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 한국교회, 공교회성과 공동체서 그리고 공공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망한다
이도영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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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이끌려서 손에 든 책이다코로나19는 지난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했고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만 입었지만그래도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1년이나 이 사태를 겪으면서 나름 대응체제를 마련하고는 있지만충분한 대응여력이 없는 자영업자들 사이에는 피해가 누적되고만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대응능력이 부족한 업장(?)들 중 하나가 바로 교회다!(물론 교회는 단순히 수익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은 아니다.) 코로나 사태가 1년이 넘어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파악 없이, ‘곧 나아지겠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회로만 돌리고 있다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고최근에는 짜증을 부리는 단계에 접어든 것 같기도 하다.(물론 그 마음이야 알겠지만어디 교회들만 고통을 감내하고 있던가.)

 





     책은 코로나 팬데믹이 불러온 사회적인 변화를 분석하고교회가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이 난국을 돌파해 나가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1장에서 저자는 코로나 팬데믹을 해석하는 기독교계의 관점이 지나치게 신정론에 치우쳐져 있다고 말한다신정론이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신앙적 고백을현실 속 악의 파괴성 앞에서도 여전히 유지시키기 위한 신학적 작업이다그러나 이건 교회 안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내밀 수 있는 답변이지교회 밖 사람들에게 할 말은 아니다. C. S. 루이스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번역작업이 필요한 건데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필요한 건 신정론이 아니라 재난 상황에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사실 세상이 욕하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다신정론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애쓰는 건 애초에 초점을 잘못 맞춘 것이다우리가 이 상황에서 말 도 안 되는 정치논리에 편승해 투덜대는 대신 제대로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교회를 향한 눈이 이렇게 악화되었을까?


     2장부터 4장은 각각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정의와 생태평화에 대응시켜 이 시대가 제기하는 과제에 어떻게 교회가 대답해야 하는가를 제안하는데문제분석과 인식에 좀 더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고그에 대한 해결책 부분은 조금 빈약한 느낌이다분석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책이나 신문을 찾아본 사람들은 충분히 알만한 내용들인지라 새로움도 덜하다.


     이데올로기의 전환(우에서 좌로의 가치 이동)을 다루는 5장으로 넘어오면 사회분석서로서의 이 책의 정체성이 좀 더 두드러진다개인적으로는 교회가 이런 부분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2~5장에서 분석하고 있는 문제들이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인해서 새롭게 나타난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이건 책의 내용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내용은 적절하다책 제목에서 지목하고 있는 주제가 책 내용에서 잘 풀려나오고 있는가의 차원이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직접 다루고 있는 6장은 약간 다르다코로나19로 인해 심각해진 불안을 다루면서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파라볼로이”, 즉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로 정의한 저자는오늘날 교회에게 필요한 모습이 이것이라고 말한다동시에 저자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서 시행했던 다양한 노력들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좋은 도전을 받게 된다.

 





     덧셈과 뺄셈을 배우지 않고는 곱셈과 나눗셈을 배울 수 없다.(C. S. 루이스의 책에서 본 비유다). 하나의 단계를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는 말이다이 책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한국교회의 과제들비록 그것이 꼭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코로나19 때문에 그 문제점이 더욱 커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그리고 이 과제들을 적절히 풀어내지 못한다면우리는 좀처럼 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할 것 같다끊임없는 과거로의 회귀와 이로 인한 정체그리고 퇴보라는 교과서적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여기저기 이 책의 저자와 비슷한 고민들을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점점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당장 내 동기들 중에서도 그런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그들의 고민과 작은 실천에 박수를 보낸다좀 더 많은 이들이 이 고민과 문제풀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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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학 이야기 - 웨스트민스턴목회와 신학 1
신현우 지음 / 웨스트민스터출판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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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우리가 보는 한글 성경은 무엇을 보고 번역한 것인지, 그리고 그 번역의 대상은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 그것은 과연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최초의 성경본문과 정확히 같은 것인지 하는 의문은, 성경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봤을 만한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신학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사본학과 원문비평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두 분야 모두 오늘날 남아있는 여러 성경의 사본들(손으로 옮겨 적은 복사본)을 통해 최초로 기록되었을 성경원본의 모습을 추정해가는 학문 분과인데, 전자는 사본들의 특징을 찾아 해석하는데 주로 관심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그 사본들을 비교하며 원문을 추정해가는 것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있는 학문이다.

 

     요컨대 사본학이란, 오늘날 더 이상 성경의 원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성경본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학문이다. 오늘날 원본은 없다. 아마도 그것이 처음 기록되었을 재질인 파피루스의 연약성 때문에, 이는 거의 확실하다.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사본들뿐이다. 그리고 이 사본들은 옮겨 적는 과정에서 자주 서로 차이를 보여준다. 이 차이는 옮겨 적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도 있고, 헬라어 문법이나 알파벳, 발음상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처음 복사한 사람들에 기인하는 것도 있으며,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열 번째, 스무 번째 필사자들에게서 기인하는 문제일수도 있다. 역시 쉽지 않은 내용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사본학 상의 여러 문제들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책이다. 어떻게 하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사본들을 통해, 사본학의 궁극적인 목적인 원문을 추정해 나갈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설명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예컨대 짧은 독법이 선호되고, 부드럽게 읽히는 문장보다 거칠게 읽히는 문장이 원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서로 다른 두 출처의 내용을 '조화시키는' 본문 후대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학자들은 저마다의 논리적인 근거를 제안하고 있고, 흔히 네슬-알란트 판이라고 불리는 헬라어성경의 편집기준은 오늘날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기준들이 가진 문제점과 모순들까지도 숨김없이 함께 제시한다. 과연 짧은 독법이 꼭 원문에 가까운 것일까? 필사자들이 내용을 더하는 일 못지 않게, 다양한 이유로 빼먹기도 하지는 않을까? 저자는 무조건 주류학설을 따라가기 보다 그 기준들이 확실한지 검증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류학설의 주장이 생각만큼 확실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저자는 이를 ‘학자들 간의 상호 주관성에 근거한 객관성 추구’라는 방식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완전한 객관성을 얻기에는 무리한 면이 있다. 사실 인문학이 가지는 궁극적인 딜레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즉, 완벽하게 원문을 찾아낼 수 있는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본학의 모든 기준은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꽤 흥미 있는 내용의 책이다. 성경 자체에 대해 한 번쯤 깊게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볼만한 책이다. 되도록 여러 가지 비유들을 사용해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쉽게 다가가려고 하는 점은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이다.(지금 보면 좀 과하다 싶기도 하지만). 이미 절판된 책이지만, 중고로 구할 수 있다면 구입해 둘 것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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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그리스도인의 선교 이야기 - 로마 제국 어느 회심자의 선교적 일상 1세기 기독교 시리즈 3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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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로 시작하는 1세기 시리즈의 세 번째이자 완결판(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건 이 책(원서)이 처음 나온 게 40년 전이었다는 것그러니까 이 세 편의 이야기가 완성되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건데그 사이에 우리나라 출판사인 IVP가 나름 역할을 했다고 한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건 전작들의 주인공인 1세기 로마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 푸블리우스가 자신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전도를 위해 애쓰고 있는지다그리고 저자가 여기에서 강조하려는 건 삶으로의 전도’,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의 나눔이다.


     흔히 1세기 기독교회의 전도는 바울처럼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직설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식이라고 여기기 쉽다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우리는 바울 이외에 그처럼 활발하고 직접적인 사역을 한 전임 선교사의 이야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


     사실 기독교가 주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1세기에는 바울과 같은 케이스가 오히려 이례적인 일이었을 것이다새롭게 교회의 일원이 된 대부분의 사람들(그 때는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이었을 거고)은 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선전했을 것 같다이 책에 나온 푸블리우스처럼.

 


     통계를 보면 아프리카나 남아시아 등지를 중심으로 여전히 기독교인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지만기존에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는 확실히 감소세로 돌아서는 것 같다그리고 이 추세의 한 자락에 우리나라의 기독교도 달라붙어 있다.


     특히나 최근 코로나 19 확산 사태와 관련해 기독교회가 얼마나 위기대처능력이 떨어지는지 여실히 드러나면서훤히 드러난 그 바닥을 보며 실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는 듯하다여기에 기존에 교회예배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모두 모일 수 없는데새로운 사람들을 전도하겠다는 계획 자체를 세우는 게 무리인 상황이기도 하고.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이전과 같은 대대적인 행사 중심프로그램 중심의 전도도 결국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가정에서 직장에서여가와 여흥을 즐기는 곳에서도 복음은 전해질 수 있고이 과정은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재미있고 유쾌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이 책의 지적은 기억해 둘만한 부분이다.

 


     얇고 작은 책이라세 권을 묶어서 작은 독서모임을 한 번 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특히나 대형교회 지향이 너무 강력해서 다른 식으로는 좀처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을 잃어버린 듯한 우리나라 교회의 상황에 좋은 도전이 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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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잡기
이복규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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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반가운 책을 읽게 됐다올해는 연초부터 계속 흥미로운 책이 독서리스트에 추가된다국문학 교수인 저자가 교회 안에서 발화되는 다양한 들 가운데 어색하거나 부적절한 표현들을 골라내 항목별로 정리해 엮은 책이다그래 우리에게 이런 정리가 필요했다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법에도 맞지 않는 말을 너무나 태연하게 사용하거나곰곰이 따져보면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이야기들을 일상적으로 쓰는지 모른다.

 

    말과 글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저자처럼 국문학을 전공했다면 더욱 그럴 테지만나도 이런 부분이 특히 민감하게 다가온다사람들이 하는 말이 문장으로 쉽게 치환되는 편인데그러다 보니 기본적인 주술호응도 안 되거나 분명 찾아보면 신학적으로도 잘못된 내용들이 관행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물론 어떤 경우는 단순히 몰라서 그러는 것일 게다하지만 분명 잘못되었다는 내용을 듣고 나서도부주의 때문에혹은 관행이라귀찮다고심지어 자신이 옳다고 우기는 일들까지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예를 들면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축복이라는 단어가 있다한문으로 빌다는 의미의 과 을 붙여서 복을 빌다라는 동사다이 말은 축복하다로 사용되는 게 문법적으로 맞다그리고 이 단어를 하나님에게 붙이는 건(예컨대 하나님의 축복’)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빌어서 우리에게 준다는 말인가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복을 비는 분이 아니시다.


     하지만 워낙에 오랫동안 축복이라는 단어가 무슨 신령한 표현처럼 사용되면서이젠 아무리 말해도 고칠 생각 자체를 안 한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축복의 사전적 의미는 그렇지만교회에서 워낙에 다른 의미(특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는 뜻으로)로 자주 사용되니 그냥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자는 어이없는 주장도 한다.(한문의 뜻은 어쩌고)

 


     높임법이 발달한 우리 언어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는 부분도 눈에 많이 거슬린다책에 나온 예로는 종님’, ‘설교말씀이 계시겠습니다’, ‘(축도할 때) ~은혜가 계시기를’, ‘복이 계실지어다’, ‘드린 헌금’ 등이 있는데높임법은 인격체에만 사용하므로말씀은혜헌금 같은 게 아무리 신령한 것들이라도 높일 수 없다심지어 ‘(목사를 가리켜) 종님은 뭔지..


     이외에도 찬송을 준비나 예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정도로 전락시키는 표현들(‘찬송하므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이나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의미의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일들 등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불편한 표현들도 많이 지적된다.


     사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나 역시 제대로 그 용법을 몰랐던 부분들인데, ‘영원한 이별을 위한 의식이라는 영결식(이건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그저 고상한 표현쯤으로 여겼던 면이 있었고우리말 어법에서 직책을 이름 뒤에 붙여 소개하는 건 교만한 표현일 수 있다는 지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저자는 직책을 이름 앞에 두는 게 겸손한 표현이라고 말한다목사 김OO)

 


     사실 이런 부분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곳이 없다그저 교회에서 알음알음 듣고 배우는 게 전부그게 맞는 표현인지틀린 표현인지를 제대로 따져보는 일은 없었다그러니 잘못된 표현들이 점점 사라지기는커녕오히려 뭔 뜻인지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도 그대로 따라하는 지경에 르게 됐다.


     이런 책을 신대원 다니는 동안 꼭 한 번 읽거나 듣고 성경시험처럼 반드시 패스해야 하는 과목으로 삼았으면 좋겠다아무래도 교회에서 가장 말을 많이 하는 게 교역자들이니그들의 언어부터 정립된다면 조금씩 교회 안의 말들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을까읽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주변에 자주 권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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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1-22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그렇다면 정말 엉망진창이 많겠네요.
전 교회에서 흠향이란 단어가 적절치 않다는 말을
오래 전에 들었습니다.
암튼 이 책 정말 필요해 보이네요.

노란가방 2021-01-22 20:55   좋아요 1 | URL
네.. ㅎㅎ
흠향이라는 단어의 향이 향을 피우다 할 때 향이 아니군요!
스텔라님 덕분에 저도 알았습니다.

복규 2021-03-19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축복‘은 이미 표준어로 바뀌어 있어 다루지 않았습니다.

노란가방 2021-03-20 19:25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저자분이시군요. 좋은 책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은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
에릭 피터슨 외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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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괴롭다유진 피터슨 같은 저자가 쓴 통찰력 있는 깊은 글을 읽는 것 자체가 영혼을 채워주는 것 같은 즐거움을 주지만동시에 그 안에 담겨 있는 진주 같은 조언들과 내 삶의 현실이 대조되는 가운데서 한 없이 자괴감을 느낀다목사의 삶목회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조곤조곤 써 내려가는 유진 피터슨의 조언을 읽다보면역시 목사는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세상을 떠난 유진 피터슨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엮은 것이다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아들 역시 목사였지만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목회 세습 같은 경우는 아니었다우선 유진 피터슨이 목회했던 그리스도 우리 왕 장로교회는 메릴랜드 주의 작은 교회였고아들인 에릭 피터슨은 워싱턴 주에서 역시 작은 교회를 개척해서 섬겼다.

 


     사실 무엇보다 유진 피터슨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착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거다책에 실린 편지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묻어나오는 그의 목회관은세례 받은 사람들 한 사람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것이었으니까구호와 목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 가운데서 이뤄지는 교제와 돌봄그리고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성장이 유진 피터슨의 목회방식이었고그건 그의 아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구호를 외치기를 좋아하는지... 새해가 되면 올해의 표어를 자랑스럽게 만들어서 큼지막한 현수막에 걸어두어야만 뭔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니다일단 목표가 만들어지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을 채근하고몰아갈 수밖에 없다이 가운데서 각 사람의 삶에 깊이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해진다우선은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봐주면서는 일을 진행하는 게 어려우니까.


     하지만 목회의 본질은 잘 짜인 프로그램을 돌리고세련되게 강의를 하고화려한 건물을 짓는 데 있는 게 아니라교회에 속한 한 사람한 사람의 삶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목사는 회중에게 지시하고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함께 예수를 따르는 사람(팔로워)이라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결국 나는 실패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단다.”였다신실한 실패자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온갖 호들갑스러운 일들로부터 벗어나서작은 공동체를 하나님께 이끌며무엇보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목회자로서 사는 데 온 힘을 다하겠다는 결단이렇게 살려고 애쓰다 보면 다른 것들은 애초에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누군가에겐 실패자로혹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그런 평가 또한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더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신실한 실패자의 길에 나섰으면 좋겠다그렇다면 교회에 대해 지금처럼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눈빛도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을까아니뭐 꼭 어떤 반응을 위해서가 아니라그게 목사가 해야 할 일의 전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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