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혁이 어려운 것은,

개혁으로 손해를 보는 기득권층은

개혁하면 손해라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에 격렬히 반대하는 반면,

개혁으로 이익을 볼 터인 비기득권층은

개혁이 뭐가 어떻게 이로운지 몰라서

당분간은 지지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거나 미지근하게 지지하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1. 요약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세 아들 -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과 두 명의 조카 -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였지만 한 차례의 숙청과 내부 갈등으로 최후의 계승자가 된 것은 둘째인 콘스탄티우스였다. 위기의 제국을 홀로 통치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처음에는 사촌인 갈루스에게, 그리고 그가 숙청된 후에는 갈루스의 동생인 율리아누스에게 제국 방위의 책임을 나누어 준다.

 

     콘스탄티우스가 죽고 제위를 계승한 것은 율리아누스였다. 이제까지 철학도였던 율리아누스는 생각보다 제국 통치의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는다. 신하들은 호위대장이었던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7개월 간의 짧은 통치를 하고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요비아누스를 대신해 황제가 된 것은 순수하게 계르만족의 혈통이었다는 발렌티니아누스였다.

 

     11년간의 제위 기간을 북방의 이민족들과의 싸움으로 보낸 발렌티니아누스의 뒤를 이어 선제의 아들인 16살의 그라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다. 이 시기 훈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이민족들의 등장으로 마치 도미노처럼 동고트족이 서고트족의 영역으로 밀려들어왔고, 서고트족은 로마쪽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제국의 동방을 책임지던 선황의 동생 발렌스가 죽고, 제국 서방을 책임지던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를 발탁해 그에게 동방을 맡긴다. 이후 그라티아누스가 반란으로 죽임을 당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전체의 황제가 된다.

 

     제국을 위협하는 이민족들의 침입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것과 동시에, 이 시기를 특징짓는 것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였다. 율리아누스가 로마의 전통 종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은 예외적인 움직임이었다. 388년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기존의 로마 종교의 공식적인 폐지를 결정한다.

 

 

2. 감상평 。。。。。。。        

 

     로마 제국은 착착 그 최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역사의 결과를 아는 후세인들이 보는 관점이고,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당면한 위기를 하나씩 대처하기 위해 애를 썼다. 출신도 배경도 성장환경도 다 달랐던 당시의 황제들이 동분서주하며 제국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후세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로마 말기의 황제들은 황궁 안에서 먹고 마시며 제국의 안위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열네 번째 책의 부제를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붙였다. 물론 그녀의 이전 책들을 읽었다면 이 표현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자신은 종교문제에 관해 꽤나 중립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표현에는 묘하게 비꼬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듯하다. 진짜 그리스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꽤나 늘 자기들끼리 싸우면서도 기독교를 제국통합의 기치로 삼고자 했던 황제들 덕분에 결국 황제들까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제국의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식이다.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유물론자인 저자의 종교적 이해는 대단히 제한적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 더 자주 푸념처럼 등장하고 만다. 결국 대단히 피상적인 관찰과 해석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쯤 해서 저자가 이 시리즈를 내면서 자신을 역사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역사학도로 소개하는 목적이 짐작이 간다. 역사가로서 역사책을 저술한다면 그가 결코 절대적으로 객관적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객관적 관점을 띄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마추어 역사학도라면 굳이 그런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책 자체는 역사가처럼 서술하면서 독자들의 저항감을 낮춰두고는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 서술인 것처럼 집어넣는다. 그래도 누군가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자신은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일 뿐이라고 한 발을 뺄 수 있다. 대단히 영리한 자리잡기이다. 아무튼 저자는 영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아예 포기하고 있는 듯 한데, 이 점은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한 축을 스스로 내차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시오노 나나미가 책을 재미있게 쓰고 있지 못하다(책 자체가 아니라 책을 쓰는 저자의 심적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애착을 갖고 쓰고 있는 로마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시기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날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의 마음과 비슷할까. 고대의 많은 역사가들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는지, (자기가 생각하기에) 책의 대상이 되는 국가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붓을 꺾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꿋꿋이 이야기를 연결시켜나가고 있는 나나미 여사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열네 번째 책은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부분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버러지 2006-07-0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미의 편향적 역사관점은 독자인 나로서도 이제 슬슬 짜증이 나게 만든다. 그녀는 마치 로마는 원래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로마다와야 하고, 14권의 로마답지 못한 기독교 동화과정은 로마사에서 없었어야 할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마는 극단으로 흐르는 것은 오히려 공감을 잃게 만드는 약점이 있다

노란가방 2008-10-01 19:05   좋아요 0 | URL
저도 동의합니다.
이전 책들에서 저자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원칙을 깨뜨리고 있죠.
후세의 관점으로 과거를 억지로 재단하려는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