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979년 가을, 흑백텔레비전이 분수에 맞지 않는 이상한 짓을 시작했다.

정시 뉴스 직전마다 뜨던대통령 말씀이란 장면부터 이상했다. 무궁화무늬로 대통령 말씀을 에워쌌지만 무궁화의 고운 빛깔이 나타나지 못하는 까닭에, 질 낮은 흑백 전단처럼 보였다. 그런 장면으로 대통령 말씀이 게시되는 거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여 가수가 등장해서조국찬가를 부르는 장면도 이상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두 팔까지 흔들며 힘차게 노래 부르지만 빨강 파랑이 아닌 흑백 태극이라, 왠지 음울해 보였다.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노려보기 시작했다' 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래, 같이 가자. 조금만 더 가면 설산 봉우리가 보일 거다. 동 트기 전에도 그 봉우리는 허옇게 보인다지. 만년설이라 그렇다는데…… 그걸 보면서 부지런히 걷다 보면 라싸에 도착하겠지. 그런데 너, 라싸까지 갈 수 있겠니?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라싸로 가는 길' 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피비린내를 머금은 먹구름이 교내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독수리에서 걸출한 인재를 영입해 우세를 점하려는 시도를, 쌍룡에서 수수방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걸출한 인재가 자기네 칼침 선배를 망신시키면서 떠오른 인물이었으니 이래저래 독수리와 한 번은 맞붙어 승부를 결정지어야 했다.

겉으로는 평온한 학교였다. 아침마다 학생과() 선생들이 교문 앞에 서서 지각과 복장단정 지도를 하고, 매 시간 수업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종이 빠짐없이 울리고, 월요일의 애국조회 또한 거르지 않고 거행되고, 7교시 직전에는 전교생이 참여하는 청소시간이 진행되고, 종례시간 후 각 반 주번들이 학급일지를 담임선생한테 도장 받으러 다니느라 바쁘고……. 하지만 동시에 피비린내를 머금은 검은 구름 또한 학교에 시커멓게 드리우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한결같이 교복바지의 밑단을 교묘하게 넓혀 나팔바지 비슷하게 입고 담배냄새도 풍기는, 살벌한 눈매의 존재들이 걔에게 다가와 포옹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섬뜩한 우의를 다지고 있었다. 전에 없이 쉬는 시간도 편히 쉬지 못하는 생활로 바뀌면서 걔는 고단해졌다. 결국은 담임선생의 독일어 수업시간 중에 코골며 자기에 이르렀다. 담임선생이 판서를 멈추고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린교?”

나는 손을 뒤로 뻗어, 정신없이 코고는 걔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서너 번 흔들자 코고는 소리가 그쳤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갈 즈음에 다시 코고는 소리를 내었다. 담임선생이 다시 설명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소린교?”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담임선생 어조를 흉내 내어 답했다.

오토바이 소리가 아닌교?”

교실에와하하!’폭소가 터졌다. 담임선생은 얼굴이 붉어진 채 자신이 우스개 가 돼버린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 때 끝 종이 울렸다. 담임선생은 체념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갔다. 하긴 학급 종례도 교실이 멀어서 오지 않는 분이 생활지도에 시간을 낭비할 리 없었다. 애들이 여기저기서 무슨 소린교?’를 흉내 내며 낄낄거릴 때 나는 돌아앉아 걔를 보았다. 걔는 공책 위에 침까지 흘리며 엎드려 자고 있었다.

교내를 서서히 휘감기 시작한 어두운 태풍의 눈이 침까지 흘리며 고단하게 자고 있었다.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달나라' 중에서 >​

첨부사진 : 영화 친구 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을 금강산을 풍악산이라고도 부른다.

 

 

 

()이가 사내를 만난 곳은 풍악산 초입인 단발령 고갯마루다. 사기그릇들을 잔뜩 얹은 지게를 지겟작대기로 간신히 세워놓고 그 그늘에 앉아 쉬려할 때 산발한 사내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사내가 용이보다 먼저 고갯마루에 와 있다가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 용이는 지게 위 그릇들이 무겁고 조심스러워 땅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올라왔으니까.

사내는 상투도 못 틀고 산발한 데다가, 길바닥에서 지내는지 옷차림도 걸레처럼 더러웠다. 짚신도 못 신은 맨발이었다. 지게 그늘에서 쉬려다가, 느닷없이 기괴한 꼴로 나타난 사내에 기겁한 용이. 하마터면 지겟작대기를 건드려 그릇들을 다 깨트릴 뻔했다.

그렇게 놀라게 했다면아이고 죄송합니다같은 사과의 말이라도 건네야 옳지 않을까. 하지만 사내는 그런 말은커녕 괴이한 소리를 내었다.

어버버!”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방산(方山) 용이' 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월남에서 돌아왔다.

커다란 군함을 타고 비둘기 태극기 풍선 날리는 조국의 항구로…… 환영의 플래카드 속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비행기로, 중상자 후송 비행기로 사월 어느 날 조국의 남부지방 어느 적막한 공군기지로 돌아왔다.

내 가슴에도 훈장은 걸렸다.

 

 

 

 한쪽 발과 한쪽 눈은 영영 내게서 달아나고, 몇 십 그람 무게를 가진 훈장 하나가 가슴에 걸렸다. 온통 붕대에 싸인 채로 나는 한쪽 남은 눈으로 후송 비행기 창을 통해 조국의 거뭇거뭇한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아아 일 년 만의 조국이었다.

나의 한쪽 남은 눈에서, 그래도 눈물은 흘러나왔다.

내가 탄 비행기가 내린 모 공군기지. 거기에 비행기의 엔진이 멎고, 부상자들이 차례차례 들것에 실려 내려질 때 나를 감싼 붕대의 섬유조직 틈새로 밀려들던 조국의 냄새. 매캐한 비행기 연료냄새 너머 밀알이 움트는 냄새, 구수한 흙냄새…….

 

 

 

그리고 공항의 가득한 적막. 적막은 조국에서도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한 쪽 면으로 검푸른 바다의 출렁임이 보일 뿐 나머지 삼면은 초록빛 야산뿐인 공항, 엔진을 끄고서 졸고 있는 비행기들, 무료한 표정의 관제탑, 군복무의 임무 속에서 세월의 나사를 매만지는 정비병들, 역시 세월의 들것을 무료하게 나르는 의무병들.

 

< 무심이병욱의  '숨죽이는 갈대밭'  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