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말이 되지 않았다. 살생을 금하는 낙산사 가까운 곳의 횟집이라니.
하지만 40년 전만 해도 그런 횟집이나 식당이 여럿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오래 전 낙산사 주지스님이 ‘먹고 살아야 하는 가여운 중생을 위해 사찰 가까이에서 식당 차리는 일을 한 번 묵인했더니 벌어진 일’이라 했고 그 때문에 ‘언젠가는 한꺼번에 멀리로 집단 이주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횟집이나 식당들이 다 정비돼 낙산사 경내는 청정해졌다.
어쨌든.
40년 전 5월 어느 날 밤, 나는 그런 횟집 중 한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처럼 퇴근 후 시간을 혼자 낭만적으로 보내고 싶었던 거다. 낙산사에서 범종을 친 듯싶은데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은, 바로 눈앞의 밤바다가 내는 파도 소리 탓이었다. 파도 소리 들으며, 횟집 방바닥에 놓인 그 날 신문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데 이런 제목의 기사가 눈에 뜨였다.
‘광주(光州)에 소요사태(騷擾事態)’
소요사태란 ‘여럿이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나 술렁거리고 소란을 피워 공공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위협하는 상황’이다. 전년도 10월 하순의 박 대통령 시해 사건 후 정국이 안정을 쉬 찾은 것으로 아는데 소요사태라고?
그 때만 해도 나는 모든 언론 보도가 철저히 통제받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하긴 서울에서 먼, 태백산맥 너머 동해안의 한 작은 읍의 선생(모 고등학교 국어교사)이 뭘 알겠는가. 시국(時局)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영서지방의 일 같았다.
횟집 주인이 서비스로 멍게 한 접시를 술상에 올리며 말했다.
“설악산 산불까지 난리야!”
“?”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는 내게 그는 이어서 말했다.
“어제 난 산불이 여태 살아있다는 게 아니요.”
그제서 나는 방을 나와 마당에 서서 설악산 쪽을 바라보았다. 설악산은 낙산사에서 북쪽으로 40리쯤에 있었다. 과연, 멀리 어둠 속 설악산의 중턱을 휘감고 있는 ‘빨간 실뱀’ 같은 게 보였다.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흉측한 산불. 뭔 일인지 불길이 확 치솟기도 했다. 주인이 말을 덧붙였다.
“6‧25 동란 때 불발탄들이 곳곳에 남아 있으니 어디 쉽게 불을 끄겠소?”
불길이 확 치솟기도 하는 건 그 불발탄이 불에 터지는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련하게 폭발음도 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이틀째 진화되지 않는다는 설악산 산불의 의미를 깨달았다. 1980년 5월에서 30년 전의 6‧25동란이 여태 끝나지 않은 것이다.
저 남쪽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광주 소요사태 또한 저 산불처럼 쉬 진화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뒤를 이었다. 취기가 사라졌다.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딱히 아무 것도 할 게 없었다.
시대의 아픔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어느 소시민의 이야기 ‘K의 고개’는 그 순간 배태(胚胎)된 게 아니었을까?
사진출처= 국립공원관리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