를 도와주는 대신, 그가 정보부를 위해 모종의 일을 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들이 들춰내는 자신의 약점들을 듣고, 젠슨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즈음 젠슨이 알게 된 한 여성이 있었다. 릴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천진 대학교의 학생으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다. 부패한 국민당 정권 대신, 중국의 개혁을 공언하고 있는 공산당이 집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릴리안. 그녀가 처음 젠슨을 만나게 된 것은 이 운동에 젠슨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지만, 어디 사람 일이라는 게 뜻대로만 되던가. 젠슨과 릴리안 모두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고 만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상황은 둘이 달콤한 사랑 놀음에만 빠져 있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특히 공산당 소속의 인민해방군이 점차 베이징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위기감을 가져다주었다. 만약 국민당이 베이징을 사수하기 위해 저항을 한다면, 수 천 년의 문화재와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될 판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한 가지 특명이 주어진다. 베이징을 공산당에게 양도하는 협정을 맺는 일이다. 졸지에 젠슨은 두 진영 사이에서 위험한 중개인으로서 활동하게 되어 버렸다.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내전 당시의 중국의 상황 가운데서, 베이징의 파괴를 막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니는 젠슨. 과연 그의 노력은 결실을 볼 것인가, 릴리안과의 사랑은 또 어떻게 될까.


 

 


[ 감상평 ]

 

        썩 유명한 제목의 책이라고 생각해서 골랐는데, 알고 보니 동명의 다른 책이 있었다. ㅡㅡ;; 책을 다 읽고서야 알게 됐는데,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다 내 무지 탓이다.

 

        ‘혁명기의 중국, 혁명보다 강렬한 사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멋진 말이다. 하지만 과연 책의 내용이 부제에 상응할 정도의 무게감과 감동을 지니고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 쳐줘서 부제의 전반부인 ‘혁명기의 중국’까지는 어느 정도 소설을 통해 드러냈는지 모르겠는데, 나머지 부분의 ‘혁명보다 강렬한 사랑’이라는 말은 말 뿐인 것이 아닌가 싶다. 소설 전체에 걸쳐서 젠슨과 릴리안의 사랑 이야기는 그다지 큰 비중을 갖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둘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접촉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거의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할 뿐이다. ‘사랑’이 ‘혁명’보다 앞서는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작가가 기자출신이라 그런지 사실묘사에는 충실했지만, 감정묘사나 이야기의 전반적인 완성도는 떨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이야기의 결말 부분이다. 혁명도 사랑도 완성되지 못하는 모습. 하지만 작가는 그 부분에 대한 적절한 의미부여에도 실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적절한 감동도 주지 못하고 있다.

 

 


        인물의 성격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도,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혁명을 이겨내는 사랑을 이루려면 적어도 상당한 결단력과 강력한 추진력, 판단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하지만 젠슨이나 릴리안이라는 인물 모두 이런 면에 있어서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언뜻 개인의 주관은 강한 것 같지만, 중요한 순간이 오면 언제나 자신의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강한 세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래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기 어렵지 않는가.

 


        역경을 이겨내는 아름다우면서고 강력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실망을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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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파괴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적이야말로 구세주다.

적의 존재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역동적으로 살 수 있다.

적이 있음으로써 삶이라는 이 음울한 사건은 웅장한 서사시가 되는 것이다.

 

 

 

[ 요약 ]

 

        일본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일곱 살 때 중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한 벨기에 소녀의 이야기다. 이런 유랑의 삶을 살게 된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직업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외교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 이야기는 여기서 끝. 이 소설은 일곱 살짜리 소녀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중국 주재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의 외국인 거주 구역으로 이사를 온 소녀.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소녀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피부로 느낀다. 남다른 관찰력과 깊은 사고를 좋아하는 소녀는 ‘공산주의 국가란 선풍기가 있는 나라’라는 독특한 고찰을 한다. 공산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경색된 느낌과 경제적인 빈곤을 매우 잘 잡아낸 고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일곱 살짜리의 눈으로 본 공산주의 사회’와 같은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이는 아이일 뿐. 이야기는 외국인 거주 지역이라는 폐쇄된 지역에서 벌어진 아이들 사이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전쟁’이 두 번 등장한다. 하나는 독일인 아이들과 여타의 유럽지역 아이들로 구성된 ‘연합군’과의 ‘골목전쟁’이다. 소녀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독일인 아이들을 골탕 먹이고 괴롭힌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전쟁 말고도 또 하나의 전쟁이 소설에는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밀고 당기기’가 그것이다.

 

        두 건의 거대한 전쟁에 직접 참여한 일곱 살짜리 소녀의 이야기. 저자는 소녀의 눈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소녀의 심리상태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 감상평 ]

 

        책의 표지 바로 다음 장에 저자의 통통한 얼굴이 실려 있다. 책이 발행일이 1999년이라서 그런가? 최근에 나오는 책들에 실려 있는 갸름한 얼굴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화장기술, 혹은 촬영, 조작 기술의 발달인지, 아니면 대대적인 다이어트를 감안한 것인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아멜리 노통브가 쓴 책이 아닌가. 작가가 쓴 다른 책들에서 받은 ‘감동’이 어느 정도 이상이었기에, 저자의 이름만 보더라도 이제는 손이 가게 되어 버렸다.

 

 

        책장을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든 생각은, 저자의 다른 소설인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라는 책과 유사한 분위기라는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 세살짜리 아이의 눈으로 본 일본 세계라는 주제였다면, 이 소설은 일곱 살짜리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이니까.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두 책은 비슷하다. 사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은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과 이어진다.

 

        하지만 내용상으로 넘어가면 좀 다른 느낌이다. 앞의 책이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세 살짜리 꼬마가 바라본 세상의 경이로움이 주요 주제라면, 이 책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조금 더 성장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여전히 소녀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지만, 뭐 소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철저히 ‘나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는가.

 

 

        작가가 비교적 초기에 쓴 이야기라서 그런지, 최근에 나온 책들과는 달리 왠지 풋풋한 느낌도 드는 책이다. 하지만 아멜리 노통브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기에는 약간 어려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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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대리인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민심이라고? 너는 민심을 몰라.

런 고상한 행동만 하면, 로마는 수도원이 돼버려.

사람들은 한때는 감동도 하겠지만 금방 싫증이 나버릴 거야.”

 

 

 

 

[ 요약 ]

 

        르네상스로 알려진 시기의 종반부를 살았던 네 명의 교황에 관한 이야기다. 비오 2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가 그들이다. 네 명의 인물은 언급된 순서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데, 각기 나머지의 교황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면들을 지니고 있다. 흔히 많은 교황들이 거의 무색무미의 재위 기간들을 보내다가 사라져버린데 반해, 이 네명의 교황들이 연이어 올랐던 이 시기는 좀 이례적이라고 하겠다.

 

         먼저 비오 2세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다시 한 번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교황이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십자군과는 무려 200년이 넘는 시차가 있었다. 시대는 물론 사람들도 변해버린 상태. 이미 민족국가의 개념은 거의 기정사실화가 된 그 시대에 과연 새로운 십자군의 결성은 가능했을까.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수도사와의 대결로 알려진 인물이다. 또, 체사레 보르자라는 ‘아들’(양자도 아니고 친아들)을 통해 이탈리아의 지배를 꿈꿨던 인물이기도 하다. 나나미 여사는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사이에 오고갔던 서신 등을 근거로, 알렉산데르 6세의 교활함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율리우스 2세는 즉위 초부터 직접 전장터를 돌아다녔던 교황이었다. 물론 그의 개인적인 용명을 떨친 적은 없었지만(그러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제법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율리우스 2세의 공적은,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강대국들(주로 프랑스나 스페인, 독일 등의)의 ‘독’들을 또 다른 ‘독’과의 연합을 통해 물리쳐 낸 일이다. 그의 재위 기간 내에 적과 파트너들은 계속해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율리우스 2세의 연극에 배우로서 참여하는 듯 했지만, 결국 그가 죽기 직전 최후로 남겨진 것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니 좀 더 악화된 것 같은 이탈리아의 상태였다.

 

        마지막인 레오 10세는 시오노 나나미가 ‘마지막 귀족적인 교황’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세 사람의 교황의 재산(전임 교황인 율리우스 2세의 저축금, 자신의 재산, 다음 교황이 떠맡은 빚)을 탕진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통치를 하는 내내 물 쓰듯 돈을 낭비했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이 ‘신의 대리인’의 자리에 올랐던 시기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시오노 나나미는 딱딱한 ‘설명’이 아니라 리드미컬한 ‘이야기’로 이 시기를 잘 포착해내고 있다.

 

[ 감상평 ]

         네 명의 개성 있는 교황들을 통해,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당시의 독특한 시대적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채 5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으로, 그것도 많은 내용을 담기에 ‘효율적’인 ‘설명’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그 반대인 ‘이야기’라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저자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중요한 포인트들을 잡아냄으로써, 하나의 이어지는 이야기로 구성해낸다는 쉽지 않은 작업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다.

 

        군데군데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강력한 반 종교적 사관이 엿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글의 시작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붓는다.


        ‘지나친 금욕은 흔히 광신의 온상이 된다. 금욕생활로 몸은 수척해지지만, 상상력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정의라고 믿고, 자신이 믿는 것은 모두 신의 계시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신의 선택을 받은 자신이 그 계시를 지상에 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들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


        한 인물의 평생의 작업을, 저자는 배고픔으로 인한 정신착란쯤으로 평가절하 해버린다. 그것도 저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정세판단과 어긋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쯤 하면 슬슬 시오노 나나미의 강력한 반 종교적 성향에 인상부터 찌푸려진다. 저자가 쓴 20권이 넘는 책들을 직접 읽어 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자의 종교분야에 관한 독선과 아집은 점점 완고해져만 가는 듯 하다.

 

 

        역시 역사란 단편적으로 알아서는 부족하다. 책을 읽기 전에 서로 다른 세 권의 책을 통해 이 책에 등장하는 교황들 중 세 명에 관해서는 이미 접해 봤었지만, 그들이 이런 식으로 연이어 교황이 되었다는 것과, 그들의 정책 사이에 나타나는 중심추의 독특함,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에 관한 지식은 이 책을 통해서 정리하게 되었다. 용케도 흥미로운 시기를 잘 포착해 이야기로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아니 때때로 조롱하고 경멸하는 사람이 쓴 기독교 인물에 관한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시종일관 독설과 비난일색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비오 2세)만 빼고는 나머지 교황들이 순수하게 ‘종교적인’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꼭 교회 역사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르네상스 시기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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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무엇보다도 플렉트뤼드는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단조롭고 게으르고 목적 없는 헛된 삶을

견뎌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애는 자신의 치열한 생활과 금기에 안도했다.

적어도 자신은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1. 요약

 

        19살짜리 아내가 남편을 죽여 버렸다. 그것도 임신 중에.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플렉트뤼드라는 중세식의 이름을 지어주고는 자살을 해버린 어린 엄마. 그리고 이모의 집에서 셋째 딸로 자라게 된 플렉트뤼드. 소설은 비극적으로 시작한다.

 

        자라면서 아름다운 외모와 평범하지 않은 기질로 주목을 받던 플렉트뤼드는, 그녀에게 매료된 이모이자 엄마의 적극적인 지지(어쩌면 애착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는)를 받아 강한 자의식과 함께 감정적인 기질을 키워나간다. 그런 그녀가 춤, 그것도 발레에 흥미를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 발레의 여주인공만큼 그녀의 강한 자의식과 격정적인 감정상태를 잘 드러내줄 만한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발레학교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많은 것을 얻고, 또 잃어버린 플렉트뤼드. 갑작스러운 사고는 그녀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러는 동안 독자는 또 다른 갑작스러운 사고에 맞닥뜨리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2. 감상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이라는 거창한 부제가 딸려 있는 책이라 기대감을 가지고 뽑아들었다. 사실 이미 작가의 다른 책들을 보고 작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설사 다른 이름이 붙어 있더라도 당연히 뽑아들었을 책이다. 하지만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생각보다 책의 내용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작가의 다른 책이, 독자의 마음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의 능수능란한 글솜씨를 자랑했던데 비하면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스토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단조로움 때문일 듯싶다. 주인공인 플렉트뤼드의 일상을 있는 보여주는데 그치고 있다.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적도, 어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있었다고 해도 그다지 부각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마지막에 작가인 ‘아멜리 노통브’가 왜 등장하는지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스토리 중심의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참 실망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렵다.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이 보여주는 ‘평균 이상’의 감정적인 격앙상태에 관한 묘사들을 잘 생각해보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만, 사실 지금으로선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고, 너무 피곤하다. 지금으로선 그나마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자신을 죽여버리다니. 당혹스러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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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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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어려운 것은,

개혁으로 손해를 보는 기득권층은

개혁하면 손해라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에 격렬히 반대하는 반면,

개혁으로 이익을 볼 터인 비기득권층은

개혁이 뭐가 어떻게 이로운지 몰라서

당분간은 지지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거나 미지근하게 지지하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1. 요약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세 아들 -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과 두 명의 조카 -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였지만 한 차례의 숙청과 내부 갈등으로 최후의 계승자가 된 것은 둘째인 콘스탄티우스였다. 위기의 제국을 홀로 통치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처음에는 사촌인 갈루스에게, 그리고 그가 숙청된 후에는 갈루스의 동생인 율리아누스에게 제국 방위의 책임을 나누어 준다.

 

     콘스탄티우스가 죽고 제위를 계승한 것은 율리아누스였다. 이제까지 철학도였던 율리아누스는 생각보다 제국 통치의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는다. 신하들은 호위대장이었던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7개월 간의 짧은 통치를 하고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요비아누스를 대신해 황제가 된 것은 순수하게 계르만족의 혈통이었다는 발렌티니아누스였다.

 

     11년간의 제위 기간을 북방의 이민족들과의 싸움으로 보낸 발렌티니아누스의 뒤를 이어 선제의 아들인 16살의 그라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다. 이 시기 훈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이민족들의 등장으로 마치 도미노처럼 동고트족이 서고트족의 영역으로 밀려들어왔고, 서고트족은 로마쪽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제국의 동방을 책임지던 선황의 동생 발렌스가 죽고, 제국 서방을 책임지던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를 발탁해 그에게 동방을 맡긴다. 이후 그라티아누스가 반란으로 죽임을 당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전체의 황제가 된다.

 

     제국을 위협하는 이민족들의 침입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것과 동시에, 이 시기를 특징짓는 것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였다. 율리아누스가 로마의 전통 종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은 예외적인 움직임이었다. 388년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기존의 로마 종교의 공식적인 폐지를 결정한다.

 

 

2. 감상평 。。。。。。。        

 

     로마 제국은 착착 그 최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역사의 결과를 아는 후세인들이 보는 관점이고,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당면한 위기를 하나씩 대처하기 위해 애를 썼다. 출신도 배경도 성장환경도 다 달랐던 당시의 황제들이 동분서주하며 제국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후세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로마 말기의 황제들은 황궁 안에서 먹고 마시며 제국의 안위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열네 번째 책의 부제를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붙였다. 물론 그녀의 이전 책들을 읽었다면 이 표현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자신은 종교문제에 관해 꽤나 중립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표현에는 묘하게 비꼬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듯하다. 진짜 그리스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꽤나 늘 자기들끼리 싸우면서도 기독교를 제국통합의 기치로 삼고자 했던 황제들 덕분에 결국 황제들까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제국의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식이다.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유물론자인 저자의 종교적 이해는 대단히 제한적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 더 자주 푸념처럼 등장하고 만다. 결국 대단히 피상적인 관찰과 해석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쯤 해서 저자가 이 시리즈를 내면서 자신을 역사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역사학도로 소개하는 목적이 짐작이 간다. 역사가로서 역사책을 저술한다면 그가 결코 절대적으로 객관적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객관적 관점을 띄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마추어 역사학도라면 굳이 그런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책 자체는 역사가처럼 서술하면서 독자들의 저항감을 낮춰두고는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 서술인 것처럼 집어넣는다. 그래도 누군가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자신은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일 뿐이라고 한 발을 뺄 수 있다. 대단히 영리한 자리잡기이다. 아무튼 저자는 영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아예 포기하고 있는 듯 한데, 이 점은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한 축을 스스로 내차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시오노 나나미가 책을 재미있게 쓰고 있지 못하다(책 자체가 아니라 책을 쓰는 저자의 심적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애착을 갖고 쓰고 있는 로마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시기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날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의 마음과 비슷할까. 고대의 많은 역사가들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는지, (자기가 생각하기에) 책의 대상이 되는 국가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붓을 꺾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꿋꿋이 이야기를 연결시켜나가고 있는 나나미 여사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열네 번째 책은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부분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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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버러지 2006-07-0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미의 편향적 역사관점은 독자인 나로서도 이제 슬슬 짜증이 나게 만든다. 그녀는 마치 로마는 원래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로마다와야 하고, 14권의 로마답지 못한 기독교 동화과정은 로마사에서 없었어야 할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마는 극단으로 흐르는 것은 오히려 공감을 잃게 만드는 약점이 있다

노란가방 2008-10-01 19:05   좋아요 0 | URL
저도 동의합니다.
이전 책들에서 저자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원칙을 깨뜨리고 있죠.
후세의 관점으로 과거를 억지로 재단하려는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