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르제 자니위스키 지음, 김명수 옮김 / 현재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모서리와 각이 없고, 단단하면서도 완만하고 부드럽게

서로 이어진 통로 내부의 표면들.

통로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연결되고 교차되었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모든 통로들이 목적지로 통해 있다.

네가 예기치 않게 머리를 부딪히는, 눈에 안 보이는 벽은 없다.

네가 선택한 길은 올바른 길 중에 하나다.

너는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된다.

 

    교수가 쓴 소설. 이 소설을 출판할 당시 바르샤바 문과대학 학장이자 폴란드 작가 협회 부회장을 맡았다는 저자의 이력이 책에 무게감을 주기 위한 노력을 책의 첫 페이지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식이 가득 찼기 때문일까? 저자의 서문에 실려 있는 지나치게 설교적인 말투는 왠지 모르게 반감이 들도록 만드는 느낌이었다.(사실 서문을 읽고 난 후에야 저자의 이력을 읽게 되었다) 저자가 채식주의자이든, 극단적 환경주의자이든, 혹은 윤회론에 관심을 갖고 있든, 그것을 마치 강의실에서처럼 독자에게 굳이 책의 첫머리부터 강의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다.(덕분에 책의 본문을 읽기 전부터 평점 1점 감점) 



    책의 내용은 쥐가 주인공인 특이한 소설이었다. 일명 동물소설. 물론, 동물이 주인공인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같은 뛰어난 풍자적 소설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들은 우화나 동화 정도로 취급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종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인 ‘쥐’는 톰과 제리에 나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몸서리가 쳐지는 잔인하고, 끔찍하며, 혐오스러운, 바로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한 쥐를 묘사하는데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을 사용한다. 그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과정이 책에 매우 빠른 박자로 묘사되어 있다. 300여 페이지가 되는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그리고 단지 한 마리의 쥐의 의식을 따라가는 내용의 소설이었음에도, 저자의 호흡이 워낙 가쁘게 진행되는 까닭에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책의 전체를 뒤덮고 있는 심리묘사, 상황묘사 등의 솜씨는, 번역된 문장들이었음에도 저자의 전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듯 했다. 



    주인공 쥐는 왜 끊임없이 방황을 하는가,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과연 어디인가. 아마도 책을 읽으면서 쉬지 않고 질문을 했던 내용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대답은 아마도 그가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듯한 환상 가운데 죽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어떤 윤회론적 결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겪으며 바쁘게 살아가지만, 결국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내용이 책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그건 저자의 생각일 뿐 내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그 두 가지의 주제 - 윤회론과 쥐의 일생 -가 썩 잘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쥐의 생태에 관한 매우 일반적인 관념들만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이런 일종의 밀착되지 못하는 느낌이 들도록 만드는 한 가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쥐를 주제로 쓰려면 적어도 쥐에 대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조사하고 연구해야하지는 않을까. 

    저자 서문과 역자 후기를 보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 것들을 풍자, 혹은 비판하고자 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던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너무 의도가 많아서 오히려 그 의도들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단지 쥐를 통해 그런 심오한 가치들을 드러내기엔 소재가 빈약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름대로는 전쟁, 빈곤 등의 배경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것들은 그다지 많은 감흥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의도성을 지닌 글이었기에, 책 자체에 논리적인 문제가 생겨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가장 단적으로, 주인공 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의 직관적으로 알아챈다. 그리고 그것이 도를 넘어서 인간들이 사물에 대해 사용하는 명칭들까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그렇게 쓴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와 같은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 정도의 상상력까지는 발휘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소재의 참신성이나 묘사의 기술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만,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드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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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성냥갑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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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므로 독자들이여, 안심하시라.

열 권의 책을 읽든 같은 책을 열 번 읽든,

똑같이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단지 전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사설집이다. 그가 한 잡지에 연재하던 사설들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사설집이다 보니 특정한 주제에 관한 깊은 사색이라기보다는 매우 상황적이고 논설적인 글들이 대부분이다. 전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 가운데 이 책은 첫 번째. 



        상황성이 매우 강조된 글들이기는 하지만, 역시 움베르토 에코답게, 그 주제는 매우 광범위했다. 최첨단의 인간복제에 관한 글부터, 고전에 관한 글까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관한 부분은 물론, 추억과 회상에 관한 문학적 느낌이 짙게 느껴지는 에세이까지. 

        저자의 관심분야는 매우 넓었지만, 결코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서 결코 겉도는 글을 쓰지 않고 있다. 특별히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컴퓨터 매체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은 지나치게 무절제한 감이 있는 오늘날의 대중문화 현상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지적을 하고 있다.(비록 그 글들이 지금으로부터 최소 10년 전에 쓰인 글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의 지적 깊이만큼은, 너무나도 닮고 싶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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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신화 범우사상신서 10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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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지프의 말없는 온갖 기쁨은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모든 우상을 침묵케 한다.

 

1. 줄거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책이었다. 알베르 카뮈라는 인물을 단지 좀 어려운 소설가정도로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그를 부르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인 것 같다.



    저자는 삶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과연 이 세상에서의 삶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이 세상은 살아갈 만큼 만족스러운 곳인가. 인간들의 삶은 행복한가. 저자가 보는 세상은 이런 질문들에 부정적인 대답만을 준다. 삶은 의미 없는, 매우 부조리한 것으로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런 부조리한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삶에 과연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자살이다. 이는 부조리한 삶으로부터 완전히 도피하는 방법이다. 사실 의미없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듯이 그런 논리를 극단으로까지 이끌고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도피일 뿐 해결책은 될 수 없다.

    두 번째의 방법은 종교와 같이, 현세가 아닌 내세에 대한 희망, 혹은 미래에는 부조리한 지금의 삶을 조리있게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꿈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역시 회피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의 상태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세 번째는 현실의 부조리함과 어려움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그 안에서 행복의 요소를 찾아내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진정으로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신들에 의해 저주를 받아 평생 동안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했던(꼭대기로 올라간 바위는 다시 굴러 내려오고, 그러면 다시 밀어 올려야만 하는 작업이 영원히 계속되는 형벌이다) 시지프가 신들의 그러한 저주(부조리한 삶)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 감상평


    카뮈의 세계관에서 현실 자체는 부조리한 것이다.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세상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진화론(혹은 자연주의)에 기반한 유물론적(그리고 이성중심적) 세계관의 결론도 동일할 것이다. 모든 것이 물질일 뿐인데, 거기에 도덕이, 윤리가, 삶의 숭고한 목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기껏해야 '유전자를 전수하기 위한 것'이라는 전혀 내키지도, 감흥이 일지도 않는 비인간적 '목적(그것을 목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만 남을 뿐.

     나는 그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 세상이 질서정연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전제를 받아들인다. 비록 타락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망가지고 왜곡되어 부분적으로는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원리적으로 이 세상은 질서와 논리성을 가지고 있는 세계이며, 최종적으로 그것은 다시 회복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 다른 만큼, 그에 대한 해결책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카뮈 식의 실존철학적 해결방법은 인간 내부에서 구원의 방법을 찾아낸다. 현실에서 초연한 채 자기 내부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에 따라 살면 족하다는 식이다. 물론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단지 현실로부터의 자기 내면으로 도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뮈가 말하는 종교적 방식은 도피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카뮈 자신의 방법이야말로 도피다. 부언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현실도피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적인 미래상이다.



    오랜만에 머리를 좀 싸매게 만드는 책을 읽게 되었다. 비록 그 내용의 전개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읽어 볼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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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기적 - 마더 테레사의 삶과 믿음
T. T. 문다켈 지음, 황애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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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몽당연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연필을 자를 수도 있고 깎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를 쓰고 싶으면 쓰시고 그리고 싶으면 그리실 겁니다.

멋진 그림을 보거나 감동적인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미술 도구나 연필을 칭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하여 감탄합니다.

온갖 영예와 영광이 영원히 우리 주 하느님과 함께하시기를!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는 유명한 수녀의 전기이다. 통상적인 전기의 방식에 따라서 그녀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연대순으로 그리고 있다. 마케도니아 지방 출신(당시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배하에 있었던)의 한 소녀가 어려운 이웃에 대한 꿈을 갖게 되고, 그 이후 인도에서의 사역을 통해 전 세계에 약자에 대한 관심과 도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고조시키기까지의 과정을 저자는 차분하게 서술해 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정신을 온 몸으로, 평생에 걸쳐 실현한 인물.

        전기를 읽고 난 뒤 든 가장 첫 번째 생각이다. 모든 사람들이 피하는 빈민, 나병환자들, 버려진 아이들을 그 자신의 말처럼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대했던 마더 테레사. 무모할 것 같았던 그의 시도는 놀라운 기적들을 만들어 내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적극적인 실천 의지. 그런 것들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나와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이 다르긴 하지만,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실 테레사와 같이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라면, 그의 종교가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그러할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하도록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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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 3 -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 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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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은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전쟁은 곳곳에서 사람들을 폭력에 익숙하게 만들기 마련인데

독일에서 전쟁은 절망에 의한 폭력을 유발시켰다.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이라는, 묵직하면서도 흥미를 끌 만한 부제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원래는 전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세 번째에 해당하는 책.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부제에서 밝힌 것처럼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과, 그 이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어떻게 설립하였는가 하는 것들이다. 



        책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써 있어서 약간 딱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저자는 요즘 나오는 여느 책들처럼 상업적인 목적에서보다는 학술적인 이유로 책을 집필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책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비유법조차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내용의 대부분은 또 다른 기록을 참고해 옮긴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인용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점은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사실성을 한층 더 강조해 주는 느낌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유대인 대학살이 단지 히틀러를 비롯한 몇몇 미친 독일인들만의 범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옮기기 위한 철도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일했으며,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의 강제노동은 양심 없는 독일의 기업가들에 의해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다. 더구나 전후에서 그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니, 마치 일본인들을 보는 느낌이다. 

        그런 독일인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인들에 의한 유대인 핍박과 학살도 엄청났다. 단지 독일에 협조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유대인들을 색출해 죽이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여러 오스트리아인들은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지휘관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5,090명의 전범 가운데 절반인 2,499명이 오스트리아인이었다. 그들은 나치 친위대 소속 말살부대의 1/3이었고, 6개의 죽음의 수용소 중 4곳을 통제했고, 600만 명의 유대인 희생자 중에 절반 가까이를 학살했다. 루마니아 인들도 못지않아서, 창고 속에 유대인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2, 3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이는 등 2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홀로코스트는 자칭 문명국가라고 하는 유럽인들의 잔학성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유럽인들이 이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나치에게 도움을 주기를 거부했고, 벨기에인들은 나치의 시도에 저항하기까지 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한 총파업까지 일어나기도 했다.(이에 비해 우리나라 노조들의 파업의 명분이란..) 핀란드와 덴마크인들도 유대인을 보호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었다. 

        영국도, 미국도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급격한 유대인의 유입으로 자국에 일어날 혼란을 우려해서였다. 결국 자국에 예상되는 피해를 이유로 그들은 수 백 만 명의 죽음을 외면했던 것이다. 



        왜 유대인들은 저항하지 않았을까? 책을 읽는 내내 이상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무려 600만 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유대인들은 눈에 띄는 저항을 하지 않는다. 왜? 

        저자는 유대인들이 저항정신을 상실하고, 타협만을 추구하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지적한다. 수 천 년 간의 박해로 인해, 유대인들은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타협이 더 큰 유익을 가져온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홀로코스트도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저항정신의 상실이라.. 한 번 쯤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다. 

        저자는 이외에도 ‘두뇌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라는 점과, 지나친 낙관주의, 일부 지도자들의 민족배반 등을 또 다른 이유로 꼽는다. 


        홀로코스트는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사건일 것이다. 한 인간의 광기와 이기심과 증오심 때문에 그것을 막지 않고 도리어 협조를 했던 얼마의 사람들이 무려 600만이라는 사람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사건. 인간은 과연 얼마나 악한 걸까. 인간들은 그 때에 비해 지금은 과연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그러한 인간의 잔학성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변하려고 하는 의지조차 없는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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