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탄생 - 성경은 어떻게 인류 문명을 지배했는가?
존 드레인 지음, 서희연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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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성경이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경험하고 주변 문명들과의 교류를 해왔던 이들에 의해 수천 년의 기간 동안 천천히 쓰여 온 책이다. 당연히 성경이 쓰일 당시의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하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지나치게 현대적인 관점을 갖는 데서 나오는 잘못된 읽기가 초래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 책은 이 분야에 관한 좋은 책을 쓰기로 유명한 저자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 정치적 상황, 국제 정세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책이다.

 

2. 감상평   

 

     책 제목이나 출판사 보다는 저자의 이름을 보고 먼저 골라든 책이다. 그만큼 이 분야에 있어서 존 드레인이라는 이름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보장해 주는 상표와 같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 그리고 역시 그 기대는 배신당하지 않았다.

 

     책은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기원 후 몇 백 년까지, 성경이 기록되었던 배경이 되는 시대들을 역사적 순서에 따라, 그리고 성경의 주요 무대를 좇아가며 풀어내고 있다. 두 강 사이에서 시작한 고대 문명부터, 이집트, 아시리아와 바벨론, 로마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기회다.

 

     이 책의 특징은 성경 역사를 따라가고 있지만, 일단 기본적으론 인문학적,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서술하면서 이와 관련이 있는 성경구절들을 언급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경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데는 오히려 이런 접근 방식이 더욱 유효할 터.

 

     성경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테지만, 성경이 만들어진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맥락을 살펴볼 때 그 본질적인 메시지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에필로그의 문장이 이 책의 가치를 잘 표현하고 있다. 성경을 더 깊게 읽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기초서적이 될 듯.

 

     참, 책의 내용 중 몇 부분에 오류가 있다. (저자의 오류인지 번역, 편집 할 때 들어간 건지는 확실치 않다) 94페이지와 100페이지에 나온 ‘기원전 3세기’, ‘기원전 2세기’라는 부분은 문맥 상 ‘기원전 30세기’와 ‘기원전 20세기’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또 411페이지 두 번째 줄의 ‘누가복음’은 ‘사도행전’으로 바뀌는 게 맞고(각주에는 옳게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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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기독교 변증 - 물을 건 묻자
조쉬 맥도웰.데이브 스테럿 지음, 오세원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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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닉은 어린 시절 교회에 출석해왔지만,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페터슨 교수의 종교학 관련 강의를 들으면서 닉의 그런 의심은 점점 확실해져갔고, 결국 그는 무신론자로 점차 변해간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대학원생 조교 자말을 통해, 닉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란 게 단지 충동적인 감정에 근거한 환각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또 논리적으로도 변호될 수 있는 무엇임을 서서히 인정하게 된다.

 

     공동 저자들은 이런 소설 속 인물들의 입을 통해, 성경의 신뢰성,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성, 부활의 실재라는 중요한 교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증명하고,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2. 감상평    

 

     아, 이런 책인 줄 몰랐다. 먼저는 책의 형식이 소설의 외향을 띄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또 이 한 권의 책에 이렇게 깊고 다양한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었다는 점도 몰랐다. 책의 첫 장을 열고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지루한 감이 전혀 없이, 그러면서도 차분하고 체계적으로 주제를 펼쳐내고 있다.

 

 

     복잡한 주제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전달하려는 시도 자체는 많이 있어 왔지만 대부분 ‘내용’을 전달하려는 욕심이 과해서 ‘이야기’의 측면은 그다지 완성도가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제법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물론 가공의 캐릭터들일 것이다. 하지만 책 속에 인용되고 있는 다양한 책들과 저자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부분이 중요하다. 저자들은 이 책을 쓰기 위해 정말 다양한 자료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을 적재적소에 삽입해서 자연스럽게 주제를 강화하는 근거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나도 학교 다니면서 제법 들었던 F.F. 브루스나 메츠거 같은 학자들의 이름을 여기에서 들을 줄이야. 덕분에 독자들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에 대한 좋은 참고도서 목록을 얻게 된 셈이다.

 

 

     기독교는 감정의 종교가 아니라 확신의 종교다. 확신은 맹신과는 다르다. 이 책은 자신들의 지적 틀 안에 들어가는 것만 실재한다고 믿는 극단적인 자연주의자들의 아집이나, 기독교이 교리 중에서 기적과 부활 같은 것들을 애써 제거하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낭만적인 착각에 대한 좋은 답변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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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의미를 찾아서 - 맥그래스, 과학과 종교,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하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박규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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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인간은 사물의 의미를 찾아내기 원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물의 원리를 파악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과학은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과학만이 진리를 판가름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믿음(신념)’ 아래 일련의 종교들을 항햔 맹렬한 조롱과 폭언을 쏟아내고 있다.

 

     저자는 그런 자연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 - 그것은 ‘의미’에 대해 말해주지 못하며, 그 자체도 일종의 신념 위에 서 있다는 사실 -을 밝히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모순점들을 지적한다. 또, 이런 과격한 유물론만이 현대 과학이 도달할 유일한 결론이 아니라는 점을 아울러 밝힌다.

 

     이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세계관으로서의 의의에 대해 논하는 저자는, 나아가 이 세계에 관한 기독교적 관점이 결코 고집이나 맹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해 우리가 관찰하고 연구해 온 바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타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유효한 원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2. 감상평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이 한창 유행이었던 몇 년 전, 그들의 책을 직접 읽어 보고는 꽤나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뭐 대단한 이야기들이나 써있는 것처럼 광고를 해댔지만, 막상 책 안에는 그냥 다섯 살짜리 어린 아이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 마구 소리 지르고 손에 잡히는 걸 던져대는 듯한 모습을 강하게 받았을 뿐이었다. 딱히 논리라는 게 보이지 않았고, 세계에 관한 큰 문제에 대한 대답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매우 편협한 사고를 통해 과장되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정보들을 이리저리 꿰어 맞춰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때려대고 있었으니까. 이 책은 그런 애들 장난 같은 주장에 좀 더 어른스러운 대답을 하고 있다.

 

 

     C. S.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저자는, 그의 변증법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단지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전공 중 하나이기도 한 자연과학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논지를 강화시킨다. 적어도 그는 도킨스 부류와는 달리 ‘실재하는 상대’가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주장’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있으니 한 수 위라고 하지 않을까.

 

     책은 단지 자연과학적 변론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논증도 더하고 있다. 이 책의 기독교세계관 안내서로서의 성격은 책의 후반부의 몇 장에서 빛이 난다. 저자는 전통적인 틀을 유지하면서도 풍성하고 다양한 비유를 사용하면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의미’를 찾아 헤맨다. 인간은 그냥 등 따숩고 배부르면 만족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니까. 이런 차원에서 자연주의자, 유물론자들은 인간의 가치를 바닥에 내던져 놓고서 자기들이 정 반대의 일을 해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셈이다. 의미를 발견하고 찾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정신의 영역인데, 이걸 그냥 전기적 자극 정도로 전락시켜버렸으니까. 그러니 유산을 ‘자연의 품질관리’라는 식으로 막말까지 할 수 있는 거고(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 중에서).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고전적 진리를, 현대적으로 잘 ‘번역해낸’ 책. 이런 시도들이 좀 더 늘어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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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브
존 맥아더 지음, 박주성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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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저자는 오늘날 많은 성경(영역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를 규정짓는 ‘노예’(그리스어로는 ‘둘로스’)라는 단어를 잘못 번역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원래 이 단어는 slave로 번역하는 것이 옳지만, 많은 번역가들이 servant(종)로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원래 성경의 저자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이 약화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책의 전반부는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의 노예됨’에 관해 성경적인 근거를 살피면서 강한 어조로 강조한다. 또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실제적인 적용점을 주는지를 차분하게 살핀다. 후반부에서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전환되는지에 좀 더 힘을 준다.

 

 

2. 감상평    

 

     책의 목표는 비교적 명확하고, 그 대상은 한 지점에 맞춰져 있다. 교회에서 선언하는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는 말만 기억한 채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헌신도 원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혹은 예수님은 부가적인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분으로 전락하고, 자기 삶의 주인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으로 여겨진다. 책은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거짓된 자의식을 매우 직접적으로 공격하며 깨뜨리는 데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책을 읽는 중에 떠오른 질문 하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것은 실제적인 상태와 지위를 가리키는 진술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인가. 책의 전반부는 강경한 어조로 이 설명이 우리의 실제 지위에 관한 설명인 것처럼 강조하지만,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부터는 다시 ‘아들 됨’으로 강조점이 옮겨진다. 어떤 사람이 주인의 아들인 동시에 노예일 수 있는가? 책 안에서도 노예가 주인에게 입양되는 즉시 그의 이전 신분은 삭제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저자는 이를 성경이 담고 있는 역설(13장)이라는 개념으로 돌파를 하려 하지만 그게 정말 유효한 방식일까.

 

     사실 성경은 매우 다양한 표현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서술하고 있다. 각각의 표현들은 저마다 진리의 한 모습들을 담고 있고. 물론 그 중에서 한 상태, 지위에 관한 설명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게 나머지 모두를 삼켜버리면 미처 예기치 못했던 난점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요컨대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노예라고 표현하는 것들은 그분에 전적인 ‘주되심’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이 책에서 자세히 풀어 놓고 있는 내용들은 이런 차원에서 성경의 진리를 잘 강조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바로 이 부분이 문제라고 하는 건 과한 부분도 있다. 물론 앞에서 내가 언급했던 사람들에겐 꼭 필요한 메시지이겠지만.(아,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편한 기독교’를 믿으면서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과연 이 책을 추천한다고 해서 손에 들 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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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김선일 옮김 / IVP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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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지난 한두 세기 동안 기독교, 그 중에서도 소위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그룹은 교회 안팎의 다양한 비난과 도전에 직면해 왔었다. 밖으로는 근대의 계몽주의로부터 ‘비이성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고, 안으로는 그런 비난을 일찍 수용해 보다 ‘현실성 있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낸 이들로부터 고루하다는 조롱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침내 시대가 변했다. 이 책의 저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 이전 시대 각종 비난과 조롱에 시달려왔던 복음주의가 이젠 자신 있게 자신의 학문적 위치와 자격에 대해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이전 시대를 풍미하던 계몽주의가 당연하듯 전제하던 이성의 절대성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었고, 거기에 기대 복음주의를 공격하던 자유주의 신학이 생각만큼 튼튼한 기초를 가지고 있거나 내적, 외적 논리적 정합성을 유지하고 있지도 못하고 있음마저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책의 초기 두 개의 장은 복음주의의 특징 -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고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정한다는 -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고, 나머지 세 개의 장은 후기 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 다원주의들과의 관계 속에서 복음주의의 자리를 어떻게 정립할 수 있을지에 관해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2. 감상평    

 

     책의 원제목이 인상적이다. ‘진리를 위한 열정(A Passion for Truth)’. 부제는 the intellectual coherence of evangelicalism이다. ‘복음주의의 지적인 일관성’ 정도가 될까. 복음주의권에서 제법 알려져 있는 저자는, 기존의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을 향한 도전에 대해 취해오던 일반적인 자세들 - 보다 ‘영적인 일들’로의 회피나, 상대가 전개하는 논리를 따라가며 수세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은 -을 떨쳐버리고, 좀 더 당당하게 공적인 영역에서 그들이 가진 보화를 자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런 자신감은 책 전체를 통해서 전해진다.

 

     책의 부제는 이 책이 복음주의에 속한 기독교인들의 삶에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데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내용임을 보여준다. 솔직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에서는 자신들이 믿는 바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게 사실인 상황에서, 특히 지적인 측면에서 교회 안과 밖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적어도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이 믿는 것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책의 내용이 결코 쉽지는 않다. 적어도 현대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저자가 말하거나 암시하는 내용의 절반은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미주만 해도 대부분이 참고문헌 일만큼 책은 광범위한 주제를 제법 깊게 다루고 있다. 자연스럽게 저자가 사용하는 방식을 그대로 실제의 변론에 적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인 복음주의의 경쟁자(혹은 적들)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가 그다지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과 복음주의만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이 결코 무례하거나 독단적인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잘 붙잡는다면 그것으로도 일단 큰 유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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