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2016년 7월에 첫 소설집 <숨죽이는 갈대밭>을 내고 두 번째 내는 소설집이다.

  오늘까지 2년여, 얘기 듣던 대로, '책이 안 팔리는 시대'라는 걸 실감했다. 우여곡절 끝에 19년만인 올봄 재회한 외수 형이 내게 말했다.

  "나는 사실 병욱이가 문학하는 일에서 영 떠났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숨죽이는 갈대밭>을 받아 읽어 보고서 놀랐다. 예전 젊었을 때 글 쓰던 기가 하나도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살아난 거 같은 거야. 수록된 12편 모두 흠 잡을 데 없이 잘 쓴 작품들이지. 그런데 어쩌면 좋아?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소설책이 안 팔리는 시대'가 됐으니 말이야."

  젊은 시절, 문학을 같이했던 형이 그리 말할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네 알겠습니다. 이제는 소설 쓰는 짓일랑 그만 두어야겠어요.' 하고 답해야 할까? 그건 아니다. 너무 비참한 답이다. 나는 나를 안됐어 하는 형한테 이렇게 말했다.

  "형, 그러니까 계속 소설을 쓸 겁니다."

  형이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병욱이야!"

 

  화천 감성마을에서 형한테 말한 대로 행동한 결과물 중 하나가 이번의 소설집 <K의 고개>다.

  소파에 앉아 TV 리모컨만 쥐면 갖가지 볼 것들이 눈앞에 편하게 전개되는 세상이다. '힘들게 책 따위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나올 만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죽기 전까지는 소설 써서 책을 낼 것이다. 왜냐면 '책의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펼쳐지는 세상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고 실토하자면 나는 사실 소설 쓰는 것 이외에는 별 재주가 없는 사람 같아서다.

  

  이 책을 위해 멋진 표지화를 건네준 전태원 화백과, 맛깔스런 삽화들을 건네준 서현종 화백, 수록될 일곱 편의 작품들을 숱하게 읽어 보며 조언하느라 밤잠설친 내 아내. 이 세 사람한테 이 자리를 빌려 말한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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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낯선 그가 싸롱에 나타난 건 오후 늦은 시간이다. 머리털이 어깨 가까이 드리워질 만큼 긴 장발에 왠지 숨 가빠 보였다. 어두운 실내조명 탓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마나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혀 있을 듯싶었다. 그는 문 열고 들어서자마자 빈자리부터 찾는 모습이었다.

공교로웠다. 하필 그 시간대에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굳이 빈자리라면 벽 옆의 전등 빛에 의지해 시집을 보고 있는 예쁜 여자애 자리뿐이었다. 그녀 혼자서, 넷이 앉아 있을 수 있는 테이블을 전세 낸 듯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풍기는 고고한 분위기 탓에 그 자리 합석은 언감생심.

그런 경우, 대개의 손님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문을 열고 사라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싸롱 안을 서너 번 돌면서도 문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때 맷 먼로의 감미로운‘Walk Away’가 흘러나왔다.

“Walk away, please go

Before you throw your life away

당신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부디 떠나달라는 노래다.

하필, 앉을 자리를 찾아 싸롱 안을 헤매는데 부디 떠나달라는 노래가 나오다니!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하긴 그 노래를 귀담아 들을 만한 여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사실 같은 남자로서 우리(나와 친구 녀석)가 나서서 그에게 합석을 권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낯선 이와 합석했을 때 그 어색함이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Walk Away 노래가 끝날 즈음에 항상 고고한 자세로 시집을 보고 있는 예쁜 여자애의 자리에 앉았다. 옆이 아닌 마주보는 자리였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싸롱에 문 열고 들어왔다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앉아 있는 장면으로 오해했을 게다. 이어지는 맷 먼로의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영화 모정의 주제가)”노래 소리에 우리는 그가 여자애한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러는 것 같았다.

잠깐만 앉았다가 가겠습니다.”

물론 예쁜 여자애는 아무 말 없이, 못 들은 것처럼 계속 시집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 30분 가까이 그는 예쁜 여자애와 말없이 합석했다가 다시 문밖으로 나가면서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앙로 거리에서 순경들이 가위를 손에 들고 장발 청년들을 단속했다는 사실을. 장발의 그가 다급하게 지하공간에 나타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만일 영화(映畵)였다면 그런 해프닝을 계기로 그는 예쁜 여자애와 썸씽이 시작될 수 있었다. 안타까웠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예쁜 여자애는 그 후로도 변함없이 항상 혼자 그 벽 옆 자리를 지켰으니 말이다.

 

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이 수필에 나오는 아폴로 싸롱은 70년대 춘천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음악다방의 이름입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서 종일 팝송과 송창식 같은 우리나라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감상했습니다. 흡연은 허락됐지만 음주는 허락되지 않았던 나름의 멋진 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싸롱’이란 이름 때문에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오해 살 수 있어서 뒤늦게 무심이 밝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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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뜬‘12세 이상 관람가라는 자막에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이나 볼 영화라는 생각에서다. 만일 아내가 옆에 없었더라면더 포스트영화 보기를 일찌감치 포기했을 게다. 오랜만에 부부가 함께 영화를 보자며 아내가 정한 첫 번째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참혹한 월남전 장면부터 시작되기에그럼 그렇지.’하는 안도감과 함께스릴러 영화로 분류된 까닭까지 납득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화면이 바뀌어 미국의 신문사들끼리 벌이는 치열한 특종 취재 경쟁 현장이라,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서서히 그 치밀한 내용 전개에 우리 부부의 숨이 조여드는 듯싶었다.

결국 영화 초반에 잠깐 나온 월남전 장면 이외에는 단 한 번도 총성이 울리지 않는데 정작 관객들은 긴장의 끈을 조금도 늦출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끝난 뒤 아내한테 내가 말했다.

언론인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이 영화를 봐야 하지 않을까?”

아내가 단번에 수긍했다. 하긴 다른 이견(異見)을 댈 수 없는 부당한 권력과 맞서 싸우는 참된 언론의 이야기영화였다.

 

 

남편의 뜻하지 않는 사망으로 얼결에 신문사 회장이 된 메릴 스트립. 그녀의 신문사 편집국장 톰 행크스. 두 사람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이 볼 만했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영화배우가 아니라 영화 속 내용의 실제인물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가 안 될 영화 속 모습들이었다.


 

 

신문사를 보전하기 위해 정부의 탄압에 굽히느냐, 아니면 신문사가 망하더라도 정부의 탄압에 맞서 특종 기사를 신문에 싣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메릴 스트립이 보여주는 감동적인 표정연기!

그녀는 힘겨운 후자를 택하며 눈시울을 적시는 표정만으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앞에서 한 내 말을 일부 고치겠다.

더 포스트 영화는 언론인은 물론이고 일반 사람들도 한 번은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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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춘천에서 못 보던 얼굴이었다. 서울 쪽 청년이 아니었을까? 먼 훗날 TV 드라마겨울연가의 배용준처럼 고급털목도리를 둘렀고 공지천에서 스케이트 타다 온 건지 스케이트 갑()도 그 끈이 한쪽 어깨에 걸려 있었다.

아폴로 싸롱 지하공간에 그가 나타난 것은 72년 겨울, 어느 날이다. 당시 겨울에는 공지천이 꽁꽁 얼어서 춘천은 물론이고 서울 쪽의 사람들까지 와 스케이트를 타다가 돌아가곤 했다. 대개, 상류층 젊은이들인 듯 보기 드문 자가용차까지 몰고 와 그렇듯 겨울 낭만을 즐기던 것이다.

어둑한 지하공간에서 별나게 하얀 그의 얼굴은 그가 춘천 사람이 아닌, 서울 사람이라는 걸 직감하게 했다. 그런데 그 날 낮에 공지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초저녁에 나타나 벽 옆 빈자리에 혼자 앉아 밤늦도록 음악을 듣고 있었다. 우리는 못 보던 얼굴의 서울 청년이 그런 모습으로 같은 공간에 있어서, 처음에는 괜히 긴장해 있다가 (촌스럽지만 일종의 텃세 심리가 아니었을까?) 서서히 긴장이 풀려가고 있었다. 그 때 기타 소리 전주에 이어 가야 할 사람이기에하며 장현의 석양이 흘러나왔다.

가야 할 사람이기에 안녕,

안녕이라고 말해야지

돌아설 사람이기에 안녕,

안녕이라고 말해야지

울먹이는 마음일랑 나 혼자 삭이면서

웃으며 말해야지 안녕 안녕

가야할 사람이기에 안녕,

안녕이라고 말해야지.”

이어서라라라라라하는 합창반주가 흘러나왔다. 그 청년의 숙인 어깨가 들먹이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다. 그는 소리 죽여 흐느꼈다. 마치 장현의 석양노래를 오열의 기점으로 삼은 둣이 말이다. ‘석양은 대중가요치고는 매우 길다. 5분은 넘는다. 5분 넘는 석양이 끝나고 다른 가수의 노래가 이어졌는데도 그의 숨죽인 오열은 그칠 줄 몰랐다.

무슨 사연일까?

그러다가 우리(나와 친구 녀석)는 지하공간을 나왔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멋대가리 없는 우리였던가. 혼자 낯선 춘천의 어느 지하공간에서 흐느끼고 있는 그 청년에게 우리가 다가가 옆의 빈자리에 말없이 앉아주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을 텐데그저 통금에 걸릴까 봐 그 공간을 나와 버렸으니 말이다.

그 시대는, 청춘의 낭만까지 자제시켰던 통금의 시대였다고 하면 변명이 될까?

 

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이 수필에 나오는 아폴로 싸롱은 70년대 춘천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음악다방의 이름입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서 종일 팝송과 송창식 같은 우리나라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감상했습니다. 흡연은 허락됐지만 음주는 허락되지 않았던 나름의 멋진 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싸롱’이란 이름 때문에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오해 살 수 있어서 뒤늦게 무심이 밝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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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혹시 복을 받기도 귀찮은 분이 있나요. 그런 분은 그 복을 그냥 내버리지 말고 이웃 분들한테 넘기세요. 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금돼지 복이니까요.  꿀꿀꿀.

 

 

사진출처 : Nate 판 톡톡 동물사랑방

Happy New Year, every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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