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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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특별한 쾌감은 글을 쓰고 있는 손에서 일어난다오.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지.

손은 자기가 창조해야 하는 것을 창조해낼 때

기쁨에 소스라치며 천재적인 기관으로 변신한다오. 

 

        소설 제목이 특이하다. 살인자의 건강법이라... 살인을 하려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건강을 유지하려고 하는 일들을 써 놓은 것인가? 의학백과사전 유의 책일까? 아멜리 노통브라는 작가의 이름 때문에 여러 기대감을 가지고 뽑아 든 책이다. 

 

        소설은 어떤 작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프로텍스타 타슈. 타슈는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위대한 작가이다. 엘젠바이베르플라츠 증후군이라는 특이한 암에 걸려 죽음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그를 취재하기 위해 사방에서 기자들이 몰려든다. 사슈의 비서는 그들에게 순서를 정해서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은 차례대로 작가를 만난다. 

       소설의 전반부는 다섯 명의 기자들이 타슈를 인터뷰하는 내용이다. 각 기자는 한 날씩 정해 타슈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타슈는 능수능란한 대화법을 통해 기자들의 질문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결국 그 대화를 통해서 기자들이 얻어낸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 모두는 타슈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무능력한가 하는 점과 타슈의 천재성에 대해 감탄만을 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그들은 전혀 타슈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어가는 내내, 기자들이 거의 맹신적으로 작가를 천재로 떠받들고 있는 모습이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자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소설가를 천재로 떠받드는 것일까.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한 번 도 없는 사람들이, 더구나 그의 책을 몇 페이지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부르고 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다섯 번에 걸친 인터뷰 시도와, 다섯 번에 걸친 실패. 독자가 이에 서서히 지루해할 만한 시점에서 아멜리 노통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작가의 소설을 모두 읽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작가가 싫어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작가의 기를 꺾어버린다. 이제까지 기자들은 그의 앞에서 굽실거리기만 했지만, 그녀는 자신을 처음 대한 작가의 불순한 태도를 사과하지 않는다면, 인터뷰를 중단하고 가겠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타슈는 그녀의 태도에 주눅이 들었는지(아마 이때까지는 주눅은 아닐 것이다.) 흥미를 느꼈는지, 그녀에게 내키지 않는 모습으로 사과를 한다. 그리고 여기자의 인터뷰는 시작된다. 

        그녀는 다른 기자들과는 달랐다. 아마도 작가의 스무 권이 넘는 책을 모두 읽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는 타슈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의 숫자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총 등장하는 여자들의 수와 작품의 수, 그리고 작품마다 등장하는 여자들의 수 등. 기자의 초점은 한 권의 책으로 모아진다. 타슈는 의도적으로 그것(아마도 ‘여자’라는 것과 그 소설을 결합시켜 생각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지만, 기자는 집요하게 물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 작업은 타슈가 남긴 한 편의 미완성 소설로 모아지게 된다. 작가는 그 소설을 집필하던 중 돌연 붓을 꺾고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칩거를 해 버렸다. 기자는 그 소설에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밝혀내고자 한다. 

        이제까지의 인터뷰의 주도권은 질문을 받는 입장에 있었던 타슈였지만, 이번에는 질문을 하는 여기자에게 있었다. 그녀는 여느 사람들처럼 타슈를 천재로 떠받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하는 말 가운데 들어있는 온갖 궤변과 비약, 모순들을 있는 그대로 펼쳐버린다. 그리고 그런 솔직함 앞에 타슈는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못한다. 그녀는 능수능란한 화법과 함정, 유도심문을 통해 그 미완성 소설에 담긴 비밀을 타슈 스스로 고백하도록 만든다. 마치 탐정이 범인에게 자백을 받아내듯이, 그녀는 타슈로부터 자백을 받아낸다. 

        그리고 그 비밀은 이제까지 타슈가 드러내었던 여성혐오증과 같은 특징, 그리고 앞서의 인터뷰에서 살짝 언급했던 내용들을 모두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사실 이 비밀을 알기 전까지, 타슈가 앞서의 인터뷰들에서 했던 말들은 정신이 살짝 이상해진 노인의 말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마치 셜록 홈즈 식의 치밀한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멜리 노통브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서히 진실에 다가가는 여기자의 작업을 바라보는 타슈의 초조함과 (나중에는) 부끄러움을 아멜리 노통브는 너무나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한 번도 타슈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행동묘사만으로 말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하나의 놀라운 요소. 아멜리 노통은 독자가 안심하게 될 때까지 충격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 읽고 나면 한 방 먹었다는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부분이다.

 

 

        『오후 네 시』를 통해서 느꼈던 작가의 필력에 다시 한 번 흠뻑 취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오후 네 시』에서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통해 상황의 모순성과 그로 인한 갈등을 실감나게 그렸던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서는 소설이론에 충실한 배경과 장면의 이미지를 사용하며 실감난 장면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소설을 읽어나갈 수록 점점 더 빠져들게 만드는 진행력도 역시나 훌륭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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