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낯선 그가 싸롱에 나타난 건 오후 늦은 시간이다. 머리털이 어깨 가까이 드리워질 만큼 긴 장발에 왠지 숨 가빠 보였다. 어두운 실내조명 탓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마나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혀 있을 듯싶었다. 그는 문 열고 들어서자마자 빈자리부터 찾는 모습이었다.

공교로웠다. 하필 그 시간대에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굳이 빈자리라면 벽 옆의 전등 빛에 의지해 시집을 보고 있는 예쁜 여자애 자리뿐이었다. 그녀 혼자서, 넷이 앉아 있을 수 있는 테이블을 전세 낸 듯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풍기는 고고한 분위기 탓에 그 자리 합석은 언감생심.

그런 경우, 대개의 손님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문을 열고 사라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싸롱 안을 서너 번 돌면서도 문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때 맷 먼로의 감미로운‘Walk Away’가 흘러나왔다.

“Walk away, please go

Before you throw your life away

당신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부디 떠나달라는 노래다.

하필, 앉을 자리를 찾아 싸롱 안을 헤매는데 부디 떠나달라는 노래가 나오다니!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하긴 그 노래를 귀담아 들을 만한 여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사실 같은 남자로서 우리(나와 친구 녀석)가 나서서 그에게 합석을 권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낯선 이와 합석했을 때 그 어색함이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Walk Away 노래가 끝날 즈음에 항상 고고한 자세로 시집을 보고 있는 예쁜 여자애의 자리에 앉았다. 옆이 아닌 마주보는 자리였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싸롱에 문 열고 들어왔다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앉아 있는 장면으로 오해했을 게다. 이어지는 맷 먼로의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영화 모정의 주제가)”노래 소리에 우리는 그가 여자애한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러는 것 같았다.

잠깐만 앉았다가 가겠습니다.”

물론 예쁜 여자애는 아무 말 없이, 못 들은 것처럼 계속 시집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 30분 가까이 그는 예쁜 여자애와 말없이 합석했다가 다시 문밖으로 나가면서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앙로 거리에서 순경들이 가위를 손에 들고 장발 청년들을 단속했다는 사실을. 장발의 그가 다급하게 지하공간에 나타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만일 영화(映畵)였다면 그런 해프닝을 계기로 그는 예쁜 여자애와 썸씽이 시작될 수 있었다. 안타까웠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예쁜 여자애는 그 후로도 변함없이 항상 혼자 그 벽 옆 자리를 지켰으니 말이다.

 

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이 수필에 나오는 아폴로 싸롱은 70년대 춘천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음악다방의 이름입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서 종일 팝송과 송창식 같은 우리나라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감상했습니다. 흡연은 허락됐지만 음주는 허락되지 않았던 나름의 멋진 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싸롱’이란 이름 때문에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오해 살 수 있어서 뒤늦게 무심이 밝히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