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선 하나님 - 그리스도인, 어떻게 권력을 향해 진리를 외칠 것인가
톰 라이트 지음, 안시열 옮김 / IVP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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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세기 세속주의자들은 종교라는 것이 곧 사라져서, 공룡처럼 화석으로나 남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흔적을 박물관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들은 이런 예측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와 그 비슷한 것들이 앉을 자리를 치워버리기 시작했다. 종교는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고,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역, 신념의 문제이니, 공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감추라는 명시적, 암묵적 지시가 내려졌다.

      물론 채 우리는 반백년이 지나기 전에 그들의 과장된 예측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종교인구는 줄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 출생을 통해 무슬림이 되는 이슬람 인구의 증가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기독교 인구도 증가추세다. 이 책에 따르면 심지어 (기독교는 이제 끝물도 지났다고 여기는) 영국과 같은 곳에서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과 같은 주요 절기에 예배당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숫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날 국지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을 설명하는데 과연 종교를 빼버리는 것이 가능할까? 9.11 테러와 같은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재정을 어떤 영역에 써야 할지를 결정하는 문제부터 교육의 내용과 목표, 그리고 방식을 어떤 식으로 정할지 같은 영역은 분명 종교와 철학이 필요한 부분이다. 현대사회는 오랫동안 철학의 부재 상태에 놓여 있었고(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철학에 기초해 있긴 하지만 그건 그 성격 자체가 자기부정적인 철학인지라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각은 혼란은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선 이 공공신학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데 힘을 쓴다. 빌라도와 예수 사이에 주고받았던 그분의 나라대화 속에서, 유대인들의 나라 개념에서, 그리고 창조신학에서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왕이시기도 했다. 예수는 그 하나임이 이 세상 깊숙이 들어오셨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저자는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권력자들과 정부와 같은 권력기관들에게 진리에 관해 말하는 방식으로 실천될 수 있다. 폭력과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권력과 한 편이 될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선지자적 야당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교회는 국가의 시녀가 될 것이 아니라 선지자로 서야 한다는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 떠올랐다.

 

     ​또 이 선포는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드러나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특정한 정치세력과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 막말을 내뱉는 식의 저열한 방식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디 성경에서 말하는 행동이던가. 책에도 등장하듯 교회는 그것이 처음부터 행해왔던 이들,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약자들의 입장을 공감하며 불의한 사회구조에 동참하지 않는 방식의 행동을 해야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십자가의 신정정치라는 단어를 곱씹어 볼만하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신정정치라는 말에서 느끼는 그로테스크한 권력행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고통과 불의함을 온몸으로 감당해 냄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을까?

 

 

     ​다양한 이유로 오랫동안 교회는 공공의 장에서 한 발, 한 발 물러서왔다. 일부는 역할에 대한 자신감의 부족 때문에(여기에는 포스트모더니티를 필두로 한 다양한 지적, 사상적 공격이 한 몫을 했다), 혹은 (내세에만 집중하는) 잘못된 신학 때문에, 또 그저 무관심이나 게으름 때문에 이런 후퇴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그분의 통치영역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바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이 영역을 그냥 둔다면, 엉뚱한 이들이 교회의 이름을 팔아 그 자지를 차지하려고 나설 것이다.

 

     ​특히 정치의 영역은 그리스도인들도 한 명의 시민으로써 당연히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이 임무는 단지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일에 투표를 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지적 또한 기억해야 둘만 하다. 공적인 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제대로 된 역할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독서시간이었다. 겨우 한 번 가지고는 안 될 것 같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

. 책 후반부는 문장들이 좀 난해하다. 번역의 문제도 약간 있었던 것 같고, 어쩌면 원문 자체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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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한 복음서 여행 - 내 깊은 갈망의 답을 찾아서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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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와 함께 한시리즈의 최근작이다.(그래도 번역서가 나온 지 2년이 다 되어서야 보게 됐다) 전작인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2’가 워낙에 좋은 책이었지만, 그에 앞서 나왔던 세 권의 다른 책들 역시 좋은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기술이 돋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새 책이 나왔다고 하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이 갖는 전작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장소다. 이전의 책들이 예수가 현대의 어떤 장소에 나타나서 누군가와 만난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시작했다면, 이 책은 현재에 사는 주인공(엠마)가 문을 열고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어떤 장소로 가서 예수를 만난다는 설정으로 진행된다. 주인공은 예수와 함께 갈릴리의 어느 호숫가로, 수가성의 우물곁으로, 예루살렘 인근의 베다니로, 복음서 속 주요 장소들을 방문하고 대화하며 교훈을 얻는다.

 

     장소와 시대의 전환은 어떻게 보면 간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문학적으로 살짝 아쉬운 면도 있다. 2천 년 전 예수가 현대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비틂을 통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반대라면, 더구나 일조의 투명인간처럼 당시 사람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존재라면 확실히 설정상의 재미가 떨어진다. 물론 이건 문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이고, 저자의 좋은 글쓰기 재주를 통해 복음서 속 이야기를 훨씬 더 실감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은 플러스 요인이다.

 

 

     제목에도 들어 있는 복음서 여행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내용이다. 어려운 신학적 표현이나 설명은 적은 대신, 편하게 옛날이야기를 말하듯 진행된다. 사실 최초의 살아있는 복음서들(사도들)’은 그런 식으로 예수와 함께 했던 일들을 회상하듯 이야기로 전해주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성서를 읽는 일이 좀 부담된다면, 이 정도의 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책의 주제는 앞서 봤던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2와 유사하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경건훈련에 참여하거나 교육을 받고, 봉사에 힘쓰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물론 이런 일들은 도움이 된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라는 진리의 제시다. 전작에 대해서도 썼지만, 참 중요하면서도 아름다운 교훈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을 지고 그분을 따르려고 하고 있는지...

 

 

     ​주제 면에 있어서 조금 더 발전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형식면에서 괜찮은 변주도 보이니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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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확신 - 세속 세계관의 정체를 밝히는 성경적 원리와 방법
낸시 피어시 지음, 오현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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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도 더 전에 봤던 책 중에 완전한 진리라는 책이 있었다. 2007년인가였는데, 그 해 봤던 수십 권의 책 중에 가장 훌륭한 책이라는 제목으로 리뷰를 썼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한창 기독교세계관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마치 달리기를 마친 후에 마시는 시원한 물처럼 여겨졌었다.

     ​다만 그 때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바로 번역된 제목이었다. Total Truth라는 원제를 완전한 진리로 번역하는 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총체적인 진리정도가 더 낫지 않았나 싶었다. 내용 역시 기독교 세계관이 갖는 총체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니까.(완전하다는 말과 총체적이라는 말엔 분명 어감의 차이가 있는데다, 우리가 발견한 기독교세계관이 최종적이거나 완전한 건 아닐 수도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게 낫다)

     그런데 이번 책도 한 눈에 봐도 그 책의 후속편임을 짐작할 수 있도록 제목을 뽑았다.(사실 표지 디자인도 비슷하다) “완전한 확신이라, 이건 어떤 내용일까. 개인적으로는 이번에도 전작과의 연계성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내용을 잘 드러내는 데는 실패한 제목인 것 같다. 책의 원제는 내용을 잘 요약하는 Finding Truth이다. 책은 저자가 제시하는 세계관 분석 틀을 가지고 다양한 종류의 세속적 세계관들의 일관성을 검증하면서 기독교가 갖는 총체성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검증의 틀은 다섯 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그 세계관에서 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우상을 규명하라’), 그 세계관이 결국 세계를 무엇으로 설명하는지를 밝히고(‘우상의 환원주의를 규명하라’), 그 환원주의가(저자에 따르면 모든 우상은 환원주의에 이르게 된다) 낳는 모순을 지적하고(‘우상을 시험하라: 상충) 그 결과를 드러낸다,(‘우상을 시험하라: 모순’) 마지막은 세속적 세계관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 원리들(대표적으로 자유의지가 있다)을 강조함으로써, 그 원리들을 진짜 설명할 수 있는 세계관을 드러내라는 것(우상을 대체하라)이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일관성이라는 부분이다. 저자는 기독교 이외의 세계관이 인간의 경험을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모순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질세계, 감정적 경험, 자유의지와 선택, 책임 등이 실재한다는 것은 순수한 경험론이나 관념론,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가지 사상들으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들이다.(심지어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도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의 주장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저자가 이 모든 과정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단지 저 사상들은 틀렸으니 더 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저 사상들을 좀 더 제대로 살펴보자, 그것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만한가?’라고 물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끝까지생각을 해보도록 요구한다. 기독교의 오랜 지적 전통과는 달리, ‘무조건 아멘만을 요청하는 대중적 종교나, 감정적 만족만을 채워주는 감성적 종교가 되어버린 오늘날 교계에, 저자의 이런 태도는 반갑기 그지없다.

 

 

     ​오랜만에 돌아왔지만(물론 그 사이에 나온 세이빙 다빈치도 인상적이었다), 여전히 탄탄한 논리 전개가 인상적이다. 갈수록 복잡해져 가는 갈등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철학과 세계관의 분석틀을 제대로 갖는 일이 필수적이다. 한동안 좀 등한시했던 관련 도서들을 다시 좀 찾아 읽어봐야겠다. 전작을 좋게 보았다면, 그리고 기독교세계관으로 어떻게 지적 영역을 구축해야 할지 궁금하다면 꼭 읽어볼 만한 책.

 

유물론이 인간을 복잡한 생화학적 장치로 환원시킬 때 그 상자에서 무엇이 삐져나오는가? 자유의지가 삐져나온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삐져나온다.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삐져나온다. 이런 것들은 환상으로 여겨져 기각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자유의지는 인간이 부인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체험의 한 부분이며, 이는 곧 이것이 일반계시의 일부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유물론의 입장은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 - P65

낭만주의자 가운데는 예술가가 많았는데, 이들이 관념론에 매력을 느낀 까닭은 관념론이 인간의 정신 혹은 창조적 상상력을 신격화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이 세상의 질서를 잡는, 곧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는 권력이라면 예술가는 이제 장인이 아니라 창조자다. - P114

철학의 목적은 무엇보다 경험에 속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쟁점을 피하는 것이다. 환원주의의 문제점은, 현상을 설명하지 않고 둘러대려고 한다는 점이다. - P147

실제에서 해체주의자가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길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는 그 비평을 자기 자신은 은근슬쩍 피해 가는 것뿐이다. 해체주의자들은 자신만은 짐짓 모든 논쟁의 현장을 초월해 있는 양 행동한다. 다른 모든 이들의 진술은 숨어 있는 이해관계와 권력 다툼의 산물로 치부해 해체시키면서 자기의 글은 해체 과정을 면제받은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자기들만 인종·계급·성 같은 사회적 힘을 초월할 수 있고, 다른 모든 이들은 이 힘 때문에 허위의식의 피해자가 되는 것처럼 글을 쓴다. - P264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세계관에 잠재된 제국주의의 정체를 벗긴다는 고상한 목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도 제국주의가 되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만 다른 모든 이들의 근원적 관심사와 감춰진 행동 동기를 폭로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에게만 그 관심사와 행동 동기를 해체하고 정체를 밝힐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상 다른 모든 관점을 침묵시킨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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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님 걸으신 그 길 - 톰 라이트와 떠나는 성지순례
톰 라이트 지음, 강선규 옮김 / 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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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복음주의권 개신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에게 순례란 살짝 껄끄러운 느낌을 준다. 가장 큰 이유는 중세 말 교회가 순례에 일종의 공로적 가치를 부여했고, 개혁자들이 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의 후예인 우리가 어떻게 다시 순례의 공로를 탐하겠는가.

     물론 저자인 톰 라이트 역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중세적 순례를 하자고 재촉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순례에 새로운 의미창조 세계의 선함과 은혜가 전달되는 신비적인 매개체로서의 가치를 제안한다. 이 논지는 서문에 담겨 있는데, 사실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주장이다.

     은혜의 수단보다 은혜 자체에 집중하자는 복음주의 개신교의 가르침 자체는 옳다. 다만 인간은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있고, 그 현실의 물질이 인간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준다는 점을 놓쳐버린다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물질보다 은혜에 깊이 천착한다는 이들이 예배당 건물에는 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걸 보면(근대 이후 건축된 세계의 크고 아름답게 예배당은 대개 복음주의자들의 솜씨다) 말이다.

 

     1장부터 9장까지로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의 공생애의 주요 지점들을 선택해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묘사하고 거기에 담긴 신학적, 신앙적 함의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1장의 경우는 예외로 다메섹에 관한 묵상인데, 우리는 예수께서 그곳에 가셨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역사적, 성경적 해석은 물론 알레고리적 해석도 곁들여지는데, 단지 복음서에 등장하는 내용뿐 아니라 구약의 여러 관련 내용들까지 풍성하게 담겨 있다.


      팔레스타인의 공생애 로드를 따라가면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 또한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요단에서의 세례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광야에서 들리는 유혹의 목소리를 물리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예루살렘의 왕좌에 새로운 왕이 앉으셨음을 믿고 선포해야 한다. 이 선포는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용서하며 불확실해 보이는 세상의 바다로 나아감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여정에 용기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잘 구성된 순서와 내용.

 

     이 내용 못지않게 후기에 해당하는 부분 또한 인상적이다. 서두에 언급한 이유와 함께, 우리가 성지 순례에 약간의 불편한 마음을 갖는 이유는 오늘날 그 지역이 갖는 독특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20세기 초중반 팔레스타인을 거점으로 건국된 현대 이스라엘은 그 이전 오랫동안 살았던 팔레스타인인들의 추방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월등한 군사력으로 그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순례라는 이름으로 그 지역을 방문하는 것은 혹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하지만 또한 2천년에 걸친 강제적 이산과 고난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 또한 가볍게 무시해버릴 수 없는 일이다.

 

     자는 둘 중 어느 편을 드는 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보는 듯하다. 우선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은 구약 선지자들의 이스라엘 회복 예언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유일무이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유대인(혹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점이다. 현대 이스라엘에 대한 무비판적인 지지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학대를 모른 척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정치적인 견해를 표시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그 땅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다. (실은 우리에게 그럴 만한 힘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는 그 탄식이 가득한 땅에 기도하러 가야 한다. 우리는 십자군이 아닌 순례자로서 가는 것이니까.

     팔레스타인의 여러 지역을 둘러보는 성지 순례를 위한 준비과정이 있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 (근데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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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 예수와 함께 성경 읽기 - 예수님의 방식으로 다시 읽는 성경 랍비 예수 2
로이스 티어베르그 지음, 손현선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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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기본적으로 유대적(혹은 히브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건 구약만이 아니라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신약성경 역시 마찬가지다. 때문에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된 당시, 기록한 사람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1세기 유대인들의 문화적 배경은 구약성경을 빼놓고는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는 그런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자신이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적어도 충분히 익숙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매 주일 몇 번씩 예배에 참여하는 일을 십 수 년 이상 해왔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익히는 일은 일부러 훈련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갖출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사람들은 성경을 대충 겉핥기식으로(이 책에서는 전자렌지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읽어간다. 성경의 원 배경과 문맥을 잊어버린 채 지금의(그리고 자신의) 기준으로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이 책은 그런 시대착오적 성경읽기에서 벗어나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시선으로 본문을 읽어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히브리식 사고와 배경에 비춰 설명함으로써 현대인들의 접근방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식이다. 그래도 1부에서는 히브리인들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2부에서는 반복되는 단어를 중심으로 서로 떨어진 성경구절들을 엮어 읽어내는 방식이 눈에 띤다. 책 본문의 뒤에 붙어 있는, 짧지만 효과적인 조언이 담겨 있는 내용들도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성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이다. 기독교가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초한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의 현실을 성경에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원리를 실제 삶에 비춤으로써 그 빛을 따라가야 한다. 이 과정은 오랜 훈련이 필요한데, 역시 그 시작은 본문인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 어떻게 이 작업을 시작할지부터가 난감해진다. 아주 좋은 책 한두 권을 읽거나 특별한 강의를 한 번 듣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원래 크고 중요한 일은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이 책은 이 오랜 준비의 필요성을 잘 집어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성경을 제대로 읽을 때 어떤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는지도 실제 예를 통해 보여준다. 내용이 아주 체계적이거나 하지는 않지만, 좋은 입문서로는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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