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현대 기독교사다. 이 시기 교회를 설명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세계화에 발맞추어 전 세계적인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어느 정도 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선교는 중세에도 다양한 지역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범위와 깊이가 크게 늘어난 것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 때문이니 말이다.
그래서 책 역시 선교운동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구 열강이 세계 각지로 세력을 떨치면서 그와 함께 교회도 그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것. 여기에는 제국주의적 선교라는 비판적 지점도 분명 존재하지만, 당시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선교지로 떠났던 수많은 이름 없는 헌신자들의 노력을 그 한 마디로 폄훼하는 건 부당한 일일 것이다.
또 하나 현대 기독교를 설명하는 용어는 ‘복음주의’다. 그 정의부터가 쉽지 않은 이 신학적 입장은 시대에 따라 그 범위와 내용이 상당히 달라졌다. 하지만 오늘날 (그 이름 때문인 것인지) 상당히 많은 이들이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 담긴 뉘앙스는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건전한 상식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정도인 것 같다.
복음주의가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했던 전 지구적 범위의 활발한 선교활동에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끼친 큰 영향력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나 존 스토트, 빌리 그레이엄 같은 인물들이 있고, 분명 오늘날 기독교계는 이들의 공헌에 힘입어 성장한 면이 있다.
이외에도 현대 기독교는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개인적인 영성이 강조되는 신앙의 흐름이 있고, 오순절주의로 대표되는 은사주의적 흐름이 또 한 편에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토피아적 이상을 포기한 채 현실에 천착하는 자유주의적 흐름이 나타난 것도 눈여겨 볼만한 지점.
책 말미에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정교회의 흐름을 간략히 요약하는 부분이 있어 눈에 띈다. 마지막 장은 기독교로부터의 지나친 일탈을 시도한 국내외의 이단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저자는 여기에 “선을 넘은 종교적 실험들”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디까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포용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저자가 언급하는 ‘선을 넘은 실험’ 중에는 명백히 사이비로 지목되는 것들(인민사원이라든지, 우리나라의 오대양 같은)도 있는가 하면, 몰몬교나 안식교, 통일교, 하나님의교회, 신천지 같은 신흥종교들도 있다. 물론 지금은 그들 스스로 기독교와 거리를 두는 집단들도 있지만, 일부는 여전히 그 뿌리를 기독교에 갖다 대고 기생하는 것처럼 보이니.
생각해 보면 오순절부의의 광적인 은사주의적 분파들도 초기에는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좀 과도한 내용을 교리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아 보이기도 하고. 여기에 몰몬교나 안식교 같은 종교단체들은 미국에서는 적어도 기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 함께 분류되기도 하니 문제는 좀 복잡해진다.
좋은 기획과 훌륭한 저자들이 참여해 한국교회에 도움이 될 만한 시리즈가 나왔다. 특히 한국 강연자(저자)들이 집필해 우리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된 상태에서 역사를 살핀다는 점은 이 시리즈의 특별한 장점인 것 같다. 수없이 분화되는 현대 교회의 다양한 신학적/신앙적 조류들을 나름 잘 갈무리해 낸 책이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가지고 뭔가를 하느라 바쁜 나머지
그것이 우리에게 작용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작품 안에서
점점 더 우리 자신만 만나게 됩니다.
- C. S. 루이스, 『오독』 중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를 보는 내내 익숙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대규모 재난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혼란에 빠지고, 몇몇은 희생되면서 남은 사람들은 가까스로 고생을 하며 결국 구조된다. 뭐 재난영화라는 게 대체로 이런 패턴을 따르긴 하지만...
주인공 차정원(이선균)은 청와대에서 일하는 비서관으로, 딸의 유학을 위해 인천공항으로 가던 중 갑자기 발생한 사고로 다리 위에서 고립되어 버린다. 여느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꽤나 높은 공직자가 여기 고립된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게 이 영화의 차별점인데, 차기 대통령이 유력한 안보실장의 직속인지라, 그냥 다 쓸어버리는 식의 해결책을 위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막는 주요한 장치.
하지만 단지 그것 말고는 크게 다른 점이 없다. 주인공이 딸과 함께 위기에 빠지는 그림은 “부산행”에서도 봤던 장면이고, 좁은 열차 안에서 좀비떼의 습격을 받는 것이나 앞뒤가 막힌 다리 위에서 유전자 조작 군견들의 습격을 받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 물론 사실상 거의 소망이 없이 끝났던 부산행과는 달리, 결국 생존자들이 구조가 되고 사태가 어느 정도 진압되는 게 차이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결말도 익히 봐 왔던 것이긴 하다.
재난 영화의 성공 공식은 뭘까.
역시나 이런 재난 영화의 포인트는 화려한 볼거리에 있지 않나 싶다. 뭔가 펑펑 터져나가고, 무너지고, 사방에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가 어려운 위기 속에 주인공을 몰아넣고, 어떻게 빠져나오는지를 보자 하는 식이다.
이런 판에 다리 위라는 공간이 적절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그 다리를 어떻게든 폭발시키려고 유조차가 뒤집어지고 터지는 장면을 넣기도 했고, 유전자 조작 군견들을 대거 쏟아 붓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다중 교통사고 정도로 그런 큰 그림이 그려질까 싶기도 하고,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기 위해 삽입한 “유전자 조작 군견”의 부작용이라는 것도 그리 와 닿지는 않는다.
여기에 또 흔하디흔한, 권력 최상층부의 은폐 공작이라는 소재가 끝내 등장하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자기 라인에서 충성을 다하는 주인공을 구해줄 것처럼 하던 안보실장(김태우)은 자신이 승인한 프로젝트가 실패해 사람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결국 자신의 수하인 차정원을 버리고자 한다.
하지만 애초에 안보실장이라는 캐릭터가 빌런으로서 충분히 묘사가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막판에 갑자기 모든 책임을 몰아넣는 게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영화의 초점이 주인공 일행의 생존을 위한 투쟁인지(그러기엔 액션이 약하다), 위험한 실험을 비밀리에 추진한 정부와 권력자에 대한 규탄인지(전화 몇 통으로 묘사하는 게 전부다), 그것도 아니면 인간을 위협하게 된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인지(애초에 노트북만 두들길 뿐이다) 모호하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부재.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을 쓰게 되는 부분은 등장하는 캐릭터들 중 누구도 (심지어 주인공을 포함해서) 감정 이입을 할 만큼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우선 당장 주인공 격인 차정원은 자기가 모시는 안보실장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지극히 편파적인 정책 결정을 내리도록 궤변을 늘어놓는 인물이다. 물론 사고를 겪으면서 생각이 좀 달라지기는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무슨 공익을 위한 각성이나 윤리적 개선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모시던 상사가 자기를 버렸다는 배신감에 대한 반발이었다.
주인공의 딸 역시, 대책 없이 여기저기를 산책하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캐릭터이다. 예의가 없어서 짜증이 난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지금 다리가 끊기고 눈앞에서 수십 중 추돌 사고가 일어났는데, 거기가 어디라도 저리 태연하게 돌아다니나 싶은 캐릭터.
실험의 책임자이면서 결국 개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하고 일을 크게 벌린 양박사(김희원) 캐릭터부터는 짜증 유발자에 가깝다. 외골수의 연구자라는 캐릭터를 잡았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시종일관 책임감은 하나도 없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은 또 엄청 낸다.
그리고 꽤나 비중 있는 역으로 영화 내내 잔뜩 등장하는 견인차 기사 조박(주지훈)은 왜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전체 스토리로부터 붕 떠 있는 캐릭터다. 쉴 새 없이 농담과 가벼운 말들을 쏟아내는 모습은 귀가 아프게 만들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제목처럼 책에 관한 다양한 역사적 이야기를 시대 순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다. 고대의, 아직 책이라는 형태로 묶이기 이전, 사람들이 어떻게 문자를 쓰고 소통했는지부터, 두루마리 형태의 권자본에서 오늘날 보는 것과 유사한 책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여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필사자들의 작업, 책을 읽는 방식(음독과 묵독), 고전에 대한 애착이 나타나면서 등장한 위작자와 복제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디지털 시대로 접어든 오늘날 책의 다양한 변형 등을 총망라한다.
대략 짐작할 수 있듯이, 어느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간 학술서 보다는 책에 관한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를 흥미롭게 풀어놓은 교양서에 가깝다. 하지만 중세영문학과 서지학이라는 저자의 전공을 생각해 보면, 이런 주제들이 단순히 흥밋거리 정도로 가볍게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 탄탄한, 그리고 종종 관련 주제에 관한 개인적 경험까지 언급되는 설명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주제에 대한 저자의 애착이 눈에 띄는 책이다. 예컨대 저자는 AD 100년 경 당시 브리타니아라고 불렸던 잉글랜드의 하드리아누스 방벽에서 근무하던 로마 군인이 쓴 편지 가운데서 베르길리우스의 시 일부가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정확히는, 비가 내리는 영국의 어느 오후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을 만끽하면서”. 지하철 역까지 우산도 안 쓰고 걸어갔다고 써있다.) 사실 이건 오늘날에도 꽤나 특별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일이긴 하다.
저자의 서술에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표현들이 자주 보인다. 이런 책을 읽는 건 역시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분야를 대중에게 알 쉽게 소개하는 작업은, 전문가라고 불리는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가 아닌가 싶은데, 진짜 전문가라면 이런 의무마저도 즐거움으로 바꿔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 역시 충분히 즐겁게 손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내 경우엔 새벽 광역버스 안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서도 전혀 졸지 않고 책장을 계속 넘길 수 있었다.
책 말미에 이 책이 속한 시리즈(이와나미 시리즈)가 여든다섯 권 소개되어 있는데, 웬걸, 하나하나가 구미를 당기게 하는 흥미로운 주제들이다. 딱 이 정도의 난이도와 내용이라면 쉬어가는 책으로 언제든 골라 들어봄직 하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